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절 없애기 두려우신 거 아니십니까. 제가 없어지면 허구의 세상에 혼자 남겨질까 봐서.”
버스 사고 후, 세상이 내가 쓴 소설로 바뀌었을 때부터 내가 아는, 소설 속 인물이 아닌 인물은 둘뿐이었다. 친구인 채연과 이재현. 어쩌면 놈의 말대로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채연을 잃었을 때도 혼자 남았다는 허무함에 잠시 넘어질 뻔했으니까. 놈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건 이재현이기 이전에 하나 남은 ‘진실’이라는 생각 때문일까.
“그래서 너. 나한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머릿속이 많이 복잡해 보이셔서 도와드리려는 것뿐입니다. 여기 와서 지켜본 당신은 꽤 고립돼어 보여서요. 본인도 느끼고 있는 거 같은데……. 안 그렇습니까?”
가늘어진 놈의 눈은 바늘처럼 내 머릿속 엉킨 실타래 중 한 가닥을 끄집어내었다.
“내가 여기에 안 어울린다고 말하는 건가?”
“그건 저번에도 말해서 더 얘기해 줄 필요는 없는 것 같고, 이건 좀 다른 문제입니다. 당신답지 않게 김세한한테 너무 말려들고 있다고 생각돼서요.”
“쉽게 말하지 마. 우리 사이엔 네가 모르는 일이 많아. 저번에 네가 물었지? 왜 여기 있는 거냐고.”
“살려고.”
놈은 이전의 내 대답을 기억하고 있다는 듯 말을 가로챘다.
“그래. 그러니까 이 자리를 선택한 건 나야!”
“선택은 당신이 했더라도. 아니, 그렇게 보였더라도. 이런 걸 원했던 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에 갇혀서 창밖만 내다보는 게 전부인 일상. 그래서 가끔 죽게 되더라도 나가고 싶은 충동에 휩싸…….”
“테리한테 들은 거야?”
한동안 위태로웠던 내 머릿속을 꿰뚫은 말에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당신을 보면 누구나 유추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물었던 겁니다. 그걸 감내하는 이유가 혹여 사랑일까 봐. 그리고 아니라는 결론이 나왔을 땐 알려 드리고 싶었습니다.”
“뭘?”
이를 꽉 문 채 이재현의 대답을 기다렸다. 놈은 내 손목을 들어 올려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새하얗게 창백한 손바닥엔 이재현의 검붉은 피가 얼룩처럼 남아 있었다.
“절 치료하는 게 김세한을 배반하는 일이라고 들었을 땐 그저 질투 때문인 줄 알았는데…… 더 나아가 이 힘을 쓰는 것 자체를 싫어하더군요.”
“……맞아.”
“왜일까. 이유를 생각해 본 적 없으십니까.”
-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가 좋았어.
김세한의 목소리가 또 한 번 머리를 울렸다.
“글쎄……. 쓸데없다고 생각해서인가?”
“당신이 평생 무력하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는 상태로 머물러 주길 바라서요. 힘이 생기면 언제든 날아갈 테니.”
“…….”
“아무리 ‘새’로 태어났더라도 날갯짓 한 번 해 보지 못하면 날 수 없습니다.”
놈은 나를 새로 비유하고 있었다. 하긴 내 모양새도 새장 안에 갇힌 새와 별다른 바 없었다. 내 표정을 살피듯 눈을 가늘게 뜬 이재현은 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장담컨대. 이런 날갯짓이 몇 번 더 계속되면, 언젠가 날개를 부러뜨리는 날이 올 겁니다.”
“…….”
내 손목을 쥔 이재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발이 다 부러지든, 족쇄를 차게 되든, 당신은 언젠가 아예 날지 못하게 될 겁니다. 그때도 애정이라는 말 아래 행복할 수 있다고 한다면 더 이상의 말은 아끼겠습니다.”
쿡. 쿡. 바늘을 닮은 놈의 말은 내가 겪고 있는 마음속 갈등을 잘도 끄집어냈다. 하지만 이재현 덕에 내 문제를 더 잘 알게 됐다고 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다.
“날 걱정해 주는 거야? 고맙네. 덕분에 내 위치를 더 객관적으로 보게 된 거 같아.”
나는 들어 올려졌던 손을 그대로 뻗어 덜 아문 상처를 치료했다.
“이건 보답이야. 나한테 이런 조언 해 주려고 다치기까지 했다니까.”
이재현은 멀쩡해진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본인도 재능 있다고 느끼시지 않습니까? 나름 산전수전 다 겪었다는 S급들이 전문적으로 일한다는 힐러가 아니라 페르 님을 신뢰하는 걸 보면.”
“…….”
“김세한도 그걸 알아서 더 경계하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이 정도 실력이면 밖에서도 잘나갈 겁니다.”
확신을 담은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 길을 꿈꾸고는 있지만, 요즘 따라 더 꿈처럼 느껴지는 게 지금 내가 처한 현실이었다.
“나한테 여길 벗어나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그럴 마음이 있다면요. 만약 기회가 없는 것이라면, 제가 만들 바람에 탑승하십시오.”
나는 비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김세한을 죽이겠다는 그 계획? 글쎄. 잘될 것 같지 않은데. 말했잖아. 그놈은 내가 잘 알아. 절대 안 죽어.”
“김세한 대신 총을 맞았다. 뭐 느끼시는 거 없습니까?”
“뭐. 네가 짠 판에 김세한이 속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내 추측이 틀렸다는 듯 이재현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새로운 몬스터와 대치 중인 상황에 적대 감정을 가진 헌터들의 습격을 받는다. 그런 장면은 적잖게 있었고, 그 상황이 문제가 되지 않았던 소설 속에선 김세한의 능력도 한몫했지만, 또 한 사람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 질문에 한 사람의 얼굴이 스쳤다.
“……테리.”
내 시선이 테리가 서 있을 문 쪽으로 향했다. 소설 속에서 테리가 맡은 역할은 김세한의 엄호였다.
“제가 말씀드렸던 거. 이걸로 증명된 것 같은데요. 당신과 제가 만든 작은 변화는 이야기를 뒤집을 수 있습니다.”
이재현은 한 걸음 더 내게로 다가왔다. 날 내려다보는 눈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김세한을 엄호해야 할 테리가 네 옆에 있어서 김세한이 다칠 뻔했어. 넌 이미 메인 스토리에 균열을 가져오고 있는 거야.”
또다시, 놈은 내 앞에 쿼터가 아닌 이재현으로서 서서.
“즉, 김세한은 죽을 수도 있어.”
이 소설이 완전히 뒤집힐 말을 무덤덤하게 했다. 순간 요동치는 가슴에 하나 깨달은 것이 있다. 나는 김세한이 죽길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면 나는 그를…….
똑똑-
“다 끝나셨습니까?”
노크 소리와 함께 들려온 테리의 목소리에 황급히 이재현을 밀어냈다. 놈은 순순히 물러나 피로 젖은 와이셔츠의 단추를 채웠다.
“그래. 들어와.”
테리의 조심스럽던 목소리와 달리 문이 세게 열렸고, 문 너머에는 언제 왔을지 모를 김세한이 서 있었다. 조금 거친 듯한 숨, 사냥의 흥분이 아직 가시지 않은 듯한 눈이 그대로 나를 담아냈다. 동물적인 감각일까, 두려움에 뒤로 물러나려는 몸을 간신히 억눌렀다.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이재현은 얼어붙은 나를 바라보다 김세한에게 고개를 숙였다. 김세한의 뒤로 보이는 테리는 나오려는 한숨을 억누르는 듯 보였다.
“보스!”
달려온 듯 보이는 S급들의 숨도 거칠었다. 특히 나와 눈이 마주친 론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마 이 일의 책임은 론과 테리가 지게 될 것이었다.
뚜벅뚜벅—
흐르는 정적 속, 방 안으로 들어선 김세한의 구두 소리만이 차갑게 공간을 울렸다.
“언제부터…… 나만 빼고 놀았던 거야, 다들.”
화를 참고 있는 듯한 목소리였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김세한은 모르게 진행된 일이었던 모양이다. 내가 입을 열어야 했다. 추궁이 계속되면 눈앞에서 테리나 론의 잘린 목을 보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내 힘을 쓰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놈에게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윽-”
그때였다. 외마디의 신음과 함께 이재현이 배를 감싼 채 바닥으로 쓰러졌다. 혹시라도 김세한의 짓일까 싶어 눈을 돌렸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는 건, 이놈…….
“내, 내가 실수했나 봐.”
놈의 장단에 맞춰 주기로 했다. 나는 엎어진 이재현에게서 두어 걸음 물러서며 테리를 바라보았다.
“의료팀, 빨리 데려가 줘.”
김세한의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던 테리가 간신히 입을 뗐다.
“어떻게 할까요, 보스.”
나를 미묘한 눈으로 훑어 내리던 김세한이 문 옆쪽의 벽에 몸을 기대며 입을 열었다.
“데려가.”
김세한의 허락에 방 안으로 의료팀이 뛰어 들어왔다. 이재현은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들것에 실려 사라졌다. 어느샌가 방 안으로 들어온 론은 김세한의 앞에 서서 고개를 숙였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이번 일의 책임은 모두 저에게 있습니다. 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론의 셔츠에도 사람의 것인지 몬스터의 것인지 모를 피가 묻어 있었다. 눈으로 확인하진 못했지만, 그가 있던 전장의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체감할 수 있었다.
그런 론의 사죄에도 김세한의 고개는 여전히 돌아가지 않고 나를 향했다.
“벌이라. 네 목을 쳐도 괜찮다는 말인가?”
무심한 말투였다. 나한테 말하는 것처럼 들려, 론과 함께 침을 삼켰다.
“……원하신다면요.”
약간의 공백 이후 들려온 론의 대답에 김세한의 눈동자가 잠시 내게서 떨어졌다.
“아니지. 동료를 살리겠단 마음에서 그런 거니…….”
김세한의 손에 푸른 빛이 떠올랐고, 곧 검이 들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툭-론의 손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손목 정도로 하지.”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귀가 먹먹해지는 감각, 그 숨 막히는 느낌이 목을 짓누를 때쯤 주르륵-쏟아져 내린 피가 바닥을 적시기 시작했고, 론의 고통 어린 신음이 방을 가득 채웠다. 누구 하나 움직이는 사람 없이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김세한의 눈이 조금 휘어졌다. 마치 내게 경고하듯이.
‘아 맞다. 김세한은 원래 이런 놈이었지.’
애정이라는 말에 눈이 멀어 있지도 않은 ‘연인 김세한’을 만들어 정을 품었던 걸지도 모른다.
“여기 있는 모두가 들었으면 좋겠군. 너희가 우선해야 하는 건 쓸데없는 감정이 아니라 명령 이행과 복종이야.”
쿵쿵-쿵쿵—
울리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망설임 없이 론에게 손을 뻗자 김세한의 눈이 다시 살기를 뿜어냈다. 투두둑-떨어지는 피에 닿으려던 내 손이 론에게 밀려난다.
“괜찮습니다.”
론은 고통스러운 듯 붉게 충혈된 눈을 하고 내게 말했다. 그건 ‘고통스럽지 않다.’라는 말이 아니라 ‘제발 내게서 떨어져.’라는 말이었다.
“이제…… 나가 보아도 괜찮겠습니까?”
꾹꾹 고통과 감정을 눌러 담은 론의 목소리에 김세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깊이 숙인 론은 방을 나섰다. 그의 걸음마다 꽉 깨문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신음이 들려왔다.
“…….”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서 있는 테리의 눈에는 눈물이 고인 듯 보였다. 그는 당사자보다 고통스러워 보이는 얼굴을 한 채 론의 뒤를 따랐다. 탁-방문이 닫히고, 몰렸던 인파가 문 너머로 사라지자 남은 건 나와 김세한, 그리고 덩그러니 놓인 론의 손뿐이었다. 순식간에 피 칠갑을 하게 된 바닥, 흉터 가득한 론의 손을 보고 있자니 나오는 건 헛웃음뿐이었다. 나는 삐딱하게 벽에 기대 있는 김세한의 앞에 서서 말했다.
“론은…… 너를 위해 일하던 사람이야.”
“나를 속인 게, 나를 위한 건가?”
차가운 목소리였다. 김세한은 문 쪽에 시선을 던지며 말을 이었다.
“다 맘에 안 들어. 저놈들도, 너도.”
김세한의 눈이 다시 나를 담아냈고, 그 말에 내가 다 망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김세한에게 S급들은 거슬리는 존재가 아니었는데, 내가 끼어들면서 서로에 대한 감정이 꼬이고 있었다.
“론은 자기 잘못이라고 했지만 내 잘못이야. 내가 데려오라고 했어.”
“……그래, 네 잘못이지. 내가 이렇게 굴 걸 알면서 일을 벌인 거니까.”
날 내려다보는 놈과 눈이 마주쳤다. 두렵고, 허탈하고, 목이 막혀 왔다. 엉킨 실을 풀어 보려고 노력했다. 놈도 그랬고, 나도 그랬다. 근데 이제 알겠다. 이 단단히 엉킨 복잡한 감정의 실을 풀기엔 우린 이미 늦었다는걸.
“미안. 잊고 있었어. 네가 이런 놈인 거.”
“사과치곤 거슬리네.”
“……난 요즘 자꾸 우리 시작이 떠올라. 내가 널 두려워하기 시작했던 날, 난 살기 위해서 너한테 매달렸고, 넌 날 살려 줬잖아.”
풀 수 없다면, 잘라 버릴 수밖에 없다.
“근데 어쩌지? 지금도 네가 무서운데, 나, 지금은 너한테 매달리고 싶지 않아.”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의도치 않게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김세한은 항상 나를 몰아세운다. 절벽에 몰릴 때면 평소엔 못 한 말이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거기엔 그 말 이후에 대한 걱정이나 고민은 들어 있지 않다. 언제 떨어질지 모르니 후회하기 전에 품어 왔던 진심을 말할 뿐이다.
“우리 이제 그만하자.”
놈의 ‘사랑해’라는 말이 평안을 줘서, 노력하는 듯 보이는 게 내심 고마워서, 반복되는 일상이 지루하면서도 깨뜨리기 두려워서. 언젠가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도 온갖 핑계로 외면해 온 바람이었다. 이재현과의 대화가 내 열망을 더욱 뚜렷이 해 줬는지도 모르겠다.
‘김세한의 곁을 벗어나고 싶다.’
그는 덤덤히 물었다.
“무슨 뜻이야?”
나는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 냈다. 막상 뱉고 나니 후련했다. 동시에 떨지 않고 말할 용기가 생긴 듯했다.
“나 때문에 누가 다칠까 봐 맘 졸이기 싫어졌어.”
“네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그럴 일 없어.”
“응. 그런데 가만있는 것도 싫어졌어.”
놈의 손이 늘 그렇듯 내 얼굴을 쓸어내렸다.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손은 평소와 달리 거칠게 느껴졌다.
“내 말을 듣기 싫다는 건, 이제 내가 필요 없다 이건가?”
“…….”
김세한의 엄지손가락이 내 아랫입술을 뭉개듯 문질렀다.
“내가 싫어하는 말 뭔지 알면서. 일부러 계속 하는 거야?”
“……마음대로 생각해.”
놈의 눈을 피하듯 고개를 돌리자 김세한의 손도 떨어졌다. 그러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언젠가 한 번은 이럴 거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이렇게 빠를 줄 몰랐네.”
“…….”
“그렇게 네가 나가고 싶다는데……. 이제 내가 필요 없다는데 말릴 이유도 없지.”
김세한의 말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놈은 날 내려다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날…… 내보내 준다고?”
“그래. 가.”
내 앞에 서 있는 게 김세한이 맞나 싶을 정도로 무덤덤한 말투였다. 좀 더 감정을 소모할 줄 알았는데, 놈은 의외로 쉽게 물러나 주었다. 내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서자 벽에 기댔던 놈의 몸도 바로 세워졌다.
“밖으로 가는 길도 모르겠네. 하긴 여기 와서 다른 곳은 가 본 적이 없으니까.”
“……응.”
“가자. 데려다줄게.”
말투, 눈빛, 표정. 모든 게 이상할 정도로 덤덤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손목을 낚아챈 순간, 그가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김세한은 내 손목을 잡은 채 휘적휘적 걷기 시작했다. 즉, 나를 배려하지 않은 보폭이었다.
쾅-!
김세한의 스킬에 닫혀 있던 방문이 폭발하듯 날아갔다. 굉음에 놀란 몸이 잠시 움츠러들었지만, 김세한의 걸음은 멈추지 않아 나는 거의 끌려가듯 발을 옮겼다. 부서진 문의 잔해들이 발에 밟혔고, 복도에선 상황을 보고 있던 듯한 S급들과 의료팀이 보였다.
벽에 기대앉아 있는 이재현, 론을 둘러싼 의료팀, 그 옆에서 얼굴을 감싼 테리가 차례대로 내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선뜻 말을 뱉지 못했다. 그건 론에게 벌어진 일이 여기 있던 모두에게 충격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의 증거이기도 했다. 어색할 정도의 침묵이 흐르는 분위기 속에서 김세한은 태연히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어디 가시는…… 겁니까?”
어느샌가 다가온 테리는 김세한에게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 당장에라도 목이 날아갈 각오를 한 물음이었다. 놈이 흥분한 상태인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가고 싶다고 해서 내보내 주려고 하는데.”
“……네?”
“왜, 아쉬워? 많이 친해졌나 봐?”
시비를 거는 듯한 말투.
탁탁—
김세한이 발을 굴렀다. 뭔가 재촉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짜증이 올라오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무언가 말을 하려는 테리와 순간 눈이 마주쳤다.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눈앞에서 테리가 죽는 것을 보는 건 사양이었다.
띵—
뾰족하게 날 선 공기, 그와 달리 명쾌한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동시에 벌어지려던 테리의 입이 닫히고, 테리에게 향했던 김세한의 시선은 앞으로 향했다. 날 잡아끄는 손에 이끌려 엘리베이터에 올랐고, 공황에 빠진 듯한 테리의 얼굴이 닫히는 문 사이로 사라졌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목적지인 1층의 버튼에 새빨간 불빛이 들어와 있었다. 위쪽의 검은 화면 속에서 붉은 숫자가 바뀔 때마다 몸이 붕 뜨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 엘리베이터 타 보는 거 처음이지?”
“……여기 왔을 때 지금처럼 네 손에 이끌려서 지하 주차장으로 갔던 거 빼면.”
“3년 만이군.”
내 방앞에 버젓이 있는 엘리베이터였는데, 단 한 번도 탄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테리의 감시 때문이기도 했지만, 주어진 현실에 순응했던 것 같다. 엘리베이터 문에는 김세한과 나의 모습이 나란히 비쳤다. 과거와 비슷한 거 같으면서도 어딘가 달라져 있다. 나는 여전히 생존의 길목에 놓여 있어 긴장한 상태이지만, 날 시험하던 3년 전과 달리 놈의 얼굴에선 미소를 찾아볼 수 없었다.
“세한아.”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온 이름이었다. 내 손목을 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그만하자고 해 놓고, 내 이름 그렇게 부르지 마.”
“마지막일 테니까 불러 봤어.”
김세한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기적이네. 난 부를 이름도…….”
“괜찮아. 나에 관해선 몰라도 돼.”
“…….”
“다 잊어 줘라. 우린…… 처음부터 만나면 안 되는 사이였어.”
다 살기 위해 매달린 내 욕심 탓에 벌어진 일이었다. 후회를 한다 한들, 난 아직도 그때 내 선택 이외의 방법을 떠올릴 수 없었다. 결국 우리의 만남은 필연이면서 동시에 악연이었다.
“잊어라……. 잊기엔 너무 늦었지.”
놈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리곤 말을 이었다.
“넌 네가 날 잡았다고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나한테 달려든 널 찔렀을 때, 쓰러진 널 데려온 건 나니까.”
“…….”
“그러니까, 널 잡은 건 나야.”
어느새 1층에 한층 가까워져 있었다. 나를 돌아본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난 너를 모르네.”
“괜찮아.”
“……야, 대체 뭐가 괜찮다는 거야. 내가 안 괜찮은데!”
놈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지만, 난 그와 눈을 맞추지 않았다.
“3년 동안 고마웠어.”
“……나한테 미안하지는 않고?”
김세한은 다시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5……. 4…….
바뀌는 숫자를 응시하다 날 바라보는 놈과 눈을 맞추었다.
“미안해, 세한아.”
그래, 미안했다. 이 모든 갈등이 내가 스토리에 끼어들며 생긴 것이니까. 그의 눈이 조금 흔들렸고, 내 손목을 쥐었던 손에서 힘이 풀어졌다.
“미안하면…….”
김세한의 입이 열림과 동시에, 1층임을 알리는 안내가 들려왔다. 열린 엘리베이터 문 너머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이 건물의 입구가 보였다.
‘진짜 나갈 수 있어.’
김세한의 등장 때문인지 자동으로 문이 열리고 있었다.
“나가면 너, 죽을 거야.”
놈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김세한의 말대로라면 난 생존 능력이라고는 없는 쓰레기니까.
난 녀석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저었고, 동시에 느슨해진 놈의 손에서 내 손을 빼내었다. 날 잡고 있던 그의 손이 그대로 공중에 떠 있었다. 그런 김세한을 지나쳐 걸었다.
“하. 그래도…… 가겠다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놈을 돌아보았다. 착각일까. 날 담고 있는 김세한의 눈이 붉게 충혈되어 눈물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았다.
“날 너무 비참하게 만드네, 너.”
놈의 말이 신경 쓰여서, 아니면 그저 내 마음의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닫히려는 엘리베이터의 문을 잡았다. 내리깔렸던 김세한의 눈이 다시 들어 올려졌다. 마주친 눈에 여러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 중엔 다시 김세한의 손을 잡을까, 하는 고민도 있었다. 솔직히 아직도 놈을 사랑하는지 미워하는지 헷갈린다. 3년의 세월이 그만큼 간단하지 못했다는 걸 의미했다. 그러나 나는 손 대신 녀석의 얼굴을 감쌌고, 짧게 입을 맞추었다.
“안녕.”
시작과 같은 방식의 작별. 잡은 엘리베이터 문이 잠시 열렸다 닫히는 시간만큼의 짧은 마지막 인사였다. 닫히는 문 사이로 날 응시하는 그의 얼굴이 사라졌다.
“잘 있어, 김세한.”
이미 보이지 않는 놈에게 인사를 건네곤 발을 돌렸다. 바깥 냄새가 났다.
4. 페르세포네의 봄
활짝 열린 문을 여러 개 지났다. 어떤 원리로 돼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지날 때마다 자동문처럼 하나씩 다시 닫혔다. 마지막 문을 남겨 놓았을 땐 잠시 고민했다.
‘진짜 이제 못 들어오는 거야. 그래도 괜찮아?’
나는 크게 한 발 내디뎠다.
징—
내 두 발이 모두 건물 밖으로 나오자 마침내 가장 바깥쪽의 문이 닫혔다.
“괜찮아. 지금 안 가면 평생…… 못 가.”
망설이는 마음을 짓밟고 스스로를 다독이듯 말했다. 몸을 돌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고 거대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회색빛 로켓처럼 위로 뻗은 건물은 많은 창 때문인지 푸른색이 감돌아 서늘한 느낌이 났다. 가장 꼭대기 층에 있던 내가 지금은 항상 내려다보던 그곳에 서 있었다.
“내가 나왔어…….”
약간의 감격에 코가 찡했다. 두근대는 심장 소리에 바람 소리가 섞여 들 뿐 주위는 고요했다.
3년 전, 몬스터들이 막 등장해 질서가 깨졌을 때와 비교해, 현재는 헌터들이 자리 잡음에 따라 오히려 길과 도로의 몬스터들은 정돈돼 있을 시기였다. 게다가 김세한의 건물 근처라면 더더욱 조용하고 안전할 것이다. 일정 범위 안에 들어온 몬스터들은 즉각 사살했으니까.
때문에 입구를 삼엄하게 지키고 있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문 근처에 별다른 경비는 서 있지 않았다. 보통 출입을 지하로 해서일까? 하긴,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때도 문 앞에 머무는 인력은 보이지 않았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김세한이 놓아준 마당에 경비가 있었다 해도 그게 별일일까 싶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탈출을 계획했을 때 걸림돌이었던 모든 게 배제된 특이한 경우였다.
나는 숨을 크게 내쉬며 어깨를 털어 냈다.
“가 보자. 어디 이 힘을 써 줄 길드가 하나 없겠어?”
머릿속엔 김세한과 갈등을 겪으면서 등장했던 몇몇 조연과 그들이 속해 있는 길드들이 스쳐 지나갔다. 주인공과 엮일 정도의 언급이 있었던 길드는 모두 리더가 S급 정도의 실력자였다.
김세한의 회사처럼 특수한 1등 회사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은 중소기업 정도의 규모였지만, 모두 팀 내에 힐러를 가지고 있을 만큼의 힘과 자본은 있었다.
그렇다는 건 반대로 이미 이름난 곳에는 전속 힐러가 없을 리 없다는 것이었다. 밑져야 본전이니 찔러는 보겠지만, 입시나 취업하는 것처럼 눈을 낮추어야 했다.
S급은 몰라도 A급이 리더로 있는 길드는 꽤 있을 것이다. 그 정도면 어렵지 않게 생활을 할 정도는 되니, 힐러를 구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또 내가 알고 있는 정보로 그 길드를 크게 키워 놓으면 내 생존 가능성도 오를 수 있다.
그렇게 살아남아서 내가 아는 이 이야기가 끝나기 전까지 돌아갈 방법을 찾는 것. 그게 내가 이 세계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계획한 일이면서 앞으로 내가 가야 할 길이기도 했다.
건물 앞의 야외 주차장처럼 보이는 곳엔 탱크처럼 개조된 검은 차량이 나가는 길목까지 양옆으로 늘어져 있었다. 조직원들이 이동 목적으로 모는 차량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소설 속에서 자세히 언급했던 부분이 아닌지라 모형을 보는 것처럼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내가 속해 있던 건물을 벗어나자마자, 아니 김세한의 영역에서 벗어나 세상에 첫발을 내디디자마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희뿌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입과 코에서 나온 하얀 연기가 하늘로 향했다.
“추워…….”
밖 세상을 마주한 나의 첫 감상이었다. 삽시간에 빨개진 손을 앞으로 뻗어 보았다. 사뿐히 내려앉은 눈이 손바닥에 닿아 물방울로 변했다. 내 손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3년의 세월만큼 변해 있었다. 낯설었다. 익숙함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니 당연한 결과인가.
막연한 두려움이 발밑으로 잔잔히 깔렸다. 원래도 새로운 도전과 환경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나에겐 이런 답답함이 익숙했다. 그래서 지금 이 겁먹은 감정을 깨트리는 방법도 잘 알고 있었다.
억지로라도 발을 내딛는 것이다. 문제를 직면하는 것만큼 인간을 강하게 하는 것은 없고, 문제를 자세히 알면 푸는 방법도 깨닫기 마련이니까.
‘이맘때쯤 유명 길드가 어디 포진해 있더라.’
감상에 젖는 것도 잠시, 내 발은 많이 마모되어 있는 콘크리트 바닥을 성큼성큼 내디뎠다.
“강남역 쪽인가?”
무작정 크고 작은 건물을 지나치면서 멀쩡히 달려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색바랜 간판을 살폈지만, 위치를 파악하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지난 3년간 대충 이곳이 어딘지 가늠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스스로를 원망했다.
김세한의 건물 위치는 ‘강남의 땅값 비싼 어딘가.’ 그렇게 짧게 설명한 것이 전부였기에 지도를 보지 않는다면 난 미아와 다름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큰 도로를 찾아야 했다. 지하철역이 있다면 도로 쪽일 테고, 어쩌면 표지판이 있을 것이었다.
저벅저벅-주변을 살피며 일단 앞으로 걸어 나갔다. 3년 만에 나온 지상에선 사람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작은 횡단보도 앞, 부식된 신호등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넝쿨에 감겨 잘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작동하지 않으니 별 의미 없지만, 새삼 도시에 사람 손이 닿지 않으면 이 모양이 된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몰골이었다.
“아……!”
갑작스레 머리가 잡아당겨졌다. 놀라 뒤돌아보자 건물 창문을 뚫고 자라난 나뭇가지에 걸린 머리카락이 보였다. 그리고 반쯤 깨어진 창문에 내 몰골이 비쳤다. 그때 웃음이 터졌다. 찰랑거리는 무릎 기장의 원피스, 긴 머리, 겨울바람에 빨개진 피부, 오래 걷기엔 밑창이 너무 얇은 신발. 뭐 하나 이 세계와 어울리는 것이 없었다.
“하아……. 원래는 이렇지 않았는데.”
3년간 달라진 게 없는 게 아녔다. 오히려 그때보다 퇴화해 있었다. 사람 손을 탄 동물은 감이 떨어져 야생으로 돌아가면 도태된다고 했던가. 지금 내가 딱 그 꼴이었다.
난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너무 대책 없이 나온 탓일까. 아니, 다시 생각해 봐도 김세한의 품에서 내가 뭘 더 준비할 수 있었을까 싶었다. 이게 맞다. 김세한이 없어진 내겐 내 몸뚱이만 있을 뿐이었다. 허탈하고 스스로가 한심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내 선택을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살 거야. 난 살아남는다.’
걸려서 엉킨 머리를 풀어내다가 이내 강한 다짐과 함께 그대로 머리를 잡아당겼다. 투두둑-소리와 함께 머리카락이 끊어졌다.
“나답게……. 나답게.”
자신에게 최면을 걸듯 중얼거리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신경을 곤두세운 채 주변 소음에 집중하고, 보도블록 사이로 자란 풀들을 밟으며 걸었다. 새하얀 시멘트로 메꿔졌던 블록들 사이사이에 초록색 이끼가 빈틈없이 피어 있었다.
한때 번화가였을 게 분명한 골목 한편 쓰레기통엔 플라스틱 컵이 잔뜩 쌓여 있었고, 그 컵들엔 내가 알 만한 로고를 박은 컵 홀더가 끼워져 있었다.
몇몇 컵 안에서 썩어 말라비틀어진 갈색빛 과일들이 언뜻 보였고, 액체는 모두 날아가 버렸음에도 색소는 투명한 컵 내부에 달라붙어 자연과 어울리지 않는 쨍한 색감을 뽐냈다. 그 컵들 사이사이엔 하얗고 작은 꽃이 피어 있었고, 둘은 참 아이러니하게 조화롭고 아름다웠다.
그래서일까. 내가 썼다기엔 여기저기 보이는 풍경이 다 생경하게 느껴졌다.
“아…….”
골목을 빠져나오자마자 도롯가에 세워진 차 위로 늘어진 시체를 발견했다. 몬스터들과 헌터들의 전투가 일상인 곳에선 그렇게 이색적인 풍경은 아니었다. 그걸 잘 알고 있어선지 박물관에 전시된 미라 모형을 보는 것만큼이나 덤덤했다. 나는 뭐 쓸만한 것이 있을까 싶어 시체를 자세히 살폈다. 뭐라도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운 좋게도 그 시체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빌리겠습니다.”
닿지 못할 인사와 함께 이미 미라가 되어 가는 남자의 손에서 조심스레 검을 빼내었다.
‘이 문양.’
남자는 헌터였던 모양이었다. 검을 거두지도 못하고 죽은 것으로 보아 급습을 당한 듯했다. 사정이 딱하긴 해도 내가 쥘 수 있는 형태로 남아 있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검의 손잡이에는 여덟 개의 잎을 가진 꽃이 단순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런 꽃이 총 세 송이.
‘이 사람, 꽤 능력 좋은 사람이었네.’
요리조리 검에 새겨진 문양을 살폈다. 나쁘지 않은 등급의 검이었지만 그래 봤자 내가 들면 일반 쇠 검에 불과했다. 그래도 예전처럼 대나무 막대를 드는 것보단 심리적인 안정감이 있었다.
그때였다.
“야.”
“으아아아악!”
갑작스레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경기를 일으키며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얼마 안 가 그마저도 누군가의 손에 틀어막혀졌다.
“쉿, 몬스터 불러들일 일 있어?”
여자 목소리? 뒤돌아보았을 땐 한눈에 보아도 헌터로 보이는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는 짧은 단발머리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고, 허리춤에는 다양한 크기의 검을 차고 있었다. 외관상 또래로 보이는 그녀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 내렸다.
“뭐 하는 사람이야, 너? 이 겨울에 패션쇼 해?”
“아, 그게, 사정이 좀 있어서…… 요.”
“존댓말 집어치워. 딱 봐도 또래구먼 뭘.”
“아, 응.”
고작 몇 마디 나눴을 뿐인데도 굉장히 단순하고 저돌적인 사람인 건 알 수 있었다. 다른 것보다 헌터를 만났다는 게 말할 수 없이 반가웠다. 애써 괜찮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했지만, 역시 혼자 다니는 건 내심 불안했던 모양이다. 헌터인 그녀는 존재만으로도 방금 얻은 검과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심리적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입꼬리를 올리며 눈을 반짝이자 그녀는 내게서 한 걸음 물러나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나를 뜯어보듯 이곳저곳을 살폈다.
“꼬락서니로 보아 여기서 굴러먹던 놈은 아닌 거 같고. 칼 잡는 폼으로 보아 헌터도 아닌 거 같고. 그렇다고 여기가 ‘아고라’ 근처도 아니고……. 뭐지.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아고라’. 가장 간단히 표현하면 민간인 보호 구역 같은 곳이었다. 여기서 민간인이란 헌터가 아닌 사람, 즉 비각성자들을 뜻했다. 여자의 눈엔 내가 비각성자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음……. 그게 사정이…….”
“말하기 싫다는 거지? 하긴 말할 의무는 없지. 뭐, 반가웠다. 이 주변에 몬스터 많이 출현하니까 조심하고.”
여자는 내게 흥미가 떨어진 듯,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며 지나치려고 했다. 나는 황급히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벼랑 밑으로 떨어지는 사람이 위쪽으로 손을 뻗는 것과 같은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저기, 혹시 다친 데 없어?”
마음이 급한 내가 앞뒤를 잘라먹고 뱉은 말이었다. 그녀는 잔뜩 물음표를 띄운 얼굴로 고개를 기울여 보였다.
“내가 힐러거든. 사정상 날 받아 줄 길드를 찾고 있는데, 네 소속 길드에 혹시 힐러가 필요할까 해서.”
여자의 허리춤에 걸린 무전기로 보아 분명 어딘가에 소속된 헌터인 듯했다. 애초에 이 시기엔 길드에 소속되지 않은 헌터가 없었다. 혼자 몬스터를 잡는다는 것이 대부분의 헌터에겐 그만큼 힘들어졌음을 뜻했다.
여자의 허리춤에 있는 검들은 헌터 고유 무기가 아닌 일반 검들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많은 검을 가지고 다니는 걸까.’라는 의문을 시작으로 어렴풋이 그녀의 포지션을 알 것도 같았다. 결박과 방어에 특화된 포박형 헌터. 대표적인 인물로는 S급 고참인 론, 릴리, 그리고 조연이었던…….
젠장, 너무 오래전이라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뭐, 상관없나. 그 조연이라면 지금은 이미 죽었을 테니.
“아. 아아.”
나름 차분한 자기소개에 여자는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잡힌 손을 털어 내듯 쳐 내며 웃었다. 조금 새침했던 인상과 달리 해맑은 미소였다.
“필요 없어.”
그녀는 나를 도를 믿느냐고 묻는 종교인을 떼어 내듯 밀어냈다.
‘아, 안 돼.’
잠시 잡았던 손목이 따뜻해서일까. 바짓가랑이를 잡듯 다시 그녀를 돌려세웠다.
“잠깐만!”
“아, 또 왜?”
“너 어디로 가는데? 나랑 같이 가 주면 안 될까?”
“나야 팀원들 있는 데로 가지. 미안한데 사정상 외부인을 데려갈 수 없거든.”
“…….”
확실한 거절에 잡았던 손목을 놓아주었다. 미련 가득한 손을 천천히 거두며 한숨을 내쉬었다. 희망의 끝자락을 놓친 듯한 절망감에 앞이 깜깜해지는 것만 같았다.
‘아. 강남역 어디에 있는지라도 물어볼까…….’
떨궈진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는 벌써 돌아섰을 거란 예상과 달리 미간을 찌푸린 채 나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괜히 말을 걸어서. 망할 놈의 오지랖, 진짜.”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오곤, 곧 내 어깨에 그녀의 겉옷이 걸쳐졌다. 무스탕과 야상이 섞인 듯한 모양새의 겉옷은 무릎까지 내려오는 기장이었다. 거친 느낌의 외측과는 달리 안쪽은 무슨 동물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회색의 포근한 털로 덮여 있었고, 의외로 좋은 냄새가 났다. 달콤한 바닐라, 혹은 캐러멜 팝콘을 닮은 포근하고 따뜻한 냄새였다. 그리고 겉옷의 외측 어깨쯤엔 ‘b.w’라는 알파벳이 적혀 있었다. 그녀의 길드 명을 칭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처음 듣는 길드네.’
내가 모르는 길드라는 건, 소설에서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녀도 언젠가는 소리 없이 사라질 엑스트라라는 것이었다.
“몬스터 만나기 전에 얼어 죽기부터 하겠다, 너.”
“……나 주는 거야?”
“그래. 내 호기심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할래.”
나는 강남역으로 가는 길을 물었고, 여자는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친절하게 길을 알려 주었다. 내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중간중간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딜 가든 빨리 가라. 날 어두워지면 네 생존 가능성은 더 낮아질 테니까. 이제 나 간다.”
휘적휘적 손을 저은 여자는 여전히 무심한 듯한 말투로 다정한 말을 뱉었다.
‘좋은 사람인데.’
옷에 밴 그녀의 온기가 따뜻하다 못해 뜨겁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만큼 몸이 얼어붙어 있었다는 걸 의미했다. 추운 모양인지 팔짱을 끼고 몸을 웅크린 채 뒤돌아선 그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던 참이었다.
스스스-바람 소리라기엔 조금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기척은 나만 느낀 게 아닌 모양이었다. 휙-고개를 돌린 여자의 시선은 내가 아니라 내 뒤쪽에 닿아 있었다.
“야, 너. 가만히 있어.”
“……어?”
슬쩍 고개를 돌렸을 땐, 코너를 돌아 나온 대형 비단구렁이가 보였다. 우릴 발견한 놈은 직선으로 뻗어진 도로를 질주하듯 기어 오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손에 들고 있던 검을 꽉 쥐었다.
꽉-꽈직- 끄-우직—
거친 아스팔트 바닥과 뱀의 피부가 스치는 소름 돋는 소리와 이것저것이 부서지고 깔리는 소리가 기괴하게 들려왔다. 한껏 크게 벌어진 입으로 가로수와 자동차, 그리고 마침내 내가 검을 가져왔던 시체까지 빨려들듯 삼켜졌다. 놈은 자신의 입에 들어가는 이물질들은 상관하지 않는 듯 보였다. 내가 만든 이 몬스터는 살아 있고, 움직이는, 그리고 숨 쉬는 생물을 가장 좋아하니까. 놈의 목적은 오직 이곳에 있는 그녀와 나일 뿐이었다.
“젠장. 하필 구렁이 새끼가 나타나.”
걸걸한 욕설을 뱉은 그녀가 허리춤에서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3구역에 구렁이 떴다. 듣고 있어?! 야! 하여간 이 새끼들은 필요한 때에. 으휴!”
무전기에 대고 소리를 지르던 그녀가 내 쪽으로 손을 뻗었고, 뒤쪽에선 굉음이 들려왔다. 슬쩍 돌아본 뒤쪽엔 내게 입을 벌린 채 멈춰 있는 구렁이가 보였다. 방어 스킬이었다.
“꼭 혼자 있을 때만 골라서 오냐고!”
그녀가 또 한 번 손을 앞으로 뻗자, 이번에 구렁이의 몸에 사슬이 채워졌다.
뱃사공의 체인.
고난도 속박술이었다. 예상외로 그녀는 실력자인 모양이었다. A등급……. 혹은 그 이상. 그녀의 길드원이 지원 온다면 잡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런 의문이 들었을 때, 머릿속에 테리와의 대화가 스쳐 지나갔다.
- 아, 론이 이끄는 1팀은 비단구렁이가 출현했다는 곳에 갔는데 허탕 쳤다고 합니다.
- 허탕이라니?
- 가니까 이미 죽어 있었다는데요?
생각에 잠길 틈도 없이 방어막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으으…….”
힘에 부치는 듯한 신음으로 보아 그녀가 날 지키려 시전한 방어 스킬은 얼마 못 가 깨질 듯 보였다. 나에게 저놈을 상대할 힘은 없었다. 그리고 내 뒤의 그녀가 공격형이 아니라 포박형이라면 나와 상황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제 발로 걸어 나올 때부터 모두 예견된 일이었다.
아. 김세한 없이 살아남겠다고, 그럴 수 있다고 자만했던 게 문제였던가. 지금의 난 참 지독히도 무능력했다.
- 나가면 너, 죽을 거야.
김세한의 목소리가 머리를 울렸고, 머릿속엔 주마등처럼 익숙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흡혈 늑대에게서 날 구해 주었던 김세한의 뒷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그런 스스로가 너무 한심해서 순간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이런 상황에서 떠올린 게 결국 놈이라니. 의지하면 안 되는 걸 알면서, 모든 게 내 욕심인 걸 알면서. 내 나약함이 역겨웠다.
‘죽음.’
나는 양손으로 검을 힘주어 잡았고, 몸을 돌려 구렁이를 마주했다. 큰 움직임 탓에 잠시나마 내 어깨를 감쌌던 그녀의 겉옷도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게 내 마지막이라면 적어도 상황을 똑바로 마주 보고 싶었다. 마지막 발악. 부서져 내리는 그녀의 방어 스킬에 질끈 눈을 감으며 검을 뻗었을 때였다.
“살려 달라고…… 말해.”
어둠 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나를 감싸 안는 누군가의 힘에 몸이 옆으로 밀려나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감고 있음에도 이미 누구인지는 알 수 있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향기가 느껴졌으니까.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고, 챙-날 선 소리를 내며 손에 들려 있던 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
쿵—
비단구렁이가 쓰러지자 바닥이 흔들렸고, 귀가 아플 만큼의 굉음이 들려왔다. 구렁이의 공략법은 작가인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놈을 죽일 수 있는 건, S급 정도의 공격 스킬이다. 구렁이를 감싼 검은 연기는 아마도 날 감싸 안은 이놈의 손에서 나온 거겠지. 나는 온기를 내뿜는 커다란 몸을 밀어내며 한 걸음 물러섰다.
“김세한.”
불어온 바람에 놈의 머리가 휘날려, 날 담은 옅은 빛의 눈이 보이다 보이지 않곤 했다. 김세한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건물 사이에는 테리와 이재현이 서 있었다.
“이런…….”
짧게 들려온 그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을 땐, 이미 등을 돌려 뛰어가는 모습만 보였다.
‘몬스터가 아니라 김세한을 보고 도망가는 건가?’
건물 사이로 사라지는 뒷모습에, 마지막 동아줄마저 놓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끝내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못했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나를 마주 보고 선 김세한을 올려다보았다.
“언제부터…… 따라온 거야?”
“처음부터.”
놈은 덤덤히 대답했다. 결국 벗어났다고 생각했던 짧은 시간도 내가 그의 품에 있었다는 걸 의미했다. 애초부터 날 놓아줄 생각은 없었던 것이었다. 하긴, 3년을 얽혀 온 관계를 끝내기엔 모든 게 쉽게 진행된다 했다.
“좀 더 놔두고 싶었는데.”
“…….”
“내 담력은 여기까지야.”
화륵—
어느샌가 다가온 이재현이 구렁이의 사체에 불을 붙였고, 순식간에 거센 불길이 위로 타올랐다. 그 불길에 내내 칼바람에 아렸던 몸을 점차 녹아내렸다. 김세한의 얼굴 반쪽이 타오르는 불 탓에 주황빛으로 보였다.
“돌아가자.”
“……싫어.”
그의 눈에 타오르는 불길이 담겨 일렁였다. 착각이 아니었다. 김세한의 눈에는 처음부터 원망이 담겨 있었다. 놈의 품은 따뜻했지만, 다시 안기고 싶지 않았다. 이름도 모를 그녀의 온기는 매달리고 싶을 만큼 간절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내가 한 걸음 물러서자 곧바로 그가 두 걸음 다가왔다.
“자기야.”
이제는 익숙해진 패턴. 평소에는 쓰지 않는 그 호칭에 고개를 들었을 땐 화가 난 듯한 김세한의 얼굴이 보였다. 뒤이어 분노를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충분히 비참해. 그간 내 노력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는 걸 알았거든.”
“……뭐?”
“어릴 때 키웠던 개가 하나 있어.”
놈은 또 한 번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했다. 갑작스러운 서두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인적 드문 숲에 놀러 갔을 때. 줄을 풀어 준 적이 있거든. 당연히 주인인 날 따라올 줄 알고 말이야. 근데 어떻게 됐게?”
“…….”
“줄을 풀자마자 도망가 버렸어. 도망가는 그 뒷모습에 대고 이름을 얼마나 불렀는지 몰라. 그렇게 내가 좋다는 듯 꼬리를 쳤으면서. 날 좋아하는 게 아니었나? 이상하다. 뭔가 통하는 게 있는 느낌이었는데 내 착각일 뿐이었나?”
날 내려다보는 김세한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나는 그제야 놈이 하는 이야기가 곧 내게 하는 말임을 알아차렸다.
“그놈을 찾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어. 야생동물을 잡으려던 덫에 걸려서 죽어 있었거든. 괘씸하더라고. 그러게 왜 도망갔어. 난 같이 놀자는 거뿐이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죽어 버리니까 슬프더라고.”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내가 뭘 후회했는지 알아? 아. 풀어 주지 말걸. 그러면 내일 또 내게 꼬리 치며 날 반겼을 텐데. 그런 그놈이 좋아서, 더 행복하게 해 주고 싶어서 준 자유가 곧 독이었구나. 내 잘못이야. 그러게 왜 줄을 풀어 줘서 친구를 잃었을까?”
김세한의 손이 내 얼굴을 감쌌고, 뜨겁게 느껴질 정도의 온기가 볼에 닿았다.
“이제 알았어. 우리를 잡고 있는 건 나뿐이었다는걸.”
“…….”
“내가 놓아 버리면, 넌 날아간다는 걸.”
덤덤한 말투와 달리 날 내려다보는 눈은 곧 나를 집어삼킬 듯 블랙홀 같이 휘몰아쳤다.
“내가 자만했어. 내가 그 녀석을 몰랐던 것처럼, 널 몰랐던 거지.”
흐르는 긴장감에 다시금 물러서려던 내 몸이 당겨진 팔에 저지당했다. 그리고 곧 목덜미 부근의 통증과 함께 눈앞이 깜깜해졌다. 아득해지는 머릿속에 나지막이 놈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제 알았으니까……. 안 놔줄 거야.”
***
“일어나셨습니까?”
눈을 뜨자마자 어두운 얼굴의 테리가 보였다. 부어 있는 눈 밑으로 짙게 드리운 다크서클이 그의 피로함을 보여 주는 듯했다. 그 너머에는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끔벅거리는 눈이 뻑뻑했고, 은은한 꽃향기가 숨 막혔다. 날카롭던 바깥바람과 달리 부드러운 침구가 피부에 스쳤고, 몸이 따뜻했다. 그런데 왤까.
‘싫다.’
앞으로의 일이 기대되지 않아서 다시 잠들고 싶었다.
“테리.”
쩍쩍 갈리지는 목소리가 낯설게 공간을 울렸다.
“네.”
“미안. 나까지 힘들게 해서.”
눈 위에 손등을 올린 채, 가장 신경 쓰였던 놈에게 사과를 건넸다.
“아닙니다. 그보다 바깥 구경은 어떠셨습니까?”
평소랑 같지만, 피로에 절어 있는 테리의 목소리가 그간 있었던 일을 되새기게 하였다. 폐허화가 진행된 건물들, 시신, 구렁이, 날 도와주던 여자, 짧았던 외출의 기억이 스쳤다. 그러고 보니 그 엑스트라, 날 도왔던 여자의 겉옷은 바닥에 떨어뜨리고 챙기지 못했다. 하긴, 그 이후 김세한의 등장으로 주워 올릴 틈이 없었으니.
“좋은 사람을 만났어.”
“저도 봤습니다. 구렁이한테 속박 걸었던 사람이요. 겉옷도 그 사람이 준 거잖아요.”
모든 걸 알고 있는 테리의 말에 웃음이 났다.
“정말 계속 따라다녔나 보네.”
마치 목줄 걸린 김세한의 개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답답해지는 목 부근을 매만지자 테리가 물을 건네왔다. 몸을 일으켜 목을 축이는 날 빤히 바라보던 그가 입을 뗐다.
“이제 와서 말씀드리는 거지만요. 페르 님과 관련된 몇몇 매뉴얼이 있습니다.”
“그런 게 있었다고……? 대체 언제부터.”
“페르 님이 밖에 나가고 싶다고 처음 이야기를 꺼내셨을 때부터요.”
“…….”
김세한이 스치듯 했던 말이 떠올랐다.
- 그래. 언젠가 한 번은 이럴 거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이렇게 빠를 줄 몰랐네.
이제야 그 말의 의미를 알 것만 같았다. 언젠가는 나를 시험해 볼 생각이었다. 내가 자신을 떠날 수 있는지를. 너무 쉽게 열렸던 1층의 문은 결국 시험의 시작이었다. 헛웃음을 흘리는 나를 앞두고, 테리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은 채 고개를 저었다.
이번 외출로 새삼 확실해진 게 있었다. 지금의 내가 보호자 없이 살아남기를 기대하는 게 오만이라는 것과 김세한의 집착이 내 상상 이상이라는 것. 물론 모든 게 충동적이었고, 감정적이었지만 이렇게 대책 없이 나가면 안 됐다.
“페르 님 담당인 저보다 쿼터가 더 신속하게 움직여서. 면목 없습니다.”
쿼터, 이재현……. 연기는 다 어디로 집어치우고 나온 건지 몰라도, 김세한의 뒤에서 상황 정리를 하던 건 놈이었다. 당최 무슨 생각인 건지.
“아냐……. 테리, 너는 론 때문에 충격받은 상태였잖아. 얼굴에 다 보였어. 그리고 나는 안 잡으러 오는 편이 더 좋았고.”
얼굴에 애써 웃음을 띠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놈도 그런 내 노력을 아는 건지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하. 그런가요? 전…… 보스랑 마찬가지로 걱정스러웠거든요. 혹시라도 위험한 일에 휘말리실까 봐.”
대화하고 있음에도 테리의 정신은 이미 다른 곳으로 간 듯 보였다. 그 사건이 꽤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미안해. 무전 받았을 때, 네 말대로 내가 거절했어야 했어.”
“아니요, 론의 목적이던 쿼터의 생존을 달성했으니……. 잘된 거죠.”
생존을 달성했다고 말하는 걸 보니, 역시 테리는 내 ‘실수’라는 이재현의 ‘거짓 연기’를 알아챘던 모양이었다. 나를 위로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테리 때문에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어쩌면 이재현도 예상보다 커진 일에 당황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테리에게서 눈을 돌리자 소파 위로 그녀에게 받았던 검은 옷이 보였다.
“어……. 저거.”
“아. 쿼터가 챙겨 왔습니다. 잘한 일인지 모르겠지만요.”
“쿼터가……?”
그 옷은 내 잠깐의 외출이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물이나 다름없었다.
‘그 여자, 다시 만날 수는 없겠지?’
“테리, b.w라는 길드 명 말이야.”
나는 마치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 본 적 있어?”
“b.w.……. 아뇨, 처음 들어 보는 것 같습니다.”
큰 길드는 이름이 날 대로 나 있는 지금, 테리가 모른다는 걸 보니 역시 작은 길드인 것 같았다. 그 정도 길드에 속한 엑스트라라면 언제 어떻게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실력자라 한들 내 소설에서 엑스트라는 새로운 몬스터의 등장에 곧잘 희생되곤 했기 때문이다. ‘S급이 리더로 있는 길드가 전멸했다더라’라는 소문도 새로운 몬스터가 나올 때마다 들려왔으니, 그녀라 한들 특별할 것도 없었다.
짧은 만남에 정이 들었던 건지, 그녀의 친절에 감동하였던 건지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아쉬움이나 그녀의 생존 여부보다는 내게 더 이상의 기회가 없다는 게 더 문제이긴 했다. 한숨을 쉬며 깨어난 이후 입 안을 계속 맴돌았던 이름을 뱉어 냈다.
“김세한은…….”
“아. 보스께서 부르기 전까지는 오지 마시라고…….”
“참 일방적이네.”
지금 이 상황을, 우리 관계를 뭐라고 해야 할까. 싸운 것도, 삐진 것도 아니었다. 굳이 정의한다면 내가 이별을 고했고, 놈이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아직은 헤어짐의 과정에 있는 연인이라 해야 하나.
“이래저래 분위기가 무겁습니다……. 저도, 다른 놈들도 다 답답해하고 있습니다.”
“나도 그래. 아무 일도 하지 말 걸 그랬다고 후회할 정도로.”
어쩌면 이게 김세한이 바라는 나의 무력감과 절망감인가 싶을 정도로 힘이 들었다. 김세한은 내게 노력해도 안 된다는 것과 내가 날뛰면 피해를 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동시에 알려 주었다.
“……후회하십니까?”
“테리, 내가 김세한의 손을 놓았을 땐 죽는다고 해도 여기 돌아온다는 선택지는 버린 거였어. 그러니까 이건 내가 가정한 상황엔 없었거든.”
“…….”
“하지만 결과로 본다면 더 안 좋아지기만 했네. 김세한도 날 서 있고, 너희도 불편하고, 나도 여전히 갇혀 있고. 빛을 잃어버린 거 같아. 조금 후회해. 차라리 막연히 꿈꾸던 때가 나았던 거 같기도 하고.”
내 말에 테리는 그저 마른세수를 할 뿐 답이 없었다.
언제나처럼 테리가 가져다주는 밥을 먹고, 피곤해 보이는 테리를 내보내고 나선 내내 멍하니 벽과 천장을 응시하며 시간을 보냈다.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 소리가 멀어진다고 느껴질 때쯤 내 심장이 뛰는 건지 의심스러워졌다. 모든 감각이 무뎌지는 것만 같았다. 어느새 찾아온 밤에 방은 어두워졌고, 눈앞이 깜깜해지고 나서야 내내 앉아 있던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방 안에서는 내가 켠 촛불 하나가 일렁였다. 이미 잘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지만, 마음이 복잡해 잠자리에 들 수 없었다. 이재현이 챙겨 왔다는 이름 모를 엑스트라의 겉옷을 쓸어내렸다. 그녀가 자꾸 떠오르는 건 강렬했던 외출의 기억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의 위치가 내가 이곳에 온 초반에 그렸던 삶의 계획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메인 스토리 밖에서 적당히 흐름을 타며 사는 삶. 이왕이면 능력도 있고.
“딱 그 정도만 됐어도.”
내게 그녀 정도의 재능이 있었다면, 아니 적어도 힐러만 아니었다면 처음부터 김세한에게서 도망칠 수 있지 않았을까.
“아닌가……?”
김세한이 그때 이미 놔줄 생각이 없었다면 단언컨대 어떤 능력을 갖게 되더라도 내가 그에게서 벗어날 확률은 없었다. 하지만 헌터가 되고, 그때의 나처럼 놈에게 매달리는 방식이 아니었다면 적어도 나를 조직원으로 써 주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재현이 말했듯, 내가 놈의 애인 자리의 앉은 것, 놈의 관심을 너무 많이 받은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날 향한 김세한의 감정이 뭐든 간에 예쁘게 포장되었던 우리의 관계는 어제부로 끝이 났다.
‘어떤 식으로 김세한 얼굴을 봐야 할까?’
어떤 애정 어린 말도 다 연극처럼 느껴질 것만 같았다.
앞으로 난 어떻게 해야 할까. 모든 계획이 다 의미 없이 느껴졌다. ‘여기서 벗어난다면’이라는 가정하에 세웠던 모든 계획이 무너져 버린 데서 온 막막함 때문인 듯했다. 김세한이 나의 무력함을 마주 보게 하려고 놔준 척한 거라면 그의 계획은 성공이었다. 적어도 지금 나의 의지력은 서서히 위축되고, 한없이 움츠러들어 모습을 감추었으니.
“이재현…….”
모든 사건에 감초처럼 끼어 있는 놈이 거슬렸다. 내 분노의 결정적인 이유는 김세한이 자른 론의 손이었지만, 이 일은 이재현과 대화를 나눴을 때…… 아니, 이재현이 총에 맞았을 때부터 시작됐다.
“그 새끼…… 내 편이긴 한가?”
명령 때문이라지만 나를 잡는 것에 앞장섰다면, 내 탈출을 부추겼던 놈의 말과는 괴리가 있다.
‘재수 없는 놈.’
끼익—
뒤에서 들려온 문소리에 반사적으로 겉옷을 숨기듯 구석으로 집어 던졌다. 내가 애정을 품은 건 전부 없어질 것만 같은 불안감이 만든 행동이었다. 노크 없이 열린 문. 분명 김세한일 게 뻔했다.
“안 자고 있었네.”
작은 촛불의 빛은 김세한의 얼굴을 비추지 못했다. 뚜벅뚜벅, 놈의 발소리가 들려오고, 나와의 거리가 완전히 좁혀지고 나서야 비로소 놈의 얼굴이 보였다. 나와 세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그는 멈추어 섰고, 난 그 자리에 딱딱하게 굳은 채 긴장감에 침을 삼켰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평소와 같은 얼굴인 김세한 앞에서 나만 얼어붙은 거 같았다.
“오늘 하루는 어땠어?”
나른한 목소리. 놈은 마치 방에 갇힌 정신병자를 대하는 심리 상담사라도 된 듯이 굴었다.그렇게 생각하니 웃음이 새어 나왔다.
“늘 똑같지. 답답했어.”
내 감정을 말로 표현하고 나니 눈물이 핑 돌았다. 그간의 거짓된 애정 속에서 3년을 보내고 난 지금에서야 진심을 얘기한다는 게 어쩐지 여러 생각이 들게 했다. 입술을 꾹 깨문 채 똑바로 그를 마주 보았다.
“나 이제 괜찮다는 말 안 해도 되지? 내 속마음이 어떤지 너도 알잖아.”
놈을 마주하기 전엔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까 고민했지만, 막상 마주하니 날이 선 목소리만 나올 뿐이었다.
“그래. 나쁘지 않네. 연기는 때려치우겠다는 건가. 아니면 그냥 화난 것뿐인가. 뭐든 지금 내 앞에 있는 건 진짜 네 모습이라는 거니까. 그게 제일 중요해.”
“맘에 든다니 다행이네. 앞으로도 이런 나를 데리고 있을 생각이야? 네 말대로라면 나는 이제…… 너에게 꼬리 치지 않는 개에 불과할 텐데?”
“그 얘기,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는 건가?”
“비유한 거 아니었나. 난 그렇게 들리던데.”
내내 나와 눈을 맞추던 김세한의 시선이 조금 밑으로 내리깔렸다.
“난…… 그 녀석이 죽었을 때도, 네가 떠났을 때도 괴로웠어.”
비꼬는 내 말투에도 놈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다시 마주한 그의 눈은 날 담고 있다기엔 혼자만의 세상에 갇혀 있는 듯 보였다.
“밖은 무섭지 않았어?”
“…….”
“난 널 잃어버릴까 봐 무서웠어. 역시 곁에 두는 게 안전한데. 네가 자꾸 멍청한 생각을 하니까……. 너랑 있던 여자한테 의지할 생각이었어? 안 돼, 너도 봤잖아. 그렇게 약하면 언젠가 몬스터에게 죽을 거야.”
“……김세한.”
“그러면 그런 사람한테 의지하던 너도 결국 죽게 될 거야. 나는 네가 죽는 걸 두고 볼 수 없을 뿐이야. 네 보호자는 나고, 넌 내 것이니까. 왜 내 마음을 이해 못 하지. 넌…….”
가슴이 답답했다. 지금의 나와 김세한 사이엔 넘을 수 없는 장막이 쳐져 있는 것만 같았다.
“너 지금…… 나랑 대화하고 있는 거긴 해?”
몇 번 느리게 깜박이던 눈이 다시 선명하게 바뀌어 내게 향했다. 놈은 한 걸음 내게로 다가와 내 손끝을 잡았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온몸이 잔뜩 긴장해 있던 터라 김세한의 손길에 움찔거렸다.
“이제…… 내가 무서워?”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 닿은 손끝에선 김세한의 온기가 흘러들었다.
“……모르겠어.”
“나도 모르겠어,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네가 내게 더 다가오게 할 수 없다면. 나한테 선택지는 더 도망가지 못하게 하는 것밖에 남지 않은 거잖아.”
그는 나와의 대화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듯 보였다.
“널 두려워하는 나한테 무슨 가치가 있어? 그럼 애인도 뭣도 아닌 거잖아.”
“왜 아니야. 내가 널 잡고 있는데. 난 여전해, 자기야.”
나른한 목소리가 그저 조용한 협박으로 들려왔다. 놈의 손가락이 내 목 부근을 타고 내렸다. 그것도 잠시, 손을 거둔 그는 조금 날 선 눈을 하고 말을 이었다.
“달라진 건 너야. 우리 사이의 문제는 항상 너라고.”
“넌…… 그냥 내가 인형처럼 살길 바라는 거지? 내 의견 없이. 너만 기다리면서.”
목소리가 떨려 왔다. 학습된 공포 때문이었다. 놈의 눈에서 광기나 분노가 보일 때면 몸이 먼저 떨리곤 했다.
“……그게 안전하니까.”
“근데 세한아, 난 그렇게 못 살겠어.”
“왜?”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무미건조하게 던진 물음에 질끈 눈을 감았다가 놈을 쏘아보았다.
“밖이 두려웠냐고 물었지? 응, 무서웠어. 네 말대로 난 그때나 지금이나 전투 능력 없는 쓰레기니까. 피부가 아릴 만큼 춥고, 바닥도 평탄한 곳 하나 없고, 나보단 뛰어났을 헌터의 시신이 나뒹굴더라. 고작 나뭇가지에 머리가 걸렸을 뿐인데 그때 느꼈어. 아, 내가 정말 편하게 살고 있었구나, 싶더라고.”
“근데…….”
그의 말을 끊어 내듯 내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근데 이상하지? 이곳에 돌아와서 눈을 떴을 땐 더 절망스러웠어. 난 여기서 보내게 될 내 똑같은 미래가, 너 하나 기다리면서 하루하루 더 무력해질 내 미래가 더 두려워!”
고함치듯 목소리가 높아졌고, 격양된 감정 탓인지, 놈에게 대들었다는 두려움 탓인지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그런 나에게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듯 보이는 김세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너 없는 미래가 두려워.”
“…….”
“결국 너와 내 바람은 합의를 볼 수 없다는 결론이 났네. 난 양보할 생각 없으니까 네가 양보해. 알아서 잘해 봐. 다만 네 행동에 여러 사람의 목이 걸려 있다는 거 명심하고.”
흘러가듯 건조한 말투였지만 귀를 의심할 만한 내용이었다.
“……뭐?”
“네가 자살이라도 하면 내가 어디에 화풀이할 거 같아?”
놈의 질문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테리였다. 본래 테리가 맡은 일은 나를 감시하는 일이었으니까.
“지금, 협박하는 거야?”
“마음대로 생각해. 아, 이거 네가 자주 쓰는 말인데. 참 무책임하고 편한 말 같네. 나도 자주 써야겠어.”
김세한은 잔뜩 찌푸려진 내 미간을 누르듯 펴내곤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잘 자. 내 꿈 꾸고.”
약간의 미소를 담은 얼굴이 촛불을 등진 채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락으로 처박히는 듯한 감각에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조용히 바닥을 적셨다.
그가 다시 나를 찾은 건 생각보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바로 그다음 날부터 놈은 그날 두었던 세 걸음 정도의 거리마저 내게 허락하지 않았다. 벗어나려 했던 것에 대한 벌일까. 놈은 내게 화풀이를 하는 듯한 몸짓으로 매일 밤 나를 안았다. 싫다고 해도 집요하게 눈을 맞추고, 숨 막히게 입술을 포개고, 밀어내는 내 손을 잡아 포박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김세한의 눈은 언제나 나를 담고 있었다.
“사랑해.”
긴 밤이 끝나갈 때면, 놈은 등 돌려 누운 나를 안고 속삭이듯 말했다. 처음엔 저 말이 마냥 끔찍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감정이란 게 참 이상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바깥에 대한 기억이 흐릿해지고, 내 반항심도 날이 닳기 시작했다. 불덩이를 삼킨 듯 타오르던 가슴에 비가 내렸고, 비가 그친 뒤 남은 건 까맣고 앙상해진 내 마음의 잔재뿐이었다.
‘이게 김세한이 원했던 일일 텐데.’
밤새 필사적으로 나를 옭아매는 놈이 갑갑하면서도 안쓰럽다고 생각했다.
‘손에 쥐고 있으면서 뭐가 그리 불안할까?’
그런 생각이 든 건 아마 놈을 향한 감정이 단순 애정도, 단순 증오도 아닌 애증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런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도 안타깝긴 마찬가지였다.
“빨리 자. 내일 또 나가야 한다며.”
그리고 난 또 한 번 놈에게 무너져 내렸다. 어리석게도. 어차피 벗어날 수 없다면 날마다 울고 싶지는 않아서였던 것 같다. 점차 모든 게 무뎌지면서 이재현도, 그날 나를 도왔던 여자도 다 흐릿해져만 갔다. 그냥 모든 게 다 꿈속의 일이었던 것만 같이 아득했다.
***
어느덧 그로부터 3개월이 흘러, 겨울을 지나 봄이 찾아왔다. 커튼을 걷어 내자 방 안 가득 햇살이 들어왔다. 이곳에 다시 돌아오고 나선 몇 번 본 적 없는 좋은 날씨였다. 눈을 감고 햇살을 만끽했다.
“페르 님, 일어나실…… 어?”
“테리, 좋은 아침!”
문을 열고 들어온 테리가 나를 보고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환히 웃어 보이자 테리의 얼굴에도 작은 미소가 자리 잡았다.
“오늘은 일찍 일어나셨네요?”
“응, 언제까지고 우울하게 지낼 수는 없잖아.”
테리는 한숨을 삼키는 듯 입을 앙다물었고, 그런 놈 앞에서 일부러 과장되게 기지개를 켜 보였다.
“네, 좋은 판단이십니다.”
“그렇지?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 같아.”
누군가가 포기하면 편하다고 했던가. 지금의 내가 딱 그랬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가고 잔잔한 수면에 떠 있는 느낌. 머리를 가득 메웠던 앞으로의 계획이 싹 날아가 버려서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불안하지 않다. 여기 있으면 죽을 일도 없고, 김세한도 어느 정도 평정을 되찾은 듯 보였고. 그래서 앞으로가 기대되진 않지만, 그게 꼭 나쁘지만은 않은 느낌이랄까.
아니, 그냥 단순히 모든 것에 지쳐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테리, 이제야 물어볼 여유가 생겨서 그러는데 말이야.”
“네, 어떤 게 궁금하십니까?”
“론은 어떻게 됐어? 그 이후로 본 적이 없어서. 잘린 손은 다시 붙였나?”
조금 늦은 감이 있는 물음이었지만, 이제야 내게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는 걸 의미했다. 테리는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답했다.
“아, 네. 아직 회복 중이긴 한데. 별다른 스킬 없이 잘린 거라 가능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렇다는 건…… 보스도 경고 차원에서 그랬다는 거겠죠. 물론 그전만큼 완전하진 않지만, 생활에는 무리 없습니다.”
김세한이라면 아예 회복할 수 없게 하는 것도 간단했을 테지만, 그럴 목적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 하나.’
나한테 시각적인 공포를 주기 위해 론을 이용한 거라면 성공이었다. 하지만 그날 모두를 떨게 했던 일이 전부 내 잘못 때문인 것만 같아 입술을 깨물자 테리가 그 생각을 알아챈 듯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론은 괜찮습니다. 일도 정상적으로 하고 있고, 원래도 포박하는 게 주 포지션이라 평소랑 다를 바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쿼터가 더 열심히 해 주고 있고요.”
김세한에게 시달리느라 한동안 잊고 있던 이름이 귀를 맴돌았다.
“……아아. 쿼터가 말이지.”
이재현, 그 녀석도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따지고 보면 놈이 모든 일의 원흉이니까.
“다 괜찮습니다. 평소처럼 굴러가고 있어요. 밖도, 안도……. 여기도요?”
그는 내게 확인하듯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
“응, 평소처럼.”
테리는 세심한 사람이다. ‘평소와 같다’고는 하지만 내가 느끼기엔 그 이전보다 나에게 더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다. 나를 깨울 때면 목소리가 한 톤 높았고, 쇼하는 사람처럼 어디선가 들은 재밌는 이야기를 풀어놨다. 다시 말해 그는 내 외로움과 따분함, 그리고 고립감을 의무적으로 풀어 주려고 했다.
“쿼터 놈 때문에 걱정입니다.”
테리의 일상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할 얘기라고는 나와 S급들에 관한 이야기뿐이었지만 꽤 흥미로운 소식이 많았다. 그리고 S급 중에서도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이는 이재현이었다. 놈은 이제 신입이라고 부르기엔 어색할 정도로 한자리를 차지했다. 김세한과 같은 공격형 헌터로 말이다.
“왜? 걔 또 뭔 사고 쳤어?”
“아뇨. 너무 안 쳐서 문제입니다.”
테리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사고를 안 치면 좋은 거지.”
“글쎄요. 보스가 그놈을 인정할수록 선배 입장인 저는 묘하게…… 불안하달까요.”
“풉. 뭐야, 그게. 그놈이 아무리 커도 너 안 잘려. 애초에 포지션이 다르잖아.”
“그런 것보다 남자의 자존심 문제입니다. 그렇게 커 버려서 나중에 자기 잘났다고 선배들 말도 안 들으면 어떡합니까.”
“흠……. 걔가 그럴 만한 캐릭터인가?”
문득 3학년 선배의 목을 조르던 놈의 학창 시절이 스쳐 지나갔다. 애초에 놈에겐 상하 관계라는 개념이 없을지도 몰랐다.
“아니다. 그럴지도.”
“아아아아~ 그것 보십시오.”
테리가 과장스럽게 머리를 감쌌다. 그런 녀석을 보며 배를 잡고 웃었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김세한의 신뢰를 얻는 것도 이재현이 생각하는 작전의 일부일까? 놈이 일으키겠다던 파도는 과연 어느 정도의 크기이며, 내게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궁금하네, 네가 궁리한 김세한을 죽이는 방법. 성공할 거라고는 생각 안 하지만.’
그보다 난 김세한이 죽길 바라고 있긴 한가. 아니었다. 가슴이 걸레짝처럼 너덜너덜한데 어째선지 놈이 피를 흘린다 생각하면 온몸이 서늘해져 견딜 수 없었다. 이도 저도 아닌 마음에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
일어나자마자 테이블 위로 보이는 큰 꽃다발이 김세한의 복귀를 알렸다. 공식적인 일로 오래 자리를 비우다 돌아올 때면 놈이 꼭 하는 인사치레 같은 것이었다. 내가 잠든 사이 몰래 다녀간 것인지, 테리를 통해 꽂아만 놓은 것인지 알 길이 없었지만 의미는 동일했다.
“돌아왔나 보네.”
빨간 장미. 사랑이라는 꽃말답게 선물할 때 흔히들 쓰는 꽃이지만, 나는 장미 향을 좋아하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같이한 시간은 길지만 소통은 턱없이 부족했던 것 같다. 애초에 놈에게 싫다는 표현은 자제하려고 노력했던 탓도 있었다.
“이제라도 싫어한다고 말하면 다른 꽃으로 바꿔 주려나…….”
나를 포함해 이 방 안엔 온통 미지근한 것들뿐인데, 붉은 장미는 눈이 아프도록 쨍해서 조금은 버겁게 느껴질 정도였다. 급속도로 피곤해진 느낌에 질끈 눈을 감았다.
“어, 일어났네.”
흐리멍덩한 시야가 들려온 목소리에 선명해졌다. 이제 노크 따위는 하지 않기로 한 모양인지 이미 문을 열고 들어온 김세한이 보였다. 나의 외출 사건 이후, 김세한은 미묘하게 달라졌다. 그중 하나는 몇 걸음을 놔두고 멈추어 서던 버릇이었다. 놈은 더 이상 내가 오기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웰컴 인사 받으러 왔어.”
몸을 일으키기가 무섭게 성큼 다가온 녀석이 나를 품에 안았다. 씻고 온 모양인지 몸에선 향수 냄새 대신 비누 냄새가 났다. 나는 순순히 김세한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전과 같은 여유로움이 없는 김세한은 나에게서 어떤 이름 모를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어서 와.”
“많이 보고 싶었어.”
“응, 나도.”
정해진 대사 같은 말이었다. 정답을 말한 모양인지 놈이 조금 떨어져 나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일어났나 보네.”
“아, 많이 부었지?”
“아냐, 예뻐.”
여느 연인 같은 대화가 오가면 다음은 입을 맞춘다. 춥-짧게 입술이 겹치고 떨어졌다. 날 내려다보는 그의 눈가가 조금 어두워 보였다.
“다녀와서 잠은 좀 잤어?”
내 물음에 그는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음…… 이제 자야지.”
다시 보니 눈이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고, 얼굴이 유독 창백했다. 밖에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궁금했지만 몰려오는 피로감에 물음표 대신 마침표를 택했다.
“피곤하겠네. 어서 가서 자.”
아, 또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흐르는 적막. 요즘 들어 이런 일이 적지 않게 있었다.
“그래. 자야지.”
중얼거리는 듯한 목소리. 피곤해 보이는 김세한의 눈이 밑으로 향하고, 곧 내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이따 저녁 식사나 같이할까?”
놈은 천천히 눈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마주친 눈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자.”
정해진 패턴에 진부함을 느끼는 건 나뿐인 건가. 아니면 놈도 마찬가지일까.
그가 방을 나서고 또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는 듯했다. 차나 커피를 마시고, 아무런 생각 없이 창밖이나 천장을 바라보다, 테리와 몇 마디를 주고받으며 웃음 짓는 하루.
“저녁 식사하시러 가시죠.”
“아, 맞다. 그랬지.”
테리의 말에 그제야 읽고 있던 소설책을 내려놓았다. 나는 이제 힐러 문헌을 보지 않는다. 쓸데없어졌으니까.
그의 저녁 제안이 오늘 아침 일인데 까먹고 있었다니. 화장대 앞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빛바랜 사진처럼 무료하게 느껴졌다. 오늘따라 부스스해 보이는 머리를 매만지다 대충 립스틱을 바르고 몸을 일으켰다.
“옷은 안 갈아입으셔도 되겠습니까?”
테리의 물음에 잠시 닫힌 옷장을 바라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의 물음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내가 지금 입은 옷은 잘 때만 입는 하얀 원피스였기 때문이었다. 포인트라곤 가슴 부근에 달린 단추 몇 개 정도인 수수한 디자인이었다. 잠옷 개념인 옷이었지만, 어느 순간 그 경계가 흐릿해졌다. 그건 내 하루가 엉망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
잠들 시간이 아닌데도 자고, 종종 자느라 식사를 거르곤 해서 시간 개념도 모호해져만 갔다. 거울 속 푸석한 피부와 건조해 갈라지려는 입술, 살이 빠진 탓에 꺼진 볼까지 정말 완벽하게 초라한 모습이었다. 지금 내겐 이 후줄근한 원피스도 과분했다. 거울을 보고 있자니 유독 혼자 채도 높은 립스틱이 거슬려 그마저도 손등으로 쓸어 지워 냈다.
“됐어. 많이 이상하지는 않잖아.”
“아. 그런 뜻이 아니라. 음…….”
“가자.”
“네.”
3개월. 그동안 김세한이 방에 있는 날은 거의 매번 이 복도를 걸었다. 그가 끊임없이 나를 찾아오고 불렀으니까.
‘아까 같은 정적이 흐르면 또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차라리 밤에 나를 찾았다면 별다른 이야기가 오가지 않을 것이었다. 몸을 섞을 땐 오가는 숨소리가 전부였으니까. 저녁 식사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둘만 있게 될 것을 상상하자 벌써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똑똑—
테리가 문을 두드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세한이 문을 열었다. 마치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듯한 속도였다. 나를 반기듯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그가 보였지만, 내 시선은 곧바로 그 너머로 향했다. 나는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저 뒤통수를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뒤돌아본 이재현과 눈이 마주쳤다. 몇 달 전, 놈이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그날이 겹쳐 보였다.
“같이 먹어도 괜찮지?”
김세한의 그 물음까지 똑같았다. 선뜻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는 나를 바라보던 김세한이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테리를 불러 세웠다.
“테리, 너도 식사 같이하자.”
“네? 저 말씀이십니까?”
테리의 목소리에선 당황스러움이 그대로 느껴졌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선 테리의 걸음이 무색하게 김세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연한 표정의 김세한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경험들이 머리를 스치자 가슴 안쪽에서부터 스멀스멀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그래. 테리가 너 말고 또 누가 있겠어. 혹시 싫어?”
“아뇨, 영광입니다.”
내리깔린 시야로 언뜻 허리를 숙인 테리가 보였다. 선명히 들리는 테리의 침 삼키는 소리가 이 상황이 얼마나 구린내를 풍기는지 알려 왔다. 김세한은 다시 나를 내려다보며 눈썹을 까딱였다. 안 좋은 예감이 든다 한들 선택지는 하나뿐이었기에, 그를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갔다.
“…….”
“…….”
이재현은 몸을 일으켜 내게 허리를 숙였다. 테리를 통해 소식만 들었을 뿐, 놈의 얼굴을 보는 것도 3개월 만이었다.
“그럼 먹지.”
김세한이 포크와 나이프를 들자 하나둘 따라 들기 시작했다.
‘이 조합, 정말 장관이군.’
숨이 막히는 식사 자리였다. 접시에 나이프 닿는 소리 정도만 들려올 뿐, 별다른 이야기는 오가지 않았다. 차라리 이대로 아무 말 없이 식사를 마치면 좋으련만. 김세한의 와인 잔이 세 잔째 비워졌을 때였다.
“3개월 만인가. 이렇게 넷이 모였던 적이 있는 거 같은데.”
불쑥 이 식사 자리의 초대자, 김세한이 침묵을 깼다. 3개월 전이라면, 나의 외출이 있던 날이다. 나는 고개를 들어 테리와 이재현의 얼굴을 살폈다.
음식을 씹던 두 놈의 입은 멈춰 있었다. 이재현은 시선을 옮겨 김세한의 접시 부근을 응시했지만, 올라오지 못한 채 다시 제 접시로 되돌아갔다. 반면 테리는 그대로 얼어 버린 듯 고개를 숙인 채로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이 자리가 그에게 얼마나 불편한지 느낄 수 있을 만큼 창백한 얼굴이었다.
‘무슨 생각 일까?’
김세한이 목적 없이 이 둘, 그리고 나를 한자리에 앉혔을 리가 없다.
“그 얘기, 하지 않으면 안 될까? 그다지 하고 싶지 않은데.”
그런 이야기를 꺼내 봤자 여기 앉은 인간 중 이득 볼 자는 없어 총대를 멨다. 김세한에게 거절 의사를 표할 수 있는 사람은 이들 중에 그나마 나뿐이니까.
“왜? 너한텐 좋았던 기억 아니야?”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테리와 이재현의 표정을 살피던 내가 옆자리의 김세한을 돌아보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삐딱하게 턱을 괸 채 나를 바라보고 있던 놈과 눈이 마주쳤다.
“이제야 날 보네.”
“…….”
턱 막혀 오는 가슴에 나는 크게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풀린 눈이 놈이 취해 있다는 걸 알려 왔다. 묘하게 어린아이 같은 말투도, 맘불만스러운 표정도 그랬다. 대체 뭐가 마음에 안 들어 괜한 시비를 거는 것일까. 바깥에서 보고 온 일이 잘 안 풀려서 화풀이 대상이 필요한 걸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만큼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였다.
‘적당히 맞춰 줘야 하는데.’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이재현과 테리를 바라보았다. 모두 그대로 굳은 채 자신의 접시에 눈을 박고 있었다.
“그냥 식사하자. 그러자고 모인 거잖아, 우리.”
좋게 넘어가려고 했던 내 말은.
“화났어? 또 고개 돌리고, 난 안중에도 없고. 그렇지?”
놈의 어리광과 빈정거림으로 돌아왔다.
‘더 가면 또 한바탕하겠군.’
내 판단이 맞는다면 이미 식사 자리는 엎어진 물이었다. 탁-소리 나게 포크를 내려놓곤 내 와인 잔을 소주 마시듯 비워 냈다. 역시 김세한이 좋아하는 와인은 내 입에 맞지 않았다. 소량임에도 타들어 가는 열기가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 가는 것만 같았다.
“……하아. 그만 먹을래. 난 다 먹었는데, 일어나도 되지?”
의자에서 일어나기 무섭게 김세한이 내 팔을 당겨 다시 앉혔다.
“어딜 가. 기껏 네가 좋아하는 두 사람 앉혀 놨는데. 더 있다 가.”
나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이 조합이 무슨 조합인지.
“네가 착각하나 본데, 둘 다 나한텐 다른 조직원들이랑 똑같아.”
“……그래? 내가 착각을 했나. 네 시선이 아직도 다른 쪽으로 향해 있는데.”
“유치하게 굴지 마. 아니라면 아닌 줄……!”
“증명해 봐.”
불안한 느낌. 놈과 함께 보낸 시간만큼 늘어 버린 직감이 내게 경고를 보내왔다.
“……뭐?”
김세한은 내 팔을 잡아당기고, 쇄골 부근을 지분거리며 말했다.
“지금 나한테 키스해.”
나지막이 울린 목소리에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왜, 못 하겠어?”
내 몸을 쓸어내리는 김세한의 손을 쳐 냈다.
“그만해. 너 취했어.”
쳐 냈던 손을 거두기도 전에 다시 김세한에게 손목을 잡혔다.
“왜 못 해. 누구한테 보이기가 두려워?”
놈이 손목을 강하게 잡아끌었고, 힘없이 일으켜진 내 몸은 앉아 있는 그의 앞으로 세워졌다. 김세한은 날 더 가까이 끌어당겨 배 부근에 얼굴을 묻었고, 그의 손은 원피스 끝자락부터 허벅지로 올라오고 있었다. 수치심에 손이 덜덜 떨리고 얼굴이 붉어졌다. 죽어도 이런 모습을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보스.”
이재현의 목소리가 울린 순간이었다. 탁-식기구를 내려놓고 몸을 일으킨 테리가 이재현의 어깨를 잡았다.
“나가자. 우리가 끼어들 때 아니야.”
“…….”
“여기 더 있는 건 페르 님한테 몹쓸 짓이야.”
속삭이는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테리는 깍듯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식사 맛있었습니다.”
테리의 인사에도 김세한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나는 점차 올라오는 김세한의 손을 막으려 필사적이었다. 눈물이 차올랐고 몸이 바들바들 떨려 왔다.
“세한아…… 제발 이러지 마.”
놈의 팔에 걸린 원피스 자락이 점차 올라갔다.
“빨리 일어나.”
이재현은 테리의 손에 잡혀 몸을 일으켰고, 나는 수치심에 눈을 질끈 감았다.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와 문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끄러움에 눈물이 떨어져 내렸고, 그저 빨리 두 놈이 여기서 나가길 바랐다. 이 이상의 비참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쨍그랑—
김세한의 팔이 찰나 나에게서 떨어져 식탁을 쓸었다. 음식을 담은 접시들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져 요란한 파열음을 냈다. 놈의 그런 행동에 놀랄 틈도 없이, 내 몸이 식탁 위로 눕혀졌다.
“싫어……. 하지 마.”
나의 거절은 곧 진득하니 입을 맞춰 오는 김세한에게 삼켜졌다. 그제야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절망스러웠다. 누군가에게 이런 모습을 보인다는 게. 특히 이재현에겐 내가 이렇게 힘없이 끌려다닌다는 걸 눈앞에서 보여 준 셈이었다. 내가 만든 주인공에게 말이다.
춥—
겹쳐졌던 입술이 떨어졌고, 나는 눈물을 떨어뜨리며 놈을 올려다봤다.
“넌 내 거야.”
나를 마주 본 눈은 광기를 품고 있었다. 숨을 타고 술 냄새가 풍겨 왔다. 어쩌면 이 모습이 놈의 진짜 모습인지도 몰랐다.
“이렇게 하려고…… 식사에 초대한 거야? 두 사람.”
“아니-, 널 믿고 싶어서.”
놈은 또다시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뭐……?”
“내가 요즘 여유가 없거든. 넌 내 건데. 분명히 내 것인데. 몇 번을 안아도 불안해. 그 이유를 오늘 알았어.”
“네가 알아낸 이유가 뭔데?”
“나만 널 보고 있어서.”
김세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놈의 집요한 시선에 나도 모르게 눈을 피했다.
“어딜 봐. 내가 아니면 누가 네 눈에 담겨?”
“…….”
“무슨 일이 있어도 넌 내 거니까. 네 마음을 어떻게 할 수 없다면…… 다른 놈들한테 널 넘보지 못하게 하는 거.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잖아.”
놈의 목소리는 조금 격양되어 있었다. 나는 축축한 눈가를 손등으로 닦으며 물었다.
“그래서, 이제 만족해?”
견딜 수 있다고 생각했다. 평소처럼 살면 된다고. 하지만 지금 놈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내 자존심을 짓뭉개고 저놈들 앞에서 이런 꼴 보여 줘서?”
연인 사이의 믿음이 사라진 순간, 필연적으로 생겨난 의심은 상처만 줄 뿐이라고.
“아니.”
날 내려다보는 붉어진 김세한의 눈에서 눈물이라도 떨어질 듯해 숨이 멈출 것만 같았다.
“속 시원할 것 같았는데. 더 이상 불안하지 않을 것 같았는데…….”
김세한이 이런 표정을 지을 때면 혼란스럽다. 이렇게 무례한 일을 당해 놓고도 왜 안타까운지. 이 어리광을 또 받아 줘야 하는 건지 고민했다.
“날 안 놓아준다며.”
난 내 목덜미를 만지며 말했다.
“여기에 네가 목줄 채워 놓은 거잖아. 뭐가 불안해. 이렇게 안 해도…….”
“사랑한다고 해 줘.”
아아. 놈이 불안한 이유는 주변이 아니라 나한테 있는 거였다. 난 떠나고 싶어 하고, 놈은 붙잡은 거니까.
“날 잡은 건 너라며. 이제 내 마음마저 바라는 거야?”
“…….”
“세한아, 너란 새끼는…… 항상 제멋대로야.”
내가 몸을 일으키며 놈을 밀어내자 쉽사리 내게서 떨어졌다. 식탁에서 내려오자 어질러진 방 안이 눈에 들어왔다. 엉망인 건 내 옷과 놈의 얼굴, 우리의 감정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마른세수를 하던 김세한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응, 마음 같은 거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데 엿 같더라고. 네 말대로 너의 주인이 나라면, 날 봐.”
“여기서 얼마나 더? 눈이라도 파낼 생각이야?”
“그럴까?”
놈의 대답에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지만, 뒤에 닿은 테이블에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내 눈 쪽으로 천천히 뻗어지는 손에 질끈 눈을 감았다. 긴장에 굳어 버린 눈꺼풀 위로 조심스럽게 놈의 손이 올려졌다.
“알려 줘. 널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해?”
“…….”
“비겁해. 기회도 준 적 없잖아, 넌.”
기회? 날 가질 기회? 어둠 속에서 들려온 원망 섞인 목소리에 머릿속엔 의문이 떠다녔다. 연인으로 보낸 3년이란 시간 동안 난 완전히 김세한의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마치 모든 권력이 나한테 있던 것처럼 말했다. 이 관계에서의 갑은 늘 김세한이었는데.
놈의 손이 떨어졌다. 조심스레 들어 올린 눈꺼풀, 흐릿한 시야 너머로 옅은 미소를 지은 김세한의 얼굴이 보였다.
“사랑하는 사람 이름도 몰라, 나는.”
놈은 한숨을 내쉬며 또다시 마른세수했다. 또 김세한의 입에 내 이름에 관한 이야기가 올랐다. 평소엔 꺼내지 않았던 주제였다. 엘리베이터에서 이별을 앞두고 비슷한 말을 했으니 이걸로 두 번째였다. 그때와 상황이 비슷했다. 김세한의 눈을 빨개져 있었고, 감정은 격양되어 있었으며, 마치 벼랑 끝에 서서 말하는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그깟 이름이 뭐라고.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이름 같은 건 그저 핑계일 뿐이었다. 그가 궁금해하고 있는 건 아마 나란 인간 자체일 가능성이 높았다. 김세한이라는 존재와 이 세계를 완전히 뒤엎어 버릴…….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비밀. 그래서 나는 아무런 말도 ‘시작’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네 말대로 우리의 시작이 그래서였을까. 너의 사랑한다는 거짓말이라도 들으려면 네가 다시 날 필요로 해야 하고, 넌 지금 내가 필요하지 않잖아.”
김세한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놈은 아직 내가 먼저 손을 놓았던 순간에 머물러 있는 듯 보였다. 내 손을 잡아 올린 김세한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문제가 뭘까 생각해 봤어.”
낮게 깔린 눈이 또다시 불길한 예감이 들게 했다.
“네가 너무 쓸모가 생겨서 그래. 여기서 나가서 다른 쪽에 빌붙을 생각인 거잖아. 그렇지?”
쓸모. 힐러의 능력을 뜻하는 것이었다. 실제론 몬스터 하나 처리 못 하는 보잘것없는 이 힘이 김세한에겐 위기의식을 느낄 만큼의 존재감을 가진 이유는 뭘까. 실제로 외출 사건이 있었을 때도 들어갈 길드를 찾는 것부터 고난이었는데 말이다. 김세한은 내게 바늘구멍 정도의 기회를 주는 것도 두려워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내 손이라도 부러뜨리게?”
비꼬듯이 뱉은 말에 김세한은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생각 안 해 본 건 아니야.”
“뭐?”
“근데 그것보다 좋은 생각이 났어. 네가 날 필요로 하게 만드는 법, 나한테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법. 좀 거친 방법을 써 볼까 해, 자기야.”
웃음기가 싹 가신 놈의 얼굴에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저런 표정 다음에 나올 말은 언제나처럼 충격적이고 진심일 테니까. 놈은 더 물러설 수 없어 테이블에 닿아 있는 내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힘없이 끌려간 몸이 김세한의 몸에 틈 없이 밀착했다. 난 그의 가슴을 밀어냈지만 꿈쩍하지 않았다.
“이게 무슨…….”
나는 놈을 쏘아보듯 올려다보았고, 반쯤 뜨인 미동 없는 눈과 마주쳤다.
“우리, 아이 갖자.”
귀를 의심했다. 그다음엔 이놈이 진심인지 확인했다.
“……뭐?”
“말 그대로야. 아이 갖자고. 넌 그냥 눈만 감고 있으면 돼.”
언젠가 이재현에게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 당신이 평생 무력하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는 상태로 머물러 주길 바라서요.
- 장담컨대. 이런 날갯짓이 계속되면 언젠가 날개를 부러뜨리는 날이 올 겁니다.
놈은 내 자유를 빼앗으려 하고 있었다. 내 심장은 공포로 오그라들었다. 난 이미 충분히 무력했고, 비참했고, 불행했다. 내가 만든 주인공에게 여기까지 몰리면서 이보다 더한 바닥은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김세한은 나를 짓누르다 못해 절벽 밑으로 끌어 내리려 했다. 머리에서 피가 싹 빠져나가는 듯했다.
“하아……. 네가 드디어 미쳤구나?”
“응, 좀 미쳤는지도 모르겠네.”
“이거 놔.”
내 허리를 감싼 놈의 팔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 하지만 몸부림칠수록 덫처럼 날 더 강하게 옭아맬 뿐이었다.
“지금 이거, 폭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넌 나랑 얼마나 있을 생각이었는지는 몰라도, 나는 계속 생각하고 있던 문제였어. 형이 얘기 꺼냈을 때도, 그런 충동이 들었을 때도 다 참아 냈어. 왜냐면 네가 스스로 올 때까지 기다리고 싶었으니까.”
“……이제 그른 거 아니야? 네가 생각해도 우리 사이, 이제 정상 아니잖아.”
고개를 저으며 미간을 좁혔지만 날 내려다보는 김세한의 눈은 나와 소통하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 안 기다리려고.”
“야…….”
“아이가 생기면 너도 여기에 미련이 생기겠지. 책임감 강한 네가 아이를 두고 떠날 생각은 안 할 테니까. 넌 아이를 지킬 힘이 없으니 내가 필요하게 될 거야.”
머리부터 돋아난 서늘한 감각이 발끝까지 삽시간에 퍼져 갔다. 놈은 내 머리카락 끝자락을 손가락으로 말아 올리며 말했다.
“결혼하자, 우리.”
언젠가 김세한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설마 이런 분위기에서 청혼을 받으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최악이었다.
“……거절할게.”
“그래, 결혼은 아이가 생긴 뒤에 생각해도 늦지 않아.”
같은 언어를 쓰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말이 통하지 않았다. 김세한의 억지에 질릴 대로 질려 한껏 인상을 찌푸릴 때쯤이었다.
놈은 와인을 입에 털어 넣었고, 그대로 나와 입을 맞추었다. 뭘 어떻게 할 겨를도 없이 입 안을 가득 채운 와인이 목으로 흘러들어 갔다. 쓰디쓴 입 안엔 놈의 살덩이가 밀려들어 와 숨통을 막았다.
콜록-콜록—
입술이 떨어지고, 나는 그제야 괴로운 목구멍을 잡고 캑캑댔다. 입 안 가득 알코올이 남긴 뜨거운 열기가 맵다고 느껴질 만큼 맴돌고 있었고, 고통에 눈물이 고였다. 놈은 그런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들어 올렸다. 정신없이 뱉어지던 기침이 멈추었을 땐 이미 침대에 눕혀진 후였다. 내 위로 올라탄 김세한에게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비켜. 마지막 경고야.”
“내 마지막 경고는 이미 끝났어.”
“너 진짜 갈 데까지 갔구나.”
“응. 누가 날 착실히 엿 먹인 덕에.”
놈은 침착히 원피스 가슴께에 달린 몇 개의 단추를 풀어냈다. 그 손이 맨살에 닿을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단추가 하나씩 풀어질 때마다 좌절감과 무력감이 밀려와 눈앞이 깜깜했고, 시린 눈 주변 근육이 파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눈을 감으면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아 억지로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내 탓이라는 거야?”
내 물음에 마지막 단추로 향하려던 놈의 손이 멈춰 섰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김세한이 소리치듯 말했다. 아니, 화를 내는 듯한 목소리였다. 나를 내려다보는 놈의 미간이 깨지듯 구겨졌다. 늘 듣던 게 당연했던 말이 화살처럼 날아와 귀가 아닌 가슴을 후볐다. 김세한의 숨은 거칠어져 있었고, 눈가는 붉었다.
“이제껏 단 한 번이라도 네가 먼저 사랑한다고 말한 적 있어?”
“…….”
“난 충분히 기다렸다고!”
그가 ‘사랑해’라는 말을 입에 담았던 순간들이 수없이 머리에 스쳤다. 동시에 언제부터 불만이었던 걸까, 언제부터 기다린 걸까, 라는 의문이 피어올랐다. 지금에서야 이런 이야기를 꺼낸다는 건, 격해진 감정에 무의식적으로 내던진 말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난 잘 알고 있었다. 벼랑 끝에 몰린 인간이 뱉는 말은 뒷일을 생각하지 않기에 내뱉을 수 있는 진심이라는 것을.
“그런 말……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래.”
오르락내리락 바쁜 그의 가슴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덤덤하게 말했다. 김세한이 벌거벗은 채 나를 마주했으니, 나도 애써 주워 입었던 ‘김세한의 애인’이라는 옷을 벗어던졌다.
“사랑해.”
목구멍에서 뱉어 낸 말이 낯설게 공간을 울렸다. 그 짧은 한마디에 김세한의 눈이 조금 흔들렸다. 그 반응에 나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어때. 이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넌 구별이 돼?”
“…….”
“난 안 돼. 널 마주한 내 마음은 늘 이 모양이야. 우리 관계는 처음부터……!”
“아니야!”
그가 내 말을 끊어 내듯 소리쳤다. 마치 나의 다음 말을 이미 예상한 것처럼 핏발 선 눈이 내게 화를 내고 있었다. 으르렁대듯 일렁이는 눈을 똑바로 마주한 채 말했다.
“아니, 너도 잘 생각해 봐. 넌 날 사랑하는 게 아니야. 처음부터 지금까지 똑같아. 흥미일 뿐이고, 네 물건에 대한 소유욕일 뿐이지.”
“…….”
“말마따나 이름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이라니,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보란 듯 실소를 흘리며 늘 품어 왔던 의문을 던졌다. 조금 커진 김세한의 눈, 옅은 눈동자에 내가 비쳤다. 끓어오르듯 했던 눈은 어느새 어항의 수면처럼 잔잔해져 있었다. 잔뜩 고양된 감정을 억누르는 듯 천천히 숨을 내쉬던 그가 마찬가지로 실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네가 뭘 안다고…….”
“알아.”
“아냐, 넌 몰라. 내가 얼마나 오랜 시간을 버텨 왔는지, 어떤 마음으로 널 안아 왔는지. 널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놈의 허벅지가 다리 사이로 밀려 들어왔고, 나는 놈을 밀어내려 팔을 뻗었다. 휙. 그는 내 손목을 잡아 올려 머리 위에 고정했다.
“놔…….”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내가 지금 이 상황을, 놈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나를 내려다보는 눈엔 다시 한번 광기가 담겼다.
“다시 말해 봐. 그때처럼 살려 달라고. 나한테 사랑을 애원해 봐.”
김세한은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다. 동시에 나는 지금이 되돌릴 수 없는 파멸의 순간이라고 느꼈다.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나도 놈도 다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지금 여기 어느 하나 행복한 사람이 없었으니까.
“넌 이게 정말 사랑이라고 생각해?”
내가 알고 있는 사랑과 놈이 알고 있는 사랑의 개념은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는 걸까. 적어도 나에겐 놈이 사랑이란 이름 아래 하는 모든 것이 미친 짓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사랑이…… 아니라도 상관없어.”
“…….”
“내가 널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있지, 내가 지금 너한테 잔인한 실수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아.”
“날 상처 준다 해도, 하겠다고?”
“너와 내 마음이 다치더라도, 널 영영 잃지 않을 방법이라면 얼마든지. 이 불안함만 덜어 낼 수 있다면. 응, 얼마든지. 미안해.”
언뜻 그의 눈에 비친 슬픔에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김세한.”
“우린 둘 다 벼랑 끝에 서 있어. 네가 날 구해 주지 않을 거라면, 나랑 같이 나락으로 가 줘.”
설득하려던 내 목소리는 그대로 놈의 입술에 삼켜졌고, 잡힌 손목은 욱신거렸다. 내 모든 애원과 저항에 대한 그의 대답은…….
“사랑해.”
그 한마디뿐이었다. 밑에서부터 들어 올려진 원피스가 그대로 벗겨져 나갔고, 김세한을 밀어내려 애쓰는 내 두 손은 여전히 놈의 손안에 있었다. 김세한은 흐리멍덩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다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를 뱉었다.
“그만 포기해, 자기야. 다칠라.”
그게 나지막한 경고로 들려서 침을 삼켰고, 눈을 맞춘 채 남은 손으로 브래지어의 버클을 풀어낸 그가 그대로 입을 맞추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섞여 드는 혀는 여전히 거칠었고, 가슴을 주무르는 손길엔 애무라기엔 아플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입에선 고통 어린 신음이 흘렀지만 틈 없이 맞춰진 입술에 먹혀 들어갔다. 뚝뚝 눈물이 흘렀고, 마침내 떨어진 입술 사이로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그는 여전히 멍한 눈으로 내 눈물을 핥아 올리곤 그대로 내 속옷 안에 손을 넣어 파고들었다.
“하지 마……. 하고 싶지 않아.”
내 말에 반응한 듯 속옷 안에서 원을 그리던 손이 돌기를 꼬집듯 눌렀고, 갑작스러운 자극에 몸이 크게 들썩였다. 눈앞이 핑 도는 감각은 쾌락이라기엔 고통에 가까워 인상을 찌푸렸지만, 김세한은 표정 없이 나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나라서 하고 싶지 않은 거야? 다른 놈이었으면?”
“…….”
단단히 엇나간 김세한과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내 속옷 안에서 나온 손이 자신의 버클을 풀어냈다. 꼿꼿하게 서 있는 김세한의 중심부에 고개를 저으며 내 위로 올라탄 놈의 어깨를 밀어냈다. 김세한은 그런 내 손이 거슬린다는 듯 다시 한 손으로 내 두 손을 모아 잡았고 남은 손으론 능숙하게 내 속옷을 끌어 내려 벗겼다. 아직 다 젖지도 않은 밑에 차가운 바깥 공기가 닿았다.
“너 뭐 하는 거야.”
“말했잖아. 너무 불안하고 조급해서 못 참겠다고.”
밑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감각에 허리가 떨렸다.
“세, 세한아…….”
애원하듯 그의 이름을 뱉었을 때, 다가온 김세한이 그대로 입을 맞춰 왔고, 아래에서는 억지로 밀고 들어온 묵직한 놈의 것이 배 안 가득한 통증을 만들어 냈다. 그는 기어코 준비도 안 된 내 안으로 자신의 것을 끝까지 밀어 넣었다. 더군다나 콘돔도 끼지 않은 상태였다.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몸이 바들바들 떨려 왔고, 발끝이 꼿꼿하게 세워졌으며, 맞춰진 입술 사이로 비명이 새어 나왔다. 그런 내 반응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는 마지막 반항으로 숨 막히게 내 입 속을 헤집는 김세한의 살덩이를 깨물었고, 곧 입 안 가득 피비린내가 퍼졌다. 하지만 입술은 떨어지지 않은 채 오히려 더 깊숙이 파고들어 왔다.
“읍!”
놈의 혀에서 흘러나온 피가 끈적하게 엉켜 든 침과 함께 강제로 목구멍으로 삼켜질 때쯤, 놈은 입을 떼어 내고 입 주변으로 흘러나온 피를 손등으로 닦아 냈다.
“더 꽉 깨물지 그랬어.”
진심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말을 뱉은 그가 보란 듯 입 안에서 혀를 굴리며 나를 빤히 응시했다. 그걸 보고 있자니 입 안 가득 남은 피의 맛이 느껴졌고, 아직 그와 혀를 섞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는 낮은 한숨을 내쉬고 내 배 부근을 쓸어내리다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윽, 으……! 안 돼. 움직이면…… 움직이지 마. 아파……! 흐윽……!”
아직 건조한 밑은 김세한이 허리를 뒤로 빼 빠져나갈 때마다 끝까지 엉겨 붙어 주변 살덩이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고통을 가져왔고, 안에서 마찰할 때마다 찰과상이 나는 것처럼 날카로운 아픔이 밀려들었다. 괴로워 고개를 가누지 못하는 나를 내려다보는 김세한의 눈에서는 아까와는 달리 욕망이 보였다.
“확실히 좋네. 네 안이 어떤지 더 생생하게 느껴져.”
“흐윽, 아, 아파아……! 아파, 흣!”
내 위로 포개듯 몸을 겹친 김세한이 잡고 있던 내 손을 놓아주었지만, 밀어낼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좋아……. 좋아해.”
내 어깨에 고개를 묻은 김세한은 내 귓가에 속삭이듯 말하며 허리를 강하게 쳐올렸다.
“아윽……! 윽!”
움찔대는 내 몸을 지탱하듯 두 팔로 허리와 갈비뼈 부근을 감싸 안은 그가 내 안을 깊숙이 파고들고 빠져나가길 반복했다. 몸은 비명을 질러 대는데 도망갈 구멍이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아, 밑에서 퍼지는 날 선 고통에 흐느낄 뿐이었다. 거친 허리짓에서 나에 대한 배려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귓가를 울리는 쾌락에 젖은 낮은 숨소리가 지금 그가 오로지 욕망을 채우는 것에 눈멀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아, 흐, 아으……! 윽……. 윽, 윽…….”
한참을 고통에 몸부림치고 나서야 젖어 든 밑에서 다소 건조한 마찰음 대신 철퍽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덕분에 통증은 사그라들었지만, 김세한도 움직이기 편해졌는지 한층 격해진 허리짓이 이어졌다.
“세한아……! 하읏, 그만, 윽, 안 돼……. 안에는, 하윽.”
“…….”
“안 돼……. 제발 안에는……. 읏, 빼…… 줘. 무서워.”
불길한 예감에 힘이 다 빠진 손으로 김세한의 어깨를 밀어내며 애원했지만, 내 허리를 감싼 손엔 더욱 힘이 들어갈 뿐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겹쳐진 몸은 그 자체로 나를 눌러 오고 있어, 몸은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지만, 노력이 무색하게 깊숙이 안으로 밀려들어 온 놈의 몸이 작게 떨리는 게 느껴지곤 귓가에 낮은 숨이 뱉어졌다.
“하아…….”
“아윽, 흑……. 흐으……. 싫어.”
그는 방금까지와 달리 느릿하고 뭉근하게 허리를 움직였고, 안은 아까보다 질척이고 있었다. 곧 느릿하게 그의 것이 내 안을 빠져나갔다. 얼마 가지 않아 엉덩이골 사이로 따뜻한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정말…… 안에다 했어. 그렇게 애원했는데.’
발끝부터 퍼진 차갑게 식은 피가 서서히 몸을 잠식할 때쯤, 포개었던 몸을 일으킨 그는 내 밑을 바라보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벌어진 다리를 오므릴 새도 없이 김세한은 흘러내린 자신의 것을 손가락으로 쓸어 올려 아직 고통이 남아 있는 내 안으로 다시 밀어 넣었다.
“이거론…… 부족해. 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싫, 읏.”
“얼마나 하면 생길 거 같아? 응?”
위험을 감지하고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 순간 김세한이 내 발목을 잡아당겨 그 부근에 짧게 입을 맞추곤 가볍게 내 몸을 뒤집었다.
“자기야, 허리 세워.”
“이거…… 놔. 으윽.”
“아, 그래. 내가 세우면 그만인데.”
우느라 높아진 내 목소리와 달리 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허리부터 배를 감싼 김세한의 팔이 나를 위로 들어 올렸다. 원치 않아도 허리가 높이 들렸고, 곧 단 한 번에 그의 것이 깊숙하게 들어와 내 안을 채웠다. 질척이는 안쪽에선 아직 그의 흔적과 내 애액이 뒤엉켜 작은 움직임에도 찔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아윽……! 흐윽.”
“신기하다. 너한테 이 짓을 하고도…… 아직도 널 보며 세우고 있는 내 자신이.”
“흐으윽……. 미친 새끼…….”
“맞아. 그런가 봐. 더 욕해.”
김세한은 내 골반을 잡은 채 허리를 흔들었고, 뒤로 들어온 그의 것은 그 전보다 더 깊숙이 들어와 배 안을 다 부술 듯한 고통을 남겼다. 내가 싫어하는 탓에 평소엔 하지 않던 체위였다.
“그, 만……. 세, 세한, 우윽……. 아파……. 읏, 아파, 깊어. 아윽!”
골반을 잡은 김세한의 손을 떼어 내려 버둥댔지만 역시 떨어지지 않았다. 아까 김세한의 입으로 받아넘긴 술의 취기가 올라오는 것인지 그의 허리짓에 몸이 흔들릴 때마다 머리가 윙윙댔다. 무력하게 흔들리는 몸덩이가 마치 고깃덩어리처럼 느껴졌다. 그런 기분이 드는 건 아마 배려 없이 내 안에 밀려들어 오기 급급한 김세한 탓일 것이다.
“엄청 깊이 닿았어……. 너 여기 좋아하잖아.”
“읏, 안 돼, 이제 그만해. 아흑, 더는!”
그가 내 몸을 완전히 덮듯이 몸을 포개어 왔다. 등을 온전히 감싼 열기에 그에게 잡아먹혔다는 착각이 들 때쯤, 김세한이 내 목덜미에 이를 박아 넣었다.
“아으흑! 아, 아파!”
고통에 눈물이 흘러내렸고, 깨문 자리를 핥는 뜨거운 혀의 감촉이 느껴졌다.
“넌…… 아무 데도 못 가.”
“윽, 아흑, 하아…….”
“하……. 좀 더…… 좀 더 나약해져서 날 필요로 해 봐.”
고통은 생생한데 머리는 바보가 되어 버린 것처럼 점점 마비되어 가는 것만 같았다. 김세한의 목소리도 귀에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하게 들려와 무슨 말인지 인식할 수 없었다. 다만 몸이 부서질 것 같았고, 내가 지칠 대로 지쳐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김세한의 것이 또 한 번 내 안을 깊고 힘 있게 파고들어 작게 전율했을 때, 그가 또 내 안에 사정했음을 알았다. 그가 내 안을 빠져나감과 동시에 풀썩 몸이 침대 위로 늘어졌다. 엎드린 채 버티던 팔에도, 무릎 꿇었던 다리에도 힘이 다 빠져 움직일 수 없었고, 다리 사이론 또 뜨끈하고 미끈한 액체가 그 열기를 남기며 허벅지 위로 흘러내렸다.
“하아……. 하아…….”
가쁜 숨이 내뱉어졌고, 놈이 빠져나간 밑은 온몸이 저릴 만큼의 고통을 만들어 냈다. 김세한은 축 늘어진 내 몸을 똑바로 눕히며 다시 몸을 겹쳐 왔다. 마치 목이 마른 사람처럼 조급하게 내 입 속을 헤집고는, 내 목과 가슴을 혀와 입술로 빨아 당겼다. 여기저기 흔적을 만들 듯하던 그가 자신의 것을 내 허벅지에 문지르듯 움직였고, 얼마 안 가 단단히 세워졌다. 아니나 다를까. 벌려진 다리 사이로 또 자신의 것을 밀어 넣은 그가 고개를 젖히며 신음하는 나를 상기된 얼굴로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네 안…… 내 걸로 가득해.”
“하아……. 으……. 하아…….”
“자, 이제 네가 누구 건지 알겠어?”
대꾸할 기력도, 날 눌러 오는 김세한을 밀어낼 기력도 없었다. 나는 그저 힘없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그를 받아 낼 뿐이었다. 김세한은 내 목덜미에 고개를 묻은 채 거친 숨을 뱉어 냈고, 나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냥 빨리 이 시간이 끝나길 바랐다. 초점이 나간 채 한참을 흔들리다 다시 입을 맞춰 오는 김세한을 빤히 바라보았다. 광기를 두른 채 번뜩이던 눈은 어느새 깊이 가라앉아 지친 내 얼굴을 담고 있었다.
술이 깬 탓일까. 밀어붙이기 급급했던 움직임이 부드러워졌고, 엉켜 드는 혀가 다정해졌고, 내 머리를 넘기는 손이 조심스러워졌다. 귀에 속삭이는 ‘사랑해.’라는 말이 슬펐다.
“으응, 흥, 아응……. 흐으.”
내 의지와 달리 숨소리에 섞여 흘러나오는 신음과 철퍽이는 소리가 방을 가득 메울 때쯤, 그가 늘어진 내 손에 깍지를 끼어 왔다. 김세한의 허리가 또 한 번 크게 요동쳤고, 그대로 늘어졌다.
“하아……. 하아…….”
“……읏.”
거친 숨소리가 내 위로 몸을 늘어뜨린 김세한에게서 흘러나왔고, 나는 아직 안에 그의 것을 품은 채 작게 전율했다. 다리 사이가 내 것인지 김세한 것인지 모를 액체들로 끈적했고, 벌어진 내 입에선 타액이 흘러나왔다. 마침내 그는 나를 완전히 굴복시켰다. 자존심은 물론이고 내 이름 아래 가졌던 존엄성도 다 산산이 부서져 도마 위 물고기가 되어 버린 거 같은 기분이었다.
‘지쳤다……. 힘들어.’
자포자기라는 말이 맞을까. 보지 않아도 내 안이 놈의 것으로 채워져 있다는 게 느껴졌다. 결국 신뢰의 벽을 완전히 허물고 말았다. 멈추었던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 겹쳐졌던 몸이 떨어지고, 안을 채우고 있던 김세한의 것도 빠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허리 통증이 밀려왔고, 감각이 없어진 밑 부근에 서늘한 공기가 채워졌다. 이제야 특유의 비릿한 냄새가 내 몸에서 나고 있다는 자각이 들었다. 엉덩이 아래로 흘러내리는 김세한의 것이 생생하게 느껴져 왔다.
‘힘들어.’
머리도 몸도 하나둘 의식을 잃어 가 시체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을 때, 나는 쓰러진 것처럼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아침이 오고 있었다. 그대로 지쳐 잠들었던 모양이다. 너무 많이 운 탓일까. 눈가가 따갑고 온몸이 욱신거렸다. 주변은 어제 일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엉망인 그대로였다. 미세한 새벽의 서늘한 빛, 바닥에 널브러진 음식물과 깨진 접시, 내 다리 사이, 옆에서 잠든 듯 보이는 김세한. 속이 울렁거렸다.
‘씻고 싶다.’
저 멀리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옷을 대충 주워 입었다. 어젯밤 놈이 풀어냈던 원피스의 단추를 잠글 때쯤이었다.
“어디 가?”
부스럭 소리에 깬 건지 놈이 손등으로 눈을 덮은 채 말했다. 과음 탓에 머리가 아픈 건지, 내내 미간이 찌푸려져 있었다.
“……내 방.”
“자고 가.”
“여기서 잠이 안 와.”
정확히는 놈 옆에서 잠이 안 오는 거였지만.
“갈게.”
“……가지 마.”
“갈래. 이 정도는 네가 양보해. 나 지금 너무 지쳤어.”
“…….”
나는 그의 침묵을 승낙으로 받아들였다. 엉망이 된 음식물들과 접시 파편들을 피해 걸었다. 이 엉망이 된 방이야말로 지금 우리 관계를 표현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문고리를 잡은 순간 잊고 있던 말이 떠올랐다. 이제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싶지만.
“세한아.”
나는 놈의 이름을 부르며 문을 열었다. 눈을 덮고 있던 김세한의 손이 들어 올려졌다.
“나 장미 안 좋아해.”
몽롱해 보이는 눈이 내게로 향했다.
“아아. 그런가.”
놈은 손등으로 다시 자신의 눈을 덮었고, 나는 그대로 방을 나왔다. 탁-문이 닫히는 순간 한숨이 새어 나왔다. 방금의 대화가 우리의 상황인 것만 같았다. 그가 내게 주었던 수많은 장미가 노력이었다고 친다면, 난 그것을 좋아하지 않은 거니까. 그걸 더 빨리 알리지 않은 나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었다. 대체 우린 얼마나 엇갈려 왔던 걸까.
“어…….”
생각에 빠졌던 내가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다. 문 바로 옆, 벽에 기대어 있는 이재현과 눈이 마주쳤다.
‘얘가 왜 여기에…….’
이재현은 벽에서 몸을 떨어뜨려 내게로 한 걸음 다가왔고, 나는 반사적으로 닫힌 방문을 확인한 뒤 곧장 놈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적어도 이 문 앞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김세한의 방과 멀어지고 나서야 나는 그를 놓아주며 마주 보았다.
“뭐야. 너 왜 여기에 서 있어? 테리는?”
내가 잡았던 옷자락을 잠시 내려다보던 이재현이 눈을 맞추며 대답했다.
“선배는…… 쉬러 가셨습니다. 페르 님은 아마 오늘은 못 나오실 거라고 하시면서……. 저는 아까 못 말린 게 마음에 좀 걸려서요.”
“……밤새 서 있었다고?”
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화끈 얼굴이 달아올랐다. 문이 두껍다고는 하지만 안에서 나는 소리가 모두 들리지 않았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어제 지른 고함과 비명, 신음이 하나하나 지나가 콧잔등이 뜨거워졌다.
아직도 밑에선 김세한의 흔적이 흘러나와 속옷을 적시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게 사실인지 그저 이재현을 앞두고 불안함에 드는 착각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이런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고, 어디론가 도망쳐 숨고 싶은 마음만 확실했다. 부끄러움에 눈을 피하는 나와 달리 나를 찬찬히 훑어 내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별일 없었냐고 묻기엔 너무 노골적으로…….”
이재현의 손가락이 내 목 부근에 닿았다. 통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김세한의 흔적이 남은 부근 같았다.
“알아달라고 과시하는 듯한 모양새네요.”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내자 놈도 놀란 듯 손을 거두었다.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
“손목, 멍드셨습니다.”
이재현은 고개를 까딱여 내 손목 쪽을 가리키며 말했고, 나는 그제야 내 몸을 살폈다. 내내 욱신거린다고 생각했던 손목에 검게 멍이 올라와 있었다. 어제 발버둥 치는 날 제지하던 김세한의 손자국임이 분명했다.
“항상…… 이런 취급 받는 겁니까?”
평소와 같은 덤덤한 목소리였지만, 어쩐지 분노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아…….”
왜 항상 이재현에겐 이렇게 비참한 모습만 보이는 건지 모르겠다. 산산이 조각나 버린 자존심에 헛웃음이 나왔다.
“됐어. 이런 거 치료하면 돼. 나 힐러잖아.”
“그런 문제가…… 아닌 듯 싶은데요.”
“쓸데없는 애정 같은 거 기대한 적 없어. 우린 서로 필요 때문에 옆에 있는 거니까.”
그렇게 대답하고 나니 왜인지 가슴 한쪽이 아려 왔다.
“그거. 정말 연인 사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까?”
“…….”
“제 상식으론 자기 여자를, 다른 남자 앞에서 그렇게 다루는 게 이해되지 않아서요.”
이재현이 또 한 번 가슴을 후볐다. 이미 여러 상처로 파여 있는 가슴을 말이다.
“질투가 많거든. 미안하네, 괜히 둘 문제에 너랑 테리 끌어들인 거 같아서.”
나도 모르게 김세한을 감쌌다. 그건 아마 마지막으로 날 안았을 때 그의 눈에 비쳤던 절망감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이야기를 마무리하려 한 사과에 이재현은 더 할 말이 있다는 듯 입을 벙긋거리다 이내 삼켜 내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뇨, 오히려 말리지 못해서 죄송했습니다.”
“거기서 네가 뭘 어떻게 했겠어. 그때 끼어들었으면…… 아마 손목으로 안 끝났을 거야.”
떨어져 나갔던 론의 손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면서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이재현을 끌고 나가 준 테리의 판단이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그나저나 밤새 마음에 걸려서 기다렸다니…….”
“그러게요. 걱정돼서 발이 안 떨어지더라고요.”
“고마워. 그리고 조심해. 너한테도 괜한 화풀이 할지도 몰라.”
지금 김세한이 경계하고 있는 사람은 이재현과 테리 같았다. 하긴, 김세한의 입장에선 이재현이 나타났을 무렵부터 내가 이상해졌다고 느꼈을지 모를 일이었다. 이재현이 내 생각에 영향을 미친 건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했고, 두 번이나 나한테 치료를 받았으니까. 테리는 항상 내 옆에 있는 탓에 의심을 사는 듯했다. 내가 테리를 가장 편안해한다는 건 놈도 알고 있을 테니.
“걱정해 주시는 겁니까?”
이재현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눈썹을 찌푸렸다.
“넌 항상 이상한 타이밍에 웃더라. 김세한이 시끄러운 또라이라 그렇지, 너도 적잖이 미친놈이야.”
“감사합니다.”
“칭찬 같았어? 욕이었는데.”
장난투로 말하자 놈은 여전히 조금 웃음을 담은 얼굴로 나를 훑어 내렸다. 그러곤 허리를 굽혔다.
“그럼,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미련 없이 뒤돌아 멀어지는 이재현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디가 새하얗게 보이는 거로 보아 주먹을 쥔 그의 손엔 힘이 들어간 듯 보였다. 화가 난 걸까.
‘왜 또…….’
뻐근해지는 가슴께를 움켜잡았다. 우습게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다. 이 만남과 대화는 또 하나의 비밀이 될 테니까.
***
그날이 지나고 나선 또 평범한 하루가 계속되는 듯 보였다. 여기서 평범은 나와 김세한 사이에 고함이 오가지 않고, 서로 상처 주지 않는 하루를 뜻했다. 그 이후 김세한은 나와 식사를 같이하지 않았고, 날 자신의 방에 부르지도 않았다. 그저 잠시 자다 깰 때면 내 옆에 누워 있을 때가 몇 번 있을 뿐이다.
그런 김세한을 발견할 때마다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다. 목 언저리가 조금 불편한 정도의 숨 막힘이 있었지만, 그 감정의 이름을 찾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그만큼 지쳐 있었다.
“언제 왔어? 미안, 내내 잤네.”
“아니. 그냥 너 자는 거 보러 온 거니까 그냥 자.”
“……그래도 돼? 고마워.”
쏟아지는 잠에 순순히 놈의 품에서 잠이 들곤 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땐 내 옆에 누워 있던 김세한은 온데간데없었고, 아침밥을 가져온 테리가 나를 깨웠다. 마치 하루하루가 끊어진 필름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페르 님?”
“아……. 지금 몇 시야?”
“아홉 시 정도입니다.”
“아, 머리 아파.”
“너무 주무시니까 그런 거 아닙니까?”
이마를 부여잡은 채 몸을 일으켰다.
“으……. 김세한은?”
“나가 보셨습니다. 요즘 이래저래 일이 많으시네요.”
“그래? 잘됐네.”
김세한이 나가는 건, 나에게 마음 편한 일이 되어 버렸다. 적어도 나와 부딪칠 일이 줄어들 테니까. 그런데 꼭 이렇게 자유 시간을 가질 때면 무기력해지고 잠이 쏟아졌다. 왜 이럴까.
“나 요즘 왜 이러지, 테리? 졸리기만 하고, 무기력하고. 현실 도피하는 걸까.”
“글쎄요.”
에이 설마, 하면서 밀어 두었던 가능성이 다시금 떠올랐다.
“설마…… 이런 거 임신 초기 증상은 아니겠지?”
손가락을 접으며 날짜 계산을 했다.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쩌면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몰려왔다.
‘진짜 임신이면 어떡하지?’
순식간에 눈앞이 새까매지고, 두려움의 장막이 나를 뒤덮었다. 손끝에 땀이 나기 시작했고, 얼굴은 뻣뻣하게 굳어 갔으며 입술은 말라 갔다.
테리는 내 눈을 피하며 물었다.
“걸리는 게 있으십니까?”
서로를 위해, 테리도 나도 암묵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던 그날.
“응, 김세한이 너랑 쿼터 불러서 밥 먹었던 그날.”
결국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불편할 게 뻔해 피해 온 이야기였다. 미안하지만 내가 이런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건 테리뿐이었다. 테리는 입술을 한 번 축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 마음에 걸리시면 테스트기라도 구해 볼까요?”
“응. 그래 줄래? 영 마음에 걸려서. 지금 내가 느끼기에 몸이 좀 이상한 건 사실이거든. 아……. 김세한은 모르게 구해 줄 수 있을까?”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미안해.”
테리는 방문 앞에 서서 나를 돌아보았다.
“아뇨, 제가 죄송하죠.”
탁-내게 고개를 숙인 놈이 문밖으로 사라졌다.
‘뭐가 미안하다는 걸까?’
어쩌면 테리도 이재현처럼 그날 끼어들지 못한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하여튼 착해서는.”
테리가 놓고 간 아침밥에선 맛있는 냄새가 올라왔다. 평소라면 생각 없이 배를 채우기 위해 입에 넣었을 텐데, 괜한 걱정 탓인지 영 입맛이 돌지 않았다.
‘진짜 임신이면 어쩌지?’
배를 문질렀지만 평소와 같았고 만질수록 아리송한 느낌뿐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다 일단 아침은 거르기로 하고 멀리 밀어 두었다.
뉘엿뉘엿 해가 질 무렵, 슬슬 배가 고파 테리가 두고 간 카트 위의 음식을 흘끔거릴 때쯤이었다.
끼이익-
‘김세한인가? 벌써 돌아온 건가?’
예고 없이 열린 문에 그렇게 예상했지만,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테리였다. 평소라면 노크를 했을 놈이라 조금 의외였다. 테리도 나와 눈이 마주치곤 놀란 듯했다.
“안 주무셨습니까? 평소엔 이 시간이면 주무셔서…….”
“나 깰까 봐? 내가 그래서 내내 자는구나. 오래 잔다 싶으면 좀 깨워.”
테리의 눈이 내 옆에 밀어 놓은 음식으로 향했다.
“아침에는 손도 안 대셨네요.”
“응, 아까는 입맛이 없어서. 이제 먹으려던 참인데.”
“아뇨, 다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이미 다 식었는걸요.”
“그래 줄래?”
내게 다가온 테리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어 보였다.
“필요하시다고 하신 거요.”
드라마에서나 보던 임신 테스트기였다. 적어도 ‘나’는 살면서 볼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꿀꺽-나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어색하게 몸을 일으켰다.
“지금 쓰시게요?”
“미뤄 봤자 불안하기만 해서……. 결과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한숨을 삼킨 듯한 테리가 아침밥이 올려진 카트를 끌고 물러났다.
“……그럼 저는 저녁 가지고 오겠습니다.”
“응.”
욕실 문을 잡은 손이 떨려 왔다. 이미 지옥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보다 나락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죽도록 두려웠다.
테리는 문 앞에 걱정 어린 표정으로 서 있었다.
“테리, 좀 늦게 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나는 애써 장난투로 이야기했지만 테리는 씁쓸한 얼굴로 문을 나서며 고개를 숙였다.
“네.”
그 이후엔 오직 나와의 싸움이었다. 원치 않은 임신 같은 거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피임은 굳이 내가 챙기지 않아도 김세한이 철저히 챙기던 일이었으니까. 혹 내가 흐릿한 판단을 했을 때도, 놈은 브레이크를 잡았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제발, 안 돼.”
놈이 액셀을 밟는 순간, 색다른 공포가 나를 절벽으로 내몰았다.
덜덜 떨리는 다리를 진정시키기를 한참, 그도 모자라 손톱을 물어뜯으며 결과를 기다렸다.
“아닌 거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30분간 그대로 욕실에 앉아 있었지만 여전히 한 줄이었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나오고 깜깜했던 눈앞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한고비를 넘긴 기분이었다.
‘조심해야지.’
하긴, 그날은 내가 조심하지 않아서 그런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어쩌면 또다시 김세한이 억지로 밀어붙일 가능성도 있었다. 놈은 날 가둘 방법 중 하나를 아이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런 일이 생기지 않으려면……. 김세한과의 갈등을 피하고, 내 감정을 숨기고, 더 철저히 다정한 연인을 연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반항이 소용없다는 건 이제 뼈저리게 알았으니, 이제 몸을 웅크리고 김세한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최선이었다.
똑똑—
욕실을 벗어나자마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좋은 타이밍이었다. 지금이라면 맘 편히 밥을 먹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것 봐. 다행이지?”
열리는 문 앞에 한 줄이 그어진 테스트기를 내밀며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 웃음은 얼마 가지 못했다. 당연히 테리가 돌아온 걸 거라고 생각했던 내 앞에 이재현이 서 있었으니까.
“아…….”
이재현은 눈앞에 들이밀어진 테스트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게요. 다행이네요.”
수치심에 절로 고개가 숙어졌다. 정말 별꼴을 다 보여 주고 있는 셈이었다. 내 정수리에 닿는 시선을 느끼며 테스트기를 거두었다.
“저녁 가지고 왔는데, 좀 비켜 주시겠습니까?”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차분한 이재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응.”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자 놈이 안으로 들어왔다. 카트 바퀴 굴리는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테리는 어쩌고 네가…….”
“이 앞에서 제가 낚아챘습니다.”
그는 어깨를 작게 으쓱이며 말했고, 나는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그래도 된대?”
“보스도 없는데 뭐 어떻습니까? 그리고 그 사람은 착한 사람이니까.”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김세한이?”
“……테리 선배 말입니다.”
그 답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저녁을 가지고 왔다지만, 놈은 계속 문 앞에 서 있었다. 식탁으로 옮길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한라그룹 회장의 별세로 테리 대신 내 아침을 챙겼던 날을 생각해 본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러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나 배고픈데, 식탁으로 좀…….”
나는 테이블을 가리키며 말했고.
“저녁은 핑계고, 할 말이 있어 왔습니다.”
놈은 곧바로 속내를 비쳐 왔다.
“응, 네가 그냥 왔을 리는 없지. 먹으면서 들으면 안 되는 거야?”
“안 됩니다.”
단호한 대답에 헛웃음이 나왔다. 이재현과 내 사이에 저녁을 둔 채 대치하다가, 이게 웬 인질극인가 싶어 결국 내가 한발 물러섰다.
“그래, 나도 궁금한 거 좀 물어볼 겸.”
“먼저 듣겠습니다. 궁금하신 게 뭡니까?”
“너 왜 자꾸 나한테 네 계획 보고하러 오는 거냐?”
나는 두어 발 더 물러나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았다. 아무래도 대화가 길어질 거라 예상해서였다.
“처음엔 네가 나를 계획에 써먹으려고 그런 줄 알았는데.”
나는 손에 들린 테스트기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제 나한텐 그런 가치가 없는 거 같단 말이야? 너도 그날 확인했잖아. 난 작가이지만 사실상 능력도 없고, 이제 바깥 상황도 잘 몰라.”
한심한 스스로를 비웃으며 말했다. 다 내려놓고 나니 이제 비참한 것도 창피한 것도 없었다. 이재현에겐 이미 내 밑바닥을 다 보여 줬으니까.
“아니면…… 그래도 같은 세계에서 왔다고 정이라도 들었어?”
틱-틱- 툭. 손톱으로 튕겨 내듯 가지고 놀던 테스트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것도 아니면…… 동정인가?”
“아뇨.”
단호한 대답에 여러 추측이 멈추었다. 놈이 막아서지 않았다면 더 여러 가지 망상을 늘어놨을 것이다. 약해진 마음 탓에 요즘 나는 쉽게 생각에 빠지곤 하니까.
“죄송하지만, 사적인 감정은 아닙니다.”
“아…….”
“그저, 제 계획에 페르 님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닙니다. 지내다 보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것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