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흑룡의 숲 2부 >
연(緣)...
제 16장. 銘(각인)
꿈꾸듯 그렇게
눈을 감고
과거라는 이름아래
흘러간
미명의 강물을 거슬러 올랐다.
一.
눈을 감자 모든 것이 검은 빛으로 바뀌었다. 무채색이 모든 것을 점령
하고 있는 세상이기는 하지만 역시 가장 편안한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그 검고도 검은 깊은 어둠의 빛깔이다.
" 샹린........"
작은 중얼거림이 엷게 퍼져 나왔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과 날카롭지만 결코 차
갑지 않았던 눈동자. 그리고 입가에 매달려 있던 환한 미소. 그의 미소
를 본 것은 단 한번이었지만 그 미소는 수천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에
도 지워지지 않은 채 더욱 선명히 가슴속에 남아있었다. 그랬다. 그는
한번 보면 결코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그는 특별했다. 단지 외모만이 아
닌 그가 지니고 있던 마음이 자신에게 건네주었던 말이 너무나도 따스
했기에 그토록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잊지 못하는 것이다.
비록 그는 시간의 강속으로 흘러 들어가 다시는 만날 수 없지만, 그때
의 그는 단 한순간의 악연으로 자신을 받아들이고 또 동정했겠지만 자
신에게는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때문에 자신은 이토록 용
족의 피에 얽매이는 것이다. 그 때문에 그와 같은 일족이라는 이유로
천오를 받아들였고 또 훼이를 증오하는 것이다.
요희는 짙푸른 빛깔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웃었다.
그가 떠난 후 변해버린 자신의 머리색. 슬픔이 모든 것을 채워버린 탓
일까. 아니면 절망의 빛이 푸른색이라서 일까. 그가 지니고 있던 투명
하고 맑은 푸른색은 영원히 자신으로서는 지닐 수 없는 색이었다. 명계
에 오직 어둡게 가라앉은 무채색만이 존재하듯이 자신은 마음 속으로
도 그 빛깔을 담지 못하는 것이다.
영원히 시간이 흐르지 않는 세상에 속한 자신은 명확하게 그 흐름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어찌된 이유일까. 그 시간의 흐름을 깨달은 것은
과연 언제부터일까.
왜 다른 이들처럼 모든 것을 잊지 못하고 깊이 가슴에 묻어둔 채 점점
더 깊은 광기의 바다로 빠져드는 것일까. 그러나 모든 것을 스스로 깨
닫고 있음에도 결코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 그러니까 모두 사라지게 만들 거야. 더 이상의 밝은 색이 모든 것
을 뒤덮지 않도록.... 영원히....'
* * *
[ 수륜(水輪) 개(開)! ]
커다랗게 울리는 주문을 외치는 소리와 함께 소용돌이 치는 둥근 물
의 고리가 파공성을 내며 자신을 쫓아오고 있었다.
팟-!
그리고 그것은 스스로의 의지를 지닌 생물처럼 속도를 더해가며 움직
여 결국에는 그의 등에 파고들었다.
" 큭...."
천오는 입술을 꽉 다물고 있었지만 격한 통증으로 인해 신음소리가 새
어나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천오는 자신의 등을 적시고 있는 축축한 액체
가 주문의 여파로 인해 생겨난 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손발
을 마비시킬 정도로 격심한 고통이 아니더라도 코끝을 스치는 비릿한
내음이 그것이 무엇인지 생생하게 가르쳐 주고 있었다.
' 벗어나야 해.....'
금방이라도 다리에서 힘이 풀려 쓰러질 것 같았지만 천오는 온 힘을
다해 앞으로 달려나갔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 앞에 무엇이 존
재하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앞으로 달려가야 한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것은 마치 본능과도 같았다. 살아야 한다는 커다란 본능이
끊임없이 앞으로 달려갈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 언제였던가. 자신이 절망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깊이 깨닫게 된 것
은. 그 말과 조우함으로 인해서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심연의 나락에 빠져들게 된 것은.
" 천오. 이리로 오너라."
단정하고 흔들림 없는 목소리가 자신을 부르자 천오는 급히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서 어머니가 자신을 부른 까닭이 무엇
인지 혼자 생각해보며 걸음을 옮겼다. 잘 다듬어서 말리기 위해 물에
씻고 있던 산열매는 햇살을 받아 더욱 붉게 빛나고 있었다.
어머니는 천오가 글을 익히고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될 무렵부터 교룡
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교룡이 무엇인지, 인간도 그렇다고 용족
도 아닌 존재라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그러나 그 사실 때문에 그녀는 더더욱 천오의 곁을 떠나지 않고 항상
함께 있었다. 자신이 원해서 한 선택이었고 결과이기에 당연하다고 여
기고 있는 것이었다.
'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해 주실까....'
천오는 어머니가 자신을 부르는 까닭이 평소와 마찬가지로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한 것이라 생각했다. 어머니는 항상 천계를 비롯한 다른 세
상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용족을 비롯해 환계에서 살아가는 영수족의
이야기와 모든 살아있는 자들의 수명을 관장하는 천제가 살고 있는 천
상계의 이야기까지. 자신이 속하지 못했지만 이어져 있는 세계이기에
천오는 그 이야기에 정신 없이 빠져들었다.
" 어머니."
천오는 어머니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무런 장식조차 하지 않은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자신에게 시선을 주고 있는 어머니
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옷차림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얼마나 그녀를 돋보이게 만드는지 알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천오는 타인과의 접촉이 거의 없는 생활 속에서도 자신의 곁에서 항상
단정한 태도로 많은 것을 가르쳐 주는 어머니가 너무나도 자랑스러웠
다. 자신은 비록 교룡이지만 그녀는 용족이라는 이름에 어긋나지 않을
만큼의 모든 소양을 지니고 있었다.
" 어머니. 하실 말씀이 무엇입니까."
천오는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어머니
를 재촉하듯 다시 그녀를 불렀다. 그러자 그제서야 그녀는 무언가에서
깨어난 듯 희미하게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 절대 나를 마음 속에 담아두지 말거라. 모두 지워버리고 다시는 기
억하지 말아라. 다음에 태어날 때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인간으로
그렇게 태어나거라."
천오는 잠시 머릿속을 채운 혼란 때문에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인지 이
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체 지금 어머니가 무슨 말을 한 것인지. 왜
그런 말을 자신에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천오의 의문에
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머니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 날 원망해라..... 하지만 기억은 하지 말아라......"
그리고.
푸욱.
날카로운 통증이 가슴을 꿰뚫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축축한 무
언가가 옷을 타고 바닥으로 점점이 떨어져 내렸다.
" 어머니....?"
가슴을 따라 온 몸에 번져 가는 통증보다 천오에게는 어머니의 말이
주는 의문이 더 크게 느껴졌다.
" 미안하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처음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천오는 흐릿하게
변해 가는 시선으로 그녀의 눈동자가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네게 고통을 주기는 싫지만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한 과오이니 어쩔
수가 없다."
천오는 무언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술만이 달싹거릴 뿐 어떤 말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 차라리 널 낳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중얼거리며 웃었다. 늘 그녀의 입가에 머무르던 미소가 너무나
도 아프게 느껴지는 것은 천오의 가슴에 꽂힌 비수 때문은 아닐 것이
다.
어머니는 결코 천오에게 교룡의 존재가 용족에게 있어 가장 금기시 되
는 존재라는 것을 말해주지 않았다. 그저 인간을 마음에 담고 있었기에
그 순간의 행복을 위해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고 하계로 내려온 것이
다.
그렇게 해서 시간은 흘렀고 천오는 태어났다. 교룡이 어떤 존재인지 왜
탄생을 막는 것인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알면서도 천오
를 낳고 길렀다. 자신에게 주어진 아내라는 이름과 어머니라는 이름은
이후에 닥쳐올 어떤 일들도 지워버릴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넓이를 가
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 날 원망해라. 널 교룡으로 태어나게 만든 나를..."
" 어.....머니..."
천오는 희미한 영상밖에 비추지 못하는 눈으로 어머니를 바라보며 손
을 내밀었다. 처음 자신의 손을 잡아주었던 그 날처럼 어머니가 가진
따스한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손을 잡
고 온기를 느끼며 잠들고 싶었다.
어머니의 손이 자신의 손에 닿자 천오는 간신히 손가락을 움직여 그녀
의 손을 감쌌다. 이제는 자신의 손이 어머니를 감쌀 수 있을 만큼 크게
변했다는 것을 느끼며 천오는 작게 미소지었다.
" 천....오...?"
따스한 무언가가 끊임없이 몸 속으로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그와 동시
에 천오는 자신의 귓가를 파고드는 어머니의 경악어린 음성을 들었다.
그러나 이미 흐릿해진 눈으로는 어떤 것도 볼 수 없었다.
그저 맞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눈물이 날 정도로 따스한 온기가 지금까
지 자신이 느꼈던 그 어느 감정보다 그립고 부드럽다는 것을 느낄 뿐.
"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치 깊은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상쾌한 기분
을 느끼며 눈을 떴을 때 천오는 무언가 크게 틀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
았다. 꿈이라고 여겼던 일은 현실임이 분명했다. 자신의 가슴에는 아직
도 어머니의 손에서 자신에게 꽂힌 비수가 그대로 박혀있었다.
경악이 온 몸을 주체할 수 없이 떨리게 만들었다. 지독한 악몽은 더 이
상 꿈이 아니었던 것이다.
" 어머니.....?"
천오는 떨리는 음성으로 어머니를 불렀다.
털썩.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손에 붙잡혀 있던 무언가가 바닥
에 떨어져 내리며 소리를 냈다.
" ........어..머니....?"
온화하지만 슬픈 듯한 미소로 자신을 바라보던 어머니의 얼굴은 이미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잴 수 없을 만큼 깊은 경악의 빛을 떠올
린 어머니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진 채 바닥을 향하고 있을 뿐.
' 왜.......'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은 꿈일 것이다.
하지만 천오는 자신의 손에 남아있는 희미한 온기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지 알고 있었다.
二.
백룡왕이 거처하는 풍천궁의 정문 앞에 도열해 있던 열명 남짓한 백룡
족 청년들은 진지함이 가득 담긴 얼굴로 오강의 말을 경청했다. 이처럼
백룡왕이 직접 어떤 일에 대해 나서서 명령을 하는 일은 거의 없었기
에 그들은 긴장하고 있었다.
"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만약 놓친다면 결코 되돌아올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 일족의 명예뿐만이 아니라 그가 치러야 하는 당연한 죄
값이다."
" 명심하겠습니다."
백룡왕 오강의 음성에 십수 명의 목소리가 하나가 되어 답했다. 그리고
그들은 왕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백룡왕의 명에
따라 특별히 선발된 그들은 전투 주문의 사용에 있어 커다란 두각을
나타내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백룡왕 오강의 명에 따라 그
들을 이끌기 위해 선두에 선 리강도 포함되어 있었다.
"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다. 이번을 놓친다면 아무것도 이루어
지지 않는 다는 사실을 명심해라."
리강은 공간에 들어선 십수 명의 백룡 일족에게 다시 한번 이번 일의
중요성을 주지시켰다.
다른 용족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최대한 조용히 일을 처리하는 것이
이번 일의 가장 중요한 관건이었다. 이미 다른 용족들에게 알려지지 않
았을 것이라고는 확신할 수 없지만 적어도 다른 용왕들이 손을 쓰기
전에 일을 처리하는 것이 옳았다. 일족의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교
룡을 탄생시킨 것이 백룡족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기 때문에. 아
직 처음 이 사실을 알려준 기린족의 황자 이외에는 교룡을 직접 마주
한 자가 없었기에 확신하지는 못했지만 남아있던 시체를 확인한 결과
그들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 바람의 술법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
고 바로 얼마 전 엄청난 대량의 학살이 있었다. 막 큰 싸움을 하기 직
전의 인간의 두 나라 병사들 수만을 말 한 마리 남기지 않고 모두 죽
인 일이 그것이었다. 용족들로서도 경악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엄청난
이번 일로 인해 분명 다른 용왕들도 사실을 알게 되었거나 의심을 품
었을 것이 명확했다. 그래서 오강은 서둘러 일족들을 하계로 보낸 것이
다.
백룡일족들이 하계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해가 서녘 하늘로 기울며 붉
은 족적을 남기고 있을 때였다.
평소라면 가벼운 마음으로 하계에 발을 딛었을 테지만 리강을 포함한
백룡 일족들의 마음은 한결같이 커다란 돌에 짓눌린 듯이 무겁기만 했
다.
" 먼저 큰 싸움이 있었던 곳으로 흩어져서 교룡의 흔적을 찾아라. 그
리고 많은 인간들이 모여있는 곳도 주의해서 살피도록. 교룡의 흔적은
아주 미세하기 때문에 제대로 주의해서 살피지 않으면 찾기 힘들다."
" 네."
리강의 명령에 따라 백룡 일족들은 각자 가야할 곳을 향해 움직였다.
순식간에 리강의 주위에 있던 열 명 남짓한 숫자의 백룡족들은 하얀
파오의 잔상만을 남긴 채 모습을 감추었다.
리강은 그들의 기운이 완전히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공간의 문을 열고
내려선 야트막한 언덕 위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 후..."
리강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백룡왕의 명을 받고 일족과 함께 하계에 내려오기는 했지만 이번일 만
큼은 자신도 어떻게 해결해야할 지 알 수 없었다. 그 교룡이 누구에 의
해 탄생했는지 그리고 어떤 생김새를 하고 있는 지도 알지 못한 채 드
넓은 하계의 땅에서 교룡을 찾는다는 것은 바다에서 황금색 조개를 찾
는 것과 마찬가지인 일이었다.
' 아무래도 이번 일은 더 깊게 얽힐 듯한 예감이 드는군.'
리강은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하고 자신 역시 다른 일족들이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룡의 흔적을 찾기 위해 움직였다. 그리고 그렇게 걸음을
옮기며 시선을 돌렸을 때 붉은 색으로 물들어 있던 하늘은 서녘 저편
으로 물러가고 그 자리는 어느새 옅은 청색의 물결로 뒤바뀌어 있었다.
* * *
바싹 마른 땅을 밟으며 흑룡족 여인 쳰란은 힘을 지니고 있음에도 비
를 뿌릴 수 없는 자신을 한탄했다.
벌써 하계의 동쪽 땅은 오랫동안 가뭄에 시달려 본래 한창 푸르게 자
라났어야 할 초목들이 제대로 자라나지 못하고 있었다. 본래 흑룡족인
자신이 해야할 일은 시간에 맞게 겨울을 부르는 일이지만 그뿐만이 아
니라 대기의 흐름을 조정하여 적당히 날씨를 바꾸는 일도 중요하다고
여겼다. 비록 용왕들로부터 함부로 날씨를 조정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들었지만 쳰란은 당장에라도 메마른 땅에 비를 뿌리고 싶었다.
그것은 인간들의 삶을 염려해서가 아니다. 어쩌면 그녀의 몸 반쪽을 차
지하고 있는 황룡족의 대지를 품은 기운이 이런 광경을 가만히 지켜볼
수 없게 만드는 지도 모른다.
그녀는 한동안 치파오의 소맷자락을 움켜쥔 채 고민에 휩싸여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작은 한숨으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
다. 아무리 마음이 동한다 해도 용족으로 태어난 이상 그리고 천계에서
살아가는 이상 정해진 규칙을 지키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 후, 차라리 다른 곳으로 가자.'
쳰란은 그렇게 생각을 바꾸고 걸음을 떼어놓았다.
그리고 그렇게 걸음을 옮겨 산 하나를 지나치자 그저 보기만 해도 마
음을 풍성하게 만드는 울창한 풀숲이 나타났다.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닌
데 한쪽은 그토록 메말랐고 이곳은 한없이 푸르른 모습을 보자 쳰란은
더욱 마음이 심란해졌다.
그렇게 풀숲을 응시하며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온 기이한 냄새가 그녀의 코를 간질였다. 그것은 그녀가 익숙하게 맡아
온 풋풋한 풀 냄새가 아닌 무언가 썩은 것 같기도 하고, 알 수 없는 어
떤 것이 고여서 풍겨내는 냄새 같기도 했다.
' 대체 이건......'
그녀는 냄새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막 풀숲의 중심부를 지나쳤을 무렵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이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마력을 담은 기운을 풍겨내는 존재. 분
명 그들은 그녀와 같은 용족임이 분명했다.
풀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여겼었는데 과연 그것은 자신의 착오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거의 달리듯이 빠른 걸음으로 달려온 두 명의 용족 남자가 나누는 이
야기 소리가 그녀의 생각을 확인시켜 준 것이다.
' 옷을 보니 백룡족이로군.'
쳰란은 하계에서 만난 같은 용족이기에 인사라도 나누려고 생각했었지
만 그들의 이야기를 듣자 그 생각은 바뀌어 버렸다. 쳰란은 길다란 풀
숲에 몸을 숨긴 채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 이 장소가 틀림없기는 한데 지독한 피 냄새 이외에는 어떤 흔적도
느껴지지 않으니 큰일이군. 백룡왕께서는 오랫동안 기다리시지 않을텐
데."
" 설마 우리의 움직임을 눈치챈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완벽하게 자취를 감출 리가 없을 텐데."
" 그럴 리는 없지. 우리는 여럿이고 그쪽은 혼자인데 그렇게까지 할
수 있을 리가 없어. 그렇지만 이상한 느낌은 드는군."
한 남자는 손을 턱에 괴고 생각에 잠긴 듯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
았다.
" 리강님께 듣기로는 그 교룡이 아주 어리다고 했는데 이렇게 자신
의 흔적을 완전히 지울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는 일이 아닌가."
" 그렇지."
' 교룡...?'
그들의 대화속에 들어있던 교룡이라는 단어 때문에 쳰란은 흠칫하고
몸을 떨었다.
항상 조심해야 할 존재로 어렸을 때부터 주의 깊게 가르침을 받아왔던
교룡이라는 말을 실제로 듣게 될 줄이야. 그것도 단순하게 가르침을 위
한 말로서가 아닌 살아있는 교룡의 존재를 두고 말을 하고 있음에야.
' 큰일이야. 어서 흑룡왕 전하께 알려야겠어. 분명 백룡족들은 다른
용족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고 움직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니까.'
교룡이라는 말이 가진 커다란 힘은 그녀의 마음을 채우고 있던 고민을
일순에 날려버리고 경각심을 되살렸다. 용족이라는 이름을 위협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존재 중 하나였기에 그 말 하나가 그녀의 마음을 휘
저어 놓은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三.
유안은 표정을 굳히고 보좌관에게서 전해들은 말과 하계에 내려가 있
던 일족에게서부터 전해 받은 문서의 내용을 몇 번이고 되새겼다.
하계에 내려가 있던 일족들에게서 이미 몇 번의 보고를 받았지만 단순
히 인간들의 나라에서 일어나는 전쟁이라고 여겼을 뿐이었다. 용족들은
하계의 계절을 비롯해 자연이 올바로 순환하는가를 책임지지만 그들의
역사에 손을 내밀지는 않는다. 그 때문에 일이 이렇게 깊어질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어느 누가 그들 인간의 싸움에 다른 누군가
의 입김이 닿아있으리라고 생각했겠는가.
" 또 다시 교룡인가?"
유안은 작게 중얼거렸다. 몇 천년에 한번 날까말까한 교룡이라는 존재
가 벌써 몇 번이나 모습을 드러낸 것인지. 자신에게 수모를 주었던 명
계의 교룡. 그와 이어져 있던 몇 번의 악연. 그리고 백부인 훼이의 아
들 역시 교룡이었으며 지금의 사건을 만들어낸 것 역시 교룡이었다.
" 그래서 지금 백룡족들의 움직임은 어떠하지?"
유안은 손에 들고있던 문서를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일족의 보고에
의하면 교룡의 움직임을 쫓아 여러 명의 백룡족들이 움직였다고 했다.
' 어쩌면 교룡 혼자만의 독단적인 행동이 아닐지도 모르지.'
유안은 자신이 겪었던 어린 시절의 씁쓸한 기억을 떠올리며 옅은 의심
에 빠져들었다. 자신이 성년식을 치르기 전 하계로 수행을 떠났을 때
제대로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교룡에게 사로잡혀 명계로 끌려갔던 기
억은 수백 년의 시간이 지나 강인한 흑룡왕으로 탈바꿈한 지금에도 가
슴속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 교룡의 흔적을 발견하는 대로 공격을 가해 척살 할 움직임을 보이
고 있습니다."
보좌관의 말이 아니더라도 유안은 돌아올 대답을 알고 있었다. 지금까
지 교룡의 존재를 알게되면 으레 그렇게 해 왔기에. 과거 훼이의 아들
만이 그의 비호아래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일 뿐 교룡이란 존재가 알려
지는 그 순간부터 목숨을 부지할 수 없게 되는 것이 정석이었다.
'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지.....?'
백룡왕의 움직임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둔한 용왕은 어디에도 존재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들이 침묵하고 있는 것은 이번
에 탄생한 교룡이 백룡족의 피를 이은 자였기 때문이었다.
유안은 깊은 사귐을 갖지는 않았지만 현 백룡왕의 성격을 알고 있었다.
그는 전대 홍룡왕이었던 란과 많지는 않지만 비슷한 점을 지니고 있었
다. 전대 홍룡왕이 가슴 속 깊이 품고 있던 호승심과도 닮은 감정. 악
의에 찬 것은 아니지만 백룡왕 오강은 다른 누군가의 간섭이나 선의의
배려도 바라지 않았다.
' 그냥 지켜보고 있어야 하나... 하지만...'
유안은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대체 어떻게 행동해야 옳은지.
백부인 훼이가 지금 곁에 있다면 그에게 도움을 청하겠지만 그는 자리
를 비운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 아니야.'
유안은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훼이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 나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훼이가
가장 마음 아파하는 일이 바로 단 하나뿐이던 자신의 아들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한 일이기에.
" 잠시 하계에 다녀올 테니 일을 좀 맡아주게."
갑작스러운 유안의 말에 보좌관은 깜짝 놀란 듯 했다.
" 함부로 움직이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진상은 알아두어야 할 것 같
아서."
" 예. 알겠습니다."
* * *
너무나도 익숙한 움직임으로 궁안을 걸어 집무실의 문앞에 당도하자
훼이는 당연하게 이곳에 익숙해져있는 자신의 모습에 작은 웃음이 나
왔다.
실로 수 백년만에 하계에 내려가 곳곳을 돌아보며 감회에 사로잡혔고,
다시는 가지 않으리라 여겼던 천상계에도 역시 다녀왔다. 이제는 과거
와 같이 억지스러운 관습이 많이 사라진 천상계는 이미 자신이 알던
장소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천상계의 모습에 기쁨대신 아쉬움을 느
낀 것은 어떤 이유일까.
손에 적당하게 힘을 가하자 희미한 마찰음과 함께 집무실의 문이 열렸
다. 익숙한 광경, 그리고 익숙한 내음. 집무실 가득히 배어있는 향은 바
로 종이에서 나는 풋풋하면서도 오래된 느낌을 주는 나무의 냄새였다.
" 돌아오셨습니까."
훼이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잠시 자리를 비우는 동안 일을 맡겼던
육백여살의 보좌관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 왔다.
" 내가 없는 동안 수고 많았네."
" 아닙니다. 흑룡왕 전하께서 매일같이 나오셔서 대부분의 일을 처리
하시고 저는 정리하는 일을 맡아서 했을 뿐입니다."
훼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보좌관의 곁을 지나쳐 책상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 그런데 흑룡왕은 아직 나오지 않았나?"
오랜만에 유안과 이야기라도 나누어 보아야겠다고 생각하며 훼이는 유
안을 찾았다. 그러나 훼이의 말을 듣자 보좌관의 표정은 아주 미미하게
굳어졌다.
" 무슨 일이 생겼나?"
" 그것이... 얼마 전 하계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비전하와 함께 그 일
을 알아보셔야 겠다며 나가셨습니다."
" 하계라....."
훼이는 낮게 중얼거리며 자신이 하계에서 보냈던 얼마간의 시간동안
어떤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는지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 어떤 일인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보게."
훼이의 말에 보좌관은 더욱 난처한 표정을 지울 수가 없게 되었다. 자
신이 이 말을 꺼냈을 때 과연 훼이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훼이는 말로 그를 재촉하지도 그렇다고 눈빛으로 그에게 대답을 요구
하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깊은 검은 눈동자로 시선을 던지고 있을
뿐. 그러나 보좌관은 결국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훼이가 어떤 반응을
보이던 간에 과거와 이것은 큰 연관이 없음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며.
" 하계에서 교룡이 나타나 소란을 피우고 있습니다. 벌써 수십만에
달하는 인간의 생명을 빼앗았다고 합니다."
훼이의 표정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눈빛조차 흔들리지 않
았다. 그 모습을 보자 보좌관은 안심할 수 있었다. 적어도 이번 일로
인해 훼이의 마음이 달라지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과거에 훼이가 인간의 피를 이은 아들을 데리고 천계로 돌아왔을 때
일족들 사이에는 엄청난 반향이 일어났었다. 다음 흑룡왕이 될 몸이었
던 그가 그같이 엄청난 일을 저질렀기 때문에. 그러나 그는 자신이 가
진 모든 것을 버리고 아버지라는 이름을 지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
룡이 가진 운명은 바뀌지 않았지만.
그 때문에 보좌관은 조심스러웠던 것이다.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훼이
의 마음에 그때의 상처가 남아있다면 이 번 일을 아는 것조차 그에게
는 옛 상처를 되살리는 일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 그래. 그렇다면 그 일은 흑룡왕에게 맡기고 그대와 나는 다른 업무
를 처리하도록 하지."
" 예. 알겠습니다."
담담한 훼이의 음성을 듣고 보좌관은 마음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며
정리해 두었던 문서들 중에서 우선 처리해야 할 것을 뽑은 후 훼이에
게 내밀었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든 훼이는 평상시와 조금도 다름없는
태도로 문서를 읽고 빠르게 그것을 처리했다.
훼이의 손에 들린 인장이 문서 위에 찍히는 소리를 들으며 보좌관은
자신이 염려했던 어떤 일도 생기지 않았음에 안도했다.
四.
" 요즘 하계에 갑작스레 용족들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네 존재를 눈
치챈 듯 하다."
카이엔은 침상에 걸터앉아 가만히 천오의 말을 듣고 있었다.
" 어떻게 하겠나?"
예전이었다면 분명 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카이엔에게 명령했을 것
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천오 역시 카이엔을 동료라는 이
름으로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나 그 동료라는 이름은 카이엔이
하계에서 살가아면서 느낀 것과는 다른 개념의 것이었다.
인간들이 으레 그렇듯이 서로에 대한 건실한 믿음과 정만으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 그것은 서로의 입장이 같다는데서 오는 동질감이었다.
" 분명 제가 움직이지 않으면 그들은 절 발견하지 못할테지요."
어쩌면 일족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백룡족들. 그러나 이제 그런 작은 망
상 따위는 지워 버린 지 오래였다.
자신이 있을 유일한 장소는 오직 이곳 명계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 아직 용족들을 상대하기에는 네 힘이 모자르다. 한 두명 정도의 용
족이라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겠지만 용왕족들과 비교했을 때는 턱없
이 부족하다."
카이엔 역시 천오의 말에 동감했다. 직접 용족과 싸워본 적은 없지만
처음 영수족과 싸웠던 때를 떠올리자 그 말을 수긍할 수 있었다. 처음
에는 그자의 정체를 알지 못해 그 강한 힘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나중에 천오에게 묻자 그자가 기린족의 황자였음을 알게 된
것이다.
아직 나이도 많지 않은 황족이 그러한데 용왕이나 나이가 많은 용족들
의 힘은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 하지만 네가 진다는 보장도 없지. 앞으로도 네 힘은 점점 강해질
테니 한번 시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카이엔은 과연 자신의 힘으로 용족들과 싸워 이길 수 있을 것인지 생
각해보았다. 반항하지 않는 인간들과의 싸움은 이제 신물이 날 정도였
다. 인간들은 그저 자신이 내는 힘 앞에서 한낮 작게 움추린 동물이 되
어버린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도망치는 것일 뿐. 그러나 그
렇게 달아난다고 해도 결코 자신의 손에서 벗어나지 는 못한다.
" 한번 싸워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결국에는 그렇게 될
일이었으니 조금 앞당겨진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겠지요."
그렇게 말하는 카이엔의 표정은 날이 곤두선 칼과 같은 느낌을 뿜어냈
다. 마치 계속해서 무언가를 베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칼의 운명처
럼.
천오는 완전히 달라진 카이엔을 보며 기쁨도 그렇다고 씁쓸함도 아닌
감정을 느꼈다. 아직까지 자신에게 절망이나 분노를 제외한 감정이 남
아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기이하게도 카이엔은 자신에게 그
러한 미미한 감정의 움직임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오백여년 전 자신 역시 지금의 카이엔처럼 강한 힘을 가진 자와 싸웠
다.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요희의 명령이었기에 그리
고 자신을 버린 부모와 달리 끝까지 교룡인 자신의 아들을 지켰던 훼
이라는 존재에게 반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다른 용족들은 자신이 낳은 아이라고 해서 교룡을 비호하지 않았다. 그
런데 어째서 훼이라는 남자만은 모든 것을 버리면서까지 지키려고 하
는 것일까. 이미 아들은 한줌의 먼지가 되어 사라졌음에도.
수백년의 시간이 흐른 후에도 잊지 않고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에 천오
는 말할 수 없을 만큼 큰 충격을 받았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아들의 모
습을 하고 있던 자신을 죽이지 않았다. 다른 용족들에게 명계에 몸담은
존재는 죽여도 결코 죽지 않는 자이기에 더 이상은 손을 쓰지 않겠다
고 말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천오는 그 속에 숨겨진 진심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자는 비록 아들의 겉모습을 흉내낸 존재일 지라도 스스로의
손으로 상처입히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 바람의 힘이라면 이제 익숙하지만 다른 용족들이 나타났을 때 제
대로 대처할 수 있을지가 의문입니다."
천오의 회상은 카이엔의 목소리에 의해 깨어졌다. 그러나 그가 어떤 생
각을 하고 있었는지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는지는 결코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천오는 수 천년의 세월을 살면서 혼란스러운 기억을 지우
는 법과 얼굴에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이었다.
* * *
" 그냥 훼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면 좋았잖아요."
시령은 하계에 내려온 지 며칠이 지나도록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자
유안의 뒤에서 작게 투덜거렸다.
" 다른 일이라면 충분히 백부님께 도움을 청할 수 있지만 교룡에 관
한 일 만은 안돼. 시령."
유안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그녀 역시 훼이의 과거를 알고 있
지만 유안처럼 직접 겪지 못했기에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교룡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는지를.
" 백부님의 역린(逆鱗)을 건드릴 수는 없지."
" 하지만 아무리 같은 교룡이라고 해도 훼이의 아들과 이 교룡은 다
르지 않나요? 그리고 그걸 모를 훼이도 아니고."
유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 그건 당연한 사실이지만 내가 걱정하는 것은 백부님이 그로 인해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고 예전처럼 숲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게 된다거
나 하는 일을 염려하는 것이지."
훼이가 그렇게 나약한 마음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걱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 아, 그렇군요."
수긍은 했지만 시령은 결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흑룡왕비
라는 큰 지위를 가지고 있지만 아직 많은 나이를 먹은 것도 아니고 어
머니가 되어본 적도 없다. 그랬기에 그녀는 그 말의 깊은 의미를 알지
못했다.
부모라는 이름이 가지는 거대한 의미를.
" 훼이는 인간의 어떤 점이 좋았던 걸까....."
시령은 작게 중얼거리며 발끝에 걸리는 풀을 툭툭 건드렸다. 시령으로
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행동이다. 그리고 그러한 그녀의 생각은 다른
영수족들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오직 용족만이 인간에게 이끌림을
느끼고 교룡을 낳는다. 다른 영수족들은 결코 인간들에게 관심을 품지
않기에 그들의 피가 섞인 인간이 태어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설령
태어난다고 해도 그들의 피에는 마력이 흐르지 않는다. 그런데 용족만
은 달랐다.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들의 피는 인간의 몸에서
사라지지 않고 나타나는 것이다.
" 이 곳에는 아무것도 없으니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기지. 워낙 하계
에는 나라도 많고 땅도 넓어서 단번에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니 조금
마음의 여유를 넉넉히 가지도록 해. 시령."
" 차라리 제가 진신(眞身)으로 뛰어다니며 찾아보는 것이 더 빠를지
모르겠어요. 저도 진신일 때라면 작은 흔적도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으
니까요."
유안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 그렇게 까지 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그냥 천천히 나와 함께 움직이
지."
시령은 금방이라도 진신으로 화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유안이 만
류하자 금새 뾰루퉁해졌다.
" 시령. 그대는 스스로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잊은 건 아니겠지?"
부드럽게 묻자 시령은 여전히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짧게 대답했다.
" 물론이죠."
" 그렇다면 왜 함부로 행동하려 하는 것이지?"
" 이게 어째서 함부로 행동하는 일인가요. 용왕비라는 자리는 결코
조용히 자리를 지키기 위한 것만은 아니잖아요. 더군다나 저는 백호족
이에요. 백호족에게 조용히 수 백년의 세월을 보내라고 하는 것은 무리
에요. 잘 알고 있지 않나요?"
유안은 또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 결코 그대에게 조용히 시간을 보내라는 이야기가 아니야. 내가 그
렇게 말한 것은 모두 시령 그대를 아끼기 때문인데 대체......."
시령은 계속 뾰루퉁한 표정으로 유안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 괜히
풀에 발길질을 하고 있었지만 마음 속으로는 무척이나 기뻤다.
" 어서 장소를 옮기기나 해요. 시간이 그렇게 많은 줄 아나요."
퉁명스러운 시령의 목소리에 유안은 작게 웃으며 공간을 열었다.
五.
짙푸른 청색의 안개에 휩싸여 시야의 대부분이 마비된 속에서 호옌 찬
의 얼굴은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가슴을 울리는 예감이 점점
날카롭게 곤두서는 것을 보니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수일이 지나도록 교룡의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해서 초조한 마음을 누
를 길이 없었는데 주위의 안개까지 자신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
는 것이었다.
그는 온몸의 감각을 최대한으로 살리기 위해 노력하며 안개 속을 헤쳐
나갔다. 그러나 안개가 끝나는 지점까지 다다랐다고 생각했는데 한참을
더 걸어도 안개는 점점 짙어지기만 할 뿐 사그라들 기미를 보이지 않
았다.
' 어서 이 곳을 벗어나야 할텐데....'
그는 마음을 뒤덮는 불길함을 애써 떨쳐버리려 노력하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주위를 자욱하게 뒤덮고 있는 안개가 마치 살
아있는 생물체처럼 꿈틀거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호옌 찬은 조심
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 느껴지던 것은 자신의
착각이었는지 안개는 처음과 변함 없이 계속 허공에서 맴돌고 있을 뿐
이었다.
그는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기며 주위에서 울리는 소리에 좀 더 귀를
기울였다. 지금처럼 시야가 마비된 때에는 온몸의 다른 감각을 최대한
으로 살려 있을 지도 모르는 주위의 위험을 감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리고 그렇게 몇 걸음을 더 옮겼을 때였다.
[ 개문(開門) 풍(風) ]
희미하게 속삭이듯 들려오는 소리.
먼 거리에서 울리는 소리 같기도 했고 바로 귓가에서 울리는 소리 같
기도 한 기이한 울림.
" 누구냐!"
고개를 돌리며 호옌 찬이 소리쳤지만 대답대신 점점 더 소리를 더해가
는 개문의 주문만이 자신을 향해 빠른 속도로 짓쳐들어오고 있었다.
개문의 주문. 그것은 자신도 익히 알고 능숙하게 쓸 수 있는 주문이었
다. 아니, 백룡족이라면 어린 아이라도 쓸 수 있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가장 기초적인 주문이었다. 물론 마력의 크기에 따라 힘의 차이가 나기
는 하지만. 그러나 그 주문이 발현된 형태는 자신도 처음 접해보는 것
이었다. 바람으로 인해 생겨난 소용돌이는 주위를 뒤덮고 있던 안개와
맞물려 음산한 울림을 토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 패사령진 개(開)! ]
호옌 찬은 음산한 울림과 함께 밀려오는 바람이 자신의 몸에 닿기 전
방어주문을 펼쳤다. 그러자 순간 부드러운 미풍이 불며 투명한 백색의
기운이 그의 주위에 막처럼 펼쳐졌다.
퉁.
그리고 소용돌이 치는 바람과 방어주문이 맞부딪힌 소리라고는 믿기
어려운 둔탁한 소음이 귀를 때렸다.
" ....!!"
방어 주문의 효력이 미치는 공간 안에서 보호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
고 호옌 찬은 온몸이 크게 울릴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
아직 상대방이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는 결코 상대의 힘이 자
신보다 아래가 아님을 깨달았다. 아니, 어쩌면 일족들에게 주문을 가르
치는 리강과 비견할 만한 실력인지도 몰랐다.
" 누구냐!"
호옌 찬은 다시 한번 외쳤다. 그러나 그의 음성은 깊게 가라앉은 안개
속으로 빨려들 듯이 사라져 버렸다. 조금전까지 굉음을 내며 주위의 사
물을 날려버릴 듯이 후몰아 치던 바람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더욱
짙어진 안개가 그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스스로에게서 낯설음을 느끼는 것은 무척이나 기이한 경험이었다. 마치
타인이 되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기분.
아래로 향하고 있던 시선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카이엔은 천오의 가르
침을 떠올렸다. 명계의 기운이 담긴 안개로 상대방의 이목을 흐린 다음
경계심이 발동하기 전에 상대를 제압한다. 그것이 첫 번째로 적과 싸울
때 해야할 행동이며 그 다음은 절대 함부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안개 속에 몸을 숨기고 끊임없이 공격을 하며 상대방이 지칠 때
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상대방은 자신을 볼 수 없지만 자
신은 상대를 보며 여유롭게 상대할 수 있기 때문에 힘과 정신력의 소
모가 적다고 했다.
그리고 처음의 공격이후 카이엔이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자 안개에
휩싸인 백룡족은 무척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 자리에 멈춰선 채
주위를 경계하며 방어주문을 풀지 않는 그를 보며 카이엔은 소리없이
미소지었다. 실제로 용족과 힘을 겨루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자신
이 생각하고 있던 것 만큼 용족의 힘은 거대하지 않게 느껴졌다. 그동
안 카이엔 자신의 힘이 요희의 피 덕분에 그리고 천오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덕분에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는 사실은 전혀 떠올리지 못한 채
카이엔은 상대방의 실력이 그리 높지 못한 것에 만족과 동시에 실망감
을 느꼈다.
' 용족이란 겨우 저 정도 였나......?'
어렸을 때부터 품고 있던 용족이라는 존재에 대한 경외심과 동경이 일
시에 무너져 내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풍륜(風輪) 전(展)! ]
카이엔은 결코 어울리지 않는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작은 목소리로 주
문을 읊조렸다.
보통 사람의 머리 하나 정도의 크기를 가진 작은 덩어리 여러개가 순
식간에 백룡족 남자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것은 아무런 색도 가지지
못했지만 회전하는 속도가 너무빨라 실체를 가진 것처럼 보였다. 백룡
족 남자의 주위에는 여전히 희뿌연 빛을 품은 방어주문이 펼쳐져 있었
지만 마치 우박 처럼 쏟아져 내리는 풍륜의 주문은 그가 펼쳐낸 주문
을 점점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 백굘족 남자는 자신의 주문을 유지시키
기 위해 두 손을 앞으로 향한 채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듯 했지만 점
점 더 거세게 내리 꽂히는 풍륜의 주문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그 모습을 보며 카이엔은 다시 한번 풍륜의 주문을 외쳤다.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더 자신이 붙었기에 더욱 강한 힘을 담아 주문을 펼쳐냈
다. 갓 주문을 배우고 그것을 펼쳐보이며 기뻐하는 어린 아이의 기분으
로.
호옌 찬은 경악했다.
자신이 전력을 다해 펼쳐낸 방어 주문이 마치 점점 금이 가 부서져 내
리는 얼음 조각처럼 희미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이지 않는 상대의 힘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마치 처음의 주문
은 자신을 시험해보기 위해 가장 약한 주문을 쓴 것 처럼.
' 설마......'
완전히 방어주문의 효력이 사라져 아무런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상태가
되고나자 그는 깨달았다. 지금 자신을 공격하고 있는 상대의 정체를.
자신이 흔적을 찾아내 없애려 했던 교룡이 반대로 오히려 자신을 공격
하고 있음을.
' 하지만 이렇게 강할 리는..........'
순간적으로 떠오른 의심이 호옌 찬의 주의를 흩트렸다. 그리고 그 잠깐
의 방심은 카이엔에게 있어 좋은 공격의 기회가 되었다.
쌩.
마치 시위를 떠난 화살이 달려 드는 소리처럼 귀를 찢을 듯이 높은 소
음이 공기를 가르는 흔적을 남기며 호옌 찬에게 달려들었다.
' 피해야 해!'
생각은 잠깐이었다. 그러나 마음과 달리 몸은 재빨리 움직여지지 않았
다.
" ........!"
번개가 온몸을 직격한 듯한 충격.
' 이럴 수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결과로 인한 전율이 더 이상의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온몸의 힘이 모래속에 스며드는 물처럼 소리없이 사그러
드는 것을 느끼며 서서히 정신을 잃었다.
주) 풍륜(風輪) 전(展) - 바람의 힘을 이용한 상급 주문의 하나로 단단
하고 둥글게 뭉쳐진 여러 개의 바람의 덩어리가 쉴새 없이 소용돌이
치며 한곳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주문이다. 움직이는 속도가 너무 빨라
소리를 들었을 때는 이미 주문이 코앞까지 당도해 있을 정도로 빠른
움직임을 가진 주문이다.
==============================================================
힘들다... 흑흑... 이틀동안 죽어라 썼지만 아직도 백여 페이지가 남았다.
시간이 너무 촉박하니 글은 더 안써지고 내용도 마음에 안 들고..
슬픈 현실이 나를 부르는구나. T^T
새벽이구나. 졸립고 스트레스 받고...
과중한 스트레스 때문에 몸만 아프다. 나는 왜 스트레스 받으면 내 몸을
괴롭게 만드는 것인지... -_-
[번 호] 8000 / 8192 [등록일] 2000년 05월 07일 22:42 Page : 1 / 49
[등록자] 까망포키 [조 회] 101 건
[제 목] [흑룡의 숲 2부] 연(緣)... - 63~68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