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흑룡의 숲 제 2부 >
연(緣)...
제 14장. 遇(망상의 그림자)
四.
마치 바람을 타고 흐르는 나뭇잎처럼 가늘고 유연한 움직임을 가진 손
가락이 춤추듯 허공을 맴돌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마치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이는 생명체처럼 몇 개의 나뭇잎을 품고 하늘을 떠돌았다. 그 나뭇
잎을 통해 바람이 어느 곳으로 움직이고 있는 가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그 움직임을 따라 대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바싹
메말라 있던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불길함을 품고 있던 땅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을 적셔줄 빗방울을 기다리듯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
라갔다.
몇 줄기에 불과한 작은 바람이었지만 바싹 마른 흙먼지를 하늘로 끌어
올리기에는 충분한 힘을 담고 있었다.
툭툭.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점점 무겁게 가라앉던 대기는 굵은 빗줄기를
흩뿌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던 흙먼지 역시
빗방울을 타고 금새 본래 자신이 있던 자리로 되돌아왔다.
황색으로 바싹 말라있던 흙은 금새 짙은 갈색으로 변모했다. 그리고 그
대지에 뿌리박고 있던 짙푸른 색의 풀과 나무들은 금새 싱싱하게 되살
아났다. 한여름의 강렬한 햇살로 인해 목말라있던 많은 생명들은 소리
없는 탄성을 지르며 몸을 적시는 단비를 맞이했다.
이제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된 주문을 마음속으로 작게 읊조리며 훼이
는 빗속을 거닐었다. 머리카락을 타고 어깨로 떨어져 내리는 빗방울은
마지 그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듯 그의 몸을 적시지 못한 채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렇게 한동안 빗속을 거닐자 실로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까지의
자신은 어떠한 필요에 의해 이곳 하계에 찾아왔었고, 필요할 때만 주문
을 행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자신과는 하등의 관계도 없는 땅으
로 와 비를 뿌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은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과거와
는 많은 차이를 지니고 있었다.
천신(天神)이라는 이름. 인간들이 무언가를 소망할 때나 위급할 때 자
신도 모르게 부르는 그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 두 눈에는 그저
깊고도 깊은 대해와 같이 비치는 푸른빛을 간직한 하늘을 향한 것이었
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하계에서 그 하늘을 응시하며 서 있는 자신은 흔
히 그들이 말하는 천신과 가장 닮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훼이는 소리 없이 웃으며 촉촉하게 젖은 대지에 발을 내딛었다.
' 홍룡족들이 화를 낼지도 모르겠군.....'
갑작스런 마음의 변화로 비를 뿌리기는 했지만 아무리 자신이라고 해
도 홍룡족들에게 불만 어린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가뭄 역시 천기의 한 부분으로 계절을 이끌어 가는 각 용족들에게 맡
겨진 소임에 의한 것이었다. 항상 좋은 날씨만 계속 되라는 법은 없었
기에. 만약 그렇게 된다면 계절 자체를 움직여 나가는 의미가 없는 것
이다. 극심한 가뭄이나 홍수, 화재 등도 자연의 한 부분인 것이다.
하지만 훼이는 실로 수 백년 만에 밟은 하계의 땅이 바싹 메말라 있는
것을 보고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하계의 땅은
늘 촉촉함을 머금고 새 생명을 싹틔우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
문이었다. 그보다는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추억의 색을 촉촉함으
로 적셔진 푸른빛으로 칠하고 싶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과거의 빛깔로 흐리게 퇴색 되어버린 지난날. 시간을 헤아려보
면 까마득하게 먼 과거이지만 자신은 그것을 바로 어제의 일처럼 생생
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때 느꼈던 감정까지도 아주 생생하게.
' 인간으로 치자면 비영과 같은 나이인가... 아니, 그보다 두배는 되겠
군..'
훼이는 가만히 과거를 되새기며 과거에 자신과 인연이 닿아있던 인간
을 떠올렸다. 겉모습만으로 따지자면 훼이는 아직 육백여세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지만 이미 노년에 접어든 용족보다도 월등하게 오랜 시간
을 살아왔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나이를 생각하자 과거에 알고 있던
비영을 떠올린 것이다. 그의 얼굴에 패여있던 깊은 주름과 자신이 보았
던 그가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자신의 한 평생을 오직 동생을 돌보며 그리고 나중에는 동생이 낳은
아이를 돌보며 보냈던 남자. 인간이 가진 그 짧은 생의 시간을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타인을 위해 썼던 그를 훼이는 다른 추억과 함께 간직
하고 있었다.
자신의 처였던 시연의 오라비라서가 아니라 그가 품고 있던 생각이, 그
가 보여주었던 태도가, 그리고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면서 훼이 자신이
받았던 느낌이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그가 자신의 평생을 통해 보여주
었던 배려. 그것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고 인간이기에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정(情)이라는 이름의 인연이었다.
* * *
" 천신님이 큰복을 내려주셨구나. 이제 한시름 덜었다."
소년은 아직 아버지가 하는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아버지가 왜 이처럼 기뻐하는 지는 알고 있었다.
정성 들여 키우던 농작물이 가뭄 때문에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아직 어린 자신이었지만 잘 알고 있었다.
" 아버지. 비를 뿌려주시는 것은 천신님인가요?"
아이는 아버지의 입에서 흘러나온 천신이라는 이름을 되새기며 물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자신이 어렸던 시절에 아버지로부터 전해들었던 이야
기를 자신의 아들에게 해 주었다.
" 비를 뿌려주는 것은 용신님이지. 세상의 모든 물을 관리하는 것은
용신님이거든. 그리고 용신님은 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
요한, 그리고 항상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관리하신다. 예를 들어 불이
나, 바람, 땅의 기운 같은 것들 말이다."
그는 잠시 시선을 촉촉하게 젖어든 바닥으로 돌렸다. 그리고 나서 흐뭇
한 미소를 띄우며 말을 이어갔다.
" 그 모든 것을 관리하는 것은 용신님이지만 그들이 사는 곳은 저
하늘이기 때문에 예로부터 모든 힘을 지닌 신들을 천신님이라 불러왔
다."
소년은 아버지의 말을 듣자 더욱 그 이야기에 관심이 생겼다. 용신들의
이야기나 다른 영수들의 이야기는 조부와 조모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
지만 그때는 그저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라고 여겼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에 비해 더 나이를 먹었음에도 비를 뿌려주는 용신의 이야
기가 흥미를 자극하고 있었다.
소년은 아버지가 비를 맞으며 밭으로 들어서 농작물을 솎아내는 것을
보며 더욱 더 깊이 생각에 잠겼다. 비록 이야기에 불과할 지라도 그 용
신을 한번 보았으면 좋겠다는 바램이 겉잡을 수 없이 세차게 솟아 올
랐다.
그러던 어느 순간인가 소년은 비소리에 색다른 소리가 섞여 있다는 것
을 알아챘다. 마치 거대한 천 조각이 펄럭이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지
는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착각인지도 모르지만 귀를
기울이자 그 소리는 소년의 생각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더욱 크게 들
려왔다. 그리고 무심코 하늘로 고개를 돌린 순간 소년은 두 눈을 크게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 아버지! 저길 좀 보세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내던 남자는 잔뜩 흥분한 아들의 음성에 고개
를 돌렸다. 그러자 아들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곳에는 전설에서나
나올법한 성스러운 동물이 막 날아오르고 있지 않은가.
그는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비볐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도
신기루도 아니었다. 촉촉하게 대지를 적시는 빗방울을 가로질러 창공을
향해 용솟음 치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생명체.
" 천신님. 감사합니다."
멀리에 있기에 확실하게 생김새를 살필 수는 없었지만 남자와 그의 어
린 아들은 하늘을 가득 채울 정도로 커다란 몸집을 한 검은 용이 소원
을 이뤄주기 위해 하강한 천신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비상하는 용을 바라보며 남자는 작게 감사의 말을 내뱉었다. 매일같이
정성껏 마음을 담아 빌었던 소망이 오늘에야 이루어지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리고 그의 아들 역시 아버지가 하는 것처럼 하늘을 향해
작게 중얼거림을 전했다. 그것이 확실하게 어떤 말이었는지는 남자로서
도 알 도리가 없었지만 그는 기분 좋게 웃음 지었다.
[번 호] 7992 / 7995 [등록일] 2000년 04월 28일 01:51 Page : 1 / 8
[등록자] 까망포키 [조 회] 17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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