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룡의 숲-125화 (125/130)

< 흑룡의 숲 2부 >

연(緣)...

제 15장. 舛(어긋난 시간)

七.

" 좋아."

요희는 미소지으며 카이엔에게 손을 내밀었다.

" 유채색으로 물든 세상에는 미련을 가지지 않아도 좋다.  그곳은 밝

음을 가진 대신 무수한 상처를 주는 곳이니까."

과거에는 요희와 천오의 말을, 그들이 내뱉는 지독하게 깊은 감정이 섞

인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들만큼 아니  어쩌면 시

간에 의해 퇴색된 기억을 가진 그들보다  훨씬 더 자신은 깊은 씁쓸함

을 맛보았는지 모른다. 그것도 혈육이라는 이름에 의해서.

" 나는 그 모든 것을  없앨 것이다. 6계는 모두 하나처럼  이어져 있

지. 그냥 생각하기에는 아무런 연관도 없어 보이지만 어느 한곳이 무너

지면 그 여파는 모든 곳에 미친다. 과거의 나는 천계를  무너뜨리고 싶

었지만 이제는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요희는 섬뜩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얼마전의 자신이었다면 분명 그

런 요희의 표정을 보며 흠칫하고  몸을 떨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상하게도 그런 그녀의 모습이 전혀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 가장 손대기 쉬운 하계를  무너뜨리면 분명 천계에 있는 용족들이

크게 당황하겠지. 다른 어떤 자들보다 하계에 깊이 연관되어 있는 것이

그들이니까."

요희는 날카롭게 자란 손톱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쓰러 내리며 말했

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빛을 품은 그녀의 손톱은 금방이라도 얼굴을 찌

를 듯 했지만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 힘을 다루는 법을 더 알고 싶습니다."

카이엔은 조용히 말했다. 자신의 귀에도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기이하

게 가라앉은 음성.

그러나 상관없었다. 이미 자신은 더 이상 과거의 자신이 아님을. 그 강

요의 시간 속에서도 지키고  있던 자신의 마음을  이제 스스로 부수어

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존재해야만 하는 자신을

지탱시켜줄 다른 무언가를 찾는 수밖에는.  그래서 카이엔은 선택했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자의 곁에서 움직이는 것이 최선이라고 오직 그것

만이 진실이라고 그렇게 여기며.

*            *            *

서늘하게 가라앉은 시선. 그 시선에  비추는 것은 음유한 기운을  가진

푸른 안개였다.

그 기운은 그리 낯설지 않은 모양새로  점점 주위를 향해 퍼져가고 있

었다. 기억하기로는 천오가 내뿜는 힘이 그 같은 형태였으며 요희가 가

진 힘 역시 그같이 음유함을 간직한 푸른 안개였다.

천오는 아무 말 없이 손을 움직여 자신의 힘이 어떤 식으로 흐르는 지

를 카이엔에게 보여주었다. 손끝을 타고 퍼져 나온 음유한 푸른 기운이

대기에 닿자 마치 강물에  파문이 퍼지는 것처럼  주위에 안개가 되어

뿌려졌다. 그 여파로 바닥까지 닿을  정도로 길게 늘어져 있던  천오의

머리카락이 미미하게 흔들리며 주위를 둘러싼 안개 속으로 퍼졌다.

카이엔은 조용히 그것을 응시하다가 천오가  힘을 멈추는 것과 동시에

그가 한 동작을 따라했다. 손끝을 타고 무언가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간신히 볼 수 있을 정도로  희미한 푸른 안개가 모습을 드러냈

다.

" 그저 힘에 몸을 맡기면 된다. 쓸데없이 주문을 쓸  때처럼 힘을 조

정하려 할 필요가 없다."

천오는 카이엔의 동작을 하나하나 살피며 잘못된 점을 일깨워 주었다.

그렇게 한동안 계속 연습을 하자 아직 미약하기는 했지만 카이엔 역시

천오가 쓰는 것과 비슷한 힘을 낼 수 있게 되었다. 그 힘은  무작정 노

력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죽은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유의 기운이 불러내는 것이지만 카이엔은 아직 죽음을 맞이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요희가 준 피를 통해 그 힘을 낼 수 있었다.

" 혹시... 알고 있습니까?"

카이엔은 주문을 끝내고 천천히 손을 내리며 물었다. 그러자 천오는 시

선만을 돌려 카이엔을 응시했다.

" 어째서 용족들에게 교룡이 금기시 되는 존재가 된 것인지."

" 훗."

천오는 그 말을 듣자마자 피식거리는 웃음을 터트렸다. 아주 우스운 것

을 보았다는 듯이. 그러나 그 웃음은 잠시 뿐 천오의 얼굴은 금새 평소

의 냉담한 그것으로 되돌아왔다.

" 지금은 이미 어떤 용족도  기억하고 있지 않겠지만 천계의 시간으

로 만년에 가까운 시간 전에는  교룡이 지금과 같은 처지가  아니었다.

교룡이라는 말은 전부터 있어왔지. 용족이 인간들이 사는 하계를  움직

이는 역할을 하게 되었을 때부터, 그리고 인간들이 하계에 살기 시작했

던 때부터."

카이엔은 담담하게 흘러나오는 천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미동조

차 하지 않았다.

" 그리고 최초는 아니지만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처음에

태어난 교룡이 있었다. 그는 왕족의 피를 이은 자였지. 더군다나 단 하

나뿐인 용왕의 후계자였다."

카이엔은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깜짝 놀랐다. 자신이  아

는 교룡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천오에게 들은  것이기는 하지만 결코

교룡의 존재가 달가운 존재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알고있

었다.

" 비록 교룡이기는 했지만 그자는  확고한 자신의 자리를 가지고 있

었고 용왕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했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는  아무리

오랜 시간 전이지만 많은 고통이 따랐지.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일족들

에게 다음의 용왕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그리고 스스로의 마음  역

시 바꾸지 않으면 안되었지."

카이엔이 스스로 명계의 존재가 될 것을 인정하자 천오의 태도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여전히 싸늘하고  냉담한 말투를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예전과 같이 무턱대고 카이엔의 신경을 거스르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오

히려 다정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카이엔이 묻는 말이나 원하는 일

을 들어주었다.

천오는 잠시 기억을 되살리는 듯 말을 멈추었다가 천천히 숨을 내뱉고

는 입을 열었다.

" 힘든 시간들을 보내고  그가 왕이 되었을  때 다른 일족들은 물론

그 자신까지 마음을 놓았다. 더 이상은 자신의 출신으로 인한 어려움이

따르지 않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에  불과했

지. 그자는 인간의 피가 흐르는 것 때문에 용족이 가진 본연의 힘을 쓸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당시 용족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봉황족에 의해

죽음에 이르게 될 정도로 깊은  상처를 얻었지. 비록 죽지는  않았지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당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삶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이엔은 찬물을 온 몸에  끼얹어진 듯한 느낌이  들어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과거에는 교룡도 지금과 같은 대접을 받지 않았다는 것에

부러움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처럼 비참한  일을 겪게 되었다니 자신의

일은 아니었지만 기분이 더욱 착잡해지는 것이었다.

" 그래서 그는 결국 왕의 지위를 버리고, 자신에게 마음을 준 여인의

곁을 떠나 하계로  내려갔다. 그리고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

어쩌면 하계에서 최후를 맞이했는지도 모르지. 어느 누구도 확인한  바

가 없으니."

천오는 다시 피식하고 웃었다.

" 그때 이후로 태어나는 교룡들은 이유 없는 갈증을  느끼게 되었다.

뚜렷한 이유도 알 수 없지. 그 전의 교룡들은 그저 체력이 약했을 뿐이

지 지금의 네가 느끼는 것과 같은 타는 듯한 갈증은 몰랐다."

천오는 카이엔과 마주 대한 이후로 가장  많은 말을 했다는 사실을 깨

닫고는 자신도 모르게 자조적인 기분이 들었다.

혼란스럽게 부서져 내리는 기억을 가지고 살아온 지 얼마나 많은 시간

이 흘렀던가. 지금까지는 자신 이외에 살아있는 교룡은 없었다. 교룡이

라는 이름이 가진 무게를 오직 혼자만이 느끼며 괴로워하던 나날들. 아

무리 무수한 시간이 흘렀어도 결코 그 무게는 반감되지 않았다.

" 어떤 용족들도 이 갈증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든지 알지

못한다. 그저 교룡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용족의 생기가 필요하다는  사

실이 알려지게 되자 교룡들은 당연히 배척 당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들

은 결코 반쪽짜리를 일족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니까. 이무기는 이무기일

뿐 영원히 용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나 당연시하고 있으니

까."

천오의 눈빛은 점점 날카로워졌다.

" 용족의 자부심은 수만년이  지나도 결코 흐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진하게 변해갔지. 지금에  와서는지독하게 두터운 벽으로  느껴질

정도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용족뿐이 아니다.  영수족 역시 다를 바가

없어."

카이엔은 이제서야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이 교룡이라는 이유

로 어떤 해도 입지 않았던 것은  스스로 자신의 정체를 몰랐기 때문이

기도 했지만 자신의 존재를 환하게  드러내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이었

다. 만약 다른 누군가가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분명 지금  이런 모습으

로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 교룡은 태어나서도 안되며 살아갈  가치 조차도 없다고 그들은 말

하지. 타인의 생명을 빨아먹고 살아가는 벌레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태

어나는 것을 선택할 자유란 누구에게도 없다."

천오의 말은 카이엔의 마음속에 마치  크게 울리는 메아리처럼 사그라

들지 않고 퍼져만 갔다.

[번  호] 7979 / 8063      [등록일] 2000년 05월 06일 02:54      Page : 1 / 44

[등록자] 까망포키         [조  회] 70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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