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흑룡의 숲 제 2부 >
연(緣)...
제 13장. 鐄(울림)
二.
" 마셔라."
카이엔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올렸다.
커다란 잔 속에 담긴 액체는 비릿하게 코끝을 찌르는 향기를 품고 있
었다. 이제는 가장 익숙하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로 익숙하지만 결
코 아무렇지 않게 넘겨버릴 수 없는 향기.
" ......이건..."
요희는 눈꼬리를 길게 틀어올리며 웃었다.
" 널 위해서다. 내 마음에 들었으니 당연한 일이지."
카이엔이 망설이며 손을 내밀지 않자 요희는 싸늘하게 웃었다.
" 이걸 마시지 않으면 앞으로도 네 몸이 죽지 않는 한 명계에 적응
할 수 없을 것이다. 과거에는 고통을 덜기 위해 이것을 주었지만 살아
있는 자의 몸으로 이곳에 머물기 위해서는 이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요희는 억지로 카이엔의 손에 잔을 쥐어주었다.
" 어서 마셔라. 명령이다."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여 그것을 감싸쥐자 싸늘하게 식어있는 잔을 타
고 아직 온기를 간직하고 있는 붉은 색의 액체가 손바닥에 그 감촉을
전해주었다.
카이엔은 거부할 수 없는 자신이 싫었다. 어떤 위협과 고통이 있다고
해도 자신의 의지로 거부한다면 지금과같이 명계에 살고 있지도, 명령
에 따라 인간들의 싸움에 관여해 무수한 살육을 했을 리가 없다. 그러
나 후회해봤자 이미 일어난 현실이 달리지지는 않는다. 자신은 교룡이
며, 두 손으로 무수한 인간들의 목숨을 빼았았다.
" .......감사 합니다....."
카이엔은 억지로 입술을 움직였다. 그리고 천천히 오른손에 들린 잔을
입가로 옮겼다.
아직 마시지도 않았는데 잔에서부터 풍겨나오는 혈향은 카이엔의 머리
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온몸에 퍼져나가는 비릿한 향기. 손끝부터 발끝
까지 구석구석 파고드는 음습한 기운. 이제 자신의 삶을 채우는 것은
이 붉은 빛뿐인 것일까. 타인의 피로 자신을 채우고 그것이 없으면 살
아갈 수 없는.
" 네 몸이 이곳에 완벽하게 적응할때까지 매일 이곳에 오도록 해라."
간신히 피의 역한 내음에 견디며 한잔을 다 비우자 요희는 냉소적인
웃음을 피어올리며 말했다.
" 돌아가라."
" 네...."
카이엔이 고개를 숙여 보이며 잔을 내려놓고 몸을 돌리자 요희는 순식
간에 얼굴에 떠올리고 있던 표정을 지워버렸다.
" 넌 그와 닮았어........"
그리고 그녀의 입가에서 새어나오는 알 수 없는 말.
" 그러니 그냥 내버려두지 않아......"
한동안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요희는 의자에 앉았다. 붉은 빛을 내는 홍
화목을 깎아 만든 그 의자는 오랜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처음과
변함없이 진한 붉은 빛을 띄고 있었다.
" 카이엔을 잘 살펴라. 분명 하계에서 무슨일인가가 있었던 모양이
니.... 내 눈을 피할 수는 없어..."
" 알겠습니다."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여러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답했다.
' 시간은 무의미하지.....'
요희는 또 다시 입술을 틀어올리며 웃음 지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그 모습.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이미 어디에도 존재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선명하게 자신의 뇌리를 점령하고 있는 하나
의 영상. 분명 수천년의 세월동안 혼자 떠올리고 마음을 준 것은 자신
혼자일 것이다. 그는 그것도 알지 못한채 원래의 장소로 돌아갔고, 자
신의 수명을 다 채운 후 죽었다. 자신과의 인연은 그저 한 순간의 악연
이라고 생각한 채. 그러나 요희는 잊지 못했다. 수천년의 시간 속에서
단 한순간에 불과한,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었다고 할지라도 기억하고
있었다.
' 절대 그냥 내버려두지 않아........'
* * *
대체 어디로 모습을 간춘 것일까. 벌싸 하계로 내려와 그의 모습을 찾
은 것 만도 수십여일. 아무리 하계가 넓다고 해도 그의 기운을 완벽히
감출 수는 없는 법이다. 더군다나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오랜 수명동안
이 좁은 곳에 몸을 묻고 살아갈 수는 없다. 인간들은 인간과 모여살고
어울리며 영수족은 영수족끼리 천상인들은 천상인들끼리 어울리는 것
이 당연한 이치. 서로 다른 성질을 지닌 존재가 융합되어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 결국 날 계속 피하고 있는건가?'
가신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을 경험하고 당혹해하
고 있었다.
처음에는 적수가 자신을 피해 모습을 감춘 것이 단순한 장난을 품은
행동이라고 여겼지만 점차 시간이 흘러가고 적수의 모습을 찾을 수 없
자 마음에 먹구름이 드리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 멍청하긴....'
한숨을 내쉬며 숲 속을 응시하던 가신은 단지 보통때와 다른 일이 생
겼다고해서 금새 마음이 약해지는 자신을 꾸짖었다. 겨우 이런 일로 실
망한다면 자신은 차기 기린족의 장을 보필하는 보좌가 될 자격이 없다.
어떤 생각으로 지금까지 환계에 머물러왔는데 이제와서 쉽게 실망할
수는 없는 법이다. 비록 자신의 몸에 흐르는 피의 반은 용족의 것이지
만 자신은 어린 시절부터 기린족의 일원이라고 생각해온 터였다.
' 마음을 가라앉히고 적수님의 기운을 찾아보자.'
가신은 자신을 타이르며 숲 속으로 발을 내딛었다. 환계에서도 적수가
가장 즐겨 찾던 곳은 인적이 드문 장소였다. 다른 곳에 비해 조용한 환
계. 그 중에서도 기린족의 땅이었지만 적수는 아무도 없는 적막한 공간
에서만이 자유로울수 있다고 여겼기에 가끔이지만 깊고 고요한 장소를
찾았다는 것을 가신은 알고 있었다.
' 혹시 적수님이.....?'
걸음을 옮긴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가신은 나무 기둥에 몸을 기댄채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인영을 발견했다. 인간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깊은
장소에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기에 그는 더 깊이 생각하지도 않은 채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 카이엔?"
리시엔은 숲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누군가의 형상을 보고 반가움을 담
은 목소리로 외쳤다. 들려오지 않는 대답. 그러나 카이엔은 최소한의
말 이외에는 하지 않았기에 리시엔은 실망하지 않았다.
" 왜 이렇게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았죠? 몸이라도 아팠었나요?"
" 아니....."
자신이 마주한 존재가 적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가신은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평소의 자신이었다면 상대를
자세히 확인하지도 않고 이렇게 무턱대고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을텐
데...
처음 숲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그것이 적수의 것과는 전혀 다른
여인의 것임을 알았음에도 무턱대고 모습을 드러내다니. 마음이 급한
것은 사실이었다.
" 죄송합니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리시엔이었다. 반가운 감정에 낯선 상대에게 말을
걸었던 것이다. 자세히 살폈다면 카이엔보다 훨씬 키가 크고, 몸집이
좋으며 머리카락 역시 적색을 띄고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을 텐
데 마음이 너무 들떠있었던 모양이었다.
" 저야말로.... 그런데 용족...이로군요."
" 네. 그래요... 그쪽도 다른 기운이 풍기는데...혹시..?"
리시엔은 망설였다.
상대의 외모는 용족이라기엔 풍기는 분위기가 달랐고, 다른 영수족은
백호족 이외에는 아직 구분할 수 없었기에 대답을 망설이고 있는 것이
다.
가신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웃었다. 그녀의 망설임이 무엇에서 기인했는
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저는 기린족과 용족의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지금은 기린족 황자
님의 보좌를 맡고 있습니다."
" 아... 이런 하계에서 영수족을 만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어
요."
" 저도 그렇습니다. 저는 가신이라 합니다."
" 저는 백룡족 리시엔이에요."
가신은 마음속에 가득 들어차 있던 먹구름이 조금이나마 풀어지는 것
을 느꼈다. 완벽하게 같은 일족은 아니라고 해도 비슷한 존재를 만났다
는 것은 분명 마음이 놓이는 일이었다.
" 혹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괜히 제가 모습을 드러내서
폐가 되는 것은 아닌지..."
" 아니에요. 확실히 만날 약속을 한 것은 아니지만 늘 이 장소에서
만났었기에 기다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 상대는 마음을 두고 있는 분인가 보군요?"
가신은 리시엔의 눈동자에 담긴 부드러움을 읽고 그렇게 물었다.
" 네....."
리시엔은 답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 아. 그런데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리시엔과 몇마디의 이야기를 나누던 가신은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을
떠올리고는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그녀라면 자신보다 하계에 오래 몸
담고 있었으니 마주쳤을 수도 있는 일이기에.
" 혹시 제가 찾고 있는 분을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기린족 황가의
특징은 알고 계시겠지만 푸른 눈동자를 가졌고 황금의 머리카락을 하
고 있습니다. 눈에 띄는 모습이니 혹시 보셨다면 기억하고 계시리라 믿
습니다."
리시엔은 절박한 그의 얼굴을 보며 기대에 부합하지 못하는 것에 미안
함을 느꼈다. 이곳에 오랫동안 머물렀지만 자신은 카이엔 이외에는 어
떤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 죄송하지만 그런 분은 본적이 없어요. 가신님의 말씀대로 그런 외
모를 지니신 분이라면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겠지요."
" 그렇습니까..."
가신이 작게 한숨짓자 리시엔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 저는 앞으로도 계속 이곳에 머물 생각이니 혹시라도 그분을 뵙는
다면 당신의 일을 말씀드리겠어요."
" 아닙니다. 그분이 이곳에 나타난다면 이곳에 붙잡아 주실 수 있겠
습니까? 주위의 풍광을 둘러보는 게 어떠냐고 권유하는 것도 좋겠지
요."
리시엔은 가신의 말과 표정을 통해 그가 조금 곤란한 상황에 처해있다
는 것을 알았다.
" 네.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할께요. 이런 곳에서 영수족을 만난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니."
리시엔은 왼손에 쥐고 있던 나무 조각상을 버릇처럼 매만지며 작게 미
소지었다.
[번 호] 7678 / 7686 [등록일] 2000년 04월 15일 00:09 Page : 1 / 9
[등록자] 까망포키 [조 회] 17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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