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룡의 숲-103화 (103/130)

< 흑룡의 숲 제 2부 >

연(緣)...

제 12장. 腔(깊어지는 시간)

언제고 제게 이런 날이 다가올 것임을

믿고 있었습니다.

한없이 길지는 않아도

단 한순간으로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는...

깊고도 깊은 강물이 빛을 받아들이지 않듯이

그저 가라앉아 버릴 기억이라 해도

간직하고 싶었습니다.

一.

" 있잖아요. 훼이."

한 장의 문서를 책상 위에 펼쳐놓은 채 생각에 잠겨있던 훼이에게 시령은 몇

번이나 말을 걸었다. 그러나  무슨 생각에 빠져있는지 훼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 훼이!"

시령은 입을 삐죽거리며 걸음을 옮겨 훼이의 어깨를 흔들었다.

" 무슨 일이지?"

그제서야 자신에게 답을 하는 훼이를 보며 시령은 투덜거렸다.

" 대체 뭘 그렇게 생각하는데 몇번이나  불러도 모르는 건지... 대체 나이가

너무 많아서 그런건가요?"

당돌하게 소리를 지르는 그녀를 보며 훼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유일하게 자신

을 처음부터 어려워하지 않았던 소녀. 이제는  흑룡왕비라는 지위에 올랐지만

그녀는 처음 만났을때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아이같은 성격도 그러했고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든 하는 것도 그러했다. 하지만 그녀 역시 자

신의 지위가 가진 역할을 수행해야 할 때는 잘  알고 있었다. 그때 만큼은 지

금의 태도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현숙한 여인의 모습으로 변모하는 그녀.

" 묻고 싶은게 있는데 왜 대답을 안한 건가요. 정말..."

훼이는 그저 피식 웃고 말았다.

" 유안이 말하길 훼이는 지금도  그 숲에 간다면서요? 예전에 살았던  그곳

말이에요."

" 그래. 그랬지."

훼이는 작게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까지 가장 마음편한 장소로 남아있

는 그곳. 이미 오래전에  그곳에 자신의 모든 감정을  묻었다고 생각했었지만

결코 그것은 아니었다.

" 유안이 걱정하고 있어요. 혹여라도 훼이가 다시 이곳을 떠나 숲으로 돌아

간다고 말할까봐."

" 왜 그런 말을 했지?"

시령은 갑자기 훼이에게서 등을 돌리며 창가를 향해 걸어갔다.

" 훼이는 나이가 많으니까. 그리고 혈연 상으로도 한참 어리니까 유안이 어

리게만 느껴지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아요. 당신에게는 미치지 못해도 유안 역

시 흑룡왕으로서의 경험과 힘과 지혜를 갖추고 있어요. 모를 리가 없죠.  이런

제가 봐도 알 수 있는데... 당신의 마음이 더 이상 이곳에 있지 않다는 것을."

순간적으로 훼이는 몸을 굳혔다.

아무렇게나 말을 내뱉는 활달한 성격의 여인이라고만 생각했던 시령이 자신의

깊은 곳을 집어낸 것이다. 결코 다른 이들에게 내보이고 싶지 않았던,  그러나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현실의 이야기를.

" 그러니까 유안은 바라고 있는 거에요.  떠난다는 이야기라도 좋으니까 자

신에게 이야기해 주기를. 그저 백부로서가 아니라  유안을 인정하는 마음에서

마음 속의 이야기를 해주길 바라는 거에요."

훼이는 천천히 손에 들고있던 인장을 내려놓았다.

벌써 흑룡궁에 머문지도 오백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그 시간이 흐르는 동

안 자신은 과연 무엇을 해 온 것인가. 그때의 깨달음으로 많은 것을 얻었다고

생각했었는데, 과거의 얽매임에 더 이상 끌려가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는데 결

코 그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자신만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 유안은 언제까지나 어린아이로 남아있지 않아요.  그리고 훼이도 모든 것

을 혼자만 담아두려 하지 말아요. 그건.... 그건 결코 바른 길이 아니에요."

시령은 조금 더 매끄러운 말로 자신의 생각을 전하고 싶었다. 그러나 말 솜씨

가 없어서인지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시령이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하고 답답해하고 있자 훼이는 피식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는 안다."

" 많은 걸 바라지는 않아요. 그저 알아 달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그랬다. 항상 자신은 혼자서만 너무 앞서서 나아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예전

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세상은 결코 자신 하나만을 품고 움직이지 않음에도.

" 시령. 이곳에 있었군."

집무실의 문을 열고 유안이 모습을 드러내자 순간적으로 시령의 표정은  조금

전까지 보이던 모습과 달리 흑룡왕비로서의 현숙함을 담은 것으로 변했다.

" 어서오세요."

" 오랜만에 시찰을 나섰더니 둘러볼 게 많아서 조금 늦어졌지."

" 표정이 밝은 것을 보니 아무런 문제도 없는 모양이군요."

훼이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떠올린 채 다시  문서로 시선을 돌렸다. 시령이

어린 아이같은 행동을 보이는 것은  오직 자신의 앞에서 만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깊이 마음을 나누고 있는 사이인 유안의 앞에서 조차 그녀는 예전의 철

없던 백호족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훼이의 앞에서만은

조부에게 어리광을 피우는 손녀처럼 태도가 바뀌는 것이다.

" 백부님을 도와 일을 처리한다더니 어느 정도나 했는지 물어도 될까?"

" 당신이 너무 일찍 오는 바람에 많은 것을 하지는 못했어요."

시령은 작게 웃어 보였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어린  아이처럼 말을 내뱉던 모

습을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그녀는 달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에 떠

오른 작고 부드러운 미소. 그것은 상대를 진정으로  생각하는 자만이 보일 수

있는 신뢰의 미소였다.

" 백부님. 감사드립니다. 이젠 제가 일을 처리하겠습니다."

언제나처럼 정중함을 담은 목소리로 유안이  말하자 훼이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수고했구나."

"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죄송할뿐입니다. 늘 백부님께 번거로운  일을 부탁

하는 것 같아서..."

훼이는 고개를 저으며 왕의 인장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백년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기분. 그때의 자신은 마음을 채우는 아련한 그리

움을 느끼며 이 자리에 섰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세월이 흐름과 동시에 모든

것은 달라져 버렸다. 그때 이  자리에 함께 있던 것은  동생 라이엔 이었지만

지금은 그때만해도 아직 어린 후계자에 불과했던 유안이 당당한 흑룡왕이  되

어 자신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 그것도 왕의  모습에서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

태도로.

" 그럼, 살펴 가십시오."

" 힘들지는 않았나요?"

" 그럴 리가. 나를 너무 과소평가 하고 있군?"

" 그렇지 않아요. 단지 묻고 싶었기 때문에 묻는 것 뿐이에요."

문이 닫히기 전 훼이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유안에게 말을 거는 시령의 음성

을 흘려들으며 작게 미소지었다.

*            *            *

" 서두르지 않으면 가신에게 따라잡히겠군."

적수는 버릇처럼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자신의  본래 자신의 계획대로라

면 벌써 천계를 떠나 하계에 있어야 하는 것인데 천계의 이곳 저곳을 돌아다

니다 보니 시간을 훨씬 더 지체하고 말았다.

환계에 머물때의 자신은 황자라는  신분. 그리고 기린족의 피를  이었다는 것

때문에 마음과는 반대로 지극히 차분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행동에 참견하지 않았기에 자유로울  수 있었다.

용족들이 하계에 수행을 나가면 숲에서 밤을 지새듯이 자신 역시 천계의 깊은

숲속에서 잠을자고 음식을 먹으며 시간을 보낸 것이다.

전대 흑룡왕비였던 숙모님 덕분에 흑룡일족과는  어느 정도 안면이 있었지만

분명 가신은 자신이 그곳으로 갔으리라고 여기고 흑룡궁에 머물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했기에 적수는 궁으로 갈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있었다.

용족들의 삶이라는 것은 처음 보았던 순간에도 그랬지만 무척이나 분주한  것

이라고 적수는 느끼고 있었다. 단 며칠간의 시간을 천계에서 보냈지만 무언가

를 찾아 끊임없이 움직이는 용족들의 모습은 마치 인간과도 비슷하게 보였다.

인간들은 짧은 생을 살아가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지만 용족들은 그것도  아닌

데 언제나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용족들이  계절의 흐름을

주관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계의 빠른 시간에 맞추어 반복되는 계절의 움

직임 뿐 아니라, 천계나 환계의 계절을 움직이는 것 역시 용족이니 그들이 바

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 나와는 별 상관 없지만...'

적수는 느긋하게 숲에 난 길을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한가롭고 조용

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실로 오랜만의 일이기에. 환계에서의 고요함은 지금의

편안한 조용함과는 달랐다.

' 내가 용족이었으면 정말 좋은 왕이 되었겠지...'

적수는 그것을 생각하자 절로 웃음이 배어나오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실제

로 용족의 피를 이은 가신조차  자신보다 더 기린족다운데 가장 순수한  피를

이은 자신은 환계의 고요함을 견디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

닐 수 없었다.

" 적수님!"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 말을 배우고 익히던 그 순간부터 늘 들어오던 음성.

적수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차분함속에  배인 날카로우면서도 익숙한

감정을 느끼면서 적수의 발은 자동적으로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아직 멀리

에 있기에 확실하게 얼굴이 보이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  해

왔기에 음성 만으로도 걸음을 옮기는  모습 만으로도 지금 그가 얼마나  화가

나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다른 이들  앞에서는 절대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가신이었지만 자신의 앞에서는 다르다.

' 역시 너무 지체했어....'

적수는 무작정 앞을 향해 걸어나가면서 천천히 공간을 여는 주문을 읊조렸다.

' 하지만 이렇게 금방 붙잡혀서야 일부러 나온 의미가 없지.'

적수는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장난스러운 미소를 얼굴 가득 피어올리며 일렁

이는 공간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 적수님!!"

적수의 모습이 공간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본 순간 멀리서부터 서둘러 걸어오

던 가신은 달리다시피하며 적수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적수는 마치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공간안으로 들어서더니 곧  문

을 닫아버렸다.

" .......이런...!"

자신을 보고 적수가 걸음을 멈추리라고 여겼던 것이 잘못이었다. 며칠전 처음

으로 혼자 모습을 감추었던 그날부터, 아니 훨씬  더 이전부터 적수는 무언가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 후..."

가신은 적수가 조금전까지 서 있던 자리에 도착하자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

쉬었다. 방금 전까지 천계에 있었으니 이제 다음으로 적수가 갈 장소는  하계.

다시 환계로 돌아갔을 리는 없고,  명계나 영계로 갈 리는  없으니 남은 곳은

하계 뿐이었다. 혹시라도 천상계에 갔을 수도 있으나  그곳에는 아는 이도 없

고, 보통 영수족들은 천인들과 대하는 것을 그리 즐기지 않았다.

'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

적수가 하계의 어느 곳으로 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곳곳을 뒤져서라도  그를

찾아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가진 신분. 차기 기린족의 장이 될 황자

의 보좌라는 이름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게 될 뿐이었다.

" 정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저도 더 이상은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가신은 아무도 없는 허공에 대고 굳게 다짐의 말을 내뱉은 후 조금전 적수가

했던 것처럼 공간을 여는 주문을 외웠다.

==============================================================

동방불패를 다 보고 이제는 신조협려 (총22편)을 보고 있습니다. ^^;

아침일찍 일도 나가야 하고, 글도 써야하고, 이제는 번역까지... 힘든 나날이지

만 나날이 나날이 잠이 모자르지만 어떻게든 되겠죠.  이제 매일 연재가 깨져

버려서 슬픕니다. 정말 하루가 너무 빨리 지나가는 요즘. 아..졸려...

[번  호] 7470 / 7686      [등록일] 2000년 04월 09일 22:06      Page : 1 / 10

[등록자] 까망포키         [조  회] 79 건

[제  목] [흑룡의 숲 2부] 연(緣)... - 36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