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룡의 숲-93화 (93/130)

제 8장. 片(부서지는 향기)

二.

" 황제폐하를 뵙습니다."

자신에게 일제히 고개를 숙이는 사람들을  오시하며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새로운 황제는 그의 아버지와 달리 계략이 깊은  자였다. 카이엔은 그와 얼굴

을 맞대자마자 그것을 느꼈다. 자신의 온몸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그것을 말해

주었다. 분명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한번에 드러내지 않는 인물이라는 것을.

얼마 전까지는 자신이 가진 직책이 낮은 것이었기에 황제와 직접 얼굴을 맞댈

일은 생기지 않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빠르게 흘러간 시간은 카이엔을 단순한 사관에서  황궁

내의 모든 기록과 서적을 책임지는 사단(史彖)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서른이라는 나이에 그 자리에 올랐다는 것은 카이엔이 그동안 많은 신뢰를 쌓

아왔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전까지는 오십년도 넘게 황궁의 일을 맡아

온 자가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 내 오늘 조례에서는 그대들이 각별히 주지해주었으면 하는 일이  있어 먼

저 그것을 이야기하려 하네."

" 삼가 경청하겠나이다. 폐하."

마치 한 사람이 말하듯이 정무관안에  모인 수십의 사람들은 입을 모아  답했

다.

"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환국이 지금까지 멸망하지 않고 명맥을  지켜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현군과 현신들이 있었던 탓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금새 역

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겠지."

무언가를 회상하듯이 나직한 어조로 말을 이어가는 황제를 보며 카이엔은  그

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 확고히 자

신의 자리를 다진 무관의 한사람으로서 같은 자리에 참석한 도수는  카이엔과

는 반대편의 위치에 선 채 진중한 표정으로 황제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

다.

" 역대의 황제들은 모두 그것을 알고 있었고 나 또한 잊지 않고 있다. 그러

나 나는 단지 지금의 명맥을 유지하며 나라를 움직여가는 황제로 머물고 싶지

않다."

정무관 안은 숨소리 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다.

" 우리 환은 더 큰 나라가 되어야한다. 제자리 걸음도, 퇴보도 용납할 수 없

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대들이 나의 수족이 되어 나라를 움직여 주어야겠지."

" 폐하의 뜻에 어긋남이 없을 것입니다."

또 다시 대신들의 목소리가 정무관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카이엔은 아직 다른 대신들이 보이는 맹목적인 나라와 국가에 대한 마

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십년이 넘는 시간을 이곳에 몸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진정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 나는 이룰 것이다.  수백년이 지난후에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나라를 이

땅에 남길 것이다. 그 이름은 환이 되겠지. 처음 태조께서 이곳에 나라를 세우

신 그때와 다름없이!"

격류에 휩싸인 듯이 황제의 어조는 점점 높아져만 갔다.

그리고 카이엔의 유리감 또한  짙어져만 갔다. 어째서 보통  사람들은 저토록

격렬한 감정을 가질 수 있는지. 그것을 타인 앞에서 토로할 수 있는지. 자신에

게는 없는 그 격심한 감정의 흐름이 카이엔은 너무나도 생소했다.

*            *            *

" 바로 저분이야. 현재 사단을 지내시는 분인데 상당히 어려보이지 않아?"

막 정무관안에서 나오는 여러 대신들의 모습을 한쪽 구석에 서서 바라보며 이

야기를 나누는 세명의 궁인들이 있었다. 그녀들은 건장한 몸집의 무관 한명과

함께 걸음을 옮기고 있는 소년같은 인상의 남자에게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녀들은 황제의 시중을 드는 시비들로 조례가 끝날때까지 밖에서 대기하다가

대신들이 다 빠져나가고 나면 다시 황제의 곁으로 돌아가야했다. 아무리 황제

의 수발을 드는 시비라고는 해도 조례에까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궁인들 중에서는 황제의 시중을 드는 높은 신분의 시비에 해당했지만  대신들

앞에서는 그저 단순한 궁인에 지나지 않았다.

" 그렇다면 바로 저분이 올해로 서른인데도 약관으로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그분이었단 말이야?"

또 다른 시비 하나가 놀랍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다른 이들에게

들릴 것을 염려한 두명의 시비가 엄한 눈초리로  그녀를 쏘아 보았다. 그제서

야 자신의 실수를 알아챘는지 그녀는 재빨리 손으로 입을 막았다.

" 정말 믿기지 않는데...? 아무리 많이 잡아도 우리랑 비슷한 연배로 보이잖

아."

" 그러기에 모두들 놀라고 있는거야. 대체 무슨 연유로 저토록 어린 모습을

하고 있는지."

그녀들의 말과 같이 황궁안에 기거하는 모든 이들에게 카이엔의 존재는  신비

함으로 다가왔다. 분명 십년이 넘게 궁에서 일을  해온 문관 중의 한사람이라

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의 모습은 시간의 흐름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나이를 먹지 않았을 리

가 없다.

황제가 직접 참여하는 조례나 국무의 논의를 위해 열리는 사담회가 아니면 그

는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황제의 시비로서 항상 옆 자리를  지키고

있던 그녀들도 카이엔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 황제께서 심기가 불편하신  일이라도 있었던 모양이지.  그렇지 않고서야

모든 대신들을 불러 조례를 열었을 리가 없지."

카이엔의 곁에서 나란히 걸음을 옮기던 도수가 입을 열었다.

도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지만 카이엔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

다. 자신이 읽어낸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면 황제의  말은 그저 겉치례에 지나

지 않는다. 지금까지 느껴온 바에 의하면 황제는 문무양쪽에 재능을 보였지만

진정으로 마음을 두고 있는 것은 어느 쪽도 아니었다. 분명 황제는 재위 기간

중에 무슨 일인가를 벌일 것이다. 카이엔의 직감은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하나 그것에 관여할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십년넘게 황궁에 몸담아왔지만 그

것은 단지 자신이 할 수 있고, 즐기는  일로서일 뿐이지 카이엔의 마음속에는

흔들림없이 강인한 나라를 위한 의지 같은 것은 담겨있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런 인연도 느끼지 못한 것 처럼.

" 그런데 일전의 일은 생각해 보았나?"

카이엔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도수는 화제를 바꾸었다.  이제 서른이

넘었음에도 아무 여자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는 카이엔을 위해 도수는  부인의

도움을 받아 젊은 여인과의 만남을 주선해주려 하고 있었다.

" 아직은...."

카이엔이 조용히 웃으며 답하자 도수는 이리저리 고개를 내저었다.

" 자네도 나이를 생각해야지.  아무리 젊어보인다지만 그게  언제까지고 갈

것 같나? 나중에 후회해봐야 소용이 없지 않겠어?"

" 언제고 마음이 내키면 내가 직접 나설테니 염려말게."

완곡하게 거절하자 도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아

직도 아쉬움이 남은 것 같았다.

도수는 삼년전, 모친이 운명하기 전에 손(孫)을 봐야 한다는 생각으로  황궁에

서 자주 마주치던 한 문관의 자제와 혼인했다.  도수보다는 한참 나이어린 여

인이었지만 의외로 둘은 서로에게 잘 어울리는 한쌍이었다.

" 마음이 그렇다는 것은 알겠네만, 자네의 말은 영 믿을 수가 없어서... 어찌

그리 한결같을 수가 있는지. 사실은 처음부터 어떤  여인을 마음에 품고 있던

것이 아니었나?"

산 속에서 은둔하듯 살아온 카이엔이었기에 그럴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도수였지만 그는 일부러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카이엔은 조용히 미소만으로

화답했을 뿐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언제나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 거동을 삼가던 아버지와 현숙하고 조용한  자태

로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던 어머니.

낮에 도수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일까. 카이엔은  불연 듯 꿈 속에서

먼 과거의 기억처럼 가라앉은 부모의 영상을 보았다. 카이엔에게 무언가를 말

해주고 싶은 듯 둘의 영상은 사라지지 않은 채 카이엔의 꿈 속에 남아있었다.

주) 사단(史彖) - 하계의  동쪽대륙의 가장 큰 나라  환에서 사용하는 문관의

직책중 두 번째로 높은 지위. 나라 안의 모든 사관들과 서적의 집필을 감독하

는 일을 하며, 이제까지 집필된 모든 책자들을 관리하는 직책이다. 서책의  유

해성을 판단하여 사멸시키는 권한 또한 가지고 있다.

[번  호] 7225 / 7360      [등록일] 2000년 03월 25일 00:11      Page : 1 / 11

[등록자] 까망포키         [조  회] 99 건

[제  목] [흑룡의 숲 2부] 연(緣)... - 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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