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룡의 숲-107화 (107/130)

< 흑룡의 숲 제 2부 >

연(緣)...

제 13장. 鐄(울림)

二.

" 마셔라."

카이엔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올렸다.

커다란 잔 속에 담긴 액체는 비릿하게  코끝을 찌르는 향기를 품고 있

었다. 이제는 가장 익숙하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로 익숙하지만 결

코 아무렇지 않게 넘겨버릴 수 없는 향기.

" ......이건..."

요희는 눈꼬리를 길게 틀어올리며 웃었다.

" 널 위해서다. 내 마음에 들었으니 당연한 일이지."

카이엔이 망설이며 손을 내밀지 않자 요희는 싸늘하게 웃었다.

" 이걸 마시지 않으면 앞으로도 네 몸이  죽지 않는 한 명계에 적응

할 수 없을 것이다. 과거에는 고통을 덜기 위해 이것을  주었지만 살아

있는 자의 몸으로 이곳에 머물기 위해서는 이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요희는 억지로 카이엔의 손에 잔을 쥐어주었다.

" 어서 마셔라. 명령이다."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여 그것을 감싸쥐자  싸늘하게 식어있는 잔을 타

고 아직 온기를 간직하고 있는 붉은  색의 액체가 손바닥에 그 감촉을

전해주었다.

카이엔은 거부할 수 없는 자신이  싫었다. 어떤 위협과 고통이  있다고

해도 자신의 의지로 거부한다면 지금과같이 명계에 살고  있지도, 명령

에 따라 인간들의 싸움에 관여해 무수한 살육을 했을 리가  없다. 그러

나 후회해봤자 이미 일어난 현실이 달리지지는 않는다. 자신은  교룡이

며, 두 손으로 무수한 인간들의 목숨을 빼았았다.

" .......감사 합니다....."

카이엔은 억지로 입술을 움직였다. 그리고 천천히 오른손에 들린  잔을

입가로 옮겼다.

아직 마시지도 않았는데 잔에서부터 풍겨나오는 혈향은 카이엔의 머리

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온몸에 퍼져나가는 비릿한 향기. 손끝부터 발끝

까지 구석구석 파고드는 음습한 기운.  이제 자신의 삶을 채우는  것은

이 붉은 빛뿐인 것일까. 타인의 피로 자신을 채우고 그것이  없으면 살

아갈 수 없는.

" 네 몸이 이곳에 완벽하게 적응할때까지 매일 이곳에 오도록 해라."

간신히 피의 역한 내음에  견디며 한잔을 다  비우자 요희는 냉소적인

웃음을 피어올리며 말했다.

" 돌아가라."

" 네...."

카이엔이 고개를 숙여 보이며 잔을 내려놓고 몸을 돌리자 요희는 순식

간에 얼굴에 떠올리고 있던 표정을 지워버렸다.

" 넌 그와 닮았어........"

그리고 그녀의 입가에서 새어나오는 알 수 없는 말.

" 그러니 그냥 내버려두지 않아......"

한동안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요희는 의자에 앉았다. 붉은 빛을 내는 홍

화목을 깎아 만든 그  의자는 오랜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처음과

변함없이 진한 붉은 빛을 띄고 있었다.

" 카이엔을 잘 살펴라.  분명 하계에서 무슨일인가가  있었던 모양이

니.... 내 눈을 피할 수는 없어..."

" 알겠습니다."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여러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답했다.

' 시간은 무의미하지.....'

요희는 또 다시 입술을 틀어올리며 웃음 지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그 모습.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이미 어디에도 존재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선명하게 자신의  뇌리를 점령하고 있는 하나

의 영상. 분명 수천년의 세월동안 혼자 떠올리고 마음을 준  것은 자신

혼자일 것이다. 그는 그것도 알지 못한채  원래의 장소로 돌아갔고, 자

신의 수명을 다 채운 후 죽었다. 자신과의 인연은 그저 한 순간의 악연

이라고 생각한 채. 그러나 요희는 잊지  못했다. 수천년의 시간 속에서

단 한순간에 불과한,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었다고 할지라도  기억하고

있었다.

' 절대 그냥 내버려두지 않아........'

*            *            *

대체 어디로 모습을 간춘 것일까. 벌싸 하계로 내려와 그의  모습을 찾

은 것 만도 수십여일. 아무리 하계가 넓다고 해도 그의  기운을 완벽히

감출 수는 없는 법이다. 더군다나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오랜 수명동안

이 좁은 곳에 몸을 묻고 살아갈 수는 없다. 인간들은  인간과 모여살고

어울리며 영수족은 영수족끼리 천상인들은  천상인들끼리 어울리는 것

이 당연한 이치. 서로 다른  성질을 지닌 존재가 융합되어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 결국 날 계속 피하고 있는건가?'

가신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을 경험하고 당혹해하

고 있었다.

처음에는 적수가 자신을 피해  모습을 감춘 것이  단순한 장난을 품은

행동이라고 여겼지만 점차 시간이 흘러가고 적수의 모습을 찾을 수 없

자 마음에 먹구름이 드리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 멍청하긴....'

한숨을 내쉬며 숲 속을 응시하던 가신은  단지 보통때와 다른 일이 생

겼다고해서 금새 마음이 약해지는 자신을 꾸짖었다. 겨우 이런 일로 실

망한다면 자신은 차기 기린족의 장을 보필하는 보좌가 될 자격이 없다.

어떤 생각으로 지금까지  환계에 머물러왔는데 이제와서  쉽게 실망할

수는 없는 법이다. 비록 자신의 몸에 흐르는 피의 반은  용족의 것이지

만 자신은 어린 시절부터 기린족의 일원이라고 생각해온 터였다.

' 마음을 가라앉히고 적수님의 기운을 찾아보자.'

가신은 자신을 타이르며 숲 속으로 발을 내딛었다. 환계에서도  적수가

가장 즐겨 찾던 곳은 인적이 드문 장소였다. 다른 곳에 비해 조용한 환

계. 그 중에서도 기린족의 땅이었지만 적수는 아무도 없는 적막한 공간

에서만이 자유로울수 있다고 여겼기에 가끔이지만 깊고 고요한 장소를

찾았다는 것을 가신은 알고 있었다.

' 혹시 적수님이.....?'

걸음을 옮긴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가신은  나무 기둥에 몸을 기댄채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인영을 발견했다. 인간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깊은

장소에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기에  그는 더 깊이  생각하지도 않은 채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 카이엔?"

리시엔은 숲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누군가의  형상을 보고 반가움을 담

은 목소리로 외쳤다.  들려오지 않는 대답.  그러나 카이엔은 최소한의

말 이외에는 하지 않았기에 리시엔은 실망하지 않았다.

" 왜 이렇게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았죠? 몸이라도 아팠었나요?"

" 아니....."

자신이 마주한 존재가  적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가신은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평소의 자신이었다면  상대를

자세히 확인하지도 않고 이렇게 무턱대고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을텐

데...

처음 숲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그것이 적수의  것과는 전혀 다른

여인의 것임을 알았음에도 무턱대고  모습을 드러내다니. 마음이  급한

것은 사실이었다.

" 죄송합니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리시엔이었다. 반가운 감정에 낯선 상대에게 말을

걸었던 것이다. 자세히  살폈다면 카이엔보다 훨씬  키가 크고, 몸집이

좋으며 머리카락 역시 적색을 띄고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을 텐

데 마음이 너무 들떠있었던 모양이었다.

" 저야말로.... 그런데 용족...이로군요."

" 네. 그래요... 그쪽도 다른 기운이 풍기는데...혹시..?"

리시엔은 망설였다.

상대의 외모는 용족이라기엔 풍기는  분위기가 달랐고, 다른  영수족은

백호족 이외에는 아직 구분할 수 없었기에 대답을 망설이고 있는 것이

다.

가신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웃었다. 그녀의 망설임이 무엇에서 기인했는

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저는 기린족과 용족의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지금은 기린족 황자

님의 보좌를 맡고 있습니다."

" 아... 이런  하계에서 영수족을  만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어

요."

" 저도 그렇습니다. 저는 가신이라 합니다."

" 저는 백룡족 리시엔이에요."

가신은 마음속에 가득 들어차 있던  먹구름이 조금이나마 풀어지는 것

을 느꼈다. 완벽하게 같은 일족은 아니라고 해도 비슷한 존재를 만났다

는 것은 분명 마음이 놓이는 일이었다.

" 혹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괜히 제가 모습을 드러내서

폐가 되는 것은 아닌지..."

" 아니에요. 확실히 만날 약속을  한 것은 아니지만 늘  이 장소에서

만났었기에 기다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 상대는 마음을 두고 있는 분인가 보군요?"

가신은 리시엔의 눈동자에 담긴 부드러움을 읽고 그렇게 물었다.

" 네....."

리시엔은 답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 아. 그런데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리시엔과 몇마디의 이야기를 나누던 가신은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을

떠올리고는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그녀라면 자신보다 하계에 오래  몸

담고 있었으니 마주쳤을 수도 있는 일이기에.

" 혹시 제가 찾고 있는 분을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기린족 황가의

특징은 알고 계시겠지만 푸른 눈동자를  가졌고 황금의 머리카락을 하

고 있습니다. 눈에 띄는 모습이니 혹시 보셨다면 기억하고 계시리라 믿

습니다."

리시엔은 절박한 그의 얼굴을 보며 기대에 부합하지 못하는 것에 미안

함을 느꼈다. 이곳에 오랫동안 머물렀지만 자신은 카이엔 이외에는  어

떤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 죄송하지만 그런 분은 본적이 없어요. 가신님의 말씀대로  그런 외

모를 지니신 분이라면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겠지요."

" 그렇습니까..."

가신이 작게 한숨짓자 리시엔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 저는 앞으로도 계속 이곳에  머물 생각이니 혹시라도 그분을 뵙는

다면 당신의 일을 말씀드리겠어요."

" 아닙니다. 그분이 이곳에 나타난다면 이곳에 붙잡아 주실  수 있겠

습니까? 주위의 풍광을  둘러보는 게 어떠냐고  권유하는 것도 좋겠지

요."

리시엔은 가신의 말과 표정을 통해 그가 조금 곤란한 상황에 처해있다

는 것을 알았다.

" 네.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할께요. 이런 곳에서 영수족을 만난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니."

리시엔은 왼손에 쥐고 있던 나무 조각상을 버릇처럼 매만지며 작게 미

소지었다.

[번  호] 7678 / 7686      [등록일] 2000년 04월 15일 00:09      Page : 1 / 9

[등록자] 까망포키         [조  회] 17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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