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흑룡의 숲 제 2부 >
연(緣)...
제 9장. 朔(초승달)
四.
" 지금 무엇이라 했느냐?"
어머니의 목소리에 담긴 것은 당황도 그렇다고 분노도 아니었다. 그저 방금
리시엔이 무엇을 말했는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는 순수한 호기심에서 우러난
질문. 리시엔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 이제 하계로 가서 살겠다고 했어요. 가끔씩은 돌아오겠지만 천계에 오는
일은 별로 없을 듯 해요."
시하라의 눈빛은 잔잔한 호수 같았다. 분명 지금 리시엔이 내뱉은 말은 충격
적인 것이다. 수행을 위해 하계에 내려가는 것이나 각 일족으로서 계절의 순
환을 위해 내려가는 일이 아니라 리시엔은 하계에서 살겠다고 이야기하고 있
음에도 그녀의 얼굴에는 어떤 흔들림도 떠오르지 않았다.
" 묻지 않으시는 건가요. 제가 왜 하계로 가겠다고 말했는지...."
어머니의 표정을 한동안 응시하고 있던 리시엔은 제풀에 지쳐 먼저 말을 꺼냈
다.
" 나는 네 결정에 토를 달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제 너도 엄연한 성년이
아니겠니."
" 그렇다면 어머니께서는 허락하신 것으로 알겠어요. 제가 인간과 사는 것
을...."
지금의 말을 속에서 준비하며 리시엔은 기대하고 있었다. 항상 현숙한 표정만
이 전부로 여겨질 정도로 급격한 감정의 변화를 드러내지 않는 어머니가 이번
에는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 그래. 그렇구나..."
어머니의 대답은 보통의 대화를 하듯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노하는 말을 들어도 좋았다. 인연을 끊어버리자고 이야기 한다해도 상처입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어머니의 반응은 리시엔의 상상을 넘어선 것이었다.
" 어째서죠....? 어째서 그렇게 쉽게 허락하시는 건가요?"
분명 리시엔이 꺼낸 말은 용족의 금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용족의 피와 인간
의 피가 만났을 때 일어나는 악순환. 그리고 오랜 세월을 걸어가는 자와 찰나
에 불과한 시간을 사는 자의 차이는 단순히 감정만으로 극복할 수 있는 넓이
가 아니다.
" 너는 내가 반대하기를 바라느냐?"
리시엔은 대답하지 못했다. 어머니가 보인 의외의 태도에 발끈해서 되묻긴 했
지만 리시엔이 바란 것은 허락이었지 반대의 말이 아니었기에.
" 나는 네가 무언가에 구속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비록 인간과의 만남은
금기시 되는 것이지만 그것을 통해 네가 말로는 얻을 수 없는 값진 무언가를
얻는다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겠다."
" 기뻐요."
리시엔은 활짝 웃었다.
어찌되었든 어머니는 자신의 선택을 받아들인 것이다. 최악의 경우 천계를 떠
나야겠다는 결심까지 했던 카이엔으로서는 무척 의외의 결과였다.
" 일부러 아버지께는 말하지 않았어요."
리시엔은 어머니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아직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흘러갈 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가슴의 허전함을 메꾸어줄 수 있는 존재
를 만난 것은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아직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는 못
하지만 리시엔은 자신을 부른 자연스러운 이끌림을 믿었다.
" 그래 그것은 내가 알아서 하마."
" 그럼, 이제 전 갈께요. 어머니."
리시엔은 그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밝고 경쾌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고는 빠
른 걸음으로 앞을 향해 걸어나갔다.
이제 완전한 성년이 되어버린 딸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시하라는 쓴 미소를 머
금었다.
" 그래........."
허공을 향해 퍼져나가는 작은 울림. 시하라의 음성은 여느때보다 훨씬 더 가
라앉은 음울한 기색을 담고 있었다.
* * *
" 기린족의 한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다실(茶室)로 모실까요?"
훼이는 보좌관의 말에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자신을 찾아올 기린족이
있는지. 그러나 자신과 인연이 닿아 있던 것은 전대 흑룡왕비 미하 뿐. 다른
기린족과는 어떤 만남도 가진 적이 없었다.
" 그렇게 하게. 잠시 후에 나가도록 하겠네."
훼이는 보좌관을 먼저 내보낸 후 책상 위에 놓여있던 몇 개의 두루마리를 원
래대로 말아두고는 몸을 일으켰다.
오백년 전. 흑룡왕의 집무실로 돌아왔을 때 느꼈던 그리운 감정은 이제 많이
퇴색되어 있었지만 그 때 바라보았던 복도 위의 광경만은 선명하게 남아있었
다. 흩어져 있던 이들의 만남으로 비롯된 새로운 인연의 시작.
눈을 감고도 막힘없이 걸어나갈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진 나무 복도위를 걸어
훼이는 다실 앞에 도착했다. 항상 방안에 보관하고 있는 여러개의 차잎들 덕
분에 다실에는 은은한 풀 향기가 배어있었다. 마치 봄날에 햇살이 가득한 숲
속을 거닐때처럼.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거친 느낌의 적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청년 한명이
찻잔을 손에 들고 자신에게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 무슨 일로 이곳까지 오셨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자리를 비운 흑룡왕을 대
신 해서 인사 드리겠습니다."
훼이는 청년이 앉아있는 탁자의 앞에서 인사말을 건네고는 자리에 마주 앉았
다.
" 연락도 미리 드리지 못하고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워낙 시급하게
움직이다보니... 저는 기린족 황자님의 보좌를 맏고 있는 가신이라 합니다."
" 전 훼이입니다. 현 흑룡왕은 얼마전에 혼인을 올려 지금은 자리를 비우고
있습니다."
훼이가 이름을 밝히자 청년은 눈에 띄게 놀라는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는 갑
자기 자리에서 일어서서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 미리 알아차리지 못하고 무례를 범해 송구스럽습니다. 먼저 인사를 올렸
어야 하는것인데..."
청년이 안절부절하는 기색을 보이자 훼이는 그에게 다시 자리에 앉을 것을 권
했다.
" 그렇게 어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다른 이들보다 오랜 시간을 살았
을 뿐. 별다른 것은 없으니..."
"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요. 저는 환계에 몸담고 있지만 기린족과 홍룡족의
피를 이은 몸입니다. 용족의 피를 가진 자가 훼이님을 모른다는 것은 말이 되
지 않습니다. 게다가...."
훼이는 손을 내저어 가신의 말을 만류했다. 용족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익히 알고 있지만 그것은 훼이에게 부담 이외의 것은 되지 못했다.
편안하게 자신을 대하기를 바랬건만 그것은 단지 바램에 지나지 않았다. 두
번의 천년을 살아온 훼이는 이미 용족들에게도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
이외에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 그런 말은 말고 이곳에 온 이유를 말씀해 보십시오. 제가 처리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 드릴테니."
훼이가 말을 꺼내자 가신은 그제서야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을 떠올렸다.
얼마전 현 기린족의 수장인 기륭의 명을 받들어 황자인 적수를 수행해 여러
계(界)를 돌아보기로 했었는데 바로 어제 아침. 적수가 자신을 따돌리고 사라
져버린 것이다. 우선 가장 가까운 곳이 천계였으므로 그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천계로 온 것이다.
" 이곳을 찾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전대 흑룡왕비 미하님의 조카되시는 적
수님께서 혹여라도 이곳을 찾지 않았나 여쭙기 위해서입니다."
훼이는 기억을 더듬었다. 전대 흑룡왕비 미하의 혈연이라면 분명 그녀와 마찬
가지로 눈에 띄는 외모를 하고 있을 것이지만 훼이는 그런 자를 본 적도 존재
한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미하는 자신의 혈연에 대한 이야기는 좀처럼 하
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기린족이 이곳을 찾았다면 당연히 내가 먼저 알고 있어야 하지만 이곳을
찾아온 기린족은 자네가 처음이야."
" 그렇습니까."
가신은 실망한 듯 작게 한숨을 내쉬며 멋대로 혼자 움직이고 있는 황자를 어
떻게 찾아내야 할 것인지 고민했다.
" 내가 다른 용족들에게 연락을 취해놓을테니 그가 천계에 있다면 바로 소
식이 들릴 것이네."
" 감사합니다. 훼이님."
난감한 표정을 떠올리고 있던 가신은 금새 표정을 밝게 되돌렸다. 기린족들
사이에서는 늘 엄숙하고 침착한 표정만을 짓던 그가 나이에 걸맞는 표정을 떠
올리게 된 것은 아마도 그의 몸 반을 점령하고 있는 용족의 피가 주는 편안함
인지도 몰랐다. 더군다나 지금 그의 눈 앞에 있는 것은 어떤 영수족들 보다도
오랜 세월을 살아온 존재가 아니던가.
" 그럼, 잠시 쉬면서 이야기라도 나누지 않겠나. 요즘 환계는 어떤지 듣고
싶네만..."
" 아...예. 기꺼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훼이는 자신의 일상에 끼어든 작은 흔들림 속으로 서서히 빠져들어갔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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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불패의 마수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요즘입니다.
지금 2시가 넘었는데 비디오 보느라고....T^T 내일 아침에 출근인데..
이제 지하철 타고 한바퀴 돌게 생겼군. [번 호] 7123 / 7686 [등록일] 2000년 03월 30일 00:04 Page : 1 / 9
[등록자] 까망포키 [조 회] 150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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