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흑룡의 숲 제 2부 >
연(緣)...
제 9장. 朔(초승달)
二.
한동안 둘은 아무말도 없이 몸을 감싼 옷을 타고 전해져오는 풀의 감촉과 산
속을 맴도는 바람의 향기를 느꼈다. 누가 이렇게 하자고 먼저 말을 꺼낸 것도
아닌데 둘은 나란히 풀위에 앉아있었다.
" 전 무척 놀랐지 뭐에요.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 같아서 몇번이고 꺼
내어 보곤 했어요."
자신은 카이엔과 달리 오랜 세월을 산 용족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지만 리시
엔은 일부러 그에게 존대하는 말을 사용했다. 세월의 문제가 아니라 각자에게
적용되는 시간의 크기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백년과 용족의 백년이 다르듯이. 서로간에 존재하는 시간의 강을 재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 그런데 어째서 이 조각이 제 눈에만 띄였을까요. 마치 빛을 내는 듯이 환
하게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어요."
만난지 불과 한시진도 지나지 않았는데 리시엔은 카이엔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건네고 있었다. 카이엔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놀랐다. 용족인 그녀가 비록 정
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고는 하나, 인간인 아니, 그렇게 알고 있을 자
신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건네고 있다는 사실은 카이엔을 혼란스럽게 만들었
다. 그리고 그것은 리시엔도 마찬가지였다. 인간과 직접 마주대하고 싶다는 생
각은 늘 해왔었지만 막상 그런 상황이 닥쳐오자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말을
꺼내는 자신이 리시엔은 무척이나 신기했다.
그리고 무슨 연유에서인지 카이엔이라는 인간 남자는 무척이나 편안했다. 판
유 오라버니와 함께 있을때 처럼.
" 실례지만 나이를 물어도 될까요?"
리시엔은 손 위에 놓여있던 조각상에서 시선을 떼며 카이엔의 검은 두 눈동자
를 직시했다.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던 그 눈동자는 어떤 감정의 침입도 허용
하지 않은 채 그저 잔잔한 수면처럼 자신을 받아들였다.
" 인간으로서는 충분한 삶을 누렸습니다. 겉보기보다는 오랜 세월을 살았지
요."
카이엔은 일부러 나이를 말하지 않았다. 자신의 나이가 밝혀진다면 분명 리시
엔은 자신의 존재를 의심할 것이기에. 그녀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자신을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자신이 백년에 가까운 세월을 살
아왔다고 말한다면 알아차릴지도 모른다.
" 저는 약관이 갓 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아닌 모양이죠?"
그렇게 말하고 리시엔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이 아닌
모양이었다.
카이엔은 조심스레 시선을 움직여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자신에게 말을 걸었는지. 분명 용족들에게는 인간과의 만남이 금지되어 있다
고 들었는데 어째서 당당하게 자신에게 모습을 드러냈는지. 비록 아직까지 정
체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카이엔은 그것이 궁금했다.
" 그런데 어째서 깊은 산 속에....."
카이엔의 질문에 리시엔은 잠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어떤 대답을 해야할
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용족임을 당당히 밝힐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인간이라고 속일 것인가.
그러나 자신은 인간의 관습이 무엇인지 모른다. 리시엔은 작게 숨을 골랐다.
" 전... 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용족이에요. 그 중에서도 백룡족이죠."
잠시 동안의 침묵. 리시엔은 카이엔의 침묵을 자신의 정체에 대한 놀람에서
연유했다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결코 그것은 아니었다.
" 용족.......이었군요....."
리시엔은 결코 카이엔의 음성에 담긴 작은 흔들림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녀가 백룡족이라는 사실이 카이엔에게 어떻게 다가오는지, 무엇을 떠오르게
만드는지.
" 바람을 다스리는......."
카이엔은 작게 되뇌었다.
" 맞아요. 백룡족은 바람을 다스리는 가을의 용이라 불리죠."
리시엔은 인간인 카이엔이 용족에 대한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 신기한지 무척
이나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 저는 그리 강한 힘을 가지지는 못했어요. 그리고 아직 나이도 많지 않아
서 계절을 움직이는 일에 참여하지는 않고 있죠. 좀더 나이가 들면 저도 정신
없이 일을 해야하겠지만."
카이엔은 머릿속에서 맴도는 무수한 질문들을 그냥 삼켜야했다. 무엇을 먼저
물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인간인 자신이 용족에 대해 너
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면 분명 눈 앞의 리시엔도 의심을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묻고 싶었던 것은 혹시라도 자신의 어머니를 아는지.
같은 백룡족이니 본 적은 있는지였다. 어째서 자신을 남겨두고 천계로 돌아가
버린 것인지. 어째서 금지된 존재인 교룡을 낳았는지. 자신에게 진실을 가르쳐
주지 않았는지.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그러나 무수한 생각들은 그저 가슴 속
에서 맴돌고 있을 뿐 어느 것 하나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 용족들은 오랜 세월을 산다고 하더군요...."
카이엔은 일부러 리시엔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 물었다.
" 그래요. 보통 천년의 시간을 살아가죠. 하지만 같은 천년이라고 해도 하계
의 시간과 천계의 시간은 흐름이 다르기 때문에 하계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시간일 거에요."
리시엔은 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 저 역시 하계의 시간은 너무나 빨라서 혼란스러울 정도니까요."
" 그렇게 오랜 시간을 살아가는 것은 어떤 기분일이 궁금하군요."
카이엔은 여전히 잡히지 않는 먼 곳에 자리한 구름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어머니가 바라보던 하늘. 그리고 이제 저 하늘 어디엔가 존재하고 있을 어머
니의 세계. 자신은 결코 닿을 수 없는 머나먼 공간. 천계.......
" 저도 아직 잘 몰라요. 두 번의 천년을 살아온 그분이라면 알고 계실테지
만."
리시엔이 중얼거리듯이 한 그 말에 카이엔은 놀라고 말았다. 겉으로는 표정의
변화가 드러나지 않았지만 카이엔의 가슴은 미칠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분명 천오에게서 들었던 그 흑룡족 남자의 이야기일 것이다. 두 번의 천년을
살아온 존재. 그리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피를 가진, 교룡을 자식으로
두었던 남자.
두 번의 천년을 살아온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 것인가. 명계의 주인인 요희나
천오 역시 오랜 세월을 살아 왔지만 그들의 세월은 죽은 시간에 지나지 않는
다. 그러나 그들에 비해 턱 없이 적은 시간이라 할지라도 그 용족 남자 훼이
의 시간은 다르다. 어디에 존재하는 지 알 수 없는 천계에서, 계절을 움직이는
힘을 가진 용족으로서 살아온 그 세월을. 기나긴 시간이 주는 무게를 누가 감
히 말할 수 있을 것인가.
" 다음에도 만날 수 있을까요... 기억할 지 모르겠지만 이번이 첫 만남은 아
니란 걸 알고 있나요?"
카이엔의 시선은 천천히 리시엔의 얼굴로 향했다. 아무리 보아도 그녀의 얼굴
에서 연유한 과거의 그림자는 지워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시간을
되돌릴 힘이 없는 만큼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어쩌면 운명의 끈이 이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랬듯이. 이
번에는 자신이 그 운명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라고....
* * *
" 아직도 하계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나?"
비웃는 듯한 천오의 낮은 어조가 귓가에 울려퍼졌다. 언제나 그랬듯이 천오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않고 카이엔의 앞에 나타나곤 했다. 명계에서 살아가는 자
들은 모두 그랬다. 아무런 소리도 지니지 않은 그림자 같은 존재들.
카이엔은 오래된 먼지로 뒤덥힌 탁자를 지나쳐 색채를 잃어버린 침상에 걸터
앉았다.
" 그곳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널 겉돌게 만든 닫혀진 세상
일 뿐이다.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 무지의 공간이기도 하지."
" 제게 모든 것을 말해야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미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당
신들이 하는 말을 듣겠다고."
평소의 카이엔과 확연히 다른 강경한 어조에 천오는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보통때는 마지못해 자신의 말에 대답하고 행동하던 카이엔이 아니던가. 그런
데 며칠 사이에 갑자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카이엔의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한 것이다. 죽음의 세계. 명계에는 어울리지 않는 빛깔로.
" 좋아. 무엇이 네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었는지는 모르지만 잊지 않는 것이
좋아. 이제 넌 더 이상 명계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몸이라는 것을. 다른것도
아닌 요희의 피가 네 몸속에 흐르고 있는 이상. 넌 그녀의 그림자와 마찬가지
인 존재가 되었다. 그녀가 명계를 떠나 오랜시간을 보내지 못하듯이 너도 마
찬가지다."
굳어진 듯이 카이엔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입술조차 움직이
지 않았다.
" 점점 명계에 익숙해질거다. 그리고 이곳을 떠나서는 살 수 없게 될 거다.
하계에 내리쬐는 햇빛을 보는 것 조차 괴로워지겠지. 결코 되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아. 너는 더 이상 빛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
을테니까."
카이엔은 가슴 속에 맺혀있던 작은 무언가가 부서져 내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
다. 마음 한 구석에서 부정하고 있던 자신의 현실. 처음 목마름의 정체가 타인
의 생명을 얻기위한 몸부림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던 그날로부터 변하지 않은
진실.
천오는 굳어진 표정으로 죽은 듯이 침상에 앉아있는 카이엔의 얼굴을 응시하
며 웃었다. 자신도 처음에는 요희의 모든 것을 거부했었다. 그녀가 내뿜는 지
독한 눈빛도, 그녀의 세계 명계가 품고 있는 독기도, 암울한 공기도, 빛 조차
들지 않는 암담한 세상이 너무나도 싫었다. 거부하고 또 거부했지만 결국 돌
아온 것은 현실에 대한 인정 뿐이었다. 자신의 부모는 자신을 버렸다. 교룡이
라는 인정받지 못한 존재를 낳은 그들은 처음부터 자신에게 어떤 것도 해주지
않았다. 목마름에 허덕이는 자신을 버려두고 떠나버렸다. 그리고 본능처럼 갈
증을 해소하기 위해 다른 이들의 생기를 찾아 몸을 움직인 자신에게 돌아온
것은 영원히 용이 될 수 없는 이무기를 대하는 경멸어린 시선이었다. 원해서
교룡으로 태어난 것도, 미칠듯한 갈증에 시달린 것도 아닌데. 그들은 자신이
죽기를 바랬다.
' 너희들이 모두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어!'
금방이라도 바닥에 몸을 눕히고 눈을 감아버리고 싶었지만 천오는 그렇게 하
지 않았다. 걷지 못하게 된 몸을 억지로 이끌며, 온 몸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지혈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움직이고 또 움직였다. 그리고 그때 요희가 나타
났다.
' 네게 새로운 생명을 주지. 저 위대한 용족을 상대로해도 지지 않을 만큼
강한 생명을....'
그때의 그 목소리가 얼마나 마음속 깊은 곳을 잡아당겼는지. 자신의 모든 것
을 끌었는지 그녀는 모를 것이다.
그러나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자신의 가슴 속에 남은
것은 그때만큼 격렬하게 타오르는 감정도 살아야겠다는 굳은 의지도 아니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고통어린 삶을 어떻게 하면 끝낼 수 있을 것인가. 그
렇게 하지 못한다면 적어도 살아있는 동안은 명계의 무거운 공기에 짓눌리지
않을 수 있게. 그렇게 살아가고 싶었다.
수없이 육체의 죽음을 맞이해도 되살아나는 괴물같은 몸은 더 이상 축복이 되
지 못했다. 그와 더불어 시간의 길 속을 걸어온 자신의 기억은 잊혀지지도 않
은 채 얽히고 섥혀서 도저히 풀 수 없을 정도로 엉켜버렸다. 이제는 무엇을
위해 앞으로 걸어나가야 하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그러던 천오의 눈 앞에 모습을 드러낸 천 이백여년 만의 교룡은 암흑의 길에
피어난 등불과도 같았다. 그것을 지표로 삼아 걸어간다면 더 이상은 다른 무
언가를 떠올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더 이상은 아무것도.
" 넌 영원히 명계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 오직 이것만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지."
천오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짓고 있었다. 그리고 하얗고 창백한 손등을 내려다
보며 그는 걸음을 내딛었다. 바닥을 메운 먼지도 이제 그의 방해가 되지는 못
했다. 천오는 긴 옷자락이 스치는 작은 소리 이외의 어느 것도 허용하지 않은
채 망연하게 침상에 몸을 묻은 카이엔을 뒤로했다.
걸음을 옮길때마다 피어오르는 미미한 먼지들은 그가 걸음을 옮김과 동시에
다시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암울한 공기처럼 쓸고 닦아내도 없어지지 않는 회색의 작은 덩어리들은 그렇
게 시간의 무게처럼 바닥에 내려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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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쉬는 날인데 글을 많이 써야함에도 불구하고...
요즘 보기시작한 20편짜리 동방불패 시리즈물이 너무 재미있어서 그만..
T^T 정말 너무 재미있어요. 근래에 본 것중 가장 잘만든 비디오 시리즈에요.
감동입니다. 아는 출연 배우는 원영의밖에 없지만 다들 연기를 너무 잘하는
군요.
하지만 이번 작가대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분발해야죠. 아자아자..
[번 호] 7319 / 7360 [등록일] 2000년 03월 28일 00:41 Page : 1 / 11
[등록자] 까망포키 [조 회] 54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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