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룡의 숲-122화 (122/130)

< 흑룡의 숲 2부 >

연(緣)...

제 15장. 舛(어긋난 시간)

四.

" 지금.... 무어라 했지요?"

리시엔은 방금 자신이 들은 이름이 잘못된 것이기를 바라며  되물었다.

그런 그녀의 간절함을 알지 못한 채 카이엔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

며 그 이름을 반복해서 말했다.

" 시하라. 시하라라고 했지."

카이엔은 과거의 순간을 되새기며  말을 이었다. 이상하게도  어머니는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으려 했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나이가 들

고 난 후에도 카이엔은 어머니의  이름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아버지로부터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지은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

으며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인간들 중에는  자신의 이름이나 어머니의 이름

과 같은 이름을 가진 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확실하게  뚜렷한 차이를

보여주지는 않지만 어딘가 다르다는 느낌만을 카이엔은 어렴풋하게 느

끼고 있었을 뿐이었다.

" 혹시 그분은 눈에 띄게 표정의 변화를 드러내지 않는 분이 아니었

나요? 목소리는 무척 차분하고."

리시엔은 카이엔의 대답이 부정이길  바라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나

마치 그녀의 바램을 산산이 부수기라도  하듯이 카이엔은 아무렇지 않

게 긍정의 대답을 했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알았느냐는 듯이 시선을

돌렸다.

어쩌면 그녀 리시엔이 자신의 어머니와  아는 사이일지도 모른다는 생

각이 들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백룡족이라고 했으니 분명  리시엔과는

만난 적이 있을 것이다. 인간과 달리 용족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 설마.... 분명 우연일거야...."

리시엔은 정신 없이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잘 알고 있었다. 단지  지금

자신이 믿지 못할 현실을 부정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도.

" 거짓말일거야......."

" 리시엔.....?"

계속 리시엔이 혼잣말처럼  이상한 말만을 중얼거리고  있자 카이엔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봐 왔던 리시엔은 어떤 순간에

도 침착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과 같이 이렇게 흔들리는  리시엔은

결코 그녀답지 않았다.

" 무슨 일이지...?"

카이엔은 다시 부드럽게 물었다. 그러자 리시엔의 끊임없이 떨리는  눈

동자가 천천히 자신을 향했다.

" 카이엔.... 이건...이건..."

리시엔은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며  끊임없이 흔들리는 시선을 던져왔

다.

" 용족에게는..... 중복되는 이름이 없어요...."

" ...........?"

카이엔은 말 없이 의문이 담긴 시선을 던졌다. 그녀의 말을 들었음에도

대체 그녀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자신은 어머니의 이름을  말한 것 뿐인데  어째서 그녀의 태도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달라졌는지를.

리시엔은 어깨까지 떨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 분명.... 거짓일 거야... 이런 건......"

"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지? 리시엔...."

카이엔은 자신이 그녀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

이 불안해 지고 있었다. 그래서 가능한 한 따스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

라보며 물었다.

순간 그녀의 눈동자에 맺혀 가는 작은 물방울이 금방이라도 떨어져 내

릴 듯이 위태롭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 제 어머니는......."

리시엔은 작게 숨죽인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러나 결코 말을 이어가

고 싶지 않다는 듯이 그녀의  표정은 점점 절망적이 되어갔다.  그리고

점점이 끊어지는 목소리로 그녀는 말했다.

" 제 어머니의 이름은...... 시...하라에요..."

" 시하라......?"

카이엔은 되물었다. 분명 지금 리시엔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은  익숙

한 이름이 아닌가. 오랜 시간 자신은 그 이름을 그리며 다시 한번 그녀

와 만날 수 있기를 소망했다. 비록 자신을 이곳 하계에 남겨두고, 아무

것도 이야기해 주지 않은 채 떠났어도 그녀는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였

다. 언제나 그에게는 그리움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오는.

' 그런데... 그런데... 어째서 그 이름이 리시엔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거지?'

거침없이 흘러가는 생각은 점점 카이엔의  마음을 날카롭게 찢는 것처

럼 변화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 하하하...."

카이엔은 미친 듯이 웃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은 슬픔으로 가득 찬 곡성으로 바뀌었고,

카이엔의 눈은 희뿌연 안개로 가득 차 있었다.

리시엔은 곁에서 그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당연히 그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동작을 만류

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을 테지만 지금은 리시엔 역시 카이

엔처럼 미친 듯이 웃고 싶었다. 차라리 그가 그랬던 것처럼 웃을 수 있

다면 마음이 조금이나마 풀어질 것 같았기에. 그러나 리시엔은 웃을 수

도 그렇다고 울 수도 없었다. 그저 망연한 시선으로 카이엔을 지켜보는

것 밖에는.

" 어째서........!"

카이엔은 절규하듯 격한 감정을 담아 소리쳤다. 어째서 이런 식으로 모

든 것이 사라지는 것인지. 자신에게는 단 하나의 소중한 것조차 남아서

는 안 되는 것인지.

자신은 지금껏 어머니를 원망한 적이 없었다. 비록 자신에게 진실을 가

르쳐 주지 않았고, 아무런 말도 없이 떠나갔지만 카이엔은 그녀를 원망

하지 않았다. 그녀가 가진 어머니라는 이름은 그녀로부터 온 자신의 이

름은 그 만큼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인간들의 틈에  섞여 수십년의

세월을 보내고, 다시 명계와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린  지금에도 카

이엔은 결코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았다. 어떤 삶을 주었다고  하더라도

카이엔에게 생명을 건네준 것은 어머니였기에. 그녀가 있었기에 지금의

자신이 존재하게 되었으므로 카이엔은 어떤  절망적인 일과 만났던 때

에도 그녀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지금만은  미치도록 그

녀가 원망스러웠다. 자신에게 생명을, 이름을 준 어머니의 존재가 미치

도록.... 원망스러웠다.

풀썩.

옆에서 리시엔이 바닥에 주저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지  않

아도 카이엔은 지금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인지 알고 있었

다. 그만큼 이제 그녀에게 익숙해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너무나

도 너무나도 잔혹했다.

카이엔은 일부러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지금 리시엔의 얼굴을  본다면

자신의 마음은 더욱 더 산산히 부서져 내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 어째서.......'

지금까지 겪었던 어떤 일도 이보다 더한 절망을 준 적은  없었다. 천오

가 그토록 싸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 했던 절망이라는 단어

를 이제서야 이해하게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것도 가장 그리워하던 어

머니라는 존재를 통해서.

메아리 치듯 휘몰아치는 의문은 카이엔을  더욱 깊은 절망의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 역시.... 역시 그렇군... 나라는 존재는 역시 그렇게 밖에는 살 수 없

는 운명인가....?'

카이엔은 입가에 진한 자조의 웃음을 떠올렸다. 그리고 나서  비틀거리

며 몸을 일으켰다.

차라리 일어서지 못할 정도로 심한 상처를 입었다면 그편이 훨씬 마음

편한 일이 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마음을 찢는 고통은 차라리 죽을지언

정 느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카이엔은 가슴이 아팠다.

[ 역궁(逆窮) 개문(開門) ]

카이엔은 표정없는 얼굴로 주문을 외워 공간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거침없이 그 속으로 발을 옮겼다.

리시엔은 그의 이름을 불러 그가  돌아가지 못하도록 붙잡고 싶었지만

입에서는 어떤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듯이 목

소리조차 스스로의 의지로 조정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 카이엔........'

리시엔은 마음속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정확하게 나이를 따져보지는

않았지만 분명 카이엔은 자신의 동생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

로 밝혀지게 된다 하더라도 리시엔은  결코 동생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카이엔을 대할 수 없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비록 짧은 시간에 불과했다 해더라도 그 시간들은 리시엔에게 있어 무

엇보다 소중하고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아무말을 하지 않아도 단지  얼

굴만을 바라보는 것 만으로 만족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깊이.

[번  호] 7884 / 8063      [등록일] 2000년 05월 03일 00:30      Page : 1 / 10

[등록자] 까망포키         [조  회] 94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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