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룡의 숲-117화 (117/130)

< 흑룡의 숲 제 2부 >

연(緣)...

제 14장. 遇(망상의 그림자)

四.

마치 바람을 타고 흐르는 나뭇잎처럼 가늘고 유연한 움직임을 가진 손

가락이 춤추듯 허공을 맴돌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마치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이는 생명체처럼 몇 개의 나뭇잎을 품고 하늘을 떠돌았다. 그 나뭇

잎을 통해 바람이 어느 곳으로 움직이고 있는 가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그 움직임을 따라 대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바싹

메말라 있던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불길함을 품고 있던 땅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을 적셔줄 빗방울을 기다리듯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

라갔다.

몇 줄기에 불과한 작은 바람이었지만 바싹 마른 흙먼지를 하늘로 끌어

올리기에는 충분한 힘을 담고 있었다.

툭툭.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점점 무겁게 가라앉던 대기는 굵은 빗줄기를

흩뿌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던 흙먼지 역시

빗방울을 타고 금새 본래 자신이 있던 자리로 되돌아왔다.

황색으로 바싹 말라있던 흙은 금새 짙은 갈색으로 변모했다. 그리고 그

대지에 뿌리박고 있던 짙푸른 색의 풀과 나무들은 금새 싱싱하게 되살

아났다. 한여름의 강렬한 햇살로 인해 목말라있던 많은 생명들은  소리

없는 탄성을 지르며 몸을 적시는 단비를 맞이했다.

이제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된  주문을 마음속으로 작게 읊조리며 훼이

는 빗속을 거닐었다. 머리카락을 타고 어깨로 떨어져 내리는  빗방울은

마지 그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듯 그의 몸을 적시지 못한 채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렇게 한동안 빗속을 거닐자 실로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이제까지의

자신은 어떠한 필요에 의해 이곳 하계에 찾아왔었고, 필요할 때만 주문

을 행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자신과는  하등의 관계도 없는 땅으

로 와 비를 뿌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은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과거와

는 많은 차이를 지니고 있었다.

천신(天神)이라는 이름. 인간들이 무언가를 소망할  때나 위급할 때 자

신도 모르게 부르는 그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 두  눈에는 그저

깊고도 깊은 대해와 같이 비치는 푸른빛을 간직한 하늘을 향한 것이었

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하계에서 그 하늘을  응시하며 서 있는 자신은 흔

히 그들이 말하는 천신과 가장 닮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훼이는 소리 없이 웃으며 촉촉하게 젖은 대지에 발을 내딛었다.

' 홍룡족들이 화를 낼지도 모르겠군.....'

갑작스런 마음의 변화로 비를 뿌리기는  했지만 아무리 자신이라고 해

도 홍룡족들에게 불만 어린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가뭄 역시 천기의 한 부분으로 계절을  이끌어 가는 각 용족들에게 맡

겨진 소임에 의한 것이었다. 항상 좋은 날씨만 계속 되라는  법은 없었

기에. 만약 그렇게 된다면 계절 자체를 움직여 나가는 의미가  없는 것

이다. 극심한 가뭄이나 홍수, 화재 등도 자연의 한 부분인 것이다.

하지만 훼이는 실로 수 백년 만에 밟은 하계의 땅이 바싹 메말라 있는

것을 보고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하계의 땅은

늘 촉촉함을 머금고 새 생명을 싹틔우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

문이었다. 그보다는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추억의 색을  촉촉함으

로 적셔진 푸른빛으로 칠하고 싶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과거의 빛깔로 흐리게 퇴색 되어버린 지난날. 시간을  헤아려보

면 까마득하게 먼 과거이지만 자신은 그것을 바로 어제의 일처럼 생생

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때 느꼈던 감정까지도 아주 생생하게.

' 인간으로 치자면 비영과 같은 나이인가... 아니, 그보다 두배는 되겠

군..'

훼이는 가만히 과거를 되새기며 과거에  자신과 인연이 닿아있던 인간

을 떠올렸다. 겉모습만으로 따지자면  훼이는 아직 육백여세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지만 이미 노년에 접어든  용족보다도 월등하게 오랜 시간

을 살아왔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나이를 생각하자 과거에 알고  있던

비영을 떠올린 것이다. 그의 얼굴에 패여있던 깊은 주름과 자신이 보았

던 그가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자신의 한 평생을 오직  동생을 돌보며 그리고  나중에는 동생이 낳은

아이를 돌보며 보냈던 남자. 인간이 가진 그 짧은 생의  시간을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타인을 위해 썼던 그를 훼이는 다른 추억과 함께 간직

하고 있었다.

자신의 처였던 시연의 오라비라서가 아니라 그가 품고 있던 생각이, 그

가 보여주었던 태도가, 그리고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면서  훼이 자신이

받았던 느낌이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그가 자신의 평생을 통해  보여주

었던 배려. 그것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고 인간이기에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정(情)이라는 이름의 인연이었다.

*            *            *

" 천신님이 큰복을 내려주셨구나. 이제 한시름 덜었다."

소년은 아직 아버지가 하는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아버지가 왜 이처럼 기뻐하는 지는 알고 있었다.

정성 들여 키우던 농작물이 가뭄 때문에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아직 어린 자신이었지만 잘 알고 있었다.

" 아버지. 비를 뿌려주시는 것은 천신님인가요?"

아이는 아버지의 입에서 흘러나온 천신이라는 이름을 되새기며 물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자신이 어렸던 시절에 아버지로부터 전해들었던 이야

기를 자신의 아들에게 해 주었다.

" 비를 뿌려주는 것은 용신님이지. 세상의 모든 물을  관리하는 것은

용신님이거든. 그리고 용신님은 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

요한, 그리고 항상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관리하신다. 예를 들어 불이

나, 바람, 땅의 기운 같은 것들 말이다."

그는 잠시 시선을 촉촉하게 젖어든 바닥으로 돌렸다. 그리고 나서 흐뭇

한 미소를 띄우며 말을 이어갔다.

" 그 모든 것을  관리하는 것은 용신님이지만  그들이 사는 곳은 저

하늘이기 때문에 예로부터 모든 힘을  지닌 신들을 천신님이라 불러왔

다."

소년은 아버지의 말을 듣자 더욱 그 이야기에 관심이 생겼다. 용신들의

이야기나 다른 영수들의 이야기는 조부와  조모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

지만 그때는 그저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라고 여겼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에 비해 더 나이를 먹었음에도 비를 뿌려주는 용신의 이야

기가 흥미를 자극하고 있었다.

소년은 아버지가 비를 맞으며 밭으로  들어서 농작물을 솎아내는 것을

보며 더욱 더 깊이 생각에 잠겼다. 비록 이야기에 불과할 지라도 그 용

신을 한번 보았으면 좋겠다는 바램이 겉잡을  수 없이 세차게 솟아 올

랐다.

그러던 어느 순간인가 소년은 비소리에 색다른 소리가 섞여 있다는 것

을 알아챘다. 마치 거대한 천 조각이 펄럭이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지

는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착각인지도 모르지만 귀를

기울이자 그 소리는 소년의 생각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더욱 크게 들

려왔다. 그리고 무심코 하늘로 고개를 돌린 순간 소년은 두  눈을 크게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 아버지! 저길 좀 보세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내던 남자는  잔뜩 흥분한 아들의 음성에 고개

를 돌렸다. 그러자 아들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곳에는  전설에서나

나올법한 성스러운 동물이 막 날아오르고 있지 않은가.

그는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비볐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도

신기루도 아니었다. 촉촉하게 대지를 적시는 빗방울을 가로질러 창공을

향해 용솟음 치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생명체.

" 천신님. 감사합니다."

멀리에 있기에 확실하게 생김새를 살필 수는 없었지만 남자와 그의 어

린 아들은 하늘을 가득 채울 정도로 커다란 몸집을 한 검은 용이 소원

을 이뤄주기 위해 하강한 천신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비상하는 용을 바라보며 남자는 작게 감사의 말을 내뱉었다.  매일같이

정성껏 마음을 담아 빌었던 소망이  오늘에야 이루어지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리고 그의 아들 역시  아버지가 하는 것처럼 하늘을  향해

작게 중얼거림을 전했다. 그것이 확실하게 어떤 말이었는지는 남자로서

도 알 도리가 없었지만 그는 기분 좋게 웃음 지었다.

[번  호] 7992 / 7995      [등록일] 2000년 04월 28일 01:51      Page : 1 / 8

[등록자] 까망포키         [조  회] 17 건

[제  목] [흑룡의 숲 2부] 연(緣)... - 50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