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흑룡의 숲 2부 >
연(緣)...
제 15장. 舛(어긋난 시간)
五.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아니, 다른 말은 필요가 없다. 그저 단 한마디 어째서... 어째서라는 말
로 묻고 싶었다. 다른 무수한 말들은 아무런 필요가 없다.
그러나 리시엔은 어머니의 얼굴을 보는 순간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어
떻게 행동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조차 모두 잊은 채 굳어진 석상처럼 움
직이지 않았다. 눈조차 깜빡이지 않으며 어머니의 모습을 두 눈에 담았
을 뿐이다.
그리고 미미한 흔들림조차 담겨있지 않았던 리시엔의 눈에서는 스스로
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맑은 액체를 떨구고 있었다. 그렇게 흘러내
리는 물방울 때문에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고 나서야 리시엔은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결코 그의 앞에서는 눈물을 떨구지 않았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모든 것
을 알아버린 지금. 더 이상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지도 알 수 없어진
지금 스스로의 의지를 배반한 채 눈물은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 돌아왔구나. 리시엔."
그녀는 언제나 그렇듯 어머니라는 커다란 이름으로 자신의 앞에 서 있
었다. 눈에 띄게 커다란 변화를 담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자상한 어머
니가 되어주지는 않았지만 리시엔이 알고 있는 시하라는 언제나 어머
니였다.
"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구나."
어머니의 감각일까. 리시엔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시
하라는 표정만으로 리시엔에게 어떤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알아채고
있었다.
" 사실을 말해주세요......"
리시엔은 속삭이듯 작은 음성으로 말했다.
시하라는 리시엔이 자신에게 말하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 말 없이 의문을 담은 시선을 딸에게 돌렸다.
" 사실을 말해주세요.... 사실을......!"
리시엔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안에 담긴 간절한 바램은 무척 깊은
것이었다.
그리고 시하라는 리시엔의 눈동자와 마주쳤을 때 비로소 리시엔이 무
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알았다. 자신이 오랫동안 감추어 왔던 사실을 가
르쳐 줄 것을 요구하고 있음을.
" 결국엔 알았구나."
시하라는 평이한 음성으로 말했다.
리시엔은 허탈하게 웃었다. 어머니의 평소와 다름없는 음성이 가슴을
찌르듯 날카롭게 느꼈다.
" 그랬나요. 처음부터 그렇게 담담하게 말할 수 있었군요. 어머니
는......"
시하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 차라리 제가 하계에 간다고 했을 때 어머니가 만류했더라면 이렇
게 슬프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리시엔은 지금 자신의 말이 억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과거
를 바꿀 수 있는 존재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그럼에도 불구
하고 이렇게 말하는 것은 마음이 너무나 아팠기 때문이다. 어머니로 인
해 이어지게 된 인연으로 자신은 나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상처를 입
은 것이다.
아무리 어머니로 인해 카이엔과 자신이 혈연관계로 이어지게 되었다고
해도 그것은 그저 하나의 펼쳐진 사실에 불과했다. 어떤 보이지 않는
끈이 둘을 연결해 끌어당긴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단순히 혈연으로서
의 이끌림을 서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인지. 그러나 사실을 알고 돌아선
지금 순간에도 이렇게 가슴이 아픈 것은 무슨 연유일까.
" 언제까지 사실을 덮어두실 생각이셨나요...."
리시엔은 처음보다는 많이 나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여전히 잔 떨림이
담겨있긴 했지만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의 것은 아니었다.
" 난 용족이라는 이름에 커다란 가치를 두지 않았다. 그래서 선택하
고 행동했지만 후회하지 않아. 리시엔. 너는 처음 너의 선택에 후회를
느끼고 있느냐?"
리시엔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배신감만을 안겨줄 것이라 여겼던 어머니
가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질문을 되돌려 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
기 때문이었다.
" 저도 후회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진실은.... 모르는 편이 나아요."
" 그래..."
시하라 역시 리시엔이 마음을 준 인간이 자신의 아들인 것은 알지 못
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세상에 아무리 우연이 많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리시엔이 카이엔과 만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아마도 죽을 때까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시하라는 생각했다. 카이
엔은 자신의 정체조차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할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사람의 인연이라는 것은, 그리고 삶이라는 것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게 흘러가지 만은 않았던 것이다. 그렇
게 해서 이처럼 복잡하고도 기이한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 모르는 채 살아갔다면 진정 행복했을 거에요. 진실 따위는 알지 못
하는 게 나아요. 바꿀 수 있다면 지워버리고 싶어요. 차라리 서로를 알
지 못했던 시절로 되돌아가서 다시 시작하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
면...."
리시엔은 고개를 숙인 채 점점 잦아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 보통의 인간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리시엔은 어머니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을 듣고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
랐다. 어머니는 너무나도 무책임하다.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고 오랜
시간을 지내오면서 자신과 아버지를 속여왔음에도 어떤 반성의 표정조
차 떠올리지 않고 있는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 어머니와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요....."
리시엔은 굳어진 목소리로 내뱉었다.
"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어요. 설사 두 분중에 한 분이 수명을 다하는
날이 온다고 할지라도."
리시엔은 그렇게 말하고는 어머니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녀가 그토록이
나 냉정하게 자신의 어머니인 시하라에게서 등을 돌린 것은 이미 다시
는 이어질 수 없는 사이라는 것을 알았어도 카이엔이 계속 그녀의 마
음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그와는 만날 수 없을지 모르지
만 어머니를, 자신을 낳았고 다시 카이엔을 낳은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그녀와 마주 대한 채 이야기를 나눈다면 자신은 죽을 때까지 카이엔의
그림자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결코 한 번 이어진 인연은 인위적인 어떤 것으로도 쉽게 잘라버릴 수
없다는 것을.
리시엔은 천계를 떠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방에 들렀다. 특별하게 챙겨
갈 물건은 없었지만 지금까지 백 수년간 몸담아 왔던 자신의 자리를
떠나는 순간이 오자 아쉬움이 밀려왔다. 리시엔은 되도록 천천히 시선
을 움직여 자신의 방을 둘러보았다. 옅은 황색의 옷장과 몇 개의 책장.
그리고 벽에 걸린 몇 폭의 그림들. 모두 자신이 오라버니 판유를 동경
하던 시절 그의 취미를 그대로 옮겨온 것들이었다. 카이엔의 시선은 계
속 자리를 바꾸며 움직였다. 오후의 나른한 햇살이 비치는 둥근 창에
시선을 던지자 그곳에는 몇 개의 자그마한 조각상이 놓여 있었다. 천계
를 떠나 카이엔의 곁으로 가던 그날에 모두 창가에 내려놓았던 것들이
었다. 자신은 한번도 본적이 없는 기이한 동물들의 형상. 그것을 보고
얼마나 신기하게 생각했던가. 그것을 보고 문득 처음 카이엔과 만나게
된 계기를 마련해 주었던 물건, 그의 손으로 만들어진 조각상을 떠올리
자 리시엔은 너무나 우둔했던 자신을 떠올릴 수 있었다. 처음에는 자신
이 우연히 그것을 발견하여 주웠지만 나중에 그와 알게되고 나서는 직
접 그를 통해 건네 받았었다. 그리고 그때 그가 자신에게 건네주었던
어머니의 조각상을 보고도 자신은 왜 아무 것도 알지 못했던 것일까.
그 조각상은 어머니와 너무나도 닮아있었는데.
' 바보였어. 눈앞의 일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리시엔은 자신을 원망했다. 조금 더 깊이 돌아올 수 없을 만큼 빠져들
기 전에 이름모를 감정의 늪에서 헤어나올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과거는 결코 돌이킬 수 없지만 그 과거를 되새기는 현재는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시간의 연속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망울. 처음 마주쳤던 그는 그렇게 깊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알 수 없는 감정으로
휩싸인 그의 시선은 리시엔을 잡아 끌었다. 마치 오랜 과거에서부터 그
렇게 예정되어 있었던 것처럼 너무나도 급작스럽고도 자연스럽게, 그렇
게 마음의 문은 소리없이 빗장을 풀었다.
' 카이엔....'
어째서 알지 못했을까. 그의 이름이 보통 인간들이 가지는 이름과는 확
연히 다르다는 것을. 오히려 자신과 마찬가지로 용족들이 가친 이름처
럼 익숙하게 들려온다는 것에 왜 어떤 의심도 품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가 교룡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마음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조금 더 깊이 생각했어야
옳았다.
그리고 그렇게 드물게 태어난다는 교룡이 어째서 자신과 마찬가지로
백룡의 피를 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 이상의 것은 생각하지 않
았던 것일까. 어째서.
리시엔은 자신에게 그렇게 묻고 또 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리시엔은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때의 자
신은 어떤 것도 뒤돌아 보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깊이 카이엔에게 시
선을 던지고 있었으므로.
그리하여 이같은 현실을 알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번 호] 7931 / 8063 [등록일] 2000년 05월 04일 19:41 Page : 1 / 11
[등록자] 까망포키 [조 회] 77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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