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흑룡의 숲 2부 >
연(緣)...
제 18장. 緣(인연)
깊이 패인 상흔
이제는 너무나도 희미해져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는
흔적......
그렇게 남겨진 상흔은
시간과 더불어
내 몸 깊숙이 자리잡았다.
一.
' 맡겨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겠군......'
영문모를 미소를 떠올리며 훼이는 집무실의 문을 닫았다. 오백여 년 전
집무실에 발을 들여놓고 자신이 돌아올 곳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기쁨
을 느끼며 걸었던 짙은 갈색의 나무가 깔려있는 복도를 걸어오며 색다
른 감회에 사로잡혔다. 실로 오백 년이라는 세월이 주는 변화는 그에
걸 맞는 크기와 무게를 지닌 것이었다.
" 좋아....."
훼이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짙푸른 빛을 떠올리고
있는 하늘에 시선을 던졌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그랬듯이.
그 깊고도 깊은 애정을 직접 보여주었듯이. 아버지라는 이름이 가진 무
게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가르쳐 주었듯이 이제는 자신이 해야할 차례
다.
세상에 태어나 무수한 시간을 보내고 많은 일을 겪었지만 가장 깊숙하
게 자신의 가슴속에 자리잡은 추억. 그것을 되살리며 훼이는 미소지었
다.
자신의 선택이 무엇을 바꿀 수 있을런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유예
기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자신이 준 하나의 선물로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낼 수 있을 테니까. 지금까지는 하지
못했던 그것들을 이제부터는 스스로의 의지로 해낼 수 있을 테니까.
훼이는 그 말이 가지는 의미. 자유라는 단어가 가진 무게가 얼마나 큰
것인지 알고 있었다.
자신 역시 그 말의 의미를 깨닫기까지 무수한 시간을 보내야 했으므로.
오래된 자로서 무수한 시간의 강을 건너왔고 많은 이들에게 경외의 대
상이 되어왔지만 그것들은 결코 자신이 원해서 가진 것들이 아니다. 훼
이는 자신이 내린 마지막 선택은 어느 누구의 방해나 만류도 받고 싶
지 않았다. 자신의 소중한 이들이 말 없이 떠나갔듯이 자신 역시 그렇
게 시간의 길을 걸어서 끝에 다다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이미 지금 오대 용왕의 회합에서 이번 일에 대한 처리를 놓고 이야기
가 오고 가고 있을 것이 분명했지만 훼이에게는 그 모든 것을 바꿀 만
한 힘이 있었다. 훼이는 지금 자신이 결정한 것을 어떤 방해가 있다고
해도 이루어 내겠다고 결심했다.
이제서야 비로소 두 번의 천년을 살아온 자신이 걸어가야 할 커다란
길을 발견했다는 기쁨에.
흑룡 일족의 곁에서 수백 년을 머물렀지만 결코 채워지지 않았던 마음
의 빈 구멍이 이제서야 메꾸어진 기분이었다. 이제 더 이상은 언제까지
이어질 지 모르는 자신의 삶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고민하지 않아도,
결코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을 되살리며 그리워하고 또 그
리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명계에 살지는 않지만 훼이는 충분히 명계에 속한 자들이 겪는 오래된
시간이 주는 고통을 맛보았다. 어째서 영원한 삶이 가장 지독한 형벌이
될 수 있는지를 깨달아 버린 것이다. 그들이 어째서 시간의 무게에 이
기지 못하고 광기에 휩싸이는 지 훼이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
다.
* * *
" 분명 용족들은 이제 합심해서 하계에 내려올 것이다. 요 근래에 계
속 조용한 것을 보면 다섯 용왕이 모여 회합이라도 하고 있겠지. 말로
모든 것을 해결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아직도 모르고 있어."
카이엔은 요희와 마주앉아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동안의 자신은
절망감으로 가득 찬 마음 때문에 어떤 것도 돌아보지 않고 제대로 생
각하지 않은 채 그들의 요구에 몸을 맡겼었다. 그러나 얼마 전 누구인
지 알 수 없는 용족 남자와 만나고 나서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돌아보
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맑아진 정신으로 요희와 천오를 대하자 그들이 예전에
비해 눈에 띄게 친절한 태도를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결코 그것이 카
이엔 자신에 대한 어떤 감정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에게 교룡이 어떤 존재인지 주위의 모든 이들이
교룡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말해주던 천오가 스스로의 과거를 들추고
있다는 것 역시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깨달았지만 카이엔은
조금도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 네 힘으로 많은 수의 용족들을 없지는 못하겠지만 오랜 시간 견뎌
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니 너는 내가 나타나기 전까지 힘을 다해 용
족들을 막아내라. 설령 용왕들이 내려온다고 하더라도 너는 이같이 행
동해야한다."
" 알겠습니다."
대답은 했지만 카이엔은 용왕들이 가진 힘이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지
난번의 백룡족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고 많은 숫자의
용족들과 상대하게 되었을 때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 하는지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 그리고 네게 죽음이 찾아온다고 해도 너는 죽는 것이 아니다. 한번
육체의 죽음을 경험한 이후에는 그야말로 진정한 명계인이 되는 것일
뿐 너는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요희의 말속에 담겨있는 명계인이라는 단어에 카이엔은 온몸이 소리
없이 긴장되어 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자신이 익히 보아온 광경을
떠올림으로서 생기는 현상이었다.
암울한 명계에서 살아가는 자들은 하나같이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
도로 격심한 광기에 휩싸여 있거나 아니면 영혼은 없고 육체의 껍질만
이 남아있는 인형과 같았다. 그나마 스스로의 생각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은 교룡인 천오와 명계의 지배자인 요희. 그리고 거의 모습을 드러내
지 않는 요희의 그림자들 뿐이었다.
명계에서 살아가는 자들은 본래 인간이었던 자들도 있고, 천인이었던
자들도 있어 각양 각색이었다. 그러나 제 정신을 가지지 못한 자들중에
는 영수족이나 용족이 없었다. 본래 명계에 떨어진 자들 중에 영수족이
나 용족이 드문데다 있다해도 카이엔으로서는 그들을 알아볼 수 없었
다.
" 이번 기회에 용족들의 숫자를 확실히 줄일 수 있겠지..... 용족들이
오기 전에 미리 몇 가지의 준비를 해두는 것도 좋을 거야. 카이엔 네
스스로 말이다."
그렇게 말을 꺼내며 요희는 기쁜 듯이 미소지었다.
그리고 그녀가 용족을 증오하는 이유를 알지 못하는 카이엔으로서는
그러한 그녀의 웃음이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의 웃음소리에 따라 마치 호응하기라도 하듯이 움직이는 화려한
머리장식은 끊임없이 흔들리며 빛을 발했다. 그리고 카이엔은 그것을
보며 약한 현기증을 느꼈다.
二.
" 이제서야 오대 용왕의 회합을 요청하게 된 점 먼저 깊이 사과 드
립니다."
오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에 앉은 채 자신에게 시선을 던지고 있는
다른 용왕들을 죽 둘러보았다. 차분한 표정을 떠올리고 있는 황룡왕과
왠지 모르게 들떠 보이는 나이 어린 홍룡왕, 담담한 시선을 유지하고
있는 청룡왕과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고 있는 흑룡왕까지.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인 용왕들은 실로 일족의 대표라고 말하는 것이 당연한 분위
기를 풍겨내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자신이 만났던 교룡에 관한
이야기를 한 기린족의 황자 적수 역시 자신의 지위에 어울리는 기품을
가지고 있었다.
오강은 그들의 얼굴을 한차례씩 응시한 후 천천히 말을 꺼냈다.
" 이미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만, 이번에 새로 모습을 드러낸 교룡
은 이미 몇 명의 힘만으로는 제거할 수 없을 만큼 강한 힘을 지니고
있음이 판명되었습니다. 그리고 더군다나 그 교룡의 뒤에 무시할 수 없
을 만큼 커다란 배경이 있다는 것 또한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오강은 잠시 말을 멈추고 다시 한번 다른 용왕들과 시선을 마주했다.
" 그 힘을 이기기 위해서는 백룡족 하나의 힘만으로는 부족하기에
저는 오늘 이 자리를 빌어 다른 용왕들의 도움을 구하려 합니다."
그는 이미 생각해 놓은 내용이 있는 듯 거침없이 말을 이어나가고 있
었다.
" 명계와도 깊이 연관되어 있는 이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우리들
다섯 용왕이 움직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사실은 모두 숙지하고 계시
리라 생각합니다만."
" 그렇다면 백룡왕께서는 우리들 용왕의 힘으로 그들을 없애자는 말
씀이십니까."
청룡왕 리린이 묻자 오강은 진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습니다. 명계의 주인을 없앨 수는 없지만 함부로 움직이지 못
하도록 타격을 입힐 수는 있을 테니 말입니다."
"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백룡왕께서도 잘 알고 계시겠지
요?"
황룡왕이 말하자 오강은 의아함을 담은 눈빛을 그에게 향하며 되물었
다.
"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들 다섯 명의 용왕들이 힘을 합
친다면 어떤 것도 해낼 수가 있습니다."
" 다른 세계의 질서를 무너트릴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기 때문입니
다."
" 그러나 그것을 막지 않으면 우리 세계의 질서가 무너질지도 모릅
니다."
그렇게 수없이 여러 번 말이 오고간 후에 용왕들은 각자의 생각을 말
하고 가장 많은 의견이 나오는 쪽을 택해 그것에 따르기로 했다.
" 그렇다면 제가 먼저 말씀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 그렇게 하십시오."
"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일족들의 피해를 최대한으로 줄이기 위해
서라면 우리들 용왕이 직접 움직이는 것이 가장 좋은 생각이라 여깁니
다. 그리고 그렇게 움직이게 된다면 어떤 상황을 만난다고 해도 서로
상의해서 결정을 하면 되는 일이니 가장 이번 일을 해결하는데 부합할
수 있는 방법임이 분명합니다."
리린이 단호한 음성으로 그렇게 이야기하자 백룡왕 역시 그녀의 말에
찬성하는 뜻을 나타냈다.
" 저 역시 청룡왕의 말과 같습니다. 다섯 명의 용왕이 한꺼번에 움직
인다는 것은 어쩌면 말이 되지 않는 일일지 모르나 아무런 피해도 내
지 않은 채 이번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최선책이라 생각합니다."
아직 대답을 하지 않은 세 용왕 역시 그들이 말이 맞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용왕이 가장 중하게 여겨야 할 것은 일족들의 생명이었다. 오
랜 시간을 살아가는 대신 용족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기에 일족을
잃는 다는 것은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 우리 용왕의 힘만으로 간단히 끝낼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좋은
일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흑룡왕 유안 역시 찬성의 말을 던졌고 황룡왕과 홍룡왕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다섯 명의 용왕이 동시에 움직인다는 소문은 천계를 떠들썩하게 만들
기에 충분했다.
본래 용족들은 소문을 내기를 즐겨하지 않지만 이번만은 그들도 입을
열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정도로 큰 충격이라는 것이 사실이었다. 용
왕이 어떤 존재인가. 그들 개개인의 힘만으로도 자연을 이루는 하나의
원소를 지배할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존재가 아닌가. 그런 그들이 다섯
명 모두 함께 움직인 것은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단 한번도 없
었던 일이다.
" 결국 그렇게 되었군요."
시령은 자신이 머물고 있던 풍천궁의 북 별궁으로 돌아온 유안으로부
터 회합에서 나누었던 말과 결과를 전해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
했다.
만약 자신이었더라도 그런 결정을 내렸을 것이 분명했기에 용왕들이
내린 결론에 수긍했다.
" 아. 그렇다면 적수님도 함께 가는 건가요?"
시령은 자신들과 일행으로 함께 온 적수를 떠올리며 물었다.
" 그가 원한다면 만류할 이유가 없지."
" 그렇다면 저는 궁으로 돌아가 훼이와 함께 지내야겠어요. 지난번에
미쳐 다 하지 못했던 이야기도 있고 하니."
유안은 시령이 당연히 함께 가겠다고 이야기 할 줄 알았는데 스스로
가지 않겠다는 말을 하자 오히려 의아해졌다. 그러나 시령은 그런 유안
의 의심을 알아내기라도 한 듯 문을 향해 손을 뻗으며 다시 말했다.
" 저는 급한 일이 있으니 먼저 떠나도 괜찮겠지요?"
" 물론이지. 내가 당신을 붙잡을 이유는 없으니."
" 그럼 유안. 몸조심하고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오길 바랄께요."
유안은 여전히 영문을 알지 못한 채 갑작스레 몸을 돌리는 시령의 뒷
모습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 * *
백룡왕의 힘으로 열린 공간 앞에는 단 여섯 명의 인원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대 용왕과 역시 이번 일에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기린족
의 황자 적수.
그들은 모두 진중한 표정으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차례로 하계
를 향해 열려있는 공간 안으로 들어섰다.
하계에 다다른 오대 용왕들은 주위를 살펴볼 겨를도 없이 마치 자신들
을 맞이하기라도 하듯 피어오르는 음울한 기운을 감지하고 재빠르게
서쪽을 향해 몸을 옮겼다.
역시 명계의 주인이라는 존재가 개입되어 있는 만큼 상대방에서도 준
비를 갖추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명계의 주인인 요희. 그녀는 깊은 명계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다른 곳에
서 일어나는 일들을 자세히 알고 있다는 사실 역시 알려져 있었기에
용왕들은 경각심을 돋우고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마치 싸움을 위한 장소이기라도 한 것처럼 넓디넓은 초원이 그
들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러나 녹색의 풀들로 가득 해야할 초원은 점점
더 들어차 오는 짙푸른 안개로 물들어 제 색을 드러내지 못했다.
' 이것이 바로 명계의 공기인가.......'
적수는 용왕들의 뒤를 따라 초원에 들어서자 마자 시야를 가질 정도로
짙게 피어오른 안개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을 떠올렸다. 자신이 교룡
과 싸웠을 때는 이런 안개가 없었기에 생소한 느낌이 들었다. 그와 동
시에 명계의 공기가 대체 어떤 성질을 품고 있길래 죽은 자가 아니면
견디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인지 호기심이 생겨났다.
그러나 적수에게 그 호기심을 풀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조용히 안개
를 바라보던 백룡왕이 앞으로 나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일족들이 말했던 시야를 가리며 움직임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명계의 공기였다. 자욱하게 깔린 푸른 안개를 보며 백룡왕은 크
게 코웃음쳤다.
[ 개문(開門) 풍(風)! ]
그리고 그는 힘이 담긴 목소리로 가장 기본적인 주문이지만 마력의 크
기에 따라서 고급 주문과도 같은 힘을 낼 수 있는 개문의 주문을 펼쳤
다.
그러자 보통 백룡 일족의 힘으로는 결코 떨쳐버릴 수 없었던 푸른 안
개가 강풍에 떠밀려 자리를 비껴 가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안개가 사
라진 자리에는 마치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누군가의 모습이 나
타났다. 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짙푸른 색의 소매와 옷자락이
긴 옷을 걸친 카이엔이었다.
서로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그들은 직감적으로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알아차렸다.
" 저 자가 바로 교룡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 시켜주기라도 하듯 적수가 입을 열어 그의 정체를
말해 주었다.
" 저토록 어린 자가 열 명이 넘는 백룡족과 싸워 이겼단 말인가.....?"
홍룡왕은 놀랍다는 뜻을 조금도 숨기지 않은 채 말을 꺼냈다. 그리고
다른 용왕들 역시 그의 모습을 보는 순간 같은 생각을 했다.
어떻게 보면 나약하기 그지없는 인간 같기도 하고 갓 성년식을 치른
용족 같기도 한 그가 전투 능력이 뛰어난 백룡족 여러 명을 물리치고
한 명의 용족의 목숨을 빼앗기까지 했다는 사실은 믿을 수가 없었다.
三.
요희의 말을 통해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눈앞에 다
섯 명의 용왕이 서 있는 것을 확인하자 카이엔은 가슴이 은근하게 떨
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용왕들의 곁에 서 있는 한 남자 역시 자신
이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분명 언제였는지 전쟁터에서 주문을 쓰고 난 후에 모습을 드러내 자신
에게 공격을 가했던 인물이었다. 그때의 자신은 지금과는 비견될 수 없
을 정도로 힘이 약했기 때문에 그의 주문에 의해 부상을 입었고 이 이
후로 명계에서 또 다른 고통을 겪었었다.
그러나 그 남자는 이후에 조금 생각이 달라졌는지 처음처럼 자신을 당
장에 없애겠다고 달려들지는 않았다.
카이엔은 어느 누구도 자신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몸 속에 흐르는 반쪽의 피. 용족의 피를 생각하며 용왕들을 향
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용왕들의 의외라는 뜻을 품은 시선이 자신에게 닿자 카이엔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모든 힘을 다해 공격주문을 펼쳐냈다.
[ 풍천(風天) 회륜(回輪)! ]
그 주문에는 카이엔이 배워온 백룡족의 주문뿐만이 아니라 천오에게서
배운 명계의 주문 역시 담겨 있었다.
백룡족에게 주어진 바람을 이용하는 주문에 명계의 음유한 기운이 실
리자 그것은 완전히 다른 형태를 가진 또 하나의 주문이 되었다.
" 제가 먼저 상대해 보겠습니다."
백룡왕이 나서자 다른 용왕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씩 물러섰다.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어 내며 움직이는 음유한 푸른 색을 품은 바람.
백룡왕 오강은 그 움직임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주문을 펼쳐
냈다.
[ 패사령진(覇邪靈陣) 개(開)! ]
그것은 모든 용족들이 사용하는 방어 주문이었지만 그것이 오강의 힘
으로 쓰여지자 방어주문은 훌륭한 공격주문으로 바뀌었다. 오강은 자신
의 주위에 방어주문을 펼치지 않고 카이엔이 불러낸 주문이 움직이는
곳을 향해 주문이 다가서도록 했다.
파아앗.
그리고 카이엔이 불러낸 바람의 소용돌이는 백룡왕이 펼쳐낸 방어주문
과 맞물려 커다란 소음을 토해냈다. 마치 딱딱한 무언가를 깎아내는 듯
한 소리가 귀를 찢을 듯이 크게 울려 퍼졌다.
카이엔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백룡왕의 힘에 의해 자신의 주문이 해소될
것을 알고 바로 다음에 펼칠 주문을 준비했다.
[ 수륜(水輪) 개(開)! ]
백룡왕의 주문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몸을 피하고 또 다른 주문을 펼
쳐낸 카이엔에게 이번에는 물의 속성을 가진 주문이 밀려들어왔다.
투명하기에 소리로 밖에 판명할 수 없는 물의 움직임. 카이엔은 정신을
가다듬고 방어주문을 펼쳤다. 그러나 엄청난 힘을 가진 물의 타격은 방
어 주문으로 보호받고 있는 카이엔에게 진동을 느끼게 할 정도로 거센
움직임을 가지고 있었다.
용왕들은 비록 카이엔이 어리기는 하지만 자신들의 힘을 받아낼 수 있
을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진 것을 보고 놀라는 한편, 그를 없애기 위해
주문을 펼치는 데 조금도 힘을 반감시키지 않았다.
[ 염궁(炎弓) 전(展) ]
홍룡왕이 외친 목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한 그 순간. 카이엔은 자신의 곁
을 스치고 지나가는 뜨거운 열기를 느꼈다. 처음의 몇 개는 그저 카이
엔의 주위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불꽃의 기운에 눈을 돌리고 있던 카이
엔이 다시 정면을 응시했을 때 화염이 타오르는 듯한 소리와 함께 뜨
거운 한줄기의 불꽃이 자신의 몸을 때렸다.
" .......녠..."
카이엔은 애써 신음 소리를 참으며 손으로 땅을 짚고 고개를 들어올렸
다. 각 용왕들이 내뿜은 힘은 그에게 적지 않은 피해를 가져다 주었다.
그 때문에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너무나 힘겨울 정도로 카이엔은 지쳐
있었다.
카이엔은 자신을 향해 조용히 시선을 던지고 있는 용왕들과 다시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조용히 사태를 주시하고 있는 황금색 머리카락의 남
자 역시 카이엔과 눈을 마주쳤다. 하늘의 빛깔과 같은 푸른색 눈동자는
카이엔을 향한 채 흔들림 없는 빛으로 차 오른 시선을 던지고 있을 뿐
이었다. 카이엔은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자신의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렇게 시선을 돌리자 자신이 미처 알아채지 못한 사이에 얼마나 많은
공격 주문이 오고 갔는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
이 이렇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 결코 요행만은 아님을 알았다.
용왕들이 가진 힘은 단순히 계절의 순환을 위한 힘만이 아니었기에 그
들의 힘이 퍼부어진 자리는 이미 제 형태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파
괴되어 있었다.
오직 대기의 흐름을 주관하는 흑룡왕 만이 아직 자신의 힘을 쏟아내지
않았기에 하늘은 여전히 푸른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카이엔은 자신의 모든 능력을 발휘하여 용왕들의 공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들이 가진 강한 힘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했
다. 네 명의 용왕이 뿜어낸 주문에 의해 밀어닥친 가공할 만한 주문의
여파는 카이엔이 펼쳐낸 방어주문을 간단히 부숴 버리고 그의 몸을 내
동댕이쳤다. 온몸이 부서지는 듯한 극렬한 통증에 카이엔은 숨을 쉴 수
가 없을 정도였다.
다시 몸을 일으키기 위해 손에 힘을 주었지만 그것조차 무척이나 힘겨
웠다. 카이엔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요희가 말했던 죽음을 경험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각오하고 있었던 일이기에 두렵
지는 않았다.
카이엔은 조금이나마 견딜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기 위하여 웅얼거리
듯이 주문을 외쳤다. 그러자 처음에 초원을 가득 감싸고 있었지만 백룡
왕의 힘에 의해 사라져버린 푸른 안개가 조금씩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 호오. 오대 용왕이 한곳에 모두 나타나다니 무슨 일이지?"
귓가를 울리는 날카로운 음성.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모든 이들은 방
금 말을 꺼낸 자가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 요희......"
" 이 중에 나를 직접 본 자는 아마 없을 텐데 날 아는 것을 보니 내
가 이토록 이나 많이 알려져 있는 모양이군?"
요희는 용왕들의 얼굴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몇 걸음을 움직여
공간 안에서 빠져 나왔다. 그리고 그녀의 뒤를 따라 길다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남자가 나오더니 곧 공간의 문을 닫았다.
" .........!"
그 남자의 모습을 본 순간 리린은 경악에 온 몸을 떨었다. 아직도 어제
의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과거에 자신의 힘을 간단히 무마시
켜버리고 유안을 데려갔던 남자가 아닌가. 리린은 자신도 모르게 격렬
한 감정이 담긴 목소리로 외쳤다.
" 어째서 그대의 세계에 머물지 않고 다른 곳을 침해하는 건가!"
" 흥..... 시끄럽군."
리린은 같은 여인임에도 요희의 소름끼치는 말투와 눈빛. 그리고 눈을
현란하게 만드는 그녀의 차림새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의 모습은 한
마디로 지독한 광기를 겉으로 드러냈다고 밖에 볼 수 없는 모습이라고
리린은 느꼈다.
" 내가 움직이는데는 스스로의 의지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필요하
지 않아."
" 한 세계의 주인이라는 자가 고작 그런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다니
너무나도 우습군."
리린은 일부러 그녀의 신경을 거스르는 말을 꺼냈다.
" 흥.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어린 용왕들과 말다툼을 해서 무엇하겠
나...."
요희는 비꼬듯이 말을 내뱉고는 분개한 표정을 짓고 있는 리린을 노려
보았다.
리린은 분했지만 그녀에게 있어 자신들이 한없이 어리다는 것은 사실
이었다. 그녀에게는 영원의 시간이 있었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다고는 해도 그녀에 비하면 턱없이 짧은 시간이었다.
" 내가 친히 내 힘을 불어넣은 상대와 싸운 기분은 어땠는지 모르겠
군. 그러나 지금부터는 내 힘을 보여줄 테니 염려하지 않아도 좋아."
요희는 싸늘하게 웃으며 날카로운 손톱을 치켜 세워 보였다.
그런 그녀의 움직임이 신호가 되어 유안을 제외한 네 명의 용왕은 동
시에 공격주문을 외쳤다.
그녀의 힘은 자신들의 힘으로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성질의 것이
었기에 그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 좋아..."
요희는 미소지으며 손을 떨쳤다. 그러자 카이엔의 힘으로 일어나고 있
던 안개가 순식간에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게 피어올랐다.
그러나 안개가 피어올랐어도 용왕들이 내뿜은 힘은 조금도 반감되지
않은 채 요희가 서 있던 장소를 향해 뻗어나갔다.
그러나 그들의 힘은 안개 속에 휘말려 본래의 힘을 다 내지 못하고 서
로 충돌했다.
" 그녀의 힘을 너무 간과한 것 같군요."
황룡왕은 중얼거리며 처음과는 완전히 다른 생명체처럼 기이한 안개를
응시했다.
" 안개를 없애기만 한다면 우리의 힘으로도 승산이 있습니다."
백룡왕은 조금 전의 경험을 되살려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그때까지 침
묵을 지키고 있던 흑룡왕 유안이 천천히 손을 들어올리며 외쳤다.
[ 개문(開門) 람(嵐) 전(展)! ]
유안의 목소리가 여러 뒤섞인 파공성 사이로 울려 퍼졌다. 누구도 그
소리를 마음에 두고 있지 않았지만 목소리가 불러낸 여파는 금새 형체
를 드러내며 나타났다.
다른 용왕들이 불러낸 주문과 뒤섞여 점점 먹구름으로 뒤덮여 가는 하
늘에서 몇 방울의 비가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은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세차게 떨어지는 폭우로 바뀌
었다.
유안의 힘으로 폭우를 동반한 폭풍이 일자 요희는 순간적으로 과거의
기억을 되살렸다. 훼이가 자신의 아들의 죽음 때문에 명계로 찾아와 온
갖 주문으로 명계의 반 이상을 파괴했던 그때도 역시 이 주문의 효력
이 크게 작용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주문은 요희가 만들어낸 안개를
없애는 데 무척 유효했다.
" 막아라."
요희는 더욱 기분이 나빠져 냉랭하게 소리쳤다. 그러자 아무것도 존재
하지 않았던 공간에서 네 명의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내고 요희를 향해
밀려오는 주문을 막아내기 위해 처음 초원을 메우고 있던 푸른색의 안
개와도 비슷하게 느껴지는 기운을 뿜어냈다.
신기하게도 그 기운에 맞닿자 유안이 불러낸 주문은 요희에게 미치지
못한 채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유안은 엷게 미소지으며 자신이 불러낸 주문에 또 다시 힘을
가했다. 폭우는 유안의 힘을 받아 처음보다 더 세차게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 과연 흑룡왕이로군......"
요희는 소리 없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선명한 푸른 눈동자를 가졌지만 흑룡왕의 모습은 훼이를 떠오르게 만
드는 데 충분했다.
" 좋아. 오늘은 결코 실망하지 않아도 되겠군."
그녀는 자신의 뒤에 그림자처럼 늘어선 네 명과 함께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웅얼거리듯이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유안은 다른 용왕들이 수월하게 힘을 쓸 수 있도록 계속해서 폭풍의
주문을 유지시켰다.
" 오늘이야 말로 우리의 힘을 제대로 써볼 수 있는 날인 것 같군요."
젊은 홍룡왕은 즐거운 듯이 외치며 먼저 주문을 펼쳐냈다. 살아 움직이
듯이 꿈틀거리는 화룡의 형상이 공중에 떠올라 명계의 존재들을 태울
듯이 불꽃을 넘실거리며 날아갔다. 다른 용왕들 역시 차례로 주문을 펼
쳐내 명계에서 온 존재들에게 퍼부었다.
" 어린 용족들이 제법 힘을 쓰는군."
요희의 음성이 그 사이를 파고들 듯이 들려오자 용왕들은 더욱 강한
주문을 펼쳐냈다.
그렇게 얼마나 싸움이 지속되었을까.
갑자기 거침없이 쏟아져 내리던 비가 거짓말처럼 멈추고 모든 용왕들
이 뿜어내던 힘이 사그러지듯이 소멸되었다. 그것은 명계에서 온 존재
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싸움은
멈췄다.
그리고 경악과 당혹감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검은 파오를 걸치고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한 남
자의 모습이었다.
" 백부님...."
유안은 망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
역시 누가 자신들의 힘을 일시에 사라지게 만들었는지 깨달았다.
四.
훼이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요희의 곁으로 다가섰다. 시간이 지났다
고는 해도 그의 마음 속에 잠겨 있는 기억이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
분명한데도 그에게서는 어떤 다른 기색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일부러 인지 아니면 보지 못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유안에게 고
개 한번 돌리지 않은 채 요희에게만 시선을 던졌다.
훼이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서 작은 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녀는 여전
히 날카롭게 빛을 발하는 손톱을 훼이를 향해 들이대고 있었지만 훼이
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 당신이 거짓말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아. 당신은 다른 용족들과는
다르니까."
요희는 다른 어떤 용족들보다 훼이를 증오했지만 그를 증오하는 만큼
훼이의 성격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와는 실로 천년이 넘는 시간동안
끈질긴 인연으로 이어져 오지 않았던가.
요희는 훼이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그러나 날카로운 어조로 답했다.
" 하지만 후회하지 않을 수 있나....?"
훼이는 대답 없이 미소만을 지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선명한 붉은 눈동
자를 정면에서 응시했다.
" 이제 그대의 기분을 알고 있으니까. 그대도 조금은 날 알았다고 생
각하지 않나? 처음에는 악연이었지만 지금은 그것만으로 생각할 수 없
는 인연이 되었지."
그리고 그 이후에 이어진 훼이의 말은 너무 작아 소근 거림으로 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요희의 표정은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
다. 그러나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여전히 차갑고 공포스러운 느낌을 풍
겨내고 있었다.
요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 좋아. 당신이 무슨 행동을 하건 간에 상관하지 않겠어. 약속은 약
속이니까."
그렇게 말하고 나서 요희는 날카롭게 자라난 손톱을 천천히 아래로 내
려 소매 안으로 감추었다.
다른 이들은 모두 그녀의 그 같은 행동에 의아함을 느꼈지만 감히 물
을 수는 없었다. 그녀가 비록 질서를 어긴 행동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한 세계를 다스리는 지배자이자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녀의 곁에서 훼이가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
을 알기에 함부로 경거망동 할 수도 없었다.
" 카이엔. 이리로 와라."
휘청거리는 몸을 지탱하며 카이엔은 걸음을 옮겨 훼이와 요희가 나란
히 서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실로 평생을 가도 모이기 힘든 자들이 한곳에 자리하고 있
었다. 오대 용왕을 비롯하여 명계를 다스리는 자들과 교룡. 그리고 스
스로의 힘으로 수명을 뛰어넘은 자까지.
그들의 시선을 받아내며 카이엔은 힘겨운 걸음을 옮겼다. 어느 누구도
함부로 나서서 훼이와 요희의 곁으로 다가서는 그를 제지하지 못했다.
분명 용족들은 그를 없애기 위해 하계에 온 것이 분명함에도 그들이
가진 용왕이라는 이름으로는 훼이에게 어떤 강요의 말이나 거부의 말
도 건넬 수 없었기에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훼이와 요희가 과
연 어떤 말을 나누었는지. 그리고 카이엔을 부르는 이유는 무엇인지 둘
이외에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다.
잔잔하게 풀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소리와 카이엔이 발걸음을 내딛는
소리 이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고요한 침묵.
카이엔은 얼마 되지 않는 거리였음에도 요희가 있는 곳까지 걸어가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게 느껴졌다. 그리고 간신히 그녀와 훼이가 서 있는
곳에 다다랐을 때 카이엔은 멀리에 있었기에 확인하지 못했던 남자의
얼굴을 보고 크게 경악했다.
그러나 미처 자신의 감정을 수습하기도 전에 요희의 손이 자신의 몸에
닿았다. 그러자 애써 지탱해오던 몸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요희는
카이엔이 바닥에 쓰러지지 않도록 그의 어깨를 잡고는 어느 순간 인형
을 다루듯이 가볍게 카이엔을 공중으로 띄워 올렸다. 그리고 다시 카이
엔의 몸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기 전 훼이의 몸에서 나온 것이 분명
한 은은한 검은 색을 띄는 안개가 카이엔의 몸을 감쌌다. 그리고 카이
엔은 조금씩 높은 하늘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 무슨 짓이지....?"
요희는 자신이 짐작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일이 흘러가자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그녀 역시 이 자리에 있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
지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훼이는 다시 한번 요희에게 작은 속삭임의 말을 전했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그녀의 표정은 눈에 띄게 굳어졌다. 과연 어떤 말이 그
녀의 얼굴에 그런 표정을 떠올리게 만들었는지 궁금할 정도로.
훼이의 몸에서 검은 안개와도 같은 기운이 새어나온다고 느꼈을 무렵
그것은 순식간에 둥근 소용돌이처럼 크게 변모했다. 그리고 하늘 높이
떠올랐다.
펄럭-!
거대한 천 자락이 바람에 날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고 여긴 순간
하늘 위로 높이 떠올랐던 검은 덩어리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한 눈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날개를
가진 용. 바로 응룡의 모습이었다.
" 응룡......."
검고 거대한 보석과 같이 광채를 뿌리는 몸체와 길게 뻗어 하늘 저편
에 닿을 듯한 날개.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은 마치 꿈이라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저것은......."
홍룡왕의 경악 어린 음성이 고요함을 뚫고 새어나왔다.
五.
몸 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거대한 열기. 숨조차 쉬지 못할 정도로 거센
그것은 카이엔의 의지를 배반한 채 그의 온 몸과 정신을 지배하고 있
었다.
' 어째서........?'
카이엔은 온 몸을 감싸며 점점 크게 차 오르는 열기와 더불어 의문 역
시 그 크기를 더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입술을 움직여 묻고 싶
었다. 대체 왜 이런 일을 자신에게 행하는지. 자신은 그와 아무런 연관
도 없는데 어째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인지.
- 내가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나?
그가 꺼낸 말에 깊이 생각을 하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카이엔은 두 눈
앞에 펼쳐진 경이로운 광경에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을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온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장대한 몸체. 신(神) 이라는 단어 이외의 말
로는 설명할 수 없는 전율과 함께 다가선 존재. 용족이라는 평이한 단
어로는 그를 묶어둘 수 없다는 것을 카이엔은 처음 마주 대하는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 리시엔에게서 들었던 누군가를 떠올렸다. 인간으로서는
감히 굽어볼 수조차 없는 용족들이 경이로움과 예의로 대하는 존재. 두
번의 천년을 살아오며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힘을 가지게 된
존재를. 그리고 그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교룡인 아들이 있었음을.
그리고 놀랍게도 그녀가 말했던 그의 얼굴은 하계에서 자신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존재와 꼭 같지 않은가.
- 그대에게 내가 지닌 모든 것을 전해 주겠다. 원하지 않는다면 거부
해도 좋다. 하지만 나는 그대가 받아들여 주기를 원한다.
카이엔은 대체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카이엔과 마찬가지로 그곳에 자리하고 있던 용왕들을 비롯한
용족들 역시 경악으로 가득 찬 시선으로 그 광경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요희 또한 엄청난 충격을 받은 듯 몸을 떨며 그 광경에서 시선
을 떼지 못했다. 훼이의 말속에 담긴 뜻이
저런 것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유일하게 자신과 더불어
영원의 시간을 이해하고 있는 존재인 그가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것을
얻었듯이 또 모른 것을 버리려 하는 것이었다.
- 그대를 통해 나는 내가 가야할 길을 깨달았을 뿐이다. 너무도 긴
시간을 산다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니 차라리 그대가 새로운 길을 볼
수 있게 만드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기쁜 일은 없겠
지.
카이엔은 정신을 잃어버리게 만들 정도로 거센 열기 속에서 계속 생각
했다. 자신에게 과연 이 같은 일을 받아들일 자격이 있는 것일까. 그리
고 과연 받아들여도 되는 것일까.
훼이라는 존재가 가진 거대한 힘과 생명력을 자신이 가지게 된다면 분
명 지금까지 자신을 괴롭히던 모든 장애와 구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
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임이 분명했다.
' 진정으로 저의 과거를 돌아보지 않으시는 겁니까?'
카이엔은 소리내어 물을 수는 없었지만 마음속의 외침으로 그렇게 의
문을 꺼냈다. 아무리 훼이가 자신에게 스스로의 생명을 주겠다고 결심
했다 해도 자신이 저지른 과오는 너무나도 크다. 명계와의 끈질긴 인연
으로 인해 그리고 강요로 인해 처음으로 인간의 피를 대지에 가득 적
시게 되었지만 거부할 수 있는 일이었음에도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
다. 아직도 그 짙고 비릿한 피의 향기가 코끝에 맴돌고 있는 듯한 느낌
이 들었다.
너무나도 나약한 정신을 가졌기에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했던 것인
지도 모른다.
고통처럼 점점 더 강도를 더해 가는 열기 속에서 카이엔은 지난 시간
의 자신을 돌아보았다. 정신을 어느 한곳에 쏟지 않으면 열기에 휘말려
더욱 큰 고통을 느낄 것이 분명했다. 과거라는 이름아래 흘러간 자신에
게 있어 소중했던 기억과 고통스러운 시간들 모두를 카이엔은 뼈에 새
기듯 하나하나 되짚었다.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자 온 몸을 태울듯한 열기는 조금 사그러든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 고통은 입을 열 수조차 없게 만
들 정도였다.
' 훼이...........'
그리고 그렇게 거대한 존재의 이름을 부르며 마치 본능처럼 카이엔은
온몸으로 열기를 받아들였다.
" 백부님........."
유안은 거센 충격에 휩싸여 작은 목소리로 계속 한마디만을 되뇌었다.
그리고 그것은 리린 역시 마찬가지였다. 용왕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것은 리린과 유안의 둘이었고, 훼이와 직접적인 연관을 가진 것 역시
둘이었다. 다른 용왕들은 그저 몇 번 그와 얼굴을 마주 대하거나 인사
를 나눈 것이 고작이었기에 훼이에 대해 경외감 이외의 별다른 감정을
품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훼이와 혈연관계에 있으며 무엇보다 더 마음 깊이 그를 생각하
던 유안과 훼이를 통해 많은 것을 깨달았던 리린은 몸을 주체할 수 없
을 정도의 충격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렇게 망연한 시선으로 하늘을 응시하던 유안은 훼이가 화한 응룡의
형상이 거짓말처럼 거의 사라져 있는 것을 보았다.
" 백부님......."
또 다시 유안은 대답 없는 훼이를 응시하며 그를 부르고 또 불렀다.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며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경악에 찬 감정에 휩
싸여 있는 적수 역시 숨을 몰아쉬며 높은 하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자신과도 인연이 닿아 있었지만 결코 시간을 내어 이야기를 나누어 보
지 못했던 용족의 오래된 자 훼이. 그는 영수족들 사이에서도 감히 함
부로 입에 오르내릴 수 없는 경외의 대상이었다.
거대한 진신을 가진 응룡. 바로 훼이의 몸이 완전히 카이엔의 속으로
스며들었을 때 갑자기 태양의 광휘보다 더 눈부신 빛이 주위를 감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카이엔의 모습은 그 자리에서 온데간데없이 사라
져 있었다. 그리고 남겨진 자들은 그저 망연함만을 느끼고 있었다.
" 약속이니 돌아가겠다."
요희는 훼이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자신을 따라온 명계
의 존재들에게 몸을 돌려 말하고는 공간을 열었다. 정신 없이 반짝이는
그녀의 옷과 장신구들은 찰랑이는 소리를 내며 맞부딪히고 있었다.
" 지금은 돌아가지만 오늘 일은 절대 잊지 않겠다. 어린 용왕들......항
상 기억해 두는 것이 좋아."
요희의 목소리는 여운처럼 길게 꼬리를 늘이며 그들의 귓가에 파고들
었다.
六.
훼이는 마지막으로 모습을 감추기 전 공간의 문을 열고 카이엔에게 말
을 걸었다. 아직 온몸을 감싼 열기 때문에 제대로 된 대답조차 할 수
없는 상태인 카이엔은 조용히 그의 행동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리고 주
위의 모든 것을 확연히 바라볼 수 없는 그는 훼이의 모습이 희미하게
비치는 것 역시 자신이 열기 속에 휘감겨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뿐 다른 의문을 품지는 않았다.
" 지금의 네게 있어 가장 만나고 싶은 상대는 분명 이 사람이겠지."
그리고 훼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공간 안에서 걸어나온 누군가의 모습
이 보였다. 아직은 옷자락만이 시야에 잡힐 뿐이었지만 그것은 얼마 지
나지 않아 어떤 한 사람의 모습이 되어있었다. 그립고도 그리운 백여
년의 세월동안 단 한번도 지워버린 적이 없는 존재. 너무나도 큰 무게
를 지녔기에 증오의 감정조차 담을 수 없었던 그녀. 어머니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가.
" 카이엔."
그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그녀의 모습. 몇 번이나 나무로 깎아 내
렸던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카이엔은 조금도 몸을 움직
일 수 없었기에 그저 시선만으로 그녀를 쫓아야했다.
" 어....머니..."
그리고 겨우 입술을 움직여 그녀를 불렀다.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의 시
간.
그렇게 거의 백여 년 만에 만난 모자는 서로를 마주본 채 움직이지 않
았다.
너무나 묻고 싶은 것이 많았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어버린 카이
엔과 달라진 아들의 모습을 계속해서 바라보기만 하는 시하라는 누군
가가 그 침묵을 부수기 전에는 결코 입을 열지 않을 것만 같았다.
" 세상에는 결코 존재해서는 안 되는 생명이란 없다. 세상을 움직이
는 가장 큰 흐름은 탄생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니까."
훼이의 목소리가 둘의 귓가에 맴돌았다. 그리고 그 목소리의 여운이 사
라진 후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시하라와 카이엔 뿐이었다.
" 사과의 말은 하지 않겠다."
시하라는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담담한 울림을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나도 그녀다운 표정과 말투에 카이엔은 자신이 어떤 말을 하려고
했었는지도 잊은 채 과거의 시간으로 되돌아갔다.
한적하고 고요하기 그지없는 삶이었어도 결코 부족함을 느끼지 않았던.
" 나는 네가 원하는 대로 살기를 바란다. 이것은 내가 어머니로서 너
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말이다. 이후에는 나를 어머니로 생각하지
말아라. 너는 내가 낳은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한 아이가 아니다."
" 어머니..."
카이엔이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어머니라는 단 한 마디 뿐이었다. 어
떤 말도 입술 사이로 새어나오지 못한 채 카이엔은 그저 어머니의 얼
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아있던 그때의 모습처럼 단정하게 틀어 올려진
머리카락과 그곳에 장식되어있는 황금색의 용잠 하나. 그리고 너무 화
려하지도 소박하지도 않은 궁장.
이제 스스로의 눈으로도 확실히 백룡족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어
머니의 모습.
" 카이엔."
시하라는 카이엔과 헤어졌던 그 날의 표정으로 아들을 응시했다. 스스
로의 힘으로 시간의 강을 건너온 아들은 어느새 훌쩍 자라 과거에 그
토록 이나 자신의 마음을 설레이게 만들었던, 그리고 더 오랜 세월이
흐른다 해도 지워지지 않을 류선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시하라는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엷은 묵광에 감싸인 카이엔
의 몸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열기 때문인지 카이엔의 얼굴은 붉게 상기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녀로서는 알 수 없는 고통 속에 있는 것도 같았
다.
자신이 바란 것은 아니지만 오래된 자는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아들을 만나보라고 이야기했다. 어떤 이야기를 하던 그것은 그녀의 자
유이지만 부모로서 그 이름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생각이 없다면 아
들을 품에서 놓아주라고.
그는 냉정한 말로 끊어버리더라도 자유를 안겨주라고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시하라는 오래된 자 훼이의 얼굴을 향해 옅은 미소로 답하고는
그가 연 공간 속으로 들어선 것이다.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의 곁을 떠나버린 어머니이건만 카이엔의 얼굴에
는 책망의 빛도 증오의 빛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그녀 역시 하계에서
카이엔이 일으킨 소동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카이엔이 얼마나 고통스
러운 경험과 기억을 지니고 있는지도. 그러나 카이엔의 곁을 떠나던 그
날 자신은 두 번 다시는 하계로 내려와 지나간 시간을 되살리는 일은
하지 않겠노라고 결심했다. 그저 모든 것을 자신의 마음 속에만 묻어둔
채 현실의 시간을 살겠다고.
" 네 어머니로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이 마지막이다. 카이엔. 두 번
다시는 날 볼일도 없을 테지만."
시하라는 카이엔과 리시엔 사이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하려했다. 그러
나 결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둘 사이의 일은 스스로의 힘으로 해
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피가 섞여있던 아니건 간
에 그 둘의 일을 풀어낼 수 있는 것은 그들 자신뿐이다.
" 내게 할 말이 없다면 이만 작별하겠다."
카이엔은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결국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시하라의 목소리는 요희에 비하면 날카롭다거나 냉담하다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카이엔은 그녀의 목소리에서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
시하라는 잠시 카이엔의 얼굴을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응시했다. 마치
기억 깊은 곳에 새기기라도 하듯이.
고개를 돌린 시하라는 카이엔의 몸을 감싸고 있던 은은한 묵광이 선명
한 흰색으로 변화하는 것을 느꼈다. 그렇지만 다시 고개를 돌려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지는 않았다. 분명 뒤를 돌아본다면 훼이가 아들에게 전
해준 생명의 힘이 어떤 변화를 가져다 주는 지 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결코 시하라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이제 자신이 카이엔에게 말했듯이 더 이상 자신은 카이엔의 어머니가
아니다. 자신은 그저 인간 남자 진류선을 영원히 마음 속에 담아둔 채
자신의 장소로 돌아가야 하는 백룡족 여인. 시하라일 뿐이었다. 죽음을
맞는 그 순간까지 백룡족 리강의 부인으로서 그리고 두 번 다시 자신
을 부르지 않을 딸 리시엔의 곁으로 돌아가 부인이 그리고 어머니가
되어야 할.
그리고 그때로부터 그들 사이에 흐르는 시간은 변함 없이 앞으로 흘러
나갔다.
七.
카이엔과 훼이가 사라지고 난 후 폐허가 되다시피 한 자리에 남아있던
용왕들은 각기 얼굴에 서로 다른 뜻을 담은 표정을 떠올리며 한 자리
에 모였다.
" 괜히 하계의 땅에 피해를 입힌 것 같군요."
황룡왕은 푸른 풀들이 가득 돋아나 있던 땅이 황폐해진 것을 보며 결
국 자신의 힘을 써서 파헤쳐진 흙들을 제자리로 되돌렸다. 당장 푸른
풀이며 나무들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는 없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
은 다시 푸르게 변할 것이다.
" 결국 이렇게 되어 버렸군요. 그분은 처음 순간부터 일족들에게 정
해진 법칙은 물론, 살아가는 자들이 지켜야할 규칙을 지키지 않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분을 거스르지는 못했습니다."
황룡왕이 자신의 힘을 거두어들이고 말하자 홍룡왕이 그의 말을 받았
다.
" 이로서 천제는 또 하나의 수명부를 버리게 되었군."
훼이가 자신의 수명부를 스스로 없애버리던 때부터,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전부터 용족들과 천제 사이의 교류는 끊긴지 오래 되었다.
천제들의 욕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용족들은 자신들의 태도를 굽혀야
한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 계기를 마련해준 훼이 덕분에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만족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것이라면 모르되 용족으로 태어난 이상 그들이 갖는 자부심은 한
마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었다.
" 정녕 이렇게 끝내시겠습니까?"
" 그러나 우리가 그 교룡을 없애려 한 것은 그자가 끊임없이 용족의
생기를 갈구하여 일족을 해칠 것임을 염려해서 였습니다. 그런데 이
제.... 그럴 일이 없어졌지 않습니까."
" 하지만 그것 뿐 만이 아니라 교룡이 목숨을 빼앗은 무수한 인간들
의 일 역시 잊어서는 안됩니다. 명계가 뒤에 있었지만 결국 움직이고
행동한 것은 교룡이 분명하니 말입니다."
황룡왕이 다른 문제를 제기하자 백룡왕과 홍룡왕 역시 고개를 끄덕였
다.
지금은 그 교룡이 교룡이라 부를 수 없는 존재가 되었음이 확실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가 이전에 범한 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에.
다른 용왕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유안과 리린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그저 푸른색으로 물들어 있을 뿐인 텅
빈 하늘에 시선을 던졌다. 금방이라도 조금전의 영상이 되살아날 듯한
느낌. 이제 이후에는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응룡의 모습. 그 웅대한
용은 그들에게도 말을 잊게 만들 정도로 거대한 위용을 자랑했다. 그리
고 그 응룡의 정체가 잘 알고있는 누군가의 모습이었기에 더욱 그 충
격은 컸다. 유안은 자신도 알지 못하고 있던 훼이의 모습에 경악했고,
또한 그가 할아버님이 그랬던 것과 같은 선택을 했음에 다시 한번 놀
라야 했다.
' 백부님. 어째서.......'
" 흑룡왕과 청룡왕 두 분께도 말씀을 묻겠습니다."
황룡왕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제서야 유안은 정신을 차렸다. 다른 용
왕들 역시 지금의 유안이 느끼고 있을 기분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 하계에 내려온 이유
를 확실히 하는 것이었다.
훼이라는 거대한 힘을 지닌 존재가 이번 일을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흐르게 만들었지만 결정을 내리는 것은 천계의 주인인 다섯 명의 용왕
이다.
" 저는 그 교룡이 명계를 떠나 자유롭게 살기를 바랍니다."
유안은 보통 때의 그와 조금의 차이도 없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나 목소리와 달리 마음은 너무나도 무거웠다.
" 청룡왕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리린은 잠시 유안에게 시선을 던졌다. 이미 과거의 치기어린 왕자였던
유안은 어디에도 없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은 명계로 잡혀갔던 어
린 후계자가 아니라 더 없이 강하고 침착한 흑룡왕이었다. 이미 자신과
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리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벌써 수 백년이 지났음에도 자신은 그 과거를
벗어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너무나도 어
리석게.
" 저 역시 흑룡왕과 같은 생각입니다."
황룡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례로 다른 용왕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규합한 용왕들의 의견을 꺼내 놓았다.
" 그렇다면 더 이상 우리 용족들은 그 교룡의 일에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겠습니다. 만약 그가 용족들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하계의 질서
를 파괴하는 경우가 아니면."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어느 용왕도 교룡이 이후에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만큼이나 그들의 마음 속에 존재하고 있
는 훼이라는 인물의 무게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
다.
" 그럼, 돌아갑시다. 괜한 헛걸음을 한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가장 위
대한 순간을 직접 두 눈으로 보았으니 실로 값진 경험을 한 것입니다."
이미 그들은 또 다른 큰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놀라지 않고 움직일 기
운이 나지 않을 정도로 정신적으로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리하여 다시 한번 자신들의 입장을 되새기게 되었다.
" 유안. 그것이 사실인가요.....?"
시령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바닥에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자
신이 유안과 함께 하계로 가지 않았던 까닭은 바로 훼이를 자신이 설
득해서 함께 움직이려는데 있었다. 그러나 궁에 돌아왔을 때 훼이의 모
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 훼이가 홀로 하계에 가서 그런 행동을 했
다니.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며 웃음을 보여주
었던 훼이가 아닌가. 그런 그가 이렇게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은 채
영원히 자신들의 곁에서 떠나버릴 줄이야.
" 나 역시 백부님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했고, 아무런 말도 듣지
못했어. 그리고 이미 그분이 응룡으로 화해 있었다는 사실 역시 알지
못했지......."
유안의 음성은 무척이나 작았다. 그러나 시령은 그의 회한이 어린 말
한마디 한마디를 빠짐없이 알아들을 수 있었다. 주위는 지극히 고요해
서 유안의 나지막한 말소리와 시령의 숨소리 이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이제 정말 두 번 다시 훼이를 볼 수 없다는 건가요....?"
시령은 가라앉듯 무겁게 내려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유안이 대
답하지 않아도 그녀 스스로 그 물음의 해답을 알고 있었다.
" 훼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당신이 선택한 것을 우리가 바꿀
수는 없었겠지만 적어도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눌 여유는 가질 수 있지
않았나요...? 어째서 이렇게 떠난 거에요...."
유안은 망연한 시선으로 시령이 되뇌이는 것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
다.
자신이 처음 만났던 때의 백부 훼이는 아직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헤메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의 힘
으로 그것을 끊어 버렸고 자신이 바라던 대로 원래 그가 속한 곳. 그리
고 한없이 위안이 되는 존재로 있어주었다. 그리고 유안 자신이 결코
다른 이들에게 해를 입지 않을 정도로, 아니 그 이상으로 크게 자라났
을 때 훼이는 그저 담담하게 웃으며 곁에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 라이
엔이 수명을 다해 눈을 감을 때에도 최후의 순간을 지켜주었으며 흑룡
왕이 된 자신을 위해 항상 곁에서 여러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훼
이의 존재가 자신에게 있어 백부라는 이름 보다 얼마나 더 커다란 의
미를 지니고 있었는지는 자신 이외의 그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용족이라는 강한 힘을 가진 존재로 태어났지만 언제나 그 강함이 모든
것을 덮어줄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방패가 되어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훼이라는 존재가 있었기에 유안의 오 백년은 행복이라는 단어로 가득
채워질 수 있을 만큼 풍족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다. 그저 자신의 기억 속에 가라
앉아 있는 지난 추억 이외에는.
그리고 천년이라는 시간을 지니고 있는 자신들 역시 시간의 도움이 아
니면 그 슬픔의 감정을 떨쳐버릴 수 없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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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병들었어요... 지금 목소리가 완전히 이상해져서..
기침도 콜록이고... 마음도 슬퍼요. T^T
글은 끝냈지만 제 마음에 안 들고, 제가 표현하려했던 부분은 독자들에게는
좀 낯설고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여하튼 오랫동안 붙잡고 있던 글을 보내니 마음이 착찹해요. 그리고 회사에서
도 일이 있어서 마음이 아픕니다.
이제 다음 글인 은의 왕국을 써야죠. 원래 바로 올라가야 하는데 제가 병이
들어서...T^T
1부 리메이크 하면서 2부 연재 들어갈 계획입니다. 그럼, 저는 이만...총총 [번 호] 8112 / 8369 [등록일] 2000년 05월 11일 22:12 Page : 1 / 38
[등록자] 까망포키 [조 회] 112 건
[제 목] [흑룡의 숲 2부] 연(緣)... - 82~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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