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흑룡의 숲 2부 >
연(緣)...
제 17장. 別(흔적이 남은 자리)
착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분명 착각이었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서로를 알지 못했더라면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두근거림을 느끼지 않았더라면
이토록 가슴을 저미는 슬픔을
알지 못한 채 살 수 있었을 테니까요.
一.
공진산(拱陣山).
먼 과거에는 왕성한 활동을 하던 화산이었으나 지금은 휴화산이 되어
정상 부근은 호수로 화한 곳. 고여있는 물이지만 바닥이 비칠 정도로
투명하고 맑은 물로 잠겨 있는 그곳은 하계에서 발견한 장소 중 가장
멋진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우수한 풍광을 자랑하고 있었
다.
천계를 떠나온 지 몇 달째. 자신의 존재가 사라졌다고 해서 천계에 어
떤 영향이 미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은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그런 마음의 씁쓸함 때문일까. 그토록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
면서도 조금의 감흥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까닭은.
쏴아아.
거센 바람이 스쳐 지나가며 울창한 풀숲을 흔들어 놓았다. 바람의 용족
인 백룡족으로 태어나 한 평생 바람을 곁에 두고 살아갈 것이라 여겼
었는데 지금은 그 바람조차 낯설기만 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은 행복했었고, 주위의 모든 것들이 너무
나도 아름답게 보여서 문제일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 어떤 것도
리시엔의 마음을 매만져 주지 못했다.
" 그래..."
작게 중얼거리며 리시엔은 웃었다. 결코 눈물을 흘리지 않을 것이라 결
심했기에 그녀는 슬픔의 감정을 눈물대신 미소로 흘려보냈다.
" 모든 것이 다 피의 이어짐이 문제였어....."
리시엔은 작게 중얼거렸다.
결코 그의 몸 속에 흐르는 피로 인해 서로가 헤어져야할 일은 없을 것
이라 믿었었는데 그보다 더한 일이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을 줄은 알지
못했다.
" 남매라고.......?"
변하지 않는 진실.
어머니는 어째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던 것일까. 자신이 인간과 함
께 있겠다는 말을 꺼냈을 때, 어째서 단 한마디도 해주지 않았던 것일
까. 딸이 자신과 같은 전철을 밟는 것이 아무렇지 않았던 것일까? 그러
나 어머니는 너무 잔인했다. 어떻게 하계에서 아버지 이외의 남자를 만
나 동생..... 카이엔을 낳고 그 사실을 이토록 감쪽같이 속여온 것일까.
그 오랜 시간동안 어머니는 현숙함 그 자체라고 믿어왔던 자신이 바보
처럼 느껴졌다. 아니, 현숙함의 문제가 아니다. 어머니가 다른 누구도
아닌 어머니가 자신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카이엔을 속인 채 수
십 년의 세월을 지내온 것이다. 그리고 결코 어머니는 자신의 잘못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과 아버지를 속인 것은 그렇다해도
어째서 카이엔에게는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일까. 어머니가
카이엔의 정체가 무엇인지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조차 말하지
않았기에 카이엔은 오랜 시간을 방황 속에서 보내야 했다. 인간이라고
믿었던 자신이 다른 이들이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늙어가고 목숨을 잃
어 가는 속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교룡이라는 이유 때문에
명계에 속하게 된 이후에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을까. 리시엔은 그를 진
정으로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그의 모든 아픔까지 다 이해할 수는 없
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서로에게 이끌림을 느낀 자신과 카이엔은.... 그것이
진정한 애정이라고 믿었던 둘의 시간들은. 비록 진실을 알았어도 결코
퇴색되지 않는 둘의 인연은 어떻게 하면 좋은가.
진정으로 마음을 열 수 있는 상대라고 여겼는데, 인간이라도.... 교룡이
라고 해도 상관없다고 여겼었는데 그렇게 잔인하게 서로를 갈라놓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진실이 남아있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 너무나 지독해........"
리시엔은 작게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하계에서 이렇게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나서 리시엔은 다시 천계로 돌
아가 아무렇지 않게 살겠노라고 결심했다. 계속 고민하고 방황한다고
해서 현실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오직 자신이 어리석다는 사실만
을 깨닫게 될 뿐.
' 더 이상..... 무엇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
리시엔은 무거운 가슴속에 또 하나의 물음을 던졌다.
* * *
"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카이엔은 분명 자신의 힘으로 그들을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통쾌하다거
나 즐겁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 네. 알고 있습니다."
요희의 말에 답하며 카이엔은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살폈다.
" 용족들은 언제나 진실을 외면하지."
카이엔은 무겁기만 한 마음으로 요희의 눈이 반쯤 감기듯이 작아지며
몽롱하게 풀어지는 것을 보았다.
대체 그녀의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이토록이나 용족에 대한 반감
을 품고 있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은 용족의 피가 흐르는 자
신과 천오를 받아들인 이유는 또 무엇일까.
" 분명 다음에는 쉽게 이기지 못하겠지요..."
카이엔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용왕들이 직접 나선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결코 네 힘을 당
해낼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해도 앞으로 그렇게 되
게 만들어 주지."
교룡이 결코 용이 되지 못하는 이무기라는 사실을 알고 직접 교룡이
어떤 취급을 받는 존재인가를 알게 되었지만 본래부터 가지지 못했던
힘을 가지게 되었음에도 카이엔은 마음이 더 무거워지는 것을 느낄 뿐.
그로 인한 기쁨이나 마음의 무게가 덜어지는 느낌은 전혀 받지 못했다.
자신이 직접 스스로의 힘으로 승리를 얻었을 때도 그랬지만 왜 이런
기분이 드는 지는 알 수 없었다.
" 당분간은 용족들이 움직이지 않을 테니 그동안 천오에게 많은 것
을 배우도록 해라. 다음에는 나나 천오가 나서지 않아도 그들이 네 옷
깃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말이다."
" 알겠습니다."
카이엔의 목소리는 자신이 듣기에도 무척 힘이 없었다. 그것을 알아차
린 요희는 싸늘한 시선을 카이엔에게 던졌다.
" 어째서 그런 표정을 하고 있지? 널 인정하지 않는 백룡족들과 상
대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건가? 그렇지 않으면 아직도 그 백룡
족 여인을 잊지 못했나?"
카이엔은 애써 지우고 가슴 한구석으로 치워 두었던 그녀의 기억이 떠
오르자 혼란스럽게 뒤섞여 가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 역시 그런가...? 어째서 네 정신은 그토록이나 나약하지? 그동안 무
수한 인간들의 피를 보면서도 깨닫지 못했나..."
카이엔은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요희가 자신에게 어떤 말을 건네고 있는 것인지 들리지도 않았고
그녀가 어떤 표정을 떠올리고 있는지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현실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난 리시엔의 영상을 지우기 위해 고개
를 저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영상이 지워지지 않자 카이엔은 점
점 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 아니야....... 아니야........ 피의 이어짐은 상관없어.... 아니야... 하지
만...."
카이엔은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허물어져 내리는 마
음을 추스를 생각도 하지 못했다.
" 하. 그랬나?"
요희는 카이엔의 두서 없는 말만을 듣고 카이엔이 왜 갑작스럽게 태도
를 바꾸었는지 알게 되었다.
자신의 목숨을 버리고라도 함께 있기를 원한다던 둘은 서로 짙은 피로
이어져 있는 관계였던 것이다.
" 우습군. 정말 우스워. 결국 애써 고른 상대로 네 운명에 참담함을
더했을 뿐 바꾸지는 못했군."
요희는 갑자기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카이엔이 고통스러워하며 지우지 못한 과거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있
음에도 불구하고 요희는 가슴속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즐거움을 누
를 길이 없었다.
어떻게 이렇게 교룡이라는 존재에게 주어진 운명은 하나같이 우스운
것인지. 자신이 보아왔던 교룡들은 모두 그랬다. 제대로 삶을 살아간
자들도 없었을 뿐더러 짧은 생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결코 행복이라는
말과는 인연이 멀었다.
천오는 어머니의 손에 죽임을 당할 뻔하고 오히려 자신의 손으로 그녀
를 죽이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리고 흑룡족 훼이의 아들 역시 그의
보호를 받으며 성년을 넘기고도 백여 년을 더 살았지만 결국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자신은 훼이의 힘을 톡톡히 맛보지 않았
던가. 기이할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진 그를. 명계의 공기 속에서도 당당
한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던 그를.
' 하지만 결국 날 벗어나지는 못해......'
그리고 또 한 명의 교룡. 정확하게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선명하지 않은
과거에 용왕의 지위까지 올랐으나 결국 교룡이 가진 운명의 틀에서 벗
어나지 못하고 최후를 맞이한 남자 역시.
' 교룡의 운명이야말로 이 명계의 빛깔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지 않는
가.'
요희는 망연한 시선으로 어딘가를 응시한 채 중얼거림을 토해내는 카
이엔을 응시했다. 그리고 소름 끼치도록 날카로운 소리를 토해내며 계
속 웃었다.
그리고 그 순간 명계는 미쳐버린 공기로 가득 찬 듯한 느낌이 들었다.
二.
백룡왕 오강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져 갔다.
그동안 백룡 일족들 중에서 전투 능력이 특출한 자들을 뽑아 교육을
시키고 앞으로 여러 일을 맡기기 위해 큰 기대를 걸고 있었는데, 십 수
명에 달하는 그들의 힘으로도 나이 어린 교룡을 없애지 못했다는 것은
당혹할 만한 결과라 아니할 수 없었다.
아무리 그 교룡의 배경으로 명계가 버티고 서 있을지라도.
" 죄송합니다. 백룡왕 전하."
리강은 고개를 숙인 채 백룡왕의 말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일족들의
희생을 늘릴 수 없다는 마음에 교룡과의 싸움을 끝내지 않고 돌아온
것은 이유가 어떻던 간에 명백히 백룡왕의 명령을 어긴 것이다.
" 분명 그 교룡이 그토록 큰 힘을 지니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명계
에서 어떤 술수를 쓴 것이 분명하다."
" 그렇습니다. 희생된 일족 한 명의 종적을 찾을 수 없는 것으로 미
루어 분명 그는 명계로 끌려갔을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저도 직접 겪어
보았지만 그 안개 속에서 싸운 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입니다. 짐작해
보건데 그 안개는 명계의 공기와 같은 성질을 지닌 것으로 여겨집니
다."
오강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그러나 그들은 모습을 드러내기만 했을 뿐 직접 힘을 쓰지는 않았
습니다. 저는 그것이 무척 이상합니다."
리강이 말하자 백룡왕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 그 교룡의 힘을 시험하려 했는지도 모르지."
" 저는 그저 죄스러울 따름입니다. 수 백년의 세월을 힘을 키우고 주
문을 사용하는 것으로 채웠지만 결국은 교룡의 손에서 일족을 다 지키
지 못했고 백룡왕께서 내리신 명령도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진지하기 이를데 없는 그의 말에 오강은 한숨을 내쉬기만 할 뿐 아무
런 대답의 말도 하지 않았다.
' 우리들 용족은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을 계절의 순환을 위해 움직
이는 일이라 여겨왔고 여러 주문을 배우는 것 역시 다른 무엇보다 그
것을 위한 것이라 생각해왔다.'
오강은 천천히 자신이 백룡왕의 후계자가 되었던 그날부터 아버지를
비롯하여 여러 나이 많은 이들에게 배웠던 이야기를 차례로 떠올렸다.
용족이 각기 다섯 가지 자연의 속성을 움직여 계절의 순환을 담당하고
그 기운이 조화롭게 운행되도록 살피지 않는다면 하계는 물론이고 다
른 곳들 역시 질서가 파괴되어 무너져 내릴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천
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을 살아가는 용족인 자신들이 오직 그 일만을 생
각하고 그 일에만 매달려 그 긴 세월을 보낸다는 것은 너무 지독한 일
이 아닌가. 그러했기에 오강은 자신이 가진 백룡왕 본연의 지위를 거스
르지 않는 한도 내에서 강한 힘을 가진 일족들을 모아 무언가를 이루
어보고자 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헛된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결
국 자신의 그런 생각은 아직 나이 어린 교룡에 의해 부서져 내리지 않
았던가.
' 함부로 조화에서 벗어나려 한 벌인가.....?'
그렇게 생각하자 씁쓸함이 전신에 퍼져갔다.
오강은 긴 시간에 걸쳐 생각해 보았지만 결코 자신 혼자만의 힘으로
이번 일을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되도록 다른 용족들에게
는 알리지 않고 일을 조용히 처리하려 했었지만 그의 생각은 너무 간
단했는지도 모른다. 백룡왕으로서 일족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했다는 말
을 듣고 싶지 않았기에 그런 행동을 한 것이었지만 결국은 함부로 움
직인 탓에 일을 더 크게 만드는 결과를 부른 것인지도 모른다.
' 결국 남은 것은 한 가지 뿐이군.....'
처음부터 이렇게 했어야 했다. 하지만 아직도 그의 마음 속에는 처음과
같은 생각이 사그러들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
오강은 생각에서 빠져나와 입을 열었다.
" 보좌관."
" 예. 백룡왕 전하."
" 각 용왕들에게 회합을 요청하는 서신을 띄우도록 해라."
그는 깊이 고개를 숙이며 오강의 명을 받들었다.
" 즉시 수행하겠습니다."
* * *
리강은 실로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와 부인의 모습을 마주대했다. 자신
이 맡고 있는 일 때문에 매일같이 집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었다.
시하라와 자신의 혼인은 서로의 의지보다는 부모의 친분 관계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았다. 둘은 서로 얼굴만을 알고 지내던 사이였
을 뿐 말 한번 제대로 한 적이 없었는데 어느 순간 혼사가 결정되고
서로간에 반대할 의사가 없자 그대로 진행된 것이다.
처음에는 낯선 감정만이 둘의 사이를 채우고 있었지만 수백년의 세월
이 지난 지금은 실로 부부라는 말이 어울리는 사이가 되었다고 리강은
생각했다.
자신과 시하라 사이에서 태어난 딸은 밝고 건강하게 자라 이미 성년식
도 치른 상태였고 자신 역시 바라던 대로 일족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
게되었다.
풍천궁에 비견할 바는 못되지만 그가 수 백년 동안 살아온 집 역시 그
리 크지는 않아도 고아함을 풍겨내는 장식과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다섯 칸의 방과 하나의 정원으로 이루어진 그 집은 그에게 있어 가장
편안한 장소임이 분명했다.
" 돌아오셨나요?"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시하라는 자신의 등장을 금새 알아차리고 부드러
운 미소와 함께 자신을 맞았다.
처음 그녀와 얼굴을 마주했던 그때로부터 조금의 변함도 없이 그녀의
모습은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고 모습 또한 약간의 변화를 제외하고
는 달라지지 않았다.
" 그대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전혀 변하지 않는 듯 하군. 혹시 나
이를 먹지 않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어."
" 농담은 하지 마세요."
그렇게 시하라와 이야기를 나누며 집안으로 들어선 리강은 문득 딸 리
시엔과 얼굴을 대한 것이 퍽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리시엔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나?"
" 돌아온 지 며칠 되었죠."
리강은 크게 기쁜 표정을 지었다.
" 그렇다면 어서 만나보아야 겠군. 그동안 리시엔에게 너무 소홀했던
것 같아."
시하라는 그저 대답 없이 희미한 미소만을 지었다.
리강은 은은한 꽃향기가 풍기는 정원을 지나쳐 리시엔의 방으로 향했
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창가에 의자를 놓아두고 앉아서 책을 펼쳐
들고 있는 리시엔의 모습이 있었다. 평소에는 항상 활동이 간편한 치파
오를 입고 있었는데 오늘은 얇고 하늘거리는 하얀 궁장을 걸치고 있었
다.
그야말로 자신이 처음 시하라와 만났던 때를 떠올리게 만드는 모습이
었다.
" 리시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어머니의 것이 아님을 알고 리시엔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돌아온 이후 어머니와는 말을 나눈 적도 얼굴을
마주 대한 적도 없었지만 그래도 리시엔은 항상 어머니가 자신에게 찾
아온다면 결코 얼굴조차 돌리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 아버지...."
그리고 오랜만에 아버지 리강의 모습을 대한 순간 리시엔은 자신도 모
르게 마음 한구석이 풀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와 동시에 금방이
라도 눈물이 솟구쳐 흐를 것 같았다.
" 정말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구나. 그동안 하계에 수행을 하러 갔다
고 해서 집에 돌아올 때마다 얼굴을 보지 못했으니, 이런 관계를 어찌
부녀라 할 수 있겠니."
" 아버지. 만나지 못할 것도 아니었는걸요."
" 그래. 하계에서 성과는 있었느냐?"
아버지의 입에서 하계에 관한 말이 나오자 리시엔은 순간적으로 또 다
시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얼굴 표정이 처연한
빛으로 가득 찼다.
" 무슨 일이 있었느냐. 리시엔?"
과연 아버지라는 이름은 허명이 아닌지 리강은 금새 리시엔에게 어떤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아채고 걱정스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그러나 결
코 리시엔은 어떤 진실도 이야기할 수 없었다.
" 아무것도 아니에요."
리시엔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 그저 오랫동안 하계에 있었더니 갑작스레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을
경험한 탓인지 조금 피곤한 느낌이 드는 것도 같아요."
물론 리시엔의 말은 거짓이었다.
용족들이 가진 강인한 피와 마력은 천계에 비해 열배 정도로 빠르게
시간이 흘러가는 하계에서도 아무런 장해 없이 적응할 수 있도록 만들
어 주었다. 그리고 아무리 하계에 몸을 담고 있다고 해도 결국 용족들
은 그들의 시간에 속해있는 법이다.
" 피곤할 정도로 주문을 썼던 모양이구나? 그렇지 않으면 네가 그렇
게 지친 얼굴을 하고 있을 리가 없지."
아버지의 말에 리시엔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을 뿐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리시엔은 어떤 진실도 알지 못한 채 기분 좋게 웃는 아버지가 답답하
고도 가엾게 여겨졌다.
수 백년을 함께 살아온 부부라는 이름을 가진 상대에게 배반을 당한
사실도 알지 못한 채 여전히 부드럽게 미소짓는 아버지의 얼굴은 너무
나도 슬프게만 보였다. 분명 아버지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것은 즐거움
과 편안함이건만 자신의 눈에는 그것이 진정한 즐거움으로 비춰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三.
" 백룡왕께서 보내신 서신입니다."
백룡왕의 보좌관이 직접 찾아와 서신을 건네자 리린은 의아함을 느꼈
다. 보통 서신을 전달할 때는 궁에서 일하는 시위들에게 전해 왕에게
전달되도록 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닌 왕의 보좌관
이 직접 움직인다는 것은 단 한가지만을 의미했다.
" 오대 용왕의 회합인가?"
" 그렇습니다."
백룡왕의 보좌관은 리린의 손에 서신이 들린 것을 확인하자 가볍게 고
개를 숙여 보이며 대답했다.
" 저는 청룡왕께서 서신을 받은 것을 확인했으니 이만 물러가겠습니
다."
리린은 고개를 끄덕여 그의 말에 답하고는 백룡왕의 보좌관을 배웅했
다. 그리고 나서 리린은 백룡왕이 요청한 회합의 내용과 일시를 담은
서신을 펼쳐들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 오 백년 간 침묵하고 있더니 또 이런 일을 터트리는군."
교룡이나 명계라는 말은 리린에게 있어서도 무척이나 깊은 인연을 가
진 말이었다. 자신이 후계자였던 시절 그녀는 교룡으로 인하여 치욕을
받지 않았던가.
왕족의 피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명계에서 나타난 교룡의 힘
을 이겨내지 못했고 너무나도 허무하게 유안이 납치되는 것을 지켜봐
야 했다. 그리고 그 일은 그녀의 일생에서 가장 커다란 자극이 되었다.
" 청룡왕 전하."
판유는 리린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지자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지 못
하고 그녀를 불렀다.
자신 역시 그녀가 과거에 명계와 얽힌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
었기에 그녀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역시 이번 일은 확실하게 매듭을 짓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지. 이
번에도 그냥 넘어간다면 더 이상 각 계를 나눈 의미가 없어지지 않겠
나. 더 이상 경거망동하게 놓아둘 수는 없어."
" 그럼, 직접 움직이실 생각이십니까?"
리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 완전히 없앨 수는 없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매듭을 지어두지 않을
수는 없겠지."
리린은 굳게 결심하고 있었다.
과거의 자신은 그들을 누를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지지 못한 젊은 후
계자에 불과했을 뿐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한 일족을 이끄는 존재이며
그에 걸 맞는 힘을 지니고 있다. 결코 과거와 같은 치욕을 당하지는 않
을 것이다.
' 당신은 오직 한가지만을 생각하고 있군요.'
판유는 과거를 되살리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표정만을 굳히고
있는 리린을 응시하며 쓴웃음을 떠올렸다. 지금의 리린은 결코 자신이
알고있는 리린의 모습이 아니었다. 과거의 일로 인해 리린의 마음에 남
아있던 상처가 이번 일을 계기로 다시 터져 버린지도 몰랐다.
명계와의 일이라면 리린보다는 오히려 흑룡왕이 더 나서야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판유는 결코 흑룡왕이 함부로 움직이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현 흑룡앙의 뒤에는 거대한 존재인 훼이가 버티고
있기에 그 자신의 모습은 별로 크게 부각되지 않고 있었지만 판유는
현 흑룡왕의 힘 역시 역대의 어느 흑룡왕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대 용족 중 가장 강한 힘을 지닌 것은 흑룡족이었고 그들의 수장인
흑룡왕의 힘은 굳이 일부러 말을 하지 않아도 모두들 강하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흑룡왕은 결코 함부로 힘을 쓰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 역시.
" 오대 용왕의 회합이 끝나면 어떠한 형태로든 결론이 날 것입니다."
리린은 판유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 표정
에는 그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있지 않다는 것이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며 판유는 근심어린 한숨을 내뱉었다.
* * *
" 정말 그렇겠군요."
적수는 시령의 말을 듣고 나서 유쾌한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자신
보다 불과 몇 살 정도밖에 나이가 많지 않은 그녀는 두 개의 모습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자신이 가슴속에 활발하게 움직이고 싶다는 마
음을 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백룡족 특유의 자유 분방
한 본성과 흑룡왕비라는 지위 두 개를 사이에 두고 그 자리에 걸 맞는
서로 다른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 그렇다면 저도 실로 기대가 됩니다. 과연 세 종족의 피가 섞인 아
이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다른 모든 이들의 관심의 대상인 이야기를 본인이 직접 꺼내자 적수는
더욱 흥미가 생겼다.
" 그런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흑룡왕과 어떻게 만나셨는지 물어도
될까요?"
시령은 싱긋하고 미소지었다.
" 아시다시피 저와 흑룡왕은 삼백여 살의 나이 차가 나지요. 그와 만
난 것은 제 오라버니가 친우였기 때문에 무척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지
요. 그때 제 나이는 무척 어렸지만."
만난 지 얼마 되지 않는 적수에게 이토록 호감이 느껴지는 것은 그의
나이가 그녀와 비슷한 탓만은 아닐 것이다. 시령은 계속 말을 이었다.
삼백여 년 전의 기억을 되살리며.
" 우리들 백호족은 무척이나 자유분방하고 집에 돌아오는 것조차 기
약할 수 없을 정도인데 그런 우리 일족가운데서도 돌아다니기를 즐기
는 오라버니가 유안과 같은 친구를 사귀었다는 것은 실로 놀랄만한 일
이었어요. 유안은 차기 흑룡왕이 될 몸이고 게다가 흑룡족 뿐만이 아니
라 기린족의 피를 이은 몸이 아니겠어요."
시령은 마치 그 순간으로 되돌아간 듯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 그리고 유안을 처음 보았을 때 무척 놀랐죠. 흑룡족 특유의 흰 피
부와 짙고 검은 머리카락 이외에도 그의 푸른빛을 발하는 눈동자가 너
무나도 그에게 잘 어울린다는 사실이 정말이지 저에게는 큰 놀라움으
로 다가왔어요."
적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 저 역시 흑룡왕께서 저와 같은 눈을 하고 계신 것을 보고 친근함
을 느꼈습니다."
" 그리고 그때 이후로 오라버니가 유안과 만날 때 처도 항상 함께
다녔어요. 처음 만났을 때는 아직 성년도 되지 않은 나이였기에 오라버
니가 저를 데려다 주셨지만 성년이 지난 후에는 저 혼자 천계로 왔죠.
환계보다 더 익숙하게 느껴질 정도로 자주 왔어요."
그리고 나서 시령은 계속해서 즐거운 표정으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아직 단 한번도 여인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가진 적도 그런 존
재와 만난 적도 없지만 요즘들어 그의 마음은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다.
지금 시령의 이야기를 듣고 느끼는 바도 있었지만 자신보다 훨씬 어린
교룡과 백룡족 여인의 사이 역시 직접 두 눈으로 보지 않았던가.
" 어울리지 않는 듯 하면서도 정말 어울리는 두분입니다."
적수는 웃음띤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다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시령을 비
롯한 이들은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시선을 돌렸다.
" 백룡왕으로부터 회합을 요청하는 서신이 도착했소."
풋풋한 다향으로 가득한 다실 안에 들어서며 유안은 말을 건넸다. 이미
유안과 적수. 그리고 시령은 서로의 피가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을 알았
기에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적수의 보좌 역으로 함께 움직이
고 있는 가신 역시 자신의 몸 속에 흐르는 용족의 피 때문인지 그들
속에 쉽게 어울릴 수 있었다.
" 그렇다면 교룡에 관한 일을 논의하기 위해서 겠군요..."
" 그렇지."
" 제가 알고 있는 것이 맞다면 오대 용왕의 회합이 열리는 것은 극
히 드문 일이 아닙니까. 각 용왕들이 수 백년 동안 왕의 자리에 있어도
한번도 열리지 않은 적이 더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 물론 그랬지. 하지만 요즘은 그것이 깨지고 있는지도 모르지. 언제
나 너무나도 평화로운 시간만이 계속되지는 않으니까."
두 쌍의 푸른 눈동자는 진지함을 담은 채 마주쳤다.
" 그대는 아무래도 이번 일과 깊은 인연이 있는지도 모르지. 그대가
아니었다면 교룡의 존재를 빨리 발견할 수도 없었을 테고. 함께 오대
용왕의 회합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겠지."
갑작스런 유안의 말에 적수는 깜짝 놀랐다. 아무리 자신이 기린족의 황
자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오대 용왕의 회합은 오직 용왕족만
이 들어설 수 있는 공간이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 이번 회합을 요청한 것도 백룡왕이니 그는 결코 거부하지 않을 거
야. 자네가 아니었다면 백룡족이 먼저 교룡의 존재를 알 수 없었을 테
니."
" 제가 그 자리에 참석할 수 있다면 실로 영광입니다."
적수는 교룡과의 만남이 이런 식으로 다른 인연을 만들어주자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비록 자신의 두 눈으로 그가 인간을
죽이는 광경을 목격하고 싸우기도 했지만 그의 진심을 본 것 또한 자
신뿐이었다.
四.
한없이 투명하고 맑은 물은 바람에 흔들려 잔잔한 파문을 토해내며 조
금씩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잔잔한 물살을 보는 순간 판유는 거침없이 피어오르는 마음
을 달래기 위해 큰 소리로 공격주문을 외쳤다.
[ 개문(開門) 수(水)! ]
그의 목소리가 울리자 마자 잔잔하게 흘러가던 물살이 거침없이 소용
돌이치기 시작하더니 곧 몇 개의 물기둥으로 화하여 하늘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 물기둥은 네 마리의 투명한 빛을 발하는 수룡의 형상으로
변모했다.
판유는 손을 움직여 수룡의 움직임을 조정했다. 푸른 빛깔의 하늘과 구
별될 수 없을 정도로 은은한 푸른색을 가진 수룡은 그의 손짓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였다. 공격주문이었지만 판유에게 어떤 사물이나 상대를
공격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기에 수룡들은 이리저리 하늘 속에서 헤엄
치고 있었다.
[ 해제(解制) ]
판유는 바닥을 향해 손을 내리며 나지막하게 해제의 주문을 외쳤다. 그
와 동시에 하늘을 유영하던 네 마리의 수룡은 물안개가 되어 다시 물
속으로 흩뿌려졌다.
그 동안은 청룡왕의 보좌관이라는 자리에 오르기 위해 개인적인 여유
를 가질 수 없었고, 보좌관에 오른 이후에는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오
늘은 청룡왕 리린도 오대 용왕의 회합에서 논의될 사항에 대해 생각을
하느라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판유 역시 시간을 얻
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만큼 흐트러져만 갈 뿐 잔잔
한 물살처럼 안정되지 않았다.
" 리시엔. 이제 너의 마음을 알겠구나...."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어린 사촌 동생 리시엔의 얼굴을 떠올렸다. 분명
그때의 리시엔이 자신을 보며 느낀 감정은 지금의 자신이 느끼고 있는
것과 꼭 같았으리라.
그날 이후로 단 한번도 리시엔은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판유는 분명 리시엔이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또
다시 그런 상황이 온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리시엔과의 일을 떠올리자 지금의 상황과 겹쳐져 그는 더욱 마음이 복
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서는 다
른 것에 열중하여 생각을 할 겨를이 없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좋을 것
이라 여겼다. 그랬기에 그는 내리고 있던 손을 다시 들어올리고 나지막
히 주문을 외쳤다.
인적이 드문 장소였기에 판유는 마음을 놓고 자신의 힘을 내뿜었다. 가
장 미미한 주문부터 시작하여 자신의 모든 힘을 담은 고위 주문까지.
거의 한시진 동안을 판유는 계속 주문을 외치며 보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마지막으로 개문의 주문을 써서 다섯 마리의 수룡을
만들어낸 후 바람의 힘을 이용해 그것을 거대한 하나의 수룡으로 바꾸
어 놓았다. 아직까지 마력만으로는 주문을 합치는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했기에 그는 자신의 몸속에 흐르는 피가 준 재능을 이용해 주문을
성공시킨 것이었다.
보통 그 주문을 원활히 펼쳐낼 수 있는 것은 용왕들이었다. 그들은 전
대로부터 힘을 계승 받기 때문에 마력의 크기는 잴 수 없을 정도로 커
다랬던 것이다.
그런 고급 주문을 비록 두가지의 마력을 합했다고는 해도 이루어낸 것
은 실로 대단한 능력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수궁(水弓) 시(矢) ]
대화를 하듯이 나지막하게 들려오는 음성.
판유가 채 그 소리를 듣고 시선을 돌리기도 전에 공기를 가르는 날카
로운 파공음을 내며 날아온 가느다란 물 줄기가 판유가 만들어낸 거대
한 수룡의 몸체를 꿰뚫고 지나갔다. 실로 망연함만을 느끼게 할 정도로
빠르고 강한 주문이었다.
' 이 주문은..... 청룡왕님....?'
그것을 깨달은 순간 판유는 깜짝놀라 자신이 조정하고 있던 마력의 흐
름을 놓아 버렸다. 그 때문에 해제의 주문을 외치지 않았음에도 수궁
(水弓)의 주문에 의하여 판유가 만들어 냈던 수룡은 가느다란 빗줄기
로 화하여 강속으로 스며들었다.
" 판유."
" 예. 청룡왕 전하."
그녀가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고 생각하니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판유는 그녀의 부름에 즉시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 그대의 힘은 정말 몰라보게 달라지는 것 같군. 다음에 언제 기회가
닿는다면 함께 수행을 가는 것도 좋겠어."
" 과찬이십니다. 전하."
리린의 얼굴은 보통때보다 더 밝아보였다. 교룡으로 인해 열리게 된 회
합에 관한 소식을 듣고 눈에 띄게 딱딱하게 굳어졌던 얼굴 표정은 조
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름대로 생각을 하고 그것을 정리한 모양이었다. 리린은 미소띤 얼굴
로 판유를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옮겨 그의 앞을 지나쳐갔다.
" 그럼, 내일 아침 백룡궁으로 함께 떠나도록 하지."
" 예. 전하."
판유는 그녀의 뒤를 따르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五.
무의식 적으로 옮겨진 발걸음이 닿은 것은 주위의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고 목숨조차 돌보지 않은 채 리시엔과 행복한 미소를 나누던 장소였
다.
" 후..."
카이엔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뱉으며 몸서리 쳐지는 기억을 떨쳐 버
리려 했다.
아직도 귓가에서는 미친 듯이 울려 퍼지던 요희의 웃음 소리가 들려
오는 것 같았다.
'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이상한 기분만이 남아있는
것일까.'
자신은 결코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흐른다해도 명계에 완전히 녹아들어
살아갈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들의 속에서 움직이고 있지만 마음만은
그들이 느끼는 것과 같은 감정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명계를 떠나 다
른 어떤 곳에 몸담을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카이엔의 괴로움은 자연스럽게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는 자신 역시 그녀나 천오와 마찬가지로 시간에
짓눌려 제정신을 잃을 지도 모른다.
" 무엇 때문에 그토록 이나 괴로워하지?"
갑작스럽게 울려 퍼진 부드럽지만 무게감 있는 음성.
카이엔은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었는데 자신의 가까이에 다가와 말
을 거는 상대를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 당신은......"
카이엔은 자신의 시야를 가득 채운 압도적인 분위기를 가진 남자를 가
만히 바라보았다. 결코 몸집이 크다거나 생김새가 위압적인 것은 아니
었지만 그 남자의 어딘가에서 풍겨 나오는 기운은 결코 그가 평범한
존재가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 그대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한 것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말을 걸었을 뿐이지."
" 혹시 용족이십니까?"
카이엔은 그가 걸치고 있는 검은색의 긴 파오가 용족들이 입는 특유의
복장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렇게 물었다. 그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기운 때문에 그가 보통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기는 했지만 정체
를 짐작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가 걸치고 있는 파오는 확실히 그가
누구인지를 증명해주고 있었다.
" 용족이라면 용족이고 아니라고 한다면 아니지."
그는 일부러 말을 회피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카이엔은 그의 대답이 진
실인지 아니면 그저 정체를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아무렇게나 꺼낸 말
인지 알 수 없었다.
" 그대는 무언가 스스로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커다란 고민과
맞닿은 탓에 괴로워하고 있나?"
카이엔은 처음 보는 이 였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이하면서도 진중
함을 품은 태도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정말이지 기이한 일
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 저는 카이엔이라고 하는데 이름을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카이엔은 가슴을 가득 채운 답답함을 조금이나마 떨쳐 버릴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낯선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 이름은 알지 못한다해도 상관없지."
그 남자는 또 다시 카이엔의 말을 교묘하게 넘기며 어떤 확실한 대답
도 들려주지 않았다.
" 그렇다면 제게 말을 건넨 이유는 무엇입니까."
" 그대의 얼굴에 근심이 어려있어서 말을 걸었을 뿐이네."
그의 대답은 처음과 같았다. 그리고 카이엔은 그의 모습을 말 없이 응
시하다가 풀밭에 앉았다.
지금은 어느 누가 말을 건다고 해도 그리고 자신의 곁에 있다고 해도
말을 하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무게를
느끼며 그저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을 뿐인 것이다.
울창한 숲의 끝으로 시선을 던지자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게 펼
쳐진 초원이 광활한 넓이를 자랑하고 있었다. 인간들에게 주어진 거대
한 대륙. 예전에는 자신 역시 그 땅에 속해있었고, 그 땅을 밟는 자들
과 함께 숨을 쉬고 먹고 마시며 살아왔지만 지금은 과거의 기억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퇴색한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다.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라면 받아들여야 하건만 그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어려운 일이다.
" 교룡이 태어나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
남자의 말에 카이엔은 마치 벼락을 맞은 것처럼 몸이 마비된 듯한 기
분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어째서 자신이 알지 못하는 낯선 누군가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을까.
더군다나 그 자신은 이름조차 말해주지 않으면서.
" .......어째서.........."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카이엔은 겨우 입을 뗄 수 있었다.
" 어째서 그대의 정체를 알고 있느냐고 묻고 싶은가?"
남자는 담담하기 이를 데 없는 목소리로 카이엔의 오른쪽에 선 채 말
을 이어갔다.
온몸을 감싸고 있는 검은색의 파오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그는 알
수 없는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카이엔은 그제서야 비로소 그의 모
습을 제대로 인식하고 어째서 이런 존재가 자신의 곁으로 다가온 것인
지에 의문을 가졌다.
" 교룡은 결코 태어나서도 안되고 목숨을 이어가서도 안 되는 존재
가 아니다."
남자의 말은 지금까지 자신이 들어온 말과는 정 반대되는 것이었다. 그
리고 그와 동시에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타인의 말은 차치
하고 라도 스스로가 그 말을 진심으로 여기고 절망하는 것은 더욱 비
참했기에.
카이엔은 남자가 어떻게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지 왜 자신의 곁에서
말을 거는지는 이제 생각하지 않은 채 그가 말하는 것에만 귀를 기울
였다.
" 그러나 스스로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든
다면 명계에서 살아가는 자들보다 더 살아갈 가치가 없다는 것을 증명
하는 셈이지."
남자의 얼굴은 자신에게 향해있지 않았지만 카이엔은 그가 자신을 바
라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 그렇다면...... 저는..... 저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카이엔은 그동안 스스로에게 무수하게 던졌던 질문을. 결코 돌아오지
않는 해답을 가진 의문을 남자에게 던졌다. 그라면 자신의 마음을 풀어
줄 만한 해답을 내려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 그대는 어떻게 하고 싶나?"
그러나 남자는 해답 대신 오히려 카이엔에게 되물었다. 그리고 카이엔
은 생각했다.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 나의 마음.......?'
카이엔은 눈을 감고 과거를 되살렸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가장 먼
과거. 한적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지내온 세월과 인간들의 틈에서 살던
시간. 그리고 스스로의 존재를 깨닫고 그야말로 어둡고도 깊은 바닥에
떨어진 듯한 지금의 삶까지. 그리하여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라는 것을 알았다.
그동안 타인에 의해 움직여져 온 나의 삶을 이제는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이고 싶노라고.
" 그것이 해답이다. 설령 어떤 것이 그것을 막는다 해도 마음이 그것
을 원한다면 이루어내야 하지. 그리고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없다."
그러나 변함 없이 울려 퍼지던 남자의 음성은 마지막 말에 가서 조금
늘어지는 듯한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카이엔은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
할 여유조차 없었다.
극심하게 떨려오는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르면 그대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 전까지는 그대에게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여라. 아무리 고통
스럽다 하더라도."
카이엔은 다시 눈을 뜨고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대체 그는 자신에게 어떤 것을 전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낸 것일까. 그
러나 그 의문을 풀 길은 없었다.
" 일어서라."
그리고 남자는 카이엔에게 손을 내밀었다. 길고 가느다란 손이었지만
카이엔에게는 그 손이 세상의 그 어떤 손보다 더 크고 단단하게 느껴
졌다.
남자의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를 느끼며 카이엔은 몸을 일으켰다. 그와
나란히 그가 서자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직 용족의 나이는 제대로 따지지 못했기에 카이엔으로서는 그의 나
이를 짐작할 수 없었지만 온몸에서 풍겨 나오는 무게감으로 미루어 적
어도 자신보다 수백 살은 더 오랜 시간을 살아온 자인 것 같았다.
다른 용족들과 달리 자신에게 어떤 적대감도 표현하지 않는 남자는 카
이엔이 만난 자들 중 리시엔을 제외하고는 유일한 존재라고 해도 틀리
지 않을 것이었다.
" 요희의..... 그리고 명계의 광기에 물들어서는 안 된다."
아무렇지 않게 이어진 남자의 말. 카이엔은 또 다시 놀라움을 느껴야
했다. 대체 그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리시엔조차 그 전부를 알지 못하는 명계의 일까지 이 남자는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 ............."
카이엔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스스로가 교룡이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그대의 탄생을
위해 그대를 낳은 부모는 모든 것을 버린 것이니까. 결코 결과가 어떻
게 나왔다고 하더라도 그대를 낳은 부모의 선택은 의지 하나만을 가지
고는 이루어내기 힘든 결정이었다."
이토록 많은 것이 변했음에도 카이엔이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기억은 부모님과 함께 했던 십여 년의 기억이었다. 지독할 정도로 한산
하고 고요했던 나날들. 아버지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어머니의 미소를
볼 수 있었던 단촐한 가족의 단상. 그 기억이 있었기에 카이엔은 자신
에게 이런 운명을 지워준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었다.
" 항상 그것을 잊지 않도록 해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자는 잡았던 카이엔의 손을 놓고 가볍게 오른손
을 휘둘렀다. 그러자 마치 거짓말처럼 모습을 드러낸 공간의 문. 아무
런 소리도 느낌도 없이 열린 공간의 문은 주위에 미미한 파동을 떨쳐
내며 다른 곳으로 통하는 문이 열렸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공간의
문을 통해서 카이엔은 알 수 없는 그리운 느낌을 받았다. 마치 반드시
돌아가야 할 고향을 발견한 듯한 따스한 그리움을.
' 안녕히..........'
들어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마력의 운용에 카이엔은 경악했지만 조용
히 남자의 뒷모습을 전송하며 미소지었다.
六.
" 백부님. 정말 가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유안의 물음에 훼이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 설마 다섯명의 용왕이 모이는데 해결 못할 일이 어디 있겠느냐. 나
는 비록 오랜 시간을 살았지만 나는 아무 지위도 가지지 않았다."
유안은 훼이에게 교룡과 그리고 명계와 얽힌 일인데 어째서 아무런 말
도 하지 않는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건네는 훼
이의 얼굴을 보자 도저히 그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유안은 한
숨을 내쉬며 어떤 말을 해야 할 것인지 생각했다.
" 그녀의 힘을 당해낼 수 있는 것은 백부님 뿐입니다. 저희들 다섯
명의 용왕이 동시에 힘을 쓴다고 해도 그녀의 움직임을 막을 수 있을
뿐, 그녀를 다시 본래의 세계로 돌려보내지는 못할 것입니다."
결국 유안은 교룡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못하고 명계의 주인인 요희가
직접 나설 경우에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지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훼이는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 그녀가 직접 나서는 일은 없을 것이다."
" 네.......?"
유안은 의아함을 품고 물었으나 훼이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거짓이라
여길 수도 없었지만 그 말을 한 것이 다름아닌 훼이였기에 유안은 그
말을 수긍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 그렇다 해도 백부님. 함께 가셔서 여러 용왕들에게 조언을 해주시
기 바랍니다. 백부님이 자리한다고 해서 거부감을 느낄 용왕은 단 한명
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계시지 않습니까."
" 유안. 네 고집은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변하지 않는구나."
훼이는 처음 만났던 날에도 유안이 고집을 피우며 자신을 졸랐던 일을
상기하고는 그렇게 말했다.
" 제 성격을 아신다면 더욱 더 제 말을 들으셔야 합니다."
그러나 유안만큼 아니, 그보다 더 훼이의 성격이 곧다는 것은 유안 스
스로도 알고 있었다. 결국 어린 시절에 그토록 졸랐던 자신의 요구는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훼이에게서 약속을 받아내기는 했었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 백부님께서는 저희에게 위험이 닥쳐도 모른척 하시겠습니까?"
유안은 억지로 일어날 가망성이 적은 일을 비약적으로 부풀려 말했다.
그러나 그것에 넘어갈 훼이가 아니었다.
" 그 정도의 위기도 넘기지 못한다면 너희는 모두 용왕의 자리를 내
버려야 하겠지. 그리고 곧 계절의 순환이 엉망이 되어 질서가 무너지지
않겠느냐?"
" 백부님."
" 시령에게서 조르는 것만 더 배운 모양이구나. 유안."
훼이는 미미한 웃음을 담은 음성으로 유안에게 말을 건네며 유안의 어
깨에 손을 올렸다.
" 늦을지 모르니 어서 떠나거라."
" 백부님......."
" 시령에게 또 한소리 듣고 싶은 모양이구나."
" 후......."
유안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먼저 나선 후 유안이 훼이를 데려오길 기다리고 있었기에 시령의 모습
은 없었다. 그러나 계속해서 시간을 끈다면 분명 시령은 다시 궁안으로
들어와 둘에게 재촉을 할 것이 분명했다.
" 그럼, 백부님 기다려 주십시오."
유안은 결국 훼이를 설득하지 못한 채 혼자 집무실을 나섰다.
그리고 유안이 나선 후 훼이는 집무실의 창가에 서서 말소리가 들리지
는 않았지만 홀로 나온 유안이 시령에게 핀잔을 듣는 모습을 바라보며
웃음 지었다. 그리고 일전에 자신과 만난 적이 있는 기린족과 용족 사
이에 태어난 가신이라는 청년과 기린족의 황자가 함께 말을 나누는 것
을 지켜보았다.
' 잘 가거라...'
그리고 훼이는 떠나가는 유안과 시령을 응시하며 깊고 따스한 미소를
떠올렸다. 결코 그들은 훼이가 자신들에게 그런 미소를 지어 보였다는
사실도, 어떤 의미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도 알지 못할 것이지만 훼이
는 그들을 불러세우지 않았다. 그렇게 그저 마음속으로 몇 마디의 말을
건네며 훼이는 창가에서 몸을 떼고 집무실 의자에 앉았다.
* * *
오대 용왕의 회합이 열리는 풍천궁은 용왕들을 맞이하기 위해 부산한
움직임을 보였다. 여러 명의 시비들이 움직이며 평소보다 더 많은 궁등
을 달아 은은하게 불을 밝혀 용왕들이 오는 것을 맞이했다.
풍천궁의 입구에서 다른 용왕들을 맞이하기 위해 자리하고 있던 백룡
왕과 백룡왕비. 그리고 보좌관을 비롯하여 몇몇 백룡 일족의 위족들은
가장 먼저 도착한 청룡왕을 맞아 인사를 건네며 궁안으로 맞아들였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차례로 황룡왕과 흑룡왕. 그리고 홍룡왕이 도착했
다.
" 그분은.....?"
서로 간단하게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은 용왕들은 아직 자신을 소개
하지 않은 황금색 머리칼을 가진 청년에게 일제히 시선을 던졌다.
" 죄송합니다. 제가 먼저 소개를 드렸어야 하는 것인데..."
유안은 여러 용왕들에게 사죄의 말을 꺼내며 자신의 옆에 나란히 앉아
있던 적수를 소개했다.
" 백룡왕께는 이미 말씀을 드렸다시피 이 기린족 청년은 가장 처음
으로 하계에서 교룡과 만난 자입니다. 이름은 적수라고 하며 다음 기린
족의 장(長)이 될 황자의 신분 입니다."
유안이 적수를 소개하자 다른 용왕들은 가볍게 인사말을 건넸다. 어느
누구도 용족이 아닌 그가 오대 용왕의 회합에 동석한 것에 대한 의의
를 표명하지 않았기에 적수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자신이 속한 기린족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거짓이겠지만 모든 영수족들 가운데서도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며 힘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것이 용족이라는 사실은 모두 인정하고 있었다. 그
런 그들 가운데서도 각 용족을 이끄는 왕이 한자리에 모였으니 적수가
위압감을 느끼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 오대 용왕의 회합에 참석할 수 있게 되어 실로 기쁨을 가늠할 수
가 없습니다. 다시 한번 용왕들게 인사 올립니다."
적수는 정중하게 몸을 일으켜 용왕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 그럼, 회합을 시작하기 전에 기린족 황자로부터 교룡에 관한 이야
기를 들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물론 몇몇 백룡족들도 교룡과 직접 대
면하기는 했으나 적수님이 직접 말을 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되리라 생
각합니다."
백룡왕은 회합의 주재자 답게 먼저 말을 꺼내 자연스럽게 진행해 나갔
다. 용왕들은 백룡왕이 보낸 서신을 통해 대략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
는지 알고 있었지만 한명도 빠짐없이 적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 제가 처음으로 교룡과 대면한 것은 동쪽 대륙 해안가 부근에 위치
한 어느 나라의 전쟁터 였습니다. 모든 영수족들이 당연히 여기고 있다
시피 인간들의 삶에 관여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저는 멀리
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적수는 그때의 광경을 되살리며 말을 이어갔다.
"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중 저는 무언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발
견했습니다. 우세하던 한쪽이 어느 순간엔가 갑작스레 전멸에 가까울
정도로 커다란 피해를 입은 것입니다. 저는 그 광경을 보고 심상치 않
음을 느끼고 가까이로 몸을 옮겼습니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에도 인간
들은 끊임없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적수는 그렇게 자신이 어떻게 해서 교룡을 만났으며 광기에 찬 교룡과
대결을 했고 그에게 상처를 입혔는지, 그리고 이름은 밝히지 않았지만
교룡이 용족 여인 한 명과 깊은 관계라는 것 역시 이야기했다.
명계가 교룡과 깊이 관련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교룡역시 명계에서 온
자들에게 제대로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리고 그 교룡과
용족 여인의 진심어린 모습을 보았기에 적수는 결코 교룡이 어쩔 수
없는 본능에 휘말려 끝없이 인간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최후까지 그 용족 여인이 어느 일족인지 그리고 이름이 무엇인
지는 말하지 않았다.
적수의 말을 들은 용왕들은 한동안 마무 말도 없이 생각에 잠긴 듯 했
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다시 백룡왕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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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미칠듯한 나날이로군요.
잠이 모자르는 슬픈 현실. 지금은 목감기까지 와서 죽을 맛입니다.
귀에서는 피가 흐르고. -_-;
아, 할 일이 많구나. 많아. 비디오가 보고 싶다.
[번 호] 8177 / 8192 [등록일] 2000년 05월 11일 22:11 Page : 1 / 54
[등록자] 까망포키 [조 회] 31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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