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흑룡의 숲 제 2부 >
연(緣)...
제 13장. 鐄(울림)
五.
" 후. 역시 이번에는 내 생각이 맞았군."
적수는 수십 일이 지나도록 자신을 찾지 못하고 있는 가신이 어떤 얼
굴을 하고 있을지 떠올리며 웃었다. 분명 보지 않아도 초조하고 걱정으
로 가득 찬 표정을 짓고 있으리라.
혼자 둘러본 하계의 모습. 예전에는 내려왔어도 제대로 가보지 못했던
인간들의 마을과 맹수들이 살아가는 깊은 산 속의 동굴. 오랜 세월동안
스스로의 힘으로 움직여 온 강과 바다의 풍경을 적수는 마음껏 음미했
다.
" 너무 괴롭히는 것도 황자로서의 태도가 아니지... 하지만..."
또 다시 적수는 빙글거리는 웃음을 지었다. 아직 자신이 성년식도 치르
지 않은 어린 아이였다면 지금과 같은 돌발적인 행동을 한다해도 이상
하게 여길 자는 없을 것이다. 어린 나이에는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다
스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힘 또한 불안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자신은 모든 이들에게 알려져 있는 기린족의 황자. 즉, 다음 기
린족의 장이 될 존재이다. 나이 역시 삼백을 넘겼기에 대부분의 소양은
갖추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지금까지 단 한번도 자신의 책무나 예의를
어긴 적이 없었다. 그런 자신이 갑작스레 이런 행동을 한 것에 늘 친구
처럼, 그리고 충직한 보좌로서 함께 있어온 가신은 적지 않은 놀라움을
느꼈으리라.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저 조용히 시간을 보내기
에는 자신의 몸속에 흐르는 피가 너무 뜨거웠다.
그럴 수만 있다면 기린족의 황자라는 자리를 그에 어울리는 가신에게
주고 싶을 정도로.
" 져주는 셈 치고 이곳에서 기다리기로 하지. 언젠가는 이곳까지 찾
아올 테니...."
중얼거리며 적수는 그대로 서있던 장소에 주저 앉았다. 분명 나이많은
장로들이 보았다면 눈쌀을 찌푸렸을만한 행동이었지만 지금 이곳에는
자신 혼자뿐이었다.
" 카이엔...."
너무나도 창백한 얼굴을 한 채 금방이라도 눈을 감을 것 처럼 미약한
숨을 내쉬고 있는 카이엔을 부축하고 있던 리시엔은 애써 눈물을 삼키
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너무나도 오랜만에 만났기에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 같았는데 막상 한
달여만에 얼굴을 마주 대한 카이엔은 자신과 헤어졌던 그날과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 무슨 일이 생겼던 것인가요... 그랬나요?'
리시엔은 자신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은 카이엔을 원망하기 보다는
자신이 함께 할 수 없는 시간동안 카이엔이 힘든 일을 겪었을지 모른
다는 사실에 가슴이 너무나도 아파왔다.
" ......리...시엔.."
카이엔은 주의깊게 듣지 않으면 알아챌 수 없을 만큼 미약한 음성으로
리시엔을 불렀다.
천오와 이유모를 싸움을 한 직후. 카이엔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지치고 다쳤다. 과연 수천년을 살아온 존재답게 천오의
힘은 자신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
보다 그는 상대방의 움직임을 읽고 있었다. 어쩌면 카이엔 자신이 너무
나도 미숙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랬기에 변변히 제대로 반격조차
하지 못한 채 고스란히 천오가 바라는 대로 심한 부상을 당한 것이다.
사실 그가 바란 것은 카이엔의 죽음이었겠지만.
숨을 몰아쉬며 카이엔은 생각했다. 이대로 자신의 처소로 돌아가서 몸
을 눕히기에는 너무나도 억울하다고. 비록 자신의 선택으로 명계에 몸
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마음만은 아직 하계에 머물고 있었다.
더욱이 자신에게는 기다려주는 존재가 있지 않은가. 비록 한 번 그녀와
의 만남이 어긋나기는 했지만 아직은 믿음이 남아있지 않은가.
그렇게 결심한 카이엔은 거의 기다시피 몸을 움직여 가장 하계와 통하
는 문을 열기 쉬운 장소로 다가갔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정신을 부여잡고 주문을 외웠다.
" 카이엔......!"
약속하지 않았음에도 그 곳에 앉아있던 리시엔의 모습. 언제나처럼 새
하얀 치파오를 걸친 채 환하게 웃는 그녀. 그러나 비틀거리는 자신을
발견한 그녀의 얼굴은 곧 걱정스러움으로 메꾸어졌다.
" 리시엔...."
조금 전보다 더 정확한 발음으로 카이엔은 리시엔의 이름을 불렀다. 마
치 지금 부르지 않으면 다시는 그녀의 이름을 부를 기회가 없다는 듯
이.
" .....돌아갔을지도 모른다고...생각...했어.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
으니까...."
힘겹게 내뱉은 카이엔의 말에 리시엔은 피식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에
는 진한 슬픔이 담겨 있었다. 선명하게 모든 것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
는 눈동자로도 카이엔은 볼 수 있었다. 그녀가 애써 울음을 참아내고
있는 것을. 그녀의 눈동자에 맺힌 물기를.
" 무슨 소리를 하는 거에요...? 말했잖아요. 항상 이곳에 있겠다고...."
" .....그랬지......."
카이엔은 희미하게 웃었다.
" ........ㅋ.."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온 몸을 꿰뚫을 듯한 격통 때문에 허리를 구
부려야 했다. 감추려했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 고통스러운 표정. 금방
이라도 피를 토하며 눈을 감을 것 같은 창백함. 용족인 리시엔이 언제
그런 광경을 본 적이 있을까. 너무나도 고통스럽고 너무나도 슬펐다.
리시엔은 그 모습을 보고 더 이상 참지 못해 카이엔의 몸을 감싸 안았
다.
진작 이렇게 했어야 했다. 이것으로 카이엔이 느끼고 있을 고통이 반감
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자신이 가진 온기를 그에게 나누어줄 수는 있
지 않은가.
' 미안해요..... 미안해요... 카이엔...'
" 이제.....괜찮아..."
카이엔은 애써 크게 미소지으며 리시엔의 품에서 빠져나와 그녀의 어
깨에 손을 올렸다. 그 작은 동작 하나가 얼마나 많은 힘을 필요로 하는
지는 카이엔 본인 이외에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카이엔은 참았다. 리시엔에게 고통스러운 모습을 보임으로해서
슬픔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 몸이.... 나을 때 까지는.... 어떤 일이....있어도.."
" 괜찮으니까...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카이엔...."
" 나는...."
미약한 음성으로 카이엔이 말을 이으려 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 누군가의 커다란 음성이 두 사람의 말을 가로 막았
다.
" 여기에 있었군!"
적수는 얼마 전 자신과의 싸움에서 부상을 입고 달아났던 교룡을 발견
하고는 크게 소리쳤다.
" 오늘은 네 목숨을 받아가야겠다."
그러나 자신의 말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교룡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
았다. 옆에 있는 한 여인의 얼굴에 시선을 던진 채 마치 굳어진 것처럼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 어서 대답을 해라!"
적수는 반응 없는 상대방의 모습에 혹시 자신이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과 격전을 벌였던 교룡
은 저토록 차분한 태도를 지니지 않았었다. 눈동자를 가득 채우고 있던
광기와 온 몸에서 풍겨 나오는 죽음의 기운을 적수는 느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그때 느꼈던 어떤 기운과 태도조차 눈앞의 존재에게서
는 풍겨 나오지 않았다.
' 정말 내가 착각한 것인가....?'
분명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도 눈 앞의 둘은 인형
처럼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적수는 조심스러운 몸놀림으로 둘의 곁으로 다가서기 시작했다. 이곳에
서는 자신이 만났던 그 교룡인지 아닌지 확실하게 구분할 수 없었으므
로 가까운 곳으로 다가가서 확인을 하고 싶었다. 자신이 잘못된 행동을
한 것이라면 빨리 사과하고 이곳에서 떠나면 되는 것이고 자신의 눈이
틀림없다면 결판을 지어야한다. 비록 자신은 용족이 아니지만 교룡을
묵과할 수는 없다. 게다가 자신은 그 교룡이 행한 무차별적인 살상을
목격하지 않았던가.
" 카이엔.....!!"
그러나 적수가 둘의 곁으로 다가서 남자의 정체를 확인하기도 전에 날
카로운 여인의 비명이 울려퍼졌다. 그리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
던 남자의 몸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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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음주면 책이 나올텐데요.
출판본 제목은 연이 아닙니다. 한글자 제목은 안된다고 해서 출판사 쪽에서
교룡 카이엔이라고 해서 내기로 했어요. ^^;
썩 마음에 드는 제목은 아니지만 그래도 다른 제목은 생각이 안나는 바람에.
이달 안으로 완결까지 쓰기로 했는데... 허허. 잘 해야지...
이번달에는 또 은의 왕국 2부까지 시작하려는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죽어나는
달입니다. 어떻게든 되겠죠~ 배째...
[번 호] 7639 / 7995 [등록일] 2000년 04월 18일 00:13 Page : 1 / 12
[등록자] 까망포키 [조 회] 102 건
[제 목] [흑룡의 숲 2부] 연(緣)... - 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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