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흑룡의 숲 2부 >
연(緣)...
제 15장. 舛(어긋난 시간)
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일까.
어차피 앞으로 자신이 걸어가야 하는 길은 무채색으로 물들어 있을 것
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끝없는 혼란에 감싸인 채 모든 것을 부
정하고 눈을 감아버리는 것은 너무나도 바보같은 일이다.
더군다나 아직 리시엔에 관한 감정조차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지 않은
가. 그녀는 분명 그때 그렇게 헤어졌어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본래 그런 여인이기에. 오래된 만남을 가진 것도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을 정도로 이야기를 나눈 것이 아님에도 서로를
너무나 잘 이해하는 둘.
카이엔은 지금 자신이 처해있는 모든 상황을 잊고 오직 리시엔과의 일
만을 생각하기로 결심했다. 지금 자신의 몸은 극도의 피로에 휩싸여 손
가락을 움직이는 것 조차 힘겹게 느껴질 정도였지만 정신만은 아주 맑
게 깨어있었다.
" 요희님은 아직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막 상념의 강속으로 정신을 놓아버리려 하던 카이엔에게 낮게 가라앉
은 천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짙은 회색 빛깔의 벽에 비스듬히
등을 기대고 선 채 카이엔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의
눈동자에는 평소와 같이 경멸어린 빛이나 지나칠 정도로 차가운 비웃
음은 담겨있지 않았다.
카이엔은 그런 천오의 모습을 보며 이유를 알 수 없는 허탈감에 사로
잡혔다. 그리고 그 동안 가장 묻고 싶었으나 묻지 못했던 말을 꺼냈다.
" 대체.... 무슨 이유로 내게 관심을 가지는 겁니까. 당신들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힘밖에 가지지 못한 내게.."
천오는 순간 아무런 표정도 떠올리지 않은 인형같은 굳어진 얼굴로 카
이엔을 마주 대했다.
" 힘 같은 건 그렇게 필요하지 않다. 다만...."
천오는 잠시 말을 끊더니 카이엔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세심하게 살
폈다. 마치 숨겨진 무언가를 찾듯이.
" 넌 교룡이다. 이 세상에 단 둘밖에 존재하지 않는 교룡중의 하나.
무엇보다 그것이 중요하지."
그렇게 말하고 나서 천오는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카
이엔은 그가 모든 말을 다 하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 전 아직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카이엔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
격렬하지도 거센 변화를 가지지도 않은 감정의 흐름에 카이엔은 주체
할 수 없이 휘말려 있었다.
" 잠시 하계에 다녀와도 좋다. 우선 몸이 나은 후가 되어야겠지만."
" ......?"
순간적으로 카이엔은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
다.
" 요희님을 화나게 하지 마라. 시간은 얼마든지 줄테니 하계에 다녀
와서 확실하게 마음을 정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나마 자신과 가장 많은 이야기를 했다고 볼 수 있는 명계의 유일한
인물인 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이엔은 그가 이처럼 아무런 별개의
감정도 섞이지 않은 태도로 말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 적어도 살아갈 이유쯤은 아는 것이 좋겠지...."
그리고 카이엔은 등을 돌리고 돌아서 걸어가는 그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 * *
그때 그렇게 헤어진 이후로 근 두달 만에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하게
된 리시엔과 카이엔은 보통때처럼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서지 않
았다. 그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가에 희미한 미소만을 머금고
서로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을 뿐. 둘은 그렇게 몇걸음 떨어진 거리에
서 서로를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있은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리시엔은 귓가를 스치는 바람
의 향을 음미하듯 눈을 감았다 뜨고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 잘... 지냈나요?"
그때는 정신적으로도 그리고 육체적으로도 서로 상처를 입은 상태였기
에, 그리고 상황조차 너무나 좋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에게 어떤 말도
건네지 못한채 헤어져야했다. 그리고 그것이 기약 없는 이별이 될 것이
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서로가 속한 세상은 너무나도 큰 차이를 품
고 있었기에.
그때. 리시엔이 카이엔의 본 모습을 알게 되고 명계에서 온 존재들에
의해 상처를 입은 후, 그리고 카이엔이 몸에서 힘을 끌어내 인간들을
학살하는 모습을 보고나서 리시엔은 온 몸에서 힘이 빠져버렸다. 그것
은 몸에 입은 상처의 탓도 있었지만 너무나도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
이라는 사실이 더 옳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카이엔의 모습을 보았다
고 해서 리시엔의 마음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어떤 말을
건네야 그가 상처받지 않을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하지만 카이엔의 얼
굴에 떠오른 너무나도 슬프고 절망적인 표정은 리시엔에게 어떤 말도
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렸다. 그저 허물어 지듯이 바닥에 주저앉은 카이
엔을 그들이 끌고 가는 모습을 그저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는. 카이엔
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표정이 슬픔에서 씁쓸함으로 다시 좌절로 바뀌
어 가는 것을 그저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는. 어떤 말 조차, 그리고 다
시 만나자는 약속의 말 조차 하지 못한 채 그렇게 헤어졌었다.
" 기다리고 있었군....."
카이엔 역시 작게 중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리시엔의 말에 답했다. 그
리고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다가서 부드럽게 손을 맞
잡았다.
" 글세요. 아버지와는 지금까지 그리 많은 말을 나누지는 않았어요.
이상하게도 아버지와는 말할 기회가 생기지 않았어요. 엄격한 느낌이
강해서 그랬을까..."
리시엔은 생각하듯 한동안 말을 멈추고 고개를 아래로 향한 채 움직이
지 않았다.
" 음... 그래요. 아버지라는 이름은 아무래도 어머니 보다는 조금 거
리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두분이 똑같이 아무말을 하지 않고 있
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단지 눈동자 만으로도 기분을 이해해주고 배려
해주시지만 아버지에게서는 그런 것을 찾을 수가 없어요. 어쩌면 저 혼
자만 이렇게 느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말하고 나서 리시엔은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카이엔과 이렇게 마주앉아서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날이 올 것
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얼마전 그와 헤어지
게 되었을 때에는 한 없는 절망감과 혼란만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
었는데 지금은 그런 기분은 완전히 씻은 듯이 지워져 버렸다.
그리고 그런 리시엔을 상냥한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던 카이엔은 처음
으로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입을 열었다. 누구에게도 이야기한 적 없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그리고 자신을 낳아준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그녀
에게 들려주기 위해서.
" 어머니는 그리 많은 말을 하는 분은 아니었지."
카이엔은 늘 하늘을 향해 그리운 시선을 던지고 있던 어머니를 생각했
다.
지금은 그녀가 용족이라는 사실을 알고있지만 그때만 해도 자신은 어
머니가 하늘을 바라보는 까닭이 오직 아버지를 그리워했기 때문이라고
여겼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도 그때의 어린아이가 아니며 진실이 무엇인지 알
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기억을 떠올릴 때면 이상하게도 마
음이 따뜻해지곤 했다. 이제는 까마득하게 먼 과거의 찰나에 불과한 기
억이 되었음에도 언제나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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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계속 붕붕 드링크를 마시고 있습니다.
모 만화작가가 만들어낸 마감을 위한 드링크로 그것을 마시면 머리가 맑아진
다고 하는데 전 왜 안 그런지 모르겠네요.
어쨌든 취지는 좋은 거니까요. 요새 제 주위에는 마감을 맞은 만화가 언니들
이 꽤 있어서 항상 같이 마감~! 하고 소리를 지르는 나날입니다.
[번 호] 7882 / 8063 [등록일] 2000년 05월 03일 00:29 Page : 1 / 10
[등록자] 까망포키 [조 회] 109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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