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룡의 숲-108화 (108/130)

< 흑룡의 숲 제 2부 >

연(緣)...

제 13장. 鐄(울림)

三.

갑자기 며칠동안 카이엔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약속을  했

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 너무 성급했었나.....'

리시엔은 진작 그가 사는 곳이 어디인지 물어두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비록 자신이 인간인 카이엔과  만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사실을 그의

다른 친우나 친지들에게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리 서로가  아무렇

지 않게 여기고 있다해도 자신은 엄연히 용족이다. 인간의 눈으로는 결

코 제대로 바라보지 못할 다른 세상의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알았을 때 인간들이 보일 반응을, 그로  인해 자

신이 어떤 마음을 갖게 될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기에 리시엔은 그저

카이엔이 모습을 보이기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러나 영문조차 모른 채 리시엔은 수일간을 보내야했다. 왜 그가 모습

을 보이지 않는지 가슴 에 가득 찬 의문  때문에 몇 번이고 인간의 마

을로 몸을 옮기려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때마다 자신을 막은  것은

자신과 그가 속한 세상이 너무나도 다르다는 현실이었다.

" 카이엔.....어째서 돌아오지 않죠?"

대답이 들려올 리는 없었지만 그래도 리시엔은 조용히 기다렸다.

숲을 스쳐 지나가는 친숙한 바람의  소리가 바람이 전해주는 싱그러운

숲의 향기가 오늘따라 더욱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은 분명 자신의 마음

이 비어있는 탓이리라.

" 나에 비해 당신의 시간이 짧은 것을 원망해야 할까요?"

왜 하필 카이엔 이었을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마음을 가

득 채우고 있던 것은 오라버니 판유의 영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 한순간의 열기와도 같이 금새 사그러 들었고 리시엔

의 전부를 이끄는 것은 카이엔이라는 인간 남자의 존재였다.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겨나리라고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음에도.

' 이런 것이 인연이라는 것일까.....'

리시엔은 작게 미소지었다.

천년이라는 시간을 살아가는 용족인  자신. 인간들이 생각하기에는  그

길이조차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긴 시간이다.  훼

이라는 흑룡족의 오래된 자가 두 번의  천년을 보내는 동안 마음에 담

아두었던 존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들었을  때 리시엔은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비교도 할 수 없는  존재인 인간을. 단지 짧은 순간

을 살아가는 것이 고작인 인간을 그토록 오랜 시간동안 가슴속에 담아

둘 수 있는지. 그러나 지금은 알 수 있다. 극히 짧은 한 순간의 인연임

에도 얼마나 깊숙이 자국을 새길 수 있는지. 그 인연  앞에서는 시간도

종족도 그 무엇도 방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맞는 옷처럼, 수만 번을 먹어도 질리지 않는 과일처럼 늘 함께 있고

싶은, 그리고 늘 함께여야 하는 존재.

' 기다려야지.....'

리시엔은 자신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없는 한적한 숲으로 시선을 돌렸

다. 기다린다면 분명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에게는 하계에서 수천

번의 계절을 보내도 남을 만한 시간이 있지 않은가.

*            *            *

" 결국에는 같은 결말을 맞이하게 되겠지."

그녀의 웃음은 힘없이 대기를 향해  퍼져나갔다. 오랜 시간 전  자신이

저질렀던 과오. 그러나 자신은 결코 그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다시 그

시간으로 되돌아간다고 하더라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 그 아이 역시 나의 피를 이었기 때문에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것일

까...'

늘 밝은 웃음을 짓던 딸 리시엔 만은 먹구름이 끼지 않은 표정을 가지

길 원했다. 다른 이들이 보는 자신의 미소가 결코 진심이 담긴 것이 아

니듯, 그러나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듯이. 그런  거짓된 표정을 가지지

않기를 바랬다. 그러나 인연이라는 것은, 더욱이 그것이 짧은 인연일수

록 새겨진 자국은 깊고 깊어서 지워지지 않는 법이다. 자신  역시 과거

에는 그것을 알지 못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매일을 후회할 정도로 깊이

아주 깊이 깨닫고 있다.

" 이제 하계로 가서 살겠다고 했어요. 가끔씩은 돌아오겠지만 천계에

오는 일은 별로 없을 듯 해요."

그 날 자신에게 건넸던 리시엔의 말. 버릇처럼 굳어져 있었기에 얼굴에

다른 표정이 끼어 들지는 않았지만 시하라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그랬듯이 리시엔 역시 같은 길을 걷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으

므로. 그때 자신은 무엇이라 해야했을까. 화를  내며 다시는 그런 소리

를 하지 못하도록 엄하게 꾸짖어야 했을까. 인간과 용족은 건널  수 없

는 넓고도 깊은 강을 사이에 두고 있다고 서로의 존재는 상처만 될 뿐

이라고.

하지만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 남편이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이 무엇

을 했는지 알지 못했듯이 딸 리시엔 역시 알지 못한다. 아니, 알아서는

안 된다. 그 아이에게 자신의 행동은 큰 상처가 될 것이 분명하므로.

" 시하라...."

오랜만에 궁에서 돌아온 남편의 음성이었다. 처음 자신과 혼인을  하던

그 날과 한치의 변화도 가지지 않은 음성.

" 돌아오셨군요."

부드럽게 웃으며 남편을 맞이하자 그는  약간의 의아함을 담은 얼굴로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 리시엔이 보이지 않는군? 항상 당신의 곁에 있었는데."

" 그 아이도 이제 성년이에요. 늘 제 곁에 있으라는 법은 없죠."

조금 전까지 지어 보이던 착잡함이 금새 사라져 버렸기 때문인지 남편

리강은 그녀의 얼굴에 끼어 들었던 다른 감정을 읽지 못했다.

" 리강. 그 아이는 지금 하계에 있어요. 혼자 수행을 하고 싶다고 하

더군요. 몇 달간 하계의 이곳 저곳을 둘러보면서 지낸다고 했으니 걱정

마세요."

" 그런가.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나..."

리강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시하라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자신의 것과 비견될 정도로  하얀 피부. 그리고 지적이고

차분한 표정이 담긴 얼굴. 시하라와 리강은 전혀 피가 섞이지  않은 사

이였음에도 너무나 닮은 표정과 모습을 하고 있었다.

" 물론이에요. 아이는 금방 자라잖아요."

그러나 그런 닮은 모습과 달리 시하라는 리강에게서 깊은 감정을 느끼

지 못했다.

부부라는 무엇 보다 깊은 관계  속에서도 자신은 행복을 알지  못했다.

그러했기에 처음 그를 보았을 때 이미 남편이 있고, 한  아이의 어머니

라는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곁에 머물렀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성은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감정은 따라주지 않았다.

' 사과는 하지 않겠어요. 리강.'

시하라는 보다 깊이 그리고 따스하게 웃으며 리강의 손을 이끌었다.

" 오랜만에 돌아왔으니 산책이라도 함께  하는 것이 어때요? 황룡족

의 영토도 좋고, 청룡족의 영토도 좋아요."

" 그럴까."

리강 역시 시하라의 미소에 전염된 듯 미소지었다.

' 처음부터 이렇게 되리란 것을 알고  있었어요. 슬퍼하는 것은 언제

나 저 혼자일 테니까요.'

" 이번에는 백룡왕께서 고급 주문 사용자들의 증강을 언급하시는 바

람에 더욱 바쁜 일이 많았지."

리강은 시하라에게 자신의 일에 대해  이것저것 이야기 해주고 있었지

만 시하라의 귀에는 어떤 이야기도 제대로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의 마

음을 채운 것은 오랜 과거에 사라진 한 남자의 모습이었다.  결코 인간

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당당한 태도를 지니고 있던 한 남자를. 비

록 인간에게 주어진 짧은 생의 삼분지  밖에 살지 못한 남자였지만 그

시간동안 시하라는 자신이 누려온  수 백년의 세월보다  더 큰 기쁨을

맛보았다.

' 류선..... 지금 날 보고 있나요.....'

시하라의 미소는 더욱 깊어졌다. 그러나 그 미소가 향하는 곳은 남편의

얼굴이 아닌 먼 하늘이었다.

[번  호] 7534 / 7995      [등록일] 2000년 04월 15일 00:09      Page : 1 / 10

[등록자] 까망포키         [조  회] 125 건

[제  목] [흑룡의 숲 2부] 연(緣)... - 41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