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친하게 지내면 좋잖아. 이것저것 사면서 말 섞다 보니 친해졌어. 다들 좋으신 분이야.”
새삼 그가 외향적인 사람이란 걸 느꼈다.
“그리고 이것도 다 인적 자원이지. 사람끼리의 친분도 재산이야. 언제 도움이 돼 줄지 모르니까.”
동시에 진절머리 날만큼 계산적인 사람이라는 것도.
그 대답에 나는 작게 고개를 저으며 인사하기 바쁜 이재현에게서 한 걸음 떨어져 걸었다. 주목받는 건 역시 적성에 안 맞기 때문이었다.
이곳저곳 둘러보던 내 시선이 투명한 유리문 너머에 박제된 흡혈 늑대에게로 향했다. 더 안쪽의 벽에는 화려한 노란 조명 아래 각종 몬스터의 머리가 박제되어 걸려 있었다. 일종의 헌팅 트로피 같은 느낌이었다. 미약하게 풍기는 화학 용품 냄새에 입 안으로 쓴맛이 감도는 착각이 들었다.
“나 참. 별게 다 있네.”
고개를 저으며 감상을 뱉자 어느샌가 옆에 온 이재현이 태연히 말했다.
“여기 우리 거래처야.”
“……거래처? 우리가 잡은 것도 여기 팔아?”
“예전엔 많이 그랬지. 지금은 이런 취미 가진 사장님들이 알아서 맡기니까 직접 거래할 일은 없지만.”
“허…….”
아무리 망해 가는 세계라도 돈 있는 사람은 여전히 있는 게 현실이었다. 몬스터 박제품은 그야말로 눈의 즐거움을 위한 사치품이었으니까. 하긴, 지금 길드를 먹고살게 해 주는 것도 대부분 돈 많은 사장, 회장님들이었다.
없는 것 없이 파는 시장 곳곳을 구경하다 보니 꽤 시간이 흐른 듯 하늘이 조금 어두워져 있었고, 상인들과 대화하는 이재현의 옆에 멍하니 서 있었을 뿐인데 어느새 장바구니가 식료품으로 가득했다.
“내가 들게.”
계산을 마친 이재현이 묵직해진 장바구니를 낚아채듯 내게서 뺏어 갔다.
“같이 들어.”
“됐어. 별로 무겁지도 않아.”
“너 혼자 할 거면 혼자 오지. 이럴 거면 왜 데리고 왔냐?”
“혼자 오면 외롭잖아.”
말문이 막힐 만큼 의외의 답이었다.
“네가 외로움을 타?”
“……사람인데 당연한 거 아닌가? 그럼 넌 안 타?”
김세한을 만나기 전이었다면 안 탄다고 얘기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난 혼자 남겨졌던 그 방에서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배워 버렸다.
“타.”
“거봐. 혼자는 외롭다니까. 어쨌든 같이 와 줘서 고마워.”
놈의 감사 인사가 낯간지러워 황급히 다른 주제를 꺼내 들었다.
“너 나름 리더인데, 애들한테 잔소리 좀 심하게 하지 마. 그러니까 걔들이 너랑 둘이 있는 걸 싫어하잖아.”
딸랑-작은 종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가면 파는 가게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이재현이 유리로 된 문을 당겨 열고 내게 먼저 들어가라는 듯 고갯짓했다. 나는 순순히 먼저 가게 안으로 발을 옮겼다. 밖과 다르게 안쪽에선 은은한 나무 냄새가 났다.
“뭐, 내가 길드를 위해서 하는 말이 잔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지. 그런데 그거 때문이라기보단 상사가 주말에 등산하자 그러면 싫은 거랑 비슷한 거 아닐까.”
뒤따라 들어온 이재현이 내 말에 대꾸하듯 답하며 가게 안쪽에 앉은 나이 지긋해 보이는 할아버지에게 묵례했다. 할아버지는 곧바로 손을 위아래로 휘저으며 화답했다. 이 가게의 주인인 모양이었다. 둘이 아는 듯한 분위기였지만 놀라울 것도 없었다. 어떻게 그 많은 사람과 친한 것인지, 이재현이 든 장바구니에 서비스로 받은 식자재가 오늘 한 끼를 채우기엔 충분할 정도였다. 생각해 보니 학창 시절에도…….
“넌…… 어떤데. 내가 불편해?”
생각에 잠겼던 날 끄집어낸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어느새 이재현은 쪼그려 앉아 아래쪽에 진열된 가면을 구경하고 있었다.
“음……. 난 딱히 너한테 잔소리 들은 적이 없어서 그런가, 나쁘지 않아.”
“다행이네.”
눈을 내리깐 이재현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가만 보면 이 녀석, 안 어울리게 웃음이 헤픈 편이다.
“이거 어때?”
그는 가면을 하나 집어 올려 자신의 얼굴을 가리며 물었다.
“좀 무섭지 않아?”
“그래? 그럼 이거.”
놈의 취향은 극히 극단적이었다. 붉은색에 요괴 같은 얼굴을 거절했더니, 이번엔 실리콘 소재의 말 가면을 집어 들었다.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
“응, 조금?”
휘어진 눈으로 날 올려다보는 이재현은 어쩐지 평소보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걸로 해.”
나는 손에 잡히는 가면을 이재현에게 내밀었다. 지극히 토속적인 느낌의 가면. 하회탈이었다. 그저 장난치려고 내민 가면이었는데 이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걸로 하자.”
“……이걸 산다고?”
“그러자며.”
쪼그려 앉았던 몸을 일으킨 이재현의 얼굴이 잠시 웃는 표정의 하회탈에 가려졌다.
“어때?”
“탈춤 출 거 같아.”
“……칭찬이지?”
“딱히.”
내 차가운 말투 탓인지 가면이 힘없이 내려갔고, 드러난 이재현의 얼굴은 어쩐지 시무룩해 보였다. 그리고 이어 들려오는 한숨 소리에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하회탈을 잔뜩 집어 들었다. 어차피 가면은 얼굴을 가리는 제 기능만 하면 그만 아닌가.
“그래. 그냥 이걸로 하자. 한국적인 거…….”
그를 지나쳐 계산대로 향하려던 순간이었다.
“……넌 진짜 착해.”
뒤쪽에서 어렴풋이 들려온 낮은 목소리에 두 손 가득 가면을 끌어안은 채 놈을 돌아보았다. 빛을 등진 이재현의 얼굴은 어둡게 보였다.
“가끔 악용하고 싶을 만큼.”
이재현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어딘가 서늘한 기운에 동물적 긴장감을 느껴 침을 꼴깍 삼켰고, 그런 나를 관찰하듯 하던 놈의 눈이 금방 아까처럼 휘어졌다. 의미를 알 수 없어 미간을 찌푸린 내 얼굴에 탈이 씌워졌고.
“잘 어울리네.”
작은 구멍만 있는 가면 때문에 좁아진 시야에는 환히 웃는 이재현의 얼굴이 가득 들어찼다.
***
테이블에 하회탈이 놓이고, 그걸 내려다보는 팀원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숨 막히는 정적 끝에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은 박도윤이 배준형의 어깨를 짚었다.
“어떤 놈이 저 둘 보내자 그랬어. 미적 감각 있는 놈으로 보냈어야지.”
배준형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간접적으로 나와 이재현을 욕하는 것이었다.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집듯 손끝으로 가면을 들어 올린 배준형이 나와 눈을 맞춰 왔다.
“대체 뭘 보고 이 가면으로 고른 건데? 보통 예쁜 걸 고르게 돼 있지 않나? 눈이 발에 달리지 않은 이상.”
기껏 등 떠밀려 다녀왔더니 적반하장이 따로 없었다. 미세하게 스멀스멀 피어나는 짜증에 짝다리를 짚고, 팔짱을 끼며 답했다.
“……나한테 뭐라고 하면 안 될 텐데? 이성재가 골랐으면 말 가면 쓸 뻔했어. 그나마 내가 이거 고른 거라고.”
“…….”
“어때? 이제 좀 고마운 마음이 들어?”
배준형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이번에도 주어진 상황에 가장 먼저 납득한 건 김성민이었다.
“그래. 얼굴 가리는 용도인데 디자인인지 뭔지가 중요한가? 못 알아보면 그만이지. 자, 어때?”
김성민이 하회탈을 쓰며 물었고, 배준형은 오만상을 쓰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 가면을 골랐다니까 ‘미친놈인가?’ 싶어서 공포심이 다 드네. 하회탈이 원래 이런 느낌이냐? 게다가 이거…… 오히려 가면 쓰면 더 주목받는 거 아냐?”
“그냥 받아들여. 어차피 이미 결정 난 거잖아. 난 말 얼굴 뒤집어쓰는 거보단 이게 나아.”
“……그건 그러네.”
마침내 하회탈이 받아들여진 순간이었다. 그래도 어떻게 보면 내 선택으로 고른 가면이어서인지 묘한 뿌듯함이 들었다.
“이건 왜 아직 그대로야?”
가면 이야기에는 끼지 않고 내내 조용하던 이재현이 테이블 위에 올려진 접시와 음식을 보며 물었다. 아까 유태영의 몫으로 남겨 두었던 음식이었다.
“아, 유태영이 아직 안 들어와서 권지우가 너희 오기…… 한 10분 전쯤 찾으러 갔어.”
박도윤이 덤덤한 투로 대답했다.
“피닉스랑 같이 있던 거 아니야?”
“그런 줄 알고 잠이라도 들었나 해서 가 봤는데, 없더라고.”
“무전은?”
“쳐 봤는데 대답이 없길래 직접 갔지.”
이상한 일이었다. 유태영은 연락이 안 닿거나 할 놈은 아니었다. 약간의 걱정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자 박도윤이 내 어깨를 잡고 말을 덧붙였다.
“혹시 몰라서 말해 두는데, 걱정하지 마. 뭐, 걔 정도면 몬스터한테 습격당하더라도 살아서는 올 테니까.”
“뭐 살아서야 오겠지만…….”
“그럼 됐지. 너도 가끔 그런 연습 필요하잖아. 죽어 가는 놈 살리는 연습.”
어딘가 무심한 듯 잔혹하면서도, 나를 향한 믿음도 느껴지는 말이었다. 그때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모두의 고개가 소리 나는 방향으로 향했다.
“미안하네. 연습 상대가 못 되어 드려서.”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 유태영이 태연히 문을 열고 들어와 외투를 벗어 소파 위로 던지듯 내려놓았다. 다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말없이 그의 움직임을 따라 눈만 굴리고 있었다.
“내 밥, 이거야?”
유태영은 뚜벅뚜벅 걸어 들어와 우리를 제치듯 밀어내고 테이블에 앉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유태영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자 모두의 시선이 같이 돌아온 권지우에게로 향했다.
“어디서 잡았어?”
박도윤이 마치 도망간 노예나 개를 잡아 온 주인에게 말하는 듯이 물었다. 물론 그 말에 울컥한 듯한 유태영이 테이블을 내려치며 성질을 내었다.
“왜 내 소식을 쟤한테 묻는데?”
“네가 말을 안 하길래. 그리고 쟤가 네 보호자잖아.”
박도윤의 말에 이번엔 권지우의 표정이 구겨졌다.
“이런 거 보호한 적 없어.”
“이런 거…….”
“그보다 유태영, 밥은 나중에, 아니 그냥 먹으면서 설명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네도 알긴 알아야지.”
“아, 하긴.”
주머니를 뒤적이던 유태영이 테이블 위로 네모반듯한 종이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모두의 시선이 어두운 고동빛 테이블과 대비되는 새하얀 종이로 향했다. 종이에 금빛으로 박힌 익숙한 로고에 심장이 뛰었다. KSH, 전무이사, 론.
“……론.”
이재현이 명함을 집어 들며 중얼거렸다. 어느새 수프를 비워 낸 유태영은 한 손으로 닭고기를 뜯으며 테이블 앞에 선 이재현을 올려다보았다.
“아는 사람이야? 하긴, 넌 S급들은 다 안다고 봐야 하나? 잠깐이지만 너 거기 사람들이랑 같이 일했으니까.”
이재현은 명함을 내려다보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어, S급 최고참.”
유태영의 턱이 떡 벌어졌고, 아직 씹어 삼키지 못한 분쇄된 닭고기가 의도치 않게 보였다.
“뭐야……. 생각보다 무서운 사람 만났던 거잖아. 역시 여기서 멀리 떨어지길 잘했다. 혹시 짹짹이 죽일까 봐 좀 조마조마해서 떨어졌던 건데.”
과장스럽게 몸을 떠는 유태영과 달리 이재현이 차분하게 되물었다.
“명함 받았다는 건…… 컨택인가?”
하긴, 론이 명함을 줬다면 그럴 가능성이 컸다.
“어, 낮에 김세한 무리도 왔잖아. 그때 날 봤나 봐.”
철렁-가슴이 내려앉는 듯했다. 평소라면 유태영의 옆자리가 내 지정석이었기 때문이다. 상황을 지켜볼 수 있고 언제라도 지원 가능한 곳. 만약 오늘 같이 갔다면 김세한 측의 누군가에게 모습을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번에도 이재현의 촉이 빛을 본 모양이었다.
“저격수가 필요하다던데. 관심 있으면 연락 달라고 하더라. 돈은 많이 챙겨 주겠다고.”
유태영은 언제 떨었냐는 듯 태연히 고기를 삼키며 말했고, 나는 저격수란 말에 테리의 얼굴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본다고 하고 명함 받아 온 거야?”
나는 최대한 덤덤하게 물었고.
“아니, 그 자리에서 거절했지. 듣기로는 거기 보스가 지 화나면 부하 손목도 잘라 먹는다는데, 무서워서 어디 일하겠냐고 했더니 웃던데?”
그 대답에 다시 한번 심장이 주저앉았다.
‘……그걸 손목 잘린 본인 앞에서 말했냐고!’
얼굴 근육이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분위기를 읽은 것인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치를 살피던 유태영이 뭐가 문제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저 소문은 KSH의 안 좋은 소문 중 가장 유명한 것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새어 나갔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추측건대 론의 손목을 치료했던 의료진 중 한 사람이 퍼뜨렸을 가능성이 다분했다. 그들은 S급들만큼 김세한에게 충성심이 있지 않을뿐더러, 자주 바뀌기 때문이었다. 이마를 짚은 이재현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명함 준 사람이 그 손목 잘린 부하야.”
유태영의 턱이 또 한 번 크게 벌어졌다.
“뭐?! 멀쩡하던데?”
“다행히 다시 붙였으니까. 내가 알기로는 그쪽 손에는 힘이 잘 안 들어가서 왼손 쓰는 연습을 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나조차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 당시 테리는 날 안심시키느라 다 괜찮다고만 했으니까.
“아무튼, 너…… 본의 아니게 엿 먹였네.”
이재현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고, 유태영은 연신 허……. 하고 헛웃음을 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쩐지 웃는 얼굴이 씁쓸해 보이더라니. 내가 대놓고 아픈 데 칼로 찌른 거구나. 아무튼, 맘 바뀌면 면접 보러 오라고 손에 쥐여 주길래 받아 온 거야.”
이재현이 테이블 위로 명함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모두의 눈이 다시 명함으로 향했지만, 그의 시선은 허공에 머물렀다.
“널 어떻게 따라왔을까?”
테이블을 짚어 조금 엎드리듯 자세를 낮춘 이재현이 물었다.
“……글쎄 미행인가? 아니면 우연히 일 나왔다 본 건가. 인기척 눈치채고 곧바로 자리 옮기긴 했는데…….”
유태영이 눈치를 보며 답했고, 이재현은 낮은 한숨을 내쉬며 되물었다.
“옥상에 있던 피닉스, 들킨 거 같아?”
“……만에 하나 봤다고 해도 괜찮지 않을까.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피닉스를 키우거나 탈것으로 이용한다는 건 상상도 못 할 테니까.”
나름 중요한 문제였다. 김세한 쪽은 아직 어떤 연유로 내 방에 불이 났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그저 방 안의 촛불이 넘어져 벌어진 사고 정도로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유태영의 말대로 피닉스를 들킨다고 한들 그날의 화재와 연관시키기 어려운 게 사실이었지만,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어쩐지 피닉스를 보이는 건 겁이 났다.
이재현은 어느새 식사를 마친 유태영 앞에 하회탈을 내려놓았다.
“내일부터 이거 쓰고 일할 거야. 오늘 같은 일 때문에 일단 예비 방편으로.”
하회탈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그의 얼굴이 또 한 번 일그러졌다. 짧은 시간 이루어진 다이내믹한 표정 변화였다.
“……야, 이거 쓰고 총을 어떻게 쏘라고!”
“총 쏠 때만 벗든지. 숨기려는 건 내 얼굴이랑 구재희 쪽이니까.”
길드가 유명해진다면 사람들의 관심도 높아지고, 길드원들의 신상과 얼굴도 팔려 나가기 마련이었다. 오늘 컨택 받은 유태영이 그 증거였다. 빛나는 별은 우주 어디에서나 눈부신 법이니 한번 유명해지면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더 유명해지기 전에 얼굴과 이름을 숨기는 게 속 편한 방법이었다. 이대로라면 값비싼 의뢰를 맡았을 때 KSH의 S급들과 같은 장소에서 만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야, 이거 누가 골랐냐? 꼭 골라도 이런 걸.”
어김없이 하회탈을 내려다보며 불만을 표하는 유태영에게 손을 들어 답했다.
“……나. 내가 골랐어.”
여럿이 모이면 꼭 그런 관계가 있다. 다 같이 있으면 괜찮지만, 사실 둘은 어색한 사이. 나와 유태영이 그랬다.
“뭐 불만이라도?”
“아, 너구나. 아냐. 이제 보니 예쁘네. 보다 보니 아방가르드 하기도 한 거 같고…….”
유태영이 황급히 눈을 피하며 아무 말이나 뱉어 냈다. 억지로 칭찬하는 게 분위기를 더 이상하게 만들었다. 놈은 날 어색해하고, 난 어색해하는 놈을 어색해한다. 한편 한쪽에선 배준형과 김성민이 떠들썩하게 명함을 구경하고 있었다.
“와 이게 그 KSH 명함이구나. 글씨도 황금색으로 박았어. 역시 있는 회사 느낌 난다. S급 컨택이면 돈 얼마나 줄라나.”
“예전에 이성재 받은 만큼 받으면 대박일 텐데……. 그나저나 오늘 사냥하는 거 보고 컨택한 거면 왜 나한테 안 오고 유태영한테 제안했을지 의문이다.”
“저격수가 필요하다잖아. 근접 공격 포지션이야 김세한 본인이 요즘 열일하니까 필요 있을 리가 없고.”
듣기론 김세한이 거의 모든 사냥에 동행하고 있다고 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까지 하면서 원작보다 더 많은 몬스터를 잡고 있었다.
‘일을 늘린다는 건 요즘 컨디션이 좋다는 건가. 아니면 반대로…….’
마침내 생각이 거기까지 닿았을 땐 의도적으로 머리를 비우려 노력했다. 방금 한 생각은 선을 조금 넘은 발상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애당초 살육을 즐기는 미친놈으로 설정했으니 그걸로 됐다고 여겼다. 그가 계속 탈 없이 사냥만 해 준다면 이야기가 크게 틀어질 일은 없었으니까.
묻어 둔 항아리처럼 어둡고 깊은 생각에서 빠져나와 눈의 초점을 찾았을 땐 명함이 박도윤의 손까지 넘어가 있었다.
“복지 좋고 돈 많이 주면 뭐 하냐? 폭군 눈치 보면서 일해야 하고, 무엇보다 퇴사가 거의 불가능한 거 아니야? 이성재만 봐도 죽어서야 퇴사한 거잖아?”
여전히 KSH에 관한 이야기가 한창인 모양이었다. 퇴사 불가. 저런 말이 나올 법도 한 게, 이야기 내에서 S급이 퇴사한 적은 없었다. 돈도 돈이지만 그 자리가 갖는 명예와 특권이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가족까지 회사 내에서 살게 해 줬으니 메리트는 분명했다. 당장 식사만 하더라도, 김세한이 내게 제공하던 음식들은 값비싸 구하기 어려운 것들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이론상 퇴사가 불가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저격수라면 테리 하나로도 충분할 텐데. 왜 저격수를 구하는 거지?’
만약 론이 저격수를 구하고 있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테리에게 무슨 일이 생겼거나, 아니면 김세한을 보조하기에 실력이 모자란다고 판단했거나. 그렇지만 후자의 경우는 거의 가능성이 없었다. 테리는 명실상부 톱클래스의 실력자니까.
‘김세한이 테리를 죽인 건 아니겠지? 아니면 정말 잘린 건가? 그것도 아니라면 퇴사?’
다시금 꽁꽁 감춰 두려 했던 마음 언저리의 짐이 수면으로 올라왔다. 몽땅 다 버리기로 마음을 정하고 한 탈출이었지만, 마음 한편엔 두고 온 놈에 대한 걱정이 있었다. 내 음식에 약을 탔다고 해도, 내가 아는 테리라면 분명 불편한 마음으로 김세한의 명령을 따랐을 테니까. 미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용서하고 싶은 인물이기도 했다. 그렇다는 건 같이 지내는 내내 쌓아 온 정을 아직 완전히 버리지 못했음을 뜻했다. 복잡한 머릿속에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던 때였다.
“……구재희.”
불쑥 허리를 낮춘 이재현이 몸과 고개를 비스듬히 꺾어 나와 눈을 맞추었다.
가까운 얼굴에 놀라 몸을 움찔거리며 물었다.
“깜짝이야. 왜?”
“생각 많아 보이길래.”
이재현은 아무 말 없이 마주친 느리게 눈을 깜박였고,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숨을 참고 놈의 작은 움직임에 집중했다. 그렇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10초가량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놈은 숙였던 허리를 세우며 말했다.
“사람은 당황하면 아무 생각도 못 한다더라.”
돌이켜 보니 이재현에게 집중하느라 별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뭐 하는 짓이냐고 다시 묻기도 전에 놈이 말을 이었다.
“그냥 지금은 네가 아무 생각도 안 했으면 좋겠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줄 알고. 놈의 말에 모래사장에 적어 놨던 글씨가 파도에 쓸려 가는 것처럼 다시 한번 머리가 비워지긴 했다. 정말 이걸 원한 거라면 또 이재현의 계획은 성공이었다. 억울하게도 말이다.
***
b.w 길드 자체는 일이 바빴지만, 힐러인 나는 그다지 할 일이 많지 않았다. 김성민과 배준형이 서로 격한 몸 장난을 치다 다치는 일이라도 없다면, 작은 생채기를 치료하는 일도 없었다. 그건 이재현이 모아 놓은 인물들의 힘과 팀워크, 그리고 그의 지휘 능력이 뛰어남을 내게 증명한 셈이었다.
‘그래. 안 다치면 다행이지.’
내가 맡은 일은 보통 유태영과 함께 옥상에서 대기하며 상황을 살피다, 부상자가 나오면 즉시 치료하는 것이었다. 사냥 지휘는 이재현이 하곤 했지만, 위에서 보면 아래에서 안 보이는 것들이 보이곤 했기에 이따금 나도 조언을 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김성민이 뒤에서 몰고, 나머지는 먼저 가서 대기하는 게 나을 거 같은데.’ 같은 전략 조언이나, ‘권지우, 스킬 그거 말고 그림자 거미줄 써 봐.’ 같은 공략 조언들이었다. 이재현은 내 조언을 빠르게 수용하고 적용하는 편이었다. 그렇게 내가 제시한 방법으로 몬스터를 잡고 나면 이재현은 항상 내가 있는 곳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고마워, 덕분이야.’
말은 오가지 않아도 마주친 눈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럴 때면 도움이 되고 있다는 생각에 어깨가 괜히 으쓱하곤 했다.
부상이라는 게 언제 생길지 모르기에 매번 길드원들을 따라다니곤 했지만, 어제 김세한 때문에 떠들썩했던 탓에 나는 또 집에 남았다. 괜히 무리해서 나갔다가 모습을 들킬 필요는 없으니까.
오늘도 별 탈 없이 돌아온 팀원들은 이제 막 해가 지기 시작한 시간대였지만 꽤 피곤했는지 하나둘 늘어졌다. 소리 없는 파도처럼 창문을 넘어온 네모난 노을이 점점 영역을 넓혀 가기 시작했다. 같은 또래가 모여 살다 보니 항상 왁자지껄했던 거실도 오랜만에 조용했다.
잠자리에 들 만큼의 체력 소모가 없는 하루를 보낸 나는 지루함을 못 이겨 거실 창가에 앉아 소설책을 펼쳐 들었다. 방에서 본다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권지우는 책 넘기는 소리에도 깨는 예민한 귀를 가지고 있어 택할 수 없었다.
“뭐 해?”
한 줄 채 읽기도 전에 이재현이 내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지치지도 않은 건지 다른 애들과 달리 평소와 같아 보였다.
“넌 안 자? 안 피곤해?”
“괜찮아. 넌 안 심심해? 책 읽으려고?”
“어. 저번에 권지우랑 나갔다가 버려진 책을 발견해서 몇 권 주워 왔어. 이 작가가 쓴 전작이 재밌길래 읽어 보려고.”
이재현은 책 표지를 살피는 듯 조금 뒤로 물러섰다.
“이거 일본 작가 거 아니야? 기무라…… 타카오였던가.”
“어! 맞아. 너 이거 읽었어?”
“어. 스릴러 좋아하거든. 이거 그 전작 첫 사건 범인이랑…….”
불길한 느낌에 나는 그의 말을 끊어 내듯 가로챘다.
“미안한데 이제 첫줄 읽었거든. 제일 중요한 거 스포일러 할 거면 가 줄래?”
“장난이야. 뭐, 그래도 책 읽는 데 방해한 거면 가고.”
그는 나 들으라는 듯 한숨을 크게 내쉬며 말했다. 그런 간접적이지만 노골적인 표현 방식이 우스워서 돌아서려는 놈을 잡아 세웠다.
“야! 할 말 있어서 온 거 아니야?”
“지금 나 잡은 거야?”
“잡아 달라고 한숨 쉰 거잖아.”
이재현은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몸을 돌려 다시 나를 마주 보았다. 노을에 물들어서일까, 놈의 얼굴이 조금 상기되어 있다고 느껴졌다.
“어, 잡아 달라던 거 맞아. 통할 줄은 몰랐지만. 옆에 앉아도 되나?”
이재현은 내 다리를 올려놓은 창틀 겸 의자 쪽으로 고갯짓하며 말했고, 나는 눈치껏 다리를 밑으로 내렸다. 그가 생각보다 내 쪽으로 바짝 당겨 앉아 당황할 때쯤, 눈앞으로 종이 몇 장이 들이밀어졌다.
“이게 뭐야?”
“너한테 맞는다는 답을 듣고 싶어서.”
나는 얼떨결에 종이 뭉치를 받아 들었다. 정갈한 글씨로 빼곡히 채워진 용지에는 그간 등장했던 몬스터의 특징과 공략법들이 적혀 있었다. 중간에 적힌 파란 글씨는 원작에 쓰인 것과 다른 공략법들이었다.
쿵, 쿵, 쿵.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무슨 감정일까. 노란색 물감을 온몸에 뒤집어쓴 기분. 또 설렘이라 착각할 만큼 목구멍부터 퍼지는 간질거리는 감각이었다. 새록새록 이 소설을 끄적이던 때가 떠올랐다. 유치하면서도 그리운 느낌에 어느샌가 내가 웃고 있다는 걸 자각할 때쯤이었다.
“……구재희.”
나지막이 들려온 이름에 고개를 돌렸을 때, 턱을 괸 채 나를 바라보는 이재현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별다른 말 없이 조금 멍한 듯한 눈으로 응시하다 먼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신의 목을 쓸어내린 두 손으로 입가를 감싸며 입을 열었다.
“보니까 어떤데……. 다 맞아?”
“응. 신기할 정도로.”
노을 탓일까. 내게서 도망가듯 고개를 돌려 보이게 된 놈의 귀가 조금 빨갛게 보였다. 가끔 무의식이 의식을 지배할 때가 있다. 지금의 내가 그랬다.
“너…… 귀 빨갛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재현의 귀에 손이 닿아 있었다. 생각한 것보다 말랑하고 따뜻한 느낌이었다. 그가 놀란 듯 몸을 움찔거리며 슬쩍 뒤로 물러나고 나서야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아, 미안. 나도 모르게.”
나는 급히 손을 거두었고, 이재현은 양손으로 자신의 양 귀를 감추듯 감싸며 나를 돌아보았다. 귀와 달리 얼굴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콤플렉스야. 귀 빨개지는 거.”
즉, 방금 나는 대놓고 남의 콤플렉스를 지적한 꼴이었다.
‘미친 건가. 왜 그랬지? 그것도 이재현한테.’
아직 손끝에 남은 열기가 죄스러웠다.
“상대한테 무슨 생각하는지……. 들킬 거 같아서.”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놈이 흘끔 나를 바라보다, 종이로 시선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내가 본 네 노트엔 딱 여기까지만 적혀 있었는데, 이다음은 네가 채워 줄 수 있을까 해서.”
그 말에 내 시선도 다시 종이로 떨어졌다.
“아, 그러네. 그럴게.”
이재현이 내 소설을 읽었을 땐 이야기의 4분의 3 정도가 진행되었을 때였다. 다시 말해, 남은 4분의 1은 오직 나만 아는 이야기였다.
“그냥…… 들려줄까? 다음 이야기 어떻게 되는지.”
별 의미 없이 건넨 제안에 나를 바라보는 이재현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이 이야기 속에 들어온 이상 나타나는 몬스터에 집중하고 있지만, 결국 이 세상의 초점은 주연인 김세한에게 맞춰져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나머지 이야기도 철저히 김세한의 이야기였다.
“아니, 안 들을래.”
의외의 답이 들려왔다.
“……왜?”
“나도 스포일러 안 좋아하거든.”
나름 이해가 되는 이유에 고개를 끄덕이며 의미 없이 종이를 넘길 때쯤 그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결말이 다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결말이라…….”
“좀 더 천천히 끝까지 즐기고 싶어, 이 이야기를.”
알 듯 말 듯 한 말이었다.
[구재희]
종이 중간에 적힌 내 이름이 시선을 끌었다. 그 세 글자를 만지듯 쓸어내리던 손이 멈춰 섰다.
“어떻게…… 이렇게 자세히 기억하고 있어? 솔직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 나도 가물가물한걸.”
내내 가져 온 의문을 당사자에게 물을 기회는 어쩌면 이번뿐이었다. 이재현은 생각에 잠긴 듯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뭔가를 골똘하게 고민하듯 ‘음…….’ 하고 늘어지는 소리를 내던 그가 목 언저리를 쓸어 내며 입을 열었다.
“네 노트가 나한테 있는 동안, 내내 읽었거든. 외워 버릴 정도로.”
“…….”
“조금 징그럽나?”
어딘가 꿈속에서 헤매는 듯한 몽롱한 느낌의 목소리였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침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이미 말했지만. 네 글, 재밌었어.”
[재밌다.]
노트에 작게 적혀 있던 놈의 작은 글씨가 스쳐 지나갔다. 그건 생에 처음 받아 보는 독자의 반응인 셈이었다.
“나 참. 고등학생이 쓴 글이 얼마나 재밌다고. 그만 비행기 태워.”
내 글에 관한 이야기는 어쩐지 부끄러워서 눈앞이 핑글핑글 도는 듯했다.
“진짠데. 나 은근 까다로운 독자야.”
나는 노을에 서서히 젖어 가는 종이를 찬찬히 눈에 담았다. 이재현은 이 소설의 유일한 독자였다. 그런 녀석이 나보다 내 이야기를 좋아해 주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소설의 별것 아닌 부분도 다 언급되어 있어서 어린 날 내 일기장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에게 재밌게 읽어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꺼내려던 참이었다.
“넌 내가 아는 모든 것 중 가장 재밌는 이야기야.”
‘네 소설’이라는 말을 ‘너’로 잘못 말한 걸까. 뭐가 됐든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출 자신을 뺏기엔 충분했다. 노을 등졌는데도 달궈진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아, 바닥에 늘어진 두 덩어리의 그림자만 바라볼 뿐이었다.
***
일이 없던 주말. 오랜만에 일 대신 각자의 취미로 바쁜 하루였다. 어김없이 거실 창가에서 책을 읽던 내게 자신의 팔을 감싼 채 오만상을 쓴 유태영과 그런 그의 등짝을 내려치는 권지우가 다가왔다. 표정만 보고도 용건은 알 것만 같아 덤덤히 책을 덮었다.
“아파!”
“아프지 그럼, 뼈가 부러졌는데.”
유태영이 비명을 질렀고, 옆에선 권지우가 별거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은 유태영을 바라보다 권지우에게 물었다.
“어쩌다 다쳤는데?”
“짹짹이에서 내리다가 발을 헛디뎌서 넘어졌어.”
권지우는 말없이 의자를 끌어다 유태영을 앉혔고, 나 또한 조용히 치료를 시작했다. 팔을 감싼 빛이 세질수록 눈에 띄게 오만상이던 유태영의 표정이 풀어지는 게 보였다.
“…….”
“…….”
그러곤 점차 덜 아파지는지 그가 슬슬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정신 차리고 나니 내가 또 불편한 모양이었다.
“별거 아니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뭐?”
“얘 걱정돼서 거기 서 있는 거 아니야?”
옆에서 내내 치료하는 걸 지켜보던 권지우가 인상을 구기며 내 질문에 답했다.
“걱정은 무슨. 유태영이 너랑 둘만 있기 어색하다고 같이 있어 달래서 있는 거야.”
“야! 그걸 당사자 앞에서 말하면 어떡해!”
“너희 대체 1년 동안 안 친해지고 뭐 했냐?”
둘의 대화로 이 모든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내 시선을 느낀 듯, 유태영의 고개가 권지우에서 내게로 돌려졌다가 땅에 박힐 듯 숙어졌다. 나는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네 잘못 아니고 내 탓이야. 내 성격이 원래 좀 그렇거든. 학교 다닐 때도 나 어려워하는 사람 많았어. 내가 사회성이 좀 떨어지나 봐.”
“…….”
“배준형이 나한테 넌 농담을 다큐로 받는다는 걸 보면 타고나길 어색한 인간으로 태어난 거 같아.”
“…….”
내 말이 길어질수록 유태영의 어깨가 내려갔다. 또 내가 불편하게 만든 셈이었다. 권지우가 오만상을 쓸 때쯤 유태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친화력이 떨어져서 그래.”
“……뭐?”
“난…… 사람보다 동물이 좋아. 말이 안 통하면서도 통하는 거 같고, 복슬복슬한 게 사람보다 귀엽잖아. 그러면서 어려운 말로 싸울 일도 없고.”
고개를 숙인 채 갑작스레 자신의 정보를 늘어놓는 놈의 의도를 파악하기까지 3초.
“나도.”
내 대답에 유태영의 고개가 들렸다.
“나도 사람보다 동물이 좋아. 어차피 동물은 사람 말을 못하니까 대화해야만 한다는 부담감이 없어선지 마음이 편하거든.”
“어어! 그거야. 말 없어도 통하는 느낌이 드는 거. 그게 진짜 기분 좋지.”
“근데…… 나는 짹짹이는 좀 무서워. 새라서 그런가. 눈만 보면 무슨 생각하는지 감이 안 와서.”
“아냐. 네가 아직 안 친해서 그래. 이따 나랑 밥 주러 가 볼래? 걘 밥 주는 사람 다 좋아해.”
아주 잠깐이었지만 나름 편안하게 대화한 듯했다. 눈을 맞춘 그의 얼굴에 웃음이 걸려 있었다. 관계라는 것에는 노력이 필요한 거 같았다. 이제 보니 내가 맺어 온 인간관계들은 항상 상대가 노력한 것뿐이었다. 채연이도, 테리도, 김세한도…….
‘나 정말 매번 받기만 하면서 살아왔구나.’
새삼 내가 얼마나 별로인 인간인지를 깨달아 버렸다.
“치료 끝났어……. 그리고 나도 너랑 밥 주러 갈래. 이따 나도 데려가.”
간질하고 어색하게 한 걸음을 내디뎠고.
“그래!”
밝게 돌아온 대답에 마주 보며 기분 좋게 미소 지었을 때였다. 와르르-무언가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왔고, 모두가 소리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유태영의 뒤편으로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이재현이 보였다. 거실 한편에 있는 책장 앞에서 책 정리를 하다 실수한 건지 바닥엔 책들과 종이가 흐트러져 있었다.
“뭐야. 저놈도 가끔 이상하다니까.”
혀를 찬 유태영이 책을 주워 드는 이재현에게 다가가 흩어진 종이를 같이 줍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어딘가 허술한 듯한 이재현을 바라보고 있을 때쯤, 어느샌가 슬그머니 옆으로 다가온 권지우가 속삭이듯 말했다.
“너희…… 진짜 뭐 있어?”
“뭐가?”
나도 모르게 권지우처럼 속삭이듯 답했다.
“이성재랑 사귀느냐고.”
“아, 너 유태영이랑 사귀어?”
말도 안 되는 말에 역지사지해 보라는 의미에서 질문을 던졌다. 어지간히도 적절한 비유였던 걸까. 그녀는 벌레라도 씹은 것처럼 표정을 찡그렸다. 얼마 안 가 권지우는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놈이 가끔 안 어울리게 등신 같은 짓을 하는데, 생각해 보니까 꼭 네가 있을 때 그러는 거 같아서.”
“……내 앞에서? 난 딱히 모르겠는데.”
처음 듣는 말에 다시 이재현에게로 시선을 옮겼을 때였다. 타이밍 좋게 아까 미처 떨어지지 못한 채 어설프게 책장에 꽂혀 있던 책이 이재현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탁-꽤 큰소리를 내며 머리에 부딪힌 책이 바닥에 엎어졌다.
“아아…….”
꽤 아픈지 머리를 감싼 놈이 낮은 신음을 흘렸다.
“거봐. 등신 같지.”
동의를 구하는 권지우의 말을 뒤로하고, 내 신경은 이재현의 빨간 귀로 향했다. 한번 알고 나니 더 눈이 가는 거 같았다.
‘지금은 창피해서 그런 건가?’
콤플렉스라 했던가. 확실히 이재현과는 어울리지 않는 신체 특징이었다. 그게 어쩐지 조금 우스워 입을 가린 채 작게 웃었다.
‘잘 빨개진다더니, 진짜네…….’
유태영과 조금 가까워져서인지, 이재현이 웃겨서인지 몰라도 기분이 좋았다.
***
그날 이후 열흘 내내 유태영과 짹짹이 밥을 주러 옥상에 올라갔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대화가 오가곤 했는데, 왜 진작 친해지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우리는 잘 맞았다. 이를테면, ‘짹짹이 두개골 부분, 티라노사우루스 같지 않아?’라는 내 쓸데없는 물음에 ‘흐음……. 파키케팔로사우루스에 더 가깝지 않아?’라는 답을 진지하게 하는 점이 그랬다. ‘콧구멍은 두 개인데 왜 똥구멍은 하나인가.’ 같은 주제로 토론할 때면 이재현과 권지우는 ‘왜 그런 걸 궁금해 하는 거야?’라며 인상을 찌푸리곤 했지만 우리는 늘 진지했고 즐거웠다.
일할 때 유태영의 옆자리가 지정석이라 같이 있는 시간이 길었는데 왜 진작 가까워지지 못한 걸까. 대화가 잘 통할 때면 녀석도 그런 생각을 하는 건지 피식피식 웃곤 했다. 늘 혼자 있는 게 편하다고 생각해 사람들을 무심하게만 대했는데.
‘용기 내길 잘했다.’
마음이 맞는 친구를 찾는다는 건 기쁜 일이라는 걸 배웠다.
모든 일과가 끝난 저녁 시간. 모두가 편한 마음으로 자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피곤한지 하나둘 잠자리에 드는 팀원들과 달리 한창 소파에 앉아 소설에 몰두하고 있을 때쯤이었다.
“야아아……. 구재희, 너 막 피로 회복 같은 건 못 해 주냐?”
젖은 걸레짝처럼 내 옆자리에 늘어지듯 누운 배준형이 웅얼웅얼 물었다.
“넌 내가 자양 강장제인 줄 알아?”
“혹시나 해서 그렇지. 게임에서는 힐러들이 체력 회복도 해 준단 말이야. 손 줘 봐.”
“……말이 돼야 장단을 맞춰 주지.”
“아. 빨리이이~”
남동생 같다 생각했던 배준형의 첫인상은 반전 없이 이어졌다. 나이를 콧구멍으로 먹은 건지 어린아이처럼 떼쓰는 놈에 못 이겨 손을 내주었다. 나는 은근 말이 안 통하는 이런 타입에 약한 편이다. 어차피 대화로는 안 될 걸 알고 있으니, 더 피곤해지기 전에 져 주고 말았다. 내 손을 잡은 배준형은 마치 티브이를 켜 달라는 것처럼 손을 흔들었다.
‘이놈…… 날 건강 보조 기계 정도로 생각하는 건가?’
그는 맞닿은 손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나서야 만족스럽다는 듯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참 앓는 소리를 내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오……. 좀 효과 있는 거 같은데?”
“기분 탓이야.”
“아닌데. 나중에 김성민한테도 해 줘 봐…….”
“플라시보 효과라니까. 그보다 피로 회복이라면 내가 좋은 약 하나 아는데. ‘숙면’이라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 손을 잡았던 배준형의 손이 떨어져 밑으로 늘어졌다. 흘끔 돌아본 녀석의 살짝 벌어진 입에선 규칙적인 숨이 뱉어졌다. 방금 건, 잠들기 전의 투정 정도였던 모양이었다.
“들어가서 자지…….”
담요라도 덮어 줄 생각으로 책을 덮고 배준형에게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불쑥 시야로 들어온 커다랗고 하얀 손이 내 손을 잡아 내렸다. 마디마디가 붉고, 손등엔 푸른 핏줄이 비치는 손.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알 수 있었다. 이재현이었다.
“내가 할게.”
잠든 배준형을 배려한 듯 작은 목소리였다. 항상 어느샌가 가까이 와 있는 놈에 놀라기도 수십 번. 이제 적응은 됐지만 새삼 이재현이 인기척이 없다는 걸 체감했다. 배준형에게 담요를 덮어 준 그가 허리를 굽혀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잠깐 나랑 얘기 좀 하자.”
따라오라는 듯 고개를 까딱인 놈을 따라 눈치껏 몸을 일으켰다.
‘무슨 말을 하려고……. 앞으로의 계획에 관련된 건가?’
앞서 걷는 뒤통수에 여러 예상과 상상을 했고, 한참 뒤에야 내가 계단을 오르고 있음을 자각했다. 이번 주 내내 유태영과 올랐던 계단. 옥상으로 가는 길이었다. 옥상 문이 열리자 인기척을 느낀 건지 이쪽을 보고 있는 짹짹이가 보였다.
삐이이!
익숙해진 건지 처음엔 무서웠던 짹짹이가 지금은 커다란 참새 정도로 보였다. 나와 눈이 마주친 짹짹이는 얼마 되지도 않는 좁은 거리를 두 발로 뛰어와 얼굴을 비볐다.
“짹짹아, 윽, 잠깐만……. 밥 없어. 안 가지고 왔어! 먹었잖아, 아까!”
애정 표현이라지만 덩치 큰 놈의 애교에 몸이 밀릴 때쯤이었다.
“그만해.”
이재현이 짹짹이의 배에 손을 올리며 덤덤하게 말하자 짹짹이가 거짓말처럼 내게서 몇 걸음 물러났다. 그러곤 조금 풀이 죽은 듯 고개를 떨궜다. 나와 유태영과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모습에 이재현을 돌아보며 물었다.
“얘한테 뭐 했어?”
“그냥 그만하라고 한 거야. 폭력도 안 썼고.”
“……왠지 풀 죽어 보이는데.”
“원래 자기보다 강한 상대한테는 함부로 못 하잖아. 몬스터든, 동물이든, 사람이든.”
차가운 밤바람 탓일까, 놈의 말에서 냉기가 느껴졌다. 짹짹이를 지나 걷는 이재현을 따라 걸었다. 흘끔-돌아본 짹짹이는 어쩐지 겁에 질린 듯 보였다.
“마음에 걸려?”
“조금.”
“왜?”
그 질문에 짹짹이에게 향했던 고개를 돌려 이재현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옥상 난간에 기대선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나를 바라보았다.
‘왜냐는 질문이 나올 대화 내용이었나?’
당최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무 답도 하지 못한 채 입만 벙긋거리고 있자 그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고개를 저었다.
“미안. 이상한 질문이었다. 짹짹이랑 많이 친해졌나 봐?”
“아……. 응. 유태영이랑 요즘 밥 주고 있거든. 그랬더니 아주 친해졌어. 짹짹이랑도, 유태영이랑도.”
“아, 저번에 얼핏 들었어. 같이 밥 주러 가자는 말.”
그날이 어렴풋이 떠오르자 책에 머리를 맞았던 이재현이 생각나 웃음이 나려던 순간이었다.
“준형이랑도 친해?”
또다시 들려온 물음에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배준형? 음……. 걔는 어떨지 몰라도, 나는 편해. 나한테 거리낌 없이 장난도 많이 쳐 주고, 맨날 더럽게 못 받아친다고 욕먹지만. 근데 그건 왜?”
“음, 그냥 네가……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서. 여기 처음 왔을 땐 사람들 좀 어려워했잖아.”
알게 모르게 리더로서의 책임감이 있는 걸까. 어쩌면 학교에서 반장이 그러듯 리더가 길드원을 신경 써 주는 상황일지도 몰랐다.
“걱정하지 마. 이제 다 편해졌어.”
“그래. 그럼…… 다행이고.”
잠시 눈을 내리깔았던 그가 자기 옆으로 오라는 듯 난간을 툭툭 치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 부름에 난간에 기대서니 깜깜하기만 한 도시 풍경 속의 낮고 높은 건물 사이로 몇몇 불빛이 보였다. 인구가 밀집된 아고라 쪽과 서울 어디서든 보일 법한 KSH 빌딩이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자 폐를 가득 채운 밤 특유의 차가운 공기가 안의 열을 식히고 빠져나간다.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할 말 있다며. 뭐야?”
“아, 미리 말해 두는데 이건 네 선택이고, 싫으면 안 해도 돼.”
“뭔데? 난 본론부터 말하는 걸 좋아해.”
이재현은 내 재촉에 어깨를 으쓱이며 곧바로 입을 열었다.
“그럼 본론부터. b.w 힐러라는 이름으로 ‘무료 치료 봉사’하지 않을래?”
“봉사?”
또 한 번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그 입에서 뱉어졌다. 이재현의 입에서 나올 말은 당최 예상할 수가 없었다.
“응. 이번에 나온 은빛 고래 때문에 땅이 꺼져서 보육원이 무너졌나 봐. 죽기도 몇 명 죽고, 다치기도 많이 다쳤대. 원장님이 이리저리 힐러들 구하고 있으시다는데. 잘 안 구해지나 봐. 근데 너도 요즘 심심한 거 같기도 하고…….”
은빛 고래. 당시 싱크홀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만든 몬스터였다. 특성 때문에 골치 아픈 몬스터였는데, 은빛 고래가 등장하는 곳은 정해져 있지 않았으니 언제 땅이 꺼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은은하게 사람들 일상에 깔려 있었다.
“이 시기에…… 돈이 안 되는데 봉사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 어쩌지. 애들이 나 무서워할 텐데. 애들한테 나, 진짜 인기 없거든.”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을 그대로 늘어놓았다. 평생 자신을 최우선으로 살아온 나에겐 남을 돕는 기쁨이나 봉사 같은 건 너무 먼 나라 이야기였다.
“아, 그게 문제야?”
이재현은 웃음을 참아 내듯 입술을 깨물었고, 나는 갑작스러운 제안에 머리가 복잡해지는 중이었다. 평소의 나라면 집에서 책 읽는 일상을 택하는 게 당연하였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분 걸까. 이재현의 제안은 내 대답에 누군가의 목숨이 걸렸다고 말하는 것 같아 다른 선택지가 없이 느껴졌다.
“그래도 애들은 아픈 거보단…… 무서운 언니, 누나 보는 게 낫겠지. 알겠어. 내가 할게, 그 무료 봉사인지 치룐지 하는 거.”
“그럼 내일 같이 가 보자. 너 한다고 하면 애들이랑 다 가 볼 생각이었어.”
“……내일? 모처럼 쉬는 날 또 일하자 그러면 화낼 텐데? 특히 박도윤이…….”
“너, 박도윤 고아로 설정했던 거 기억나?”
그런 디테일한 엑스트라 설정을 기억할 리 없었다. 끽해야 그 인물의 죽음을 더 비참하게 보이기 위해 추가한 설정일 게 뻔했다. 또 한 번 그의 기억력에 놀랄 때쯤 더 놀랄 만한 말을 뱉었다.
“그 보육원, 박도윤이 있었던 곳이야. 그곳 출신이거든. 사실은…… 걔가 너한테 말 못 하고 끙끙대는 거, 내가 대신 말하는 거야.”
“……뭐야,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면 좋았잖아. 내가 거절했으면 어쩔 뻔했어.”
“네 의견을 최우선으로 하고 싶었으니까. 쓸데없는 사정이 추가되면 네 진심이 흔들릴 수도 있잖아. 넌 착하니까.”
“…….”
언뜻 듣기엔 나를 위한 배려처럼 느껴졌지만 곱씹을수록 넘어갈 수 없는 말이었다. 흘끔 바라본 이재현의 옆얼굴은 하얀 피부 탓인지 밤인데도 선명하게 보였다. 그 피부와 대비되는 어두운 머리카락은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려 밤하늘과 섞여 들 듯했다.
“이재현.”
내 부름에 그는 미동 없이 천천히 눈을 감은 채 입을 열었다.
“그 이름…… 진짜 오랜만이다.”
느긋하게 들어 올려진 속눈썹이 떠오른 달빛을 받아 빛났고, 서서히 돌려진 얼굴이 나를 마주했다.
“왜?”
나른한 느낌의 그 말이 내 부름에 답한 것임을 인지하는 데 꽤 많은 시간이 들었다.
“너, 방금 약속 어긴 거 알고 있어? 넌 기억 못 할지 몰라도…….”
“기억해.”
빠르면서 짧고 명확한 답에 숨이 막힌 듯했다. 작게 한숨을 내쉰 놈이 말을 이었다.
“널 속이지 않겠다고.”
“그래.”
“그래도 이건 속인 건 아니지 않아? 그냥 쓸데없는 정보를 숨긴 거지.”
“같은 거 아니야?”
“난 명백히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네가 그랬다고 느꼈다면 사과할게. 미안해.”
쉽게 들어 버린 사과에 힘이 빠진 어깨가 내려갔다. 이재현과 논쟁할 자신은 있었지만, 상대에겐 그런 의지가 없어 보였다. 사과를 들어 버렸으니 이제 잘못을 짚고 넘어가기도 뭐했다.
그리고 애초에 박도윤이 먼저 얘기 꺼낸 것도 아니었으니, 섣불리 말할 수 없었던 이재현의 입장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그래도…….
“뭔가…… 진 느낌이야.”
내 말에 이재현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싸웠어? 사과는 내가 했는데 왜 진 느낌이야.”
“몰라.”
설명하기 어려운 꽁한 기분. 잘근잘근 입술을 씹으며 먼 곳을 바라보던 때, 어깨높이의 난간 위로 불쑥 그의 손바닥이 올라왔다. 뭘 주는 건가 해서 내려다보았지만, 손바닥엔 아무것도 올려져 있지 않았다.
“뭐야?”
“나도 해 줘. 배준형한테 해 줬던 거.”
그 말에 배준형의 잠투정이 머리를 스쳤다. 그걸 아는 걸로 보아 뒤쪽 어디선가 보고 있던 모양이었다. 하긴, 배준형이 잠들자마자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났으니까.
“아, 그거 배준형이 떼써서 해 줬던 거야. 어차피 별 효과도 없어.”
“배준형은 있다고 하지 않았어?”
“하, 걔 말을 믿어?”
“일단 해 줘 봐. 판단은 내가 할 테니까.”
내게 내민 손이 재촉하듯 작게 위아래로 흔들렸다. 그리고 나는 아직 아까의 일로 마음이 불편한 상태였다.
“싫어.”
“와. 사람 차별하는 거야? 아니면 나도 떼써야 해 줄 건가.”
“답지 않은 짓 하지 마라.”
“그래. 내버려 둬. 할 말 끝났으니까 추운데 먼저 들어가. 난 상처 받아서 좀 울다 갈 테니까.”
우는소리를 내며 과장스럽게 푹 고개를 숙인 것과 달리 내게 내민 손은 여전히 흔들거렸다.
“어휴…….”
그냥 세워 놓고 갈 수도 있는 건데, 답지 않은 짓이 또 밉지 않아 손바닥을 내려치듯 손을 올려놓았다. 빛이 새어 나오자 얹어진 손을 살포시 감싸 쥔 그가 언제 우는 시늉을 했냐는 듯 고개를 들고 반대편 손으론 턱을 괸 채 달을 바라보았다. 이재현의 옆얼굴을 흘끔거리다 맞잡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거봐, 별 효과 없지?”
“아니야. 좀 있는 거 같기도 해.”
“……진짜?”
“응. 뭔가…… 혈액 순환에 좋은 거 같은데.”
그 말에 흘끔 바라본 이재현의 귀가 또 붉어져 있었다. 플라시보 효과인가? 어쩌면 정말 혈액 순환에 도움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왜지? 치료하는 게 세포 재생이랑 관련 있어서인가?’
그렇다면 아까 들었던 배준형의 말도 꽤 신빙성 있을 수도 있었다.
“아무튼, 설령 진짜 효과 있어도 다른 애들한테는 말해 주지 마. 또 해 달라고 하면 귀찮아지니까.”
내 손을 잡은 이재현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싶더니 갑작스레 고개를 떨궜고, 얼마 안 가 중얼거리는 듯한 대답이 들려왔다.
“어, 말 안 해 줄 거야. 절대.”
이재현 손이 뜨거워서일까, 밤바람이 부는데도 조금 덥다고 느껴졌다. 여름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
“도윤아! 오신 거야?”
“네, 다행히 해 준다고 해서요. 쟤예요, 저희 팀 힐러.”
박도윤이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가리켰고, 중년의 나이로 보이는 여자의 눈이 빛났다.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한시름 놓겠네요.”
버선발로 뛰쳐나와 내 두 손을 꼭 감싸 쥔 보육원장이라는 사람은 쳐진 눈꼬리, 따뜻한 눈빛, 올라간 입꼬리까지 악의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외모를 가졌다. 나이 들면 성격이 얼굴에 티가 난다더니 어느 정도 맞는 것 같았다. 여자의 뒤로는 이재현의 말대로 반절은 무너져 내린 보육원과 물이 고인 구덩이가 호수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감사받아도 되는 걸까. 다 내가 만든 상황인데.’
내가 이 세계에서 집중한 건 주인공인 김세한뿐이었고, 현재 나는 메인 이야기 밖의 상황을 체감하고 있었다. 이재현은 어쩌면 나에게 이런 걸 보여 주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쿼터로 활동할 때 그는 이곳이 아닌 밖은 희망이 없다고 말했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게 있다면, 내가 힐러라는 것이었다. 내가 아프게 한 이들을 치료해 줄 수 있다는 게 양심의 가책을 덜어 주었다. 아주 이기적이게도.
“그…… 치료해야 하는 아이들은 어디 있나요?”
“아, 건물 뒤편에 있어요. 건물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지금은 임시방편으로 간이 천막 밑에서 지내고 있거든요.”
“몇 명이나 다친 거예요?”
“작은 부상을 당한 아이들은 서른 명 정도예요. 그중 심각한 애가 여섯 명 정도고요. 하아……. 제가 마음이 급해서 그러는데 이동하면서 설명해 드려도 될까요?”
여자는 굳이 묻지 않아도 되는 동의를 구했지만, 이미 발은 빠르게 움직여 우리를 이끌었다. 분위기의 심각함을 느껴서인지, 내 뒤를 따르는 팀원 모두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할 수 있는 만큼 아는 지식으로 응급 처치해 놓긴 했는데 잘했는지 모르겠어요. 이렇게 힐러 구하는 게 더딜지 몰라서…….”
힐러가 세상에 알려진 이후, 의료계는 큰 타격을 입었다. 처음엔 부상자들이 급속도로 늘어나면서 붐비던 병원도 인구가 줄어들고 힐러들이 이름을 날리면서 점점 그 수가 줄어 갔다. 사람들이 죽어 가는 게 일상이 된 지금, 힘 있거나 돈 있는 사람 밑에서 일하는 게 힐러였고, 결국 이래저래 약자들은 갈 곳 없이 내밀려진 상황이었다.
건물을 가로지르자 들리지 않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며 초록색 천막이 보였다. 천막 근처에선 몇 명의 아이가 뛰놀고 있었다.
“참…… 이상하죠. 말도 안 되게 빨리 회복시키는 능력이 있는데도 치료받기가 더 어려워졌다는 게…….”
“…….”
“실례가 안 된다면 혹시 존함을 알 수 있을까요? 저희 아이들 치료해 주시는 분 이름 정도는 알고 있고 싶어서요.”
천막 앞에 멈춰 선 원장이 우리 쪽을 돌아보며 물었고, 덩달아 뒤를 바라봤던 내가 팀원들과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그 물음이 내게 향한 것임을 알아차렸다.
“아, 구재희라고 합니다.”
“아……. 구재희 힐러님, 그리고 b.w 길드원분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녀는 머리가 땅에 닿을 듯 허리를 숙였고, 나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처음 받아 보는 정중한 인사에 가슴 한쪽이 무거워짐을 느꼈다. 그 무거운 짐을 덜어 내고자 나 또한 깊이 허리를 숙였고, 이재현이 내가 해야 할 말을 대신 해 주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별일 없을 테니 마음 놓고 계세요.”
마침내 들어선 천막 안. 햇살이 천막을 통해 들어오는 탓에 조금 어두웠고, 비릿한 피 냄새가 진동했다. 크고 작은 눈동자들이 일제히 우리에게 향했고, 그마저도 못하고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아이들도 중간중간 눈에 띄었다. 굳이 원장님이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의 치료가 우선시돼야 하는지 파악되는 셈이었다.
‘좋아. 시작해 볼까.’
팔을 걷어붙인 순간이었다.
“언니는 누구예요! 저희 선생님 친구예요?”
갑작스럽게 내 앞으로 대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나타났다. 순수함이 담긴 해맑은 목소리였지만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기에 몸이 얼어붙었다.
‘뭐야……. 치료만 하면 되는 거 아니었어?’
나를 올려다보는 반짝이는 눈이 부담스러웠다. 잘못 대답해서 아이를 실망하게 할까 봐 불안하기도 했다.
“어, 언니는 힐러고…… 아픈 거 치료해 주러…….…….”
더듬더듬 이야기를 이어 갈 때쯤, 이재현이 여자아이를 안아 들며 미소 지었다.
“저 언니는 보내 주고 오빠랑 놀자. 아, 혹시 여기서 누가 제일 아야 하는지 알려 줄 수 있어?”
‘아야’라니. 이재현의 입에서 놈과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나왔다. 발에 밟힐 것같이 작은 아이들이 여전히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어 머릿속이 새까매질 때였다.
“야, 정신 차려. 애들이 너 잡아먹냐? 그리고 우리 너 보조하러 온 거니까. 명령해. 이것저것 시키라고.”
박도윤이 내 어깨를 잡아 돌려세우며 말했다. 귓구멍으로 들어온 놈의 차가운 목소리에 복잡했던 머릿속도 냉정을 되찾았다. 때마침 이재현에게 안긴 아이의 손가락이 천막 구석에 누운 남자아이를 가리켰다. 목표가 뚜렷해지자 사고가 안정되기 시작했다. 나는 남자아이 쪽으로 고갯짓하며 입을 열었다.
“우선 쟤부터 치료할 거야. 박도윤, 너는 나 따라다니면서 붕대 풀고 옷 벗기는 거 도와주고, 유태영이랑 권지우는 상태 심각한 애들 순서대로 파악해서 나한테 데려와 줘. 상태 많이 심각하면 바로 알려 주고. 배준형이랑 김성민, 너희는……. 이재현처럼 애들 좀 놀아 주고 있어. 가능하면 나한테서 멀리 떨어져서.”
매번 이재현이 하는 역할 분배를 오늘은 내가 해야 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개를 끄덕인 놈들은 나보다 한발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박도윤과 함께 구석에 있는 아이에게 다가갔다. 사람이 가까이 왔는데도 남자아이는 눈을 감은 채 간간이 숨만 뱉었다. 박도윤은 아이에게 감긴 붕대를 차근히 풀어냈고, 남자아이는 괴로운 듯 인상을 쓰며 식은땀을 흘렸다. 엉성하고 과도하게 많이 감긴 붕대가 감았던 사람의 초조함과 불안함을 보여 주는 듯했다.
“됐어. 여긴 됐고, 다른 데 상처 더 있는지 봐줘.”
상처가 드러나면 나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 피가 떡이 되어 있던 상처에 새살이 자라나듯 채워지기 시작하자, 내 손에서 나오는 빛만큼이나 박도윤의 눈이 빛났다. 안도감이 든 듯했다.
“야, 미리 말해 두는데, 고맙다. 여긴 내 개인적인 감정이 담긴 데라서……. 마음이 불편했거든.”
“……고마우면 다음 주 설거지 담당 난데, 대신 해 줘라.”
낯간지러운 소리를 피하려 했던 대답에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얼마든지.”
어이가 없을 정도로 ‘힐’이라는 능력은 위급한 아이들을 순식간에 구해 냈다. 치료하는 나도, 그걸 지켜보는 팀원들도 너무 쉽게 안정을 찾는 아이들의 상태에 고개를 저었다. 안도감과 동시에 왠지 모를 씁쓸함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위급한 아이들의 치료를 끝내고 나자 한숨 돌릴 시간이 생겼고, 잔뜩 긴장해 있던 몸도 그제야 풀어져 제 호흡을 찾는 듯했다. 의식이 있는 아이들은 모두 밖으로 나가 버려서 천막 안은 조용했고, 반대로 천막 밖에선 신이 난 듯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했지만, 기가 막힌 역할 분배였다.”
자화자찬을 하며 눈을 감자, 천막 안에 남은 팀원들이 나지막한 웃음으로 동의를 표했다. 놀이동산에서나 들었던 행복 가득한 높은 웃음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덕분에 늘어졌던 천막 안에서도 하나둘 힘없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놀아 주는 게 아니라 자기들이 노는 거 아니야? 저 정도면.”
“뭐, 정신 연령은 비슷할지도.”
권지우와 유태영이 피곤한 듯 눈을 감은 채 각각 한마디씩 거들 때쯤이었다. 이재현이 흠뻑 젖은 머리를 하고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입고 있던 겉옷은 어디 갔는지, 하얀 티 한 장만 걸치고 있었다.
“뭐야. 너희 왜 쉬고 있어? 다 끝났어?”
약간의 불만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권지우는 옆에 누워 잠든 아이들을 바라보다 물음에 답했다.
“어. 급한 애들은 이제 끝났고, 너희가 데리고 나간 애들 한 명씩 데려오면 될 거 같아. 근데, 너 그거 다 땀이야?”
이재현은 대답 대신 티셔츠 목 부근을 잡아 팔랑이며 고개를 젖혔고, 의도치 않게 내 시선은 끌려 올라간 티셔츠 아래로 언뜻 보이는 배의 근육들로 향했다. 안 그래도 하얀 피부가 젖어서 번들거리니 빛이 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왜 그걸 또 보고 있는 거지.’
하늘로 향했던 이재현의 고개가 제자리로 돌아올 때쯤 내 시선도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늙었나 봐. 애들 체력 못 따라가겠어. 한 사람만 나랑 교대하자. 박도윤, 네가 가라.”
“그래, 내가 한 놈씩 데리고 올게. 앉아서 좀 쉬어.”
박도윤이 바통 터치하듯 이재현과 손바닥을 맞부딪치곤 천막을 나섰고, 동시에 권지우와 유태영도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게?”
“우리도 바통 터치해 주게. 이성재 꼬락서니 보니까 바꿔 줘야 할 거 같네. 정신 연령이 맞아도, 신체 연령이 맞는 건 아니니까.”
권지우의 말에 유태영의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곧 천막 밖으로 사라졌다. 순식간에 우르르 빠져나간 팀원들 탓에 이재현과 둘만 남겨진 이 상황이 영 당황스러웠다. 내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이재현이 아직도 덥다는 듯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았다.
“왜. 혹시 나한테서 땀 냄새 많이 나?”
나른한 목소리를 흘린 이재현이 어느새 가늘게 눈을 뜨고 눈동자만 돌려 나를 응시했다. 보고 있다는 걸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터라 잠시 멍청하게 눈을 깜박였다.
“아. 아니, 뭐 하고 놀았길래 다 젖었나 해서.”
“말도 마. 성인 되고 이렇게 뛰어 본 거 처음이야.”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젓는 움직임에서 충분히 진심이 묻어 나왔다. 그래도 밖에서 들리던 웃음소리로 보아 재밌게 놀아 주긴 한 모양이었다. 하긴, 아까 내게 말을 걸어 온 여자애를 들어 올렸을 때도 아이를 마주하는 데에 꽤 능숙하다는 게 느껴졌다.
“너 애 대하는 거 잘하더라. 의외였어. 나랑 다를 바 없을 거 같았는데.”
“어. 너 불편해하는 거 티 나더라. 그런데…… 대체 넌 날 어떻게 생각하길래 다 의외라 그래?”
“사이코패스.”
피식-바람 빠지듯 웃은 놈이 다시 눈을 감았다.
“고민도 안 하고 답하네. 그 생각, 아직도 안 고쳐졌나.”
“몰라. 애들한테 다정한 거 보면 아닌 거 같은데, 어제 짹짹이한테 냉정했던 거 보면 맞는 거 같기도 하고. 동물은 안 좋아하고 애는 좋아하나 보지?”
“음……. 둘 다 딱히. 난 말이 안 통하고, 그래서 논리가 안 통하는 상대를 싫어해서.”
도르륵 허공에 눈동자를 굴리던 놈이 말을 이었다.
“그냥 다들 그렇잖아. 어떤 상대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이상적인지, 굳이 배우려 하지 않아도 자라면서 학습되니까. 필요에 맞게 그때그때 연기하는 거지. 난 그걸 잘하는 편이고, 넌……. 좀 못하는 편인 거 같고.”
결국 싫어하는 것과 별개로 좋아하는 것처럼 연기했다는 말이었다.
“음……. 난 다정한 사람들은 다 타고났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것도 다 연기일 수 있구나. 새삼 내가 참 기본적인 걸 못한다는 생각이 드네. 요즘 들어 더.”
연기도 못하고 다정하지도 않아서 아이들은 여전히 내게 부담이 된다. 혹시 실수라도 해서 상처 줄까 두렵기 때문이었다.
“근데…….”
들려온 이재현의 목소리가 생각에 잠겼던 나를 다시 수면으로 끄집어냈다.
“난 네 그런 점이 좋아. 표정이랑 목소리만 들어도 무슨 생각하는지 알 것 같아서.”
“결국 알기 쉽다는 거잖아. 남 푸념하는데 거기다 불 지르고 앉았네.”
천막 쪽으로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일할 시간이 되었음을 알려 왔다. 나는 그대로 기지개를 켜며 몸을 일으켰다. 딱딱한 바닥에 꽤 오래 앉아 있어서인지 엉덩이가 욱신거렸다.
“생각해 보니, 나도 연기 못할 때 있어.”
뒤에서 나지막이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고, 때마침 나를 올려다보는 놈과 눈이 마주쳤다.
“야, 그만…….”
“이상하게 네 앞에선 가끔 아무것도 못 숨기겠더라고.”
아, 또다. 놈이 단단히 내 시선을 옭아매 눈을 돌릴 수 없었고,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며칠 전 노을 앞 창가에서도, 옥상에서도 느꼈던 묘한 분위기였다. 온몸이 얼어붙고, 내쉬는 숨이 신경 쓰이는 불편한 감각. 그 설명하기 어려운 놈과 나 사이의 ‘무언가’는 배준형과 김성민의 목소리가 가까워지고 나서야 깨어졌다. 이재현의 시선이 거두어지고, 몸을 일으켜 나를 지나치고 나서야 참았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뭐지? 나 지금 긴장했던 건가?’
이상한 기분에 이재현을 돌아보았을 땐, 천막 안으로 들어온 김성민과 배준형이 보였다.
“뭐야, 왜 또 너희 둘만 있어? 아……. 놀릴 힘도 없다. 물이나 좀 줘 봐.”
배준형은 허리를 숙인 채 손바닥을 위아래로 흔들며 말했고.
“야, 쟤네 아픈 애들 아니야. 오늘 그냥 철수해.”
김성민은 반대로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차라리 몬스터 잡는 게 낫지? 내일부턴 더 열심히 해라.”
그리고 이재현은 평소와 같은 얼굴로 두 놈에게 물을 건네고 있었다.
***
나는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건 아마 내가 그리 다정하고 사랑스럽지 못한 사람임을 증명하는 하나의 요소일 것이다. 우는 게 싫고, 뭐든 챙겨 줘야 하는 게 싫고, 져 줘야 하는 게 싫고, 무엇보다 날 싫어해서 싫다.
‘치료만…… 치료만 하자.’
작은 생채기를 치료하던 중이었다. 날 빤히 바라보는 아이의 시선이 느껴져 같이 빤히 바라봤을 뿐인데 갑작스레 표정이 일그러진다 싶더니 이내 울음을 터뜨려 버렸다.
‘아팠을 리는 없고, 지금 나 보고 우는 거지?’
역시 싫어, 애들은 싫어.
“왜 울어? 아팠어? 오빠랑 나갈까?”
이재현이 우는 아이를 안아 들고 웃음기 어린 얼굴로 나를 흘끔 내려다보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놈이 천막 밖으로 사라지자 양옆에선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각각 김성민과 권지우의 것이었다.
“야, 애들 다 울려야 끝날래? 너 이상한 데 재능이 있다. 뭐 귀신의 집에 상주하는 지박령이 꿈이야?”
“치료하면서 말도 좀 걸고, 웃으면서 하라고. 그런 거 있잖아. 어린이집 선생님들이 애들 달랠 때 하듯이 말이야.”
차라리 의식 없는 아이들 치료하는 게 더 좋았다.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들으며 살가운 성격으로 태어나지 못한 자신을 욕했다.
“미안……. 미안해.”
우려하던 그대로의 상황이었다. 아이들은 날 무서워했고, 나는 아이들이 울면 당황스러웠다. 답답한 건 팀원들뿐만이 아니었다. 나 스스로가 가장 답답했다. 이게 다 인간관계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싫어하는 건 최대한 회피하려고만 하던 지난날들이 축적되어 만들어진 결과였다. 자존심이라는 헝겊으로 덮어 놓았던 자기혐오가 자꾸만 모습을 드러냈다.
‘싫어도 해야 해. 언제까지고 피할 수만은 없잖아.’
이재현의 제안에 수락한 건 나였으니 책임져야 하는 것도 나였다. 그렇게 기합을 넣고 눈에 힘을 주었을 때, 마침 천막 안을 살피듯 고개를 내민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최대한 다정한 얼굴을 하려 애썼지만, 막상 다시 아이를 마주하니 억지로 끌어 올린 입꼬리가 떨려 왔고, 눈꺼풀에 경련이 일었다. 그런 내 모습이 꽤 기괴했는지 아이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다 도망가 버렸다.
‘안 돼……! 난 안 될 거야! 나는 쓰레기야. 이 무능한 인간아…….’
원래도 없던 자신감이 깎여 나가고, 스트레스가 쌓여 가고 있었다.
“무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치료하는데 무서울 만도 하지. 애들이든, 동물이든 앞에 있는 사람이 자기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는 안다는데.”
권지우는 나지막이 애들이 우는 이유를 설명하듯 말해 왔다.
“맘에도 없는 말, 스몰 토크. 그런 거 재능이 없어……. 왜, 배준형도 나한테 재미없다고 다큐 인간이라잖아. 특히 이성재처럼 ‘아야’ 같은 말 죽어도 입에 못 담겠고.”
내 우는 소리에 김성민이 눈썹을 까딱였다.
“이성재랑 다른 애들은 좋아서 하겠어? 넌 왜 그거 하나 못해서 일을 복잡하게 하냐? 또 하나 울려서 나랑 권지우까지 애 달래러 나가면 너 혼자 애랑 둘이 있을 수 있어?”
김성민의 언성이 조금 높아졌다. 이제껏 일 때문에 싸운 적이 없었던 터라 그런 모습이 낯설었다. 확실히 그의 말이 맞았다. 나 하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주는 건 정말이지 원치 않았다.
하지만 조금 서글퍼졌다. 이게 정말 노력의 문제인가. 빌어먹을 성격은 타고난 것이고 애정은 받은 적이 없어 어떻게 베풀어야 할지를 몰랐다.
“과거를 떠올려 봐. 너도 어렸을 땐 부모님이…….”
김성민이 눈썹을 까딱이며 꺼낸 말에.
“우리 부모님 맞벌이셔서 유치원 다닐 때부턴 종일 혼자였어. 그전에는 어떻게 지냈는지 기억 안 나고.”
덤덤히 답하자 침묵이 이어졌다. 가정 환경이 특별히 안 좋았던 건 아니었다. 그냥 혼자 있는 시간이 길었을 뿐이다.
‘혼자 잘 있네. 어린 나이에도 의젓하구나.’ 어릴 때 가장 자주 들었던 칭찬이었다. ‘철이 빨리 들었구나.’라는 말도. 어리광 부리지 않아야 한다고 늘 생각했다. ‘됐어. 내가 해도 돼.’가 말버릇이었다. 뭐든 혼자 해결하려고 애썼다. ‘못 갈 거 같아. 우리 딸, 혼자 올 수 있지?’ 그런 말을 들어도 괜찮았다.
상대에게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할 일도 없다. 애정을 기대한 순간 외로워진다. 나는 그걸 남들보다 조금 일찍 알았을 뿐이었다.
‘나한테 기대하지 마. 그래서 누구든 내게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더욱 기어들어 가 내핵을 보려는 자신감에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권지우가 불쑥 내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뭐야?”
“이 정도라도 웃어 보라고.”
“이렇게?”
그녀를 따라 입꼬리를 올렸을 뿐인데 권지우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하지 마라. 눈은 가만있고 입은 웃으니까 공포 영화가 따로 없네. 답이 없네, 답이 없어.”
다시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와 내 어깨에서 완전히 힘이 빠졌을 때였다. ‘아.’ 하고 무언가 생각난 듯 감탄사를 내뱉은 김성민이 가방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나 혹시 몰라서 가져왔는데, 이거.”
가방에서 꺼낸 건 하회탈이었다.
“그거 뭐, 어쩌자고? 나 쓰라고?”
“응, 네 얼굴이 안 보이면 애들이 덜 무서워할 것 같은데.”
“야, 이거보단 내 얼굴이 낫지.”
“아냐. 이게 나을 수도 있어. 적어도 얘는 웃고 있잖아.”
나는 그제야 살면서 내내 봐 왔던 하회탈이 웃는 얼굴이었음을 깨달았다.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어느샌가 내게 가면이 씌워졌고, 그런 날 바라보던 권지우의 눈썹이 씰룩였다.
“그래. 이게 나을 수도 있겠다. 아예 말 못 하는 컨셉으로 가. 왜, 놀이동산에 있는 인형 탈 알바들처럼. 손만 이렇게 귀엽게 흔들어 주고.”
양손을 머리 높이에 올린 권지우가 손목을 좌우로 빠르게 돌려 손을 흔들었다. 유치원에서나 볼 법한 동작이었다.
“이 정도는 할 수 있지?”
난 순식간에 역할에 몰입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네.”
권지우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내 머리를 가볍게 쓸었다.
놀랍게도 그 이후로 우는 아이는 없었다. 오히려 치료가 끝났을 땐 내게 ‘신령님’이라는 비현실적인 칭호가 붙었다.
모든 아이의 치료가 끝나고 해가 저물기 시작했을 때쯤,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수프와 빵을 먹었다. 수프엔 겨우 존재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작게 썰린 건더기가 떠다녔다. 안 그래도 모자란 식량을 우리까지 축내는 것 같았지만, 식사를 권하는 원장님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도 실례인 것 같아 먹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오후 여섯 시쯤 되었을까. 그리 늦은 시간도 아닌데 낮 내내 뛰어놀았던 아이들과 고생한 팀원들은 천막 안에 널브러져 꿈나라를 헤맸다. 내 옆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는 원장님의 얼굴엔 오늘 아침과는 달리 안도감이 담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이렇게 빨리 잠든 건 처음이에요. 그만큼 오늘 하루가 만족스러웠다는 거겠죠. 아픈 데도 다 나았고, 신나게 놀았고. 정말 감사…… 어머, 근데 그 가면은 왜……?”
무심코 나를 돌아본 원장님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가득했고,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가면을 내렸다.
“아……. 그게 사정이 있어서요. 하하, 그나저나 슬슬 가 봐야 할 텐데.”
“아, 깨우지 마세요. 애들도 그 편이 행복해 보이는데……. 좀 더 자고 가셔도 괜찮아요. 뭐, 좁고 딱딱한 바닥이지만요.”
코까지 골기 시작한 배준형에게로 뻗어졌던 손이 머쓱하게 거두어졌다. 천막 안을 비추던 작은 등이 꺼지고, 원장님은 가장 상황이 좋지 않았던 남자아이의 옆에 몸을 뉘었다. 아이의 자는 얼굴에 닿은 눈은 사랑을 담아 반짝였다. 천막에 가려 반쯤 힘을 잃은 채 들어온 노을이 안을 붉게 물들여 노곤한 분위기가 풍겼다. 여러 숨소리가 섞여 들려오는 천막 안, 말똥한 눈으로 구석에 앉아 뒤척이는 아이들을 구경하던 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심심해.’
혹시 몰라 가면까지 집어 들고 천막 밖으로 나오자 노란 운동장 구석에서 작은 남자아이를 마주 보고 쪼그려 앉은 이재현이 보였다. 늙어서 아이들과 놀아 주기 힘들다던 이재현은 결국 마지막까지 깨어 있었다.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해와 길어지는 그림자, 그리고 종이 위에 찍힌 점처럼 덩그러니 있는 두 인영은 마치 한 폭의 그림같이 느껴져서 발이 저절로 움직였다. 목적지가 생긴 것이다.
이재현과 꼬마가 가까워질수록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분주하고 화려한 손동작과는 달리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뭐…… 하는 거야?”
내 물음에 이재현이 나를 올려다보았고, 그 뒤로 약간의 텀을 두고 남자아이가 놀란 듯 몸을 움찔거렸다. 나를 보고 놀라는 듯해 반사적으로 가면을 다시 쓰려던 그때였다.
“얘, 귀가 안 들리는 애야.”
그 한마디가 모든 상황을 설명해 냈다. 그렇다는 건, 둘은 지금까지 소리 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꼬마 아이의 얼굴을 기억 속에서 찾아내었다. 가면을 쓰기 전에 치료받은 아이 중 유일하게 울지 않았던 아이였다.
이재현은 또 아이와 눈을 맞춘 채 손을 분주히 움직였고, 동작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아이의 동그란 눈은 깜박이지 않았다. ‘경청’을 하는 셈이었다. 이재현의 ‘말’이 끝나자 남자아이는 나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들리는구나. 그럼 이제껏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는 건가.’
지금 알게 된 이 아이가 어쩐지 조금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힐러는 단순한 상처 치료를 할 뿐, 근본적으로 귀가 안 들린다거나 하는 선천적인 문제는 해결할 수가 없었다. 모처럼 비현실적인 힘을 가졌는데도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게 아쉬웠다.
“너 수화할 줄 알아?”
“응, 조금. 배우고 싶어서는 아니고, 대학에서 단체로 봉사 나갔다가 우연히 배웠어.”
“방금은 뭐라고 한 건데?”
“‘누나가 놀라게 해서 미안하대’라고 했는데, 용서해 준대.”
그가 말하는 내용과는 달리 아이의 눈은 집요하게 내 얼굴에 꽂혀 있었다.
“용서해 준다면서 왜 이렇게 보는 건데.”
시선이 부담스러워 가면 뒤로 숨으려 하자 이재현이 고개를 저었다.
“소리가 안 들리면, 자연스럽게 사람 입 모양에 집중한다고 하더라. 얘가 읽을 수 있는 건 네 표정이랑 눈빛, 입 모양뿐인데 가리지 마. 이게 미안하다는 의미의 수화야.”
어설프게나마 이재현을 따라 하자 아이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리고 또 알지 못할 손동작으로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뭐…… 뭐라는 거야?”
“아픈 데 낫게 해 줘서 고맙대. 자기도, 다른 사람들도.”
“아……!”
나는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뜻이 통한 건지 아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 얘 마음에 들어. 어린애가 어린애 안 같아서 정이 가네.”
“아깐 어린애 안 좋아한다더니.”
“애도 애 나름이지. 너도 친해져 볼래? 분명 좋아하게 될걸?”
이재현이 아이의 작은 손을 마주 잡고, 따뜻한 미소를 띠었다. 출산 장려 포스터에서나 나올 법한 그림에, 어색하게 얼굴을 긁다 놈 옆에 쪼그려 앉았다.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는 것. 아까 김성민에게 배운 ‘아이들과 소통 잘하는 법’ 중 하나였다.
“난 애는 좀……. 게다가 얘는 대화도 안 통할 테고.”
까만 콩자반 같은 눈동자가 뚫어져라 내게로 향했다. 적어도 이 아이 앞에선 가면 뒤로 도망칠 수도 없었다.
“말이 안 통하니까 다른 게 통하기도 하지. 눈이랑 표정은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주거든.”
옆에서 들려오는 이재현의 말에 아까 둘만의 세계에 빠진 듯 보였던 모습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지금의 나도, 이 아이도 서로에게만 집중하고 있었으니까. 말랑해 보이는 볼살에 난 솜털이 부드러워 보였고, 낮고 작은 코가 귀엽다고 생각될 때쯤이었다. 아이의 눈이 예쁘게 휘어졌고,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나 지금, 이 애 따라 웃은 건가?’
폭-아이가 내 목을 감싸 안자 중심을 잃고 넘어지려는 몸을 간신히 바로 세웠다. 본능적으로 감싸 안으려 했던 팔은 이미 아이의 등에 닿은 상태였다. 그 순간, 가슴 속 저릿한 감각이 손끝과 발끝으로 퍼지는 느낌이 들었다.
“역시 네가 마음에 들었나 봐.”
이재현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여전히 작은 감격에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런 건 설명 안 해 줘도 알아. 네가 말한 게 뭔지 알겠어.”
아이와 나는 별다른 말 없이도 교감하고 있었다. 나는 어색하게 아이의 등을 쓸어내렸다. 작은 척추와 따뜻하고 보드라운 온기가 고스란히 손끝을 통해 느껴져 왔고, 코끝이 매워졌다. 살갑지도 못하고, 감정 표현도 서툰 나를 이렇게 좋아해 준 아이는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순식간에 이 아이가 특별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마음에 들 거랬지?”
아이는 내게서 떨어지고 나서도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다. 이재현의 예상이 맞아 들어 가는 건 상당히 자존심이 상했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응, 얘 이름 뭐야?”
“아까 원장님한테 물어봤는데, ‘북이’라고 하시더라.”
“북이?”
“항상 뭐 급한 게 없이 느긋한 성격이라 거북이가 떠오르셨대. 귀가 안 들려서 반응이 늦은 거 같기도 한데…….”
“북이. 뭔가 어울리는 거 같기도 하고…….”
생글생글한 얼굴에 목구멍이 간질간질해질 때쯤 북이가 내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보였다.
‘약속하자는 건가?’
반사적으로 새끼손가락을 들어 맞대자 북이의 표정이 미묘해졌고, 옆에 있던 이재현도 작게 웃음이 터졌다.
“뭔데……. 너만 웃지 말고 설명해봐, 이 상황. 야, 이재현……!”
심각해진 북이의 표정에 초조함이 들어 옆에서 킥킥대는 그를 재촉했다.
“네가 너무 맘에 들었나?”
“왜? 나 좋대?”
“‘엄마’라는데?”
생각보다 당혹스러운 호칭에 입이 벌어졌고, 동시에 묘한 책임감이 밀려들었다. 지금 이 아이가 내게 그만큼 마음을 많이 주었다는 생각에 드는 부담감이었다. 이재현은 내게로 향한 북이의 시선을 가져가며 자신을 가리켰다. 북이는 엄지를 내밀어 보였고, 이재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래? 너 짱이라고?”
“나는 ‘아빠’래. 그래, 너보다 내가 먼저 친해졌는데. 그 호칭 안 줬으면 서운할 뻔했다.”
그 말에 갑자기 호칭의 무게감이 의심되기 시작했다. 어쩌면 오늘 온 모두가 북이의 엄마, 아빠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커질 때쯤이었다. 어느새 하늘이 어둑해져 있었고, 돌아가려는 건지 북이를 안아 든 이재현이 나를 내려다보며 장난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까딱였다.
“이제 그만 돌아가죠, 여보?”
이재현은 북이의 소꿉놀이에 동참이라도 하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뭔 미친 소리야?’ 하는 의미를 담아 미간을 찌푸렸고, 내 반응에 놈은 민망한 듯 고개를 돌리며 툴툴댔다.
“좀 받아 줘라. 애들이 좋아하는 소꿉놀인데.”
“말로 해 봤자 북이는 못 듣잖아.”
“알아. 어차피 이미 자.”
“엥, 그새?”
이재현은 내게 보여 주려는 듯 북이의 얼굴이 있는 쪽으로 살짝 몸을 돌렸고, 북이는 정말 입을 벌린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무해한 얼굴은 내가 아는 세상과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고 순수해 보였다. 귓가에 종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처음으로 사람들이 아이를 왜 좋아하는지 알 것만 같은 순간이었다.
“봉사하길 잘한 거 같아. 북이 소개해 줘서 고마워.”
“그럼…… 나중에 또 올래? 북이 보러.”
이재현이 나를 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는 잠든 북이 얼굴에 눈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또 오자.”
이재현의 입가에도 작은 미소가 걸렸고,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갔다.
***
보육원 봉사를 다녀온 후, 문득 내가 가진 힘을 이대로 두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세한의 옆에 있을 때보다야 힐러로서 힘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가벼운 상처를 치료하고 있을 뿐이었다.
- 이렇게 힐러 구하는 게 더딜지 몰라서…….
원장님이 했던 말이 내내 머리에 맴돌았다. 어쩌면 필요한 데는 많은데 잘못 분배된 건 아닐까. 딱히 대의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모든 걸 내가 초래했다는 생각 탓이었을까. 이미 망가뜨려 버린 세계를 조금이나마 봉합하고 싶어졌다.
‘일단 얘기는 꺼내 볼까?’
내가 이미 b.w에 소속된 이상, 모든 것에는 이재현의 결정이 필요했다. 나라는 인간도 이 길드를 구성하는 한 부분이었으니, 합의되지 않는 곳에 시간과 노동을 할애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멍하니 침대에 누워 있다가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섰고, 조금 떨리는 마음으로 이재현의 방문 앞에 섰다.
이 집에서 방은 크게 여자 방, 남자 방으로 나뉘어 있었지만, 이재현은 유일하게 개인 방 겸 서재를 가지고 있었다. 리더의 특권이라기보단 단지 그가 의뢰 및 계약 관련 서류와 각종 책을 모두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똑똑—
조심스레 방문을 두드렸지만, 별다른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자나?’
거실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지만 이제 저녁 여덟 시. 이재현이 잠자리에 들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불이 꺼져 있다면 바로 닫을 생각으로 슬그머니 문을 열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책상 위에 매달린 노란 등 하나가 미약하게 방을 비추고 있었고, 그 밑에선 안경을 낀 이재현이 종이 몇 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약간 찌푸린 미간이 지금 그가 꽤 몰두해 있음을 알려 왔다. 끼익-탁- 내가 왔다는 것을 알리려 일부러 소리 내서 문을 닫았지만, 글씨를 읽어 내리는 눈동자만 작게 움직일 뿐이었다.
‘얘가 안경을 꼈었나?’
조금 낯설게 느껴지는 얼굴에 잠시 망설였지만, 책상 앞으로 발을 옮겼다.
“저기…….”
목소리를 내고 나서야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내 발에 닿았고, 천천히 올려다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이재현은 조금 당황한 듯 황급히 안경을 벗고 눈을 비볐다. 뭔가 놀란 듯한 움직임에 내 몸도 괜히 이리저리 흔들렸다.
“아, 미안. 놀랐어? 노크했는데 대답 없길래.”
“어……. 집중하느라 못 들었나 봐. 의뢰서들 확인 좀 하느라.”
문서를 보는 내내 쥐어뜯듯 잡고 있던 머리가 하늘로 향해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이상한 모양이 되어 버린 머리에 시선이 머물렀고, 그걸 눈치챈 듯한 이재현이 자신의 앞머리를 몇 번 매만졌다.
“근데 이 시간에 왜…… 할 말 있어?”
“오. 족집게네.”
“넌 목적 있어야 말 걸잖아. 그래서 용건이 뭔데.”
이재현은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듯,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의자를 돌리며 손짓했다. 자신의 옆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혼자 쓰는 방이라 그런지 그가 앉은 의자를 제외하면 앉을 데라곤 침대밖에 없어서 자연스레 이재현의 책상에 반쯤 걸터앉듯 기대어 섰다. 막상 그를 앞에 두니 서두를 어떻게 떼야 할지 몰라 애꿎은 손가락만 괴롭혔고, 이재현은 말없이 내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어……. 그, 봉사 활동 다녀와서 생각한 건데 말이야. 너도 알다시피 내가 여기서 이 힘을 많이 사용하는 건 아니잖아?”
“응. 그런데?”
내가 꺼낸 말이 서론이라는 걸 안다는 듯 눈썹을 까딱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답은 다음 말을 재촉하는 추임새였다.
“내가 이쪽 일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작은 병원을 운영해 봐도 될까 해서. 물론 남는 시간에 말이야.”
그가 원하는 대로 곧장 본론을 꺼내자 내 말을 곱씹듯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 되물었다.
“병원?”
“뭐. 병원이라기엔 뭐하지만, 비각성자나 헌터……. 다 구분 없이 다치면 올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좋을 거 같아서. 치료비는 좀 저렴하게 해서…….”
“으흠…….”
“아, 그리고 혹시 김세한이랑 마주칠까 봐 걱정되는 거면 어차피 병원에서도 가면 쓸 거고, 걔네 길드엔 전문 치료 센터도 있어서 굳이 다른 병원 찾을 일이 없으니 안전할 거라고 생각해. 잘 생각해 보면 나 혼자 집에 남아서 노는 시간에 굴려서 돈 벌 수 있고…….”
나름 계산적인 이재현을 꼬드길 만한 설명을 덧붙였지만, 턱을 매만지는 그의 표정은 미묘했다.
“아니, 약자를 챙기는 건 엄밀히 말하면 돈이 안 되지. 게다가 소외된 사람들을 거두겠다는 거잖아.”
계산기 두드리는 속도는 나보다 그가 월등히 빨랐다. 나름 짜내 본 이 일의 장점이 놈의 단호함에 무너졌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팔짱을 낀 채 다리를 까딱이던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뭐에 관심 있는 거야?”
“……어?”
“남을 돕는 착한 나? 아니면 명예? 그것도 아니면 아무것도 안 한다는 무력감에서 탈피하고 싶은 거야?”
얼굴이 빨개질 만큼이나 적나라하면서 마치 나를 꿰뚫어 보는 듯한 물음이었다. 놈은 강제로 스스로의 욕망과 마주 보게 하였다. 이제 보니 이재현이 나열한 이유도 어느 정도 지분이 있는 듯했다.
“딱히…… 봉사에는 뜻이 없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일종의 책임감이랑 욕심 같은 것 때문이야. 네가 살려 놓은 b.w 길드원들도 원래 죽었어야 하는 애들이었잖아. 살렸더니 KSH 소속 S급들에 버금가는 힘을 가지게 된 거고. 바뀔 수 있다는 걸 보니까, 가능하면 최대한 많은 인원을 이야기의 마지막까지 데려가고 싶어. 내가 움직이면 좀 더 희망 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어.”
낯선 사람을 안 좋아하는 내가 인류애 따위 가지고 있을 리 없었다. 내가 가만있을 수 없다고 느낀 건 보육원에서 처음으로 내가 만든 이 세계의 절망을 목격한 순간부터였다.
‘아, 아이들도 그냥 희생양에 불과하구나. 그래, 그랬지. 이 이야기에서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었어.’
막연히 알고만 있던 일을 직접 눈으로 보는 건 꽤 큰 충격을 가져왔고, 우연히 만난 북이가 내 충동에 불을 질렀다. 그 아이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엑스트라일 테지만, 적어도 치료해 줄 ‘힐러’가 없어서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아졌다.
“밑 빠진 독을 손으로라도 막아 보겠다는 건가. 하긴, 이 이야기 끝에 너랑 내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니까. 사람은 최대한 많이 살아 있는 게 좋기야 하겠다. 약자들도 발전 가능성이 있다고 친다면, 몬스터를 상대할 인원도, 경제를 활성화할 인력도 많으면 좋으니까. 뭐 그다지 도움은 안 되겠지만.”
이재현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채 끄덕이며 말했다. 딱히 납득은 되지 않지만, 뜻은 이해했다는 듯한 대답이었다. 또 ‘이야기의 끝’이라는 말은 우리가 이곳과는 동떨어진 존재라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케 했다.
“그래.”
눈을 반쯤 뜬 이재현이 고개를 바로 세우며 말했다.
“어……? 허락한 거야?”
“어차피 이유가 뭐든 거절할 생각 없었는데? 너 하나로 운영하는 거라면 뭐 적자 볼 일도 없고, 무엇보다 네가 하고 싶다는 거잖아. 솔직히 우리 따라다니는 게 더 위험하다고 생각하던 차라.”
“왜? 내 옆엔 항상 유태영이 있는데.”
“아니. 몬스터가 위험하다는 게 아니라, 최근에는 전보다 더 돈이 되는 의뢰 위주로 받다 보니 김세한 팀이랑 슬슬 겹치는 것 같아서.”
여기 있는 한은 벗어날 수 없는 이름일 텐데, 놈의 이름이 고막을 지나 머리를 울릴 때마다 가슴이 짓눌리는 듯한 답답함이 몰려들었다. 혹시라도 마주치게 된다면 놈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적어도 웃으면서 볼 수 있는 사이가 아님은 확실했으니, 이야기의 끝까지 마주치지 않는 게 최선이었다.
“그럼 일단 작게라도 공간이 하나 필요하겠네.”
무의식중에 떠올렸던 얼굴이 들려온 목소리에 사라졌다. 이재현은 또 무언가를 생각하듯 턱을 짚고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병원 하니까 생각난 건데 말이야.”
약간의 미소를 띤 이재현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내 머리에 작은 빛이 번뜩였다.
“미소 정신 병원…….”
“미소 정신 병원!”
거의 동시에 같은 답이 흘러나왔고, 뜻이 통했다는 것이 반가운 듯 이재현이 내게 손바닥을 보였다. 가볍게 마주친 손바닥에선 경쾌한 소리가 났다.
미소 정신 병원. 아고라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3층짜리 작은 건물이었다. 지금은 다른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주인 없는 폐허에 불과했지만, 이곳을 기억하는 이유는 이야기 초반에 김세한이 사냥하던 스테이지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대단한데. 거길 기억하고 있고.”
“말했잖아. 외울 정도로 읽은 이 소설의 애독자라니까.”
안에선 열리지 않는 병실 문, 도망간 의료진, 남겨진 환자, 피가 튄 하얀 벽과 천장, 의료 기구가 주는 싸늘함……. 그 특유의 분위기가 필요해 선택했던 장소와 장면이었다. 그때 방 안에 갇힌 환자에게 김세한이 어떤 말을 했는지도 기억했다.
[“꺼내 줄 수야 있지만……. 나와도 지옥일걸. 어느 쪽이 좋아? 갑자기 나타난 괴물들에게 죽임당하는 거, 아니면 거기서 꿈꾸다 잠드는 거. 선택해. 원래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잖아.”]
그 질문에 방에 남기를 선택해 아사했을 이의 시체도 아직 그곳에 있을 것이었다.
“근데 거기, 아직 정리 안 돼서 시체 많을 텐데. 왜 거기야?”
“음. 위치상 아고라랑 가깝기도 하고, 잘만 정리하면 병원 느낌 제대로 날 거 같아서. 그리고 잘 꾸미면 2, 3층은 우리 공간으로 쓸 수 있을 거 같고.”
미묘하게 높아진 목소리. 그가 약간 흥분했다는 게 느껴졌다. 여러 가지 이유를 대고 있었지만, 분명 관심 있는 건 다른 쪽일 것이다.
“너 스릴러 좋아한다더니. 그래서 좀 궁금한 거 아니고?”
“음……. 좀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긴 하지.”
마치 들켰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도망치듯 눈을 돌렸던 그가 올라간 입꼬리로 말을 이었다.
“일단 건물 상태가 어떤지, 나중에 박도윤이랑 권지우 끌고 다녀와서 알려 줄게.”
“음……. 왜 그 둘이야?”
“썩은 시신 보면서도 덤덤할 만한 애들……임과 동시에 박도윤은 보육원 일로 너한테 빚진 게 있어서 별말 없이 도울 거 같고, 권지우는 널 많이 챙기니까 별말 없을 거 같아서.”
“생각보다 철저한 계산으로 선별했네. 너답다.”
“아, 너도 괜찮으면 같이 가고.”
그의 제안에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장면을 쓸 때 내 스트레스는 최고조를 달릴 무렵이었고, 자르고 터트리고 피가 흩뿌려지는 것만 생각하며 썼던 것이라 자극적인 묘사만이 가득했다. 즉, 내겐 스트레스를 뭉쳐서 버린 쓰레기 굴 같은 장소였고, 코 푼 휴지는 다시 만지고 싶지 않은 심리로 더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난 됐어.”
거절하고 나니 일은 내가 제안해 놓고 다 이재현에게 미루는 꼴이라 황급히 다른 대화 주제를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러던 중 책상 위에 올려진 안경에 시선이 멈춰 섰다.
“아, 아까 안경 쓰고 있던데. 너 시력 안 좋아?”
별다른 고민 없이 안경을 들어 올리자, 놈의 시선도 안경으로 향했다.
“음……. 많이는 아닌데 어릴 때부터 좋은 편은 아니어서.”
나는 어릴 때부터 시력 하나는 좋았던지라 안경을 쓰는 애들을 보면 늘 신기했다. 생각 없이 안경을 눈 가까이 대자 세상이 선명하면서도 휘몰아치듯 팽글팽글 돌았다. 어지러울 걸 알면서도 안경이 보이면 꼭 한 번씩 눈에 대 봐야 직성이 풀리곤 했다. 호기심을 해결한 나는 안경을 제자리에 내려놓으며 되물었다.
“근데 왜 나는 너 안경 쓴 거 한 번도 못 봤지?”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이 세계에서도 원래 세계에서도 이재현의 안경 쓴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어…… 남들 앞에선 잘 안 쓰니까.”
그는 목 부근을 긁고, 노골적으로 내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그럴수록 의문이 들었다.
“왜?”
무언가 숨기는 게 있는 듯한 모양새라 집요하게 눈을 맞추자 놈은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다시 눈을 돌렸다.
“……안 어울리니까.”
그 순간, 아까 황급히 안경을 벗었던 장면이 머리를 스쳤다.
“아. 그래서 아까……. 아하. 풉.”
“야, 웃지 마.”
생각지도 못한 답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재현이 자신의 외모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게 코미디였다.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 여전히 딴 곳을 보는 놈의 귀가 빨갰다.
“너도 외모에 신경 쓰긴 하는구나. 그런 거 전혀 생각 안 할 이미지인데.”
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고, 그는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꽤 부끄러워하는 듯해서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했다. 사람은 늘 기대에 부응하고 싶은 심리가 있으니 알게 모르게 이재현은 그 기대에 맞춰 살아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긴, 계속 잘생겼다고 해서 부담됐으려나.”
놈의 학창 시절을 떠올리며 꺼낸 이야기인데 예상치 못하게 발목을 잡혔다.
“누가 나 잘생겼대? 아니면 네 생각이야?”
이놈, 어쩌면 의외로 왕자병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귀가 있다면 애들이 하는 얘기들을 들었을 것이고, 눈이 있다면 거울을 맨날 볼 텐데 모를 리가 없었다.
“와, 모른 척하는 거 봐. 재수 없어. 그만하자, 이 얘기.”
“왜. 진짜 궁금해서 묻는 건데.”
정말 모르겠다는 듯 눈을 끔벅이는 놈이 가소로워 듣고 싶을 말을 뱉어 주었다.
“그래……. 네가 우리 학교 간판남이었다. 됐지?”
나는 언젠가 채연이 말했던 고리타분하고 촌스러운 단어를 입에 담았고.
“그게 무슨 뜻인데?”
놈은 그마저도 물고 늘어졌다.
“아. 네가 학교에서 제일 볼만했나 보지! 이제 됐어?”
그 단어를 내 입으로 풀고 나서야 놈은 만족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네 입으로 들으니까 괜히 이긴 기분인데.”
사람 괴롭히는 악취미가 있는 건 확실해 보였다.
“너 진짜 깬다.”
오만상을 쓴 채 꺼낸 말에 이재현은 다시 눈을 빛내 왔다.
“깨질 만한 좋은 이미지가 있었나 봐?”
“아, 짜증 나…….”
뱉고 보니 어릴 적에 놈을 어느 정도 의식했다는 걸 인정한 꼴이었다. 상황은 역전되어 나는 얼굴에 올라오는 열을 식히려 애썼고, 놈은 웃음을 참는 듯 몸을 작게 들썩댔다. 날 바라보는 집요한 시선을 피해 도망치다 다시 이 상황을 넘길 만한 이야기를 꺼냈다.
“어릴 때부터 시력이 안 좋았다는 건, 내내 안 좋았다는 거네. 학교 다닐 때 공부 어떻게 했냐? 렌즈 끼고?”
“음, 안경 끼면 물론 선명해서 좋긴 한데. 시력이 또 그 정도로 안 좋은 건 아니라. 멀리 있는 것만 좀 안 보이는 정도야.”
“지금 나는 잘 보이는 거야?”
“응. 딱 이 정도 거리에서는.”
그렇게 말한 놈이 의자를 밀어 조금 뒤로 가며 말을 이었다.
“이 정도 거리면 흐릿해서…… 자세히 보려면 눈에 힘주고 집중해야 해.”
“…….”
“이렇게.”
그는 멀어진 거리에서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마주한 얼굴에 학창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어딘가 냉하고, 노려보는 듯한 느낌. 늘 불편하기만 하던 놈의 ‘그 시선’이었다. 복도를 지날 때면 어김없이 마주친 그 눈의 비밀을 알아 버린 것만 같았다.
***
바로 다음 날이었다. 이재현은 다른 볼일이 있다는 말 하나로 팀원들을 납득하게 하고, 오늘 있는 의뢰에서 빠져나왔다. 대체로 팀원들은 그의 계획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건 무관심이라기보단 믿음이 그만큼 크다는 걸 의미했다.
낮임에도 구름이 낀 하늘 탓에 잿빛 필터를 씌운 듯 세상은 한층 채도를 낮추었고,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끈적하게 피부를 감싸 와 몸이 젖은 듯 무거운 느낌이었다.
이렇게 한껏 음산한 기운이 감돌아 대낮인데도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지금, 나와 이재현은 미소 정신 병원을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유독 서늘하게 살갗을 스쳤고, 나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야, 이재현. 너 무슨 학과 들어갔다고 했지?”
“나? 법학과. 근데 그건 왜?”
그 대학의 법학도라니. 이제 보니 두 달 내내 학교 앞에 걸려 있던 현수막이 오버가 아니었다. 이재현이 법학과에 간 건 대한민국에 큰 득이 될 것이다. 놈은 명백히 언변술의 귀재다.
“잘 선택했네. 딱이다, 너.”
“뭐야, 갑자기.”
그게 아니라면 어제만 해도 안 간다고 확언했던 내가 미소 정신 병원을 앞두고 있을 리 없었다. 벗겨진 페인트 탓에 콘크리트가 드러나 회색빛이 되어 버린 외관, 덜렁거리는 초록색 십자 간판, 깨진 창문. 모든 요소 하나하나가 굳이 이 건물이 가진 서사를 설명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을 만큼 서늘하고 불길한 기운을 풍겼다.
“자. 이제 들어가 볼까?”
어쩐지 조금 들뜬 듯한 이재현이 먼저 발을 뗐다. 보통 정신 병원들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환자들의 탈출을 막을 겸, 보안을 철저히 하기 위해 이중문을 사용한다. 하지만 이곳은 그저 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쇠와 유리 조각만 바닥에 몇 개 굴러다닐 뿐, 뻥 뚫려 있었다.
그렇다는 건 안에 몬스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입구가 제대로 막히지 않은 건물이라면 대부분 몬스터 서식지가 되곤 했기 때문이다.
‘무…… 무서워.’
잘린 시체, 토막 난 몬스터 사체. 지금까지 아무렇지 않게 겪어 왔던 피 냄새 나는 상황은 무섭지 않았다. 다만, 빈 병원이 주는 서늘한 분위기가 싫었고, 풍겨 오는 약 냄새가, 방 안에서 쓸쓸히 썩어 갔을 시체가,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올지 모르는 몬스터가 두려웠다.
이재현은 병원 입구 앞에서 나를 돌아보며 왜 오지 않느냐는 듯 눈썹을 까닥였다.
“야…… 내가 진짜 이런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솔직히 좀 무섭다. 너 혼자…….”
자존심을 한 번 굽히고 꺼낸 호소가 끝나기도 전에 이재현이 말을 가로챘다.
“아, 그래……. 무서우면 어쩔 수 없지.”
나를 이해한다는 말의 내용과는 달리 그의 눈이 내리깔렸고, 아까까지만 해도 묘하게 밝았던 얼굴이 티가 날 정도로 가라앉았다.
“비록 네 의견으로 건물 답사를 나온 거고, 그 때문에 내가 오늘 의뢰에서 빠져 안 그래도 피곤한 팀원들에게 부담을 끼치면서까지 시간 비워서 왔지만. 그래. 무섭다는데 어쩔 수 없지…….”
구체적으로 늘어놓는 불평 아닌 불평이 심장을 쿡쿡 찔렀다. 한숨을 삼키는 듯한 이재현이 작게 몸을 튼 순간, 달려가 놈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야! 갈게. 가면 되잖아.”
“아냐, 무리할 필요 없어.”
날 무리하게 하는 본인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눈썹을 늘어뜨렸다. 이렇게 되니 내가 가게 해 달라고 사정하는 모양새였다.
“아, 간다고!”
“뭐, 그렇게 원한다면…….”
이재현은 그제야 한층 개운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놈을 향한 얄미움도 건물 입구에 서자 미약하게 풍겨 오는 소독약 냄새에 다 씻겨 내려갔고, 온 신경은 그저 한 걸음 앞의 내가 겪어야 할 현실에 쏠렸다.
“혹시 몬스터 나올지도 모르니까…… 여기 잡고 갈게.”
엄지와 검지로 이재현의 소매 끝자락을 살짝 잡아당기자 흘끔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뭐…… 무서우면 팔을 잡는 것도 괜찮은데, 나는.”
그는 고개를 기울이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를 배려해 주는 걸까.
“그래? 고마워.”
베풀어 준 호의를 받아들여 놈의 손목을 잡았다. 이재현의 손목에 걸린 차가운 메탈 시계가 손날 부분에 닿아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의외로 두꺼운 손목은 내 손으로 다 감싸 쥘 수 없었다. 하긴, 그의 키와 체격으로 봤을 땐 당연한 거였지만, 이렇게 체감하고 있자니 새삼 놀라웠다. 닿은 손바닥 가득 열기가 느껴졌고, 손목 부근에서 느껴지는 맥박이 손끝을 타고 전해져 왔다.
‘전에도 느꼈지만 얘…… 엄청 건강한가 보네.’
조금 빠른 듯 느껴지는 맥박에 흘끔 놈을 올려다보았을 땐, 무슨 일인지 반대 손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야, 너 혈액 순환 엄청 잘되나 보다.”
“……그래? 그런가 보지 뭐. 그보다, 너 가끔 사람 당황하게 하는 거 알아?”
“왜? 나도 느끼고 싶어서 느낀 게 아니라, 네 혈관이 너무 팔딱팔딱…….”
“아니야. 됐어.”
아래쪽 손날에 닿은 시계가 영 불편해 손을 조금 올려 놈의 팔을 잡았고, 이번엔 혈관 대신 근육의 작은 움직임이 느껴져 왔다. 원래 사람 몸이라는 게 이렇게 신경 쓰이는 게 많았던가. 손바닥이 너무 많은 정보를 받아들였다.
“가자.”
아까까지만 해도 먼저 발을 뗐던 놈이 지금은 움직이지 않아 내가 먼저 말을 꺼냈고,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린 이재현이 두어 번 크게 숨을 뱉어 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더니 사실은 긴장하고 있던 모양이다. 혹은 막상 가려니 두려운 걸지도 몰랐다.
“야, 무서우면 나중에 권지우랑 박도윤이랑 같이 오…….”
“아냐. 갈 거야, 지금.”
놈은 잠시 떨어지려 했던 내 손을 잡아 원상 복구해 놓으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마침내 들어선 병원 안. 들어가자마자 앞쪽으론 위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보였고, 그 전엔 양옆으로 뻗은 복도가 있었다. 병원 특유의 하얀 바닥과 벽엔 약간의 얼룩이 져 있었고, 스산한 느낌을 주는 냄새가 풍겨 왔다. 어딘가 꿉꿉한 곰팡내와 비슷했다. 구석구석엔 거미줄이 늘어져 있었고, 바닥엔 두툼이 쌓인 먼지와 함께 족히 4년은 되었을 검은 피가 눌어붙어 있었다.
“으…….”
눈을 반쯤 뜬 채 이재현이 움직이는 대로 끌려다니듯 발을 옮겼다. 1층 복도를 얼마나 걸었을까. 갑작스레 풍겨 오는 악취에 코를 막았다. 처음 맡아 보는 낯선 냄새에 금방이라도 구역질할 것 같았다. 생선이 썩어 문드러진 듯, 약간 톡 쏘는 암모니아와 닮은 냄새.
“시체 썩는 냄새야.”
“……뭐?”
덤덤히 말하는 이재현을 올려다보며 되물었다. 코로 들어온 악취가 목구멍을 뜨겁게 만들고 있어 눈물이 핑 돌았다. 이재현은 검은 바닥 위에 놓인 몇 개의 뼈를 신발로 건드리며 말을 이었다.
“이미 뼈밖에 없지만 썩을 때 났던 냄새가 건물에 배었나 보다.”
사람의 두개골을 발로 이리저리 건드리며 태연하게 살피는 이재현의 옆에서 나는 코를 막은 채 올라오는 역함을 억눌렀다.
“야…… 초입부터 이 모양인데 여기 진짜 청소해서 쓰게?”
미소 정신 병원은 3층짜리 작은 소규모 건물이었다. 하지만 작다고 해도 팀원 일곱 명이 청소한다면 한 달은 꼬박 걸릴 것이었다. 더군다나 이 냄새를 지우기 위해선 꼼꼼한 세제 청소가 필수일 것 같았다.
“다른 데도 둘러보고 결정하지 뭐. 사실 내가 가 보고 싶은 데는 2층이야.”
놈이 가려는 곳은 얼핏 예상할 수 있었다. 갇힌 환자가 있을 204호 병실. 즉 김세한이 지나간 곳이었다. 이재현은 1층을 둘러보다 다시 계단 쪽으로 향했다.
열린 병실 문 사이로 환자들이 쓰던 침대와 책상이 보이고, 관리실로 보이는 곳엔 커다란 모니터가 놓여 있었다. 사각지대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짧은 복도에도 구석구석 달린 CCTV와 복도 교차로에 달린 반사경이 또 한 번 이곳이 정신 병원임을 체감케 했다.
다시 입구 쪽으로 돌아온 이재현은 망설임 없이 2층으로 향했다. 위로 향하는 계단 벽면에는 그린 사람의 나이를 추측할 수 없는 그림들이 어설프게 붙여져 있었다. 어떤 그림은 눈이 아플 정도로 쨍한 색감과 강한 선을 가진 반면 어떤 그림은 색 하나 없이 흐릿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밑으로는 군데군데 눌어붙은 검은 피의 흔적과 뼈가 보였다. 또 한 번 풍겨 오는 악취에 코를 틀어막았다. 적나라한 죽음의 냄새였다.
“이런 거 보면 좀 서럽지 않아?”
오만상을 쓰는 나와 달리 그는 평온한 얼굴로 계단을 오르며 말했다.
“……뭐가?”
“한 생물이 어떤 삶을 살아왔든, 고귀했든 천했든, 선했든 악했든. 다 똑같은 악취를 풍기며 썩어 간다는 게.”
놈은 이 눈이 따가울 정도 풍기는 악취에도 코를 막지 않았다. 그저 앞을 보며 걸을 뿐이었다.
“공평하면서도 차이가 없어서 싫어. 차이가 없으면 적당히 나쁘게 살고 싶어지잖아.”
중얼거리는 듯한 말이었지만, 이재현의 생각을 엿듣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딱히 죽음에 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어둠이 죽음이지 않을까. 그 정도는 생각해 본 적 있지만.
“적당히 나쁜 건 괜찮지 않아?”
뚜벅뚜벅-2층 복도를 걷는 발걸음 소리에 내 목소리가 겹쳐졌고, 날 바라보는 이재현의 시선이 느껴졌다.
“너도 그렇게 생각해?”
“응. 내가 지향하는 삶인데? 순간순간 후회 없이, 자기 욕구 채우면서, 사람들 눈치 안 보고 사는 거. 난 신을 안 믿어서 사후 세계는 없다고 생각하거든. 왠지 갈 때 착하게 살았다, 뿌듯했다고 느끼기보다는 맘껏 지랄하고 가서 속 시원하다고 느끼는 편이 좋지 않아?”
“풉.”
나름의 생각을 늘어놓고 있는데, 옆에선 웃음을 참으려는 듯 이재현의 몸이 꿀렁거렸다.
“왜 웃어. 네가 먼저 꺼낸 주제잖아.”
“아니, 그냥 김세한이 괜히 만들어진 건 아니구나 싶어서. 네 가치관이 다 들어가 있네.”
“아……. 뭐, 너무 착하면 사람들한테 끌려다니게 되니까.”
“그런 거치곤 넌 너무 착한데?”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나는 언제나 나 자신을 최우선으로 챙기고 있었으니까.
“네가 뭘 알아. 난 안 착해.”
“아냐. 넌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착해. 좀 더 이기적으로 살아. 더, 더 이기적이어도 되니까.”
놈의 말이 귀를 타고 흘러들어 와, 소화되지 못한 채 가슴에 얹혔다.
‘더 이기적으로?’
“가령, 이 소설의 말미에 b.w의 팀원 하나가 몬스터에게 당하는 일이 생긴다고 쳤을 때, 구하거나 치료할 생각 말고 네 목숨부터 챙길 수 있어?”
“…….”
이재현이 든 예시에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으로 상황을 그려 보니, 쓰러진 팀원을 두고 갈 거 같지는 않았다.
“거봐. 내가 아는 구재희는 이렇다니까.”
그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움직이던 두 다리를 멈추자 작은 창이 뚫린 하얀 문이 보였다. 슬쩍 올려다본 벽면에는 ‘204호’라는 글자가 박혀 있었다.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긴장감이 흘러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을 때, 놈은 망설임 없이 문을 열며 말했다.
“걱정 마. 설령 네가 그러지 못하더라도, 내가 끌고 달려 줄게. 너랑 달리 난 착하지 않거든.”
나라면 하지 못할 일을 놈은 태연히 해낸다. 아마 나라면 이곳의 문을 열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면 내가 그린 이 처참함을 그저 상상이라고 치부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김세한이 떠난 뒤에 남겨진 이 사람의 남은 시간은 자세히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꼭 확인하고 싶었어, 여기.”
불행히도 알게 돼 버린 ‘그 냄새’가 더 지독히 풍겨 왔다. 찾을 필요도 없이, 방 한편에 놓인 침대 위에 사람의 흔적이 있었다. 자해라도 한 걸까. 먼지 붙은 새하얀 벽에 피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배고파.’, ‘외로워.’, ‘살려 줘.’ 모두 짧은 말들이었지만 그 밑에 남은 뼛조각의 주인이 느꼈을 공포가 생생하게 전해졌다.
방 안에는 새하얀 침구가 올려진 침대와 철장이 단단히 쳐진 창문, 그리고 텅 빈 책상이 전부였다. 자해를 방지하기 위해 연필 한 자루도 주지 않은 탓에 다른 시선을 끌 만한 건 없었다. 이재현은 문에 길게 남겨진 손톱자국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아주 조금이지만 살 가능성이 있는 현실에 맞서기보다, 꿈속에서 죽어 가기를 택한 인간의 모습이 정말 인상 깊었거든.”
“……나 참. 너도 별걸 다 기억하고 있다.”
놈의 말에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악취에 적응한 걸까. 아까까지만 해도 눈에 담기 힘들었던 사람의 잔해를 어느샌가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굶어 죽어 갔을 그의 하루하루를 머릿속에 그렸다. 이 사람, 죽기 직전엔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으려나. 쓸데없는 망상이 또 한 번 머리를 잠식했던 순간이었다.
“나라면 당연히 전자였겠지만, 이야기를 쓴 너는 혹시 후자를 택하려나?”
이재현이 또 한 번 나를 생각의 늪에서 꺼내어 냈다.
“글쎄, 나가려 하지 않았을까. 작은 가능성에도 일단 희망을 걸어 보는 편이어서. 그 탓에 대책 없다는 소리도 많이 듣지만.”
무거워지는 마음에 방 안을 살피기 그만둔 내 앞으로 이재현의 가슴께가 보였다.
“이런 대화를 해 보고 싶었어, 너랑.”
가까운 거리 탓일까.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온기가 뜨거웠다.
‘아, 내가 계속 잡고 있었구나.’
무의식적으로 계속 잡고 있던 팔을 놓아주었을 때, 그의 손이 그대로 올라와 내 머리 위에 얹어졌다.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놈을 올려다보았고, 이재현은 옅은 미소 띤 얼굴로 손을 올려 내 머리를 쓰다듬듯 쓸어내렸다.
“네 소설 읽으면서 내내 궁금했거든. 이 작은 머릿속엔 대체 뭐가 들었을까.”
“뭐?”
“평소에 뭘 생각하고 살면 이런 장면을 상상할 수 있지? 재밌다.”
마치 혼잣말을 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복도 창가와 병실 문을 타고 넘어온 황금빛 햇살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익숙한 구도, 조용한 주변, 마주 선 우리. 내 의지와 관계없이 노트를 든 이재현을 마주했던 교실에서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고마워. 즐겁게 해 줘서.”
‘어쩌면 그때 교실에서 내게 하려던 말도 이런 것이었을까.’라는 생각이 스쳤고,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당장 목 잘린 시신을 봐도 끄떡없는 나인데 썩은 시신에는 꽤 충격을 받았는지, 답사를 다녀온 날 모두가 모인 저녁 식사 자리에서 헛구역질을 반복했다. 그 강렬한 냄새가 계속 코끝에 맴도는 착각이 들었고, 결국 두통까지 앓고 나서야 아주 늦은 새벽에 잠들 수 있었다.
이재현은 뭐든 정해진 일을 실행해 옮기는 데 망설임이 없었고, 이번 병원 청소 건도 마찬가지였다. 계획을 세우고 곧바로 다음 날부터 청소가 시작되었다.
비위가 약한 나를 배려한 팀원들 덕에 대략적인 시신이 치워지는 3일 동안 청소에서 배제되었는데, 그는 하루하루 미소 정신 병원의 청소 상태를 내게 자발적으로 보고했다. 본의 아니게 뛰어난 상상력을 가진 탓에 놈이 무의식중에 묘사하는 시체들이 머릿속에 그려져 괴로웠지만, 이재현의 즐거워 보이는 얼굴을 보고 있자면 낯설면서도 신기해서 그 시간이 나쁘지는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불안했던 건 팀원들의 반응이었다. 내 욕심으로 하지 않아도 되는 수고를 하게 된 셈이니까.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이재현이 청소하는 내내 끌고 다닌 권지우와 박도윤은 물론이고, 나머지 팀원들도 군말 않고 그의 말에 따랐다. 이게 바로 의리인 걸까. 새삼 불만을 토해 내지 않는 팀원들에게 감동했다.
그렇게 어느새 한 달이 흘러 병원 청소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나는 젖은 걸레로 먼지 낀 창문을 닦아 내며 수줍게 입을 열었다.
“너희 되게 적극적이다. 고맙기는 한데…… 이 정도로 열심히 도와줄 줄 몰랐어.”
밀려드는 훈훈함에 나도 모르게 코를 쓸었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내 예상만큼 가슴 따뜻하지 않았다.
“어, 이성재가 2층은 놀이방으로 써도 된다고 해서. 아싸! 당구대 놔야지.”
하긴, 병원으로 쓸 공간은 1층으로 충분하긴 했다. 힐의 특성상 내과 진료는 불가능했으니 입원할 환자는 없었고, 사실상 환자와 만날 진료실 하나만 있으면 됐다.
“3층은 개조해서 짹짹이 집 만들기로 했어. 옥상에 두는 거 안 그래도 불안했는데. 이성재 그 새끼, 은근 섬세하단 말이야.”
뒤에서 들려온 유태영의 말로 내가 괜한 감동을 하고 있었음을 확실히 깨달았다. 여기 있는 모두가 그저 자신의 이득을 보고 움직이는 것이었다. 불만이 너무 없다 했더니, 결국 불만이 없게 만든 것뿐이었다. 이재현이 이들을 얼마나 파악하고 있는지가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역시 사람 다루는 데에는 도가 텄네.’
나는 고개를 저으며 픽 웃음을 흘렸다.
이재현의 능력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병원을 차려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에, 내심 이를 어떻게 알려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건물 청소를 어느 정도 마쳤을 때쯤 미소 정신 병원을 b.w의 힐러가 병원 개념의 치료소로 바꾸고 있다는 정보가 아고라를 중심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넌 뭘 했길래 개업도 안 했는데 소문이 돌아?”
“그냥 청소 도구 사러 아고라 갈 때마다 상인들한테 슬슬 흘렸더니……. 원래 소문 퍼지는 건 빠르거든.”
감탄을 담아 묻자 이재현은 별일 아니라는 듯 덤덤히 답했다. 문득 사람들과 시답지 않은 얘기를 나누던 놈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과연 그가 이것까지 의도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b.w의 힐러’라는 말이 사람들에겐 꽤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한창 떠오르고 있던 ‘b.w’라는 길드의 이름과 거기에 소속된 힐러가 운영하는 병원이라는 사실이 시너지 효과를 내며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
이재현의 우려대로 병원을 운영하면서 얻는 수익은 소박했지만, 병원을 운영한 덕에 이름만 들어도 알 만큼 커져 버린 ‘가면 길드 b.w’의 몸값은 치열한 의뢰 경쟁 덕에 오름세가 계속되고 있어 결과적으론 도움이 되는 데에 성공한 셈이었다.
손님을 받은 건 3개월 정도로 짧은 기간이었지만, 빠르게 퍼진 소문 덕에 결과적으로 나는 꽤 이름난 병원을 운영하는 힐러가 되었다. 비록 병원을 지키는 게 나 하나이고, 그 큰 건물에 내가 머무는 공간이라곤 진료실이라는 이름의 방 하나였지만. 무언가를 한다는 것, 밤에 지쳐서 잠들 수 있다는 것, 내 쓸모를 증명한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에 젖어 있었다.
마침내 충족된 욕구에 하루하루 편한 마음으로 변하는 하늘을 감상할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김세한의 옆에선 꿈꾸지 못했던 생활을 누리는 셈이었다.
여느 때와 같은 병원에서의 하루가 지나갈 줄 알았던 날, 손님의 발길이 끊기고, 예상에 없던 인물이 노크도 없이 진료실로 들어왔다. 가면을 쓰려던 내 손이 진료실로 들어온 익숙한 실루엣에 멈칫했다. 이재현이었다.
“뭐야? 어쩐 일이야?”
“오늘 일이 좀 일찍 끝나서. 병원엔 별일 없는지 보러왔어.”
평소라면 집에서 만나야 하는 이재현을 진료실에서 보니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늘 같이 아침과 저녁을 먹는데도 오랜만에 만난 듯한 느낌. 그건 아마 병원 답사 이후 둘만 있는 시간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때, 일은 할 만해?”
진료실 안의 가구라곤 내가 쓰는 책상과 의자, 책장, 환자가 누울 수 있는 작은 침대, 등받이 없는 손님용 의자뿐이었다. 그는 태연히 내가 있는 책상으로 다가와 키에 비해 낮을 게 분명한 작은 손님용 의자에 앉아 나를 마주 보았다. 마치 나를 찾아온 환자 같은 느낌이었다.
“할 만한 건가? 그냥 하는 거지 뭐.”
“뭐, 잘할 거라 믿긴 했는데…….”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 예감에 나는 눈치껏 보던 책을 내려놓았다. 나는 몰려드는 환자들을 진료하느라, 놈은 쏟아지는 의뢰들을 처리하느라 한창 바빴기에 이렇게 ‘대화’를 위해 마주 보는 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너, 말 못 한다는 소문 돌더라.”
그 소문은 나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가면을 쓴 나를 빤히 바라보다 수화로 대화를 시도했던 환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소문이 난 원인은 내가 보육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없이 치료만 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벗어 둔 가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 이거 쓰면 말을 안 해도 될 것 같은 기분이라……. 그렇다고 말을 못 한다는 소문이 나다니, 사람들 상상력도 좋네.”
“보통 사람들에겐 아무 말도 없다는 게 그만큼 이상한 일이니까.”
테이블에 놓인 하회탈을 매만지며 새삼 내가 다친 상처 부위에만 집중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치료했던 부위들은 생각이 날지언정 떠오르는 환자의 얼굴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외상은 대부분 티가 나서 굳이 어딜 다쳤냐고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에 생긴 문제이기도 했다. 결론적으론 병원을 기계식으로 운영하는 셈이었다. 다쳐서 오면 고쳐서 내보내는, 소통 없고 목적만 있는 심플한 운영이었다. 이재현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말을 안 하고 진료를 보는 의사라니. 넌 정말 상상 이상으로 능력이 좋네.”
“사회성이 심히 떨어진다는 말을 참신하게 해 주네. 고맙다. 네 쪽은 뭐 새로운 몬스터가 나타났다거나……. 재밌는 소식 있어?”
“뭘 물어. 다음 몬스터 나타나기 전까지 중요한 사건 하나 남았잖아.”
상당히 형식적으로 던진 질문에 돌아온 답은 잊고 있던 사건 하나를 떠오르게 했다. 인구의 3분의 1만 남은 시점. 은빛 고래가 가져온 피해는 사람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슬슬 힘의 한계를 느끼던 전국의 길드가 대책 회의를 위해 아고라에 모이는 사건이 있다. 아고라로 모이는 이유는 간단했다. 가장 많은 수의 생존자가 모인 곳이었고, 무엇보다 가까운 곳에 김세한이 있기 때문이었다.
‘평화와 협력, 경쟁보다는 공생.’
결론이 뻔한 회의였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에겐 공통의 적은 서로가 아닌 몬스터임을 강조하며 인류애를 충전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소설 속에서 이 에피소드가 필요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먼저 암묵적으로 세계 최강이었던 김세한이 공식적인 1등으로 인정받는 순간이 필요했다. 물론 김세한 본인은 별 관심 없을 테지만, 작가인 내 욕심으로 쓰인 장면이었다.
두 번째로는 자신의 이익만 좇던 김세한이 어느 정도 ‘대의’를 생각해 보게 되는 시간이 필요했다. 처음부터 먼치킨이었던 김세한에게 외적으로 성장할 부분이 더는 남지 않았기에 취한 선택이었다. 어느 이야기든 주인공이 성장하는 장면은 놓칠 수 없는 부분이니까.
“맞다. 그런 에피소드도 있었지…….”
“뭐야, 잊고 있었어? 독자 입장에선 꽤 쾌감을 주던 장면이었는데.”
이재현은 또 내 소설의 호평을 꺼내어 놨지만, 내 신경은 다른 쪽에 쏠려 있었다.
“길드 모임이라면 우리도 가 봐야겠지?”
“뭐. 워낙 유명해져서 참가는 해야 할 거 같아. 네가 신경 쓰고 있는 거…… 김세한인가?”
이재현은 내 머릿속을 들여다본 듯 말했다.
“응. 그날 난 뒤로 빠져 있을게. 가면 쓰면 들키지야 않겠지만, 별개로…… 얼굴 보고 싶지 않아서.”
대책 회의는 스토리를 위해 빠질 수 없는 에피소드다. 따라서 김세한이 올 게 확실했고, 무대에 오르게 되어 있었다. 김세한은 무대, 나는 군중 속. 멀리서 보는 게 고작일 테지만, 놈을 눈에 담는다면 또 한동안 생각에 잠겨 아무것도 못 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지금 내겐 더 이상의 감정 소모는 불필요했다. 굳이 ‘누구의 얼굴’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알아들은 듯 이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조심해. 김세한은 감이 워낙 좋으니까, 스쳐 가면서 목소리만 들어도 알지 몰라.”
“내 걱정 해 주는 거야?”
놈은 꼭 대답하길 뭐한 걸 되묻곤 했다. 마치 당황하는 내 반응을 즐기기라도 하듯.
“뭐, 일단 리더니까.”
대충 얼버무리는 대답에도 놈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럴 때면 항상 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 너 진짜 짜증 난다.”
“또 왜.”
되묻는 얼굴엔 미소가 번졌다.
“몰라. 넌 그냥 존재 자체가 짜증 나. 할 말 끝났으면 일어나. 나 일해야 해.”
“거짓말. 환자 없어서 쉬고 있는 거잖아, 지금.”
“공부 중이었거든?”
“힐러 교본 다 봤다고 하지 않았어?”
손쓸 새도 없이 내 앞에 놓인 책을 낚아챈 놈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소설책일 줄 알았는데……. 이건 또 예상 못 했네.”
“……아, 내놔.”
“나한테 배우지.”
“너도 많이 아는 건 아니라며.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지금 읽고 있는 건 수화 교본이었다. 병원을 열고 일이 바빠 요즘은 찾아가지 못했지만, 그 전에는 이재현과 보육원에 곧잘 찾아가곤 했다. 북이는 항상 ‘어색하면 어쩌지…….’라는 전날 밤 고민이 무색할 정도로 나를 반겼다.
“……나도 알아듣고 싶어. 북이가 뭐라고 하는 건지.”
“이거, 그림으로 설명돼 있어도 헷갈리지 않아?”
“……독심술도 해?”
“역시 내가 알려 줘야 할 거 같은데.”
놈은 은근히 미끼를 던졌고, 나는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덥석 물었다.
“네가 그렇게 알려 주고 싶다면 어쩔 수 없지. 많이는 아니고 매일 저녁 한 시간 정도.”
뻔뻔한 말투로 말하자 놈은 과장스럽게 책을 닫으며 가식적인 미소를 띠었다.
“아. 한 시간이나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바쁘신 ‘힐러’ 선생님.”
놀리는 듯하면서도 날 비행기 태워 주는 말이 나쁘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오냐.”
“근데 생각보다 진심인가 보네, 북이한테. 하긴, 네가 네 발로 찾아가서 만날 정도면.”
“응. 그냥 챙겨 주고 싶더라.”
떠오르는 귀여운 얼굴에 가슴이 몽글몽글해졌다.
“허, 애 안 좋아한다고 했던 게 누구더라.”
이재현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애는 안 좋아해. 그냥 북이를 좋아하는 거지.”
“왜?”
또 이상한 타이밍에 들려온 물음이었다. 북이를 왜 좋아하느냐는 것 같았다.
“그냥 나한테 달려와 안기는 게 강아지 같아서? 뭐 이유야 많겠지만. 음. 그래도 결국은…….”
“결국은?”
“북이가 날 좋아해 주니까, 나도 좋아해 주고 싶어. 받았으니 돌려주고 싶은 마음인 걸지도 몰라.”
떠오르는 예쁜 미소에 내 입에서도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와 달리 이재현은 미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그런 쪽에 약하구나.”
“뭐? 귀여운 거?”
“아니, 사랑받는 거.”
쿡-또 한 번 놈은 아무렇지 않게 내 깊은 곳을 찔러왔다.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눈이 불쾌했다.
“남의 약점 찾는 거 좋아하는 거야?”
“정곡이었나 보네.”
정곡이었다. 입을 꾹 다문 나 대신 그가 말을 이어 갔다.
“난 네 친구가 이채연뿐인 이유가 궁금했거든. 그럼 혹시 학창 시절에 인간관계를 제한하던 것도 그런 맥락인가. 사랑받으면 돌려 줘야 하고, 그게 힘들어서 아예 안 받겠다. 그런 식의 사고?”
날 캐릭터 분석하듯 해석을 늘어놓는 이재현 앞에서 대놓고 인상을 구겼다.
“그냥 혼자가 편해서야. 그리고 너, 사람 해부하는 것 좀 그만둬. 기분 뭣 같으니까.”
“불편했다면 미안해.”
또 쉽게 들어 버린 사과에 나오려는 한숨을 억눌렀다. 이미 다 들켜 버린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억울하지만 이재현이 한 해석은 어느 정도 들어맞았다.
나는 태어나길 몹시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태어났고, ‘1’만큼의 애정이 수포가 되었을 때 입는 타격도 남들보다 월등히 컸다. 그래서 나는 애정을 받는 것을 두려워했다. 상대는 내게 주는 게 작은 일부분일지 몰라도, 그에 상응하려면 난 전부를 걸어야 했으니까.
“근데…… 한 가지 의문이 드네.”
“…….”
“왜 김세한한테는 그렇지 않았지? 내가 느끼기엔 김세한은 널 꽤 진심으로 좋아한 거 같은데.”
이재현은 턱을 괴고 고개를 삐딱이 한 채 물었다. 반쯤 뜬 눈은 마치 내가 대답할 때까지 계속 기다리겠다는 듯 흔들림이 없었다.
“그게 왜 궁금한데?”
“김세한이랑 지낸 게 3년인데……. 이름도 알려 주지 않았다는 게 내가 생각하고 있는 ‘착한’ 너랑은 괴리가 있어서.”
“멋대로 환상 품지 마. 누가 착하다고…….”
나른한 듯한 이재현의 눈이 조금 빛났다. 남의 연애사에 관심이 있을 만한 놈은 아니었지만, 상대가 주인공인 ‘김세한’이라 흥미를 느끼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어느 정도 날 파악한 이재현의 앞이어서일까, 어설픈 거짓말을 지어내는 것도 어려웠고,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다.
“걔한테 받은 만큼 주려면……. 난 분명 전부 다 꺼내 줘야 했을 테고, 나는 영원하지 못할 관계에 모든 걸 걸 만큼 어리석지 않았으니까.”
지난 이야기가 되었지만, 나는 그 당시에 김세한의 마음이 사랑이 아니길 바랐던 것 같다. 사랑이라 믿어 버리면 다 주고 싶을 게 뻔해서 계속 뒷걸음질 쳤고, 놈이 따라오면 더 도망치고 싶어졌다. 서로가 진심이라 한들, 어차피 놈이 내민 손은 잡아 줄 수 없을 테니까.
나는 돌아갈 곳이 있었고, 김세한의 세상은 이곳이었으니 우리는 가라앉을 게 뻔한 젖은 종이배에 타고 있는 셈이었다. 어차피 언젠가 끝날, 필연적으로 아플 게 뻔한 관계.
‘아무도 행복할 수 없는 사랑이 가치가 있을까?’
아니, 다른 걸 다 떠나서 애초에 나란 인간은 사랑과 어울리지 않았다. 사랑엔 용기와 헌신이 필요했고, 나는 상처받기 두려워 아무것도 걸지 못하는 겁쟁이였으니까.
“그럼 반대로 영원할 거라는 확신이 있으면, 다 걸지도 모른다는 건가?”
생각에 잠긴 내게 이재현은 또 한 번의 질문을 던져 왔다. 아까와 달리 김세한과 연관 없는 듯한 물음이었지만 이재현의 눈은 여전히 호기심을 담고 있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뭐…… 영원하다면야 그럴지도 모르겠네.”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있는 법이었다. 이별을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만남도 두려워하는 나에게 ‘영원’이라는 말은 내심 꿈꿔 오던 단어일지도 몰랐다.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있다고 믿고 싶은…….
“근데 뭐. 영원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냥 내 곁에 오래 있어 주는 정도여도 좋을 것 같아. 추억도 가치 있다는 걸 배운 참이라.”
요즘의 나는 조금씩 변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어색하던 유태영과 친해진 것도, 북이를 아끼게 된 것도, 자발적으로 낯선 사람들을 치료하게 된 것도 예전의 나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이재현이 넓혀 준 세상은 나를 조금씩 변화하게 하는지도 몰랐다.
내 대답에 눈을 느릿하게 깜박이던 이재현은 묘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나, 널 조금 이해한 거 같아.”
건방진 확신이 담긴 말에 나올 대답은 한 가지였다.
“너 진짜 짜증 난다.”
7. 재연(1)
길드 모임이 있는 날이 밝았다. 이재현은 ‘혹시 모르니까.’라는 말을 하며 체형을 감출 만한 벙벙한 옷을 입히고, 가죽 장갑까지 끼웠다. 가면부터 발을 다 덮은 바지까지, 그야말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노출되는 부분 없이 까매서 흡사 그림자 같았다. 김세한을 의식한 게 뻔했지만 보게 되더라도 아주 멀리서 보게 될 텐데 이럴 필요까지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의 감은 곧잘 맞는 편이었기에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새벽 내내 내리던 비는 그쳤지만, 여전히 우중충한 하늘엔 햇살이 나지 않았다. 평소보다 무겁고 습한 공기 때문인지 기분도 차분히 가라앉는 듯했다.
“아, 꼭 가야 하나? 가서 뭐 하는 건데. 돈 주는 것도 아니면서 오라 가라야.”
배준형은 다시 비가 쏟아질 듯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온몸이 쑤신다는 듯 몸 이곳저곳을 주먹 쥔 손으로 두드렸다. 이 모든 상황이 귀찮다는 듯한 태도에 이재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 모임, 주최자가 장석현이야.”
“윽. 그 양반이구먼.”
이름 석 자에 배준형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인상을 찌푸렸다. 장석현. 그는 한국에 몇 안 되는 별 네 개, 즉 육군 참모 총장이었던 남자였다. 군사 중심으로 만들어진 아고라 생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자, 지금은 사실상 거의 신으로 떠받들어지는 자였다.
신체적 결함으로 지금은 직접 전투에 나서지는 않지만, 그도 각성자이다. 명성답게 각성하는 순간도 나름의 희생 서사를 가지고 있어 내 소설에서 가장 호불호가 덜 갈릴 만한 인물이었다. 강한 선(善)을 미워하기란 쉽지 않으니까.
“뭐, 가서 얻는 건 없을지 몰라도, 안 가면 불이익이 있을지도 모르지.”
장석현은 군인다운 남자였다. ‘강자 앞에 당당하고, 약자를 구한다.’라는 뜻이 확고했고, 말과 행동이 일치했기에 아고라의 모두가 그를 사랑했다. 오늘 여는 모임도 그의 인류애에서 비롯된 것이었기에, 거기 참가하지 않는다는 것은 장석현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밉보이는 일이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김세한도 그가 가진 권력을 마냥 무시할 수 없었는지 참가 의사를 내비쳤다. 사람들의 눈치를 봤다기보다는 장석현의 위치를 존중해 줬다는 쪽에 가까웠다. 자신의 참가 여부에 따라 회의가 가지는 영향력과 파급력이 달라질 거라는 걸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김세한이 참가한다면 사실상 나라의 공식적인 회의가 될 것이었다. 장석현의 체면을 살려 주면서도 담쌓았던 아고라의 헌터와 비각성자, 다시 말해 잠재적 고객들에게 각인된 회사의 이미지를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도 손해 볼 것 없는 결정이었다.
“이 가면이 너무 알려져서 안 가면 바로 들통날걸. 가면 길드 b.w 불참이라고.”
이재현이 가면을 쓰며 집을 나섰고, 팀원들도 이제는 몸의 일부가 된 듯 자연스럽게 가면을 챙겼다.
사람이 없는 한적한 동네를 빠져나와 아고라에 도착했을 땐, 여기저기 설치된 스피커에서는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원래라면 안내 방송이나 대피 방송용으로 쓰였겠지만, 오늘만큼은 아닌 모양인지 아고라의 입구부터 시끌벅적했다. 어쩐지 ‘인류의 미래’라는 거창한 의견을 나누기 위해 모였다기엔 다소 가볍고 산만한 분위기였다.
“아가씨! 고래고기 꼬치 하나 들지?”
“오늘 들어온 사과 싸게 드립니다!”
어디서 쏟아져 들어왔는지 모를 잡상인들도 노점을 차려놓고 호객 행위가 한창이었다.
‘현실이었으면 죄다 불법이었을 텐데.’
아니나 다를까, 기존 상인들은 지금 이 상황이 영 아니꼬운 모양인지 인상을 쓰고 이따금 언성을 높였다. 사람이 몰린다는 건 돈 냄새를 맡은 상인들도 몰려 기존에 있던 사람들의 자리가 위협받는다는 것. 힘들수록 이방인에게 거부감을 갖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순리였고, 이는 서울에 있던 길드에도 비슷한 불안감을 가져왔다.
“밑에 있던 애들 대형구렁이 여덟 장에 했다던데. 시장 물가 제대로 흐리네.”
여덟 장, 800만 원. 잡는 방법이 공식화되면서 A, B급도 구렁이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지만, 투입되는 인원과 위험도를 고려한다면 확실히 평가 절하된 가격이었다. 투입되는 인원을 최소 네 명이라 잡더라도 인당 떨어지는 돈은 200. 지금 길에서 파는 꼬치의 가격이 5만 원 정도였으니, 한 열흘 생활비 할 돈이려나.
“안 그래도 박 터지는데 살기 더럽게 힘들게 하네.”
주위에서 들려오는 대화는 묘하게 불만과 혐오를 담고 있었다. 사람들은 늘 자신의 밥그릇을 지키는 데에 예민했고, 오늘 일은 분명 장석현의 지지도에 영향을 줄 것이다. 아무리 인류를 사랑하는 그라도 신이 아닌 이상 모두에게 이득을 안겨 줄 수 없었다. 따라서 아무리 성자라도 모두에게 사랑받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 점이 ‘정치가’와 닮아 있었다. 사실상 크기만 작아졌을 뿐, 이곳은 여전히 서로 다른 이익을 좇는 사람들이 지독하게 엉킨 ‘사회’였다.
“b.w다.”
“b.w?”
“아. 왜, 그 병원 운영하는 힐러 소속된.”
“아아. 아고라 근처 거기? 근데 쟤네, 웬 가면을 쓰고 있어?”
귀가 너무 밝은 탓일까. 딱히 듣고 싶지 않지만 우리를 보며 떠드는 이야기도 들어야만 했다. 다른 팀원들도 이 수군거림을 듣고 있으려나. 터벅터벅, 내 앞을 걷는 화제의 주인공들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거나 반쯤 뜬 눈으로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모두 시큰둥한 반응이었지만, 오직 배준형만 방방 뛰듯 걸으며 감탄사를 뱉어 냈다.
“와, 우리 알아보네. 연예인 된 거 같다, 연예인.”
들뜬 배준형의 말에 김성민은 귀를 후비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봤자 다 안티팬들이야.”
“에이. 안티팬들도 다 잘나서 생기는 거지. 너 그 말 몰라? 악플보다 무플이 상처라는 말.”
“그래? 난 욕보단 나한테 관심 없는 게 나을 거 같은데. 그래서인지 이 시선들이 너무 불편하네.”
김성민은 마치 들으라는 듯 수군대는 사람들을 훑으며 말했다.
“괜히 싸울 거리 만들지 마. 그냥 얌전히 있다 돌아가는 게 오늘 목표라고 생각하고.”
이재현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무심하게 말했고, 그에 김성민은 혀를 한 번 차고는 다시 앞을 응시했다. 물론 분이 풀리지는 않았는지, 뒷짐 진 손의 가운뎃손가락이 펴져 있었다. 수군거리는 사람들에게 날리는 욕이겠지만, 의도와는 달리 놈 뒤에서 걷는 내가 욕을 먹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말이 회의지. 이건 그냥 축제 열린 거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