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룡의 숲-118화 (118/130)

< 흑룡의 숲 제 2부 >

연(緣)...

제 14장. 遇(망상의 그림자)

五.

리시엔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며 상처를 입었던 어깨를 쓰다듬었다.

이제는 옷에 묻어있던 희미한  핏자국 이외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자리. 약간의 아련한 동통만이 그 자리에 상처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줄

뿐  상처를 입었던 어깨에는 흉터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용족의 피가 지닌 특성 때문일까. 몸의 상처는 기이할 정도로  금방 나

아졌다. 외상을 치료하기 위한 약을 바른 것도 아닌데 상처는 너무나도

빨리 아물었다. 그러나 리시엔은 아무런 기쁨도 느끼지 못했다. 차라리

욱신거림을 동반한 통증이 계속 되었다면  주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

는 지 잊을 정도로 생각에 잠기는 일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리시엔은 인간의 마을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높은 언덕에 앉아 자신이

겪은 일을 되짚어 보았다.

그저 마음의 이끌림을 따라 움직였다고 여겼는데 모든 것은 그녀의 생

각처럼 단순하고 평이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카이엔이 사실은  인간이

아니라 자신과 같은 백룡족의 피를 이은 교룡이라는 사실과, 그가 교룡

으로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곁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강해진 자신의 마음을 리시엔은 다시 한번

되짚어 보았다.

' 교룡이라고 해서 내 마음이 달라지진 않아....'

리시엔은 직접 명계에서 온 존재의 앞에서 말했듯이,  그리고 기린족의

황자에게 말했듯이 다시 한번 자신의 마음을 굳혔다. 그러나 마음이 그

렇게 굳어졌다고 해도 자신은 명계에. 카이엔이 지금 머물고 있을 명계

로는 갈 수 없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이야기. 명계의 공기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에게는 독과 같아서 온 몸의 기운을 빼앗고 급기야

는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는 이야기를 리시엔은 직접 만나본 명계의 존

재를 통해 알았다. 명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아도 그들에게서  풍겨나오

는 어둡게 가라앉은 기운이 명계가 어떤 곳인지를 알게 해주었던 것이

다. 그러나 그들과 마찬가지로 그 속에 속해있던 카이엔은 어째서 다른

것일까.

그만은 독기로 가득 찬 어두운 땅에서 살아온 자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만은 아직 빛이 비추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자세한 내용을

알지는 못하지만 명계에서 온  존재의 말로 미루어  볼때 그들이 죽은

자인것과 달리 카이엔은 죽음으로 인해 그  땅에 발을 디딘 존재가 아

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 소름끼치는 붉은 눈동자를 가진 여자의 명령에 따라 거침없

이 인간들의 생명을 빼앗던 카이엔은 그 순간 만큼은 그들.  명계의 존

재들과 조금도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카이엔의 손으로 만

들어진 붉은 색의 바람은 리시엔에게 거센 충격을 안겨주었다.

순수하고 따스한 카이엔이 완전히 다른 누군가로 변모해 버린 듯한 모

습. 교룡이라는 이름이 어째서 그렇게 커다란 거부감을 안겨주는  이름

이 되었는지 리시엔은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카이엔을 생각하는 마음이 반감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리시엔은 다시 기다리는 것이다. 자신보다 더 심한 상처를 입고

도 그만한 힘을 냈던 카이엔은 분명  지금 스스로의 힘으로 몸을 움직

일 수 없을 정도로 지쳐있을 것이 분명했다. 비록 그가 죄 없는 인간들

의 무수한 생명을 빼앗기는 했지만  리시엔은 그런 인간들의 생명보다

카이엔의 몸이 더 걱정스러웠다.

그에게는 명계의 공기가 더 편안할런지도 모른다. 그 명계에서 온 차가

운 느낌의 남자가 말했듯이 카이엔의 몸  속에 흐르는 피의 반 이상이

명계 주인의 것으로 채워져 있다면  분명 카이엔은 하계보다 명계에서

더 편안함을 느낄 것이다. 자신은 결코 들어설 수 없는  땅이지만 그리

고 암흑의 땅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 곳에서 카이엔이 조금이나마

편안하게 숨쉴 수 있다면 리시엔은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 기다릴거야...."

리시엔은 한자한자 힘주어 그 말을 내뱉었다. 언제 카이엔이 다시 하계

로 와 자신을 찾을지 그것이 기약할 수없을 만큼 긴 시간이 될지 몰라

도 자신은 기다릴 것이라고, 이렇게 허망하게 놓쳐버릴 수는 없다고.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여인의 명령에 의해 어쩔  수 없

이 움직이며 힘을 쏟아내던 카이엔이  지었던 표정을. 그 얼굴에  담긴

고통의 깊이를 그때로부터  수일이나 지난 지금에도  리시엔은 느끼고

있었다.

*            *            *

" 그래서 그 사실을 백룡왕께 전하셨습니까?"

가신은 진중하게 굳어진 얼굴을 하고 있는 적수에게 물었다. 그러자 적

수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만을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적수는 입을 열었다.

" 확실하게 백룡왕께 말을 전한  것은 아니지만 백룡일족의 귀에 들

어갔으니 분명 지금쯤은 백룡왕도 그 사실을 알았겠지."

가신은 한 자리를 계속 왔다갔다하며 생각에 잠겼다. 적수가  혼자만의

힘으로 교룡을 없애겠다고 나서지 않은  것은 다행한 일이지만 교룡의

존재가 백룡왕의 귀에 들어갔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것은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용족들이 이제까지 교룡을 어떻게  대해왔는지

가신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곁에 있었다던 용족 여인.

' 용족 여인....?'

가신은 설마 하며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차분하게 미소지으며  누군

가를 기다린다고 말했던 백룡족 여인의 얼굴. 외모로 알 수  있는 나이

에 비해 성숙한 느낌을 자아내던 그 여인. 분명 그녀 역시 지금의 장소

에서 자신과 만나지 않았던가.

" 적수님. 그 용족 여인이 혹시 백룡족 아닙니까?"

적수는 잠시 고개를 숙이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얼마 후  고개를 끄

덕이며 대답했다.

" 묻지는 않았지만 바람의 힘을  쓰던 걸로 보아 백룡족이 분명하겠

지."

' 이런......'

가신은 이번 일이 그리 단순하게 끝나지 않을 것임을 어렴풋이나마 짐

작할 수 있었다. 단순히 용족들의  손에 모든 것의 처리를  맡기기에는

불안한 무언가가 이 일의 열바닥에  깔려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의

하나는 바로 리시엔이라는 백룡족 여인의 존재였다.

교룡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결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은 채

행동하는 그녀가 이번일에서 커다란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있음을 가

신은 알아챘다.

' 정말 단순하게 끝날 일이 아니로군.'

가신은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교룡과  심상치 않은 명계의 움직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무슨 일을 부를 것이라고 짐작했다. 과거에도 천계까

지 와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했던  명계의 주인이 오백년이라는 시간

동안 침묵을 지킨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임이 틀림 없기에.

'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겠어....'

가신이 막 생각을 떠올림과 동시에 적수 역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 일이 복잡해 지는 듯 하군."

가신이 생각한 것을 적수 역시 알아채고 있었다. 적수는 작게 중얼거리

며 다시 한번 교룡과 그의 곁에 있던 백룡족 여인  리시엔을 떠올렸다.

아무런 연관도 없어야 할 그들이 그렇게  깊게 이어져 있듯이 쉽게 해

결될 일은 아닌 것이다.

" 함께 조금 더 주위를 둘러보지. 무언가 다른 것을  발견할 수도 있

으니."

적수는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명계의 존재들이 드나들었던 입

구가 있던 곳을 찾아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직접 그곳으로 들어설  생각

은 없지만 분명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여기며.

처음 교룡이 하계의 전쟁에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도, 그와

명계가 깊게 이어져있다는 것을 알아낸  것도 자신이므로 끝까지 사실

을 밝혀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머릿속에 자리잡았다.

[번  호] 7802 / 8063      [등록일] 2000년 04월 30일 01:03      Page : 1 / 9

[등록자] 까망포키         [조  회] 117 건

[제  목] [흑룡의 숲 2부] 연(緣)... - 51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