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흑룡의 숲 제 2부 >
연(緣)...
제 9장. 朔(초승달)
꿈을 꾸었습니다.
확연하지는 않지만
무척이나 따스한 꿈을.
그것은 분명
당신이 제게 찾아왔던
그 날의 꿈이었을 겁니다.
一.
뱀과 같은 미끈하고 날카로운 몸통에 두쌍의 날개를 가진 기이한 새. 리시엔
은 또 다시 자신의 눈에 띈 나무 조각상을 집어 들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음 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슬픔과 아쉬움의 감정 때문
에 어떤 것도 제대로 보고, 듣지 못할 정도였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수풀 사
이에 떨어져 있던 기이한 생김새의 조각만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리시엔
은 또 다시 이리저리 조각상을 돌려가며 모양을 살폈다. 두쌍의 기형적인 날
개가 달린 것 이외에도 새의 눈은 세쌍이었고 다리는 세 개나 달려 있었다.
일전에 주운 조각상이 하나의 다리를 가진 학의 형상이었던 것에 비하면 지금
의 것은 비교도 도지 않을 정도로 흉측한 형상이었다.
' 대체 무엇이지....이것은?'
그러나 리시엔에게 의문을 풀어줄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 .....누구일까...?"
리시엔은 작게 중얼거렸다. 대체 누가 이런 기이한 동물들을 조각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 기괴하면서도 정교한 조각을 수풀속에 던져 버리는 것인지. 세 번
에 지나지 않은 마주침이었지만 이미 조각상은 리시엔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
다.
무심코 발걸음을 내딛던 리시엔은 순간적으로 숨을 들이키며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자신의 모습을 상대방이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놀
란 나머지 순간적으로 보인 반응이었다.
세 번째의 기이한 조각상은 리시엔에게 의외의 만남을 가져다주었다.
' 분명히......'
분명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에 자신과 마주쳤던 인간 남자
의 모습.
어린 나이의 인간이 가지기 힘든 깊은 검은색의 눈동자. 지금 그 속에 담겨있
는 것은 자신에게 잊지 못할 감정을 떠오르게 만들었던 그것이 아닌, 어떤 것
도 마음에 담고 있지 않은 무심함. 그것이었다.
' 어떻게 하지...?'
리시엔은 망설였다. 분명 그는 인간이며 자신은 용족이기에 아무리 겹친 우연
으로 인해 그와 재회했다고 해도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된다. 그러나 리시엔의
마음 속에 자리하고 있는 충동은 그것을 방해하며 모습을 보이고 말을 걸라고
유혹하고 있었다.
인간의 마을곁을 지나칠때면 으레 모습을 드러내 그들 속에 들어서고 싶어서
몸이 달아오르곤 했었다. 행동만 주의한다면 자신이 용족이라는 사실을 인간
들에게 들키지 않을 것이라 장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리시엔은 항상 망
설임 끝에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마치 깊게 새겨진 듯이 뇌리속에 남아있는
부모님의 말이. 그리고 판유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기 때문이다. 용족들은 느끼
지 못하지만 인간들에게 용족을 비롯한 다른 영수족들이 가진 기운은 거대하
게 느껴지기 마련이라고. 그 때문에 그들은 그 거대한 힘에 짓눌려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낀다고.
' 하지만.........'
리시엔의 가슴속의 작은 고동이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지금 인연의 끈을 놓
친다면 두 번다시 이어질 수 없을 것이라고.
카이엔은 오랜만에 맞은 혼자만의 휴식을 즐기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지난
며칠간은 본래의 자신을 망각할 정도로 난무하는 핏줄기 속에 빠져있었다. 그
리고 실로 오랜만에 인간의 생기에 취했다.
용족의 것에 비하면 미지근하게 식은 몇 모금의 물에 지나지 않지만 분명 목
마름을 해소해 준다는 것에 변함은 없었다.
아직 제대로 된 갈피조차 잡지 못하고 있는데 그러한 정신과 반대로 점점 몸
은 일방적인 살육에 익숙해져갔다. 자신의 힘을 상대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들을 상대로 무차별적인 힘을 내뿜으며 카이엔은 무언가가
마음 한 구석에서 떨어져 나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무척이나 허전한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때마다 카이엔은 알지 못하는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 정신없이 손을 움직였
다. 조각을 하는 동안에는 다른 어떤 것에도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 후...."
자신도 모르게 새어나온 한숨 때문에 카이엔은 피식하고 웃고 말았다.
불과 몇 년전만 해도 자신이 가진 최대의 고민은 어째서 다른 이들이 나이를
먹어가듯이 늙지 않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었다. 병에 걸린 것은 아닌지, 다
른 이들이 의심하는 것처럼 인간으로 둔갑한 요괴라던지. 카이엔은 진심으로
고민하고 또 고민했었다. 그러나 그때 자신이 인간이 아닌. 저 하늘 어딘가에
서 살아가고 있는 용족의 피를 이은자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런 우스운
고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천오는 말했다.
카이엔은 천이백여년만에 처음으로 태어난 교룡이라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노라고. 그렇게 이야기 했다.
그러나 그 의미가 무엇인지. 그로인해 자신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그다지 궁
금하지 않았다.
" ....!"
그렇게 한참을 조각하는데 매달리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카이엔은 문득 피
부를 찔러오는 낯설면서도 그리운 감각에 몸을 떨었다. 그 감각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카이엔의 가슴을 울리며 피를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전쟁터에서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울려대던 북소리처럼 점점 커져만
가는 가슴의 열류는 본능처럼 치밀어올라 기어코 몸을 움직이게 했다.
" 아.....!"
자신에게 일렁임을 느끼게 한 진원지를 찾아 몸을 옮기자 그곳에는 성년을 넘
긴지 얼마 되지 않아보이는 젊은 용족 여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 손에 무언
가를 꼭 쥔 채. 길게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과 그 검은 빛에 대조되는, 한번
도 본 적이 없는 몸에 달라붙는 흰색의 의복. 의복에 감싸인 그녀의 몸은 매
끈하게 뻗어내린 은어의 몸체처럼 생기있고 아름답게 보였다.
카이엔은 여인의 엷은 감탄성이 무엇에서 연유했는지 알지 못한 채 소리없이
그녀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 용족....'
마음 속에 퍼져가는 단 한마디의 단어.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자신의 시야를 가득 메운 여인의 모습은 오래전 모습
을 감춘 어머니를 떠오르게 만들었다. 곱게 내리뻗은 콧날이 어머니와 흡사했
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으면 어머니 이외에 처음으로 모습을 대한 용족 여인
이기 때문일까. 카이엔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자리를 지키고만 있었
다.
" 저..... 혹시 이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신가요?"
매끄럽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여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카이엔은 잠
시 여인이 말한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했다.
시야에 잡힌 것은 얼마전 자신이 조각했던 산여(酸與)의 상(像)이었다. 명계의
구석구석을 자신들의 은신처로 삼아 살아가고 있는 재앙을 불러오는 이형의
동물들. 그 중에서도 자신이 등장하는 곳에는 반드시 공포스러운 일이 일어나
게 만드는 저주의 새 산여의 조각이었다.
" 산여..... 산여라는 동물입니다. 전설 속에 등장하는...."
자신도 모르게 대답이 터져나왔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 그랬군요. 제가 지식이 짧아 미처 알지 못해 궁금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대답에 감사드려요."
카이엔은 아무렇지 않게 이어지는 여인의 말에 가슴속에서 무언가 이질적인
감정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수없이 다른이들의 존재를 없애가면
서도 느끼지 못했던 격렬한 감정. 진정으로 누군가를 없애고 싶다는 끓어오르
는 타오름. 상대에 대한 적의.... 곧 살의(殺意) 였다.
' 죽여... 저 용족을 죽여...'
카이엔은 주문조차 외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손 끝에 힘을 모았다. 요희가
자신에게 준 피로 인해 몸 속 가득 배어있는 명계의 독기를. 순수한 용족에게
는 어떤 극약보다 더 위험한 독기를 내보내기 위해서. 눈 앞에서 자신에게 말
을 거는 용족여인의 존재를 없애버리기 위해서.
변하지 않는 카이엔의 얼굴 표정 때문인지. 그렇지 않으면 알고도 모르는 척
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여인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그 미소에서
카이엔은 먼 과거에 느꼈던 순수한 그리움을 보았다.
" 전 리시엔이라고 해요. 당신은요?"
카이엔은 가슴위까지 들어올렸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손 끝에 희미하게 맺혀
있던 검은 안개 덩어리는 어느새 사그러들고 있었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
던 것 처럼.
그리고 여인의 맑은 눈동자가 카이엔의 동공안에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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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천리안에서도 작가 대전 시작입니다. @[email protected]
참가 작품은 오 마이 갓 (금어울님), 소울러드라딘(모시모시군), 젤나가를 찾아서
(벽월님), 너희가 판타리아를 아느냐(뱀파이어님). 그리고 저의 흑룡의 숲 2부 연.
이렇게 해서 다섯 명입니다.
뭔가 의욕이 샘솟는 기분. 열심히 써야지.
모두 즐거운 일요일 보내세요!
[번 호] 7292 / 7360 [등록일] 2000년 03월 27일 00:27 Page : 1 / 13
[등록자] 까망포키 [조 회] 95 건
[제 목] [흑룡의 숲 2부] 연(緣)... - 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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