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룡의 숲-111화 (111/130)

< 흑룡의 숲 제 2부 >

연(緣)...

제 13장. 鐄(울림)

六.

리시엔은 망연하게 웃으며 카이엔을 감싸 안은 채 아무런 행동도 취하

지 않고 있었다. 그런 그녀 대신 행동을 개시한 쪽은 아무런 면식도 가

지지 않은 적수 쪽이었다.

" 아무래도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듯 하니 편안하게 쉬게 해 주는 게

좋겠습니다."

리시엔은 적수가 가까이 다가서 말을 걸자 그제서야 그의 존재를 눈치

챈 듯이 느릿하게 시선을 움직였다.

" 정확한 원인을 알기  전에는 함부로 약을  쓸 수도 없으니 우선은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눕혀 보살피도록 하십시오."

적수는 상대방이 용족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있었기 때문에 보통 다른

영수족을 대하듯이 정중하게 말을 건넸다.

" 카이엔....."

리시엔은 적수가 말하는 대로 움직였지만 아직 보통 때의 그녀로 되돌

아오지는 못했다. 마음 한구석이 무언가 커다란 덩어리로 가로막힌 듯,

머릿속에 안개가 낀 듯 불투명한 느낌.

침묵과도 같은 기다림 속에서 만난 카이엔이 아닌가. 그런데 어째서 이

런 모습으로 밖에 만날 수 없는 것일까. 항상 그의  안색이 창백하다고

느꼈지만 이런 식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해보지 못했는데.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인간과의 인연이..... 만남이 금지된 것은. 너무

나도 다른 시간의 차이 때문에 남는 것은 상처뿐이므로. 그  때문에 금

기라는 말로 그 관계를 끊으려 한 것일까.

무슨 일일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 카이엔...... 눈을....떠요....."

리시엔은 망연한 눈동자로 카이엔의 새하얀 얼굴을 내려다보며 중얼거

렸다.

처음에는 그저 자신이 알고 있는 교룡을 발견했다는 사실 때문에 흥분

해 있던 적수는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리시엔의 행동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용족

여인은

눈앞에 있는 카이엔이라는 남자와 깊은 인연을 가졌다는 것을. 다른 누

군가가 억지로 끊어버릴 수 없는 감정의 교류를 하고 있다는 것을.

지금으로서는 얼굴이외에 남자가 그때의 교룡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방

법은 없었다. 교룡으로서 만났던 그때의 어려 보이는 얼굴을 가진 남자

는 온몸에서 엄청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결코 좋은 느낌을  주지

못하는.

그러나 지금 자신의 눈앞에 창백한 안색으로 쓰러져 있는 존재는 다르

다.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것은 오직 미약한 생명의 기운뿐. 자신이 알

고 있는 교룡과는 너무나 달랐다.

" 제가 좀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리시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적수는 조용히 손을 내밀어 카이엔

의 손목을 잡았다. 보통 사람들에 비해 약간 낮게 느껴지는 체온. 그리

고 극히 미약하게 움직이는 맥박.  그 이외에는 아무런 이상함을  느낄

수 없었기에 적수는 의심을 품었다.

' 별다른 이상이 보이지 않는데 어째서 이렇게 곧 죽기라도  할 것처

럼 창백하지?'

" 그렇다면 역시......."

적수는 아직 풀리지 않은 의심을 스스로의 힘으로 증명해내기 위해 조

심스럽게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의 손이 향한 곳은 카이엔의 이마였

다.

' 손해볼 것도 없으니 한번 시험해보지....'

적수는 자신의 전신을 타고 흐르는 격동하는 맑은 기운을 손끝에 모았

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게 생명을 유지시키기 위해 마땅히  존재하는

그것. 그러나 교룡에게는 턱없이 부족한 생명의 기운을 그는 손끝을 통

해 카이엔에게 전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무런 거부감 없이 자신의 생기를  받아들이던 카이엔의 얼굴에 아주

조금씩이긴 하지만 창백함이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눈을 뜨자 카이엔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나 리시엔은 그의 미소를 보

고 안도감대신 쓸쓸함을 느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카이엔이 그렇게

감정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처음 그와 마주쳤던 날처럼. 가라앉아 있

지만 한  없이 쓸쓸해 보였던, 그래서 결코 잊혀지지 않았던.

" .....리시엔....."

*            *            *

카이엔과 리시엔은 항상 같은 장소에 있었다. 카이엔이 쓰러졌던, 그리

고 자신의 생기를 받아들이고 정신을 차렸던 그 날로부터 이틀의 시간

이 흐르고 난 후 적수는 다시 그때의 장소로 갔다. 이곳에서 가신이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결심한 것도 있었지만  혹시라도 아직 그들이 머

물고 있다면 확실하게 풀리지 않은 자신의  의문을 증명할 수 있을 것

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적수는 기린족 특유의 소리내지 않는 걸음걸이로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앉아있는 둘의 뒤로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막 그들의 몸에  손이 닿을

만큼 가까워진 순간이었다.

팟-!

갑자기 울려 퍼진 소리와 함께 거대한  백색의 섬광이 주위를 가득 채

웠다. 그리고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몰아치는 강풍.

적수는 순간적으로 숨을 삼키며 방어주문을 펼쳤다.

바로 그때의 힘이었다. 그러나 얼마간의 시간동안 그때의 두 배 이상으

로 강해진 힘.  적수는 당혹감을 느꼈지만  당황하지는 않았다. 자신은

기린족의 황자. 힘으로 누군가에게 굴복 당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 역시 네 정체를 드러냈구나..."

적수는 힘주어 말을 내뱉었다. 며칠동안 곁에서 함께 지내면서도  자신

이 오해한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역시 자신의 눈은 틀림이

없었다.

하지만 의외인 것은 곁에 있는 여인의 존재였다. 어째서 교룡인 저자의

곁에 용족이 머물고 있는 것일까. 용족이라면 마땅히 교룡을 없애는 것

이 당연하거늘. 그리고 교룡의 행동 역시  그때와는 무척 달랐다. 힘을

뿜어내면서도 자신의 곁에 있는 여인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

도록 주문의 영향권을 조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문의 여파가 사라지자 숲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금전의

고요함을 되찾았다.

그리고 울려퍼진 숲의 고요함을 닮은 목소리.

" 어서 이곳을 떠나기 바랍니다."

카이엔은 조용한 음성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 그럴 수야 없지. 어떻게 교룡이 눈앞에 있는데 그대로 돌아갈 수가

있나. 게다가 나는 그대와 처음 만난 것도 아닌데..."

적수가 답하자 다시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나 그것은 교룡의 음성이 아

니었다.

" 당신이 카이엔을 도와주신 것은 감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탁이니 지금 시간을 방해하지는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두 남자는 동시에 당혹감을 느꼈다. 그것도  서로 다른

이유로.

" 리시엔. 그대는 용족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째서 저 자가 교룡이라

는 사실을 알면서도 함께 하는 것입니까?"

놀라지 않았다면 그것은 거짓일 것이다. 그러나 리시엔은 적수를  통해

그것을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

다. 그저 엷은 미소를 지었을 뿐.

" 제발 부탁드려요. 기린족은 평화로운 것을 추구한다고 들었습니다.

더군다나 당신은 황족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 그럴 수는 없습니다."

리시엔의 간곡한 말에도 불구하고 적수는 뜻을 굽히려 하지 않았다.

" 교룡은..... 더군다나 다른 이의 생명을 빼앗는  교룡은 자신의 생명

으로 사죄해야 합니다."

" 들었지....? 그렇다면 결론 역시 하나야........"

씁쓸함을 감춘 카이엔의 어조에 리시엔은 의아한 듯이 고개를 돌렸다.

" 전 아무렇지 않아요."

" 날 떠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크게 상처입게 될 거야. 내

가 되었든 그대가 되었던 간에.... 교룡이란  어디에도 있을 수 없는 존

재니까......"

카이엔은 신경질 적인 웃음을 터트렸다.

" 당신은 교룡이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해. 단지 들어온  몇 가지의

이야기는 전부가 아니니까. 교룡이라는 존재는.... 있어서는 안  되는 생

명이야."

리시엔은 슬픈 듯이 미소지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 어째서 그런 말을 하지요? 그게 무슨 상관인가요."

그러나 카이엔은 결코  자신의 마음속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지워지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곁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적수는 적지 않게 놀랐다.  리시엔이

한 말은 그만큼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었기에. 그는 기다리기로 했다.

적어도 그들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는 기다리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 전 이미 천계를 떠나왔어요. 당신이 순수한 인간이었다고 하더라도

결코 곁에서 떠나지 않았을 거에요. 그런데 교룡이라는 사실 때문에 내

가 당신을 떠나야 하나요?"

리시엔은 격해지는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가

슴속에 이런 슬픔과 격렬함이 숨어있다고는  느끼지 못하고 있었을 정

도로.

" 내 마음을 아직도 모르나요?  교룡이건 인간이건 누군가가 당신을

지탄하던 간에 난 상관이 없어요. 당신에게 이끌린 것은 당신의  피 때

문이 아니라 당신 그 자체를 보고서였어요. 그런데도.... 그런데도......"

카이엔은 눈을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라버니 판유를 사모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던 수년간은 안타까움이라

는 감정을 알았지만 그때의 그 감정은  지금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한 것이었다.

겨우 진정하게 서로에게 이끌렸고 서로를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하늘은

둘의 인연이 이어지는 것을 막으려 하는 것일까.

" 설사 누군가 당신이 교룡이라는 이유로 우리 둘을 막는다면 전 망

설임 없이 상대를 공격할 거에요. 제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이지 일

족도 피도 아니니까요."

카이엔은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해준 적도 자신에게 이런 감정을 전해준 적도 없었다.

" 리시엔....."

" 지금까지는 아무도 없었을지 모르지만 이제부터는 달라요. 전 결코

당신을 떠나지 않을 테니까.  절 이끈 것은  결코 당신의 피가  아니에

요."

" 리시엔....."

카이엔은 다른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한  채 계속 리시엔의 이름을 불렀

다. 가슴속에 차 오르는 감정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알지  못한 격렬한

흐름을 내포하고 있었다. 진작 이런 느낌을 알았더라면 오랜 과거에 이

런 느낌을 알았더라면 지금처럼 현실이 바뀔 때까지 잠자코 그것에 휩

쓸리지 않았을 텐데 시간은 너무나도 가혹했다. 이미 자신은 명계를 떠

나서는 살 수 없는 몸이 되었는데  이제서야 이런 격렬함이 자신을 지

배하게 되다니. 그것은 피를 열망하는 교룡의 본성을 드러낼 때 느끼는

감정보다 더한 격랑이었다.

[번  호] 7640 / 7995      [등록일] 2000년 04월 18일 00:14      Page : 1 / 11

[등록자] 까망포키         [조  회] 105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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