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룡의 숲-124화 (124/130)

< 흑룡의 숲 2부 >

연(緣)...

제 15장. 舛(어긋난 시간)

六.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카이엔은 스스로의 의지로 피를 부르고 있었다.

이미 이 비릿한 피의 향기가 주는 정신을 앗아가 버릴 듯한 감각에 취

해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만은 달랐다. 이렇게 미친 듯이 모든 것을 부수고  또 파괴

하는 것은 극심하게 밀려오는 마음의 통증을 느끼지 않기 위함이었다.

" 전진하라!"

커다란 외침소리와 함께 질서 정연하게  도열하고 있던 무수한 인마가

앞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붉고 푸른 깃발들이 펄럭이고  번쩍이는

은색의 광채가 들판을 가득 채웠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무수한 이들이 한데 모여 앞으로 내달리는 모습을

카이엔은 그저 멍한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장엄하기까

지 한 이 광경은 카이엔에게 있어 결코 낯선 장면은 아니었다. 이미 오

래 전에 자신 역시 친우 도수를 따라 몇 번 전장에 나선  적이 있었다.

그리고 도수의 죽음  이후에는 표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황제의 명을 받은 그림자로서 빠지지 않고 전장에 나서곤 했다.

인간들은 보다 넓은 땅을 얻기 위해, 보다  많은 돈을 얻기 위해, 보다

높은 곳으로 올라서기 위해 싸움을 한다. 동물들은 본능에 의해 움직이

며 그들이 싸우는 것은 스스로의 목숨을 지키는 목적, 혹은  먹이를 얻

기 위해 움직일 때와 같이 뚜렷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싸움은 그런 필요에 의해서가 아닌 보다 높은 곳으로 보다 더 많이 얻

고 싶다는 마음속의 끊이지 않는 욕망에 의한 것이었다.

다닥다닥.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점점  작게 울려 퍼졌다. 아직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 있었지만 수천 수만에 달하는 병사들과

함께 움직이는 말들은 점점 작게 화하고 있었다.

' 어째서 저렇게 뒤조차 돌아보지 않고 앞을 향해 달려가지?'

카이엔은 자신이 무엇에 의문을 느끼는 것인지도 명확히 알지 못한 채

그저 자신의 눈에 들어온 광경을 바라보며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는 작은 점이 되어버린 무수한 인파의 행렬. 분명 다른  어떤 나라

와 전쟁을 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이제는  그들 인간이

속한 나라의 이름을 아는 것에도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지만 조금 전

까지만 해도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던 그들의 모습은 카이엔의 머릿속

에 깊이 새겨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광경은  카이엔의 머릿

속에서 과거의 영상과 겹쳐지기 시작했다.

인간과 함께 인간의 마음으로 그 속을 누비던 그 시절.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은 채 그저 손에 든 창을 휘두르던. 서로의 마음을 아는 친

구가 있었기에 깊은 고민조차 하지 않아도 되었던 그때를 카이엔은 기

억해 냈다.

' 허망하게 지워져버린 과거는 너무나도..... 너무나도 무의미하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잠시일 뿐 결국 카이엔의 마음과 몸을 점령한 것

은 현실이라는 무거운 이름뿐이었다.

' 지우겠다. 과거 따위는.......'

카이엔은 걸음을 옮기며 미소지었다. 더 이상은 그 어떤 것에도 구애받

지 않은 채 모든 것을 지우고 싶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백지상태

가 되어 다시 시작할망정 지금은 모든 것을 지우고 싶었다.

카이엔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그리고 리시엔과 헤어진 그  날

이후로 단 한시도 통증이 멈추지 않는 가슴에 손을 올린 채 천천히 눈

을 감았다. 그리고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를 가만히 느꼈다.

이제는 둥둥거리는 작은  울림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  무수한 인마의

이동소리. 그리고 항상 곁에 머무른 채 떠나지 않는 작은  바람의 소리

를. 바람이 잎새를 흔들고 스쳐지나가며 내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순간 한동안 느껴지지 않았던 타오르는 듯한 갈증이 목을 따라

올라왔다. 그 갈증은 어떤 시원한 물로도 해소시킬 수 없는  본능의 요

구. 교룡으로 태어난 자가 평생 짊어지고 살아가야 할 업과도  같은 것

이었다.

카이엔은 싸늘하게 웃으며 가슴에 올리고 있던 손을 아래로 내리고 입

술을 움직였다. 그러자 카이엔의 입술에서는 공간을 여는 주문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카이엔은 정확하게 그들이 도착할 장소를 알고 있었다. 그곳은 수만 명

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초원이었다. 아직 자신의  눈앞을 지나

쳤던 인마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지만 카이엔은 머지않아 그들

이 이곳에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카이엔이  그들을 기

다리는 것은 다른 하나의 이유를 포함하고 있었다. 카이엔 이외에 넓은

초원에 자리하고 있는 다룬 존재들. 머지 않아 도착할 무수한 사람들을

기다리며 그들과 대적하기 위해  숨을 죽이고 있는  또 다른 사람들이

그곳에 질서정연하게 도열한 채 서 있었던 것이다. 실로 오랜만에 목격

하게 되는 대규모의 싸움이었다.

" 준비하라!"

그리고 멀리서 작은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하자 가장 앞에서서 군사들

을 지휘하는 한 남자가 크게  소리쳤다. 그 소리는 고요하던  평원안을

메아리치며 크게 울렸다.

그리고 병사들이 다음 순간을 대비하여 손에  든 무기를 꽉 쥐는 것과

마찬가지로 카이엔 역시 기다렸다.

자신의 온 몸을 미치도록 떨리게 만드는  갈증을 풀어줄 그 유일한 샘

물을 찾아.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본능이 시키는대로.

" 전진!!"

그리고 동쪽 편에서 먼지를 피우며 달려오는 인마의 행렬이 모습을 드

러냈을 때 펄럭이는 검은 깃발이 자신의 눈앞에서 움직이는 것을 조용

히 응시하며 카이엔은 온몸의 힘을 한곳에 모았다.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거대한 힘으로 모든 것을 지워버리기 위해서.

다시는 이 타는 듯한 괴로움을  전하는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그리고

그 갈증보다 더한 고통을 느끼게 만드는 괴로운 기억을 지워버리기 위

해서.

금방이라도 땅이 무너져 내릴 것처럼 커다란 소리가 울려퍼졌다.  인간

이란 혼자 있을때는 지극히 미약한 존재에 불과하지만 이처럼 많은 수

가 모이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큰 힘을 내게  마련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본래부터 마력을 타고난 영수족과는  비견될 수 없지만 그렇다해

도 인간의 힘을 함부로 무시할 수는 없었다.

잠시 카이엔이 생각에 잠긴 사이 검고  푸른 갑주를 걸친 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맞붙어 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용히 그들의  모습을 내

려다보던 카이엔은 끌어 모았던 힘을 한번에 내뿜기 위해 주문을 읊조

리기 시작했다. 여러 번에 걸쳐 요희가 준 피로 인해 자신의 힘은 몰라

볼 정도로 크게 높아져 있었다. 그러나 비록 천오에게 조차  미치지 못

하는 힘이어도 인간들에게는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라는 사실에

는 변함이 없었다.

카이엔은 크게 소용돌이 치는 거센 바람의 움직임을 조정하듯 두 손을

하늘을 향해 뻗어올렸다.

*            *            *

가신은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도 그럴것이 지금 자신의 눈

에 비치는 광경은 아무리 담이 큰  자라 할지라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

는 배기지 못할 정도로 끔찍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짙푸른 녹색을 띄고 있어야 할 풀들을  뒤덮고 있는 것은 검붉게 굳어

진 피의 빛깔. 그리고 그 피를 흘린 시체들에게서 풍겨  나오는 냄새가

모든 것들을 뒤덮은 채 안개처럼 그곳에 잠겨있었다. 사람이고  말이고

할 것 없이 한데 어우러져  바닥에 쓰러져 있는 모습. 그러나  시신 중

어느 하나도 온전하게 모습을 보전하고 있는 것이 없을 정도로 눈앞에

널부러져 있는 존재들은 갈기갈기 찢긴 상처를 가지고 있었다.

" 이것이 그.... 교룡이 한 짓입니까?"

가신의 물음에 적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그때의 교룡이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한 자신이

었지만 그 리시엔이라는 백룡족 여인의  존재가 그런 광폭함을 누그러

뜨리리란 것을 그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서로의 존재를  너무나도 깊이 이해하고 있다고

적수는 느꼈었다. 그 때문에 자신이  그토록 깊이 좌절감을 느낀  것이

아니던가.

" 어떻게 이런 일을 벌일 수가 있습니까. 항거할 힘조차 가지지 못한

인간들에게...."

가신은 어느새 망연한 표정이 되어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같은 일을 벌인 것일까. 명계라는  땅은 도저치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지른 자들이 사는 곳이라고 하는데 그들도 지금

그 한 명의 교룡이 한 일에 비하면 선한 일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

도로 여겨졌다.

" 우리가 할 일은 그 교룡의 행방을 찾는 것이다.  지난번에 힘을 겨

루었을 때에는 내쪽이 조금 우세했다.  분명 우리 둘의 힘을  합친다면

그 교룡을 잡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

적수는 그렇게 말하고 피비린내 나는  시체들의 틈속에 발을 들여놓고

혹시라도 남아있을지 모르는 교룡의 흔적을 찾기위해 몸을 움직였다.

" 적수님......."

그리고 그런 적수의 모습을 가신은 놀란 눈으로 응시했다. 기린족이 어

떤 일족인가. 세상에서 가장 평화롭고 조용한 것을 추구하는 일족이 아

니던가. 그런에 그런 기린일족의 가장  진한 혈통을 가진 적수의  지금

행동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상황이 그렇게  급한

것이라해도 적수가 직접 나서서 움직일  것이라고는 한번도 생각한 적

이 없었다.

' 적수님께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일이 생겨났던 것이 분명하군. 지

난번에도 내게 그런 말씀을 하시더니...'

가신은 자신과 떨어져 지내던 얼마간의  시간동안 적수의 생각을 송두

리째  바꾸어 놓을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에 그저 놀랄 따름이었

다.

" 적수님. 이곳에서 무턱대고 흔적을 찾을 것이 아니라  주위를 둘러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공간을 여는 주문을 사용했다고 한다면 분명 이

곳이 아닌 빈 장소에서 행했을 테니 말입니다."

적수는 한참동안 정신을 집중하고 교룡이 남긴 흔적을 찾으려 하던 중

가신의 말을 듣고 그가 말한 것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음이 급한 나머지 성급하게 생각조차 하지 않고 몸을 움직였던 것이

다.

" 함께 찾아보도록 하지."

그 말에 가신은 안도하며 자신의 주군이 다시 시체들의 틈에서 빠져나

오는 것을 조용히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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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지우는 것은 완결편까지 올린 다음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

오늘은 토끼가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았습니다. 불쌍한

토끼..T^T

아자아자. 힘내서 글쓰잣!

작가대전에서는 1등은 했지만 더 괴로운 일이 기다리고 있구나...

[번  호] 7933 / 8063      [등록일] 2000년 05월 04일 19:42      Page : 1 / 10

[등록자] 까망포키         [조  회] 82 건

[제  목] [흑룡의 숲 2부] 연(緣)... - 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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