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흑룡의 숲 제 2부 >
연(緣)...
제 11장. 浸(꿈의 파편)
二.
눈 앞을 수놓은 붉은 색의 혈화.
무너지듯 바닥으로 쓰러져 내리는 몸. 창백하게 굳어지는 얼굴. 소리없는 절
규. 그 모든 것들이 아주 천천히 비의 눈에 새겨졌다.
굳게 감긴 눈은 더 이상 그 속에 담긴 검은 눈동자를 보여주지 않는다. 이제
영원히 그 눈을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항상 맑게 흔들리던 그 눈동자를. 그 속
에 담겨있던 옅은 쓸쓸함의 그림자와 배려의 시선을. 이제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어째서...?
어째서 이런 결말을 맞이한 것일까. 그동안의 슬픔과 고통을 보상받기 위해서
라도 행복하리라 생각했는데. 그가 행복해지지 않는다면 세상은 너무나도 불
공평한 것이라고 여겼었는데. 잔혹한 시간은 비의 눈에 그 모든 것들을 새겨
넣은 채 거침없이 흘러갔다.
' 용족인데....... 용족이라는 이름을 가졌는데.....'
비는 절망했다. 자신이 가진 이름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
던 현실에 대해서. 그리고 어째서 자신의 주위에서 모든 이들이 떠나가는지.
가장 처음 얼굴 조차 보지 못한 어머니가 그랬고, 숙부 비영이 그랬듯이. 그러
나 그들은 인간이었기에 쉽게 보낼 수가 있었다. 그들의 삶은 짧은 것이기에.
하지만 어째서. 성휘는 천인이라는 신분을 가졌음에도 그 수명을 다 채우지도
못한채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인지. 그것도 가장 최악의 형태로.
막을 수 있었다면...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막을 수 있었다면....
후회하고 또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지만 자신에게는 아무런 힘도 없었다. 흑룡
의 피를 이은 자신임에도. 가장 강인한 용족인 아버지로부터 그것을 이어받았
음에도 자신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왜 나는......'
성휘와 연화의 미래를 지켜주지 못했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쓸쓸한 미소만
을 남겨둔 채 성휘는 떠났고, 연화는 남았다.
피부를 타고 느껴지는 공간이 열리는 파동.
그 파동을 느끼자마자 비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모습이 드러나자 비는 더욱 격해지는 감정을 애써
추스렸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 무슨 일이지...?"
"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어떻게 친 혈육을 자신의 손으로...."
떨려 나오는 자신의 목소리는 마치 먼 곳에서 울려퍼지는 듯 생소하게만 느껴
졌다.
" 저는....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일시에 모든 것이 부서져내린 듯한 느낌이었다. 이제까지 자신이 지켜오려 했
던 무언가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듯한 상실감.
자신때문에 아버지는 무수한 것을 잃었지만 반대로 얻은 것은 없다. 성년식을
치루었을 때도 그랬다. 그리고 홍룡왕 화란의 계승식 때 역시. 자신의 존재로
인해 훼이가 얻은 것은 없었다. 아버지라는 이름 아래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
은 결코 기쁘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스스로 많은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장소와 자신만 있으면 된다고 했지만 비
는 그 사실을 정면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눈 앞의 모든 것이 사라진다. 존재감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잘게 부서져 내
린다. 모든 것이 그렇게 먼지처럼 흩어져 간다.
훼이는 슬픔과 절망을 자신이 가진 힘을 뿜어내는 것으로 대신 메꾸었지만 비
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비가 선택한 것은 마음을 닫아버리는 일이
었다. 더 이상 어떤 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느껴지지 않도록. 그렇게 문을
닫아버린다면 더 이상 상처입지 않아도 되고, 현실에 절망하지 않아도 되므로.
* * *
언제부터인가 아버지의 곁을 지키게 된 당당하고 강인한 여인 화란. 그녀는
자신이 가진 장점과 능력을 잘 알고 있었으며, 활용할 줄 아는 여인이었다. 그
녀는 자신의 의지로 모든 것을 결정했고 또한 움직여갔다. 어떻게 그렇게 솔
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지 비는 그것이 궁금했다. 자신은 지금
까지 참아왔고 감추어 왔던 그것을 그녀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것
이다.
' 어머니.......'
자신에게는 너무나도 낯설고 생소한 느낌의 단어.
모든 살아있는 자들을 있게 한 바로 그 어머니라는 말이 가진 따스함을 자신
은 느껴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 이유로 인해 슬픔을 느낀 적은 없었다. 아버지
훼이는 항상 자신을 따스하게 감싸주었으므로. 그로 인해 비는 어머니라는 존
재의 공백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곁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은. 그로인해 자신이 있을 자리가 조금이
나마 줄어든다는 사실은 무척 슬픈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어느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비는 자신으로 인해 아버지가 얽애이는 것을 바라지 않았
기에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감정의 움직임. 미묘하고도 미묘한 그 흐름을 자신은
무의식적으로 피하고 있었다.
그래서 였을까. 평소와는 다르게 생소하고 이질적인 그것에 눈을 돌린 것은.
피부로부터 거부감을 느끼게 만드는 공기 속으로 몸을 들여놓겠다고 생각한
것은. 단순한 호기심만이 아닌, 필연적인 무엇으로 인해 그곳에 들어서게 된
것은.
처음에는 알지 못했던 공간. 훼이는 그곳의 이름만을 언급했을 뿐 어떤 곳인
지 자세히 말해주지 않았다. 무엇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음울한 땅에서 자신을 맞이한 기이한 형상의 동물들. 죽은자의 땅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곳에 그런 존재들이 사는지, 그리고 모든 세상이 가라
앉은 회색빛 잔영으로 둘러싸여 있는지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들
그러했으리라. 일부러 명계의 땅에 발을 들여놓을 만큼 무모한 생각을 가진
자는 없을 테니까.
' 교룡이로군..... 교룡.....'
천오는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
다. 자신과 같은 피가 흐르는 존재. 인간과 용족 어디에서 속하지 못한 채 살
아가야하는 존재. 교룡만이 뿜어내는 특유의 기운. 교룡인 자신만이 알 수 있
는 그 기운을 느끼며 천오는 점점 기분이 좋아졌다.
지금까지 교룡으로 존재하는 것은 자신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누구인지는 모
르지만 또 어떤 무책임한 자가 교룡을 만들어낸 것이 분명했다.
' 좋아. 어떤 자인지 한번 봐야겠군.....'
그 오랜 시간을 건너 태어난 교룡의 존재는 마치 길게 이어진 실이 당겨지는
것처럼 천오를 부르고 있었다.
' 파오....'
그 교룡이 걸치고 있는 것은 파오였다. 그것도 흑룡을 상징하는 검은 색의 파
오. 자신은 단 한번도 입어보지 못했던 그 옷을 자신보다 헤아릴 수 없을 정
도로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태어난 이 교룡은 당연하다는 듯이 입고 있었다.
' 흑룡의 힘인가...... 그런 것인가......?'
절로 웃음이 나왔다. 흑룡의 피를 이었기에 자신과는 달리 교룡으로 태어났음
에도 당당한 용족의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자신만이 자신
의 부모만이 자신의 존재를 거북하게 생각했던 것인가.
" 좋아......."
천오는 작게 중얼거렸다.
처음으로 밟은 명계의 땅에서 느껴지는 이질감 때문에 정신없이 주위를 둘러
보며 그 어린 교룡은 망설이고 있었다.
" 필방."
천오는 웃음을 지으며 목소리를 냈다. 자신과는 달리 처음부터 다르게 살아온
그 교룡에게도 고통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
* * *
" 교룡......?"
비는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몸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지만 머릿속을 가득 채운 의문이 풀어지지 않는한 정
신을 놓을 수는 없었다.
" 어째서.....어째서 아버지는 그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지.....?"
비는 계속 묻고 또 물었다.
인간과 용족의 금기시된 사랑으로 인해 태어난 존재. 다른 용족들은 혹여라도
교룡이 태어나면 죽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은 지
금까지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었다. 그저 불만에 찬 시선을 받았을 뿐. 그 이
상이 것은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이런 세월이 지나도록 자신은 교룡이 무엇
인지 조차 알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그리고 자신의 온 몸을 지배하던 알 수
없는 고통과 목마름이 무엇이었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이
미 자신은 모든 것을 알아버렸다. 아버지의 존재가. 아버지가 가진 훼이라는
이름이. 흑룡으로서의 강인한 힘이 자신에게 향하던 모든 것을 막아주었다는
사실을.
" 어째서 입니까.......어째서......."
비는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한 눈물을 애써 참았다.
이제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왜 그런 고통을 겪지 않았는지. 아니, 겪
었지만 이유를 알지 못한 채 그저 몸이 약하다고만 알고 있었는지를...
그것은 모두 아버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자신
은 분명 지금까지의 삶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차라리... 차라리 부자라는 이름에 얽매여 있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이렇게
괴롭고 슬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비는 점차 흐려져가는 눈을 간신히 들어올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여전
히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암담한 회색빛으로 가라앉은 죽음의 땅일 뿐.
지금까지 자신이 머물러 있던 환한 빛의 세상은 아니었다. 이렇게 이곳에서
무너져 버린다면 더 이상 끊임없이 괴로워하지 않아도 될테지만 비는 그렇게
쉽게 무너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존재하고 있었기에 훼이는 아무렇지 않게 아버지가 될 수 있었다는 것
을. 둘의 깊은 피의 이어짐은 서로에게 깊은 자국을 남겼다는 것을.
훼이는 희미하게 숨을 내쉬고 있는 비의 손을 붙잡고 계속 자신의 생기를 불
어넣기 위해 노력했다. 너무나 미약하게 숨을 쉬고 있는 비의 모습은 금방이
라도 꺼져버릴 촛불같아서 훼이는 너무나도 조급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런 훼이의 마음과는 반대로 비는 조금도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
리고 교룡으로서 본능적으로 가져야 할 생기에 대한 목마름도 지금은 느껴지
지 않는 것 같았다. 그저 미약하게 숨을 내쉬며 비는 자리에 누워 있었다.
너무나도 자신과 닮은 하얗게 굳어진 얼굴을 내려다 보며 훼이는 후회했다.
비에게 사실을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을. 그로인해 지금의 결과가 생겨난 것이
라면 모든 것은 자신의 책임이라고.
" 비.... 눈을 뜨거라...어서..."
그러나 훼이의 목소리는 비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어째서 이런식으로 이어지는 것일까. 어째서 자신의 곁에는 소중한 이들이 머
물러 주지 않는 것일까.
훼이는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마음을 애써 추스렸다. 자신이 지금
이 자리에서 무너져 버린다면 비는. 자신의 어린 아들 비는 어떻게 앞을 헤쳐
나갈 것인가. 지금은 그 미래를 걸을 수 있을지 조차도 알 수 없는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쩌면 그것은 영겁의 시간이었을 수도 있고 불과
짧은 시간에 지나지 않는 찰나의 순간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훼이에게는
그 기다림의 시간이 너무나도 고통스럽고 길기만했다.
미미한 흔들림을 보이던 눈꺼풀이 힘겹게 위로 올라가며 힘없는 검은 눈동자
가 나타났다.
" 비.... 정신이 드느냐?"
비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너무나도 미약했기에 그것은 미소라고 보여지지
않을 만큼 작았지만 훼이는 알 수 있었다. 비는 힘겹게 웃음을 보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 아버지........왜 그렇게 슬퍼하시는 건가요....'
목소리를 낼 수 없을만큼 약해져 있었기에 비는 눈으로 물었다. 지금까지 묻
고 싶었지만 단 한번도 꺼내지 못한 채 마음 속 깊이 담아두었던 말들을.
' 저는 괜찮아요.. 항상 그랬어요. 아버지가 있었기에...... 저는 이렇게 지금까
지 아무런 불편 없이 살아왔잖아요.'
" 비. 조금만 참거라. 금방 예전처럼 건강해질 테니까."
아버지의 걱정스러운 음성이 귓가를 파고 들어온다고 느낀 것과 동시에 비는
자신의 손을 타고 전해오는 따스한 흐름을 느꼈다. 갈증을 해소시켜주는 시원
한 물과도 같은 느낌의 기운을.
' 괜찮아요. 아버지........'
" 비..."
비는 조금 전보다 더 뚜렷한 미소를 떠올렸다. 항상 훼이가 봐왔던 아들로서
의 미소. 어리광을 부리는 작은 아들의 미소. 그러나 그 미소는 언제나처럼 마
냥 어리지 않았다. 자신의 두 눈에 그렇게 비추고 있었을 뿐. 비는 이제 완벽
히 자신과는 다른 존재가 되어있었다. 자신을 통해서 태어나기는 했으되 비는
훼이와는 다른 이름을 가진 것처럼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 슬퍼하지 마세요..... 전 괜찮아요. 비록 예전에는 알지 못했지만 교룡은....
오래살지 못한다는 것을 이제는 알아요. 아버지의 목숨과 더불어 제가 지금까
지 살아왔다는 것을 이제는.... 알아요.'
" .....아버지..."
미약한 음성. 훼이는 희미하게 울려퍼진 비의 목소리를 듣고 미소지었다.
" 그래. 기운을 차리거라. 이제 금방이다."
' 전...... 괜찮아요.'
비는 남아있는 마지막 힘을 다하여 훼이의 손에 잡혀있던 자신의 손을 빼냈
다. 그리고 작게 고개를 저었다.
' 걱정하지 마세요. 비록 아버지보다 먼저 가게 되었지만....... 전 괜찮아요.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아버지.... 슬퍼하지 마세요.'
비는 웃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 아버지와의 마지막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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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도피의 나날들.
역시 이벤트 한번 끝내고 나니 피로가 며칠을 가는군요. 오늘은 오랜만에
쉬는 날이었는데 잡지사에 코스프레 촬영을 가느라고 또 아침 일찍 일어
나고 말았습니다. T^T
어제는 제 돈 주고 새 비디오를 샀죠. 9년만에... 정말 하도 안사주길래
치사해서 제가 샀습니다.
요즘은 다른때보다 더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제 자신의 많은
일이 변했고, 지금도 달라지고 있지만. 역시 변하지 않는건 변하지 않는 것
이고, 뭐 이제는 익숙해지고 있지만요. 사회라는 것에. 그리고 세상이라는
것에. ^^ 요즘은 조금 센치해지고 있습니다.
[번 호] 7403 / 7686 [등록일] 2000년 04월 08일 01:32 Page : 1 / 13
[등록자] 까망포키 [조 회] 108 건
[제 목] [흑룡의 숲 2부] 연(緣)... - 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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