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흑룡의 숲 제 2부 >
연(緣)...
제 11장. 浸(꿈의 파편)
하지만....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따스함 속에 아픔이 담겨 있음을
그러나 이제까지처럼 아무 말도 않겠습니다.
저는 그저 당신에게는 작고 작은 존재.
품안의 작은 새처럼
그저 잠을 잘 뿐입니다.
一.
함께 걸음을 옮기고 있던 비가 갑작스레 몸을 비틀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자 훼
이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제까지 아무런 이상도 보이지 않았던 자신의 아
들이 어째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일까.
" 비야....비."
훼이는 조심스럽게 비의 몸을 받치고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비는 축 늘어진
채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 설마........'
훼이는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하나의 사실 때문에 흠칫하고 몸
을 떨었다. 자신의 생각이 맞다면 분명 비는 이유도 모른채 스스로 절망하고
있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언제 그것이 시작될지. 그것으로 인해 어떤 결과
가 생길지는 훼이 자신도 잘 알수 없었으므로.
비가 천계에 몸 담은지 70여년. 하계에 있었다면 조금 더 빨리 드러났을지 모
르는 교룡의 증거.
강인한 용족의 피와 일순간을 사는 인간의 피가 섞임으로 해서 생긴 부작용이
비를 무너지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 정신 차려라. 비."
훼이는 조심스럽게 비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러나 비는 실이 끊어진 그림자
인형처럼 미동도 없이 늘어져 있을 뿐 눈을 뜨지도 어떤 작은 움직임도 보여
주지 않았다.
" .......아버지?"
몽롱한 시야에 들어 찬 것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아버지의 얼굴이었
다. 비가 알고 있는 아버지의 얼굴은 자신에게 배푸는 무한의 신뢰와 애정으
로 가득찬 것이지 저런 슬픔이 깃든 표정이 아니다. 비는 그런 아버지의 얼굴
에 의아함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 .......아....."
' 이건......?'
몸을 일으켜 세우자 갑작스레 온 몸에 퍼져가는 작은 전율. 그것은 깊고도 깊
은 그리움이었고, 메마른 강을 채운 물줄기가 주는 시원함과도 닮아있는 감정
이었다.
" 몸은 괜찮은 거냐. 비?"
" ...........네. 아버지..."
영문을 알지 못하는 비는 자신의 온몸을 타고 흘러가는 기이한 느낌 때문에
그저 멍한 목소리로 대답했을 뿐이었다.
" 다행이로구나."
" 저........"
비는 조용히 숨을 삼키며 물었다. 지금 자신의 온 몸을 지배하는 전율의 정체
가 무엇인지. 그 동안 말 없이 견뎌왔지만 점점 더해져만 가던 온 몸의 고통
이 어떻게 일시에 해소된 것인지.
"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비의 물음에 훼이는 대답없이 미소만을 떠올렸다. 그것은 언제나 그가 비에게
아버지로서 보여주던 그 미소였다.
" 피로했던 모양이다. 그 때문인지 며칠간 정신을 잃고 있었다."
훼이는 비에게 사실을 이야기 하지 않았다. 비 스스로가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일부러 마음 속에 괴로움을 심어줄 필요는 없다.
자신만이 이 사실을 알고 지금처럼 해결한다면 분명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다른 이들의 비난어린 시선도, 지탄도 받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훼이는 비의
아버지이며 비는 훼이의 아들이기에. 부자간의 교류를 막을 수 있는 것은 그
누구도 없다.
" 그랬군요...."
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얼굴에 떠오른 언제나와 같은 미소를
확인했지만 비의 마음은 무거워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온 몸을 지배하던
기이한 전율도 이미 사라져 있었다. 아니, 일부러 의식하려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비의 입가에는 자조적인 웃음이 떠올랐다.
" 죄송해요. 아버지...."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처럼 가슴이 뜨거워져 갔다.
어째서 자신은 원하는 만큼의 힘을 낼 수 없는 것일까. 그리고 어째서 아버지
의 얼굴에 수심으로 가득 차오른 그늘을 만드는 것일까. 자신 때문에 아버지
는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버렸음에도.... 자신은 그저 아들이라는 이름만을 가
졌을 뿐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어째서 네가 사과를 하지...?"
" 죄송해요...."
비는 애써 눈물을 참으며 그 말만을 반복했다. 지금은 도저히 아버지의 얼굴
을 볼 수 없었다.
* * *
" 교룡을 만들다니 훼이답지 않군요."
훼이는 피식 웃으며 그와 눈을 마주쳤다.
" 그렇다면 나다운 것은 무엇입니까?"
" 당신이 지금까지 보여준 것은 최강의 흑룡으로서 당연히 가져야할 모습들
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당신에게서 과거를 찾을 수는 없게 되었군요. 힘이
감소하지는 않았을테지만 지금 당신은 후계자의 지위도, 당연히 머물러야 할
흑룡궁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 그런 것을 바라고 살아오지는 않았습니다."
서린은 의아함을 담은 시선을 훼이에게로 던졌다. 자신이 알던 훼이와 지금의
훼이는 확실히 어딘가가 달랐다. 아무런 일이 생기지 않았다면 훼이역시 자신
이 얼마전 황룡왕의 지위에 올랐듯이 흑룡왕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강한 흑룡왕이 되리라고 의심치 않았던 훼이는 이제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버린 채 마치 유폐라도 당한 것처럼 먼 별궁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는 것이다.
" 당신에게 이런 일이 생기리라고는 한번도 생각한 적이 없는데...."
" 후회하지 않는다면 거짓이겠지만 적어도 제가 선택한 길을 부정하고싶지
는 않습니다."
서린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 대체 인간의 무엇이 당신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모르겠군요."
늘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던 서린으로서는 드물게도 그는 소리를 높이고 있었
다. 그러나 그것은 감정의 격한 분출이 아닌 당혹감에 의한 것이었다.
" 지금은 오히려 잘 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커다란 굴레를 가지고 살아가
는 것 보다는 이렇게 조용히 살아가는 것이 더 나은일 같군요."
서린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가끔은 서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던 둘이었
건만 지금은 너무나도 다른 존재가 되어버린 것 처럼 달라져버렸다. 같은 후
계자의 자리에 있던 과거와는 너무도 큰 차이를 지닌.
" 하지만 인간을 사랑한 것으로 끝내지 않고 왜 교룡을 낳았습니까. 낳지
않는 것이 당신에게도 그리고 아이에게도 더 행복한 일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을텐데..."
훼이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 역시 아무것도 모르지 않았던가. 그녀는 자신에게 아이가 생겼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십년의 세월이 흐른 후 훼이가 다시 모습을 드러낼때까지.
' 교룡.......'
잘 알고 있었다. 교룡이 무엇인지. 교룡으로 태어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살아가는 동안 온몸을 지배하는 고통과 싸워야 하며, 자신을 죽이려는
일족들에게 쉼없이 목숨의 위협을 받아야 하는데다, 정신적인 절망감이 얼마
나 큰지. 어느 한곳에도 속하지 못한채 영원히 떠돌아다녀야 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그랬다. 훼이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했기에 훼이는 자신의 아
이가 태어났다는 것을 안 그 순간부터 자신의 아이만은 다른 교룡들이 걸어온
삶을 그대로 밟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토록 비참하고 괴로운 삶을 살게 할
수는 없었다. 설령 그것으로 인하여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잃게 된다고 하여
도. 훼이는 위대한 이름보다는 소중한 것 하나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
라고 여기고 있었다.
" 서린. 당신은 당신의 아이가 교룡이라면 그 아이를 죽일 수 있습니까...?"
훼이는 되물었다. 아버지가 되어보지 않은 자라면 결코 느낄 수 없는 그 감정
의 흐름을 과연 그가 이해할 수 있는지 묻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전
하지 못했던 자신의 아버지에게 묻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 ......조금이지만 알 것 같군요..."
한참을 생각한 후에야 서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멈춤없이 흘러가는 시간들.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자신은 그 무겁고도 거
센 시간의 파도 속에 몸을 담고 있다.
아주 오랜 과거의 자신은 그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은 채 살아도 괜찮은 시
간속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때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고
더 이상 자신은 비라는 이름만을 가진 존재가 아니다. 흑룡의 피를 이은 자로
서. 훼이의 아들로서 존재해야하는 것이다.
하지만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 것일까.
이유는 없는데도. 왜 이렇게 슬픔만이 가슴을 메우는 것일까.
자신을 향한 아버지의 따스한 미소와 시비들의 얼굴을 보고 느낄때마다 치밀
어 오르는 슬픔은 도저히 스스로도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이었다.
" 비. 무언가 생각할 것이라도 있는 모양이구나."
익숙하면서도 따스한 아버지의 목소리. 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언제나와
같이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검은 파오를 걸치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두눈 가득 들어왔다.
"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저 날씨가 너무 좋아서 빛을 쬐고 있었어요."
비는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 그래. 움직이지 않는 것 보다 이렇게라도 밖에 나와있는 것이 더 좋은 일
이지."
훼이의 눈에 비친 것은 아직까지 창백함이 남아있는 아들의 얼굴이었지만 비
가 본 것은 자신이 넘을 수도 바꿀수도 없는 현실의 벽이었다.
" 내일은 제게 새로운 주문을 가르쳐 주세요."
비는 활달한 목소리로 훼이를 보챘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아직은 작고 어린
아들의 모습이 되어. 그리고 훼이는 그것에 환한 웃음으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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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행사도 간신히 끝마쳤고, 잠도 조금 잤고 한데...마감은..
부족한 50페이지는...T^T
지금 겨우 한편썼는데 언제 다 쓸 것인가. 게다가 1권 분량 이야기도 다
짜놓았던 것이었는데.... 다 어긋나 버렸다. 슬프다. 슬퍼...
[번 호] 7339 / 7686 [등록일] 2000년 04월 05일 23:00 Page : 1 / 14
[등록자] 까망포키 [조 회] 113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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