제 8장. 片(부서지는 향기)
기억의 잔해...
비산하는 은색의 편린과
침전하는 참담함 미소
당신이 내게 준 것은...
내가 당신에게 얻은 것은...
끊임없이 조각조각 끊어져 내리는
가라앉은 회색 빛 기억의 잔해
一.
카이엔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낯선 풍경으로 가득 찬 궁 안을 걸어가며
자신 이외의 어느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잘 된 일일 수도 있다. 다른 곳도 아닌 황궁 안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이기에.
그러나 아직 많은 사람이 있는 곳은 불편하기만 한 자신이 이런 황궁 안의 무
게를 견딜 수 있을까. 처음 산에서 내려와 보았던 시장의 모습보다는 한산하
고 조용했지만 황궁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수는 수천을 헤아린다.
황궁 건물은 한눈에 들어차지 않을 정도로 거대했다. 햇살을 받아 유려한 선
을 뽐내며 빛나는 청색의 기와로 덮인 수십 채의 건물들과 화려하게 채색된
굵은 기둥.
" 황궁에.... 말입니까?"
도수는 한 달만에 집에 들르자 마자 카이엔을 붙잡고 다짜고짜 이야기를 꺼냈
다. 함께 황궁에서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 마침 사관의 자리가 비었다고 하니 가면 좋을 거야. 다른 곳의 일과 달리
황궁은 예절만 잘 지킨다면 그리 어려울 일은 없으니까."
" 사관이라면 기록을 담당하는 일이겠군요."
" 그렇지.."
카이엔은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사관의 일이라면 도수의 말대로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은 오랜 시간을 타인과 단절된 공간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사람을 대하는 것보다는 책을 대하는 것이 훨씬 편했으니까.
" 그렇다면 언제쯤...?"
카이엔이 묻자 도수는 그런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이 환하게 웃으며 답
했다.
" 당장 내일이라도 일을 시작할 수 있을 테지. 여러 가지를 배워야하겠지
만."
자신이 과연 그런일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기 전에 카이엔은 아직 익
숙해지지 않은 타인들과의 접촉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일 것인가를 생각했다.
수일동안을 도수의 집에 머물면서 주위 사람들의 생활을 두눈으로 직접 확인
하고 겪어도 보았지만 아직은 확신할 수 없었다. 홀로된 산 속에서의 생활보
다 다른 이들이 사는 곳에 녹아들어 사는 것이 더 나은 일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 생각해보게. 중도에 그만두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이런 일을 통해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시험해 보는 것도 괜찮다고 여기고 있으니까."
그럴지도 모른다. 카이엔은 자신의 마음이 어디를 향해 흘러가고 있는지 알지
못했기에. 마치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물살 위를 떠도는 작은 나뭇잎 처럼.
" 그렇다면......."
순간적으로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카이엔은 입술을
움직이고 있었다.
주위를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은 낡은 향을 풍기는 오래된 책들과 풋풋하게 빛
을 발하는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은 종이들이었다. 카이엔은 그 종이에서 시선
을 돌려 방안에서 쉴새 없이 붓을 놀리고 있는 몇 명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분명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을 터인데 그들은 고개조차 들어올리지 않은 채
새하얀 종이 위에 검은 색의 글씨를 채워가고만 있었다.
종이의 색처럼 새하얀 그들의 의복은 도수가 늘상 입고 있는 허리 아래를 덮
는 길이의 무복과 달리 긴 소매와 앉아 있음에도 무릎까지 내려오는 옷자락으
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옷을 보자 카이엔은 자신의 아버지가 입고 있던 옷이
이것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버지가 입고 있던 옷은 항상 소매가
길게 늘어져 있어 신기하게 여기고 있었기에 카이엔은 쉽게 그것을 알아챈 것
이다. 자신이 늘상 입는 옷은 그것보다 활동적인 짧은 것이었기에.
" 이리로 와서 앉으시오."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은 채 조용히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기만 하던 카이엔에
게 젊지만 차분한 목소리가 말을 걸어왔다. 습관처럼 몸에 배어있는 예의 때
문인지 그의 어조는 절제된 느낌을 전해주었다.
" 무반 도수님이 말씀하신 분이신가."
여전히 종이위에 붓을 놀리는 것을 멈추지 않고 있는 사람들을 지나쳐 자신에
게 말을 건 남자의 앞에 다다른 카이엔은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대나무로 만
든 깔개로 덮여있는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자 딱딱한 느낌이 옷을 지나 피부
로 전해졌다.
" 카이엔이라 합니다."
" 나는 추형이라하네. 미미하지만 여기 사관들의 일을 관리하는 직책을 맡
고있지."
" 결국 하기로 결정된 모양이지?"
" 아...네."
" 잘 되었군 그래. 그렇다면 앞으로 황궁 안에서 거처하는 것이 더 낫겠군."
막 사관들이 몸담고 있는 서고에서 몸을 빼낸 카이엔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이 모습을 드러낸 도수와 얼굴을 마주했다.
" 이렇게 이른 시간에 이곳에 와 계시다니요."
" 괜찮아. 지금은 마땅히 내가 해야할 일이 있는 것이 아니니."
그렇게 몇 마디의 말을 나누며 카이엔은 도수의 안내를 받아 황궁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게 되었다. 황족을 비롯하여 고위의 직책을 맡은 자들만이 드나들 수
있는 장소를 제외하고 연꽃이 피어있는 연못을 비롯해, 도수가 대부분의 시간
을 보내는 병사들의 연무장까지. 카이엔은 생소한 황궁의 모습을 두 눈에 담
았다.
* * *
" 식사하실 시간입니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서책들을 넘겨가며 정리할 부분들을 추려
내던 카이엔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비스듬히 돌렸다.
그러자 옅은 푸른빛의 궁복을 걸친 여인 몇 명이 문 양쪽에 늘어선 채 다른
방으로 옮길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 이외에는 젊은 여인들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대한 적이 없었기에 카이엔은 여자들을 대하는 것이 무척 서툴렀
다. 황궁안에 거주하는 인원들 중 반수정도가 여인. 그것도 젊은 여인들이었기
에 이제 익숙해질만도 되었건만 아직까지 그들의 얼굴을 직접 마주대하는 것
조차 어색하기만 한 카이엔이었다.
카이엔은 오랜 시간 앉아있어 딱딱하게 굳어진 무릎을 펴며 자리에서 몸을 일
으켰다.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관들은 다른 방에서 새로운 기록을 집필하는데
주력하고 있었고 카이엔은 홀로 오래된 책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 다른 분들은 이미 한자리에 모여계십니다."
다시 한번 카이엔을 재촉하는 말이 들려왔다.
" 아..."
카이엔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여인들의 곁을 지나쳐 항상 식사를 함께 하는
방으로 걸어갔다. 하루의 대부분을 서고에서 보내는 사관들이었지만 식사시간
에는 꼭 한자리에 모여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음식을 드는 것을 당연시
하고 있었다. 다른이들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일이겠지만 셋 이상의 인원과 식
사를 한 적이 없는 카이엔은 그것 조차 어색했다.
" 이제 얼마 후면 그동안의 결실을 보게 되겠군."
추형이 묽게 탄 대추차를 마시며 입을 열었다.
그는 서책을 만드는 일에 모든 것을 건 인물이었다. 이름있는 귀족 집안의 자
제임에도 불구하고 그리 높은 자리를 바라지 않는 그에게 카이엔은 약간의 호
기심을 느끼고 있었다. 아직 친숙해지지는 않았지만 자신보다 먼저 사관의 자
리에 있어온 다른 자들은 보다 높은 곳으로 빨리 나아가기를 원하고 있는데
반해 추형은 지위와는 상관없이 자신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싶어했다.
" 조금만 더 애써보도록 하게."
" 네."
가족으로 피를 이은 혈족으로 구성된 것이 아닌, 무언가를 하기 위해 서로 모
인 사람들과의 관계라는 것은 생소하면서도 의미있는 것이었다. 아직 완벽하
게 지금의 생활에 적응했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적어도
모든 것을 잊고서 한가지에 집중할 수 있다는 사실은 무료함보다 훨씬 값진
경험이 되어주었다.
그것으로 인해 카이엔은 도수가 자신을 이끌어준 것에. 다른 세상을 경험하게
해준것에 감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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냥 ^-^
어제 졸려서 그냥 잔 바람에 오늘 올리네요.
[번 호] 7198 / 7360 [등록일] 2000년 03월 24일 10:41 Page : 1 / 9
[등록자] 까망포키 [조 회] 97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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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룡의 숲 제 2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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