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6)

“맞다니까, 변태.”

목덜미에 놈의 말캉한 입술이 닿았다. 몸 전체에 퍼지는 간질간질한 감각에 작게 어깨를 떨었고, 놈은 그런 나를 달래듯 등을 쓸어내렸다. 귓바퀴를 따라 천천히 움직이는 놈의 혀에 눈을 질끈 감았을 때였다.

“근데 생각해 보니 좀 억울하네.”

귓전에 울리는 놈의 목소리가 나른하고도 축축했다. 소름 돋는 감각에 손이 작게 떨려 왔다. 그게 묘하게 애를 태워서, 당장에라도 놈이 더한 자극을 주었으면 했다. 꾹-입술을 물며 나오려는 간질간질한 음성을 참을 때였다.

“그렇다는 건, 넌 항상 만족스럽게 하고, 난 욕구 불만이라는 거잖아. 응?”

“읏. 뭐?”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가 여전히 나지막하게 귀를 간질였다. 어깨를 쓸어내리던 김세한의 손이 테이블을 짚고 있던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손에 닿은 것은 이미 뜨거운 열을 뿜어내고 있는 놈의 중심부였다. 딱딱하게 스치는 물건에 꿀꺽-또 한 번 침을 삼켰다. 가운에 가려 보이진 않고, 느껴지기만 할 뿐인데도 그것의 존재감은 순식간에 얼굴에 열이 오를 만큼 뜨거웠다.

“이놈이 이렇게 된 데에 네 책임이 있다는 거지.”

“…….”

“어때? 미안한 마음이 좀 들어?”

김세한이 허리를 움직였고, 내 손 위로 놈의 것이 비벼졌다. 손바닥 가득 묵직한 성기의 작은 굴곡과 생김새가 느껴졌다.

“하…….”

낮게 흘리는 숨소리, 손에 느껴지는 열기에 내 중심도 뜨거워졌다. 내 어깨에 이마를 묻은 채 밑의 감각에 집중한 듯한 그의 턱을 잡아 올렸다. 이미 눈이 반쯤 풀린 놈이 어금니를 깨문 채 나를 응시했다.

“침대로…… 갈까?”

내 물음에 서서히 감기던 그의 눈이 다시 들어 올려졌다.

“오늘은 나 만족시켜 주는 건가?”

뱉어 냈던 뜨거운 숨소리와 달리 다시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세한은 내 허리를 받쳐 그대로 안아 들고 발걸음을 옮겼다. 침착하고 조심스럽게 나를 침대에 내려놓은 것과 달리 놈이 조급하게 내 입술을 찾아들었다. 원피스 밑에서부터 올라온 손이 불쑥 가슴을 움켜쥐었고, 갑작스러운 자극에 고개를 돌렸지만 입술은 떨어지지 않은 채 더 깊은 안쪽과 입천장을 쓸어 올렸다.

“으흐, 으.”

“하…….”

아찔해지는 머릿속에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고, 놈은 입술을 떼어 내기 무섭게 내 원피스를 위로 올려 벗겨 내었다. 툭-능숙하게 풀어낸 브래지어가 침대 밑으로 떨어졌고, 놈은 발가벗겨진 내 몸을 감상하듯 내려다보았다.

“역시…… 상상보단 현실이 좋긴 좋네.”

“읏, 거기…… 싫어.”

놈은 손가락으로 내 가슴의 돌기 주변에 원을 그렸고, 나는 배배 몸을 꼬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 바로 반응해 주고. 알고 있어? 네 몸, 진짜 예뻐.”

달려들 때는 언제고 다시 여유를 찾은 듯 속도를 늦춘 놈에 내 몸만 작게 흔들렸다. 그제야 밑으로 내려간 그의 시선이 내 속옷 위로 머무르는 듯했지만, 불행히도 아직 나를 놀릴 생각인지 작게 웃음을 띠었다. 놈의 세워진 손가락이 꾹-민감해진 밑쪽 돌기에 입을 맞추듯 눌렀다 떨어진다.

“읏!”

두 손으로 입을 막아 나오려는 신음을 억눌렀다. 전신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지만, 놈은 그러거나 말거나 속옷 위로 아래의 모양새를 따라 작은 원을 그렸다.

“난 네 몸이 참 좋아. 주인이랑 달리 솔직해서…….”

“…….”

“싫다는 네 말이, 거짓말이라고 알려 주거든.”

수치심에 미간을 찌푸린 채 올려다보자 놈은 피식-웃음을 흘리며 세워진 내 무릎에 입을 맞췄다.

“미안, 너무 놀렸어?”

차갑게 느껴지는 김세한의 손이 내 속옷을 파고들었고, 곧 익숙한 듯 내 안을 휘저었다. 갑작스레 밀려 들어온 그 차가운 손가락에도 배 속은 뜨거워졌다. 놈의 손이 안에서 움직일 때마다 턱이 떨려 왔고, 질척거리는 소리가 방을 울렸다.

“이것 봐. 좋아하잖아. 그렇지?”

나를 만지는 놈의 숨도 조금 거칠어졌다. 달빛을 담아 더 금빛으로 보이는 눈이 욕구와 뒤섞여 금방이라도 나를 삼킬 듯 보였다. 나는 발끝을 세워 거의 다 풀어진 가운 사이로 드러난 놈의 중심부를 쓸어내렸다.

“나 놀릴 여유 없는 거 같은데?”

내 말에 김세한은 자신의 것을 내려다보곤 가운을 벗어 내며 답했다.

“……어. 좀 한계긴 하지.”

큰 골격에 보기 좋게 잡힌 근육은 작은 움직임이 한눈에 보일 정도로 선명했다. 두툼한 근육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긴 팔다리 탓인지 김세한의 몸은 가벼워 보였다. 직각으로 떨어지는 어깨선과 선명히 드러나는 손목, 발목의 복숭아뼈 같은 부위도 그의 날 선 느낌을 살리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언제 봐도 석고상 같은 매끈하고 하얀 피부가 차가우면서도 단단한 느낌을 풍겼다.

“뭘 그렇게 봐?”

어느샌가 그의 입에 물린 콘돔의 껍데기가 벗겨져 나갔고, 새하얀 다른 부위와는 달리 조금 붉은 놈의 것에는 투명한 옷이 입혀져 있었다. 나는 모든 준비가 됐다는 듯 속옷을 잡아 내리는 김세한의 손을 저지했다.

“잠깐만.”

내리깔렸다가 올라온 김세한의 눈은 이미 흥분에 잡아먹힌 듯 초점이 흐려져 있었다.

“왜. 입은 채로 하자고? 그것도 색다르고 좋지.”

그는 기다렸다는 듯 속옷을 옆으로 젖히며 말했다. 나는 흥분한 놈의 손을 잡아 내리며 몸을 일으켰다. 새파랗게 핏발 선 손은 이미 내 애액으로 젖어 축축한 상태였다. 즉, 나도 놈도 흥분한 상태이지만 일단은 브레이크를 밟아야 했다.

“내가…… 내가 넣을게.”

안 한 지 보름. 저 흥분도로 달려드는 놈을 상대하기엔 버거울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잠자리에서 다정한 편이지만, 흥분이 강해지면 이성을 잃고 배려심 없이 허리를 흔든다. 그리고 그 여파는 오로지 내 몸에 새겨져 다음 날까지 이어졌다. 몸이 부서질 듯한 경험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는 않았다. 놈의 가슴께에 손을 올리며 진정시키자 순순히 눈을 감은 채 크게 숨을 내쉬었다. 숨소리가 작게 떨리는 거로 보아 욕구를 억누르는 듯 보였다.

‘와 진짜 어쩌지.’

그를 침대 헤드에 기대 앉히고, 어깨를 잡은 채 위로 올라탔다. 밑으로 느껴지는 빳빳하게 세워진 놈의 것에 마른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못 본 사이에 또 낯설어져 다시 적응해야 할 판이었다. 두려움에 도망치고 싶다고 말하는 본능이, 갈구하듯 나를 올려다보는 그의 눈에 무산되어 버린다. 내 손이 놈의 것을 쥐자 놈의 시선도 밑으로 향했다.

“난 네가 내 거 쥐면 기분이 묘하다?”

놈과 처음 잔 날에도 비슷한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무시한 채, 천천히 선단을 입구에 문지르며 심호흡했다. 비벼질 때마다 들리는 소리가 묘하게 자극적이었다.

“아. 진짜 미칠 거 같아.”

그는 당장에라도 나를 내리누를 듯 어깨에 손을 올렸고, 나는 격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안 돼. 진짜 아프단 말이야.”

“흐음…….”

“최대한…… 빨리 해 볼게.”

김세한은 어느 정도 나를 배려한 모양인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정신을 잃고 밀어붙인 날이면 난 놈의 품에 안겨 울었고, 놈은 아이 달래듯 사과하곤 했다. 김세한도 나와 비슷한 걸 떠올렸는지 기세가 조금 누그러졌다.

스륵, 미끄러져 들어온 물건에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쭈뼛쭈뼛 온몸의 털이 세워지는 느낌에 입술을 깨물었다.

“아아……. 읏, 하아.”

“이렇게…… 젖었는데도 힘들어?”

놈은 자신의 기둥을 타고 흘러내린 내 것을 손가락으로 훑어 내며 내게 보이듯 내밀었다. 두 손가락을 벌리자 길게 늘어진 액체가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김세한은 젖은 손을 뻗어 내 가슴의 돌기를 꼬집었다.

“나 참. 학습력 없는 몸이야. 그렇게나 안았는데 날 기억 못 하고 맨날 힘들게 하다니.”

“으흐……. 아까는 좋다며.”

말 많은 놈에게 툴툴거리듯 말하자 얼굴 가득 비릿한 미소를 띠었다.

“맞아. 나쁜 몸이라 좋기도 해. 매번 널 굴복시키는 느낌…… 나쁘지 않거든.”

미묘하게 가늘어진 눈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을 땐 이미 늦었다. 놈이 살짝 내 허벅지를 내리눌렀고, 쑤욱, 놈의 것이 밀려들어 왔다.

“아읏……! 흐으……. 흐윽, 아파……. 아파, 이 나쁜 놈아.”

욱신대는 아래에 눈물이 찔끔 흘러나왔다. 와중에 어정쩡히 중심을 잃어 와락-놈의 품에 안기듯 목을 감쌌고, 김세한은 천천히 내 등을 토닥였다.

“이렇게 매달리는 것도 나쁘지 않고.”

“미친 새끼…… 죽여 버릴 거야.”

“내 거 넣고서 욕하면 묘하게 흥분되는데.”

“……변태 새끼.”

내 욕설에 놈이 키득거리는 게 느껴졌다.

“근데, 아직 다 안 들어갔어.”

“나쁜 새끼…….”

“나 참, 오늘 안에 새끼 들어가는 욕은 다 듣겠네. 뭐, 그런 건 밤새 들어도 좋으니까. 이제 어쩔래?”

김세한은 허리를 슬쩍 돌리며 물었고, 나는 놈의 어깨를 잡은 채 마주 보았다. 녀석의 손이 젖은 내 눈가를 문지르고 머리를 쓸어내렸다. 밑은 여전히 아팠다. 적응하려 허리를 조금 흔들자 김세한이 입술을 깨물었고 또 한 번 떨리는 숨을 뱉어 냈다. 그가 참아 주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나도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이제 너 움직이지 마. 약속해.”

약속이라는 말이 걸리는 건지 김세한이 말을 늘어뜨렸다.

“흐음……. 곤란한데. 뭐, 네가 만족만 시켜 주면. 자. 빨리 뭐라도 해 봐. 응?”

확실한 건 이대로 다 넣었다가는 경부에 닿아 아플 게 뻔하다는 것이었다. 들어간 건 3분의 2 정도였지만, 놈의 재촉에 천천히 허리를 돌렸다. 안이 휘저어지는 소리가 자극적으로 방 안에 울려 퍼졌고, 나는 눈을 감은 채 배 안을 가득 채운 놈의 것에 집중했다.

“이렇게 해서 오늘 안에 나 만족시키겠어?”

놀리듯 비아냥대는 말이었다. 그게 얄미워 입술을 깨문 채 노려보자 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계속해 보라는 뜻이었다.

“아……. 하아, 읏.”

허벅지를 쓸어내리던 녀석이 내 허리에 손을 올렸다.

“흐음……. 이거 생각보다 자극적이다. 너 혼자 하는 거 훔쳐보는 거 같아.”

“하아……. 아.”

“내 거 넣으면 네 배가 미세하게 볼록해져. 너도 보여?”

“야…….”

“네 안. 기분 좋아. 맨날 처음같이 날 밀어내. 언제쯤 완전히 내 것이 될까?”

자극적인 말에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열이 올라 붉어졌을 내 얼굴을 감상하듯 뚫어져라 보고 있는 놈과 눈이 마주쳤다. 배 속부터 찌르르 퍼지는 쾌감에 몸이 떨리기 시작해 허리를 멈출 수 없었다. 나는 손을 뻗어 자꾸만 부끄러운 말을 뱉는 그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놈의 손에 저지되었다.

“너…… 읏, 자꾸 그런 말 하지 마.”

“기분 좋은 얼굴로 허리 흔들면서 그런 말 하는 거야?”

“으흐…….”

“그래도 뭐, 내 입 막는 법은 하나밖에 없는데. 알고 있지?”

놈은 내 손목을 놓아주었고, 나는 그대로 그의 얼굴을 잡아 입을 맞추었다. 맨날 싫다는 말을 뱉을 때마다 놈이 내 입을 막는 방법 중 하나였다. 농염하게 섞이는 혀만큼이나 안에 있는 녀석의 것도 더 단단히 내 안을 헤집었다. 춥, 입술이 떨어지기 무섭게 신음이 터져 나왔다.

“흐응, 으으으……. 읏, 아!”

놈의 목에 두 팔을 감고 당겨 안은 채 눈을 감았다. 절정에 다다를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진짜 돌겠다……. 끝까지 넣게 해 줘.”

나지막이 귓가를 울리는 숨소리 섞인 목소리를 무시한 채 그를 바짝 힘주어 안았다. 김세한의 것을 품은 안쪽에서부터 시작된 전율이 뇌와 손, 발끝까지 퍼져 나갔고, 배가 불을 삼킨 듯 뜨거워졌다. 치아가 작게 떨려 왔고, 작은 환희를 담은 숨이 뱉어졌다.

“하아…….”

“…….”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달뜬 숨을 뱉어 내자 놈이 날 밀어내듯 떨어뜨려 마주 보았다. 아직 여운이 남아 경련하듯 몸을 움찔거리자 놈은 조금 불만이 있는 듯 눈썹을 까딱였다. 내 입술을 매만지던 놈의 엄지가 입 안으로 들어와 내 치아를 훑었다.

“치사하게……. 너 혼자 늘어지지 말라고. 이건 네가 계약 파기한 거야.”

“……뭐?”

“더 못 참아. 나도 다 갖고 싶어.”

무슨 계약…… 하고 생각하려는 찰나 획-놈에게 밀린 몸이 그대로 침대에 눕혀졌고, 갑작스레 바뀐 위치에 그가 내 위로 보일 때쯤이었다.

“읏!”

단번에 깊숙이 밀려 들어온 페니스에 그대로 고개가 젖혀졌다.

“괜찮지? 괜찮잖아. 네 안, 잔뜩 젖었는데. 응?”

마치 괜찮다는 말을 강요하는 듯한 말이었다. 내 대답을 기다리듯 허리를 뭉근하게 돌리던 놈이 크게 숨을 뱉으며 날 내려다보았다.

“나 아직…….”

이미 한차례 절정이 지나간 후라 몸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놈을 필사적으로 밀어내는 내 팔도 마찬가지였다. 불쑥 코에 입을 맞춘 녀석이 나의 몸 위로 완전히 자신의 몸을 포개었다. 온몸을 짓누르는 듯한 무게감이 묘한 압박감으로 바뀌었다.

“괜찮아. 내가 다시 끌어올려 줄게, 아까보다 더 기분 좋아질 거야.”

귀에 속삭이는 말이 곧 달콤한 경고였음을, 쑥-빠져나갔다 밀어붙이는 놈의 허리짓에 알 수 있었다.

“아, 흐읏, 세한아……. 잠깐만.”

놈이 내 안에 밀려들 때마다 눈앞이 깜깜해지고, 고개를 가눌 수 없었다. 귓가엔 점점 거칠어져 가는 놈의 숨소리만 울렸다. 손자국이라도 남기려는 듯 내 가슴을 움켜쥔 손엔 아플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 또다, 거친 허리짓이 놈이 이성을 잃어 가고 있음을 알려 왔다.

“으읏, 세한아, 세한아…….”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붙잡은 채 놈의 이름을 간절히 불렀다. 그런 내게 반응한 듯 놈이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나를 내려다보았다. 몽롱해 보이는 듯한 눈은 미묘한 광기를 두른 채 나를 삼킬 듯 빛났다.

김세한은 이렇게 가끔 이름을 불러 주면 묘한 눈빛을 한다. 어딘가 들끓는 것 같으면서도 역설적으로 억누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좀만 천천히……. 힘들어. 읏. 아!”

“……안 돼. 더 힘내 봐. 할 수 있잖아.”

다정하게 머리를 넘기는 놈의 손과 달리 허리는 여전히 포악하게 움직였다.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린 그가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밀려드는 쾌락에 몸부림치며 입술을 깨무는 내 입에 불쑥 놈의 손가락이 밀려들어 왔다.

“소리, 들려줘.”

“응. 아흐. 읏…….”

그의 움직임에 따라 몸이 위아래로 흔들렸고, 그저 눈을 감은 채 입에서 달아날 뿐인 소리를 흘렸다. 김세한의 허리짓이 격해짐에 두 팔을 뻗어 목을 끌어안았다. 억울하지만 다시 끌어올려 준다는 놈의 말대로 또 한 번 절정이 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깊숙이 들어온 놈 때문에 내 허리도 튕기듯 들려 휘어졌다. 내 벌어진 입에선 흐느낌에 가까운 소리가 흘러나왔고, 놈의 입에서도 작은 신음이 뱉어졌다. 순간 경직됐던 몸이 곧 늘어졌다.

“아……. 좋아.”

내게 작게 입 맞춘 녀석이 내 몸 위로 무게를 싣듯 쓰러졌고,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쾌감이 지나가자 아래에는 감각이 없었다.

“……힘들어.”

“그래도 또 갔잖아. 너, 나한테 다 들켰어.”

“……피곤해. 씻고 잘 수 있을까.”

“음. 아니.”

뜨겁고 간질하고, 축축한 밑은 아직 내 안에서 움직이는 놈 때문에 또 질척이는 소리를 냈다. 쑥-안을 가득 채웠던 놈의 것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아……. 아래에 감각이 없어.”

휑하게 느껴지는 밑이 조금씩 차가워졌다. 몸을 늘어뜨린 채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는 나와 달리 부스럭거리던 김세한은 내 배를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문제 하나 낼게. 맞혀 봐. 오늘 내가 출장 갔다 사 온 것은?”

“……아. 커피 원두 바꿨더라.”

“땡.”

왜 틀렸지? 별 관심 없이 고개를 돌렸을 땐 다시 콘돔을 입에 문 김세한이 보였다.

“……뭐 하는 거야?”

“너랑 쓰려고 내가 잔뜩 사 왔어. 오늘은 두 개만 더 쓸까?”

머리를 울리는 위험 경보에 몸을 일으키려 무릎을 세웠을 때였다. 내 양 발목을 잡아 올려 자신의 어깨에 걸친 그가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어딜 도망가.”

“…….”

“약속했잖아. 만족시켜 주겠다고.”

내가…… 그런 약속을 했던가?. 오늘 내가 모르는 계약이 하나 생긴 듯했다. ‘혼자 만족하는 건 불공평해.’로 시작해. ‘김세한이 만족할 때까지.’로 변이된 계약. 합의한 기억은 없지만 반항해 봤자 달라질 것도 없었다. 또다시 벗겨진 콘돔 껍질에 체념한 채 눈을 감았다.

***

커튼을 걷자 햇빛이 방 안 가득 쏟아져 들어왔다. 김세한은 미간에 내 천 자를 새긴 채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것도 잠시, 나와 마주친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뭐야. 벌써 씻었어?”

젖은 머리를 대충 털어 말리고, 가운 대신 바닥에 늘어진 원피스를 주워 입었다. 원피스는 어제 마구잡이로 벗겨져 던져진 여파로 가슴께가 풀어 헤쳐져 흉한 상태였다. 어제 그가 풀었던 가슴 쪽 단추를 하나씩 채웠고, 김세한은 졸린 눈을 하고도 그 지루한 과정을 성실하게 관람했다.

“일어나야 하는 거 아니야? 왜 아무도 깨우러 안 와?”

툭툭, 이리 오라는 듯 그가 자신이 누워 있는 침대의 옆자리를 두드렸다. 못 이기는 척 발을 떼자 놈은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대답했다.

“내가 오지 말라 그랬어. 너 깰까 봐.”

“역시. 어제 나 보낼 계획이 아예 없었구나.”

“어…… 들켰다.”

눈을 감은 채 이야기하는 김세한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런 내 손은 반대로 잡아당겨져, 중심을 잃고 또 한 번 녀석의 가슴께에 안겼다.

“너 자꾸 이런 식으로 힘쓸래?”

“미안. 좀만 더 이러고 있자. 내가 이런 아침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이런 아침이 뭔데?”

“원 없이 뜨거운 밤 보낸 다음 날.”

또 특유의 능글거림이 나올 타이밍인 모양이었다. 놈은 수위 높은 이야기를 하고 당황하는 내 반응을 즐기는 악취미가 있었다.

“너 또…….”

“햇살이 좋고, 네 냄새가 밴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처음 본 게 네 얼굴인 그런 아침?”

예상과 달리 답지 않게 다정한 말이었다. 놈을 밀어내려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순순히 안겨 그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일정하게 들려오는 그 소리가 나를 나른하게 만들었다.

“그럼 오늘은 일정 없는 거야?”

“음…… 뭐가 있던 거 같은데. 아, 어제 그놈.”

웅얼웅얼, 다시 잠들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그놈?”

“지금 몇 시지? 오라고 해 놓긴 했는데.”

흘끔, 침대맡 협탁 위에 놓인 탁상시계를 살피던 녀석이 다시 누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아직 시간 좀 남았어.”

“누구 오기로 한 거면 나가고.”

“아냐, 그것 때문에 가면 나 그놈 죽일지도 몰라.”

“누군데.”

내가 몸을 일으키자 녀석이 아쉽다는 듯 입술을 축이며 침대 머리맡에 상체를 세워 앉았다.

“어제 인원 보충한댔잖아. 시험 보러 온 놈 중에 좀 괜찮은 녀석이 있어서.”

“그래? 네가 그런 소리 하는 거 테리 이후에 간만이네.”

무언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김세한의 눈썹이 까딱였다.

“……뭔데 그렇게 자연스럽게 불러.”

“테리?”

가볍게 되물은 것뿐이었는데 놈의 인상이 더욱 찌푸려졌다. 김세한은 가끔 어린아이처럼 굴 때가 있었다. 질투를 숨기지 않는다는 점이 특히 그랬다.

“아, 배 아파. 이제 딴 놈으로 바꿔야 하나?”

“그러지 마. 테리가 좋아.”

단호하게 말하는 나를 보던 김세한은 확신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꿔야겠다.”

“아오. 너 진짜…….”

“이번에 오는 그놈으로 바꿀까. 실력도 괜찮고, 지금 붙여 놓은 새끼처럼 귀엽게 생긴 것도 아니고, 말수도 적어 보이는 게…… 너랑 친해질 일도 없을 거 같고.”

김세한은 신입을 회상하듯 눈을 굴리며 말했다.

“걔가 나랑 안 친해질 거라고 어떻게 확신해?”

“궁금하면 너도 봐 봐. 아주…… 기계 같은 놈이야. 너도 친화력 없고, 걔도 없고. 아주 사무적인 관계가 될 거 같은데?”

날 놀리듯 킥킥대는 녀석에게 놀아나고 싶지 않아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바꾸지 마.”

눈을 깜박이던 김세한이 못마땅하다는 듯한 눈썹을 까딱였다.

“넌 꼭 목적이 있어야 스킨십하더라.”

“싫어?”

고민하듯 잠시 입술을 삐쭉이던 녀석의 얼굴이 금방 풀어졌다.

“영악한 거…… 싫지는 않네. 종종 그렇게 해.”

“고마워.”

만족스럽게 서로를 보며 웃을 때쯤이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늦장 부리던 김세한이 가운을 걸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들어와.”

그 한마디에 대문만 한 방문이 열렸다. 나도 침대에 앉아 있기 뭐해 김세한 옆으로 자리를 옮기려던 찰나였다.

“불러 주셔서 영광입니다.”

들려오는 목소리에 순간 걸음이 멈추었다.

‘어라, 이 목소리, 어디서 들었더라.’

김세한에게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천천히 발을 옮겼다. 그런 나를 당겨 자신의 옆에 세운 김세한이 하품을 삼키며 말했다.

“얘가 그 새로 데려온 놈이야. 실력이 좋더라고.”

“…….”

입술이 자연스레 벌어졌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나와 마주한 녀석은 두어 번 눈을 깜빡이다 허리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성재라고 합니다.”

이재현이었다. 잊고 있던 내 글의 처음이자 마지막 독자, 버스에서 함께 이곳으로 흘러들어 온 놈. 녀석이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여전히 속을 모를 눈에 가짜 이름까지 단 채로 말이다.

무심하게 내리깔린 눈, 높낮이 없는 건조한 말투, 군더더기 없어 차갑게 느껴지는 얼굴. 모든 게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대로였다.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와 이재현의 옆얼굴이 그늘졌다. 물론 해를 받는 부분은 놈의 새하얀 피부 덕에 한층 더 눈부셨지만, 내가 주목하는 건 더 깊어진 어둠 쪽이었다. 반반 다르게 보이는 얼굴이 인물 ‘이재현’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듯했다.

미동 없는 이재현에 반해 내 눈은 이리저리 움직였다. 아마도 내가 그만큼 당황했다는 증거겠지.

“나…… 이만 가 볼게.”

내 어깨에 감긴 김세한의 손을 내려놓았다. 녀석은 아쉽다는 얼굴이었지만, 불편한 내 표정을 읽은 건지 순순히 놓아주었다. 내가 낯을 많이 가린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재현을 스쳐 가며 일부러 어깨를 부딪쳤다. 불만스러운 의문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부딪힌 어깨를 잡고 돌아보며 입술을 깨무는 내게 녀석은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나는 그 인사를 받아 주지 않은 채 성큼성큼 방문을 나섰다. 문밖에는 언제 온 건지 테리가 서 있었다.

“이제 나오시네요.”

“계속 여기 있었어?”

“음…… 두 시간 전부터요. 언제 나오실지 모르니까요.”

“부르지. 뭐 하러 기다려.”

“보스한테 찍힐 일 있습니까. 이게 마음 편합니다.”

테리는 문 쪽으로 고갯짓하며 말을 이었다.

“그보다 방금 들어간 녀석, 신입인 거죠? 사격 시험에서 만점 받았다고 종일 소문이 자자하더니. 이제 보스까지…… 생초짜라던데 수재는 수재인가 봅니다.”

“……그런 수재가 갑자기 나타났다는 거지?”

“네?”

그렇게 눈에 띌 만큼의 실력을 갖춘 사람이 뒤늦게 나타난 것에 의문을 품는 건 나뿐인 듯했다. 이미 이름날 사람은 이름나 있고, 보통은 길드나 조직에 몸을 담게 돼 있었다. 스카우트도 아니고 시험이라. 뭔가 구린내가 진동했다.

“그렇잖아. 각성이 늦었을 리는 없고, 이제야 그 실력을 뽐내겠다고 기어 나온다고?”

“새로 온 녀석이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아니…… 그보다 이상하지 않냐는 거지.”

“뭐 이상할 게 있겠습니까. 저도 생활고만 아니면 조용히 살고 싶었고, 저놈도 버티다 버티다 그냥 헌터를 직업 삼기로 했나 보죠.”

내 말은 테리의 동의를 얻지 못했다. 하긴 녀석은 김세한의 무리 중 가장 착하고 정직한 인물이고, 그렇기에 팔자에도 없는 내 감시원이 되었다. 인물 설정을 잘못한 것 같았다. 뒷담 정도는 같이 까 줄 수 있는 놈으로 만들었어야 했다.

“30분만…… 혼자 있게 해 줄래?”

“제가 미쳤습니까. 방 이외의 공간에 페르 님 혼자 뒀다 걸리면 전 모가지입니다.”

끽-소리를 내며 테리가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나는 한숨을 크게 내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볼일이 좀 있어서 그래. 30분 뒤에 여기로 다시 올게. 부탁이야.”

“……무슨 일 있으십니까?”

대답이 없는 나와 내 뒤에 있는 방문을 번갈아 보던 테리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김세한과의 갈등이 있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알겠습니다. 아무쪼록 잘 해결하십시오.”

물러나는 듯하던 테리가 다시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주제넘은 조언이지만 페르 님이 좀 져 주십시오. 보스가 답지 않게 페르 님 앞에선 좀 어린애 같지 않습니까.”

“……그래.”

“30분입니다.”

테리는 나와 새끼손가락을 건 뒤 사라졌다. 나와 떨어진 시간은 그에겐 나름 자유 시간일 테지만, 모습만 감출 뿐 아래층 어딘가에서 날 기다릴지도 몰랐다. 조용히, 그리고 신속하게 캐내야 했다. 조급한 마음에 까득-까득- 생각 없이 깨물던 손톱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뭐 하나 변한 게 없네…….”

얼굴, 목소리……. 모든 게 기억 속 놈과 같은데, 처음 보는 사람 같았다. 특히 날 보는 안개 낀 듯한 눈이. 이놈이 혹시 나를 기억 못 하는 걸까 싶을 정도로. 욱신거리는 손끝이 하얀 빛과 함께 온전히 회복될 때쯤, 문 너머로 발소리가 들려왔다.

“감사합니다. 그럼.”

문을 열고 나온 이재현은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하고 조심스레 문을 닫았다. 그러곤 눈만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내가 여기 있을 걸 알았던 것처럼.

“…….”

아무 말도 없이 서 있는 녀석의 소맷자락을 잡아끌었다. 이재현은 별다른 저항 없이 내가 이끄는 곳으로 끌려왔다. 얼굴엔 그 어떤 당황스러움이나 두려움은 보이지 않았다. 김세한의 방에서 한참 떨어지고 나서야 나는 몸을 돌려 녀석을 마주 보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녀석의 딱딱한 물음에 기가 차 짧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너야말로 무슨 짓이지?”

“…….”

“뭔 개수작이야, 이게.”

나를 내려다보는 눈은 놈을 처음 만났던 날에 봤던 것과 닮아 있었다.

2. 유일무이 독자

놈이 그날을 기억하는지 몰라도, 이재현과의 첫 만남은 고등학교에 다닐 때보다 좀 더 전이었다.

“이거 봐, 세현중 교복. 예쁘지?”

처음 남자 친구가 생겼다는 친구를 둘러싸고 사진 구경이 한창이었다. 세현중은 사립 중학교로, 뭘 모르는 우리에겐 그저 부잣집 자식들의 학교라는 인식뿐이었는데 그곳에 재학 중인 남자 친구는 그녀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별 관심은 없었지만,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세련된 교복이 예쁘다는 것에는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한참 남자 친구 자랑을 들어주다 수업이 시작됐다.

“잘 가.”

“응, 내일 봐.”

학교가 끝나고 형식적인 인사가 오갔다. 그날따라 비가 내렸고, 교문 앞은 자녀를 데리러 온 학부모의 차들로 붐볐다. 추적추적-빗소리 탓일까, 내 검은 우산만큼이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아니, 조금은 우울한 것 같기도 했다. 더러운 구정물을 튀기며 달리는 차들이 있는 큰 도로를 벗어나 골목길로 들어서자 어느새 북적이던 사람들이 사라진 상태였다. 양옆으로 늘어진 크고 작은 빌라와 주택가는 오늘따라 더 조용했다.

‘어, 세현중 교복이다.’

내 앞에서 걸어가는 사람의 하늘색 우산 밑으로 사진 속 그 교복과 검은색 책가방이 보였다. 가는 방향이 같아서인지, 그냥 교복이 예뻐서였는지. 그도 아니면 그 골목길 눈에 보이는 사람이라곤 하나뿐이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내 눈은 앞서가는 그 남자애에게 향해 있었다.

‘뭐지?’

잘만 가던 남자애가 걸음을 멈춰 서고, 잠시 고개를 돌려 무언가를 바라보는 듯했다. 한 10초 정도 흘렀을까. 멈칫하는 듯하던 녀석은 다시 앞을 보고 걷기 시작했다.

‘뭐가 있었나?’

그런 의문을 품은 채 아까 남자애가 멈춰 선 부근에 다다랐을 때였다.

먀옹—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곳에는 힘없이 쓰러져 비를 맞고 있는 어린 고양이가 보였다. 고양이에게서 흘러나온 피가 내리는 빗물과 섞여 주변에 붉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탁—

놀란 마음에 나는 우산을 떨어뜨린 것도 모른 채 고양이에게 다가갔다. 교통사고로 이미 죽어 있는 고양이 사체는 몇 번 본 적 있지만 이제 막 사고를 당해 사경을 헤매는 건 처음 봤다. 내 손에 담길 만큼 작은 아이였지만, 이미 배 쪽엔 심한 손상이 있어 보였다.

“……어떡해.”

힘없이 울음소리를 내는 녀석은 마지막으로 도움을 청하고 있는 듯 보였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고양이에게 손을 뻗던 그 순간이었다.

“손대지 말지?”

뒤쪽에서 들려온 무미건조한 목소리.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을 땐 우산 밑으로 날 내려다보는 남자애가 서 있었다. 언뜻 보이는 검은색 가방, 하늘색 우산. 아까 봤던 남자애가 맞았다. 내려다보는 눈에선 별다른 감정이 보이지 않았다.

“뭐……?”

그래서일까. 명백히 눈이 마주쳤는데도 저 남자애가 나에게 말을 한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끝까지 책임질 거 아니면 손대지 말라고.”

“…….”

“어설프게 손 뻗어서 괜한 희망 주지 마.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게 나중엔 더 괴로워.”

“…….”

“뭣보다 너, 후회할걸.”

눈엔 빗물이 들어갔는지 앞이 흐릿해져, 남자아이의 얼굴도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남자애는 나한테 할 말이 끝났다는 듯 발을 돌렸다. 나는 갑자기 다가와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고 떠나려는 놈을 쏘아보았다. 그냥 보내기엔 억울한 느낌이 들었다.

“……뭔 개소리야. 혼자 죽어 가는 게 더 괴로운 거잖아!”

성큼성큼 멀어지는 그 남자애는 답이 없었다. 하지만, 난 놈과 달리 한껏 격양되어 있었다.

“너도 마음에 걸려서 다시 돌아온 거 아니야?!”

분했던 건지, 사춘기여서 그랬는지, 숨이 거칠어지고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내가 왜 녀석에게 화를 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만 어두운 하늘과 상반되게 눈이 아플 정도로 밝은 하늘색 우산을 들고 있는 그 남자애가 멀어질수록 뭐라 말하기 힘든 상실감이 들었다. 단순히 이 상황에서 같이 머리를 맞대 줄 사람이 필요했던 걸지도 몰랐다.

“그래! 가라, 가. 이 사이코패스 새끼야!”

목에선 쇳소리가 났고, 비는 갑작스레 거세졌다. 빗소리가 귀를 때렸고, 거꾸로 뒤집혀 있는 내 우산엔 벌써 작은 웅덩이가 만들어져 있었다.

“나밖에 없어…….”

나는 낮게 신음하는 고양이를 내려다보며 스스로 뺨을 쳤다. 지금 이 아이를 구할 건 나뿐이었다. 카디건을 벗어 조심스레 고양이를 감싼 뒤 안아 들었다. 이제까지 맞았을 비겠지만 내게 안겨 있을 때만큼은 맞게 하고 싶지 않아 품에 꼭 안았다.

“내가…… 꼭 살려 줄게.”

하아. 하아-내 숨소리가 빗소리보다 커질 때쯤, 등하굣길 내내 스쳐 지나가 기억에 남아 있던 동물병원에 도착했다.

“저기요…… 하아…… 얘가 교통사고를 당했나 봐요……. 상태가 심각한 거 같은데 도와주세요.”

내가 다급하게 부탁하자 놀란 듯한 간호사는 고양이와 나를 번갈아 살피다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진료실에서 가운을 입고 있는 남자가 걸어 나와 접수 카운터에 올려진 고양이를 내려다보았다. 복장으로 보아 수의사인 것 같았다. 뚝뚝-내게서 떨어진 빗물이 병원 바닥을 적실 때쯤 의사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길고양이죠? 키우는 거 아니고.”

“……네, 그런데요.”

“음…… 학생 마음은 알겠는데, 살리고 싶다고 전부 살릴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늦었다는 거예요? 아직 살아 있는데…….”

“딱 봐도 장기 손상이 있는데, 이걸 수술해 주려면 병원비가 꽤 들 거예요. 내 말 무슨 말인지 이제 알겠죠?”

‘어디까지 좋은 마음일 수 있어?’ 내 귀에는 그런 질문으로 들렸다.

쿵. 쿵. 쿵.

심장이 귀 쪽에서 뛰는 듯 몸을 시끄럽게 울렸다. 수의사와 아직 숨을 내쉬고 있는 고양이를 번갈아 보다 조용히 안아 들었다. 그 순간, 내가 꿈에 찌든 어린아이라는 것을 자각한 것 같다.

“미안해요. 조심히 가요, 학생.”

나긋나긋한 인사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병원을 나섰다. 그리고 몇 걸음 걷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너무 뛰었던 터라 이제 걸음 힘도 없었고, 눈물이 차올라서 앞도 보이지 않았다. 돕는 것이 맞다고 배웠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그만큼 베풀 여유가 있을 때나 가능한 것이었다.

“미안해……. 네가 만나게 하필 나라서…… 살려 주지 못해서 미안해.”

고양이 위로 빗물인지 내 눈물일지 모를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한참을 꺼이꺼이 울고 나서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내 카디건을 붉게 물들인 고양이의 숨은 끊어져 있었다.

“미안해…… 정말.”

상상과 현실의 괴리. 좌절감과 무력감을 배운 순간이었다.

- 끝까지 책임질 거 아니면 손대지 말라고.

그 순간, 왜 그 남자애의 말이 떠오른 건지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나는 꿈에 젖은 애새끼였고, 놈은 나보다 더 성숙했다는 것이다.

그날 이후로 가끔 악몽을 꾸었다. 무미건조한 그 남자애의 목소리와 끝내 내 품에서 죽었던 고양이가 번갈아 머리를 어지럽혔다. 시간이 흘러 피에 젖었던 카디건도 졸업해서 볼 일이 없어지고, 꿈조차도 가물가물해질 때쯤이었다.

“교훈을 생활화하여 고등학생으로서의 본분을 다할 것을 엄숙히 선서합니다.”

기억하기 싫음에도 뇌 깊은 곳에 선명히 남아 있는 목소리는 미묘하게 더 굵어져 내 고개를 들게 했다. 잘 기억나지 않던 그 남자아이의 얼굴이 선명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다만, 동일 인물이라기엔 어딘가 빛을 담고 있었다.

“……년 ……월……. 일 입학생 대표 이재현.”

나도 모르게 놈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이재현…….”

***

로맨스는 대체로 유치해서 질색이다. 우연히 순정 만화에서 본 ‘학교의 왕자님’인 남자 주인공을 보고 굉장히 비웃었던 기억이 있다. 전교생이 이름을 알고 있을 만한 사람, 우수한 성적, 교우 관계, 운동 신경까지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남자애. 그런 교내 유명인이 실제로 존재할 줄은 몰랐다. 친구가 많지 않고, 같은 반도 아닌 내가 녀석의 소식을 다 알 정도였으니까 유명인이라면 유명인인 셈이었다.

“이번에도 우리 반에서 1등이 나왔다. 이재현.”

복도를 걷다 창문 너머에서 들려온 소리에 걸음이 멈췄다. 열린 3반 창문 너머로 안쪽 풍경이 보였다. 반 아이들이 손뼉을 치기 시작했고, 놈의 담임 선생님은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재현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이게 현실이긴 한가?’

“와……. 3반 이재현, 벌써 두 번째 1등이 거지? 완전 사기캐 아니냐?”

당시 채연은 호들갑을 떨며 동의를 구하듯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게…….”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그 모든 장면에서 나만 동떨어져 놀랍도록 그림 같은 놈을 방관했다. 매우 이상적이지만, 내겐 놈의 모든 게 이상하다고 느껴졌다. 무엇보다, 비 오던 그날 만났던 그 남자애라기엔 평범했다. 여기서 평범하다는 것은 ‘미친놈’ 같지는 않았다는 거다. 내 머릿속 이미지로는 우산 밑의 그 녀석이 사람들과 어울리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사람을 착각하고 있나?’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는 모래밭인 운동장과 반들반들한 바닥의 농구 코트가 있었고, 그걸 둥글게 감싼 형태로 산책로 같은 길이 이어졌다. 그 앞엔 벤치도 놓여 있어 많은 학생이 밥을 먹고 나면 나무가 늘어진 산책로를 걷거나 벤치에 앉아 수다를 떨곤 했다.

점심시간, 배를 채우고 벤치에 앉아 계절을 알리는 드높은 하늘과 노랗게 말라 간신히 가지에 붙어 있는 나뭇잎을 감상했다. 쭉-여유롭게 음료수를 빠는 나와 달리 옆자리에 앉은 채연은 종이 몇 장과 싸우고 있었다.

“그러게 반장을 뭐 하러 맡아. 귀찮게.”

사람들은 반대의 성향을 가진 사람에게 끌린다고 하던가. 내성적인 나와 달리 내 친구들은 적극적이고 활달한 편이었다.

“나 말고 할 사람도 없었잖아. 대학 갈 때 도움 되겠지.”

착하고 거절 못 하는 성격. 채연은 임원이 되기에 딱이었다.

“내가 볼 땐 그 시간 아껴서 공부하는 게 더 도움 될 거 같은데.”

“아 씨……. 안 그래도 알고 있으니까 그만 찔러. 그리고 장점도 있단 말이야.”

“장점…… 그런 게 있어? 뭔데?”

“이거.”

대놓고 흥미 없는 모양새로 눈만 굴려 그녀가 들어 올린 종이를 확인했다. 번호와 함께 몇몇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게 뭔데?”

“각반 피구 출전자들 출석 번호랑 이름.”

“근데?”

“체육 대회에서 짝 피구 하잖아.”

“아, 네가 나 나가라는 그거?”

“네가 다른 거 다 하기 싫다니까 그냥 적당히 남자애 방패 삼아 숨어 있으라는 거지.”

단체 줄넘기 싫어, 기마전 싫어. 달리기 주자를 하라니, 미쳤어? 이래저래 고개를 젓다 보니, 남은 게 그것뿐이어서 출전하는 거뿐이었다. 채연은 뭐가 그리 좋은지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선생님이 나한테 짝 정해 오라고 했다.”

“그런 걸 너한테 맡긴다고?”

“아니. 사실 그냥 랜덤으로 정해서 정리만 해 오라는 거였는데 이번 기회에 권력 남용하고 그러는 거지 뭐.”

“허. 뭐 별거라고 권력 남용까지야.”

“아니야. 벌써 좋아하는 애랑 하게 해 달라는 애들도 있단 말이야. 너무 설레지 않아?”

채연은 본인이 더 설렌다는 듯이 공중에 주먹을 흔들었다. 호들갑을 떠는 그녀가 조금 귀여워 웃음이 나오려던 순간이었다. 갑작스레 내게 고개를 들이민 채연의 눈이 빛났다.

“내가 너 이재현이랑 하게 해 줄까?”

들려온 놈의 이름에 채연의 얼굴에 음료수를 뿜을 뻔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내 얼굴은 아주 많이 구겨졌을 것이다. 내가 그걸 전혀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야. 싫어.”

“왜? 당연히 좋아할 줄 알았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왜 당연히 좋아해야 하는 건데.”

내 언성이 조금 높아지자 채연이 그제야 내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내 짜증은 이미 올라온 상태였다.

“참 나. 걔가 뭐라고.”

“야…… 내 생각이 짧았다. 미안해. 애들한테 매너 좋고 잘생겼다고 인기 많으니까 무심코. 그럼 넌 누구로 해 줄까?”

“……걔 빼고 아무나.”

모두가 좋아할 만한 남자애. 그게 곧 이재현을 표현하는 말이라는 거겠지. 이미 사과한 채연에게 더 화낼 순 없어서 애꿎은 음료수 캔을 빨대로 찔러 댈 때였다.

“야, 이재현!”

방금까지 언급하고 있던 인물의 이름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벤치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멀뚱히 서 있는 이재현과 눈이 마주쳤다.

‘혹시 들은 건가? 아닐 텐데. 난 일부러 이름은 말 안 했고…….’

눈이 마주친 건 아주 잠시였다. 녀석은 곧 자신의 친구들과 섞여 사라졌지만, 나는 조금 전에 봤던 녀석의 얼굴을 곱씹었다.

‘저 새끼…… 지금 정색한 건가?’

순간이지만 그 얼굴 위로 비 오던 날에 봤던 놈의 얼굴이 겹쳤다.

“뭐야……. 맞네, 동일 인물.”

***

그렇게 시간이 흘러 2학년이 되었다. 듣고 싶지 않음에도 녀석에 대한 소식은 귀를 틀어막지 않는 이상 들려왔다.

길거리 캐스팅을 당했다더라, 아버지가 국회 의원이라더라. 뭐 그런 종류의 것들이었다. 내가 녀석을 고등학교에 와서 알게 됐다면 뭔가 좀 달라졌을지도 몰랐다. 남들처럼 그냥 ‘잘생긴 남자애’나 ‘사기캐’라든가 그렇게 여겼을지도 모른다. 이재현은 기본적으로 웃는 얼굴이었지만, 어디까지나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였다. 놈은 나에겐 ‘표정 관리’를 하지 않는다. 즉 내게는 친절을 베풀 생각이 없다. 놈이 나를 의식하는지 안 하는지는 본인이 아닌 이상 알 수 없었다. 다만 만약 의식한다면 나를 싫어하는 쪽인 것은 명확했다.

우연히 복도를 지나치다 눈이 마주칠 때면 그 표정 없는 얼굴로 날 빤히 보곤 했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나 또한 놈을 짧게 노려보았다.

뭘 야려. 팍, 씨. 그렇게 생각하곤 했다.

벽면으로 늘어진 목제 사물함, 너무 조잡해서 시선을 끌 만한 알록달록한 교내 행사 홍보 포스터, 복도를 가득 채운 어수선한 아이들의 목소리. 뭐 하나 차분한 게 없는 학교 복도에서 놈과 눈이 마주칠 때만큼은 아무것도 없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미지의 공간에 빨려 드는 느낌을 받았다. 모든 게 내가 녀석을 불편해하는 마음이 만들어 낸 상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 혼자만의 미묘한 기 싸움은 분명 존재했다.

음악실 이동 수업이 있던 날이었다. 수업 종이 쳤음에도 수행 평가에 대한 설명이 길어져 다음 수업이 음악 수업인 다른 반 아이들이 문 앞에 바글거렸다.

“경례.”

반장인 채연의 짧은 인사를 끝으로 수업이 끝나고, 나는 아까부터 안 나오는 펜을 흔들어 대다 포기하고 짜증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아까 바른 립밤 탓인지 머리카락이 입술에 달라붙어 묘하게 신경을 긁었다.

“아. 짜증 나.”

미묘하게 올라오던 짜증이 문을 열고 처음 보인 익숙한 실루엣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쯤 되면 묘한 인연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처음으로 문을 열어젖힌 내 앞에 이재현이 서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나를 빤히 바라보는 그 얼굴을 정면으로 보고 있자니 피로감이 몰려와 대놓고 인상을 구기곤 고개를 돌린 채 지나쳤다. 이렇게 무시하면 편할걸, 왜 그간 눈을 안 피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도 참 유치하네.”

“뭐가?”

“아니. 새삼 내가 아직도 애새끼구나 해서.”

“자기 주제 파악을 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어른이라던데.”

“그래. 오늘부터 어른 하련다.”

“말투가 왜 그래? 곧 머리 깎고 절 들어갈 애 같아.”

채연과 시답지 않은 대화를 나누며 다음 수업 준비를 위해 서랍을 뒤지던 때였다. 무언가 잊은 거 같은 허전함을 느꼈다.

‘노트. 노트가 없다.’

순간 온몸이 서늘해져 황급히 가방을 뒤지고 주변 바닥, 사물함까지 모두 뒤졌지만 보이지 않았다. 노트가 없어졌다.

‘와 씨…… x됐다.’

절망감에 절로 머리에 손이 올라갔다. 그런 내 행동에 채연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왜? 뭐 잃어버렸어?”

“노트…….”

“에이~ 뭐야. 뭔 노튼데. 내 것 복사해 줄게.”

“그런 거 아니란 말이야아아.”

생떼 부리듯 머리를 감싼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울음소리를 냈다. 정말 울고 싶은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나머지 수업을 어떻게 들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머릿속은 오직 잃어버린 노트 생각뿐이었다.

“아, 나 죽으면 사인은 수치사야. 알아 둬.”

“난 또 별거라고, 이름도 써 놨다며. 누가 주웠으면 가져다주겠지?”

“이름을 써 놓은 게 문제라고. 미친, 다 같이 돌려 보면 어쩌지?”

“남의 노트 보통 잘 안 열어 보지 않나? 그리고 앞에 몇 장은 필기라며. 걱정하지 마.”

혼자 공상하는 것을 좋아하던 그 당시의 나는 소설을 쓰고 있었다. 답답한 학교생활에서 찾은 나름 건전한 스트레스 해소 방편이었다. 다만, 원래 수업 필기용으로 사 두었던 노트여서 출석 번호와 이름이 적혀 있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근데 소설 쓰는 거 몰랐네. 신기하다. 뭔 내용이야?”

“망해 가는 세계에서 또라이 주인공이 다 해 처먹는 내용.”

스스로 만족스러운 요약이었으나 채연은 고개를 저었다.

“너 그간 스트레스 많이 받았구나.”

“그런가……. 그럴지도.”

부정하기엔 대리 만족되는 부분이 많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왜 나한테는 안 보여 줬어?”

“……누구 보여 주려고 쓰는 거 아니야. 자기만족용이고 앞으로도…… 아!”

“왜?”

문득 음악실에서 글을 끄적였던 기억이 스쳤다. 복도에서 떨어뜨렸을 가능성도 있지만, 놓고 온 거라면 음악실뿐이었다.

나는 점심도 거른 채 곧바로 교무실로 향했고, 때마침 문을 나서려는 음악 선생님을 잡아 세웠다.

“선생님……! 저 1반인데요. 제가 음악실에서 노트를 잃어버린 것 같은데. 혹시 보셨거나, 선생님께 있다거나…….”

간절함을 담아 말을 늘어뜨렸지만, 바람과는 달리 선생님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노트? 글쎄 잘 모르겠네. 너희 다음 반이 5반이던가? 선생님이 물어봐 줘?”

“아니에요…… 제가 찾아볼게요.”

선생님을 통해 찾으면 괜히 일이 커질 것만 같아 고개를 저었다.

‘울고 싶다, 진짜.’

음악실. 줄지어 늘어진 책상, 교탁, 심지어 피아노 밑을 샅샅이 뒤졌지만, 몇 년이나 됐을지 모를 눌어붙은 먼지 덩이가 끌려 나올지언정 노트는 보이지 않았다.

“잘 가라…… 김세한.”

노트를 찾으려는 이유 중 가장 첫째는 창피함이었고, 두 번째는 이제까지 적은 이야기가 아까워서였다. 소설의 주인공에게 혼자만의 작별 인사를 하며 오늘따라 서늘하게 느껴지는 음악실을 빠져나왔다.

***

노트 찾기를 포기하고 그로부터 일주일 정도가 되어 가던 날이었다. 여러 방편으로 신경 쓰는 게 많아서인지 깜박하는 일이 잦았고, 그날도 내일 시험 준비에 필요한 교과서를 두고 온 날이었다.

“이러니까 노트도 잃어버리지……. 누굴 탓해.”

초가을, 방과 후 시간대이면, 주황빛으로 변한 해가 창에 가득 미끄러져 들어왔다. 아이들이 모두 돌아가 고요한 복도엔 내 신발 밑창과 반질반질한 바닥이 만들어 내는 삑삑 소리만 울렸고, 문이 열린 화장실에서 청소 후 나는 특유의 표백제 냄새가 복도까지 흘러들었다. 조용한 학교가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생각 없이 우리 반 교실 문을 열었을 때, 노을 탓에 길게 늘어진 누군가의 그림자가 내 신발 앞코에 닿았다.

언뜻 보이는 인영은 정확히 내 책상 앞에 서 있었다. 고개 들어 얼굴을 확인했을 때 나는 침을 삼켜야 했다. 이재현이었다.

‘쟤가 우리 반에 왜 들어와 있지? 왜 하필 내 책상 앞에 있지?’

상황 파악을 못 해 머릿속 떠다니는 물음표를 잡을 새도 없이, 놈의 손에 들려 있는 노트를 발견했다. 머릿속이 새하얘질 것만 같았다.

‘아……. 제발.’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나를 보는 얼굴엔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 이재현은 조금씩 내게 다가오고 있었고, 나 또한 놈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벌렸다. 무슨 말이 나올까.

‘음악실에 있더라.’, ‘복도에서 주웠어.’, ‘반 애들에게서 가져왔어.’

여러 예상 답안이 있었다. 하지만 이게 이미 이재현의 손에 들린 이상, 이 노트가 어떻게 놈의 손에 있게 됐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이재현의 입이 열리기 전에 먼저 말을 꺼냈다.

“읽었어?”

“…….”

최대한 덤덤해 보이자는 의도와는 달리 초조함에 목소리가 떨렸다.

“이거…… 읽었냐고!”

울컥, 울컥 올라오는 감정에 녀석을 올려다보며 소리쳤고, 여느 때처럼 내 눈을 빤히 쳐다보던 녀석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삐-녀석의 대답 뒤로 귀가 먹어 버린 느낌이 들었다. 쿵쾅쿵쾅, 가슴이 힘차게 펌프질을 시작했고, 얼굴엔 열이 올랐으며, 코가 매웠고, 목구멍 어딘가에 돌이 걸린 느낌이 들었다.

“……내놔.”

나는 놈의 손에 들린 노트를 잡아채듯 빼앗아 들고 그대로 교실을 빠져나왔다. 머릿속엔 오직 이재현 앞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 하나뿐이었다.

그놈이 내 소설을 읽는다.

노트를 잃어버린 날, 수없이 그렸던 시나리오 중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방울방울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가장 들키기 싫은 놈한테 치부를 들킨 느낌에 자존심이 무너져 내렸다.

“아…… 맞다, 교과서.”

집에 도착해 책상에 앉고 나서야 내가 학교로 돌아갔던 이유를 떠올렸다.

‘시험이고 나발이고……. 모르겠다.’

무기력함이 몰려왔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내게로 돌아온 노트를 펼쳤다. 그리고 노트의 거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빼곡히 적힌 소설을 읽어 내렸다. 그리고 여기저기 보이는 맞춤법 실수와 이제 보니 오글거리는 대사에 수없이 시큰거리는 얼굴을 감쌌다.

‘날 뭐라고 생각할까?……나 참, 난 왜 이런 걸 신경 쓰고 있냐. 시험이 코앞인데……. 그 새끼는 또 일 등 할 텐데.’

어딘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어디까지나 피해자는 나인데, 보상은커녕 더 큰 피해를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이재현을 생각하고 있다는 자체가 지는 느낌이었다.

“쯧. 공부나 하자.”

생각을 비워 내고, 노트를 덮으려던 순간이었다. 탁-운 없는 날답게 노트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게 뭐…….”

평소의 나라면 펼쳐 볼 일 없던 노트의 마지막 페이지. 그 구석에 작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대충 본다면 그냥 넘어갈 만큼 아주 작은 글씨였다.

[재밌다.]

***

시험이 끝나고도 내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이번 내신은, 보자……. 조금 떨어졌네?”

“아…… 네.”

“흠…… 논술 전형 준비하자. 내신은 다음 시험엔 꼭 올리는 거로 하고. 알았지?”

의지 충만한 선생님은 의지 바닥인 나를 질질 끌고 가고 있었다.

“대답해야지.”

“네…….”

그녀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나서야 내가 나가는 것을 허락했다.

‘진로 면담이라…….’

내가 점차 어른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어리석고 유치한 이 마음도 허락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기호 2번 이재현]

교무실을 빠져나오자마자 복도 벽면에 붙은 포스터 속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이재현과 눈이 마주쳤다. 기어코 전교 회장까지 해 먹으려는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심란한 하루하루, 아침에 우르르 몰려와 선거 유세를 하는 인간들 때문에 더 날이 서 있었다.

“어우…… 꼴 보기 싫어.”

나는 미성숙하다. 이재현을 앞둘 때면 나의 그런 면이 더 잘 드러난다. 모든 것이 이재현보다 열등하다. 냉정히 돌이켜 보면 놈이 싫은 이유는 어쩌면 그거 하나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안 그래도 미성숙한 내가 이재현 앞에선 더 못났다는 걸 증명하는 것 같아서.

또 내 소설에 대한 일까지 겹쳐서 이제 얼굴만 봐도 스트레스를 받을 지경이었다. 내가 놈을 보지 않으면 눈이 마주칠 일은 없었다. 어른이 되려면 그에 대한 생각을 비워야 했다.

“어휴…….”

7교시 수업 시간. 면담은 끝났으니 돌아가서 자습해야 했지만, 이래저래 우울해서일까 영 내키지 않았다. 문득 1층에 있는 매점 생각이 나 교실로 향하던 발을 계단 쪽으로 돌렸다.

‘빨리 다녀오면 안 걸리겠지?’

주머니를 뒤적이며 매점으로 향하던 그때였다.

“야 이 새끼야!”

어디선가 들려온 고성에 내 걸음이 멈춰 섰다. 반사적으로 돌아보니 학교 건물 뒤편에 남학생 두 명이 서 있는 게 언뜻 보였다.

“저놈들…… 싸우는 건가?”

평소라면 ‘알 게 뭐야…….’ 하며 발을 뗐을 일이었다.

내가 여전히 멈춰 있는 이유는 그중 한 명이 이재현이었기 때문이다. 이재현 앞에 선 남자는 명찰 색으로 보아 3학년 선배인 듯싶었다.

“아닌가…… 혼나는 건가?”

상황을 파악하기 쉽지 않았다. 싸운다기엔 일방적으로 남자가 이재현에게 소리치고 있었고, 혼나고 있다기엔 이재현의 고개가 너무 꼿꼿했다.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는 이재현은 지금 상황이 너무 지루하다고 느끼는 듯했다.

“너 이 새끼!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친구들도 선생도 너 떠받드니까 네가 뭐라도 된 거 같아!”

정확히 귀에 꽂힌 대사에는 혀를 내두를 만큼이나 덕지덕지 열등감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저 남자를 비난하기엔 나도 이재현에게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남자를 보는 이재현의 눈에 경멸이 담겼다. 아니, 하찮게 보는 것 같기도 했다.

“눈 안 깔아? 눈 안 까냐고, 새끼야!”

악을 쓰는 남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학교를 울렸다. 이 정도 소란이면 곧 선생님이 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 이만 돌아가야 하나? 매점도 못 갔는데. 지금이라도 갔다 올까?’

잊고 있던 초콜릿 우유가 생각나 다시 걸음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너 내가 만만해?”

뭐가 그리 분한지 숨을 몰아쉬던 남자는 기어코 주먹을 휘둘렀다.

퍽—

주먹은 정확히 이재현의 얼굴에 꽂혔고, 평생 꼿꼿할 줄만 알았던 이재현의 고개가 돌아갔다. 나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선배의 꼰대질이 학교 폭력으로 바뀐 순간이었다. 나는 남자의 패기에 혀를 내둘렀다.

‘저 새끼 앞길 생각 안 하네. 까딱하면 대학은 물 건너가겠는데.’

남자는 그저 이재현을 때렸다는 생각에 취했는지 거만한 표정으로 자기 주먹을 내려다보다 다시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그래. 너 같은 새끼들은 매가 약이지.”

대사들이 하나같이 주옥같았다.

‘와 이재현…… 똥 밟았네.’

이제 선생님이 적절한 타이밍에 나타나기만 하면 3학년이 징계 먹는 거로 끝날 일이었다. 몇 대 더 맞는다면 강제 전학도 가능할지 몰랐다.

투—

이재현의 입에서 나온 피가 바닥에 뱉어졌다. 진득하게 늘어지는 피 섞인 침에 소매로 입가를 닦아 낸 놈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난…… 너 같은 새끼들이 제일 싫어.”

계속 입 다물고 있을 줄만 알았던 이재현이 입을 열었다. 남자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뭐?”

“자기 못난 걸 남 탓만 하는 새끼. 열등감에 찌들어서 괜히 제 주변이나 물어뜯는 새끼들 말이야.”

낮게 깔린 목소리. 지금의 이재현과 처음 만났던 그날 들었던 놈의 목소리가 겹치는 것 같았다. 남을 내려다보면서 무심하게 던지는 목소리.

“그런 놈들이 꼭 나를 싫어하더라고.”

내게 던지는 말이 아닌데도 이재현의 말이 가슴에 꽂혔다.

‘아 기분 뭐 같네, 진짜.’

어쩌면 이재현에겐 저 꼰대 놈과 내가 별반 다를 바 없을지도 몰랐다.

“너 이 새끼! 말 다 했어??”

아니나 다를까. 이재현의 말에 더 열이 받은 듯한 남자는 다시 주먹을 쥐었다. 또 한 대 맞을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이재현이 가볍게 주먹을 피했다.

“한심한 놈.”

이재현은 긴 팔을 뻗어 남자의 턱을 잡았다.

“억-”

짧은 외마디와 함께 남자가 넘어졌고, 곧 그 위로 이재현이 올라탔다. 이재현의 손은 턱에서 내려와 남자의 목을 눌렀고, 꽤 힘이 들어간 건지 놈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보였다. 버둥거리는 남자의 팔이 이재현의 얼굴에 닿지 못한 채 점차 내려왔다.

‘어…… 저거…… 위험해 보이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놈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이재현에게 깔린 남자의 입에선 괴로운 신음이 흘러나왔고, 내 발은 무의식적으로 그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야…… 그만해.”

나설 생각은 절대 없었다. 하지만 살인 현장의 목격자가 될 생각도 없었다. 내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린 놈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죽일 생각인 거야?”

“…….”

놈은 천천히 눈을 깜박이다 남자를 누르고 있던 손을 거두었다. 콜록콜록-기침 소리와 함께 남자는 바닥을 기었고, 이재현은 느긋하게 몸을 일으키고도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서는 몰랐는데, 가까이 오니 이 녀석에게도 격양된 숨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에 담기지 않았을 뿐, 이재현도 흥분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또 한 번 이재현의 입이 벌어졌지만, 동시에 멀리서 바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 온다.”

나는 놈에게 경고하며 돌아섰고, 엮이지 않겠다는 내 계획은…….

“거기 뭐야!!?”

걸걸한 목소리의 선도부 선생님의 등장과 함께 물거품이 되었다.

***

일이 있고 다음 날, 나는 평생 올 일이 없을 줄만 알았던 교장실에 들어와 있었다. 흔히 교무실에서 보던 허술해 보이는 플라스틱 명패와 달리 웅장하다 느껴질 정도로 거대한 책상 위에 놓인 검은색 명패엔 금색으로 교장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벽면에는 교장의 학위 증서가 걸려 있었고, 양옆으로는 학교를 상징하는 마크가 수놓아진 큰 깃발이 세워져 있었다. 두꺼운 문 너머로 작게 들려오는 아이들의 목소리는 아득해서, 확실히 내가 아는 학교와는 분리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교장실 중앙에 길게 늘어진 낮은 테이블, 그 주위를 둘러싼 몇 안 되는 소파. 무려 그중 한 자리를 내가 차지했다. 내 맞은편에선 교장의 얼굴이 보였고, 몇몇 안면 있는 선생님들이 소파 뒤로 서 있었다. 그리고 내 양옆 쪽으로 나란히 마주 보는 소파엔 여전히 숨을 씩씩거리는 3학년 남자와 차분한 표정의 이재현이 앉아 있었다. 3학년 남자의 어머니로 보이는 여자는 이재현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재현아, 부모님은 역시 못 오신다니?”

“네. 좀…… 바쁘셔서요.”

뒤쪽으로 다가와 조심스레 묻던 이재현의 담임 선생님은 괜찮다는 듯 녀석의 어깨를 두드리며 본인이 놈의 옆자리에 앉았다. 곧이어 앙칼진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봐요. 누군 안 바빠요? 이렇게 방치해서 키우니 애가 사람 죽일 뻔한 거 아니에요?”

“뭐 하나 확인된 게 없는데 막말하지 마시죠, 어머님. 재현이 몸에 난 상처는 안 보이십니까?”

다행히 오지 못한 이재현 부모님의 빈자리는 그의 담임 선생님이 메꿔 주고 있는 듯했다. 무려 교장을 마주 보는 자리에 내가 호출된 이유는 뻔했다. 양쪽 주장이 엇갈리기 때문이었다. 뭔 놈의 CCTV 사각지대가 이리 많은지. CCTV가 제 역할 하나 해내지 못해 내가 소환된 것이었다.

“자. 본 대로만 말하면 돼.”

3학년 학부모 못지않게 날 선 듯했던 이재현의 담임이 어느새 온화한 얼굴로 나를 보며 부드럽게 말했고,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내게로 쏟아졌다. 나는 그저 이 상황이 뭣 같았다. 초콜릿 우유 하나 먹으려던 게 뭔 죄라고 이렇게 여기 앉아 이 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아야 하는 걸까.

게다가 나보다 더 안절부절못하는 우리 담임 선생님을 보고 있자니 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무슨 일인지 얌전히 눈을 내리깔고 있는 이재현을 훑어 내렸다. 몸 군데군데 멍이 들어 있었다.

‘맞은 건 얼굴뿐인데……. 이 새끼, 나중에 선배들한테 해코지당한 건가?’

아니면 설마 자기가 일부러 상처를……?

3학년 놈은 나를 보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자기를 살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저도 지나가다 본 거라 전체적인 상황은 잘 모르지만…….”

서두를 뗀 나에게 시선이 쏟아졌다.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로는 3학년 선배가 쟤를 혼내고 있는 것처럼 들렸어요. 그러곤 선배가 갑자기 주먹을 휘둘렀어요.”

내 말에 선생님들 사이에서 대화가 오갔다. 아니나 다를까. 3학년 꼰대 놈은 나를 보며 소리쳤다.

“그다음이 있잖아. 그다음 이야기를 하라고!”

난 여전히 내가 왜 이런 고함을 듣고 있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쪽 선배가 먼저 주먹을 휘두르셨고, 얘는 막으려는 건지 손을 뻗었는데. 이쪽은 목을 잘못 맞으셨는지 넘어지시더라고요. 뭐가 됐든 사람 된 도리로 싸움을 말려야 하겠다는 생각에 다가간 것뿐이었고, 그게 전부입니다.”

내 이야기가 끝나자 3학년의 어머니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기 아들을 바라보았다. 믿음이 조금 흐려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엄마…… 나 진짜 아니야. 나 한 대밖에 안 때렸어. 오히려 죽을 뻔했다니까!?”

“그럼 그렇지……. 재현이는 전교생이 알 정도로 성실한 아이입니다. 누구 목을 조를 학생은 더더욱 아니고요. 이 정도 맞고도 겨우 그 정도 방어를 했다는 게 무엇보다 큰 증거 아니겠습니까?”

선생님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커졌다. 내가 놈의 편을 든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저 3학년 놈이 마음에 안 든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고, 둘째는 나 홀로 열등감에 놈을 미워했던 과거에 대한 사죄의 의미였다.

“야, 너! 왜 거짓말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3학년의 목소리가 귀 따갑게 울렸다.

“얘 거짓말하는 거예요! 아, 맞아요. 그때 둘이 아는 사이 같았어요. 야! 너희 둘이 친한 거지? 아니면 너 얘 좋아하냐? 이재현한테 잘 보이려고 그러는 거야?”

남자는 내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소리로 내 신경을 긁었다.

‘하하. 이 새끼, 살면서 맞을 일 많겠네.’

이 정도면 남을 화나게 하는 재능을 가진 인간임이 확실했다. 하지만 저 우스운 발언에도 또 한 번 내게 시선이 쏠렸다. 그 시선에는 이재현의 눈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뇨. 이름도 몰랐는걸요.”

내 대답에 교장실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재현을 모른다는 게 그 정도 충격인 모양이었다. 빤히 나를 응시하는 이재현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그 분위기를 수습한 건 불쑥 내게 다가온 담임 선생님이었다.

“……워낙 타인한테 관심이 없는 애라서요. 다른 반 아이의 이름은 아마 모를 겁니다. 그렇기에 누구 편에 서기 위해 거짓말을 할 아이도 아닙니다.”

어깨에 올라온 선생님의 손은 차가웠다. 감동을 자아내는 믿음이 아닐 수 없었다. 상황은 이재현이 사과를 받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입시를 앞둔 선배에 대한 이재현의 배려였다. 일이 대충 마무리되어 갈 때쯤 교장은 교장실에 딸린 검은색 전화기를 두 손으로 잡고 사람 좋은 미소를 띤 채 공손히 통화했다.

모르긴 몰라도 언뜻 들리는 통화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어쩐지 이재현의 부모님일 것만 같았다. 높은 사람 대하듯 허리를 약간 굽힌 교장의 저자세가 수화기 너머 사람의 위치를 짐작하게 했다. 어쩌면 굳이 내 거짓말이 필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졸지에 거짓말쟁이가 되어 버린 3학년 놈에게 손가락질하기 바빴지만, 내 시선은 고개를 숙인 채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이재현에게 닿아 있었다.

‘성숙은 무슨…….’

나보다 성숙할 줄만 알았던 놈은 똑같이 덜 자란 애새끼였다.

***

학창 시절의 이재현에 대한 기억이 저 깊은 곳에서 헤엄쳐 올라왔다. 단정하던 교복이 더 차갑고 무거운 느낌의 정장으로 바뀌었을 뿐, 놈은 여전히 빙산의 본체처럼 속내를 알 수 없는 놈이었다.

“너 내 소설 기억하고 있는 거지?”

“…….”

“그래서 김세한 찾아온 거 아니야?”

이재현은 여전히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쓸어 넘기곤 짝다리를 짚으며 놈을 노려보았다.

“무슨 꿍꿍이야? 가짜 이름까지 달고.”

내 말에 이재현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처음 보는 표정에 당황스러우면서도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웃어?”

“어떻게 아십니까? 가짜 이름인지.”

놈의 말에 눈썹을 까딱였다.

‘이놈은 또 무슨 소리야?’

눈을 가늘게 뜬 이재현의 고개가 조금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언제는 이름도 모르신다더니.”

놈이 한 말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선, 잠시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아뇨, 이름도 모르는데요.

케케묵은 기억 속, 모든 걸 마무리 지었던 그 발언이 떠올랐다. 우리 학교에서 놈의 이름을 모르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내가 딱히 그의 이름을 부른 적도 없으니 이재현은 정말 그렇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곤 입을 뗐다.

“이재현.”

“…….”

“네 진짜 이름. 이재현이잖아.”

놈의 이름을 부른 건 입학식에서 중얼거린 이후 처음이었다. 그래서일까. 입 밖으로 내뱉어진 이름이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나를 옭아매는 시선 속에 갇힌 듯 그저 빤히 놈을 응시했다. 모든 게 어린 날의 눈싸움하던 그때로 돌아가 버린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번에도 먼저 눈을 돌린 건 나였다.

“너 명문대 갔잖아. 학교에 현수막 달고 난리였는데, 모를 리가 있겠어?”

어색한 공기에, 먼저의 말을 변명하듯 설명을 덧붙였다. 이재현은 삐뚤었던 고개를 바로 세웠다.

“여기 어딘가에는 계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죽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다 보니 여기밖에 안 남더라고요.”

“나…… 말이야?”

놈의 존댓말이 어색해 되물었다. 이재현은 대답 대신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말을 이었다.

“다만, 그 자리가 조직원이 아닌…… 애인 자리일 줄 몰랐네요.”

놈의 말이 고막을 타고 넘어와 심장에 비수처럼 꽂혔다. 이 생활에서 지루함과 무력감을 느끼고, 존재 의미를 찾고 있던 내겐 뼈아픈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날 놀리는 거야?”

“……그렇지 않습니다.”

“야. 너나 나나 다를 거 없어. 이곳에 흘러들어 온 순간부터 살 궁리만 했고, 덕분에 이렇게 살게 됐어. 너도 이제 밖에서 살기 힘들어져서 살 방도 찾으러 김세한한테 온 거 아니야?”

언성이 높아지려는 것을 경계하며 속삭이듯 물었다. 이재현은 눈을 느리게 깜박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뭐?”

“다만, 여기에서 저는 이성재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왜?”

이재현이 잠시 내 눈을 피했다가 다시 눈을 맞추었다.

“페르 님은 그 인물 자체로 자리를 만들었지만, 저는 아니었습니다. 이야기 초반, 이 세계의 필요한 인물의 수는 정해져 있었고, 그 안에 들기 위해선 이미 자리가 차 있는 곳을 비워야 했습니다. 물론 신분도 필요했고요.”

“……그게 무슨 소리야?”

“사람을 죽였습니다.”

이재현 특유의 덤덤한 목소리에 내 귀를 의심해야 했다.

‘살인?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순간 3학년의 목을 조르던 무심한 눈의 이재현이 떠올랐다. 그때도 뭔가 이상함을 느꼈지만, 역시 이놈, 정상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 인물의 자리에서 착실히 살고 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절차를 밟기도 하고, 뛰어넘기도 하면서요.”

“……이성재?”

“기억이 안 나시는 게 당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 큰 비중이 있던 인물은 아니니까요.”

희미한 기억을 더듬으며 괴로워하던 때였다. 나를 찾는 듯한 테리와 눈이 마주쳤다. 황급히 이재현의 멱살을 잡아 끌어내렸다.

“그만. 뒤에 테리가 있어. 나머지는 나중에.”

내 목소리를 줄이기 위한 거리였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녀석의 목소리 또한 귓가에 울렸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고마워? 대체 뭐가 고맙다는 걸까.

“…….”

흠칫-귀에 닿은 숨결에 놀라 어깨를 들썩인 내게, 이어 약간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갑다는 말도요.”

스르르, 멱살을 잡은 손이 풀리자 이재현은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내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전 가 보겠습니다, 페르 님.”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멀어지는 녀석의 뒷모습을 보고 얼어 있었다.

‘속을 모르겠네……. 아직도.’

이재현이라는 캐릭터를 도무지 파악할 수 없었다. 놈은 마주 오는 테리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테리는 얼떨결에 그 인사를 어색한 미소로 받았다. 내게 다가온 테리는 눈짓으로 이재현의 뒤통수를 가리키며 물었다.

“뭡니까?”

짧은 한마디에 여러 의미가 담겨 있었지만 나는 알아듣지 못한 척 일차원적으로 대답했다.

“뭐긴 뭐야. 신입이지.”

뚜벅뚜벅, 앞장서서 발을 옮기는 나를 테리가 가뿐히 뒤따라왔다.

“제가 그런 걸 몰라서 묻겠습니까. 왜 페르 님이랑 있었냐는 거죠.”

놈은 예상대로 더 깊숙이 파고들어 왔다. 그리고 이내 혼자서 결론을 내린 듯 인상을 구겼다.

“맘에 안 드신다더니. 군기 잡으신 겁니까?”

“…….”

이게 테리의 장점이었다. 정의롭고 똘똘하면서도 단순한 사고. 덕분에 서로 오해 생길 일이 없었다.

“그만두십시오. 어차피 들어오면 선배들이 엄청나게 갈굽니다. 뭣 하러 페르 님까지 가세를 합니까. 애 스트레스받게.”

“그래. 알겠어. 그만할게.”

내 방문 앞에 도착하자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우물쭈물하던 테리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보스랑은…….”

“아, 좋게 좋게 풀었어.”

내가 손을 휘저으며 말하자 테리가 한층 가벼워진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다행입니다. 그럼 쉬십시오.”

탁-방문이 닫히고, 허리 숙인 테리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한숨이 터져 나왔다. 갑작스레 피로감이 몰려와 침대에 뛰어들어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이성재……. 이성재.”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재현이 노렸다는 건, 분명 내 작품 속에서 언급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분명 이야기 초반에 나왔던 인물일 테고, 비중이 크지 않은 인물.

“아, 몰라. 그게 누군데.”

그 소설을 쓸 때 나는 오로지 김세한의 주변에만 집중했기에 지나갈 엑스트라의 서사에 많은 공을 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저자인 나와 달리 이재현은 그 비중 작은 인물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작은 엑스트라라도 김세한을 만나 조직에 들어오고부터는 절대 엑스트라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놈도 그걸 노린 걸 테고.

“그나저나 역시 살아 있었네.”

놈을 마지막으로 봤던 건, 검은 인간에게 당할 뻔한 나를 빨간 비상 탈출용 망치로 구해 줬던 그때였다.

“나도 고맙다는 말을 해 둘 걸 그랬나?”

너무 많은 일이 있었기 때문일까. 밀려드는 피로감에 몸에 힘을 빼고 순순히 눈을 감았다.

***

내 소설은 세상 자체가 던전이 되어 버린 셈이지만, 그와 별개로 김세한이 ‘연구’ 목적으로 만들기 시작한 작은 인공 던전이 이 건물 내에 있었다. 레벨별로 몬스터들을 잡아 층마다 배치해 만든 작은 던전은 새로운 인원을 뽑을 때 일종의 레벨 테스트를 위한 장소로 가장 많이 쓰였고, 훈련용으로 쓰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곳 직원의 랭크 분류는 어느 정도 정확했고, 김세한은 어떤 몬스터가 출몰했는지에 따라 인력을 체계적으로 분산할 수 있었다.

“테리는 좋겠네.”

“저요?”

점점 어려워지는 힐러 관련 문헌을 읽어 내리다, 멀뚱히 창밖을 보고 서 있는 놈에게 푸념하듯 말을 건넸다.

“뭐가 말입니까?”

“그냥 강해서 좋겠다고.”

“네?”

놈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김세한의 옆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S급으로, 회사 직급으로 따진다면 임원급이었다. S급은 지금까지 출연한 몬스터를 모두 잡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고, 테리는 내 감시원이지만 임원 중에서도 주요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김세한이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내 옆에 둔 것이었다.

“나도 S급 헌터였으면 좋았을 텐데. 이렇게 갇혀 있지 않아도 되고.”

“흠……. 제 생각엔 페르 님이 다른 포지션이셨어도 딱히 달라질 거 없을 거 같은데요.”

“왜?”

“보스를 만난 시점에 각성하신 거잖아요. 페르 님이 운이 좋아 쓸 만한 헌터였다고 해도, 결과는 같았을 겁니다. 똑같이 사랑에 빠지고, 곁에 두셨겠지요.”

“음……. 글쎄.”

김세한과 ‘사랑’이라는 말은 언제나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다. 철저히 ‘노맨스’로 써낸 내 작품 속 주인공은 사랑을 모르니까.

“그래도 지금보단 날 전선에 끼워 주지 않았을까 싶은 거지.”

“흠. 그것도 글쎄요. 달라지지 않았을걸요. 그냥 이게 보스의 애정 표현인 거죠.”

“날 밖에 못 나가게 하는 게?”

“‘보호’하는 게요.”

테리는 강조하듯 말했다. 이놈도 내 편인 듯하지만 역시 김세한의 사람이다.

“아, 맞다. 그보다 소식 들으셨습니까?”

“뭐?”

“그때 그 신입 말입니다. 페르 님이 군기 잡으시던.”

곧바로 이재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걔 왜?”

나는 최대한 무관심한 척 되물었다.

“예상대로 천재는 천재였나 봅니다. 레벨 테스트에서 S급 받았다고…….”

“뭐?!”

“아, 깜짝이야…….”

복합적으로 놀라운 소식이었다. 하나는 놈의 실력에 대한 놀라움이었고, 둘은 그 실력을 숨기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그야 S급을 달았다는 건 임원이 된다는 말이나 다름없었고, 그건 본격적으로 김세한의 주변에 있겠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럼 다음 사냥부턴 김세한이랑 같이 나간다는 거야?”

“뭐 이르면 그러겠죠? 보스도 이미 예상하시고 얼굴 본 거 같으시고.”

“허.”

실력이 좋다고 들었을 땐 A급 정도일 줄 알았다. 신입이 곧바로 A등급을 받는 것도 어려운 일이니까. 시작부터 S급이라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아무튼, 잘 지내시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페르 님이 미워하면 보스도 못되게 구시지 않겠습니까. 그건 너무 불쌍합니다.”

“하. 벌써 후배라고 챙기냐?”

“그냥 후배도 아니고 천재 후배지 않습니까. 저번에 인사하는 거 보니까 예의도 바른 거 같고. 아, 얼굴도 잘생겼더라고요.”

그놈이 잘생겼다는 말은 학창 시절 내내 너무 들어서 진절머리가 날 정도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에는 그 얼굴만 보면 하루 기분을 잡칠 정도였으니, 놈의 잘생겼다는 얼굴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잘생기긴 무슨.”

“그러십니까? 뭔가 취향이실 줄 알았는데.”

“뭐? 대체 왜? 무슨 근거로?”

또 한 번 달칵, 내 분노 버튼이 눌렸다. 테리는 자신의 턱을 짚은 채 나름 진지한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그냥 어딘가…… 보스랑 닮아서요.”

***

창문 너머 구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이때쯤이던가.’

기억에 남은 소설 구간에 가까워진 것 같았다. 나는 테리와 김세한의 방으로 향했고, 작게 문을 열었다. 문틈으로 삐딱이 턱을 괸 김세한이 보였다.

“14구역에서 새로운 몬스터가 출연했다고 합니다. 촉수를 사용하며 현재 A급 세 명과 대치…….”

내 생각대로 일이 이미 터진 모양이었다. 눈을 내리깔았던 김세한이 웃음을 띤 채 보고를 멈추게 했고, 곧 나와 눈이 마주쳤다.

“이만하지.”

“네? 하지만 급한 상황이라…….”

“나는 더 급한 상황이라.”

김세한의 말에 나의 존재를 눈치챈 조직원은 흘끔흘끔 나를 돌아보았다. 어쩐지 조금 원망스러워하는 눈빛 같기도 했다. 김세한은 무언가 떠오른 듯 손가락 하나를 남자 앞으로 펴 보였다.

“즉, 상황이 위험할 수 있다는 말이네. 처음 등장하는 놈이니 생포하는 게 좋겠고.”

“……네, 그렇습니다.”

“내가 직접 지시하지. 자네는 나가 봐도 좋아.”

“하…… 하지만.”

“아, 나한테 맡겨 둬.”

김세한은 남자의 어깨를 두드리며 떠밀었고, 나에게 들어오라는 듯 손짓했다.

“거기서 뭐 해? 이리 와.”

내게 허리를 숙인 조직원과 바통 터치하듯 방 안으로 들어섰다.

“나인지 어떻게 알았어?”

“내 방문 노크 없이 열 수 있는 사람, 한 명밖에 더 있어?”

마중 나오듯 문 앞으로 걸어 나온 김세한은 나를 한 품에 안았다.

“일하는 중인 줄 알았으면 안 왔을 텐데.”

“너보다 중요한 일은 없지.”

“하여튼 말은. 그보다 급한 일부터 하지? 해결한다고 약속하고 보낸 거잖아. 상황이 급한가 보던데.”

“아.”

김세한은 나를 안은 채로 손만 뻗어 무전기를 낚아챘다.

“14구역 지원. 쿼터. 몬스터는 생포.”

정말 본론만 담긴 내용이었다. 나는 처음 들어 보는 코드명에 김세한을 올려다보았다.

“쿼터는 누구?”

“아. 그때 너도 봤지? 그 신입 코드 네임.”

요컨대, 지금 14구역으로 향하는 건 이재현이라는 말이었다.

“괜찮겠어? 그래도 신입인데…….”

“걱정하는 거야?”

“다 몰살당할까 봐 그러지.”

이번에 등장하는 몬스터는 분명 조직에 꽤 많은 사상자를 내는 화려한 등장을 했던 놈이었다. 찌푸려진 내 미간을 꾹 누르던 녀석은 작게 웃었다.

“그놈 코드 네임, 내가 지어 줬어.”

“네가?”

김세한이 지어 줬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동시에 그 뜻이 궁금해졌다.

“무슨 뜻인데?”

“쿼터. 4분의 1이라는 뜻의 용언데.”

나는 ‘설마 내가 그것도 몰랐겠냐.’라는 의미로 눈썹을 까딱였고, 김세한은 뭐가 웃긴지 작게 키득대며 말을 이었다.

“걔는 꼭 죽일 때 네 토막을 내더라고. 이미 죽은 걸 쓸데없이 한 번 더 벤단 얘기야.”

사체를 또 벤다는 건 아주 철두철미하거나, 지독한 악취미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었다.

“넌 그게 웃겨?”

한숨을 쉬며 묻자 김세한은 날 안심시키려는 듯 등을 쓸어내렸다.

“그만큼 아직 여유롭다는 거지.”

어느새 나른하게 내리깔린 눈은 내 입술에 닿아 있었고, 점차 가까워지는 그의 얼굴에 의문을 담아 물었다.

“지금 키스할 타이밍은 아니지 않나?”

“싫어?”

“싫은 건 아닌데…….”

“그럼 됐지.”

코가 맞닿을 거리에서 속삭이듯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곧 입술이 포개어졌다. 부드럽게 입술을 가르고 들어온 그의 숨이 달아서 순순히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침대에 눕혀진 내 목에 김세한의 입술이 닿았을 때쯤, 덩그러니 놓인 무전기에서 조금 격양된 듯한 이재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4구역, 쿼터, 임무 완료.]

김세한의 명령만큼이나 간단하고 명료한 보고였다.

“거봐. 내가 걱정하지 말라고 했잖아.”

김세한의 느긋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왠지 모를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안 죽었네.’

이재현의 등장은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흔들어 놓고 있었다. 이번 몬스터로 인한 피해를 비껴 갔고, 현장에 나가야 할 김세한은 내 앞에 있다. 반쯤 풀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김세한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렇게나 가까이 있는데도 3년간 단 한 번도 의식한 적이 없었다.

-그냥 어딘가……. 보스랑 닮아서요.

테리의 그 한마디에 놈의 얼굴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닮았나?’

닮았다면 눈매와 입매가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왜 닮은 걸까. 그 당시 매번 보던 얼굴이어서일까.

“왜 그렇게 빤히 봐.”

“구경하면 안 돼?”

김세한은 고민하듯 낮은 신음을 흘렸다.

“난 보기만 하면 애가 달아서 싫던데.”

내게 가볍게 입맞춤한 그가 고개를 기울여 깊숙이 입 안을 헤집었다.

3. 쌍방과실 7:3(1)

잠든 김세한을 바라보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재현의 등장으로 머리가 복잡한 탓인지 잠이 오지 않았고, 내 방만큼이나 익숙한 김세한의 방에는 흥미를 끌 만한 것이 없어 창문 앞에 섰다. 갇혀 지낸 시간이 길어서인지 현재로선 바깥만큼이나 내 구미를 당기는 것은 없었다.

내려다보이는 거리에는 사람이 다니지 않았다. 그러나 3년이 지난 지금, 이전의 회색 도시보다는 조금은 색을 되찾은 모습이 보였다. 건물 사이로 파릇파릇 풀들이 자라나고 있었고, 빈 도로에는 아직도 정리되지 못한 몇 대의 차들이 몬스터의 사체와 함께 부식되어 가고 있었다. 아포칼립스라는 설정에 걸맞게 인류와 문명의 멸망이 조금씩 진행되어 갔다. 지상은 몬스터의 소굴이 된 지 오래였고, 빈 건물 층층에도 사람 대신 몬스터가 득실댔다.

지금 살아남은 사람은 이 세상을 받아들이고 적응한 각성자거나, 그들을 고용할 수 있는 자산가거나, 그게 아니라면 그런 자를 보호자로 둔 자들뿐이었다.

그중, 나는 세 번째 케이스였다.

“뭘 그렇게 봐?”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놀랄 새도 없이 곧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놈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날 뒤에서 끌어안은 채 얼굴을 비비적거리는 김세한의 머리카락이 볼을 간질였다.

“나 때문에 깼어?”

“응, 허전해서.”

아직 잠에 취한 듯한 목소리가 닿아 있는 몸을 타고 울렸다. 내가 여기 살아 있는 이유는 김세한을 보호자로 두었기 때문이다.

“세한아.”

“응.”

“나 밖에 나가고 싶어.”

무언가에 홀린 듯 내뱉은 말이었다. 한동안의 적막이 흐르고, 나지막한 그의 한숨 소리가 고요한 방 안을 울렸다. 내 몸을 감싸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순간 몸이 포박당했다고 느낄 정도였다.

“그 말.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아까까지와 달리 선명히 날이 서 있는 목소리. 녀석과 닿아 있는데도 따뜻하긴커녕 주변 공기마저 차가워지는 것만 같았다. 놀라울 것도 없었다. 김세한은 내가 나간다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여기서 지내게 해 달라고 한 건 너 아니었어?”

그 말 한마디가 또 한 번 놈과의 처음을 떠올리게 했다. 김세한의 연인을 자처한 그날, 난 죽음 앞에서 네가 필요했으니까.

“맞아. 근데 이제 잘 모르겠어. 세상 사람들과 달리 난 항상 정체되어 있는 거 같아.”

“요즘 들어 그렇다는 건 최근에 뭔가 일이 있었다는 건가?”

“아무것도 없어. 그냥 내가 무기력할 뿐이야.”

뭐가 날 이렇게 솔직하게 한 걸까. 이 위험한 생각을 왜 김세한에게 고스란히 전하고 있는 걸까.

“나가면 넌 분명 금방 죽을 거야. 3년 전 그날과 넌 아무것도 달라진 것 없어.”

“…….”

고개를 든 녀석의 머리가 내 어깨에서 떨어지자 놈의 입술이 곧바로 내 귀에 닿았다.

“넌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어.”

그 말은 명백한 협박이며, 내 부탁에 대한 거절이었다.

***

김세한과 함께한 3년이란 시간 동안 내 몸은 정체되어 있었지만, 생각은 수없이 바뀌었다. 처음엔 기회를 봐 떠날 생각이었다가, 역시 안 될 거 같으니 놈 옆에서 늙어 죽길 바랐다가, 그래도 역시 이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게 반복되다 보면 지독하게 우울해진다. 어느 순간부터 생존이 목표가 되어서 ‘원래 내가 살던 세계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겠다는 나의 원래 계획은 시간이 흐르며 점차 흐릿해져만 갔다. 하지만 그 생존에 대한 문제도 점차 다른 것에 무너지려 했다.

놈은 날 ‘힐러’로 쓸 생각은 없다느니, 밖은 위험하니 나가지 못한다느니 하는 개소리로 결국 방에 갇혀 평생을 보내게 했다. 생존이란 단어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답답함은 놈과의 시작부터 잔잔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연인으로서의 김세한은 내게 많은 생각을 들게 했다. ‘나간다’는 말만 아니라면 그는 내 의견에 대부분 져 주는 편이고, 내 눈치도 많이 살폈다. 정말 사랑하는 것처럼.

“웬 케이크야? 생일도 아닌데.”

불쑥 내 방에 찾아온 김세한은 장미와 케이크, 그리고 반짝이는 액세서리들을 내려놓았다. 날 마주 보는 얼굴엔 평소보다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너 기분 별로인 거 같아서.”

그가 이러는 이유는 이미 알고 있었다. 어제 일을 신경 쓰고 있는 것이었다. 김세한은 내가 자신에게서 뒷걸음치는 것을 경계한다. 그래서일까. 꼭 이런 날이면 내게 걸어오던 걸음을 조금 멀리서 멈추고 팔을 벌린다. 나머지는 내가 스스로 걸어오길 바라는 것이다.

“고마우면 안아 줘.”

나는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놈의 품에 안겼다. 이 행위에는 별다른 생각이 필요하지 않았다. 놈의 방식으로 오랫동안 훈련받은 개가 하는 복종과 같은 반사적인 움직임이었다.

“고마워.”

내 감사 인사를 받고는 마치 할 일을 마쳤다는 듯 김세한이 방을 나섰고, 방 안 곳곳 채워졌던 우디 향도 옅어졌다. 끽해야 한 달, 내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가 또 바뀌었다. 꽃병에 꽂힌 꽃은 시들 일이 없었고, 입에 넣을 단것은 방 곳곳에 굴러다녔다.

“내가 이상한 건지, 김세한이 이상한 건지.”

여느 연인과 같은 모습인데, 난 뭔가 공허한 느낌을 받았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김세한의 이 모든 행위가 정말 사랑인가, 아니면 어디선가 본 걸 흉내 낼 뿐인가. 가능성 있는 의심이었다. 애초에 놈을 사랑할 수 없는 인물로 만들었으니까.

하지만 나란 존재 자체가 이 소설의 변수여서 이렇다 확신하지는 못했다. 싫증을 잘 내는 김세한이 3년을 곁에 두고 있는 여자라니. 이미 있을 수 없는 일이기도 했고.

“이걸 또 어디에다 둬.”

오늘 그에게 받은 장신구들을 이미 꽉 차 있는 서랍장 안에 처박았다. 방 안 곳곳에 가득한 장미, 무엇보다 덩그러니 놓인 케이크를 바라보다 헛웃음을 흘렸다.

“가지고 왔으면 같이 먹고라도 가든가……. 하여간 뭘 따라 한 건지 몰라도 어설퍼.”

포크를 꽂으려던 손이 밖에서 들리는 미세한 파열음에 멈추었다. 소리가 들려온 문밖을 확인하려 조용히 방문을 열었을 땐, 문틈으로 무릎을 꿇은 채 숨을 몰아쉬는 테리와 김세한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

김세한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발소리를 죽인 채 테리 앞으로 갔다. 고개만 돌려 나를 확인한 테리는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마저도 괴로운 듯 구부정한 자세였다.

“뭐 필요하세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너.”

“네?”

“김세한한테 케이크를 받았는데 혼자 못 먹겠어.”

“남기시면…….”

“아니. 양이 많아서가 아니라 외로워서. 들어와서 같이 먹고 말동무나 좀 해. 그것도 네가 맡은 일이잖아.”

테리는 썩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테리에게도 호소보다는 명령이 더 잘 먹히는 모양이었다. 그는 김세한이 사라진 복도를 바라보다 순순히 내 방으로 따라 들어왔다.

“많이 아픈가 보네?”

“……네?”

“김세한이 너한테 해코지한 거 대충 다 봤으니까 거짓말 안 해도 돼.”

“…….”

이리저리 머리 굴리는 녀석이 빤히 보여 미리 거짓말을 차단했다. 그리고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김세한이 너한테 쓴 스킬. 뭐였는지 알겠어?”

“그냥 기본 스킬……. 푸른 용의 발톱이었습니다. 아, 제가 그냥 맞고 있었을 뿐이지 절대 보스가 저를 죽이려 했다거나, 다치게 했다거나…….”

테리는 묻지도 않은 것을 변명하듯 뱉어 놓았다. 다쳐 놓고도 김세한을 감싸는 테리가 영 못마땅했다. 주절거리는 그를 끌어다가 의자에 앉혔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나를 테리가 불안한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복부, 푸른 계열.”

중얼거리며 책에서 보았던 지식을 상기해 내었다.

“뭐…… 하시려고요?”

“뭐긴 뭐야. 치료지. 나 힐러잖아.”

나는 그의 복부 쪽에 손을 가져다 대었고, 테리는 뭐가 불안한 건지 눈을 질끈 감았다. 하얀 빛이 감돌던 복부 쪽에 푸른 빛이 섞여 들었다. 마침 어제 읽은 책에 일반 상처와 헌터의 스킬에 다친 상처는 치료법이 다르다고 적혀 있었다.

“됐다.”

“…….”

“어때?”

파르르 속눈썹을 떨며 슬그머니 눈을 뜬 테리는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다 다시 나를 올려다보았다. 놀란 듯 커진 눈이 빛을 담은 채 반짝였다.

“진짜 공부하신 겁니까?”

“어. 나도 실전은 처음이야. 진짜 안 아파?”

“와, 대단하십니다.”

내게 엄지손가락을 내민 테리 앞에서 공중에 어퍼컷을 날려 보였다. 배를 문지르는 놈의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게 좋으십니까?”

“그러게. 별것도 아닌데. 오랜만에 느껴 보는 성취감이라 그런가?”

차를 내리는 내 앞에서 녀석은 안절부절못한 채 기웃댔다.

“제가 하면 되는데 불편하게 왜 이러십니까.”

“앉아 있어. 미안해서 그러는 거니까.”

“…….”

“나 때문에 맞은 거잖아. 김세한한테.”

테리가 맞은 이유는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내가 여기 생활에 불만이 없도록, ‘나가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는 것도 테리의 역할이었으니까.

“미안해. 내가 생각이 짧았어. 나한테 네 안전도 걸려 있는 건데.”

“아닙니다. 사람 마음이 어떻게 생각한 대로 되겠습니까. 인형도 아니고……. 페르 님도 점점 연기랑 거짓말만 늘고 계시지 않습니까.”

“……넌 가끔 예리한 면이 있단 말이야.”

놈은 미묘한 웃음을 띤 채 내 옆에서 케이크를 잘라 그릇에 옮겨 담았다.

“제 입장이 좀 곤란하긴 합니다.”

“그렇지. 네 입장에선 내가…….”

테리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아뇨, 점점 제가 누구의 사람인지 좀 헷갈리거든요. 이래서 보스가 너무 친해지지 말라고 하셨나 봅니다.”

“풉, 그런 말도 했단 말이야?”

“페르 님이 없을 때의 모습을 몰라서 그러십니다. 질투도 얼마나 많으신지. 가끔 차라리 제가 여자였으면 좀 나았으려나 싶습니다.”

“아냐, 알아. 그놈이 질투 많은 건. 근데 그건 네가 여자여도 똑같았을걸.”

내가 이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건 이 방에 작은 창이 있기 때문이었다. 숨 막혀 죽지 않도록 작은 창이 되어 주는 ‘테리’의 존재가 날 미쳐 가지 않게 해 주는 심신 안정제나 다름없었다.

“넌 나랑 있으면서 안 답답해?”

“음. 솔직히 말씀드려도 됩니까?”

“답답하구나.”

“아무래도요. 제가 이런데…… 페르 님은 얼마나 더하실까 싶고. 그래서 안 되는 거 알면서도 책 구해다 드린 겁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엔 무언가 몰두할 게 꼭 필요하다 들었거든요.”

“그래, 고마워.”

나는 가뿐히 케이크 한 접시를 비워 내곤 포크를 내려놓았다.

“곧 너도 전장에 나가게 될 거야.”

내가 이곳에서 나가게 된다면, 테리는 더 이상 지켜야 할 존재가 없어진다. 그럼 내 소설에서처럼 김세한의 엄호를 맡게 될 테지.

“무슨 의미입니까. 설마 자살 같은 거 생각하고 계신 거 아니시죠?”

테리는 어느새 심각해진 얼굴로 되물었다. 앞뒤 다 잘라먹은 말에도 테리는 내 말의 의미를 어느 정도 간파한 듯했다. 자신이 전장에 나간다는 건 내가 여기 있는 한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뭐? 내가 자살하는 거랑 전장이랑 무슨 상관이야. 거기다 내가 뭐 때문에 이렇게 살고 있는데. 나처럼 생존에 대한 갈망이 강한 사람이 자살하겠어?”

고개를 저으며 어이없다는 투로 되물었다. 테리는 눈썹을 늘어뜨리곤 바쁘게 내 표정을 확인했다. 내 감정의 흐름과 생각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요했지만, 그 너머에선 나에 대한 진심 어린 걱정이 느껴졌다. 장난스레 어깨를 으쓱해 보이자 한숨을 뱉어 낸 입에선 안도감이 담겨 있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럼 그런 불안한 말을 왜 하십니까? 페르 님이 계시는 동안은 아마 계속 같이…….”

“계속 같이…… 평생?”

“…….”

꾹 입을 닫은 테리의 눈이 떨렸다. 내 물음은 여기서 계속 갇혀 지내는 삶을 가정한 것이었고, 테리는 그 생활에서의 답답함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죽지 않겠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난 여전히 살고 싶다. 살아서…… 언젠가 이곳을 벗어날 것이다.

“역시 테리는 다정해. 평생 곁에 있어 주겠다니.”

“아뇨. 그…….”

곤란해 보이는 얼굴이 안쓰러워 환히 웃으며 그의 말을 잘라 냈다.

“고마워.”

내가 김세한의 사랑만 받고 살 수 없는 인격체라는 걸 자각해 버릴 때쯤 이재현이 등장한 탓일까? 자유에 대한 갈망과 함께 시간이 지나 부식되었던 내 원래 계획이 떠올랐다. 난 돌아가야 할 현실이 있다. 그리고 그를 위한 방법은 적어도 이 밖에 있을 것이었다.

***

바로 그날 저녁이었다. 녀석에게 받은 케이크로 채워진 배가 다 꺼지기도 전에, 김세한은 저녁 식사를 나와 함께하고 싶다며 테리의 무전기를 울렸다.

“보스도 나름 신경 쓰고 계신 모양이네요.”

“그러게.”

나는 테리와 함께 곧장 김세한의 방으로 향했다.

“그럼…….”

“그래, 적당히 있다 올게.”

굳이 다툼을 만들지 말자. 스스로 다짐한 후 문을 열어젖혔을 땐, 흰색 식탁보 위로 화려하게 차려진 음식들과 김세한, 그리고 또 한 사람이 보였다. 문 열리는 소리 탓인지 김세한의 맞은편에 앉은 사람이 나를 돌아보았다.

이재현이었다.

“뭐…….”

김세한은 몸을 일으켜 문 앞에서 멍하니 굳어 버린 내게 다가왔다.

“같이 식사하는 거, 괜찮지?”

그는 내 손을 잡아끌어 자리에 앉히며 물었고, 이미 벌어진 판을 깰 수도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단둘만 있는 시간을 중요시하는 김세한의 제안이라고는 믿기 힘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재현이 무슨 말을 한 걸까. 혼란스러운 상황에 팽팽 돌아가기 시작한 머리와 달리 최대한 태연하고 침착하게 음식을 씹어 삼켰다.

“너 답답해하는 거 같아서. 바깥 얘기 듣고 싶을까 봐.”

“……응?”

“어제 그 몬스터 궁금해하는 거 같길래 내가 일부러 불렀어.”

그렇게 질투가 많은 놈이 이런 자리를 만들다니. 김세한이 나를 위하는 방법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이재현과 김세한 사이에서 식사라. 마음 같아서는 피하고만 싶었다.

“그래서, 처음 임무 수행한 기분은 어때?”

“좋습니다. A급 세 명을 잃은 것은 유감이지만요.”

음식을 어디론가 처넣기 바쁜 나를 사이에 두고, 어제 있던 사냥에 관한 이야기가 오갔다.

“단단한 껍질 때문에 무기는 들지 않는 몬스터였습니다. 대신 다른 스킬은 통하는 듯해…….”

피식. 이재현이 늘어놓는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모두 내 소설에 나열됐던 공략법이었다. 갑작스레 조용해진 걸 뒤늦게 눈치챈 내가 고개를 들었고, 김세한은 턱을 괸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손을 뻗어 내 입가를 쓸어내린 놈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이제야 웃네.”

그가 내게 품은 감정이 사랑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김세한의 머릿속에서 내가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내 얼굴을 쓸어내리는 김세한의 손이 목에 닿았을 때, 나는 슬쩍 몸을 뒤로 빼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만해. 손님도 있는데.”

놈의 눈동자가 쓱, 이재현을 쪽으로 움직였다. 조금 고민하는 듯하던 김세한은 내게서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어느새 비워진 자신의 와인 잔을 스스로 채웠다. 김세한이 마시는 와인은 매번 달랐지만 아주 드라이하고 쓰다는 공통점이 있었고, 때문에 단걸 좋아하는 나와는 취향이 겹치지 않았다. 그 쓴 와인을 물 마시듯 한 번 들이켠 그는 이재현을 향해 미소 지었다.

“내가 듣고 싶은 건 그거야.”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어제 몬스터를 잡은 스킬, 어떻게 발동시켰나?”

“…….”

“방법은 아직 세상엔 알려지지 않은 것인데 말이야.”

고기를 썰던 이재현의 손이 멈추었다. 스킬을 발동시키는 방법은 이미 알려진 것을 제외한다면 알 방도가 없었다. 따라서 고급 스킬의 경우는 조직의 특수한 자산인 셈이었다. 더군다나 이번 몬스터를 잡을 수 있던 스킬은 김세한도 익힌 지 얼마 되지 않는 ‘사신의 작살’이었으니 알려진 바가 없는 것이 당연했다. 정보의 우위를 갖고 있다는 건, 숨기려 해도 티가 나기 마련이다. 나 또한 그랬고, 지금의 이재현도 마찬가지이다.

스킬은 얻고자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경험치를 쌓다 보면 처음 각성했을 때처럼 어느샌가 체득하는 것이었다. 김세한의 경험을 토대로 공식화한 스킬 발동 조건이 새어 나간 게 아니라면 이재현이 그걸 얻은 방법은 뻔했다. 김세한이 밟았던 사냥 루트를 똑같이 밟은 것이다. 물론 그게 가능하다는 건 놈도 꽤 괜찮은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의 방증이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이재현은 눈을 내리깐 채 덤덤하게 답했다.

“……운이 좋았다라.”

허공을 떠돌던 김세한의 시선이 잠시 내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묘한 미소를 띤 김세한의 얼굴이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운이 좋았다. 우연이다. 세상엔 참 영화 같은 일이 많아.”

어딘가 뼈가 있는 말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 상황은 내가 궁지에 몰렸을 때 겪었던 패턴과 비슷했다.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쿼터, 난 자네 같은 사람을 보면 실험해 보고 싶어져.”

‘실험’. 익숙한 느낌의 단어에 언젠가의 기억들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 네 말대로 우연인지 아닌지 ‘실험’하고 싶어졌어.

아, 순간 나오려는 외마디를 억눌렀다. 상기하고 나니 이 상황은 분위기, 대화 패턴, 김세한의 묘한 눈빛까지 그때와 비슷했다. 실험이라는 이름 아래 죽음의 문 앞까지 밀렸던 그날을 떠올리자 반사적으로 아랫배가 아프고 손바닥이 땀으로 젖어 들었다.

“……어떤 실험 말입니까.”

“그 좋은 운이 과연 어디까지 갈지 말이야.”

김세한은 와인 잔을 돌리며 말했다. 붉은 와인이 와인 잔을 벗어날 듯 아슬하고 높게 소용돌이쳤다. 자신의 접시에 내리깔려 있던 이재현의 시선이 김세한에게 향했다.

“어차피 자네는 S급 아닌가. 서로 대련 상대가 되어 주면 좋을 것 같지 않아?”

그 말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말인지 이곳에 있는 나도, 이재현도 알고 있었다. 김세한은 이 세계의 선택을 받은 인물이었으니 헌터 중엔 적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걸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본인이었다. 따라서 놈이 하려는 일은 호기심에 개미를 태워 죽이는 일에 불과했다.

“세한아.”

토해 내듯 놈의 이름을 뱉었다. 올라간 입꼬리, 흥밋거리를 찾아 들떠 있는 얼굴을 한 김세한이 나를 마주했다.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은 채 그와 눈을 맞추는 데에 온 에너지를 쏟았다. 이재현의 영향일까. 요즘 들어 3년 전과 비슷한 상황이 펼쳐지는 것만 같다.

“하지 마.”

그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그 실험의 대상이 나에게서 이재현으로 옮겨 간 것뿐이었다.

“왜?”

“너랑 상대 안 될 거 알잖아.”

그는 내 말에 눈썹을 까딱였다. 약간의 미소를 지은 김세한의 눈이 데구루루 이재현에게 향했다가 돌아온다.

“그러니까 넌 쟬 걱정하는 건가?”

이미 이재현의 존재는 가볍게 무시하고 있는 듯한 물음이었다.

“기껏 들어온 고급 인력인데. 죽일 생각인 거 같아서 아까울 뿐이야.”

“흠……. 고마운 조언이긴 한데.”

학습된 공포는 무섭다. 순식간에 서늘해지는 주변 공기가 날을 세운 채 내 피부를 파고들었다. 놈에게 이런 기운이 돌 때면 죽음이 코앞에 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자기야.”

낮게 깔린 목소리. 평소엔 잘 부르지 않는 호칭이었다. 또, 이런 목소리로 부를 만한 느낌의 단어도 아니었다.

“이유가 뭐든 내 앞에서 다른 사람 걱정은 하지 마.”

“…….”

“배 아프잖아.”

내가 놈의 감정을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이런 것이었다. 나라면 사랑하는 사람을 이렇게 짓누르지는 않을 테니까. 의지와는 달리 놈의 냉기 서린 눈에 반사적으로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보스가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평소와 다름없는 이재현의 딱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김세한의 시선이 내게서 거두어졌다. 나이프를 내려놓은 이재현이 냅킨으로 입을 가볍게 닦아 내었다. 식사를 마쳤다는 의미였다.

“긍정적인 답이라 좋군.”

김세한은 묘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자리를 옮길까?”

“네, 그러시죠.”

동시에 의자를 미는 소리가 방을 울렸다. 나는 요동치는 심장을 진정시키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난 두 사람을 따라 몸을 일으켰다.

“왜? 아직 음식이 남았는데.”

나를 지나치려던 김세한이 일어난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여느 때와 다름없는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 그러니까 나도 아무렇지 않아야 했다. 나는 반절도 먹지 못한 내 접시 위의 스테이크를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네가 준 케이크 먹느라 배는 이미 차 있었어. 그만 먹을래.”

“아, 그런가.”

앞장선 이재현이 먼저 문을 열고 우리를 기다리듯 서 있었다. 김세한이 먼저 문을 나서고, 나는 잠시나마 이재현과 눈을 맞췄다. 작게 어깨를 들썩인 이재현은 내게 나가지 않느냐고 묻는 듯했다.

‘이놈은 지금 이 상황이 안 무서운 건가?’

역시 속을 알 수 없는 녀석이었다. 김세한의 곁에 비정상적일 정도로 딱딱하게 서 있던 테리가 방에서 나온 나를 발견하고 쪼르르 달려왔다. 이재현과 김세한의 짧은 대화가 오가고, 그들을 살피던 테리는 자세를 낮춰 귓속말했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손, 떨고 계시는데.”

테리의 말에 아직도 미세한 떨림이 남아 있는 손을 뒤로 감추었다.

“방으로 가자, 테리.”

이제 뭐든 상관없으니 이곳을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아, 잠깐.”

이재현과 함께 나와는 반대 방향으로 향하던 김세한이 나를 불러 세웠다.

“내 생각이 짧았다.”

“뭐?”

“너도 같이 가자. 다른 층 구경해 본 적 없잖아.”

이재현도 이재현이지만, 대체 무슨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는 건 김세한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 점이 ‘또라이’라는 설정의 김세한다운 것이기도 했다. 슬쩍 내 표정을 살핀 테리가 대신 입을 열었다.

“페르 님이 오늘은…….”

“아니, 연인인 내가 더 잘 알지. 답답하다고 했거든. 하긴 대부분 방에서만 지내는데 당연한 거지.”

테리의 입을 닫게 만드는 말이었다. 여기서 더 끼어들었다간 김세한의 심기를 건드릴 테니까. 테리를 더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갈래.”

“잘 생각했어. 아, 테리. 너도 동행해.”

갑자기 불린 자신의 이름에 테리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놈의 얼굴엔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지만, 곧 그들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랍니까?”

소곤소곤, 테리는 내게만 들릴 목소리로 물어 왔다.

“저 신입은 왜 또 같이 있고, 보스는 왜 저렇게 신나 계신 거냐고요.”

함께했던 시간이 길어서인지 테리도 단번에 김세한의 작은 흥분을 읽어 내었다. 테리에게 답을 주고 싶었지만, 모든 이야기를 짧게 요약해 낼 자신이 없어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옆에 두고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 주차장으로 갔던 3년 전을 제외한다면, 처음으로 다른 층에 가 보는 것이었다. 언뜻 흘려듣기만 했을 뿐, 나는 이 건물의 구조에 관해 정확히 알지 못했다.

[김세한의 방은 꼭대기 층. 밑층은 훈련용 던전과 연구소, 의료실, 조직원들의 숙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건물의 구조를 그 한 문장으로 정리했던 나를 원망할 뿐이었다. 김세한과 내가 지내는 곳은 꼭대기 층. 그리고 우리가 향한 곳은 그보다 한 층 아래인 곳이었다.

‘다른 걸 잘 모르겠네.’

언뜻 보기에 위층과 별다른 바 없는 복도였다. 김세한은 층에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커다란 철문 앞에 멈추어 섰다. 흡사 냉동 창고 입구를 연상케 하는 서늘하고 무거운 느낌의 문이었다.

“아……. 제발.”

테리가 뭔가 불안한 듯한 목소리를 내었다. 김세한이 보안 장치로 보이는 기기의 초록색 화면에 손을 올리자 거대한 철문이 징-소리를 내며 양옆으로 벌어져 열렸다.

안쪽엔 검은 정장 차림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 모두의 눈은 갑자기 열린 문 쪽, 즉 이쪽을 향해 있었다. 조직원 대부분과는 안면이 없는 나도 모두 아는 인사들이었다. ‘김세한의 무기’로 불리는 S급들이자 김세한만큼은 아니어도 내가 공들여 만든 인물들이니까.

책을 들고 있는 사람, 코를 골며 자는 사람, 귤을 까먹고 있는 사람도 보였다. 툭-입에 물고 있던 귤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그건 그가 얼마나 당황했는지를 보여 줬다. 아주 잠깐 시간이 멈춘 듯한 정적이 흘렀다.

“오셨습니까! 보스.”

그것도 잠시, 모두가 동시에 각 잡힌 인사를 건넸다.

“뭐, 뭐…… 뭐야!! 억!”

그 소리에 놀라 발작하듯 껑충 뛰며 잠에서 깬 남자도 동료에게 목덜미를 잡혀 상황 파악도 하지 못한 채 일단은 허리를 숙였다. 선망의 대상이 되는 S급들이라기엔 다소 허술해 보였다. 테리는 이마를 짚으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제야 테리가 불안해하던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벽에 걸린 작은 다트판, 이곳저곳 널브러진 만화책. 한쪽에 과자, 차, 커피 같은 주전부리가 준비되어 있는 걸로 보아 아무래도 S급들이 모여 쉬는 공간인 듯 보였다.

“오……. 오신다고 미리 언질 주셨으면…….”

“아냐, 쉬는 공간에서까지 뭘. 편하게들 있어.”

전혀 편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사람들의 시선은 김세한 옆의 이재현으로 향했다가 뒤따라 들어온 내게로 향했다.

“하하, 페르 님까지. 이게 대체…….”

그리고 그 모든 의문이 담긴 눈동자는 마지막으로 내 옆에 서 있는 테리에게 향했다.

“어떻게 된 일일까아요?”

모두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눈을 하고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

하긴 누가 봐도 골 때리는 조합이긴 했다. 보스, 갓 들어온 S급 신입, 이 층에선 볼 일 없었던 나까지. 테리는 자신에게 향한 따가운 시선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흘러넘치기 일보 직전인 쓰레기통을 가리키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아마 서로 책임을 묻는 소리 없는 다툼이 오가고 있는 듯했다.

방 안을 살피던 내 눈이 작은 모니터 화면에 멈추었다. 익숙한 장소. 내 방 앞 복도를 비추는 화면이었다. 지금까지 테리가 내가 나오려고 할 때면 불쑥 튀어나왔던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미 예상하던 일이었지만, 실제로 감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니 묘한 느낌이 들었다.

“네 자리는 보통 여기겠구나, 테리.”

맞은편 S급들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이고 있던 테리가 내 목소리에 모니터 쪽을 돌아보곤 얼굴을 굳혔다.

“아……. 네.”

불편함을 주려는 것은 아니었는데, 놈은 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숙였다. 테리가 아니더라도 내가 방을 나오는 걸 다수가 볼 수 있다는 것. 그건 탈출할 가능성이 거의 없음을 의미했다.

“대련실을 이용하고 싶은데. 지금 누가 쓰고 있나?”

“아. 곧장 비워 드리겠습니다.”

김세한의 한마디에 어둡던 방이 환해졌고, 정면의 벽인 줄만 알았던 곳이 투명해졌다. 김세한의 용건을 파악한 S급들이 양옆으로 비켜서자 어느새 완전히 안이 들여다보이는 통유리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왼쪽으로는 입구로 보이는 두꺼운 철문이 자리 잡고 있어 마치 취조실이나 녹음실을 연상케 하는 공간이었다.

유리창 너머로는 대련 중인 듯하던 두 사람이 숨을 몰아쉬다 갑자기 보이게 된 바깥 상황에 급히 허리를 숙였다. 곧 별다른 말이 오가지 않았음에도 대련실은 비워졌다. 물론 밖으로 나와 뒤늦게 나를 발견한 두 사람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테리를 소리 없이 갈궜다.

마침내 김세한과 이재현이 대련실에 들어가 검을 나누어 들었다. 마주 보고 선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이렇게까지 결과가 정해진 싸움이 또 어디 있을까.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이재현의 실력이 궁금하기도 했다.

‘새로운 몬스터를 혼자 잡았다면, 김세한과 같은 공격형 헌터라는 거겠지.’

나는 두꺼워 보이는 유리창 너머, 평소와 같은 무표정으로 대련용 검을 살피고 있는 이재현을 눈에 담았다. 착각일까. 그 무표정에선 약간의 호기심이 보였다.

‘정말 안 무서운 건가?’

김세한과 이재현이 안으로 들어갔음에도 방 안은 불편한 긴장감으로 고요했다. 최고참이자 사실상 S급 통솔자인 론은 아까까지 읽던 책의 표지를 의미 없이 매만지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갑작스러운 김세한의 등장에도 그나마 가장 덤덤해 보였던 그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건 그가 대충 이 상황을 이해했음을 뜻했다.

“하아, 저놈은 어쩌다 보스한테 걸려서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에선 걱정과 체념이 동시에 느껴졌다. 아주 작은 한마디였음에도 방 안 이곳저곳에서 S급들의 한숨이 파도 타듯 이어졌다. 아마 동의한다는 말을 대신하는 것 같았다.

달칵—

론이 버튼을 누르자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투명해졌던 유리창이 또다시 뿌옇게 불투명해지고 있었다. 그때 유리창 너머로 김세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그냥 놔둬.”

“예?”

“보이게 두라고.”

반쯤 불투명했던 유리가 다시 투명해지자 김세한과 눈이 마주쳤다. 즉, 나를 의식한 명령이라는 것이었다. 곧이어 검 부딪치는 소리가 게임의 시작을 알렸다. 나를 의식한 것인지, 아니면 둘의 결투에 빠져들어선지 사람들은 조용했다. 어색함에 입술을 물어뜯으며 테리의 옷깃을 당겨 물었다.

“뭔 대련실이 이런 곳에 있어? 불편하게.”

“원래 대련이라는 게 S급한테나 필요한 거지 않습니까. 저희는 큰일이 아니라면 출동할 일이 별로 없다 보니…… 몸이 굳는 걸 방지하기 위해 대련을 자주 하려 합니다. 무엇보다 더 발전하려면 우리끼리 싸우는 수밖에 없거든요.”

지금까지 나온 몬스터를 모두 잡을 수 있는 등급이란, 가장 높지만 발전이 없는 등급이기도 했다.

“너희끼리 힐러도 없이 싸워도 되는 거야? 다칠 거 같은데.”

나는 세게 벽에 부딪힌 듯한 이재현을 보며 물었다.

“원래는 적당히 ‘다치지 않게’ 가 원칙이지만…….”

어깨를 다친 듯한 이재현의 손에서 검이 떨어지자 김세한은 스스로 검을 놓았다. 벽 쪽으로 붙어 있는 이재현에게서 두어 발 물러선 김세한을 보며 생각했다.

‘끝난 건가?’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릴 때쯤, 내 생각과 달리 곳곳에선 혀 차는 소리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그른 거 같네요.”

테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고, 이어 유리창 너머에서 김세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너한테 보고 싶은 건 다른 건데. 그거 꺼내 봐.”

흥분한 듯한 목소리에는 미세한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김세한의 손에선 스멀스멀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김세한의 흥분도로 보아 사고 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설마 여기서 저걸 꺼내 들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사신의 작살.

목표를 사살하는 데에 집중한 스킬이라 주변 파장은 크지 않겠지만, 대상은 확실히 죽는다. 특히나 저렇게 가까운 거리라면 빗나갈 일도 없다.

“진짜…… 죽일 생각인 거야.”

숨 막히도록 조용한 공간에 내 목소리가 울린 순간.

“뭐……. 그렇게 보고 싶으시다면요.”

이재현의 손에서도 검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맞다. 저놈도 미친놈이었는데.’

김세한의 눈이 커지고, 입가엔 더 큰 미소가 자리 잡았다.

“김세한!”

쾅-!

손 쓸 틈도 없이 들려온 갑작스러운 폭음에 내 목소리가 묻혔다. 대련실 안이 온통 검은 연기로 가득 차 상황을 알 수 없었다. S급들 또한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쟤 지금 보스랑 똑같은 스킬 쓴 거 맞지?”

“보스…… 제발. 시체 치우는 건 사양이라고요.”

“신입, 그 거리였으면 장난 아니고 진짜 죽었겠는데.”

아무도 김세한의 패배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저 미친놈.”

옆에서 나지막이 들려온 욕설은 테리의 것이었다. 테리가 김세한을 미친놈이라 칭할 리 없었다. 그렇다는 건 이재현을 그렇게 불렀다는 건데……

나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왜, 넌 뭔가 봤어?”

“제가 본 게 맞다면요. 신입이 먼저 쏜 것처럼 보여서요.”

검은 연기가 서서히 가라앉았고, 흐릿하게 안쪽 상황이 보였다. 이재현은 벽에 기대앉아 있는 모양새였고, 김세한 또한 그대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바닥에 흥건한 피가 아까의 상황을 간접적으로나마 보여 주었다. 이재현은 고통스러운 듯 고개를 젖힌 채 자신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바닥에 웅덩이를 만든 피의 근원지는 이재현의 어깨였다. 헛웃음과 안도의 한숨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살아는 있네. 용케도.’

하지만 모두의 시선은 이재현이 아니라 김세한에게 향해 있었다. 김세한의 얼굴에 난, 길게 늘어진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 다 일부러 빗맞혔다는 건가? 아니면 피한 건가?’

뚝-뚝한 방울, 한 방울 바닥을 적시는 김세한의 피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놈이 다친다는 건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김세한은 피가 새어 나오는 자신의 볼을 쓸어내리듯 닦아 냈다.

“더…… 할 수 있어?”

김세한은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누가 봐도 전투 불능인 이재현에게 물었다. 이재현은 입술을 깨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더 하면 너…… 역시 죽겠지.”

“…….”

김세한이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역시 그만할래. 너 죽이면 미움받을 거 같아.”

나를 신경 쓰는 듯한 놈의 말에 몸이 얼어붙었고, 가슴속이 울렁거렸다.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이상한 감정이었다. 김세한의 말은 사실상 상황 종료라는 뜻이었기에 잠시 적막이 돌던 주변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지금 당장 의료팀 호출해. 보스랑…… 지금 당장 간당간당한 놈도 있으니까 피 많이 챙겨 오라고 하고.”

“보스,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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