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흑룡의 숲 제 2부 >
연(緣)...
제 12장. 腔(깊어지는 시간)
二.
" 혹시 어디가 아픈 것은 아닌가요....?"
리시엔은 이마에 손을 올린 채 눈을 감고있는 카이엔을 보며 걱정스러운 음성
으로 물었다. 카이엔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답하지 않는다고 해도
카이엔은 한 눈에 보기에 얼굴빛이 창백한 것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모습
을 하고 있었다.
" 급한대로 잠시 몸을 눕히는 것이 좋을 듯해요. 제가 옆에 있을테니 잠시
눈이라도 붙이세요."
" ......그만둬..."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 소리에 담긴 것은 지금까지와 같은 담담함이 아니었다.
날카롭게 솟아있는 칼날처럼 싸늘함을 품은 소리. 리시엔은 마음 속으로 놀람
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순수하고 깊은 눈을 가졌다고만 여겨왔던 카
이엔이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일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 일면이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성질의 것이라는 사실에.
" .......방금...?"
" 그만두라고......"
리시엔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카이엔이 이런 말을 하는지. 항상 많은 말
을 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에게 따스한 미소로 답하던 카이엔이 아니었던가. 인
간임에도 불구하고 여느 용족들보다 더 깊은 눈동자를 가진 그가 아니었던가.
" 혹시..... 제가 있어서 불편한 것인가요...?"
한참동안 카이엔의 숙인 뒷모습을 응시하던 리시엔은 작게 사그러든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카이엔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동안 이어진 숨막힐 정도의 적막.
" 돌아가요......"
한참이 시간이 더 지나고 나서야 카이엔은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결코 리시엔이 바라던 것이 아니었다.
' 어째서........'
리시엔은 입술을 달삭였다. 말로 내뱉고 싶었지만 내뱉지 못한채 그저 입 속
으로 맴도는 말.
' 그래요. 지금은 그저.....'
리시엔은 자신에게 등을 내보인 채 움직이지 않는 카이엔을 향해 환하게 미소
지어보였다. 결코 그는 보지 못할테지만 아직 자신이 천계를 떠나왔다는 것을
이야기 하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지금의 카이엔이 어딘가 이상한 태도를 보이
고 있기는 하지만 결코 이것이 다는 아니다. 마지막은 아니다. 리시엔은 두 번
다시 자신의 감정을 속이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얼마간의 시간이 흐
르지 않은 과거의 일이었음에도 자신이 그토록 마음 깊숙히에 담아왔다고 여
겼던 오라버니 판유에 대한 감정은 어느새 사그러 들고 지금 리시엔의 가슴을
채우고 있는 것은 오직 카이엔이 전부였다. 자기 자신조차 이런 감정의 변화
를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어째서 자신은 이런식으로 용족과 인연이 닿아있는 것일까. 카이엔은 비록 고
개를 돌리지 않았지만 리시엔의 발걸음이 점점 멀어져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
다. 닿는 듯 닿지 않는 듯 조용한 걸음 소리를 들으며 카이엔은 허탈하게 웃
었다.
그녀가 가진 피가 자신과 같은 백룡의 것이기에 이런 감정이 드는 것일까? 아
니면, 용족의 피가 곁에 있는 것 만으로도 자신은 또 다시 갈증을 느끼는 것
일까.
리시엔의 몸에서 풍겨나오는 그녀 특유의 향취는 카이엔의 마음에 무수한 파
문을 만들어냈다. 오랜 과거에도 느끼지 못했던 마음의 움직임을 그녀는 단
한번의 만남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인간으로서 살아왔던 수십년의 시간들 속
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격렬하고도 격렬한 감정의 흐름.
천오의 비웃음에 담긴 의미를 카이엔은 이해하고 있었다. 교룡이라는 결코 죽
음으로도 벗어나지 못할 굴레속의 자신이 가지기에는 너무나도 사치스러운 감
정이라는 것을.
' 하...... 리시엔.....'
카이엔은 마음속으로 작게 그녀의 이름을 되뇌었다.
어째서 용족인 그녀는 자신에게 다가선 것일까. 분명 용족들은 인간과의 접근
을 꺼려한다. 그러하기에 자신과 같은 교룡의 존재가 부정당하는 것이다. 하지
만 그녀는 어째서 그런 모든 사실을 접어둔 채 자신에게 말을 걸고, 미소를
보여주는 것일까. 자신이 교룡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그녀의 눈
에 인간으로 비치고 있다면 용족으로서 당연히 지금과 같은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 백룡족......"
카이엔은 혼란 스러운 정신과 끊임없이 자신에게 갈증을 풀어줄 것을 요구하
는 몸의 욕구를 애써 무시하며 중얼거렸다. 자신의 어머니가 속해있는, 그리고
자신에게 다가선 여인 리시엔이 속해있는 바람의 용. 백룡이라는 이름을.
혹시 그녀라면, 리시엔이라면 자신의 어머니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카이엔
은 처음 리시엔이 백룡족이라는 사실을 알았을때부터 마음 속에서 자신을 꺼
내주길 바라던 질문을 이제서야 떠올렸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결코 묻지 않을 것이다. 설령 리시엔이 어머니와 아는 사
이라고 해도. 카이엔은 절대 묻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리시엔을 두 번 다시는
만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리시엔도 언젠가는 자
신이 교룡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지금 그녀가 자신에
게 품고 있는 호감은 금새 물거품 처럼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 어느 누구도
교룡을 진심으로 대하는 이는 없을 것이 분명했으므로.
' 어서 본래의 나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지. 끊임없이 다른이의 생기를 탐욕
스럽게 빨아들이는 교룡의 본성으로... 피빛을 즐기는 잔악한 교룡의 본성으
로.....'
카이엔은 그렇게 생각하며 싸늘하게 웃었다. 마치 천오의 그것처럼.
* * *
[ 개문(開門) 풍(風)! ]
카이엔은 여느때보다 더 강한 힘으로 눈 앞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없애갔
다. 자신의 주위에는 접근 조차 할 수없을 만큼 나약한 인간들. 한때는 자신이
저 속에 속해있다고 믿었고, 그러했기에 보통의 인간과 다른 자신의 모습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 속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자신은 더 이상 나약
한 존재도, 짧은 생명을 가진 존재도 아니다.
붉은색의 피빛 바람이 주위를 가득 채웠다. 비릿한 피의 향역시 자욱한 안개
처럼 주위에 퍼져갔다.
" 하....하하..."
카이엔은 갑자기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 없었다. 가슴에 가득 쌓인 무언
가가 일시에 터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통쾌함이 아닌
무언가 사실과 어긋나고 있다는 느낌. 마치 울분과도 같은 감정이었다.
" 어서 도망쳐라!"
아직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자들은 크게 소리를 지르며 카이엔이 있는 곳에서
반대편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 괴물에게 목숨을 잃을 수는 없다!!"
" 괴물......괴물이라....."
카이엔은 작게 되뇌이며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주문을 불
러냈다. 언제나처럼 단 한번에 모든 것을 없애기 위해서. 자신의 눈 앞에 보이
는 것은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니다. 그저 거친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일 뿐
이다. 붉은 색으로 곱게 물든 가을의 단풍잎에 지나지 않는다.
쌔앵.
소름끼치도록 커다란 바람 소리가 허공을 가르며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와 동
시에 눈 앞에 존재하던 모든 것들이 붉은 색으로 바뀌었다. 바람을 타고 흐르
는 붉고도 붉은 안개, 지워지지 않을만큼 진한 향기가 대기를 수놓았다.
" 크윽!"
거친 비명소리가 피의 안개를 헤치고 들려왔다. 마치 카이엔에게 책망의 말을
던지듯이.
" 모두 사라져버려....."
카이엔은 작게 읊조렸다. 자신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희미하게.
' 어디가 아픈 것은 아닌가요?'
걱정스럽게 울펴퍼지던 부드러운 음성. 순간적으로 격한 비명을 가르며 들려
온 리시엔의 음성.
" 아니야!"
카이엔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환청에 불과할 지라도 그녀의 존재가 자신에게 끼치는 영향은 조금씩 커져가
고 있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카이엔이었기에 그는 더더욱 리시엔의 존재를
부정했다.
결코 만나서는 안되는, 이어져서는 안되는 인연이라고. 그렇게 계속 주문처럼
되뇌고 또 되뇌었다.
그리고 그런 카이엔의 격한 감정은 입술을 통해 공격 주문으로 변화하여 눈
앞의 모든 것들을 베고 있었다.
[번 호] 7471 / 7686 [등록일] 2000년 04월 09일 22:06 Page : 1 / 9
[등록자] 까망포키 [조 회] 84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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