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룡의 숲-130화 (130/130)

< 흑룡의 숲 2부 >

연(緣)...

종장(終章). 緣(가장자리)

인연......

당신과 나를 묶은 것은

그 오래고 오랜

시간의 강을 건너

당신과 나를 만나게 한 것은

내 가슴에 지워지지 않을

흔적을 남긴 것은

一.

카이엔은 아직도 변해버린 자신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강한 힘과 더  이상의 갈증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몸. 어떤 용족들보다도 강인한 존재가 되었건만 달라진 것은 자신의 겉

모습일 뿐. 본래의  카이엔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카이엔은 용족의

오래된 자 훼이로부터 그의 힘과 생명을  건네 받고 나서 한동안 낡은

자신의 어린시절의 집으로 돌아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평

생을 지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카이엔은 앞으로 자신이 어

떻게 움직여야 할 것인지 생각하며 그 장소에서 빠져나왔다.

어깨를 타고 흘러 내려와 시야를 어지럽히는 새하얀 머리카락. 그 색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힘의 계승을 통해 용왕의 자리를  이어받은 존재뿐.

오직 왕의 피가 흐르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빛깔이었다.  그러나 자신

은 교룡. 용족들이 가장 꺼려하는  존재임에도 그 위대한 색을  가지게

된 것이다.

자신이 얻은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교룡으로서 마땅히 느끼고  죽음

을 맞이하는 그 순간까지 벗어버릴 수  없는 괴로움조차 더 이상 자신

을 따라다니지 못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을 얽매이게 만든 명계 역

시 더 이상 자신에게 힘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 자신의 핏줄로 인해

짊어지고 있던 모든 굴레를  카이엔은 더 이상  짊어지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자유. 오래도록 꿈꿔오던 진정한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가슴속을 채우고 있는 것은 자유를  얻은 데서 오는 기쁨이 아

닌 허탈한 상실감이었다.

' 훼이. 왜 제게 이런 힘을 준 것입니까. 그리고 어째서 제게 더 많은

길을 보여주지 않은 겁니까....'

차라리 이런 힘 대신 지난 일이 모두 거짓이라고 누군가가 말해준다면.

리시엔과 자신은 결코 피가 이어져 있지 않다고, 자신은 교룡이 아니라

그냥 보통 인간이라고. 단 수십 년의 세월을 살아갈 뿐이지만  어떤 거

리낌도 없는 인간이라고 말해준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그저  한낮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해준다면.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모든 일

들이 안정되자 카이엔의 정신을 지배하는  것은 오직 리시엔이라는 단

하나의 이름뿐이었다.

어떤 슬픔도 고통도 경험하지 않은 채  그저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살아갈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결코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다.

" 리시엔......"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채 그리움을 더해 가는 이름.

자신의 누이라는 사실을  알았어도 결코 핏줄이라는  관계로 다가오지

않는 그립고도 그리운 이름.

자신의 주위에 머무는 바람을 타고  리시엔이라는 이름의 여운은 계속

흩어지지 않은 채 공중에 머물러있었다.

알지 못했더라면 고뇌할 필요 없이 그녀와 남은 시간을 함께 할 수 있

었겠지만 진실을 안 이상 현실만을 위해  모든 것을 지워버릴 수는 없

었다. 그것은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라면 당연히 지켜야만 할 법칙

이었기에.

" 지키고 싶지 않아......"

카이엔은 나지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신은 처음부터 질서를 벗어

난 자였는데 어째서 지금까지 질서에 얽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그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진실이라는 이름의 고통과 단절된  채로

살아갈 수 있었다면 행복했을 것이다. 설령 교룡이라는 이유로, 자신이

행해왔던 죄의 대가로 죽음을 맞이한다고 해도.

겨우 마음을 안주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태어나서 처

음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온 미소를 지을 수 있었는데 그것이 단지 혈육

의 이끌림에서 비롯된 것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이미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지금에도  자신의 감정을 부정할 수 없는

데 그 단 하나의 단어로 모든 것을 바꾸어 버리다니. 어째서 그것이 진

실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고통스러운 고뇌의 바다  속에서 카이엔은 훼이가 자신에게

남겼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결국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가는 것은 스스로의 의지로 결정되는 것이기

에 어떤 것을 선택하는가 버리는가는 모두 마음에 의한 것이다.

' 리시엔.......'

퇴색되기는커녕 점점 더 색을 더해 가는 잔영. 카이엔은 흔들리는 생각

을 붙잡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 훼이. 당신이 제게 준 것을 저는 항상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너

무나도 무겁지만 자유라는 말을 스스로의  힘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렇게 살겠습니다.'

이제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그의 존재를  카이엔은 뚜렷하게 마음

속에 담았다.

*            *            *

카이엔은 조용히 공간을 열고 회색 빛의 하늘과 음울하게 가라앉은 땅

에 발을 디뎠다.

이제 더 이상 돌아오지 않아도 좋은 곳이었지만 명계에서의 기억이 오

직 고통과 괴로움으로 점철된 것은  아니었기에 카이엔은 죽음의 향기

와 빛깔로 가득 찬 그곳에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마지막이라고  해도

좋았다. 스스로의 의지로 명계와의 기다란 끈을 끊어버리기 위해서  카

이엔은 암울한 이 땅에 다시 발을 디딘 것이다.

" 달라졌군......."

작은 중얼거림.

마치 카이엔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녀는 미처 그녀의 처소로 걸

음을 옮겨 찾아가기도 전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명계의 모든 것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금새 알아채는 그녀답게  카이엔이 들어선 것 역시

알아차린 것이 분명했다.

여전히 날카로운 칼날처럼 곤두선 목소리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카이엔

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천천히 몸을 돌리자 카이엔은 그녀의  시선이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향

해있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머리카

락인 만큼 그녀의 시선이 향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 그 남자는 결국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는군.  오랜 과거에

누군가가 그랬듯이...."

요희는 아주 오래된 기억을 되살려 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훼이의 아

버지가 그에게 생명을 전해준  것처럼 수천 년  전의 과거에도 교룡인

자신의 아들을 위해 생명을 버린 용왕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기억하

는 것은 용족이 아닌 그녀 요희였다.

" 너를 붙잡지는 않아. 아니, 이제는  붙잡고 싶어도 붙잡을 수 없게

된 건가?"

요희는 그렇게 말하고 소리내어  크게 웃었다. 과거에는  소름끼치도록

듣기 싫었던 그녀의 웃음소리가 지금은  이상하게도 아무렇지 않게 들

렸다. 그것은 분명 힘의 탓이  아니라 자신이 그녀를 이해했기  때문에

다르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몰랐다.

" 내게는 끝없는 시간이 있으니 조금 더 기다린다고 해서 달라질 것

은 없지. 약속은 약속이니까."

훼이가 그녀와 어떤 말을 나누었는지는 이제 그녀 혼자만이 알고 있겠

지만 훼이의 말이 그녀를 바꾸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

다.

대체 어떤 것으로 요희의 가슴에 가득  차 있던 분노와 증오를 사라지

게 만든 것인지 궁금했지만 카이엔은 묻지 않기로 했다. 앞으로도 영겁

의 시간을 살아갈 그녀가 조금이나마 즐거운 기억을 간직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고 싶었기 때문에.

자신 역시 그녀를 통해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지만 그것이 결코 자신

에게 있어 지워버리고 싶은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지 않았나.

" 다시 찾아와도 되겠습니까..."

카이엔은 요희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물었다.

" 이제 너를 막을 자는 어디에도 없지. 비단 명계뿐이 아니라 천상계

나 환계에서도 마찬가지일 테지. 오직 영계만을 제외하고 네가 가지 못

하는 곳은 없을 것이다."

요희는 짙푸른 빛깔을 띠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톱으로 매만지며 대

답했다.

" 아직 너와 나의 인연은  끝난 것이 아니니까. 그리고  너와 명계의

인연 또한. 그리고 나 역시 널  과거의 카이엔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제 그자. 훼이를 대신하게 되었으니 네가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

지금은 단지 유예기간을 주는 것 뿐이야."

요희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날카로웠다. 하지만 카이엔은 미소지으며 그

것을 들을 수 있었다.

항상 암울하고 답답하게만 여겨졌던 명계의 공기와 하늘의 빛깔이었건

만 이상하게도 지금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안개처럼 명계를 안정시키는

필요 불가결한 무엇으로 느껴졌다.

" 천오는......"

요희보다 더 자신과 깊은 인연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는 자신 이외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교룡을 카이엔은  만나보고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요희는 입술을 틀어 올리며 웃었다.

" 천오는 결코 너와 얼굴을  마주하려 하지 않을 테지.  그냥 돌아가

라."

카이엔은 이유를 물으려 했지만 물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과거

의 모든 것을 털어 버리고 천오와 얼굴을 마주 대할 수 있으리라.

" 다시 찾아오겠다고.... 그에게도 전해주십시오."

카이엔은 정중하게 말을 건넸다.

" 그럼..."

하얀 안개처럼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카이엔의 머리카락과 파오를 보며

요희는 고소를 머금었다.

오랜 세월에 걸친 자신과  용족과의 인연은 이제  카이엔을 끝으로 더

이상 생겨나지 않을 것임을 그녀는 희미하게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지

금의 이 기억조차 잊을지 모르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어떤 자보다 가장  오랜 시간을 살아온 자신이 이

토록 이나 무언가에 얽매여 세월을 보낼 줄은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이

미 자신은 수천 년의 시간을 그렇게 보내왔다.

그래도 지금은 조금 알 것 같았다. 과거에 자신의 곁에서  떠나갔던 샹

린이 자신에게 보내던 눈빛을 단순한  동정의 빛만으로 의식하지 않고

도, 그의 말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라는  사실도. 자신이 어째서 용

족에게만 그렇게 매달렸었는지도. 하지만 요희는 이 깨달음이 오래도록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역시 알고 있었다.

자신이 명계의 주인이 되어 지내온  무수한 시간은 머릿속에서 얽히고

또?제멋대로 배합되어 있다는 것을. 그것이 자신을 광기에  휩싸이게

만든다는 것을.

분명 다음에 카이엔을 만나게 된다면  지금처럼 담담하게 그를 보내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아직 자신의 마음에 끓어 넘치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은 조금도 해소

되지 않았다. 단지 그 흑룡족 남자 훼이와의 약속이 있기에  요희는 평

소의 자신과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웃고 있는 것이었다.

二.

요즘은 과거와 비견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책을 읽었다. 그러나 그 수

많은 책의 내용은 리시엔에게 기억되지 못했다. 읽는 순간만큼은 그 내

용에 몰두해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지만 책장을 덮고 나면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지워져 버리는 것이다.

' 소용없는 짓이야.....'

그리고 동시에 터져 나오는 한숨. 마치 처음부터 한숨만이 자신의 곁에

있었던 것처럼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었다.

누군가의 손이 어깨에 닿자 리시엔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흠칫하고 떨

었다. 이렇게 다른 누군가가 가까이 다가서도록 느끼지 못하고 있던 자

신이 한심하기도 했지만 그때 이후로 리시엔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

는지도 생각할 수 없는 상태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 얼굴빛이 많이 나빠졌구나."

실로 오랜만에 듣는 반가운 음성. 과거에는 그 음성을 듣기  위해 작은

구실을 만들어 쉴새없이 그를 찾아가고, 또 꿈속에서도 그를 그리곤 했

었다. 지금은 철없던 지난  날의 작은 추억으로 여기고 있지만.

" 오라버니...."

" 리시엔."

무척이나 반가운 얼굴이었음에도 리시엔은 마음 깊숙한 곳에서 아무런

감흥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과거의 자신이었다면  얼굴

가득 숨길 수 없는 기쁨을 담은  채 그것을 애써 지우려 노력했겠지만

지금은 희미하게 미소짓는 것이 고작이었다.

" 그 이야기는 들었다."

과거에 자신이 좋아했던 목소리가 위안의 뜻을 담아 말을 건네 왔지만

리시엔은 그 목소리를 듣고도 아무런 감흥조차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판유는 이미 현 청룡왕과 혼인한 몸이었다. 과거의 철없던 자신

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그저 오라버니를 바라보고 또 그리워했었지

만 처음부터 둘의 사이에는 인연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몰

랐다.

" 위로는 바라지 않아요. 타인은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고  또 그런

일이니까요."

순간 판유는 할 말을 잃은 채 리시엔을 바라보기만 했다.  얼마의 시간

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리시엔은 자신이  알고있던 과거의 어린 소녀에

서 완전히 탈바꿈해 있었다. 이제 그녀는 소녀가 아니라 한  명의 여인

이었다.

" 그래.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

판유는 씁쓸함을 지우며 답했다.

교룡이라는 존재와 알게 되고 서로 마음이 끌리는 것을 느꼈지만 결국

은 넘을 수 없는 벽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라고 판유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리시엔도 시하라도 교룡을 낳은 것이 누구인지 그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졌고 왜 리시엔이 이토록 변모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리시엔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덮으며 시선을 옮겼다. 처음에는 판유의

옷자락에서 그리고 어깨로 마지막에는  눈으로. 그러다 그녀는  갑자기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말을 꺼냈다.

" 인사가 늦어서 죄송해요. 오라버니. 그리고 늦었지만 혼인... 축하드

려요."

" 알고 있었구나."

리시엔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오라버니가  혼인하셨다는 것은 알고 있었어

요. 단지 그때 하계에 내려가 있었을 뿐이니까요."

판유는 변해버린 리시엔을 통해 짧은  순간이어도 시간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통감했다. 자신이 리린과 즐거움으로 가득 찬 시간

을 보내고 있을 때 리시엔은 마음의  상처 속에서 허덕이며 그것을 치

유하기 위해 길게 느껴지는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 고맙다. 리시엔."

판유는 진심으로 리시엔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위로를 해줄 수는 없

지만 적어도 자신의 마음을 전해주고 싶었기에.

" 두 분은 정말 잘 어울리니 분명 평생토록 행복하실 거에요."

판유는 부드럽게 울리는 리시엔의 목소리를  듣고 가슴 한구석이 바늘

에 찔린 것처럼 따가워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용족의 기나긴 삶에서도

평생을 함께 할 진정한 동반자를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런데 겨우 찾은 그 반려자가 자신과는  결코 이어질 수 없는 사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과연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

자신의 어렸던 동생 리시엔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동안 힘들고도 힘든

만남을 가지고 다시 헤어짐을 겪었던 것이다.

" 앞으로도 계속 이곳에 있겠느냐?"

천오는 직접 묻지 못하고 돌려서 물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리시엔의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가 터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 물론이에요. 이 곳은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잖아요."

" 부모님은 어떻게 지내시지?"

판유는 리시엔이 더 이상 상처를 떠올리지  않게 하기 위해 말을 돌렸

다. 그러나 그것 또한 상처를 건드리는 것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리시엔은 힘없이 웃었다.

"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일족들에게 주문을 가르치는 일을 하시고 어

머니 역시 변함이 없어요."

그리고 자신 역시 바뀌지 않았다. 단지 기억만을 품고 있다는  것이 다

를 뿐 생활 자체에는 변함이  없었다. 예전에는 영원히 어느  누구와도

만나지 않고 살겠다고 결심하고 천계를  떠났었지만 결코 홀로 한곳에

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리시엔은 깨달아 버렸다.

혼자서는 어떤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추억에 잠겨서만 살아갈 뿐

이라는 것을.

三.

" 결국은......."

유안은 희미하게 웃었다.

결국은 아무 말도 없이 마지막 순간을  보낸 백부 훼이를 조금은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토록 오랜 시간을 살아오면서 그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무엇을 바라

보고 살았는지는 본인이 아닌 이상 알  수 없지만 그의 마지막 선택이

할아버지가 했던 것과 같았다는 사실은.... 정말 의외였다.

" 그대를 내 동생이라 여겨도 되겠나?"

유안은 부드러운 시선으로 카이엔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무런 공통점도

가지지 못한 존재에게서 느껴지는 편안한 느낌. 그가 주었을  오래되고

강인한 생명과 힘을 품고  있는 눈앞의 존재는  동일한 것을 가졌다고

해도 그와는 너무나 달랐다. 비록 훼이에게서 힘과 생명을 얻었다고 해

도 두 번의 천년을 살아오며 훼이가 얻었던 지식과 깨달음까지는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유안은 카이엔에게서 훼이가  가지고

있던 어떤 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었다.

" .......원하신다면."

카이엔은 자신에게 새로운 생명을 건네준 존재 훼이와 닮은 용모를 지

닌 남자를 약간의 호기심이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완전히 달라져버린 시간들. 이전의 자신이 어쩔  수 없이 지녀야 했던,

그리고 속해야했던 장소와 시간은 이제 무의미한 먼지처럼 사라져버렸

다. 단 한사람의 힘에 의해서. 그가 지닌  거대한 힘이 카이엔의 삶 자

체를 바꾸어 놓은 것이다.

더 이상은 어떤 이에게서도 강요를 받지 않아도 되고, 위협  또한 사라

져 버렸다. 그리고  본능적인 갈증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그야말로

행복이라는 단어로 채울 수 있을 만한 삶이 펼쳐진 것이다.

처음부터 자신은 인간도 용족도 아닌  존재였지만 지금은 용족이되 용

족이 아닌, 그리고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었다. 두 말은 같은

뜻을 지닌 것 같았지만 풀어보면 너무나도 커다란 차이를 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었다.

자신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짙은 검은  빛깔을 내는 머리카락을 늘어뜨

린 현 흑룡왕과 마주서 있어도 결코  힘의 차이를 느끼지 않아도 되는

존재. 교룡이되 교룡이 아닌 자. 이제 그것이 자신이 가진 새로운 이름

이었다.

*            *            *

오래고 오랜 시간동안 변함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검은 숲. 분명 용

족들이 태어나고 천계의 영토가 만들어지던 무렵부터 존재했을 태고의

깊은 숲은 이제 주인을 잃은 채 처음 태어났던 그 날처럼 조용히 잠들

어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아오른  가지와 울창한 잎. 햇빛조차  완전히

다가설 수 없는 그 오래된 숲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결코 이후에도 지

워지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흑룡족의 영지에 속해있지만 그들  흑룡일

족 조차 그 숲의 전부를 알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런 오래된 숲에 주인

으로 군림하던 자 훼이가 사라지고 나서 한참이 지난 어느 날. 그 숲과

는 어울리지 않는 색을 가진 존재가 그곳을 찾아왔다.

' 이곳인가......'

짙푸른 빛깔을 머금은 숲 속에서도 가장 중심에 위치한 깊은  곳. 울창

한 나뭇잎과 가지에 가리워져 하늘의 한 부분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그 곳에 잔상을 남기며  움직이는 것은 한 겨울에나  볼 수 있는

눈의 빛깔처럼 새하얀 일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

것이 길다랗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었다.

카이엔은 지금 자신이 찾아온 장소가  너무나도 복잡한 길을 지나쳐서

도달한 곳이기에 그에게 가르침을 얻지  못했더라면 자신도 이곳을 찾

을 수 없었으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분명 자신이외에는  흑룡족이라고

하더라도 이 장소를 알지 못할 것이다.

카이엔은 조용히 훼이에게서  들었던 대로 마력을  움직여 주문하나를

완성해냈다. 그러자 순간 주위의 풍경이 조금전과 확연히 달라지는  것

이 아닌가. 훼이는 그곳에 외부에서 방어주문을 걸어 놓았던  모양이었

다.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아오른 거대한  전나무 숲의 중심에 다른 곳

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풍기는 작은 공터가 하나 나타났다.

그리고 그 공터 안에는 하계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초옥 하나가 지어

져 있었다. 나뭇가지를 엮어서 만든 울타리와 마른 풀로 덮여있는 황색

의 지붕. 그리고 두 칸 짜리 조촐한  방. 짙은 갈색으로 변해있는 마루

에 발을 올려놓자 익숙한 삐걱임이 들려왔다. 자신이 산 속에서 살아가

던 시절 항상 들어왔던 문소리와도 비슷한 그 소리에서 카이엔은 정겨

움을 느꼈다. 그리고 마치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 채 하루  하루를 지내

던 그 과거의 시간으로 되돌아간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낡아서 빛 바랜 문풍지가 발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먼지 쌓인

갈색의 낮은 탁자 위에 정성스레 접힌  종이 하나와 녹옥 반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 이것이군...'

카이엔은 훼이에게서 들었던 그대로 놓여있는 물건들을 잠시 바라보다

가 손을 뻗어 그것을 집었다.

카이엔은 글자마저 희미하게 바랜 종이  하나와 하나의 옥으로 만들어

진 반지를 손에 올려놓고 한동안 계속 그것만을 응시했다.

천년도 더된 물건이지만 옥색의 반지는 조금도 퇴색되지 않은 채 본래

의 모습 그대로 카이엔의 손바닥에서 빛을 발했다. 황금처럼  화려하지

는 않아도 은은하게 풍겨 나오는 반지의 광채가 카이엔은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대체 이것이 무엇이기에 훼이는 숲에서도 가장 깊고 발길이 닿

기 힘든 곳에 주문까지 걸어 두며 이것을 보관하고 있었을까.

그에게 물건의 유래에 관해 아무런 말도 듣지 못했기에 이 금방이라도

번지로 화할 듯이 낡은 편지와 옥색의 반지가 누구의 것이었는지는 모

르지만 카이엔은 그것을 소중히 품속에 간직했다.

훼이가 자신에게 준 물건이기 때문에. 그는 그저 그 물건을  찾아서 카

이엔에게 마음대로 처분하라고 했던 것이다.

' 분명 소중한 물건이겠지.'

오랜 세월을 살아온 훼이가  간직하고 있던 물건이라면  연유를 알 수

없어도 분명 깊은 의미가 담긴  물건이 틀림없으리라는 사실을 카이엔

은 마음으로 느꼈다.

四.

카이엔은 진정으로 마음을 담아 미소지었다. 그리고 그동안 부르고  싶

었지만 입을 열어 소리 높여 부를 수 없었던 이름을 부르려 했다. 그러

나 막상 입 밖으로 나온 것은 그녀의 이름이 아니었다.

" ...........누이...."

리시엔은 부서질 듯 환하게 웃으며 카이엔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가락이 닿은 것은 눈처럼 새하얗게 변한 카이엔의 머

리카락이었다. 매끄러운 머리카락을 훑고 지나가는 손가락의  움직임은

작은 바람소리를 품고 있는 것만 같았다.

리시엔은 아무 말도 없이 카이엔의 얼굴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하얗게

변해버린 카이엔의 머리카락에서  예전과 조금의 변화도  없이 여전히

나이에 비해 어려 보이는 얼굴을,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를 무언가를 말

하기 위해 조금씩 움직이고 있는 입술을 천천히 응시했다. 그렇게 바라

보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마치 신기루를  붙잡고 싶어하

는 인간들처럼 깊고 깊은 염원을 담아서.

" 많이....... 달라졌구나...... 아니,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어...."

그렇게 말하고 나서 리시엔은 살짝 웃었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말했는

지도 제대로 기억할 수 없었지만 리시엔은 이유 없이 웃었다.

오직 일족의 왕들만이 가질 수 있는 빛깔을 품은 카이엔.  자신이 기억

하고 있던 카이엔의 모습과는 달랐지만  리시엔은 카이엔의 얼굴을 보

는 것만으로도 그동안 딱딱하게 굳어져  있던 마음의 응어리가 풀어지

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 잘 어울려. 하얀 빛깔......"

리시엔은 어떻게 해서 카이엔이  왕들만이 지닐 수  있는 색을 가지게

되었는지 알고 있었다. 소문은 너무나도 순식간에 천계 전체에 퍼져 나

갔기 때문이었다. 용족들의 경외감을 한 몸에 받으며 흑룡궁에  거처하

던 훼이가 자신의 생명을 카이엔에게 주었다는 사실을. 몇몇 이들은 카

이엔이 교룡이기 때문에 훼이가 정에 이끌려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이라

고 말하기도 했고 다른 몇몇은 그가  카이엔에게 어떤 것을 맡기고 떠

났다고도 말했다. 오랜 시간을 홀로 살아왔기 때문에 더 이상은 이곳에

머물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진실을 알고 있는 카이

엔은 결코 입을 열지 않았고 궁금증을  풀기 위해 그에게 다가서는 자

도 없었다.

지금은 어떻던 간에 과거에 그가 했던 행동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 요즘은 어떻게 지내죠...?"

카이엔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물었다.

그렇게 일부러 묻지 않아도 리시엔의 얼굴이 예전에 비해 많이 말랐다

는 것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지만 카이엔은 일부러 그것을

들추어내지 않았다.

" 조용히 집에서 책을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어."

리시엔은 그렇게 답하며 문득 둘의 입장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을 깨

달았다.

과거에는 자신이 카이엔보다 나이가 많았음에도 말을 높였었는데 지금

은 반대가 된 것이다. 카이엔은 자신의 동생이기 때문에 그  역시 누이

에 대한 예의로 말을 높이고 있는 것이리라.

그때의 헤어짐 이후 처음으로 대면하는  둘이었지만 마치 억겁의 시간

이 지난 후에 만난 것처럼  낯설고도 그리운 감정이 샘솟았다.  그러나

둘 중 어느 누구도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둘 중 하나라도 손

을 내밀면서 함께 가자고 이야기한다면  거부하지 않을 것이 분명한데

도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은 세상의

윤리에 얽매이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둘의 사이에 벽

을 쌓은 것은 자기 자신들이었다.

감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더욱 깊어졌지만 두께를 알 수 없는 벽 하

나가 둘의 사이를 가로막은 채 나아가지

도 그렇다고 물러서지도 못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 한번이라도 좋으니 예전처럼 내 이름을 불러줄 수 는 없나요....?'

리시엔은 미소짓는 얼굴과 반대로 마음속으로 통곡하듯 외쳤다.

" 이젠 확실히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한 힘을 가지게 되

었구나."

카이엔은 자신의 머리카락에서 떨어져나가는 리시엔의 손을 응시한 채

고개만을 끄덕였다.

" 백룡왕 전하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야. 이  하얀 머리카락도

몸에서 풍겨 나오는 분위기도."

카이엔은 여전히 아무대답도 하지 않은  채 리시엔의 행동을 지켜보기

만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카이엔은 바로 얼마 전에 숲에서 가지고 나

온 반지를 리시엔의 손에 쥐어주었다.

" 이건........"

리시엔은 손바닥을 펴지 않아도 카이엔이  자신에게 준 물건이 무엇인

지 감촉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카이엔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입술을 떼었다.

" 제 마음입니다. 이 반지는 천년도 더된 물건입니다. 오래된 것이지

만 누이가 이것을 꼭 받아주리라 여겼습니다."

리시엔은 가만히 손바닥을 펼쳤다. 그러자 은은하게 빛을 발하는 옥 반

지가 자신의 손바닥 위에 놓여있었다.

오랜 시간동안 제 모습을 유지해온  이것을 자신에게 건네주며 말하는

카이엔의 의도는 무엇일까.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리시엔은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둥근 반지

가 의미하는 것은 언제나 같았다.

" 카이엔......"

" 리시엔."

카이엔은 이번에야말로 누이가 아닌 리시엔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둘  사이에 쌓여있던 벽은

소리 없이 부서져 내렸다.

" 남매라는.... 피로  이어진 관계를 거부하지는  못할 테지만 적어도

함께 있는 일이라면 괜찮겠지요?"

리시엔은 대답 없이 환하게 미소지었다.

어떻게 되어도 좋았다. 그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여겼기에. 앞으로 어떤 일이 생겨난다고 해도 과거를 잊고서 오직 눈앞

의 현실만을 위해 살겠다고.

" ..... 언제까지나......"

리시엔은 울음 섞인 음성으로 속삭였다. 카이엔과 영원히 다시  마주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지내온 지난 몇 달 동안은 그녀의 삶에 있어 가장

기나긴 고통의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고통의 시간들을  보상하기라도

하듯이 지금 이렇게 자신의 눈앞에 카이엔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 언제까지나 그분에게 감사할 거야......."

카이엔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역시 리시엔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맞이할 먼 훗날의 어느 순간까

지 결코 그의 존재를 잊지 않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에.

" 나와 함께 하계로 가 주겠습니까?"

리시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카이엔의 눈동자에 비친 그녀의  얼

굴은 눈물에 젖어 있었지만 어느 때보다도 행복해 보였다.

五.

아침 안개와도 같이 희뿌연 빛이 섞인 머리카락. 분명 검은 빛깔임에도

아이의 머리카락에는 그 안개와 닮은 몽롱한 빛깔이 섞여 있었다. 많은

이들의 호기심을 자아내며 탄생을 기다리던  흑룡왕 유안과 백호족 출

신의 흑룡왕비 시령의 아이는 세상에 태어났다.

유안의 품에 안긴 채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는 아기는 머리카

락 이외에는 보통의 여느 용족 아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유안

은 자신의 아이가 가진 세  가지의 피가 앞으로 어떤  작용을 하게 될

것인지 조금은 알아차리고 있었다. 유안 자신의 몸 속에 흐르는 기린족

의 피가 자신에게 다른 이들의 수배에 달하는 이점을 가져다 주었듯이

자신의 아이 역시 기린족과  백호족과 용족의 피가  주는 어떠한 것을

얻게 될 것이다. 많은 이들이 우려하고 있던 것과 달리  아이는 백호족

만이 가지는 특성인 진신(眞身)을 가지지  않고 태어났다. 그것은 아마

도 유안의 몸 속에 흐르는 기린족과 용족의 피가 더 강한 기운으로 자

리잡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확한 결과는 앞으로 수십  년이

흘러야 알 수 있을 것이다.

" 백부님께서 이 아이를 보셨다면 분명 웃으셨을 텐데..."

유안은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러

나 시령은 유안이 얼마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아쉬운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자신 역시 훼이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해서. 그에게 마지막 인사조차 건

네지 못했기에 이렇게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눈물을 떨굴 정도로 안타

깝지 않은가.

' 너무나도 무정하신 분이에요. 훼이... 당신은. 하나뿐인 혈육에게 인

사조차 남기지 않고 떠나다니.'

시령은 유안의 마음을 너무나도 깊이  이해하고 있었기에 결코 지금의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만약 지금 자신이 떠올린  말이 유안

의 귀에 들어간다면 그는 분명 커다랗게 한숨지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

이다.

" 적어도 마지막으로 한마디는  전하고 싶었는데, 그것이  안 된다면

우리의 아이라도 보고 가시길 원했었어. 이렇게 허망하게 이별하게  될

줄은...."

그렇게 말하며 유안은 허탈하게 웃었다.

훼이가 있었기에 흑룡일족의 왕이 된 이후에도 언제나 처음 백부의 존

재를 알고 그를 만났던  무렵으로 되돌아가 마음껏  어리광을 피울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것도 과거의 추억으로 화해버렸다.

불과 얼마 전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머나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지는. 훼

이는 두 번의 천년을 살았지만 어쩌면  자신은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을

기억하게 될런지도 몰랐다. 처음부터 훼이의 존재는 유안에게 있어  결

코 넘을 수 없지만 한없이 이끌림을 전해주는 자였던 것이다.

그런 훼이가 사라진 지금. 유안은 순식간에 수백 살의 나이를  먹은 듯

한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그가 있었기에 누리던 어린 기분은  이제 꿈

처럼 사라져버렸다. 그것은 시령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안 몰래 훼이를

찾아가 궁금한 것을 묻기도 하고, 마음껏 하고 싶은 이야기도  하며 마

음을 풀지 않았던가. 그것은 모두 훼이가 까마득하게 나이가 많은 존재

여서도, 유안의 백부여서도 아니었다. 그가 지니고 있는 편안함이 그의

입가에 머물고 있는 미소가 시령에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게 해준 것

이었다.

" 오는군."

유안은 공간의 일렁임을 감지하고는 말했다. 그리고 그곳으로 몸을  돌

리기 전에 자신의 품안에서 잠든 아이를 시령에게 건네주었다.

" 그가 우리 아기를 보고 기뻐했으면 좋겠어요."

시령은 처음 만나는 상대였지만  그의 몸 속에  익숙한 훼이의 기운이

숨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편안한 표정으로 그렇게 이야기했

다.

" 인사 올립니다."

공간의 문에서 새하얀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개를 숙인 채 인사

를 건네고 있었기에 그 사람의 존재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하

얗게만 보였다.

" 카이엔."

유안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카이엔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린 카이엔과 시령의 시선이 마주쳤다.

시령은 눈보다 더 새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카이엔을  보고 그의 힘이

현 백룡왕보다 강하면 강했지 뒤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 어서 와요."

시령은 인사말을 건네며 천천히 카이엔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처음에는

너무나도 새하얀 머리카락만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지만  지금은 그의

차분하고 단정한 얼굴과 심유한  눈빛이 차례로 그녀에게  비추어졌다.

훼이와 닮은 점은 어디에도 없지만  카이엔은 훼이에게 선택된 존재이

기에 그녀는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그리고 더 이상은  훼이의 그림자

를 그에게서 찾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훼이는 결코 그런 식으로 자신을

기억하길 바라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에.

" 우리의 아이에게 인사하세요. 카이엔."

카이엔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시령의 품안에 안겨있는 아

이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그의 길다란 하얀 머리카락이 아이의 볼에 닿자 아이는 간지러움을 느

꼈는지 반짝하고 눈을 떴다. 머리카락과 같은 옅은 회색 빛의 눈동자는

맑고 투명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 반갑구나."

카이엔은 미소지으며 몇 번 아이의  볼을 쓰다듬고는 고개를 들어올렸

다.

" 남자아이입니까?"

" 맞아요."

" 건강하게 자라겠군요."

" 카이엔이 이곳에서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봐준다면 좋겠어요."

시령은 어머니가 되었어도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직선적인 성격 때문

에 호감을 느낀 카이엔에게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카이엔은 가볍게 고

개를 저었다.

" 제가 하계의 인간들에게 지은 죄는 너무나도 무겁습니다. 그리고....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일이 있습니다."

시령과 유안은 묻지 않았어도 그것이 어떤 말인지 알 수 있었다. 직접

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카이엔은 바로  명계에 관한 이야기를 꺼

낸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들은 알지 못하는 다른 어떤 일도  분명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 벌써 돌아가려 하는 건가요?"

시령이 묻자 카이엔은 희미하게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 닮았구나.....'

유안은 다시 한번 카이엔에게서 훼이의 그림자를 보았다. 자신이  아직

성년식도 치르기 전의 기억 속에서 분명  훼이 역시 흑룡궁에 오래 머

물지 않고 금방 돌아가곤 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하지만 아무리 닮았어

도 더 이상 그에게서 훼이의 그림자를 찾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이미

훼이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자가 되었고 훼이에게서 생명을 전해

받았지만 카이엔이 훼이와는 완전히 다른  별개의 존재라는 것은 명백

한 사실이었다.

"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몇 마디의 말만을 나누고 나서 바로  카이엔은 몸을 돌리고 공간을 열

었다. 훼이가 그랬듯이 그 역시 주문조차 필요없이 힘을 사용하고 있었

다. 유안은 그런 카이엔의 뒷모습을 보며 훼이의 선택이 잘못되지 않은

것임을 느꼈다.

" 우리의 아이가 자라서 주문을  배우며 뛰어다닐 무렵이 되면 분명

다시 만날 수 있을 테지."

유안은 여운처럼 남은 하얀 잔상을 되새기며 작게 중얼거렸다.

연(緣)  終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