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준형은 언제 사 온 건지 가면 밑으로 고래고기 꼬치를 밀어 넣으며 말했다. 나름 이 상황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박도윤은 그런 배준형의 꼬치를 자연스레 뺏어 들었고, 가면 안으로 들어갔다 나온 꼬치는 반토막이 나 있었다.
“아! 이렇게 먹을 거면 너도 하나 사 먹든가!”
“돈 없어.”
“아니, 돈 벌어서 건물 샀냐? 뭐 맨날 돈이 없대.”
배준형은 짜증을 내면서도 마지막 한 입은 박도윤에게 양보했다. 이러나저러나 착한 놈이었다. 축제 같은 분위기가 마음에 든 것 같은 두 사람과 다르게 유태영은 속이 매스껍다는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렇게 복작복작하니까. 옛날 지옥철 악몽이 되살아나는데……. 인류애가 바닥날 거 같아.”
물론 나도 유태영처럼 사람 많은 곳은 딱 질색이었다. 처음엔 우리를 의식하듯 열렸던 앞길도, 사람이 몰린 곳에 진입하자 어쩔 수 없이 막혀 우리는 어느새 사람들에게 치이고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가장 앞서던 이재현은 유니폼 같은 옷을 입고, 종이 여러 장을 든 여자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재현과 몇 마디 나누다가 뒤에 있는 우리의 수를 세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쉽게 말하면 출석 체크의 개념이었다.
‘나 이런 쓸데없는 설정도 했던가.’
여자가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마치 놀이공원에 입장하는 것처럼 좁은 입구를 통과했다. 아무튼, 이걸로 전원 참석의 의무는 완수했다. 머릿수로 출석 체크를 하는 거면 이제 나는 쓸모를 다한 것이다.
“여기 이런 식으로 쓰긴 하네. 그냥 공터인 줄 알았는데.”
“원래 이런 목적으로 만든 광장일걸?”
김성민과 배준형이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우리가 들어온 이곳은 아고라의 진짜 ‘아고라’. 말 그대로 민회나 재판, 상업, 사교 등의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앞쪽에 높게 솟은 무대, 광장을 감싸듯 둥글게 세워진 철제 펜스, 그리고 어수선한 사람들까지 흡사 콘서트장을 연상케 했다.
출석을 확인한다는 건, 적어도 광장에는 상인이나 일반인을 제외한 길드 소속 헌터들만 있다는 것을 의미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사람이 많았다. 툭툭-부딪치는 몸들 때문인지 내 옆을 걷던 권지우가 적나라하게 욕을 내뱉었다.
“아, 시발.”
그러곤 갑작스레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왜?”
속삭이듯 묻자 권지우가 고개를 들며 답했다.
“지갑이 없어.”
“지갑이……?”
“소매치기인가. 아까 그놈, 일부러 부딪친 거 같더니……. 개새끼. 잡히면 뒤졌다. 이목구비를 다 없애 주겠어.”
주먹 쥔 손이 새하얗게 질린 채 바들바들 떨렸고, 가면에 뚫린 모든 구멍에선 살기가 새어 나왔다.
“얼마나 들었는데?”
뭣하면 내가 채워 줄 용의로 물었다. 여기서 나는 딱히 돈 욕심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돈보단 가족사진 때문이야. 그 지갑에…… 하나 남은 가족사진이 있어.”
그 한마디에 완전히 다른 문제가 되어 버렸다.
‘이런…….’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나를 배려한 걸까. 권지우가 한숨을 크게 내쉬며 어깨를 털어 냈다.
“괜찮아. 조심 안 한 내 잘못이지. 그따위 잔기술에 털리다니.”
한때 히로인으로 쓰려고 나름 비극적인 과거를 지니게 했던 게 문제였다. 그녀는 가족을 위해 싸웠지만, 막냇동생까지 다 잃고 나서야 뒤늦게 각성했다. 씁쓸한 가족사를 알고 있기 때문인지 마음이 무겁게 짓눌렸다.
“……내가 찾아볼게.”
“뭐? 됐어.”
“아냐. 어차피 난 이쯤에서 너희랑 헤어져야 해. 이성재한테도 빠져 있겠다고 미리 말해 뒀어.”
“아……. 김세한 때문에?”
권지우가 노골적으로 소리를 줄이며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멈춰 섰다.
“응, 아무튼 이 근처를 좀 살펴볼게. 원래 그런 놈들, 휙 돈만 빼고 지갑은 어디 쓰레기통에 던져 두잖아.”
걱정 말라는 내 뜻이 통한 건지 그녀는 앞서가는 팀원들과 멈춰 선 나를 번갈아 보다가-
“고마워.”
짧은 한마디를 하곤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잠시 한눈만 팔아도 일행을 찾을 수 없을 만큼의 인파가 몰려 있었다. 그건 여기가 꽤 중요한 메인 스테이지라는 것을 뜻했다. 주요 인물인 장석현도, 주인공 김세한도 등장하게 될.
‘일단 지나온 데부터 찾아볼까?’
걸어왔던 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가려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얼씨구?’
눈앞에서 소매치기하는 현장을 목격했다. 툭-어깨가 부딪치는 순간, 순식간에 주머니를 터는 경이로운 움직임을 보이는 놈이었다. 광장 안에 있는 것으로 보아 그도 헌터인 모양이었다. 몰린 인파 속, 소매치기범이 저놈 하나라고 단정할 수 없었지만, 일단은 놓치면 안 될 것 같았다.
지갑의 내용물을 확인하려고 인파를 벗어나리라 생각했던 놈은 훔친 지갑을 주머니에 챙겨 넣은 채 다시 사람들 사이로 섞여 들었다.
‘훔친 거 일일이 확인도 안 하는 거냐고!’
권지우가 당한 것이 조금 이해가 될 만큼 고수의 향기를 풍겼다. 놈은 사람들 사이를 미꾸라지처럼 휙휙 빠져나갔고, 마침내 사라졌다.
‘젠장…….’
어쩐지 정말 진범을 놓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놈의 커다란 겉옷 주머니엔 권지우의 지갑도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망했네.’
사람들이 몰려 시야 확보가 어려웠다. 나도, 그 소매치기범도 키가 큰 편이 아니었기에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포기하고 몸을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으아악-!
누군가의 굵은 비명이 광장에 울려 무시할 수 없는 파동을 만들어 냈다. 그에 잠시 시간이 멈춘 듯 주위가 조용해졌다가, 다시 웅성거리는 소리가 퍼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사람들이 뒤로 물러나듯 움직였고, 거기에 치인 나도 밖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뭐야? 무슨 일인데?’
갑작스러운 소란과 남자의 비명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문득 궁금해져 까치발을 들었을 때였다.
“저거, 죽은 거야?”
“피 흘리는 거로 봐선…… 곧 죽을 것 같은데. 저래도 되는 거냐고…….”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힐러 한 명쯤은 있지 않을까?”
불안한 느낌의 속삭임이 구경꾼들 사이로 파문처럼 번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언뜻 보이는 사람들의 눈은 모두 한곳에 향해 있었고,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기긴 한 모양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쪽 상황은 보이지 않아 까치발을 내린 순간이었다.
내 앞쪽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남자가 내 가면을 빤히 응시했다. 그 시선에 당황할 때쯤 그가 손을 낚아채듯 잡았다.
“당신, b.w 소속 힐러 맞지? 나 치료해 줬던.”
“…….”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늘 상처 부위에만 집중해 환자의 얼굴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었다.
가면, 얼굴을 가리기 위해 쓴 이 가면이 지금은 나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사실상 가면이 아니었다면 남자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을 테니까.
“말 못하는 거 보니까 맞네. 잘됐다! 사람 하나 살려 줘. 아직 안 죽었을 거야.”
잠시 얼어붙어 입을 떼지 못했을 뿐인데, 남자는 확신한 듯 가슴을 쓸어내리곤 내 손을 잡아끌기 시작했다. 뭘 어떻게 해 볼 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힐러! 힐러 지나가니까 비키세요!”
남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자 사람들이 두 줄로 나뉘어 길을 텄다. 이럴 때만큼은 한마음이 되는 건 자국민들의 특징이었다. 마침내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왔을 땐, 피비린내가 후욱 끼쳐 가장 먼저 상황의 심각성을 알렸다. 모두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만들어진 둥근 공간. 내가 쫓던 소매치기가 피를 흘리며 누워 있었다.
‘이게 대체…….’
상황을 자세하게 파악할 새도 없이 쓰러진 소매치기범 앞에 서 있는 또 다른 인물이 시선을 끌었다. 뚝-뚝- 서슬 퍼런 은빛 검을 타고 검붉은 피가 방울방울 떨어졌다. 그 검을 든 커다란 손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얇은 피부 위로 튀어나온 푸른 핏줄이 남자의 체형을 가늠케 했다. 익숙한 위압감, 차가운 분위기, 용 문양을 새긴 검. 얼굴을 올려다보기도 전에 나는 그를 알아보았다.
김세한이었다.
차마 놈의 얼굴까지 도달하지 못한 시선이 피 묻은 손에서 내려와 땅에 처박혔다. 꿀꺽-내 침 삼키는 소리가 유독 크게 귓가를 울렸다. 쿵. 쿵. 쿵. 심장이 목부터 발끝에 닿을 듯 뛰어 왔고, 무의식적으로 얼굴에 가면이 잘 씌워져 있는지를 확인했다.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는 더는 상관할 바 아니었다. 너무나 가까이에 만나면 안 될 김세한이 있었으니까.
‘도, 도망가야 해.’
몸을 돌리려던 순간, 누군가에게 등을 떠밀렸다. 갑작스러운 힘에 중심을 잃어 소매치기범 앞으로 쓰러지듯 넘어졌다. 엎드리듯 앞으로 고꾸라진 탓에 탁-무릎이 바닥에 부딪혔고, 본능적으로 바닥을 짚은 팔이 몸을 지탱했다. 인파 사이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듯 등장한 나란 존재에 순식간에 웅성거리던 주변이 조용해졌다. 주목을 받는 게 느껴졌지만 내 신경은 오직 내게 닿아 있을 김세한의 시선만을 의식하고 있었다. 뻣뻣이 굳은 몸은 움직일 생각을 못 하고 바닥에 넓게 퍼져 가는 피를 방관하고 있을 뿐이었다.
“죽어 가는 사람 이렇게 둘 거야? 무슨 조치라도 해 봐. 당신 힐러잖아!”
정적을 뚫고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다시 주변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거기엔 아까까지와는 달리 김세한이 아닌 나를 향한 비난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김세한이 발걸음을 옮기자 주변엔 침묵이 감돌았다. 이곳에 토할 것만 같은 긴장감을 만드는 건, 그의 작은 움직임이었다.
뚜벅-뚜벅- 놈의 워커가 바닥에 핏자국을 남겼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발걸음 소리에 내 심장도 소리를 높였고, 몸은 돌처럼 굳어 눈동자로만 김세한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다. 김세한의 발은 쓰러진 남자를 사이에 두고 내 맞은편에서 멈추어 섰다. 검은 가죽 워커가 무심히 남자의 피를 밟고 섰고, 그가 뿜어내는 냉기에 주변 공기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어느 순간 내가 숨을 쉬고 있지 않다는 걸 자각할 때쯤이었다. 김세한이 서서히 몸을 숙였고, 의도치 않게 그의 얼굴이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아…….’
조금 길어진 듯한 옅은 색의 머리칼, 그 너머로 언뜻 보이는 창백한 얼굴은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조금 야위었고, 표정이 없었다. 그리고 어딘가 나른하고 잔잔했다.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닌 것만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지만, 놀라울 만큼 익숙한 향기가 들이마신 공기에 섞여 들어 그가 김세한임을 증명했다.
고개를 들면 나를 마주 볼 수 있는 높이였지만, 김세한의 시선은 내내 남자의 손에 닿아 있었다. 그는 꾹 주먹 쥔 남자의 손을 펼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꺼내어 들었다. 눈물 모양 다이아몬드가 달린 금빛 목걸이. 나는 그 목걸이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놈에게 생일 선물로 받았던, 그리고 내가 그 방을 떠나기 전 시체의 목에 걸어 두었던 그 목걸이였다. 나지막한 한숨 소리가 들려왔고, 곧이어 기억 속의 목소리가 고막을 타고 머리에 새어 들어왔다.
“죽었을걸. 죽이려고 했거든. 그래도 뭐…… 살리든가. 살릴 수 있으면.”
작게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 머리에서 시작된 진동이 손끝과 발끝을 울려 왔다. 김세한의 시선은 여전히 들어 올려지지 않았지만, 내게 한 말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놈은 볼일이 끝났다는 듯 몸을 일으켰고, 태연히 걸어왔던 방향을 거슬러 다시 핏자국을 남겼다.
“보스.”
또 한 번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김세한을 의식하느라 차마 발견하지 못했던 테리가 보였다. 이마부터 눈을 지나 볼까지 길게 이어진 흉터를 가진 남자. 낯설게 느껴지는 얼굴이었지만 그는 분명 테리였다. 그 뒤로 익숙한 얼굴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론, 릴리……. KSH의 S급 헌터들이었다.
“왜 그렇게 봐. 죽일 만해서 죽였는데. 이거, 잃어버릴 뻔했다고.”
김세한의 손가락에 걸린 목걸이가 잠시 그네 타듯 달랑거렸고, 다이아몬드는 순간순간 다른 빛으로 화려하게 반짝였다. 말을 삼키듯 입술을 꾹 깨물고 김세한을 응시하던 테리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내가 아닌 남자를 응시하는 듯했다. 그제야 나도 눈앞에 쓰러진 남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래. 지금 나는 그냥 힐러일 뿐이야.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할지도 몰라.’
뒤에선 나를 재촉하는 사람들의 원성이 들려왔지만, 귀는 따가울지언정 머릿속은 한없이 고요했다. 천천히 끼고 있던 검은 가죽 장갑을 벗어 내곤 배부터 흉곽까지 깊게 베인 상처에 손을 뻗었다. 손끝을 통해 아주 미약하게 느껴지는 심장 박동이 남자의 숨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음을 알려 왔다. 상처에 빛이 닿은 순간, 김세한이 남자의 죽음을 예상한 이유를 알았다. 일반적인 상처가 아닌 스킬에 당한 상처였다. 정말로 이 남자를 죽이려 했던 모양이었다.
‘사람에게 스킬을 쓰는 걸 또 보게 되다니.’
몬스터를 잡을 때 쓰는 스킬을 사람에게 쓰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없다고 할 순 없지만, 힐러 스킬에 관한 문헌에서도 아주 뒷장 심화 과정에서 다룰 정도로 아주 드문 일인 것은 분명했다.
스킬에 당한 상처 치료는 꽤 과정이 어렵고 복잡했다. 힐러의 실력이 뛰어나야 하는 건 기본이고 스킬마다 치료법이 달라 일단 무엇에 당했는지 특정해야 했다. 나는 차분히 머리를 굴렸다. 김세한의 검엔 피가 묻어 있었고, 남자의 몸이 관통당하지는 않은 것과 이 남자 하나만 다친 걸로 보아 그리 광범위하지 않은 스킬이었다. 검에 두르기 쉽고, 반사적으로 나올 만큼의 스킬이라면 푸른 용의 이빨 정도의 기본 스킬이려나.
‘정답이네.’
상처에 푸른 빛이 섞여 들고, 천천히 벌어졌던 살이 실처럼 연결되어 서로를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곧 살이 완전히 채워졌고, 나는 천천히 손을 떼어 냈다. 피에 흥건히 젖은 남자의 옷 때문에 치료해도 치료한 것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 내가 할 일은 끝이었다. 손에 묻은 남자의 피가 벌써 말라붙어 검게 변해 있었고, 살갗이 건조해져 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그걸 무시한 채 다시 검은 가죽 장갑을 꼈다.
‘아. 권지우 지갑.’
몸을 일으키려다 뒤늦게 내가 이 남자에게 볼일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남자의 겉옷 주머니에 손을 뻗으려던 순간이었다. 툭-상처가 있던 남자의 배 위로 돈뭉치가 올려졌다. 영문 모를 돈뭉치는 얼마인지 가늠이 안 될 만큼 두꺼웠다.
‘이게 뭔…….’
고개를 들었을 땐, 나와 눈을 맞추려는 듯 쪼그려 앉은 테리가 있었다. 가면을 썼는데도 놀란 온몸이 순식간에 차게 식는 게 느껴졌다.
“b.w의 힐러님이시죠? 듣던 대로 실력이 뛰어나십니다.”
“…….”
놈은 흉터가 있는 쪽의 눈은 완전히 쓰지 못하는지, 한쪽 눈으로만 나를 담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상처가 생겨 달라진 얼굴을 하고 있는데도 들려온 목소리는 아직도 그 특유의 다정함을 담고 있어 속이 메스꺼웠다. 순간 반갑다고 느꼈던 나 스스로가 역겨웠기 때문이다.
“이거, 많진 않지만 사례금입니다. 저희가 처리해야 하는 문제였는데 힘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제야 놈이 올려놓은 돈뭉치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나는 나오려는 한숨을 참으며 그대로 남자의 주머니를 뒤졌다. 총 세 개의 지갑이 손에 잡혀 나왔다. 낯익은 지갑을 열자 권지우의 가족사진이 보였다. 지금과는 달리 해맑은 얼굴을 한 사진 속 권지우를 보자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안정감이 들었다. 긴장으로 뻣뻣이 굳었던 근육들이 이완되는 것만 같았다.
‘돌아가자.’
나는 지갑을 든 채 몸을 일으켰고, 테리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저기…… 이거.”
여전히 돈뭉치를 건네는 테리에게 고개를 저어 보이곤 곁눈질로 김세한 쪽을 돌아보았다. 아주 순간의 충동을 참지 못한 까닭이었다. 팔짱을 낀 채 나를 응시하는 김세한과 아주 잠시 눈이 마주쳤지만, 그의 눈은 곧바로 내리깔렸다.
결국 눈에 담은 김세한의 얼굴에 주마등처럼 놈과 지냈던 순간순간이 스쳐 지나갔다. 어딘가 날이 닳은 듯한 눈은 금방이라도 감길 듯 느리게 깜박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잠시 내리깔렸던 놈의 눈이 약간의 빛을 담아 냈고, 내 몸은 그에 반응해 움찔거렸다. 김세한이 내 쪽으로 발을 떼 다시금 모두가 얼어 버린 듯 정적만 가득하던 순간이었다.
“장석현이다!”
놈이 만들고 있던 긴장감을 깨뜨릴 만한 그 남자의 이름이 울려 퍼졌다. 탁-탁- 빛이 도는 반질반질한 소재의 바닥과 부딪히는 지팡이 소리가 그가 여기에 가까워지고 있단 것을 먼저 알려 왔다. 양옆으로 비켜선 사람들로 그가 등장할 방향은 알 수 있었다.
“사람이 몰린 것치고는 조용해서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무게감 있는 목소리. 마침내 장석현이 인파를 넘어 이곳, 소란의 중심에 등장했다. 볼에 길게 그어진 얼굴의 상처, 묘하게 힘없이 굽어진 듯한 한쪽 다리, 기상을 담은 선명하게 빛나는 눈동자. ‘살아 있는 역사’라 칭하는 게 과하지 않을 정도로 그의 외모 어디 하나 지나온 역사를 담고 있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역시 자네구먼.”
김세한에 장석현이라니. 최악이었다. 이 에피의 주요 인물들의 만남이 아직 제대로 된 회의가 시작된 것도 아닌데 이루어졌다.
장석현은 아직 의식이 없어 바닥에 널브러진 남자를 바라보며 앞쪽 눈썹을 두어 번 긁어 냈다. 마치 굳이 묻거나 듣지 않아도 상황을 파악한 듯한 반응이었다.
“시작도 전에 이 모양이라니. 그것도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이러면 당신을 대놓고 지지하기 어려워지잖나. 여론이라는 게 있는데.”
내용과는 달리 여론을 생각하지 않는 말이었다. 이미 이곳에 있는 모두가 듣고 있었으니까. 잠시 멈춰 서 장석현을 바라보던 김세한이 성큼성큼 다시 내게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는 긴 다리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고, 나는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보스!”
또다시 테리의 다급한 외침이 공간을 울렸다. 뒤로 벽처럼 서 있는 사람들 탓에 더 물러날 곳이 없게 된 순간, 몸은 한껏 움츠러들었고, 심장은 놈의 발걸음에 맞춰 위아래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뜻을 알 수 없는 반쯤 뜨인 눈은 조금 멍한 느낌으로 내내 내게 향해 있었다. 마침내 김세한이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워졌을 때, 그와 내 사이로 지팡이가 끼어들었다. 장석현의 것이었다.
“보아하니 이 힐러가 저 남자를 치료한 거 같은데. 그래서 해코지하려는 건가?”
“……물어볼 게 있을 뿐이야.”
“아쉽지만 대답을 듣지 못할걸세. 어릴 때 당한 사고로 말을 못한다고 들었는데.”
장석현은 내게 확인하듯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추었다. ‘어릴 때 당한 사고’라니, 사람 입을 타는 건 믿을 게 못 된다더니……. 내가 그간 타인의 앞에서는 입도 벙끗 안 한 탓에 나와 관련된 소문에 쓸데없는 서사가 붙은 모양이었다. 그게 뭐든 딱히 상관없었기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동시에 김세한의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그런 김세한을 보며 혀를 한 번 찬 장석현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나는 자네가 나름대로 사회생활은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그게 대의가 아닌 이득을 위해서일지라도……. 냉정한 사회인이 지금은 그냥 앞뒤 생각 안 하는 어린애가 되었구먼.”
도발하는 듯한 말이었다. 내게 닿아 있던 김세한의 시선이 천천히 장석현에게로 향했다. 피곤이 느껴지는 눈은 조금 붉었고, 흐렸으며, 뻑뻑해 보였다. 별다른 반응이 없는 걸로 보아 그다지 장석현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여론을 그만 흐리게. 내 쪽이 곤란해지는 것도 고려해 달란 말이야. 아니지. 꼭 내가 아니더라도, 당장 끌고 있는 회사에도 타격이 갈 것 아닌가. 자네는 가슴이 둔한 대신 머리가 비상한 것 아니었나?”
“당신…… 지금 내 지갑 걱정해 주는 건가?”
김세한이 별 실없는 얘기를 다 듣는다는 듯 웃었다. 오가는 대화에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자 날 지켜 주는 듯했던 장석현의 지팡이도 제자리로 돌아갔다. 김세한은 내게 관심이 떨어진 듯 보였고, 사람들의 관심도 내가 아닌 두 사람에게 향해 있었다.
‘도망가자.’
권지우의 지갑을 꾹-손에 쥔 채 사람들을 비집고 거슬러 올라갈 때쯤이었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어서일까. 꽤 멀어졌음에도 김세한의 목소리가 선명히 들려왔다.
“다 상관없어졌어. 돈이 어떻든, 회사가 어떻든, 명예가 어떻든. 다 내가 찾고 있는 거에 비하면 쓸모없거든.”
찾고 있다는 게 뭘까. 그게 나는 아닐 것이다. 놈은 분명 내가 죽은 줄 알 테니까. 그럼 대체 뭘까. 놈을 저 지경까지 몰고 간 그 무언가는.
‘하긴, 이제 상관할 바는 아니지. 아닌데…….’
상관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딘가 불안감이 남아 심장이 벌렁거렸다. 의지와는 달리 뇌리에 박힌 김세한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고, 아직 공기 속에 놈의 향기가 섞여 있는 듯했다. 나는 정신없이 사람들을 헤집고 나와 곧장 광장을 빠져나왔다. 들어갈 땐 일일이 길드 확인을 해 번거로웠지만 나가는 건 자유로웠다. 권지우의 지갑도 찾았으니 이제 내가 그곳에 있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하아-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괴로웠다.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뛰어 오고 있었다. 놈이 가까이 왔을 땐 들켜 버리는 줄만 알았다. 설마 그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나를 구할 줄은…….
‘요즘 S급들이랑 같이 목격된다고 하더니. 잠을 못 잘 정도로 일하는 건가.’
안 그래도 얼굴이 창백한데 야위기까지 하니 정말 당장에라도 영원한 잠에 빠질 것 같은 위태로운 느낌이 들었다. 날 긴장하게 했던 광기 어린 눈도 지금은 피곤함만 느껴질 뿐이었고, 내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테리는 역시 김세한이 그렇게 만든 걸까. 가령 나와 관련된 일로 생긴…….’
그때였다. 옷 끝자락을 누군가가 당기는 듯한 느낌에, 멍하니 생각에 잠겨 흐릿했던 눈앞이 선명해졌다. 짧게 반복되는 조심스러운 느낌의 당김. 슬쩍 옆으로 고개를 돌렸을 땐 생각보다 낮은 곳에 그 주인공이 있었다. 북이였다.
보육원은 아고라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있었다.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로 멀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북이가 이곳에 혼자 있는 것은 의문이었다. 보육원에서 혼자 나올 이유가 뭐가 있지.
나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기울이는 북이를 바라보다, 내가 지금 가면을 쓰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자세를 낮춘 채 가면을 살짝만 들어 눈을 맞추었고, 그제야 북이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와락 안겨 오는 북이의 등을 쓸어내렸다. 익숙한 가면인데 나라는 확신이 없었던 모양이다.
‘윽. 귀여워.’
아프기만 했던 안쪽이 북이라는 안정제에 편안해지고 있었다. 한참을 행복감에 젖고 나서야 북이가 왜 여기 있는지 다시 궁금해졌다. 평소대로 입 모양을 보여 주며 대화하고 싶었지만, 주변에서 보는 눈들이 조금 신경 쓰여 가면을 벗으려다 말았다.
[친구. 선생님. 어디.]
버벅거리며 교습지에 있던 단어를 연결해 움직였고, 북이는 잠시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배시시 웃어 보였다. 북이 입장에선 내가 갑자기 말을 하게 된 셈이니 신기한 모양이었다. 사실 왜 여기 있는지를 묻고 싶었지만 아직 그럴 만한 실력이 되지 않았다. 북이도 그런 내 실력을 고려한 건지 간단한 답을 해 왔다. 고개를 젓고 어깨를 으쓱이는 거로 보아 자기도 모른다는 뜻인 듯 보였다.
‘정리하면 무슨 이유로 여기 왔지만 길을 잃어버렸다는 건가. 진짜 큰일 날 뻔했네. 나 때문은 아니겠지?’
해맑은 미소를 짓는 북이를 보고 있자니 애들을 왜 잃어버리는지도 조금 알 것 같았다. 북이는 자신이 어떤 위험에 처하였는지 모르고 그저 반가움을 표현할 뿐이었고, 나는 북이를 애타게 찾고 있을 원장님 생각에 눈이 깜깜해졌다.
[가자. 집. 나랑.]
어순이 맞는지는 몰라도 동작을 천천히 해 보이자 북이는 이번에도 알아들었다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연스레 내 손을 잡아 왔다. 몸을 일으킨 순간 북이의 시선이 어딘가에 꽂혀 있음을 알았다. 탕후루. 과일값이 금값인 지금 저것만큼 비싼 간식은 없었다. 따라서 보육원에선 먹어 보기 힘들 게 뻔했다.
‘아, 돈을 이래서 버는 거구나. 다 사 주고 싶다.’
북이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린아이의 눈에 반짝이는 저게 얼마나 맛있어 보일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당당히 상인 앞에 돈을 내밀자 난생처음 어른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상인은 다짜고짜 들이밀어진 돈에 미간을 찌푸리다 눈을 크게 뜨며 반가움을 표했다.
“아! b.w 힐러? 아까부터 당신 얘기 많이들 하던데!”
젠장, 내가 예상외로 꽤 유명한 모양이었다.
“아, 말 못한다고 했지?”
뒤늦게 내가 말없이 돈을 내밀었다는 자각을 했다. 가면만 쓰면 습관적으로 입이 다물어지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말을 못한다는 컨셉을 의무적으로 유지해야 하나, 하는 고민이 들었다. 상인은 내가 내민 다섯 장의 지폐 중 네 장만 받아 들며 말했다.
“유명인 할인이라고 생각해. 당신 좋은 일 하는 사람이잖아.”
그 순간 유명인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상인은 북이의 손에 탕후루를 쥐여 주며 물었다.
“아들?”
‘……?!’
순식간에 애 딸린 사람이 되어 버렸다. 편견 없는 상인의 물음에 잠시 북이를 내려다보았다. 첫 만남 이후 북이는 여전히 나를 ‘엄마’라고 부르고 있었다. 북이의 엄마가 몇 명이나 더 있을지는 몰랐지만, 자세한 상황을 설명할 방도도 없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아들 인물이 훤하네. 나중에 크면 큰일 하겠어.”
그냥 하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어쩐지 어깨가 으쓱했다. 이런 쓸데없는 대화가 불편하기만 했는데 마주 보고 웃는 아저씨와 북이를 보고 있으니 가슴 언저리가 간질간질했다. 나는 몰라도 북이는 계속 좋은 사람들과 좋은 경험을 쌓았으면 좋겠다. 사랑스러운 북이가 세상을 계속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행복 가득한 얼굴이 또 나를 향했고, 나는 가면 안에서 미소로 화답했다.
북이의 보폭을 따라 걷다 보니 얼마 가지 못하고 벤치에 앉게 되었다. 북이는 하나의 과일이 사라져 갈 때마다 내게 권해 왔다. 말을 하지 않아도 ‘진짜 안 먹어? 맛있는데?’라고 묻는 듯해서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안쪽에선 회의라는 이름의 연설이 시작된 모양인지 장석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을 때쯤이면 김세한의 목소리도 들려올 테였다. 마음 한구석으로는 보고 싶은 바람이 있긴 했다. 원작 작가로서 꽤 기대하고 있었던 ‘장면’이기도 했고, 이야기 중반부의 가장 의미 있는 ‘사건’이기도 했으니까.
공식적인 한국 랭킹 1위 헌터로서 책임감을 느끼게 되는 김세한이라.
다시 상상에 잠겼던 나를 이번에도 북이가 꺼내 주었다. 어느새 빈 꼬치를 든 북이는 내 옷깃을 당겨 다 먹었으니 가자는 듯한 움직임을 취했고, 나도 그에 따라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김세한의 연설을 작게나마 듣는 것은 무리인 모양이었다. 하긴, 원장님이 걱정하실 걸 생각하면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다.
사람들 모두가 우리와는 반대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우리는 회의가 시작돼 사람들이 더 몰려드는 광장 쪽에서 멀어지고 있었으니까.
꽤 많이 걸어 눈앞에 보이는 사람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북이는 내가 아는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가자는 듯 내 옷을 당겨 왔다. 지름길이라도 아는 건지 어딘가 자신에 찬 얼굴을 한 북이를 군말 없이 따르던 때였다. 골목을 빠져나가자 역시 낯선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벤치, 그 뒤로 우거진 나무, 남아 있는 분수의 흔적으로 보아 공원으로 쓰던 곳인 듯했다.
‘아, 설마…… 집 가는 길이 아니라 여기 오고 싶다는 거였나.’
지끈 아파져 오는 이마를 짚었지만, 잡혀 오는 건 가면일 뿐이었다. 내게 어떠냐고 묻는 듯 뿌듯한 얼굴을 한 북이에게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나한테 좋은 곳을 보여 주고 싶어 했던 마음이 예쁜 건 사실이었으니까. 결국 골머리 썩는 건 어른의 몫이었다.
잠시 내 손을 놓은 북이는 수거하지 않아 넘쳐흐를 듯한 쓰레기통에 꼬치를 꽂아 두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북이’라는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적잖이 신난 모양이었다.
‘역시 애는 애구나.’
사람 손길이 잘 닿지 않는 듯 부식된 벤치와 부서진 상아색 아기 천사 동상, 무엇보다 군데군데 이가 빠진 바닥의 보도블록들이 어딘가 허술함을 뿜어내고 있었지만, 그와 다르게 나무 사이로 우뚝 솟은 시계탑은 제대로 작동하는 듯했다. 오후 네 시. 북이를 만나지 한 시간가량 되어 가고 있었다.
‘원장님…… 죄송해요. 빨리 갈게요.’
초조함에 고개를 돌린 순간 북이가 누군가와 부딪혀 넘어졌다. 황급히 달려가 북이의 상태를 살폈다. 양 무릎이 까져 피가 나고 있었다. 이런 건 내가 치료하면 그만이었지만, 이미 북이가 겪은 고통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아, 어떤 새끼가 앞을 안 보고 다녀!’
물론 뛰어다닌 북이의 탓도 있겠지만, 상대는 어른 아닌가. 적어도 이 정도는 피해…….
“……씨발.”
나지막이 들려오는 욕설. 귀를 파고든 목소리가 심장을 울렸다. 조심스레 올려다본 곳에는 김세한이 서 있었다. 아까와는 달리 눈엔 분노가 가득했고, 숨김없는 살기가 느껴졌다.
쿵-심장이 떨어져 내렸다.
‘왜 김세한이 여기…….’
지금쯤이면 연설하고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적당히 ‘화합’이라든가, ‘통합’이라든가. 그런 단어들이 적혀 있는 연설문을 읽고 있어야 할 놈이 왜……?
굳어 버린 나와 달리 북이는 꼼지락거리며 바닥에서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작은 손에 흘러넘치게 잡혀 늘어져 빛나는 것. 목걸이였다. 순간 목걸이 하나에 피범벅이 되었던 남자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고, 머릿속엔 위험 경보가 떴다. 김세한에겐 약자나 어린아이를 향한 배려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야.”
북이는 김세한이 떨어뜨린 목걸이를 주워 주려는 모양이었지만, 놈의 눈은 적의를 담고 있었다. 짜증이 담긴 듯한 외마디에 나는 목걸이를 뺏어 들고, 북이를 뒤로 밀어내며 손바닥을 보였다. 거기 그대로 서 있으라는 표시였다. 그 모든 게 김세한에겐 수상한 행동이었겠지만, 순간적으로 북이를 지켜야겠다는 판단에서 나온 것이었다.
김세한의 눈이 자연스레 내게로 향했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든 목걸이로 향했다. 나는 조심스레 다가가 놈 앞에 목걸이를 내밀며 고개를 저었다. 줄 테니까 진정하라는 신호였다. 알아챌지는 모르겠지만. 검은 가죽 장갑 위로 얹힌 목걸이가 아까보다 반짝이는 것만 같았다.
‘무슨 야생 동물 다루는 것도 아니고.’
아까의 잔잔함은 어디 가고 잠시 내가 알던 ‘그 김세한’을 마주한 거 같았다. 앞뒤 없이 자기 분노를 표출하던 어린애 같은 모습 말이다. 그리고 그 분노를 불러일으킨 건 이 목걸이였다.
‘왜 그런 눈을 하는 거야. 이게 뭐라고.’
놈은 그제야 내 의도를 파악한 건지 기세를 조금 누그러트렸다. 검을 뽑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김세한의 손이 아주 천천히 목걸이 쪽으로 뻗어지고 있었다. 아까도 그렇고 왜 이런 걸 들고 다니는 걸까. 부딪혀서 떨어질 정도면 방금도 꺼내 보고 있었다는 건가. 여러 의문이 스치던 순간이었다.
스르륵-쾅!
굉음과 함께 바닥이 흔들리고 있었다. 불길한 물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이 소리의 원인을 알아차렸다.
‘말도 안 돼. 하필 여기라고?’
눈치챈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닥이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은빛 고래의 등장이었다. 놈이 등장한 곳에는 자기 덩치보다 큰 구덩이가 생기고 물이 들어찬다. 지금 여기에 몬스터가 등장한다고? 원작에서는 아예 다루지 않은 일이었다. 아니, 애당초 이런 곳이 있는지 나도 처음 알았다.
마치 선을 그어 둔 것처럼, 김세한에게 닿기까지 단 몇 걸음을 앞두고 나만 구덩이 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 탓에 나와 김세한의 거리가 멀어졌고, 그의 손은 목걸이에 닿지 못했다. 팔은 여전히 뻗고 있었지만 방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떨어지기 싫다는 바람이 담겨 놈의 옷자락을 잡을 듯 휘적였고, 하마터면 살려 달라는 말을 내뱉을 뻔했다.
‘나 참. 김세한인데……. 또…… 또.’
이제 난 김세한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놈의 연인이었던 페르는 죽었고, 여기엔 또 한 번 주인공을 마주한 운 나쁜 작가이자, 놈에겐 오늘 처음 마주친 말 못하는 힐러만 있을 뿐이었다.
날 내려다보는 김세한의 묘한 얼굴을 마지막으로 목걸이를 손에 쥔 채 꾹 눈을 감았다. 아주 짧은 순간인데도 생각이 많았던 탓일까. 추락하는 순간이 아주 길게 느껴졌다. 첨벙-등 부근이 수면과 부딪히며 느껴지는 충격도 잠시, 몸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리고 익숙한 공포심이 온몸을 잠식했다.
첨벙첨벙, 팔다리가 의지와는 상관없이 물을 가르고 움켜쥐었다. 콧속으로 가득 들어찬 물이 생소한 괴로움을 가져왔고, 자연스레 벌어진 입에선 공기 방울이 빠져나왔다. 내 마지막 숨이 위쪽으로 향했다. 나는 가지 못할 수면으로 말이다. 컥컥-폐까지 물이 들어차는 감각에 온몸은 고통으로 요동쳤다.
‘살려 줘, 제발.’
언제나 죽음 앞에서 발악해 보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고, 마지막엔 그저 누군가의 도움을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내 죽음과 가까운 곳엔 늘 김세한이 있었다. 벼랑 끝에서 공황에 빠진 머리와 발버둥 치는 몸이 갈망하는 건 명확했다. 네가 다시 한번 날 살려 줬으면 좋겠다. 염치없는 바람에 스스로도 넌더리가 났다.
‘왜 항상 네 앞에서 이렇게 무력한 거야. 왜 또 이렇게 마지막까지…… 닿을 수 없는 곳에 손을 뻗게 해.’
죽음 앞에서 나는 또 위로 손을 뻗고 있었다. 네가 잡아 주길 바라는 나약하고, 동시에 이기적인 마음이 멋대로 튀어나온 탓이었다. 요동치던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게 되었을 때, 눈앞이 몽롱해짐을 느꼈다. 아까까지만 해도 괴롭던 속이 지금은 평온했다. 마치 물과 하나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그제서야 이리저리 날뛰던 생각과 본능이 차분해짐을 느꼈다.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 떨어지는 날 바라보던 김세한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아직 내 손에 있는 목걸이도.
‘김세한…….’
어쩌면 그 녀석한테 이 목걸이는 페르가 남긴 유품 정도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놈이 추억하는 건 ‘나’일 테고, 힘들고 지치게 한 것도 ‘나’일 것이다. 그만 추억해도 될 텐데. 잊어야 아픔도 사라질 텐데. 안쓰럽게 왜 이런 걸…….
스륵—
나는 손에 쥐고 있던 목걸이를 놓아주었다. 이대로 같이 휩쓸려 너의 기억에서 사라지길 바랐다. 그게 주인공의 인생에 잠시 끼어들었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마무리였다.
쾅-쾅—
들려오는 굉음에 마지막 힘으로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때였다. 투명했던 물이 약간의 붉은빛을 띠고 있었고, 뿌연 시야에 나보다 높이 뜬 목걸이가 들어왔다.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커다란 손이 목걸이를 낚아채듯 쥐었다. 목걸이가 눈앞에서 사라지고 보인 건 김세한이었다.
물 안에서도 평온해 보이는 놈은 옅은 머리 색과 눈동자 때문일까, 흡사 인어로 착각할 만큼이나 신비로워 보였다. 특히 나를 내려다보는 무표정한 얼굴이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흐릿한 시야에 비친 갈색 눈이 나를 삼킬 것처럼 느껴졌고, 아주 긴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눈이 점차 감길 때쯤, 팔목이 당겨지고 몸이 떠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순간 앞이 깜깜해졌다. 이게 내 의식의 한계였던 모양이다.
콜록-콜록—
허파에 공기가 밀려들어 오는 게 느껴졌다. 의식이 돌아왔을 땐, 김세한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야 가득 들어찬 얼굴에 나는 잠시 이게 꿈인지 한참을 생각했다. 툭, 툭. 놈의 머리에서 떨어진 물이 가면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현실 감각이 돌아왔다. 몸을 일으키자 놈은 순순히 밀려났다.
손을 들어 가면이 제대로 얼굴에 붙어 있는지 확인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그제야 공원 중앙에 둥글게 생겨 버린 호수 위로 둥둥 뜬 은빛 고래의 사체가 보였다.
‘역시 김세한이 처리한 건가.’
바로 내 옆에 있던 북이는 눈물을 떨구며 내게 안겼다. 갑자기 벌어진 일에 북이도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끊기듯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떨리는 등을 조심스레 감싸 안았다. 손끝에 느껴지는 온기에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김세한은 그런 나와 북이를 한참 바라보다 옆에 쓰러지듯 앉았다.
“당신 벙어리라고 했지? 기침하는 거 보니 성대가 망가진 건 아닌 거 같네. 애랑 달리 귀도 들리는 거 같고.”
“……콜록.”
“그럼 실어증인 건가. 사고로 뇌 쪽이 다쳤나 보지?”
“……콜록, 콜록.”
김세한 특유의 날카로운 분석이었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끝까지 파고들어 앞뒤가 맞아야 지나가는 피곤한 성격. 말을 못하는 이들은 보통 청력에 이상이 있기 마련인데, 내게 들을 수 있으면서 왜 말을 못하느냐고 묻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그냥 그런가 보다 할 뿐이었다. 타인의 깊은 사연 따위 궁금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김세한의 질문은 내게 어느 정도 호기심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아, 하긴…… 말을 못하니 대답하는 것도 무리겠네. 내가 알기로 실어증은 말을 더듬거나, 말을 못 알아듣거나, 습득이 느리거나…… 셋 중 하나라던데. 아, 지금도 이해 못 하고 있을 수도 있겠구나.”
혼자서 중얼거리던 그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떨궜다. 나는 차분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처음 본 사람. 지금 내게 김세한은 그저 오늘 처음 본 낯선 남자여야 했다. 내게 안긴 북이의 등을 쓸어내리며 살려 줘서 고맙다는 의미로 고개를 숙였다.
“방금은 감사 인사인가? 그럴 필요 없어. 이거 가지러 간 거였으니까.”
김세한의 손에는 젖어서 더 빛나는 듯 보이는 목걸이가 있었다.
“그러니까…… 당신은 그냥 내려간 김에 끌고 나온 거야. 혼자 남을 아들이 불쌍해서.”
김세한은 북이에게 턱짓하며 말을 이었다.
‘……?’
놈의 눈에도 북이가 내 아들 정도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하긴, 이 시간에 함께 공원에 있는 걸 봤으니 그렇게 생각할 만했다.
“엄마는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나을걸. 잘은 몰라도…… 아마.”
그 말에 김세한이 엄마 없이 자랐다는 게 떠올랐다. 엄마가 없는 설정은 왜 했더라. 성격이 저렇게 된 것에 설득력을 부여하려고 그랬나. 완벽한 주인공에게 주는 페널티였던가. 지금은 그 이유도 잘 생각나지 않았다.
힐끔-내 품에서 고개를 돌린 북이가 김세한과 눈을 맞추는 듯 보였다. 김세한은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뭐가 됐든. 엄마도 벙어리, 아들도 벙어리라니 기구한 모자네.”
들려오는 태연한 비하 발언에 북이의 눈을 가렸다. ‘벙어리’란 말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 입에서 나오는 거 알아 봤자 좋을 거 없어.’
새삼 놈이 다정하거나 남의 기분을 생각해 주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했다. 정말로 날 ‘어쩌다’ 구한 모양이었다. 다행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서운…… 서운?
‘무슨 생각을……. 미친 게 분명해.’
쾅쾅-정신 차리라는 의미로 내 허벅지를 내려쳤다. 평소라면 얼굴을 때렸을 만한 생각이었지만 가면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내게 안겨 있던 북이가 조금 놀란 듯 보였다.
“왜?”
귓전에 들려온 소리에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리자 코앞에서 김세한의 얼굴이 보였다. 가늘어지는 눈이 보일 리 없는 가면 속 나를 꿰뚫어 볼까 두려웠다. 슬그머니 뒤로 고개를 빼자 놈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벙어리라 그래서 기분 나빠? 화내는 거 같길래.”
화냈다. 멋대로 너에게 무언가를 바랐던 자신에게.
“미안해. 내가 원래 말을 예쁘게 못 하는 편이라.”
김세한답지 않은 말이 들려왔다. 저놈에게서 사과를 받다니, 그저 놀라웠다. 타인의 감정 같은 건 잘 신경 쓰지 않는 안하무인 김세한이 조금 달라진 걸까. 나는 놈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이해해 준다는 거지?”
나른한 목소리였다. 놈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가면 좀 벗지? 다 젖었는데도 계속 쓰고 있네.”
툭 던져진 한마디에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가면을 쓰고 있을 이유, 보통이라면 없었다. 흐르는 긴장감에 가면 위로 손을 올렸을 때,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가면 길드.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라. 뭐, 특이한 컨셉이긴 하네. 길드 가입 조건에 얼굴 공개 금지, 이런 거라도 있는 건가?”
우려와는 달리 깊게 파고들지는 않았다. 김세한과 마주 보는 지금이 너무 현실성 없어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놈이 이렇게 혼자 떠들어 대는 게 너무 어울리지 않았다.
“어쨌든 내가 살려 준 거니까 좀만 더 어울려 줘.”
“…….”
“혼자 있으면 또 생각에 잡아먹힐 거 같거든. 난 지금 딴생각을 좀 하고 싶어. 뭐라도 좋으니까.”
놈은 목걸이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엄지로 동그란 다이아몬드를 쓸어내리다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이 소속된 길드에 예전부터 관심이 있었어. 그런 데도 힐러가 있다는 건 오늘 처음 알았네. ”
관심이라니. 불안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너무 성장한 게 문제였나? 그때 유태영이 컨택 받았던 게 문제였나? 여러 의문이 가지를 치기 시작했을 때, 놈이 정답을 말해 왔다.
“이 목걸이 주인이 당신 길드가 궁금해서 물었었나 봐. 물론 그땐 b.w가 성장하기 전이었지만. 신경 안 쓰려고 하는데도 눈이 가더라고.”
“…….”
“나한테서 그때 벗어났다면……. 아마 당신네 길드에 있었을지도 모르겠네. 그 사람도 힐러였거든.”
적나라한 페르의 이야기였다. 왜 그 이야기를 내게 하는 걸까. 쿵쿵쿵-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뛰어 와 놈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 테리, b.w라는 길드명 말이야. 들어 본 적 있어?
언젠가 테리에게 물었던 그 질문이 설마 이렇게 연결이 되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김세한은 생각보다 아주 근처까지 도달해 있었다.
‘괜찮아. 김세한에게 나는 죽은 사람이야.’
생각과는 달리 손끝이 떨려 오고 있었다. 그걸 억누르려 주먹을 쥐었고 북이는 그런 내 몸을 인식한 듯 고개를 젖혀 나를 올려다보았다.
“하마터면 애 엄마 일자리 뺏을 뻔했네. 그 사람도 실력은 좋았…….”
“…….”
“떨고 있네. 많이 춥구나?”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내게 닿아 있을 게 뻔한 놈의 시선이 두려웠다.
“다 젖었으니……. 엄마 때문에 애도 다 젖었네.”
북이에게 뻗어진 김세한의 팔이 스치듯 내게 닿았을 때, 나도 모르게 놈의 손을 쳐 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확인한 그의 얼굴엔 아주 약간의 당황스러움이 비쳤다. 그도 잠시, 차분히 가라앉은 눈을 한 녀석이 조금 가까이 다가왔다.
“이 부딪치는 소리 들려.”
“…….”
“추운 게 아니라면, 내가 두려운 건가?”
숨소리 섞인 목소리에 머리부터 한기가 퍼져 나가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예리한 놈과 있다간 얼마 안 가 정체를 들킬 것 같았다. 밀려드는 불안감에 꾹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쯧—
김세한이 짧게 혀를 차고 고개를 돌렸다.
“하긴, 아까 그런 장면을 목격했으니 두려울 만도 한가.”
“…….”
“아까 애한테서 목걸이 뺏어 든 거. 그거 때문도 있지? 내가 당신 아들 해칠까 봐서.”
김세한은 몸을 뒤로 젖히며 말을 이었다.
“가. 무서워하는지도 모르고 잡고 있었네, 내가.”
“…….”
“아깐 좋은 판단이었어. 목걸이…… 아니, 그 사람과 관련된 일이면 필요 이상으로 난폭해져서. 나도 날 잘 모르겠거든.”
날 칭찬하는 말이었지만 고개를 젖혀 잘 보이지 않는 얼굴이 조금 씁쓸하게 느껴졌다. 그런 표정을 읽은 걸까. 내 품을 벗어난 북이가 놈의 어깨를 두드렸다. 마치 위로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
김세한이 가는 눈을 하고 북이를 돌아보았다. 그 눈빛에 담긴 감정을 조금 알 것 같았다. 나도 북이의 저런 행동에 지친 마음을 위로받곤 하니까.
“이름.”
어깨에 올려진 북이의 손을 감싼 김세한의 입에서 나지막이 나온 한마디였다. 그리고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것도 인연이라 통성명이라도 해 두고 싶은데.”
“…….”
“젠장. 말해 줄 인간이 하나도 없네. 왜 이렇게 다들 이름이 비싸.”
웃음 섞인 목소리가 울렸고, 나는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건 곧 작별을 의미했다. 놈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굴렸다.
“알고 있을지 몰라도 내 이름, 김세한이야.”
그는 몸을 일으키려는 날 올려다보며 의미 없는 자기소개를 했다.
‘알고 있어. 아주 잘. 넌 내 주인공이니까.’
몸을 일으킨 내 옆으로 북이가 달려와 손을 잡았다. 갈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옆에 있던 북이가 떨어지고 나니 김세한만 덩그러니 이 넓은 공원에 남겨졌다. 내가 있던 그의 옆에는 짙고 둥근 물 자국이 흔적처럼 남아 있었다. 그저 일어났을 뿐인데, 방금까지 나란히 앉아 있던 순간이 믿기지 않는 꿈처럼 느껴졌다. 고개를 젖혀 나를 올려다보는 김세한의 얼굴도 여전히 현실감이 없었다.
“반가웠어……. 잘 살아.”
안녕을 의미하는 인사에, 나는 그에게 또 한 번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예상치 못한 만남, 대화, 그리고 작별이었다. 내게 약간 미소를 지어 보이는 듯했던 놈의 얼굴이 또 한 번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듯 보였다. 북이를 잡은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갔고,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김세한과의 이별이 아쉬운 듯 돌아보는 북이가 신경 쓰였지만 난 꿋꿋이 앞만 보며 걸었다.
놈의 머릿속에 아직 페르가 남아 있다는 걸 확인해 버렸다. 목걸이의 의미도, 놈이 분노한 까닭도, 전부 나와 관련되어 있었다. 안쓰럽다는 감정이 들 때마다 스스로가 가증스러웠다. 놈을 떠나오면서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결과이니까. 심지어 그걸 복수라고 생각했으니까.
우리의 끝은 예쁘지 않았다. 서로를 상처 입혔고, 갉아먹었으며, 끝내는 서로를 죽였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의 감정싸움은 어쩌면 그다지 상관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당시 복잡했던 우리 사이의 갈등, 너를 향한 배신감, 분노. 그 모든 걸 떠나서 애초에 나는 너의 옆에서 떠나야 했던 인물이었다. 단지 그 시간이 조금 빠르고 늦고의 차이가 있었을 뿐, 이야기가 끝날 때쯤 헤어져야 한다는 건 매한가지였다.
‘김세한…….’
너무 아파하지 않길 바랐다. 우리의 끝은 꼭 그날이 아니더라도 올 것이었으니. 페르는 죽었다. 죽은 사람을 향한 그리움이라면 분명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이 이야기가 끝날 때쯤엔 페르와의 기억이 흐려질 테고, 그의 마음에도 안정이 생길 것이다.
‘이럴까 봐 만나고 싶지 않았어.’
오히려 문제가 있다면 그가 아니라 김세한에게 조금 마음을 줘 버린 나에게 있었다. 그 증거로 그에게서 멀어지는 걸음마다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수백 번 억누르고 있었으니까. 생각대로 따라 주지 않는 간사한 심장이 아프게 울렸다.
울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한 채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새 보육원 앞에 와 있었다. 어떻게 왔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아서 마치 순간 이동을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북아!”
높게 들려온 목소리에 멍하던 머리가 깨어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눈앞엔 신발을 제대로 신지도 못한 채 이쪽으로 달려오는 원장님이 보였다. 나를 올려다본 북이의 손을 놓아주자 쪼르르 원장님에게 달려간다. 그녀는 털썩 주저앉아 북이를 끌어안고 눈을 질끈 감았다. 안심하다 못해 금방이라도 울 듯 일그러진 얼굴이 그간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를 말해 주었다.
“죄송합니다. 북이랑 만난 지는 꽤 됐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건에 휘말리는 바람에 조금 늦었네요. 좀 더 빨리 왔어야 하는 건데.”
“아니요, 그저 돌려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며 말했고,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그리고 뒤늦게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 구재희 힐러님이시죠? 어떻게 북이랑…….”
여태껏 북이를 데려온 사람이 누군지 확인할 정신조차 없었던 모양이다. 그건 그만큼 온 신경이 북이에게 향해 있었음을 의미했다.
“길드 회의 때문에 저희도 아고라에 갔는데, 거기서 이 가면 때문인지 북이가 저한테 와서요. 왜 아고라에 있던 걸까요?”
“하아. 좋은 거 구경시켜 주려고 애들 데리고 갔었는데, 다른 애들 신경 쓰다 보니……. 북이가 없어진 것도 돌아온 뒤에 알았어요. 자격 미달이네요.”
북이를 안아 든 원장님의 얼굴이 어두워지는 게 보였다. 애초에 이런 시기에 혼자서 서른 명 가까이 되는 어린아이들을 돌본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경제적인 면에서도, 노동력 면에서도. 아주 잠깐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했을 뿐인데 갑작스레 턱, 숨이 막히는 듯했다.
“솔직히 이해 안 돼요. 타인을 위해서 자기 인생 갈아 넣는 거.”
내 머릿속이 김세한에 대한 생각으로 복잡했던 탓일까. 생각이 입 밖으로 달아나듯 꾸밈없이 흘러나왔다.
“……네?”
갑작스러운 돌직구에 원장님은 자기가 잘못 들은 건 아니냐는 듯 되물었다.
순간적으로 뱉은 말에 당황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주워 담을 의지는 남아 있지 않았다. 이왕 뱉은 말이니 좀 더 제대로 물어볼까.
“박도윤도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이해할 수 없이 다정한 사람이라고. 저도 이해는 할 수 없지만, 원장님 같은 사람이 있으니까 세상이 돌아가는 거겠죠. 저는 아이를 싫어하고 불편해하는데 북이는 좋아요. 그래서 이런 북이를 만나게 해 주신 원장님이 좋아요. 존경스럽기도 하고요.”
주인공인 김세한을 악인으로 만들 만큼 어릴 땐 착함이 싫었다. 본디 선함이란 희생, 헌신, 배려를 깔고 들어간다. 다시 말해, 객관적으로 머리를 굴려 계산한다면 본인에겐 늘 마이너스의 요소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착하다는 말이 싫었고, 본디 착하게 태어난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늘 손해만 보며 살 테니까.
그녀는 여전히 내 말에 혼란스러워 보였지만, 어색한 웃음을 띠며 화답했다.
“……제가 볼 땐 힐러님도 이해할 수 없이 착하신 분인데요. 애들을 안 좋아하시면서 돈도 안 되는 저희 아이들 치료해 주시고, 지금은 헐값에 돈 없으신 분들 치료하고 계시면서…….”
남들에겐 내가 그런 이미지로 비치는 건가. 실상은 그저 자신이 가치 있길 바라는 마음과 의무감, 어느 정도의 이기심, 작가로서 세상을 이렇게 만들어 버린 것에 느끼는 죄책감 때문에 일하는 건데.
“저는 그냥 책임감 때문에 하는 거고요. 어쨌든…… 자격 미달이니 뭐니 자기비판 하지 마세요. 원장님은 착하셔서 못할지 모르지만, 비교라는 걸 좀 해 보세요. 버러지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런 것들에 비하면 원장님은 성모 마리아나 다름없죠.”
그녀를 처음 봤을 때 생각했던 그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 들자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북이를 내려다보는 그림자 진 얼굴엔 씁쓸함이 깔려 있었다. 뒤늦게 내가 한 말이 그다지 좋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착한 사람에게 착하다고 하는 게 칭찬이라고 생각했는데, 부담일 수도 있겠구나. ‘성모 마리아’라며 멋대로 치켜세우고, 그녀가 성숙하고 완전한 선인이길 기대했으니. 사과하고 싶었다. 그런데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한동안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던 그녀가 천천히 입을 뗐다.
“아뇨. 저도 그냥…… 병 같은 거예요. 가여워서 거두고, 거두었으니 어쩔 수 없이 책임감으로 키우고, 능력도 안 되면서. 그냥. 점점자신이 없어져요. 내가 부족해서 애들이 불행할까 봐요.”
“……지금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얘기 하고 계시는지 아시죠?”
“모르겠어요. 제가 요즘 좀…… 많이 힘든가 봐요. 미안해요. 없는 시간 쪼개서 북이도 데려다주셨는데 이런 푸념이나 하고 있고…….”
조심스레 속 이야기를 흘린 원장님은 어딘가 위태로워 보였다. 나는 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그러곤 원장님 품에 있는 북이를 쓰다듬으며 인사를 건넸다.
“원장님, 또 올게요.”
“그럼요. 언제든지요.”
묵례를 건넨 채 미련 없이 뒤돌아 걸었다. 내가 해결해 줄 수 없는 문제를 듣는 건 꽤 괴로웠다. 이재현의 말이 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어느 정도’ 착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착한 사람을 곁에 두는 게 꺼려진다. 착한 사람들은 굳이 짊어지지 않아도 될 짐을 스스로 지려 하고, 나는 그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괴로웠다. 하지만 지금의 원장님을 내가 어떻게…….
- 끝까지 책임질 거 아니면 손대지 말지?
죽어 가는 고양이에게 손을 뻗었던 내게 이재현이 했던 말, 왜 그게 지금 떠오르는 건지 모르겠다.
이런저런 생각에 오히려 머리가 텅 비어 버렸을 무렵, 나는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내 집, 우리 집, 이재현과 팀원들이 있는 숙소였다. 똑똑-문을 두드리자 얼마 안 가 문이 열렸다.
“뭐야? 먼저 와 있을 줄 알았더니. 왜 네가 제일 늦어? 병원도 안 열었잖아, 오늘은.”
문을 열어 준 김성민이 팔짱을 끼고 문지기처럼 물었다. 놈을 밀어내고 안으로 들어서자 식사 준비가 한창인 식탁과 소파에 앉아 날 빤히 바라보는 이재현, 그리고 내게로 다가오는 권지우가 보였다. 다가온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다 이내 한숨을 쉬었다.
“야, 연락도 안 되고……. 몬스터라도 만났나 해서 걱정했잖아. 유태영이 짹짹이 타고 한 바퀴 돌아보겠다고 방금 나갔는데.”
나는 그제야 허리춤에 달린 무전기가 떠올랐다. 휘몰아치듯 마주한 사건들로 완전히 잊고 있었다.
“아…… 미안. 진짜 그랬겠구나. 무전기 망가졌어. 물에 젖는 바람에.”
“물?”
“음……. 설명하자면 긴데. 일단 이거.”
나는 안주머니를 뒤져 권지우에게 지갑을 건네었고, 놀란 듯 벌어졌던 입이 곧 포물선을 그렸다.
“고마워. 어디서 찾았어?”
“소매치기범 주머니에서.”
“응?”
“응.”
대답했음에도 권지우는 눈썹을 까딱였다. 하긴 이해하기 힘들고, 설명하기도 힘든 상황이긴 했다.
“근데 이것도 젖어서…… 상태가 어떨지는 모르겠다.”
불안함에 머리를 긁적인 내 우려와 달리 지갑을 열어 본 권지우의 표정은 약간의 안도감을 담고 있었다.
“돈만 젖었지, 사진은 상태 좋아. 정말 고마워. 근데 너무 고생한 거 아니야?”
“뭐, 너한테 중요한 거잖아.”
사실 그녀에겐 뭐라도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도움만 받았기 때문이었다. 옅은 웃음을 짓는 얼굴에 가슴 한쪽이 뿌듯함으로 차올랐다. 오늘 겪은 수많은 고난이 모두 헛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아, 아무튼 너 집에 없어서 다들…….”
그녀가 말을 이으려 할 때였다.
탁-접시가 테이블에 놓이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고, 모두의 시선이 소리가 난 방향, 그러니까 이재현에게로 향했다. 아까만 해도 소파에 앉아 있었던 그가 어느새 테이블 앞에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일단 앉아. 얘기도 먹으면서 하고. 유태영한텐 돌아오라고 했어.”
차분한 목소리. 하지만 어쩐지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묘하게 풍기는 냉한 분위기 탓인지 이재현의 말 뒤론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었다. 갑자기 찾아온 침묵에 아직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내가 권지우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뭐야. 쟤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이 있긴 했는데, 그것 때문은 아닌 것 같고. 너한테 삐쳐서 저러는 걸 거야.”
그녀 또한 내게 속삭이듯 답해 왔다.
“나? 나 때문에 삐쳤다고?”
“말없이 사라졌는데 집에도 없으니까……. 쟤, 네 걱정 많이 했거든.”
권지우의 지갑을 도둑맞은 게 계기이긴 했지만, 어차피 나는 뒤로 물러나 있겠다고 했으니 따로 보고 안 해도 괜찮다는 판단을 내렸었는데 그게 문제였던 걸까. 아니, 역시 연락이 안 됐던 게 큰 문제였던 모양이다. 모든 상황은 갑작스러웠고, 오늘의 난 말 못하는 사람이어야 했다.
“뭐 해. 밥 먹자니까.”
또 한 번 이재현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고, 권지우가 몸을 움츠렸다. 차갑고 단호해진 목소리가 서러워 입을 삐쭉이며 자리에 앉았을 때였다. 쾅-문을 열고 들어온 유태영이 나를 발견하고 곧장 다가왔다. 날 찾으러 갔다가 무전을 받고 돌아온 것이었다.
“야! 너 이씨, 연락도 안 되고. 너 때문에 이성재한테 권지우만……!”
“야! 닥쳐.”
벌떡-몸을 일으킨 권지우가 유태영의 입을 막았다. 읍읍-하는 소리를 내는 유태영의 귀에 권지우라 뭐라 속삭이자 이내 바둥거리는 몸이 차분해졌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유태영이 자리에 앉아 입에 빵을 욱여넣기 시작했다.
“이성재한테 권지우만. 다음에 뭔데?”
“눈치껏 넘어가자, 좀.”
배준형이 나지막이 말하며 내 발을 밟아 왔다. 하긴 권지우 본인이 숨기려 하는 걸 캐 봤자 좋을 건 없을 듯했다.
“얘기해 봐, 무슨 일 있었던 거야?”
밥을 먹자고 한 주제에 본인은 식기구조차 들지 않은 이재현이 나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순간 오늘 겪었던 수많은 일이 머리를 스쳤다. 고민할 필요 없이 키워드는 명확했다.
“김세한을 만났어.”
접시에 식기구 부딪히는 소리만 들려오던 식탁은 그마저도 들려오지 않게 되어 버렸다. 하긴 내가 뱉어 놓고도 믿기지 않는 이야기기도 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주 우연히 만난 거고 놈은 날 알아보지 못했어. 알게 된 건 김세한이 우리 길드에 관심이 좀 있다는 거 정도. 그게 다야.”
“김세한이 죽일 뻔한 남자를 살렸다는 힐러가 너야?”
이재현은 대충 상황을 아는 듯 보였다. 그 많은 사람이 목격했으니 안 퍼지려야 안 퍼질 수 없으려나.
“응. 오해 안 했으면 좋겠는데. 난 휘말린 것뿐이야……. 나 참. 당연한 말을 왜 해명하고 있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었다. 마치 내가 잘못한 걸 변명하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자. 늦게 들어온 이유는 우연히 길을 잃어버린 북이를 만나서야. 데려다주고 원장님이랑 대화하느라…….”
“무전기가 물에 젖었다며. 그건 왜 그랬는데?”
이재현은 생략하려던 이야기도 캐내었다. 김세한과 하루에 두 번 마주친 게 스스로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서, 그리고 그때 느꼈던 감정들을 다시 상기하고 싶지 않아서 숨기려던 사건이었다.
“나 있던 곳에서 은빛 고래가 나타났었어. 하필 한 걸음 차이로 휘말려서. 나는 수영을 못하니까 죽나 싶었는데…… 결론적으론 김세한이 구해 줬어. 물론 그놈이 처음부터 날 구하려던 건 아니고, 그냥 겸사겸사 그렇게 된 거긴 한데.”
뭔가 꺼내 놓을수록 무거워지는 마음에 입을 오물거릴 때쯤이였다.
“널 못 알아본 건 확실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기울인 이재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는 그 눈이 싫어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애 딸린 말 못하는 유부녀로 생각할걸……. 북이랑 같이 있었거든. 오늘 보육원에서도 아고라에 견학 왔었더라고. 북이가 무리에서 이탈한 걸 내가 발견해서 데리고 있었고.”
슬쩍 이재현의 눈치를 보았다. 놈은 눈을 내리깐 채 믿어 주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가라앉은 그 얼굴이 거슬렸다. 사실 나부터 이재현에게 묻고 싶었다. 대체 왜 그 시간에 김세한이 공원 같은 곳에 있었는지 말이다.
“큼……. 내 얘기는 끝났으니까 너희도 좀 말해 봐. ‘무슨 일’이 있었다며.”
권지우가 말했던 ‘무슨 일’이 어쩌면 김세한이 거기 있던 이유를 설명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배준형이 우유를 들이켜며 머리를 긁었다.
“어쩌다 보니 우리 팀에서 공식적인 랭킹 1위가 떴어.”
“무슨 소리야, 그게?”
모두의 시선이 한곳에 몰려 있음을 눈치채고 고개를 돌린 곳엔, 아까부터 내내 한마디도 없던 박도윤이 있었다.
“젠장.”
쏠린 시선에 나지막이 뱉어지는 욕설로 보아 축하할 만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배준형에 이어 김성민이 포크로 테이블을 작게 두드리며 설명을 덧붙였다.
“김세한, 사람들 보는 앞에서 사람 죽일 뻔했다나 봐. 장석현이 그걸 의식한 건지, 아니면 김세한이 안 하겠다고 한 건지 몰라도, 다른 인간 물색하던 중에 하필 우리가 눈에 띈 거지. 루키로 이름 빵 날리기도 했고, 요즘 돈도 많이 벌었잖아. 너 덕분에 여론도 좋고.”
김세한이 그곳에 있었던 이유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다. 역시 아까 오갔던 장석현과의 언쟁이 문제가 된 모양이었다. 아니면 지쳐 보이던 김세한이 먼저 거절한 걸 수도 있었다. 1위로 인정받는 그 에피소드가 통째로 망가졌다는 결론이 나자 또 다른 의문이 피어올랐다.
“……근데 왜 이성재가 아니라 박도윤이야?”
“당연히 장석현은 우리 팀 리더를 선택했지만, 알 게 뭐야. 가면 쓰면 그놈이 그놈이라 리더가 누군지도 모를 텐데. 너나 이성재나 눈에 띄면 위험할 수 있잖아? 김세한 무리가 거기 있을 게 뻔한데. 그나마 이성재랑 분위기 비슷한 놈이 나겠어, 배준형이겠어?”
결국 겉보기에 차분한 느낌의 박도윤이 희생당했다는 이야기였다. 김성민의 설명이 끝나자 박도윤이 이마를 짚었다.
“씨발…….”
나지막이 들려오는 욕설이 놈의 심정을 알려 왔다. 다르게 생각해 보면, 장석현이 눈여겨보고 있을 만큼 이재현의 평판이 김세한을 바짝 추격했다는 해석도 가능한 건가.
“아무튼, 좋게 좋게 끝났어. 장석현도 만족하고, 사람들도 김세한이 아닌 것에 만족하고. 그런데 아무도 1위로 인정 안 해 주는 이상한 시상식 느낌이긴 했지.”
“우린 장석현 때문에 눈치 보기 바빴던 피해자지. 괜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평가당하고. 우리도 거절할 걸 그랬나?”
“됐어. 거절했었으면 분명 불이익 있었을걸. 우리까지 거절하면 본인 입지가 흔들릴지도 모를 일인데 가만두겠냐고.”
오가는 대화로 대충 어떤 상황이었는지 머리에 그릴 수 있었다. 팀원들도, 나도 모두 파란만장한 하루를 보낸 모양이었다. 모두의 의문이 어느 정도 해결되었을 때쯤 식탁은 약간의 활기를 되찾아 가고 있었다.
“근데 랭킹 1위 포함 길드면 의뢰 값도 더 오르려나?”
“똑같을 거 같은데. 그 자리는 허수아비에 불과하니까. 김세한이 안 맡겠다 해서 어쩌다 떠맡게 된 거고, 어차피 걔네 길드가 부동의 1위인 건 변함없는 사실이잖아. 규모나, 실력이나. 솔직히 우리 이름 알려지기 시작한 건 1년도 안 됐고.”
그 말에 이 에피소드가 망가졌다 한들 별 변화는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공식이든 아니든 모두의 머릿속 1위는 김세한일 게 뻔했으니까. 다만 이름뿐인 1위라도 이번 일로 우리 길드의 이름이 더 유명해졌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장석현이 김세한 다음으로 생각하는 게 이재현이라는 걸 확인한 셈이기도 했다.
“야, 랭킹1위.”
배준형은 놀리는 게 뻔한 억양으로 박도윤을 불렀고, 그는 답이 없었다.
“어? 대답 안 하지. 그럼 뭐라 그러지. 허수아비? 비슷한 단어 또 뭐 있냐? 바지사장?”
“안 닥칠래?”
마침내 딱딱했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다시 평소 같은 시끌벅적한 식탁이 되었을 때쯤이었다. 툭툭. 누군가가 내 발을 건드려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음식에 손을 대지 않은 이재현이 턱을 괸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 먹고 잠깐 내 방으로 와.”
풀어진 식탁 위의 분위기와 달리 여전히 냉기가 흐르는 얼굴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을 하려고…….’
내내 냉랭했던 이재현 덕분에 입에 쑤셔 넣은 음식들이 무슨 맛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끝나지 않길 바랐던 식사가 끝나고 팀원들이 하나둘 방으로 들어갈 때쯤, 나는 마치 교무실에 불려 가는 학생처럼 자세를 낮춘 채 이재현의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들어와.”
마치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침을 한 번 크게 삼키고 문을 열었을 때, 등 하나 켜지지 않은 깜깜한 방 안이 보였고, 열린 커튼 너머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서늘한 기운의 푸른 달빛만이 은은히 방을 비추고 있었다. 창을 등지고 선 이재현은 그림자처럼 어둡게 보였지만 팔짱을 낀 채 날 응시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발을 들이민 이상 들어가야 했지만, 무거운 분위기에 문고리를 완전히 놓을 때까지 다시 나가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그러다 문득 억울한 기분이 들어 성큼성큼 놈 앞으로 다가갔다.
‘나도 휘말린 것뿐인데 뭘 잘못했어, 내가.’
이재현은 내가 선 방향으로 몸을 돌려 마주했다. 나란히 창 앞에 서자 아예 보이지 않던 이재현의 얼굴이 달빛을 받아 선명해졌다. 예상대로 무표정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최근 놈의 웃는 얼굴에 익숙해져서일까? 저 얼굴이 유독 차갑게만 느껴졌다.
“야, 너 왜 화났는데?”
울컥, 올라오는 서러움에 조금 따지듯 물었고.
“화 안 났는데?”
놈은 눈썹을 까딱이며 답했다.
“안 나긴, 아까부터 팔짱 끼고, 밥도 제대로 안 먹고, 봐, 지금도…… 삐딱이 서 있잖아.”
“……삐딱이 선 것도 문제야?”
놈은 순순히 자세를 바로잡았지만, 팔짱은 여전했다. 그건 아직 마음이 온전히 풀리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입술을 삐죽이며 눈을 돌렸다. 화를 낸다면 받아쳐 줄 요량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놈을 화나게 할 만큼 잘못한 게 없었으니까.
“해 봐. 할 말 있어서 오란 거…….”
싸우게 된다면 질 생각은 없었다. 눈에 힘을 준 순간 이재현이 내 말을 가로채듯 입을 열었다.
“걱정했어. 순간이지만…… 네가 안 돌아올까 봐 불안했고.”
툭-한껏 올라갔던 어깨에 맥이 풀렸고, 동시에 숨이 멈추었다. 예상치 못한 말을 들어서일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지막이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달빛에 반쯤 그늘진 얼굴이 아까와 달리 조금 가라앉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한숨을 삼킨 듯 작게 내뱉어진 숨소리. 그는 내리깔린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말을 이었다.
“아무 말도 안 하고 가서 서운했고, 내가 묻지 않으면 숨겼을 오늘 일이 신경 쓰였어.”
“…….”
불안, 서운, 신경. 모든 말이 사건보단 감정과 관련된 말이었다. 다시 들린 이재현의 시선이 똑바로 내게 향했다.
“그러니까, 이건 화난 게 아니라…… 그냥 너한테 시위하는 거야.”
그 말에 아까 들었던 권지우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 너한테 삐쳐서 저러는 걸 거야.
삐쳐? 이재현이? 놈의 아무런 꾸밈없는 말이 그대로 나를 파고들어 척추를 간질였다. 나도 모르게 목 뒤를 쓸어내리며 숨을 참았다. 흔들림 없이 날 내려다보는 눈과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눈을 맞추었다간 온몸이 가려워 견디지 못하게 될 것만 같아 고개를 숙였다.
“내가 할 말은 이게 단데. 넌?”
“…….”
마치 먼저 선수 친 후 네 차례라며 마이크를 넘기는 듯한 모양새였다.
“넌 나한테 할 말 없어?”
재촉하듯 들려온 말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잘잘못의 문제였다면 물어뜯어 줄 용의가 있었는데, 놈은 또 한 번 내 사기를 크게 꺾어 왔다. 이재현이 내게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는 대충 눈치껏 알고 있었다.
“미안해…….”
그리고 그 말을 뱉은 순간, 혀에 가시가 돋아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미안하다는 말은 살면서 거의 입에 담아 본 적이 없었다. ‘죄송합니다.’와는 어딘가 조금 다른, 가슴 언저리가 답답한 말. 적어도 자존심 강한 나에겐 어려운 말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상대를 걱정시켰다는 게 이런 기분일 줄은 몰랐다. 적어도 지금 뱉은 ‘미안해.’라는 말은 상황을 무마하려는 술수가 아닌 진심이었다. 나를 걱정했다는 건 그만큼 나를 생각해 주고 있다는 것이었고, 나도 그만큼 상대를 생각하고 싶었다.
“조금 해명하자면, 저번에 너랑 대화했을 때, 나는 그날 뒤로 빠져 있겠다고 했으니까……. 보고 생략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그리고, 김세한 일은 굳이 자세히 언급하지 않아도 무방한 내용이라서 말 안 하려던 거고…….”
말을 늘어뜨리며 힐끔 눈치를 보자 이재현은 굳이 팔짱을 고쳐 꼈고, 보란 듯 한숨을 내쉬고 눈을 돌렸다. 누가 봐도 아직 불만 있는 듯한 태도였다.
“알겠어. 다음엔 꼭 보고하고 갈게. 다녀와서는 무슨 일 있었는지 생략 없이 너한테 다 말할게. 전부 다!”
최대한 양보해서 내던지듯 말하자 불쑥 내 앞으로 새끼손가락이 들이밀어졌다. 미간을 찌푸린 채 눈을 끔벅이자 그는 반쯤 뜨인 눈을 하고 펼쳐진 새끼손가락을 까딱였다.
“난 구두 계약 안 믿어.”
문득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이재현과 손가락을 걸었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달라진 게 있다면 나와 놈의 입장이 반대되었다는 것뿐이었다.
“……나 참, 이거 걸면 구두 계약 아닌 게 돼?”
“적어도 약간의 부담은 있던데…… 경험상.”
손가락 걸고 약속이라니, 답지 않게 순수하고 어린아이 같은 행동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곤 손가락을 걸었다. 살짝 걸린 손가락에 이재현이 그다음을 요구해 왔다.
“도장 없는 계약은 발뺌하면 효력이 없어.”
“어련하시겠어.”
꾹-엄지가 맞닿았고, 그제야 내 손을 놓아주었다. 놈과 닿았던 엄지와 엉켰던 새끼손가락에 체온이 남아 다른 곳보다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이재현의 팔짱이 풀렸다. 기분이 나아졌다는 걸 의미했다.
“너…… 좀 어린애 같은 거 알아?”
눈에 보이는 기분 변화에 헛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그래서 싫어?”
이재현은 종종 이상한 질문으로 나를 당황하게 했다.
“어? 아니 좋다, 싫다. 그런 문제가 아니라…… 그냥 그렇다고.”
“애 같다라. 내 말이 생각보다 1차원적이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난 네가 다른 이유로 화낼 줄 알았거든. 적어도 서운하다든가. 그런 식은 아닐 줄 알았어.”
“나도.”
놈은 목 부근을 긁으며 내 눈치를 보듯 힐끔거렸다. ‘나도.’라는 대답은 대체 뭘까.
“대답이 이해가 안 되는데?”
“나도 뭐라고 화내야 하나, 이게 화내도 될 문제인가 판단하기 어려웠어. 왜냐면 단순히 내 기분의 문제였으니까.”
이재현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 또한 그런 기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기분은 상했지만, 이걸 뭐라고 상대에게 표현하면 좋을지, 그래도 되는 건지 판단하기 어려워 항상 입을 다물곤 했다. 또 한편으로는 서운함, 불안함, 슬픔. 그걸 다 표현하는 건 어른스럽지 못하다는 생각도 있었다.
잠시 김세한과 싸우던 순간들이 머리를 스쳤다. 김세한이 내게 감정을 내비쳤을 때도 그가 어린아이 같아졌다고 생각했었고, 단 한 번도 말로 내 감정을 설명해 본 적이 없었다. 그땐 그가 어리광부린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이재현과 갈등이 잘 해결된 걸 보면 문제는 나한테 있었는지도 몰랐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내게 이재현의 목소리가 이어서 들려왔다.
“원래 감정이라는 게 유치한 거야. 꾸미기 어려운 부분도 있고, 수식어가 많아질수록 진심이 왜곡될 때도 있으니까.”
“…….”
“나이가 들수록 겁도 많아지고, 겉멋만 들어서 감추게 되고, 드러낼 때는 나름의 용기가 필요해져. 네가 느꼈다시피 다 드러내면 멋없잖아.”
조금 작아진 듯한 목소리. 어느새 한 손으로 얼굴 반쪽을 가린 이재현이 고개를 숙였다. 붉어진 귀가 지금 조금 창피하다는 걸 알려 와서 나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이재현은 나와 다르면서도 비슷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비슷하게 느끼되 문제는 다르게 풀어 가곤 했다.
감정 문제에 있어 나는 침묵했고, 감내했고, 도망쳤다. 왜냐면 감정이란 건 그저 ‘나’ 혼자만의 영역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게 견디기 버거워지면 상대를 끊어 내면 그만이었다. 그게 상처를 최소화하는 방법인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으니까.
“네 말대로면…… 오늘 넌 용기를 낸 건가?”
나는 창가에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뭐, 그렇지.”
“왜?”
놈의 고개가 서서히 들어 올려졌다. 마주친 눈에선 아주 약간의 당황이 비쳤다. 놈이 내게 해 오던 질문을 역으로 건넨 것뿐이었다. 대답하기 모호하고, 정해진 정답도 없고, 그래서 어려운 질문. 그의 눈이 나를 담은 채 천천히 깜박였고, 벙긋거리던 입이 조금 힘겹게 열리는 듯 보였다.
“내가 용기 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라서.”
얼버무리거나 회피하지 않는 명확한 답이었다. 올곧은 시선에 심장이 연신 내려앉고, 몸에 체온이 올라가는 듯했다. 늘 나를 파고들던 질문이 얄미워서, 당하기만 했던 걸 되돌려 주려던 내 의도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오히려 역습을 당한 기분이었다.
“적어도 내가 널 똑바로 보고 서 있어야 네가 뒤돌았을 때 마주 볼 수 있잖아.”
추상적인 말이었다. 날 기다리고 있다는 듯한……. 숨 쉬기가 불편해졌다. 목덜미 언저리가 뜨거워져서 괜히 손으로 매만졌다.
이재현은 어떤 상황과 감정에서도 도망가지 않는다. 그래서 무서웠다. 매번 힘들어지면 외면하고 덮어 두기 바빴던 나에게 그는 무던히 강적이었다. 마주 보고 싶지 않은 걸 눈앞에 들이밀고, 윤곽만 드러나는 걸 자꾸만 구체화하려 한다. 나는 그게 어지간히도 불편했다.
대답 없이 입술만 깨물자 작게 미소 지은 녀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
“고마워.”
“……뭐가?”
“너도 용기 내줬잖아. 내 억지에 미안하다고 말해 준 거. 그게 너한테 꽤 힘든 일이었다는 걸 난 잘 알거든.”
무언가 들킨 듯한 느낌이었다. 사람을 잘 다루는 이재현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더 그렇게 느껴졌다. 얼굴이 달아올라 고개를 숙였을 때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그래. 자존심이 세서.”
머릿속에 놈이 내게 했던 ‘미안해.’라는 말들이 스쳐 지나갔다. 늘 너무 쉽게 들어 버려 날 기운 빠지게 하던 사과들이었다.
“아니던데. 미안하단 말, 잘만 하더니만…….”
아, 말을 뱉은 순간 모든 걸 알 수 있었다. 그 쉽다고만 느꼈던 사과가 다 놈이 짜낸 용기였음을. 입을 꾹 다문 나를 내려다보던 이재현이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물을까 말까 고민했던 건데. 김세한, 오랜만에 보니까 어땠어?”
“많이 말랐더라. 옛날보다 눈에 힘도 빠져 있는…….”
“그런 거 말고. 네 감정이 어떤지 묻는 거야.”
또다. 내 감정이 왜 궁금한 걸까. 주인공과도, 스토리와도 관계없는데 말이다. 순식간에 머리가 아닌 가슴 언저리가 무거워졌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 했지만, 속이 어지러운 건 사실이었다.
“확실히 시간이 지나니 분노가 날이 닳았나 봐. 안쓰럽다고 생각했어. 아직 추억 속에서 사는 것 같아서.”
“…….”
역시 얼굴을 보지 말았어야 했다. 목소리를 듣지 않았어야 했다. 무의식중에 떠오른 김세한의 얼굴에 일부러 세게 고개를 저어 머리를 흔들었다.
“내 감정은 그냥…… 옛 연인으로서 느낄 만할 뻔하디뻔한 감정일걸. 원래 그렇잖아. 밉든 곱든 정이 있으니까.”
전 연인을 생각하며 떠드는 건 그만하고 싶어 대충 형식적인 답을 뱉었다. 이재현은 눈을 내리깐 채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의 의미보단 생각에 잠긴 듯한 움직임이었다.
“……무슨 생각해?”
문득 놈의 머릿속이 궁금해져 뱉은 질문이었다. 대답하려는 듯 이재현의 입이 작게 벌어진 순간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대답할 새도 없이 문이 열렸고, 동시에 어설프고 어색하게 느껴지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등장한 권지우는 잠시 우리를 번갈아 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 대화 중인 건 알겠는데, 손님이 와서.”
권지우는 누군가에게 이리 오라는 듯한 손짓을 했고, 예상보다 한참 낮은 높이에서 ‘손님’이 등장했다. 울고 있는 북이였다. 북이는 우리를 발견하자마자 방 안으로 뛰쳐 들어왔고, 이재현이 빠르게 북이를 안아 들었다. 뚝뚝 끊기는 울음소리. 아까도 들었던 북이의 목소리였다.
“북이가 왜…….”
넘어져서 무릎이 까져도 울지 않던 아이, 무표정한 나를 무서워하지 않았던 아이. 그런 북이가 유일하게 운 건 오늘 내가 죽을 뻔했을 때였다.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권지우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몰라. 유태영이랑 근방 산책하다가 길에서 울고 있는 애가 있길래 봤는데 너희랑 자주 있던 걔 같아서. 뭐 말이 통해야 해결을 해 주지. 자꾸 잡아당기기만 하니까.”
“근방 어디?”
“아고라 근처였어. 보육원이랑 가까운 데. 데려다주려고 했는데 자꾸 안 가겠다고 버텨서. 뭔가 얘기하려는 거 같긴 한데.”
“뭐지. 아까도 길 잃어버렸는데……. 알겠어, 내가 데려다주고 올게.”
이재현이 북이를 달래길 포기한 듯 바닥에 내려 주었을 때였다. 울어서 숨이 차는지 작은 몸이 떨리고 있었다. 그게 안쓰러워 몸을 낮추고 눈을 맞추자 북이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듯 보였다.
[선생님.]
내가 알아볼 수 있는 건 그 정도였고, 자연스레 이재현을 돌아보았다. 북이를 내려다보던 그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보육원에 무슨 일이 생긴 거 같아.”
“무슨 일인데?”
이재현은 겉옷을 챙겨 들며 북이를 안아 들었고, 남은 손으로 내 손목을 잡았다.
“네가 필요한 일.”
-다음 권에 계속—
SSS급 집착남에게서 도망치는 방법 4
7. 재연(2)
김세한을 위한 세상이라 다른 곳엔 희망이 없다는 이재현의 말이 맞았다. 사람이 죽어 나가고, 국가의 역할이 무너져 질서가 깨진 순간 강도질과 폭력, 자살은 이 세계에선 흘러넘치는 이야기일 뿐 특별한 에피소드가 아니었다. 이상했다. 내가 만든 어두컴컴하고 거친 이 세상이 이제 와 새삼 두려웠다.
보육원에 들어서자마자 건물 전체를 울리는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으며 도착한 곳에서는 아이들이 여느 교실같이 꾸며진 방 앞 복도 쪽, 창과 문에 붙어 하염없이 절규하고 있었다. 창문 너머로 방 안 바닥에 흥건한 피가 보였고, 정면으로 보이는 벽에 기대 멍하니 앉아 있는 원장님이 보였다. 의식은 있는 듯 보였지만 어딘가 혼자만의 공간에 갇힌 듯 초점 없는 눈이었다.
“…….”
“…….”
그 장면을 눈에 담은 팀원 모두가 숨을 멈춘 채 얼어붙었다.
‘선생님이 다쳤다.’ 북이가 표현 말은 그게 전부였지만 막상 와서 눈에 담은 풍경은 더 참혹했고, 아이들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니, 이해 못 하는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자살 시도.’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상황을 그렇게 설명하고 있었다.
목구멍에서부터 피 냄새가 올라오고, 머리가 아득해지는 상황 속에서 가장 먼저 움직인 건 박도윤이었다.
“……비켜.”
그 말에 배준형과 김성민이 황급히 문 앞에 붙은 아이들을 떼어 냈다.
쾅—
박도윤이 손에 든 검으로 문을 가르자 허술한 목재 문이 후드득 부서져 내리면서 마침내 안으로 들어갈 길이 열렸다. 당장에라도 안으로 뛰쳐 들어갈 것만 같던 박도윤은 부서진 문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내리깔린 시선은 원장님을 향해 있었고, 핏발 선 붉은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작게 들려오는 치아 부딪치는 소리까지 지금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 그에게 얼마나 충격인지를 보여 주는 듯했다. 지금 박도윤은 여기서 오열하고 있던 아이들과 별 다를 바 없이 불안해 보였다. 그에게 원장님은 부모나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박도윤, 애들 데리고 밖으로 나가. 나만 들어갈게.”
나는 박도윤을 밀어내며 말했고, 놈은 순순히 뒤로 물러서며 안으로 들어가려는 아이들을 안아 들었다. 그래, 이런 장면을 봐서 좋을 건 없다. 피를 볼 수밖에 없는 세상이지만, 자신을 아껴 주던 사람의 이런 모습은 분명 트라우마가 될 것이었다.
“혼자 괜찮겠어?”
이재현은 조금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혼자여야 해. 살아 계시고, 의식도 있으니까 이보다 나빠질 순 없을 거야. 걱정하지 말고 애들이나 잘 달래 줘. 북이도.”
“알겠어. 다녀와.”
그는 나를 조금 응원하듯 어깨를 두드리며 멀어졌다. 건물 안을 울리는 아이들의 울음소리는 마치 죽은 부모를 앞두고 멀어지는 듯 높고 처절했다.
터벅터벅, 내 발걸음 소리에도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바닥에 퍼진 피 가까이에 작은 커터 칼이 떨어져 있었다. 굳이 그녀에게 묻지 않더라도 지금 이 상황을 모두 설명받은 느낌이었다.
“……미안해요. 책임감이 애매했나 봐요.”
잠긴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공허해 보이는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피의 출처는 그녀가 감싸고 있는 손목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베인 손목을 계속 지혈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자세를 낮추어 조심스레 그녀의 상처 부위를 살피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회하고 계셨나 봐요?”
내 질문에 깨문 그녀의 입술이 하얘졌고, 이내 눈물이 흘러내렸다.
“잠을 혼자 못 자는 아이가 있거든요. 다 재웠다고 생각하고 나온 건데……. 용기를 낸 순간, 저를 찾아다니던 그 아이와 눈이 마주쳤어요.”
꿈을 꾸는 듯한 목소리였다. 다 잠기고 힘이 빠져서 나까지 깊은 심해로 빨려 들 것만 같은 목소리.
“어떻게 아이들에게 용서를 빌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런 모습…… 보여 주고 싶지 않았는데.”
머릿속엔 대충 장면들이 그려지고 있었다. 그녀와 아까 나누었던 대화도, 유독 어두웠던 표정도 하나둘 스쳐 지나갔다. 뱉고 싶은 말 전부를 목구멍 아래로 내려보낸 채, 지혈하고 있던 손을 거두어 내고 그녀의 손목을 치료했다. 손에서 나오는 밝은 빛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저 이거 잘한 거 맞아요? 용기 내셨는데. 제가 다 수포로 만든 거 같아서 묻는 거예요.”
처음으로 치료하면서도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죽어 가는 사람을 치료하고 내심 뿌듯했던 건 ‘살고 싶은 사람’을 살렸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여기에서 제가 할 이상적인 말은 정해져 있죠. 치료하고 열심히 살아라, 다시는 이런 일 하지 마라, 아이들을 생각해라……. 그런 책임감 없고 좋은 말들이요. 근데 저는 그런 말 못 하겠어요.”
오늘 낮에 나누었던 대화에서 나는 선뜻 그녀를 돕겠다고 하지 못했다. 지금 내가 짊어진 일도 버거웠고, 내 의견으로 팀원들이 원치 않는 일을 돕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방의 문에서 그녀 앞으로 오는 짧은 거리를 걸으며 생각이 바뀌었다.
처음에는 화가 났다. 아이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였다는 것과 모든 걸 포기하려던 그녀에게.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과연 나는 화를 내도 되는 입장인가. 들지 않아도 됐던 짐을 들었던 그녀가 이젠 지쳐서 내려놓은 것뿐이고, 나는 거들지 않은 방관자일 뿐인데.
“차라리 욕해 주세요……. 자격 없다고, 실망했다고.”
“제가 뭐라고 원장님을 욕해요. 듣고 싶으면…… 박도윤한테 들으세요. 여기 오는 내내 당신은 그럴 사람 아니라고 굳게 믿었던 사람이니까.”
“아아…….”
내 손의 빛이 사그라들자 피가 묻어 있을 뿐 말끔히 아문 뽀얀 손목이 안정된 맥박을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살았지만 아마 바뀌는 건 없을 것이다. 그게 이 상황의 엿 같은 점이었다.
말끔히 아문 손목을 매만지던 그녀가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도윤이는 참 고마운 아이예요. 다 컸으니 이제 자기 인생만 살면 될 텐데 자기가 번 돈도 다 이 보육원에 쓰고, 그러면서도 힘들다는 내색 한 번 한 적 없죠.”
내내 내심 궁금했던 이 보육원 운영비의 출처가 밝혀진 순간이었다. 배준형이 붙여 준 그의 별명은 짠돌이였는데 설마 이런 식으로 얽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 아이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네요. 크게 실망했겠죠. 겨우 도와줬는데 이런 꼴이라니…….”
“애초에 말이 안 됐어요. 혼자 이 많은 아이를 돌본다는 게……. 원장님은 착한 분이니 또 언제 어떻게 새로운 아이가 이곳에 들어올지는 모를 일이죠. 손은 부족한데 관심을 원하는 아이는 많고. 저는 원장님의 앞길이 뻔히 보여요. 죄송한 말이지만요.”
답답함에 뱉은 말이었다. 그녀는 피가 말라붙어 까매진 손으로 마른세수했다.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은 간단했다.
“그래서 지금은 어때요. 죽고 싶어요, 아니면 살고 싶어요?”
“……죽고 싶지 않아요.”
살고 싶다는 말과는 다른 느낌의 말이었다. 조금 더 절박하고 처절했다.
“아이들과 나를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정답을 모르겠어요. 이 앞길에 빛이 있는지도요.”
“그럼 여기 계세요. 잠시 다녀올 테니까.”
“어딜…….”
“해결책 찾으러 밖에요. 그리고, 손님이 와서 비켜 드리는 거예요.”
내 말에 그녀의 눈이 문 쪽으로 향했다. 박도윤이 서 있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며 몸을 일으켰다.
“욕 듣고 싶으시다면서요. 욕은 저놈이 제일 잘해요.”
그러곤 걸어 들어온 박도윤을 지나쳤다.
방을 나서고 얼마나 지났을까, 뒤쪽에선 처절한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내겐 비치지 않았던 가장 밑바닥의 설움이 박도윤을 보고 터져 버린 모양이었다.
문이 열려 있는 방 안. 젖은 속눈썹을 내리깐 채 잠든 아이들과 하나같이 생각에 잠긴 듯 팔짱을 낀 팀원들이 보였다.
“박도윤 그 자식, 어디다 돈을 쓰길래 맨날 빈털터리인가 했더니…….”
“그래. 쉬는 날에 맨날 쇼핑간다더니, 사 들고 오는 게 하나 없어서 이상하긴 했지.”
옆방에서 들려오는 대화를 들은 모양인지 김성민과 유태영이 저마다 과거를 회상하듯 눈을 굴리며 말했다. 오늘 하루가 힘들었을 아이들에게 이불을 덮어 주던 배준형이 어울리지 않는 낮은 목소리를 흘렸다.
“왜 말을 안 해서 뒤늦게 알게 만드냐고…….”
박도윤의 심정은 사실 이해가 갔다. 서로의 이익을 위해 뭉친 길드. 운이 좋게도 만난 괜찮은 사람들. 어쩌면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는 편이 좋은 관계일지도 몰랐다. 나의 우울을 드러내지 않는 것도 따뜻한 배려라고……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부담 주기 싫었겠지, 박도윤 성격상……. 저번에 애들 다쳐서 위급할 때도, 길드 힐러를 개인적인 데 이용해도 될지 알 수 없어서 망설였다고 했잖아.”
권지우가 피곤한 듯한 눈으로 아이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박도윤이라면 사실 이맘때쯤엔 죽었을 인물이다. 이재현이 이야기를 바꾸지 않았더라면 보육원은 어떻게 됐을까. 그 비극적인 사건들이 ‘세계는 점차 피폐해져 갔다.’라는 문장 정도로 정리됐겠지.
“난 돕고 싶어. 원장님도, 애들도, 북이도.”
내뱉어 버렸다. 말을 하면 이제 책임질 일밖에 남아 있지 않게 되는데,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단계까지 와 버린 것이었다. 내 말에 모두가 생각에 잠긴 듯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재현은 우리를 관찰하듯 눈을 굴렸고, 흐르던 침묵을 깨뜨린 건 배준형이었다.
“나도. 왜 박도윤이 아무 얘기 안 한 게 서운했을까 생각해 봤는데, 우리는 ‘길드’라는 이름 아래에 만나긴 했지만 솔직히 가족 같은 사이잖아. 다들 돌아갈 곳도 없고. 너희들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거든. 아무튼, 나도 돕고 싶단 얘기야. 어쨌든 여기 있는 아이들이 박도윤한텐 가족인 셈이니까.”
내가 이 길드에 합류한 건 1년이지만, 나머지 팀원들이 같이 보낸 시간은 3~4년 정도였다. ‘가족’이란 말이 과분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불안한 세계의 밑바닥에서 서로 의지하며 동고동락해 온 사이였으니까. 배준형의 말에 유태영이 머리를 감쌌다.
“그래. 주말 반납…… 하자.”
괴로운 듯한 모양새였지만 동의의 의미였다.
“뭘 그렇게 괴로워해. 애들이랑 노는 거 은근 재밌어.”
김성민은 키득거리며 유태영을 달랬다.
“그건 너랑 배준형이나 그런거고. 아무튼 뭐, 대충 의견은 같은 거 같네. 이성재, 너만 아까부터 입 다물고 있는데, 무슨 생각하는 거냐?”
권지우가 이재현을 돌아보며 물었고, 놈은 묘한 웃음을 지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했던 약속, 기억나?”
이재현의 말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오직 나만이 그 약속이 뭔지 모르는 것 같았다.
“했던 약속이 뭐였는데?”
“사사로운 감정에 흔들리지 말 것, 서로 마음 주지 말 것, 명령을 우선시할 것.”
딱딱하고 사무적인 약속이었다. 연애 금지 조항이 생긴 이유가 어렴풋이 추측될 정도로 서로에게 동업자 이상의 감정을 품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배준형의 말, 그리고 거기에 동의한 모두가 그때의 약속을 깬 것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책임지지 못할 일에 손대지 말 것.”
이어진 말은 놈들이 아닌 나를 보며 한 말이었다. 어두운 목소리.
- 끝까지 책임질 거 아니면 손대지 말라고.
또다. 또, 또, 또다시 빗속에서 들었던 놈의 목소리가 겹쳐 들려왔다. 역시 지금과 죽어 가는 고양이를 앞두었던 그날은 닮아 있었다. 그리고 손을 댄 후에 결말이 얼마나 처참했는지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반대로 얘기하면…… 책임질 수 있으면 그만인 거잖아. 해 볼 때까지 해 볼래. 넌 빠지든가.”
조금 날이 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죽은 고양이의 잔상이 머리에 스쳐 나도 모르게 흥분해 있었다. 그리고 이재현을 마주 본 순간, 그날 멀어지는 하늘색 우산에 대고 소리쳤던 내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같이 책임져 줘. 혼자는 무거우니까 같이 짊어져 줘. 난 못 지나치겠으니까 너도 지나치지 말아 줘.’
결국 그도 같은 의견이길 바라고 있었다.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어떤 말이 나올지 몰라 불안한 걸 보면, 같이 지내 온 1년 동안 나도 모르게 놈에게 의지해 왔던 모양이다.
“네 대답이 그거라면. 뭐.”
“……무슨 의미야, 그게.”
“나도 돕겠다고.”
긴장감과 달리 명료한 찬성의 의미였다.
“근데 너희 대체로 대책 없는 거 알지. 너희는 좋은 마음만 가지면 되겠지만, 나는 꽤 골치가 아파서 말이야.”
권지우가 끔찍이 싫어하는 잔소리. 명료했던 찬성 뒤로 이어진 계획은 전혀 간단하지 못했다.
“솔직히 쉬는 날 우르르 몰려와서 도와 봤자 원장님한텐 큰 도움 안 돼. 육아는 365일 24시간 이어지는 거니까. 그래서 분배가 필요할 거 같아. 내가 의뢰 난이도 조정해서 대충 스케줄 짤 테니까, 해당 요일엔 사냥에서 빠지고 여기 와서 원장님 도와주는 식으로 하자. 그리고 수익의 10% 정도를 여기에 지원하는 거 어때. 아, 그리고 애들 말인데. 단순히 놀아 주기보단…….”
나는 턱을 괸 채 줄줄 계획을 읊어 대는 놈을 보며 웃음을 참았다. 대체 언제부터 이런 구체적인 방안을 세우고 있던 걸까. 놀라우면서도 든든했다.
이번 일뿐만이 아니었다. 이재현이 옆에 있다는 건 막연히 일이 잘될 것만 같다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내가 조금 흔들리거나 약해져도 그는 끄떡하지 않을 거 같아서 그냥 기대고 싶어져 버린다.
길어지는 말에 다들 2초에 한 번 바통 터치하듯 하품을 할 때쯤, 박도윤이 돌아왔다. 붉은 눈가, 처진 어깨, 머리를 쓸어 올리는 손. 원장님과의 대화가 어떤 분위기였을지 대충 예상해 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원장님은?”
나는 최대한 무미건조하게 질문을 던졌다.
“아. 잠드시는 거 보고 나왔는데……. 그냥 자는 척해 주시는 걸 수도 있고. 걱정 마. 칼은 일단 내가 가지고 왔어. 적어도 오늘은 별일 없을 거야. 어쨌든 고맙다. 또 도움받았네.”
“출장 진료도 가끔 하고 그러는 거지.”
“미안하다. 다들 피곤한 하루의 마지막에 이런 거 보게 해서.”
박도윤의 성격이 그대로 묻어나는 대사였다. 아무에게도 피해 주고 싶지 않다는 전제가 깔린 답에 배준형이 조금 미간을 찌푸렸지만,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원장님이랑 너만 아는 사이냐? 뭐, 네가 좀 더 오래 알았겠지만, 이게 꼭 너만의 일은 아니라는 말이야.”
“배려 안 해 줘도 괜찮아.”
박도윤은 아주 미약한 미소를 띠었다. 나에겐 안 해 줘도 괜찮다면서 놈은 날 배려해 주고 있었다. 숨이 턱턱 막히는 무거운 공기에 얼굴을 쓸어내렸다.
“……앞으로 어쩔 생각인 건데. 넌 계속 일해야 할 텐데, 이제 원장님 혼자 두기 불안할 거 아니야.”
“더 자주 찾아봬야지. 일 끝나고 늦게라도 애들 돌보는 거 도와드릴 거야.”
“야, 네가 무슨……. 그러다 사냥할 때 집중력 흐트러지기라도 하면 너나 다른 사람 위험해질 거 아니야.”
언성이 조금 높아지자 날 보는 박도윤의 눈이 놀란 듯 커졌다. 팀원 중 나와 가장 비슷한 성격을 가진 박도윤과는 서로 언성을 높일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싸해진 분위기에 나는 마치 마이크를 넘기듯 이재현을 가리켰다. 이재현은 조금 어이없다는 듯 날 돌아보았다. 하지만 곧장 내 의도를 간파한 듯 입을 열었다. 앞으로 보육원을 도울 계획을 말했을 때, 예상대로 박도윤은 곧장 미간을 찌푸렸다.
“됐어. 너희가 뭐 하러. 이럴까 봐 말하기 싫었던 거라고.”
박도윤이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숙이자 절로 숙연해진 분위기가 침묵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여기서 멋있는 대사를 날려 줄 수도 있었다. 소년 만화에 나올 법한 ‘넌 혼자가 아니야.’, ‘우린 가족 같은 사이니까.’ 같은 대사 말이다. 하지만 오늘의 나는 꽤 지쳐 있어 이 이상의 감정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김칫국 마시지 마. 난 너 보고 하려는 게 아니라 북이 보고 하려는 거니까.”
덤덤하게 던진 내 말이 신호탄이라도 된 듯, 모두 한결 가벼운 얼굴을 하고 말을 던지기 시작했다.
“난 태연이랑 태민이.”
“난 준수랑 미연이.”
“너희는 왜 애들 차별하냐? 난 다 좋아.”
그리고 마무리는 박도윤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린 이재현이 했다.
“이미 결정됐고, 난 계획 수정하는 거 싫어해.”
고개를 숙인 박도윤은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이내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보는 그의 약한 모습에 섣불리 위로하는 사람은 없었고, 그저 그 울음소리가 더 들려오지 않을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
이후론 스케줄에 변화가 생겼다. 2인 1조로 일주일에 한 번, 일하러 가는 게 아닌 보육원에 가는 식이었다. 그렇게 하면 일주일에 네 번 정도는 원장님을 도울 수 있었다. 때문에 병원엔 ‘매주 수요일 휴업’이라는 팻말이 걸렸다. 내가 원장님을 돕는 날이 곧 수요일임을 의미했다.
햇살이 강렬한 초여름. 어느 때보다 맑은 하늘엔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밝은 날, 나는 이재현과 함께 이불 빨래를 하고 있었다.
“왜…… 왜 이렇게 됐지?”
흰색 페인트가 다 벗겨져 회색 콘크리트가 다 드러난 보육원의 옥상. 턱이나 난간이랄 게 없어 훤히 내려다보이는 운동장에선 술래잡기라도 하는지 원장님을 피해 도망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행복이 묻은 비명이 들려왔다.
“2인 1조니까.”
이재현은 거품이 동동 떠다니는 자줏빛 대야 안에서 꾹꾹 이불을 밟으며 답했다.
“누가 그걸 몰라서 물어? 왜 하필 너랑 나냐고.”
나는 이재현 앞에 쪼그려 앉아 그가 들어간 대야에 세제를 더 채워 넣으며 따가운 햇볕에 눈을 찌푸렸다.
“왜? 그럼 문제 있어?”
문제가 없었는데 생겨 버렸다. 어느 정도 친해지고 편해지면서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이재현과의 긴장감이 요즘 들어 다시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었다. 눈이 마주치면 침묵이 돌고, 숨 쉬는 게 신경 쓰이고, 도망가고 싶은 이상한 충동이 들었다. 난 그게 불편했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아니. 과연 이게 최선의 분배였나 해서 그런 거지.”
“왜. 나름 밸런스 분배해서 넣은 건데.”
“밸런스?”
“권지우랑 김성민, 유태영이랑 배준형. 한쪽은 차분하면 한쪽은 밝은 느낌의 애들로. 그러면 애들 놀아 줄 사람이랑 원장님 도와주는 역할로 효율적이잖아.”
이재현의 말은 항상 꽤 설득력이 있었다. 놈의 말을 곱씹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우린 무슨 조합인데?”
“음…… 나머지?”
“아하.”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찰팍찰팍 물 밟는 소리에 웃음소리가 섞여 들었다.
“왜 웃어?”
웃고 있을 놈을 올려다보았지만, 햇살에 눈이 부셔 고개를 다시 숙였다. 이재현은 그런 나를 알아챈 듯 조금 자리를 옮겼고, 그림자 안에 나를 가두었다. 눈이 부셔 내내 힘이 들어갔던 눈꺼풀이 한결 편안해졌다.
“아무 말이나 한 건데, 이걸 믿는구나 싶어서.”
“……말을 말자. 빨리 밟기나 해.”
난 분위기를 잘 읽는 편이었다. 뒤통수가 홧홧한 느낌에 가까이 있으면 안 될 것만 같아 몸을 일으킨 순간이었다.
“너랑 있고 싶어서 권력 남용한 거야.”
이재현의 키 덕분인지 몸을 일으키고도 여전히 나는 놈의 그림자 안이었다. 그런데 왜일까. 완전히 햇살을 온몸으로 받을 때보다 더 더운 것만 같았다. 콧속으로 들어오는 여름 공기가 들끓어 폐가 타들어 가다 못해 심장이 익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나랑……? 왜?”
최대한 무심하게 되물으며 찰나 눈을 맞추었다. 햇살을 등져 어둡게 보이는 놈의 얼굴엔 옅은 미소가 보였다. 내게 닿은 시선이 해보다 따가워 고개를 숙였다. 울렁거리던 심장이 콩콩, 짧고 빠르게 뛰었고, 온몸이 막대처럼 뻣뻣해졌다.
“음. 너랑 있으면 재밌는 일이 많으니까.”
재밌는 일이 많았던가. 오히려 순간순간 당황했던 기억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하긴, 놈의 웃는 얼굴도 날 당황하게 하는 요소였다. 결국 재밌다는 말은 본인에겐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참 재밌을 것도…….”
그에게서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툭-대야에 걸쳐 놓았던 호스가 내 발에 걸려 하늘로 향했다. 일순 춤추는 뱀처럼 이리저리 공중에 흩뿌려지던 물이 정확히 이재현의 얼굴을 적시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뚝뚝-젖은 머리카락과 턱에서 물이 흘러내렸고, 벌어진 입술 사이에선 축축한 숨이 뱉어졌다.
“야, 미안! 호스가 거기 있던 거 깜박…….”
내리깔린 기다란 속눈썹이 물에 젖어 더 진하게 보였다.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린 놈이 차분히 바닥에서 호스를 집어 들었다. 그러곤 긴 눈초리를 휙 접으며 물었다.
“덥지?”
저의를 파악할 시간이 없었고, 그 눈웃음이 가식적이란 걸 알았을 땐 이미 늦었다. 어차피 내 대답과는 상관없는 물음이기도 했고. 호스의 입구를 막았던 이재현의 손이 떼어지기 무섭게 촤아아-머리 위에서 물이 떨어져 내렸다.
“야…… 내가 미안하다고 했잖아.”
“아니, 막상 젖으니까 시원해서. 좋은 건 나눌수록 배가 된다잖아.”
어금니를 꽉 깨물었지만, 이 더운 날 싸우면 뇌가 익을 것 같아 나오려는 욕을 삼켜 냈다. 얼굴에서 떨어지는 물을 짜증스럽게 털어 내며, 끈덕끈덕 달라붙어 오는 젖은 머리를 올려 묶을 때쯤이었다.
“근데…… 이건 진짜 예상 못 했네.”
혼잣말하는 놈의 시선을 따라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하얀 티셔츠가 젖어 하늘색 속옷이 비치고 있었다.
“아.”
“미안. 보려던 건 아니고 그냥, 그냥.”
이재현은 갑자기 헛기침하며 황급히 눈을 돌렸고,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아직도 가득한 빨랫감을 대야에 더 밀어 넣었다. 창피할 것도 없었다. 노출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 입지는 않지만, 비키니도 흔하게 접할 수 있는데 브래지어가 별건가 싶었다.
“괜찮아. 속옷도 옷인데 뭐. 네 말대로 젖으니까 좀 시원하기도 하고. 그리고 너도 젖어서 다 비쳐.”
둘 다 흰옷을 입어 상황은 매한가지였다. 오늘 할 일이 빨래라는 것을 알았다면 선택하지 않았을 색상이었다. 젖어서 달라붙은 티 위로 새하얗고 탄탄히 근육 잡힌 몸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이미 치료하면서 보았던 몸이지만 보면 안 될 것만 같은 느낌에 고개를 숙였다.
“난 상관없어.”
그의 말은 딱히 내게 보여도 상관없다는 말이었다.
“나도 상관없어.”
오히려 의식하면 더 어색해질 뿐이어서 건조하게 꺼낸 말이었다. 그 말에 꾹꾹 빨랫감을 밟던 발이 멈춰 섰다.
“왜, 힘들어? 나랑 교대할래?”
아까부터 쭉 힘든 일을 해 오던 건 이재현 쪽이었다. 웬만해선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는 놈이라 눈치껏 컨디션을 살펴야 했다. 아까부터 지금까지 내리쬐는 햇빛 아래서 일했으니 지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야, 나와. 이제 내가 할게.”
대답이 없는 그를 밀어내려 늘어진 팔 쪽으로 손을 뻗었을 때였다. 탁-일순 잡혀 당겨진 손목에 대야 안에 들어서기 무섭게 중심을 잃었다. 입에서 튀어나오지 못한 비명이 삼켜지고 코앞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고개를 들었을 땐, 날 거의 안다시피 밀착한 이재현이 보였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본능적으로 뻗은 손은 가슴 부근을 짚고 있었지만, 한껏 놀라 벌렁벌렁한 심장에 그걸 의식할 새도 없이 욕부터 튀어나왔다.
“야이씨! 잡아당기면 어떡해. 넘어질 뻔했잖아.”
“왜 상관없어?”
“뭐?”
놈의 질문에 순간 아까의 대답이 스쳐 지나갔다. 그저 이 상황을 어색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 한 거짓말이었다. 의식한다는 건 꽤 지는 느낌이었으니까.
“넌 내가 남자로 안 보이는 건가?”
이재현은 그 어색한 상황을 피해 보려던 내 노력이 무색하게 정면으로 부딪쳐 왔다. 잡힌 팔목과 그의 몸에 닿은 손이 델 듯 뜨거웠고, 가까운 거리에서 뱉어진 숨이 엉켜 끈적하게 얼굴을 스쳤다. 마주친 눈은 내 작은 떨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움직이지 않아서 순간 가슴 깊이 무섭다고 생각했다.
“더워.”
“…….”
“쓸데없는 장난 말고 나가. 내가 할 테니까.”
푹 고개를 숙이며 놈을 밀어내자 생각보다 순순히 내게서 떨어졌다. 어느샌가 온몸에 열이 올라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대야에서 빠져나간 놈의 다리를 확인하고 나서야 작게 부채질을 하며 오므라든 발가락을 펴 냈다.
“난 먼저 해 둔 거 널고 있을게.”
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다행히 이재현은 몇 가지 옷들을 가지고 점점 멀어졌다. 숙인 고개 탓에 그 모든 걸 그의 허리 아래쪽 새하얀 두 다리로만 확인하고 있었다. 열이 올라 붉어졌을 게 뻔한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 다녀와.”
최대한 권태로운 목소리로 답하며 일부러 철썩철썩 큰 동작으로 발을 움직였지만, 여전히 온 신경은 그의 움직임에 집중돼 있었다. 그대로 멀어지던 발이 잠시 멈췄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어떨지 몰라도 나는 네가 이성으로 보이니까, 조심해 줘.”
“…….”
“왜…… 세상에 믿을 남자 하나 없다는 말도 있잖아.”
착각이라고 생각해 애써 가두어 두었던 의심이 무너진 댐 마냥 흘러넘쳤다. 어쩌면 내가 받아들이는 모든 게 그저 진실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재현이 나를 이성으로 의식하고 있다.’
우리 사이 흐르는 어색한 기류를 설명받은 느낌에 열이 오를 대로 오른 뇌가 과부하로 멈춰 섰고, 그의 시선이 닿았던 몸 곳곳에 털이 쭈뼛쭈뼛 서는 게 느껴졌다. 조금 벌어진 입은 아무 말도 뱉지 못한 채 금붕어처럼 벙긋거렸고, 공기 사이로 흐르는 팽팽한 긴장감이 불편하다 못해 숨이 막혔다.
터벅-터벅- 멀어지는 두 발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달궈진 온몸은 식을 줄을 몰랐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매미 소리가 이명과 뒤엉켜 머리를 울렸다.
“더워서 그런 거야…….”
그것 말고는 이 이상한 열기를 해명할 방법이 없었다.
원장님이 바빠 미뤄 두었던 아이들의 옷과 이불 빨래를 모두 마치고 널기를 끝냈을 땐, 강렬했던 햇빛 대신 은은한 노을이 잔잔히 흘러들고 있었다. 옥상에 올라온 원장님은 우리를 보자마자 눈썹을 늘어뜨리며 안절부절못하셨다.
“죄송해요. 여름날에 빨래라니. 아이고, 땀이…….”
원장님은 머리와 옷이 전부 땀으로 젖었다고 생각하신 모양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어느 정도 마른 옷은 젖은 빨랫감들을 옮기면서 또다시 젖어 버렸다. 결국 아까의 해프닝이 아니었어도 어차피 젖을 운명이었던 것이다.
“얼마나 더우셨으면 얼굴도 빨개지셨어요.”
이어 들려온 말에 황급히 고개를 숙여 볼을 가리듯 온도를 확인했지만, 미적지근한 볼은 제 온도를 되찾은 듯했다. 나는 그제야 그 말이 내가 아닌 이재현에게 던진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 제가 원래 잘 빨개지는 피부라서요. 햇빛을 많이 봐서 그럴 거예요. 아마…….”
힐끔-언뜻 보이는 손부터 젖은 티 너머로 비치는 피부, 그리고 목까지 마디마디 꽃잎처럼 붉어진 살갗이 묘하게 눈길을 끌었다.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고, 훔쳐보고 있다는 걸 자각한 순간 고개를 떨구었다.
‘침을 왜 삼켜. 왜 이래……. 미친 건가.’
원장님과 이재현의 대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지만, 나는 오늘따라 묘하게 이상한 스스로를 분석하고 진정시키느라 바빴다.
“무슨 생각하는데 멍하니 서 있어. 많이 힘들어?”
머릿속을 어지럽힌 주인공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고개를 들었을 땐 원장님이 계시던 자리에 이재현이 서 있었다. 원장님은 이미 내려가신 모양이었다. 대체 얼마나 오래 상념에 빠져 있었던 걸까.
“대충 말리고 저녁 준비 도와줬으면 하시던데.”
이재현은 수건 한 장을 내게 건네며 말했다. 하는 김에 모두 하겠다며 다 빨아서인지 이재현에게 들린 수건은 단 두 장뿐이었다. 최대한 무심하게 수건을 받아 들고 거침없이 팔과 다리를 쓱쓱 닦아 내며 물었다.
“저녁은 뭐 하신대?”
“카레. 배준형이랑 유태영이 어제 장 봐서 왔다고 하더라고.”
“아, 둘 다 그런 쪽으로 섬세한 편이긴 하지.”
자연스러운 대화를 하며 올려 묶었던 젖은 머리로 손을 올린 순간이었다. 텁-던져지듯 가슴 위로 올려진 수건이 찰싹 달라붙었다. 이재현의 것이었다.
“뭐야?”
“난 안 닦아도 되니까 그러고 있어.”
“됐어. 너도 닦아. 난 머리만 닦고 끝낼 거니까.”
얹어진 수건을 다시 건넸고, 순순히 수건을 받아 든 녀석은 나를 지나쳐 뒤쪽에 섰다. 그리고 내 어깨를 스치듯 뻗어진 손에 들린 수건이 또 한 번 목과 가슴 부근을 덮었다. 마치 턱받이를 한 듯한 모양새였다.
“널 위해서가 아니라 날 위해서. 자꾸 눈이 가서 힘들거든.”
갑작스레 귓가를 울린 낮은 목소리에 움찔움찔 작게 어깨를 떨었다. 매듭을 짓는 건지 목에 스치는 수건과 미적지근한 손이 신경 쓰였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뒤에서 느껴지는 놈의 움직임에 긴장해 있을 때쯤, 묶였던 머리가 스르륵 풀어졌다.
“머리 말린다며. 내가 해 줄게.”
여전히 가까이에서 들리는 목소리. 머리끝을 매만지는 손길이 등에 닿아 간질간질 묘한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허리가 곧게 세워지고, 뒤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몸을 데웠다. 아, 역시 안 되겠다.
“……내가 할 거야.”
“내가 하게 해 줘.”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손이 날개뼈를 스쳐 지나갔을 때, 더 참지 못하고 등을 돌려 마주 보았다. 이재현은 어딘가 조금 나른해진 눈을 하고 태연히 내 손에 들린 수건을 뺏어 갔다.
“너는 왜 남의 머리를!”
언성을 높였으나.
“그냥 만져 보고 싶어서.”
돌아온 답에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는 당황해 굳어 버린 내 어깨를 잡아 다시 돌려세웠고, 곧 머리를 쓸어내리는 조심스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그래, 자기 머리는 짧으니까 긴 머리를 만져 보고 싶을 수도 있지. 납득하고 나니 몸에 힘이 빠졌고 마음도 편안해졌다. 두피를 살살 문지르는 섬세한 손길에 강아지의 기분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생소했다.
‘하긴, 남이 머리 말려 줄 일이 얼마나 있겠어.’
그리고 그 희박한 가능성의 경험을 이재현을 통해 하고 있었다. 굉장히 아낌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 만큼 나른하고 포근한 감각이었다.
머리카락에 스치는 온기에 자연스레 김세한이 떠올랐다. 그도 곧잘 내 머리를 넘기고 쓰다듬었기 때문이다. 날 만지는 손은 늘 무언가를 꾹꾹 눌러 담아 억누르고 있는 듯 느껴져서 편안하기보단 속이 울렁댔다. 김세한은 늘 파도치고 있었고, 난 그걸 받아 줄 자신이 없었고, 또 서로가 그걸 알고 있어서 늘 인내하는 느낌.
그와 다르게 이재현은 호수처럼 늘 잔잔한 느낌이었다. 굳이 받아 낸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피로하지 않았고, 위험하다고 느껴지지 않아서 밭 끝부터 서서히 젖어 드는데도 가만히 서 있게 됐다. 가끔 당황하게 만들긴 하지만 대체로 마음이 편했다. 딱히 보상해 주지 않아도 되는 친절이라고 여겨져서일까.
“엄청 얌전히 있네. 자는 거 아니지?”
나른해져 눈을 감고 있긴 했다.
“너 여동생 있어?”
“아니, 외동인데.”
“아니면 연애를 엄청 많이 해 봤나 보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뭔가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 것 같아서.”
풋, 뒤에서 숨 섞인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음……. 애인이랑은 별개로 나도 이런 경험은 처음인데. 다른 사람 머리 만질 일이 얼마나 있겠어.”
마주 보지 않아서인지, 머리에 닿는 손이 다정해서인지, 따뜻한 해 질 녘 풍경 때문인지 그가 주던 긴장감이 완전히 사라지고 노곤한 감각만이 남았다. 돌이켜 보면 이재현은 힘든 일을 도맡아 하고, 여자들을 먼저 배려하고, 은근히 잘 웃는다.
“어릴 때 난 네가 왜 인기가 많나 했는데……. 너 좀 그러네.”
그 얼굴로 웃으면서 베푸는 친절이라. 학창 시절, 일주일에 한 번은 불려 나간다던 소문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가 좀 그래?”
어딘가 긴장이 담긴 느낌의 물음이었다.
“좀 질질 흘리…… 아니다. 미안, 표현이 좀 저급했다.”
“…….”
“음……. 과도하게 친절하다고. 물론 넌 자각 못 했겠지만, 이성을 그런 식으로 대하면 오해가 종종 생기니까. 아, 난 그런 오해 안 하니까 걱정하지 말고.”
“…….”
“쓰읍. 혹시 친절한 것도 인기 관리 차원에서 그러는 거야? 너 은근 그런 거 신경 쓰잖아. 맞네, 저번에 안경도…….”
정확히 맞춰지는 퍼즐이 만족스러워 고개를 끄덕일 때쯤, 어느샌가 머리를 쓸어내리던 손은 멈춰있었다. 하아-낮은 한숨 소리가 들려오고, 지금까지의 조심스러웠던 손길과 달리 머리를 헝클어트린 놈이 머리 위에 수건을 얹어 놓고 떨어졌다.
“야! 뭐야, 갑자기.”
나는 얼굴을 덮은 수건을 잡아 내리며 뒤돌았고, 이재현은 눈을 반쯤 뜬 채 노골적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냥. 너 미워서.”
어린아이 같은 표현, 어디선가 본 적 있는 표정.
“야, 너 삐쳤어?”
“…….”
“뭘 그런 거로 삐쳐. 내가 너 어장 관리하는 거 아니냐고 해서? 야. 난 어장 관리 나쁘게 생각 안 해. 그게 다르게 생각하면 은근 능력이라니까? 그게 또 관리, 경영…….”
달래려고 한 말이었지만 좀 더 노골적인 단어가 쓰여서일까. 놈의 표정이 눈에 띄게 더 안 좋아졌다.
“너 진짜 짜증 난다.”
언제나 내가 그에게 했던 말을 이번엔 듣고 있었다. 질린다는 듯 오만상을 쓰고 돌아서는 이재현의 손목을 잡아 세웠다. 삐친 것치고는 쉽게 몸을 돌렸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너 진짜 그대로 가게?”
“뭐.”
“아무리 여름이라도 이따 추울걸.”
나는 손에 들린 젖은 수건을 매만지다 한쪽으로 던져 놓았다. 조금 어리둥절한 얼굴로 날 바라보는 놈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하자 순순히 내 앞으로 다가왔다. 오직 삐딱하게 짚은 짝다리가 놈의 불만을 표현하고 있을 뿐, 말은 고분고분 잘 듣고 있었다. 나는 턱받이처럼 목에 둘린 수건을 풀어내었다.
“야…….”
놈은 어김없이 눈을 돌렸다. 시선이 간다면서 피하는 경우는 뭘까. 그냥 이성인 날 배려해 주는 걸지도 몰랐다. 내가 그의 시선을 불쾌하게 느낄지도 모를 일이니까. 한 손으로 멱살을 잡아 내리자 어정쩡하게 허리를 굽힌 그와 눈높이가 맞았다.
“눈 감아.”
“…….”
마주친 눈이 당황스러움을 담아 휘청휘청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젖은 티를 펄럭이며 말했다.
“보기 싫으면 네가 눈 감으면 되잖아.”
조금 가늘어지던 눈이 순순히 내리깔렸고, 이내 완전히 감겼다. 흰 피부 위에 살포시 깔린 짙은 속눈썹이 부러울 만큼이나 풍성해서 순식간에 시선을 끌었다. 나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젖은 머리를 털어 내듯 수건으로 닦아 냈다. 그가 내게 해 줬던 것처럼 조심스러운 손길은 아니었고, 강아지 털을 말려 줄 때처럼 투박한 손길이었다. 그게 불편한 건지 이재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해.”
그는 질끈 눈을 감은 채 내 거친 손길을 감내하는 듯 보였다.
“그냥 받은 거 갚는 거지. 친절을 받았으니까 나도 주는 거야.”
“그럼 살살 해 줘.”
“너도 아까 이렇게 했잖아!”
언성을 높이자.
“네가 나 어장 관리한다며!”
놈도 언성을 높여 왔다.
“아, 역시 그것 때문에 삐친 거였어. 삐돌이야, 완전.”
“삐돌이…….”
이재현은 또 다른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입술을 씰룩이며 코로 슝슝 숨을 뱉어 냈다. 또 ‘허.’라는 어이없다는 투의 외마디를 뱉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크게 내쉬고, 손에 힘을 빼 천천히 머리를 쓸어내렸다. 놈이 해 준 만큼 해 준다는 의미에서였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를 가득 채웠다가 빠져나가기를 반복했고, 익숙한 샴푸 향이 코끝을 스쳤다. 잔뜩 균열이 생겼던 그의 얼굴도 한껏 느슨해져 편안해 보였고, 생각보다 기분이 좋은 건지 조금 더 머리를 내어주듯 고개를 숙였다. 쓰다듬어 달라고 요구하는 강아지 같았다.
“난 아무한테나 친절하지 않아.”
나지막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웃음이 흘렀다. 역시 아직도 아까의 분이 안 풀린 모양이다.
“그래? 남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할걸.”
“삐치지도 않고.”
“지금 삐쳐 계시잖아요.”
탁, 머리 위에 올려진 내 손 위로 이재현의 손이 얹어졌다. 놈의 손끝은 손등부터 시작해 손가락 마디와 손톱 형태를 파악하듯 움직였다. 그 온기가 간지러워 그만 거두려던 순간, 내 손을 감싼 커다란 손이 꾸욱 자신의 머리 위로 내리눌렀다. 떨어지지 말라는 신호쯤 되는 것 같았다.
‘아, 어쩌다 이 모양이 됐지.’
또다시 놈이 쳐 놓은 긴장감이라는 덫에 갇혀 버렸다. 꿀꺽 침을 삼킬 때쯤, 이재현의 낮은 한숨이 들려왔다. 스륵 들린 얼굴은 노을 때문인지 조금 붉게 보였고, 나를 향한 눈도 조금 흔들리는 듯 보였다.
“구재희.”
“……뭐?”
“너 눈치 없다는 말 자주 들었지?”
“뭐래. 눈치 하면 나지. 눈치로 살아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자신하는 내게 이재현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뺏어 들 듯 수건을 가져간 놈이 그제야 내 손을 놔주며 접었던 허리를 폈다. 무심하게 자신의 목 부근을 닦아 내는 그의 시선은 바로 내 옆 허공에 닿아 있었다. 일부러 눈을 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만큼 부자연스러운 시선 처리였다.
“나보고 좀 깬다며. 예상하던 거랑 달라서.”
“어, 뭐 좀?”
그저 내가 생각하던 이미지와 차이가 있어서 한 말이었다.
“내가 요즘답지 않게 당황해서, 초조해져서, 몸도 마음도 생각대로 안 돼서, 나도 나답지 않다고 느끼는 중이야.”
“……어.”
“네 앞에서만 그래.”
오늘 이재현은 역시 어딘가 이상했다. 이전에도 이따금 예상치 못한 말로 날 당황하게 하곤 했지만, 지금은 확실히 좀 더 노골적인 느낌이었다. 생소한 상황에 혼란스러워 머리가 욱신거렸다.
‘대체 왜 이러는 걸까. 무슨 대답을 바라는 거지. 대체 난 뭘 어떻게 하면 돼?’
고개를 푹 숙인 그가 수건으로 얼굴을 감쌌고, 한참 뒤에 내려진 수건 너머로 날 마주한 얼굴은 노을 탓이라 할 수 없을 만큼 빨개져 있었다.
“그러니까. 이런 건 너만 아는 나야.”
젠장. 역시 이런 감각은 싫다. 감길 듯하면서도 뚫어져라 날 응시하는 눈에 내 얼굴에도 노을이 내려앉을 것만 같았다. 볼썽사납게 뛰어 오는 심장이 버거웠고, 팔다리에 소름이 돋아 당장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의 말은 마치 날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듯 들렸다. 작가이면서 같은 ‘세계’에서 살던 사람이라 그런지 내게 마음을 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를 꽤 가까운 동료로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친구? 우린 어느새 정을 나누는 친구가 된 건가. 이성, 의식, 특별함……. 또 한 가지의 가능성이 떠올랐지만 따져 볼수록 말이 안 돼 애써 무시했다.
“하아…… 더워.”
숨 섞인 목소리를 뱉은 이재현은 아직 새빨간 얼굴을 다시 수건에 묻으며 몸을 돌렸다.
“내려가자. 원장님 기다리시겠다.”
날 재촉하는 듯한 목소리에 조금 멍한 정신을 다잡았다.
“응. 그래, 가야지.”
순간 숨 쉬는 방법을 까먹어 버린 듯했다. 어떻게 걷는지도. 그 순간엔 오직 이상하리만큼 여유 없어 보이는 이재현의 얼굴을 눈에 담는 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렇게 보지 마.”
“……왜?”
힐끔, 나를 돌아본 이재현이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창피해.”
***
막막하기만 했던 보육원 봉사는 익숙해져만 갔다. 수요일이면 어김없이 병원 대신 보육원으로 출근했고, 데면데면하던 아이들과도 가면 없이 대화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내가 발전한 것보다 아이들이 경계를 푼 게 가장 큰 요인이었다. 모두가 모인 저녁 식사 자리에선 어느 정도 익숙해진 아이들의 이름이 들려왔다.
“태현이가 진짜 말 안 듣지 않냐? 어린애랑 진심으로 싸울 뻔했다니까?”
“난 태현이보다 동희. 애들 다 자는데 걔만 쌩쌩해. 옛날이었으면 무조건 체육계 유망주인 건데.”
“맞아. 동희…… 걔는 힘도 세. 미래가 기대되지 않냐? 각성하면 무조건 공격형이다.”
걱정이었던 원장님의 정신 건강은 빠르게 회복되었고, 돈을 투자한 만큼 아이들의 식사 질도 올라갔다. 결국 보육원을 피로 물들였던 건 관심과 돈의 부재였던 것이 드러난 셈이었다.
“구재희, 병원 쪽은 어때? 힘들진 않아?”
박도윤이 어울리지도 않는 다정한 말투로 물어 왔다. 내가 제일 먼저 보육원을 돕자는 말을 꺼냈다는 걸 안 이후로 쭉 이 모양이었다. 그 적응되지 않는 다정함이 불편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식탁에 미지근한 침묵이 흘렀다.
“뭐…… 안 힘들어. 아예 말 못한다고 소문난 이후로 사람들이 다친 부위만 내밀고, 돈 쥐여 주고 가거든. 치료 기계가 돼 버린 느낌?”
“……그렇게 운영해도 괜찮아?”
“왜? 스몰 토크 없어서 편한데.”
“뭐. 네가 편하면 그만이다만.”
물론 소통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정말 날 기계 취급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보통 고통에 인상을 찌푸리고 들어왔던 환자가 이후 편안해진 표정으로 나와 눈을 맞추고 살짝 고개를 숙인다거나, 감은 눈으로 들어온 환자가 눈을 뜨고 고맙다는 듯이 손을 잡아 준다거나. 아주 조용하지만 상냥한 인사들을 꽤 많이 받았고, 덕분에 사람의 눈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를 배우게 되었다.
“너희 쪽은 어떤데. 인원 빠지니까 힘들지 않아?”
내 질문에 박도윤은 이재현 쪽을 바라보다 어깨를 으쓱였다.
“뭐. 이성재가 생각해서 짠 거겠지만, 남은 인원으로 어떻게든 되더라고. 권지우가 없으면 유태영이 보조해 주니까.”
밸런스를 고려했다더니, 성격이 아니라 사냥 쪽 포지션 밸런스였던 모양이었다. 힐끔-이재현을 바라보다 일순 눈이 마주쳤고, 난 황급히 부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아…… 진짜 돌겠네.’
난 요즘 이재현을 피하고 있었다. 이상하리만큼 놈답지 않았던 보육원 옥상에서의 기억이 자꾸만 떠오르는 탓이었다. 젖었던 몸, 뜨거웠던 얼굴, 닿았던 손……. 다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그날 이후 얼굴을 마주 볼 수 없게 되었다.
평소 낮에는 각자 일을 하고, 만날 일은 이렇게 아침저녁 식사 자리뿐이어서 고개를 숙이고 밥만 먹으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같이 일해야 하는 보육원이었지만, 그것도 내내 원장님과 붙어 다니면서 쉴 새 없이 아이들에게 시달리니 해결되었다. 말하자면 ‘나는 지금 매우 바쁘다.’를 어필하며 도망치는 것이었다.
그보다 가장 큰 문제는 놈이 직접 말을 걸어 오는 경우였다. 식사를 마친 팀원들이 슬슬 뒷정리를 시작했고, 옆얼굴로 느껴지는 시선에 이재현이 말을 걸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구…….”
백 퍼센트다. 저놈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올 것이다. 입에서 나온 첫 글자에 이미 머릿속은 분주해진 지 오래였다. 모든 게 찰나의 순간이었다.
“야! 유태영!”
나는 나가려는 듯 겉옷을 챙겨 입은 유태영을 불러 세웠다. 생각보다 크게 나온 목소리에 모두가 하나둘 나를 돌아보았다.
“어…… 왜?”
“너 짹짹이 보러 가는 거지? 같이 가.”
“그래…… 근데 갑자기 왜…….”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한 얼굴이었지만 이내 말을 더듬으며 얼떨떨하게 승낙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의문을 담은 눈으로 이유를 물어 왔다.
“왜긴 왜야. 보고 싶어서지.”
유태영이 고개를 갸웃하다 이내 끄덕였다. 이상할 만했다. 짹짹이의 거처가 이 집 옥상에서 병원 건물 3층으로 옮겨진 이후로 매일 짹짹이와 인사하곤 했기 때문이다. 하루도 안 돼 보고 싶다니, 남들은 짹짹이와 내가 아주 애틋한 사이라고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날 바라보는 이재현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대로 지나쳐 유태영을 따라나섰다. 문을 나서자마자 유태영은 자신의 겉옷을 건넸다. 이렇게 이재현을 피하는 데에 유태영을 쓰는 것도 세 번째였다.
“뭐가 그렇게 급해서 맨날 옷도 제대로 안 입고 나와. 여름이라도 밤엔 추워. 감기 걸린다?”
“……어, 고마워.”
앞서가는 유태영을 따라 발을 맞추었을 때, 그는 넌지시 물어 왔다.
“그래서 피하는 건 누군데. 박도윤? 이성재?”
자연스럽다고 생각했었는데 꽤 티가 나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는 건 이재현 본인도 내가 피하고 있다는 걸 느꼈을지도…….
“어……. 음.”
“대답하기 싫으면 말고. 아무튼, 나야 같이 가면 좋지만, 남들은 오해할지도 몰라.”
“무슨 오해?”
“권지우가 자꾸 너랑 뭐 있냐고 묻는다고. 왜 대상이 너랑 이성재에서 나로 옮겨 왔는지 몰라도.”
이성이 둘만의 시간을 보낸다는 건, 남이 보기엔 역시 그렇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유태영의 말에 어깨에 걸쳐진 그의 겉옷을 매만지며 물었다.
“음……. 넌 이런 친절, 아무한테나 베푸는 거지?”
“아무한테나 그러지는 않는 것 같은데? 남자 놈들한테는 이런 적 없으니까.”
친절. 유태영이 타인에게 베풀 수 있는 친절의 범위는 과연 어디까지일까.
“야. 만약 권지우가 은빛 고래를 잡다가 다 젖어 왔어. 그럼…… 뭐 머리 말려 주거나 그럴 거야?”
내가 가정한 상황을 찬찬히 따라오던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왜 굳이 내가? 권지우 팔이 다친 상황이야?”
역시 그 친절은 과도한 친절이었던 건가.
“그리고 만약 내가 해 준다 그래도……. 오히려 권지우가 칠색 팔색을 하면서 화낼걸.”
거기다 결국은 더 강하게 거절 못 하고 가만히 머리를 내준 나도…… 전부 이상한 상황이었다.
“근데 그건 왜 물어봐? 누가 너 머리 말려 줬어? 남자?”
“…….”
유태영은 은근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하긴 갑자기 이런 걸 물으면 보통 질문한 본인과 관련되어 있을 확률이 크기도 했고. 대답이 없는 걸 곧 긍정의 의미로 생각했는지 그는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개수작이네.”
그러곤 간단한 정리를 해 왔다. ‘개수작.’ 이재현과 매치가 되지 않는 단어였다.
“마음 있으면 받아 주고, 아니면 아예 쳐 내. 계속 받아 주면 말려든다?”
“……그런 종류는 아닐 텐데.”
“뭐가 아니야. 아주 클래식한 수작인데. 누군지 몰라도, 나 참…… 존경스러울 만큼 대범하다.”
궁금할 만도 한데, 유태영은 누군지 캐묻지 않았다. 어쩌면 병원에서 만난 환자로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병원에서의 일은 나의 사생활 그 자체였으니까. 다시 떠오른 이재현의 얼굴에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수작 부리고 할 놈이 아니라니까? 날 꼬셔야 할 이유도 없고.”
“아, 너 꼬시려고 하는 거 맞는다니까. 어느 남자가 외간 여자 머리를 말려 주냐? 좋아하니까 닿고 싶은 거잖아.”
“좀…… 특이한 사람일 수 있잖아. 유별나게 다정하다거나, 배려가 몸에…….”
“예외 없음.”
유태영은 다시 간단히 내 말을 끊어 내었다. 그러곤 무언가 생각 난 듯 덧붙였다.
“아아. 그놈이 게이라서 널 아예 그런 대상으로 안 보고 있으면 가능하겠다. 뭐…… 친절의 범위에서…….”
순간 모든 여자아이의 고백을 거절했던 그놈의 과거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모든 게 완벽한 남자의 문제점은 ‘게이’라는 점이라는 말을 언뜻 들은 것도 같았다. 이재현, 설마.
“아니면 성불구자라거나, 무성애자라거나. 그만큼 희박…….”
“진짜…… 그쪽으로는 생각도 못 했네. 덕분에 의문이 풀린 거 같아.”
개운하게 내뱉은 말에 유태영은 혼잣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의문 풀리는 타이밍이 이상한데. 뭔지 몰라도 너 같은 눈치 밥 말아 먹은 여자 좋아해서 힘들겠다, 그 남자도.”
그 말에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진짜 아니라니까. 날 왜 좋아해.”
이재현이 날 좋아할 만한 이유가 없었다. 아니, 상대가 누구인지 떠나서 애초에 나는 사랑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고, 그것은 스스로 생각해도 당연하였다. 주제 파악은 제대로 하고 있었다.
“야, 베프.”
유태영이 이름 대신 애칭으로 불러 왔다. 우리가 가까워지면서 이따금 부르게 된 칭호였다.
“안 그렇게 생겨선 자존감이 너무 낮네. 너 꽤 괜찮은 사람이야. 그러니까 나랑 베프인 거고. 게다가 너, 그 김세한이 좋아하던 여자잖아.”
갑작스레 꺼내진 이름에 마음이 다른 쪽으로 무거워졌다.
“네가 매력 있으니까 좋아했겠지. 김세한이면 솔직히 주변에 깔린 게 여자일 텐데.”
“아냐. 그건 그냥…….”
김세한이 날 좋아했다는 건 이제 인정해야 했다. 그런데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가 나를 왜 좋아하는지. 옆에 두다 보니 정이 든 탓이었을까. 지금 와서 생각해도 기이한 관계였다.
- 난 네가 지금 이 상황에 관련해 뭔가를 알고 있는 거 같거든.
아마 날 처음 잡아 둔 이유는 내게 수상함을 느껴서 일 것이고.
- 넌 역시 특이해.
내 억지스러운 입맞춤에 화답한 이유도 아마 호기심의 연장선일 것이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되는데 그다음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같이 보낸 3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는 내게 아무것도 캐묻지 않았다. 내가 수상하다는 걸 알았고, 그걸 눈치채고 있었다면 충분히 더 오류를 찾아내고 물어왔을 법도 한데 말이다.
‘넌 대체 왜…….’
꼬리를 무는 의문에 말을 잇지 못하자 아, 하고 짧게 탄성을 뱉은 유태영이 어색하게 눈을 굴렸다.
“미안, 괜히 또 이름 꺼내선.”
“아냐.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아무튼, 대충 상황이 눈에 보여서 말하는 건데. 뭐, 단순 잠자리 상대가 필요해서 그런 걸 수도 있으니까, 좀 구리다 싶으면 냉정하게 쳐 내. 너도 원한다면 할 말은 없다만 그런 가벼운 만남 원하는 놈치고 좋은 놈이 없어서 그래.”
나름 진지한 조언에 피식 웃음이 나면서도 순간 몽글몽글한 기분이 들었다. 진심 어린 걱정을 듣는다는 건 꽤 즐거웠다.
“응, 고마워. 잘 생각해 볼게,”
***
화요일. 내일이면 이재현과 보육원을 가야 하는 날이었지만, 어제 유태영과의 대화 때문일까. 어쩐지 이제 피하지 않아도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긴 이재현이 누굴 좋아하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건 사실이었다. 내가 생각하던 ‘그’ 이미지엔. 거기다 대상이 나라면…… 역시 납득이 되지 않았다.
- 넌 어떨지 몰라도 나는 네가 이성으로 보이니까, 조심해 줘.
아주 만약 유태영의 말대로 단순 잠자리 상대가 필요하더라도 굳이 나여야 할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아고라만 가도 또래 여자는 찾을 수 있고, 대부분은 이재현에게 호감을 품고 있을 텐데 말이다. 굳이 같은 팀원인 나를……? 너무 위험이 큰 게임 아닌가.
- 네 앞에서만 그래.
이따금 얼굴을 붉히는 건……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하지만 이런 고민을 한다 한들, 내가 외면하려는 예감이 사실이라 한들 쓸데없었다.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든 간에 앞으로 이재현이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냥 넘어갈 일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나는 아무 일도 생기지 않기를 빌고 있었다. 더는 누군가 때문에 감정이 고양되고 가라앉는 경험을 하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 상대를 실망하게 하는 게 겁이 났다. 이 이상은 가까워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게 더 원하면 분명 서로 힘들어질 테니.
“아……. 한가하네.”
오후 다섯 시, 창문 밖은 비가 내려서인지 더 늦은 시간처럼 어두웠다. 저녁 여덟 시까지는 병원에 있어야 했지만, 날씨 탓인지 오늘따라 손님도 없어서 종일 비 내리는 창을 무료하게 구경하다 책을 읽어야 했다.
‘삐이이-’
멀리서 들려오는 짹짹이의 울음소리가 유태영이 돌아왔음을 알렸다. 일이 끝나면 모두 곧장 집으로 향하는 것과 다르게 유태영은 피닉스를 병원 3층에 놓고 가기 때문에 내겐 놈들의 퇴근과 무사 귀환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일이 끝났나 보네.’
돌아온 피닉스를 마중이라도 하려고 몸을 일으킨 순간이었다. 복도를 내달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혹시나 다른 손님일까 하는 마음에 가면을 썼다. 발걸음 소리로 보아 꽤 다급한 느낌이었다.
‘많이 다친 걸까?’
드르륵-문이 열리고,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뚝뚝-바닥으로 떨어지는 빗물과 피, 익숙한 유태영의 얼굴이 보였고, 그의 등엔 낯익은 머리통이 늘어져 있었다.
이재현이었다.
“야, 얘 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피에서 특유의 쇠 냄새가 풍겨 왔고, 하얗게 질린 입술이 낮은 신음을 뱉어 낸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눈앞이 깜깜해지고 순간 머리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상황 파악이 되기도 전에 나는 이재현을 간이침대에 눕혔다. 급한 상황 같았기 때문이다. 침대에 눕혀진 이재현은 연신 신음을 흘렸고, 다리와 어깨에선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는 판단이 들고 나서야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새로운 몬스터라도 나타난 거야?”
“아니. 한눈팔았지 뭐. 이놈 수면 시간 보면 무리도 아니야……. 에휴. 아무튼 데려다 놨으니까 난 다시 간다.”
“어디 가는데?”
위급한 느낌으로 등장해 태연히 등을 돌려 나가는 녀석에게 소리치듯 묻자 닫히는 문 사이로 고개만 빼꼼 내밀어 답했다.
“아직 일 안 끝났어. 애들도 현장에 있고. 뭐, 별일 없을 거 같긴 한데. 아무튼…….”
말도 다 끝내지 않은 채 유태영이 문을 닫고 사라졌다. 닫힌 문 너머로 복도를 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박도윤이 공식적인 1위가 된 영향이 정말 있는 건지 돈 되는 일이 몰려들었고, 이 인원수로 소화하기엔 꽤 고된 작업인 모양이었다.
‘에휴…….’
치료하면 그만이었지만 팀원들이 다치는 건 언제나 가슴이 철렁철렁했다. 피가 새어 나오는 다리는 잘리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로 깊게 베여 있었다. 다른 건 생각할 겨를 없이 더 위급해 보이는 다리를 먼저 치료하고 어깨를 살필 때쯤이었다.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이재현이 어느새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살 만한가 보지? 아픈 게 다리 쪽이었나? 여유 있으면 옷 네가 벗어 봐. 어깨 치료해 줄 테니까.”
“여유 없어. 아파.”
“없는 사람치곤 대답이 빠르네.”
사실상 놈의 상의를 벗기는 일도 내 몫이라는 것이었다. 하나하나 단추를 풀어낼 때마다 눈을 질끈 감은 이재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많이 아픈 건가.’
누워 있는 놈의 단추를 풀어내곤 어깨를 살폈다. 어리광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겉으로 보는 것보다 꽤 심한 상처였다.
“뭐야, 잘못하면 위험할 뻔했네.”
빛을 뿜는 손이 망설임 없이 놈의 어깨를 감쌌고, 곧 살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이재현의 찌푸려졌던 미간도 점점 평온을 되찾아 갔다.
“그러게 잠 좀 자. 맨날 뭐 하길래 잠이 부족해?”
잔소리하듯 뱉어 낸 질문에, 살포시 눈을 감고 크게 한숨을 내쉰 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누구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서.”
장난기 없는 목소리였다. ‘누구’라는 게 곧 나일 거라는 예감에 애써 못 들은 척 무시하며 치료를 이어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치료가 끝나 떨어지려는 내 손을 그가 낚아채듯 잡아 세웠다.
“요즘 나 피하는 거 맞지?”
빠져나갈 구멍 하나 내어주지 않는 물음에 마른침을 삼켰다. 얼굴 근육이 뻣뻣이 굳어져서 당황스러움을 감출 여력이 없었고, 내게 닿은 시선이 따가워 식은땀이 흘렀다.
“이거…… 놔.”
잡힌 손을 어떻게든 빼내려 했지만, 놈은 더 꽉 옭아맬 뿐 놓아주지 않았다.
“봐. 또 도망가려고 하네.”
“아니야.”
“뭐가 아닌데. 요새 나랑 눈도 안 마주치면서.”
“아 글쎄 아니라니까.”
“정말 아니라면 증명해 봐.”
잡힌 손이 일순 세게 당겨졌다. 크게 휘청여 중심을 잃은 몸이 반사적으로 이재현의 가슴 언저리를 짚었다. 젖은 몸, 손바닥을 타고 흘러들어 온 익숙한 온기가 보육원 옥상에서의 기억을 되살렸다. 이재현은 남은 손으로 내가 쓰고 있던 가면을 벗겨 냈고, 그에 보호막이 사라진 듯 순간 몸이 움츠러들었다. 느릿하게 깜박이는 눈이 순식간에 나를 잡아맸다. 불편한 긴장감에 숨이 막혔지만, 놈이 말하는 ‘증명’을 위해선 당황하지 않고 제대로 마주 봐야 했다.
쿵. 쿵. 쿵.
의도치 않게 닿아 있는 손바닥이 그의 심장 박동을 읽었고, 그 진동이 내게도 영향을 주고 있었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30초 정도가 아무 말 없이 흘러갔다. 덤덤하게 눈을 깜박일수록 오히려 이재현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크게 숨을 내쉬고, 그의 손에 들린 가면을 뺏어 다시 얼굴에 썼다.
“자, 이제 됐지?”
대답을 대신하듯 손목을 잡고 있던 손이 스르륵 내게서 떨어졌다.
“치사해.”
눈을 감은 놈이 이해 못 할 한마디를 내뱉고 상체를 일으켰다. 나는 두어 발 물러나 설 자리를 주었고, 단추를 잠글 줄만 알았던 그는 오히려 단추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왜 벗어?”
더 드러나는 놈의 몸에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눈을 돌리며 물었다.
“다 젖었잖아. 피도 묻었고, 갈아입어야지.”
“현장 다시 안 가 봐도 돼?”
“어. 거의 마무리되던 때라, 지금 가면 끝나 있을걸.”
이재현은 몸을 일으키며 침대를 돌아보았다. 젖어 있던 옷 탓인지 침대도 피와 빗물로 얼룩져 있었다.
“기다려. 옷 갈아입고 침구도 새로 갈아 둘게.”
그는 짧은 말을 남긴 채 그대로 나를 지나쳐 진료실을 나섰다. 닫힌 문 너머로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2층으로 향하는 모양이었다. 2층은 배준형과 김성민이 가져다 놓은 다트판, 게임기, 당구대, 소파, 그밖에 생필품과 먹을거리 등이 있는 공간이었다. 요즘은 바빠서 거의 이용하지 않는 팀원들의 휴게실이기도 했다.
‘기다리라는 건…… 다시 오겠다는 건가?’
의자에 앉아 읽던 책을 들었지만, 어째선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겨우 한 장을 넘겼을 때,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검은 티셔츠에 빨간 추리닝 바지를 걸친 이재현이 그와 대비되는 흰 침구를 들고 들어왔다.
“그 옷…… 김성민 거지.”
“어. 있는 게 이거밖에 없던데. 이상해?”
“아니.”
늘 정돈된 느낌의 옷만 입는 놈이 김성민의 옷을 입자 새로운 느낌이었다. 날 티 나지만 어딘가 그것도 나름 잘 어울리는 듯했다.
빠르게 침구를 갈아 낸 녀석이 젖은 침구를 가지고 진료실을 나섰지만, 이내 또 안으로 들어왔다.
“뭐야?”
되돌아온 이유를 알 수 없어 물었고, 놈은 대꾸 없이 새 침구가 깔린 침대에 누워 끔뻑끔뻑 느릿하게 깜박이는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다 뒤늦게 답해 왔다.
“좀 자려고.”
물론 답이라기엔 설득력이 없는 말이었다.
“집에 안 가?”
“밖에 비 오잖아. 좀 더 기다리다 갈래. 너 끝날 때까지.”
“끝나려면 아직 두 시간 이상 남았어. 그리고 잘 거면 다른 병실이나 2층에 가도…….”
“여기가 좋아. 어차피 오늘은 오는 손님도 없을 거 같고…… 누가 오면 그때 나갈게.”
다른 이유였으면 무언가 반박을 했을 거 같은데. 좋다는 말에는 반론할 거리를 찾을 수 없어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그걸 알아서 쓴 단어일지도 몰랐다. 이미 깨져 버린 집중력에 책을 덮은 순간이었다.
[구재희, 이성재 상태는 어때?]
무전기에서 유태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 관찰하듯 바라보는 이재현을 확인하고 무전기를 들었다.
“멀쩡해.”
[다행이네. 여기도 다 마무리돼 가긴 하는데…… 아.]
“뭐야? 무슨 일 있어?”
[별일은 아니고…… 아무튼, 이따 보자.]
별일이 아니라기엔 무전기 너머에서 고함이 오가고 있었다. 나는 조용해진 무전기를 내려다보다 이재현에게 눈썹을 까닥여 보였다.
“무슨 일 난 모양인데 지금. 진짜 안 가 봐도 되겠어?”
“유태영이 나 의식해서 말을 아낀 거면…… 예상되는 게 있긴 한데.”
이재현이 한숨을 내쉬며 눈을 굴렸다. 바깥 상황은 전혀 알지 못했기에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뭔데?”
“묘하게 동선이 겹치는 길드가 있었거든. 시비 거는 건지 스킬도 빗나가게 쏴서 박도윤이 맞을 뻔하기도 했고.”
무질서인 아포칼립스를 배경으로 하는 만큼 어느 정도 이름을 알린 우리에게도 적이 생긴다고 한들 이상할 게 없었다.
“뭐야? 아는 길드야?”
“모르는 얼굴들인데 실력은 꽤 괜찮더라. 아마 밥그릇 싸움인 거 같은데, 뭐 내가 있으면 말렸겠지만…… 아까부터 김성민이 으르렁거리긴 했어.”
단순하고 다혈질인 두 인간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상대방이 도발하면 곧바로 맞도발할 김성민과 지고서는 못 사는 박도윤. 두 캐릭터를 잘 아는 나에게 앞으로의 상황은 안 봐도 비디오였다.
“싸우겠네. 배준형은 덩달아 화낼 테고, 말릴 사람은 유태영, 권지우 정도인가.”
“음…… 글쎄. 다쳐 오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가끔 무력엔 무력으로 대응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
이재현의 대답에 그제야 느긋한 태도가 이해되었다.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거구나?”
“당하고만 있을 필요 있나 싶기도 하고.”
무력에는 무력이라. 하긴 이재현도 비슷한 느낌이긴 했다. 김세한과 대련할 때도 그랬고, 3학년 선배 앞에서도 그랬고, 의외로 싸움을 피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가능하면 갈등을 피하려는 나와는 대비되는 면이었다.
현장 상황을 더 물으려던 마음이 꺾여 무전기를 내려놓은 순간이었다. 눈앞이 어두워진다 싶더니, 몇 번 깜박이던 전등이 이내 꺼졌다. 현재 돌아가는 발전소에서 만드는 전기량은 한계가 있었고, 때문에 아고라에서 벗어난 곳에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덤덤히 서랍에서 라이터를 꺼내 들었다. 책상 위에 있는 향초에 불을 붙이자 방 안을 은은하게 비출 정도는 되었다. 나는 이재현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너 자라고 불도 꺼 줬네. 자. 끝날 시간 되면 깨워 줄게.”
“넌 뭐 하게? 이 정도 밝기면…… 이제 책도 못 읽잖아.”
“뭐, 그렇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긴 했다. 놈의 말대로 손님이 올 것 같지도 않았지만, 또 모르는 일이라 문을 닫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리 와.”
이재현은 자신의 옆자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포근해 보이는 이불이 놈의 손에 꺼졌다 차올랐다.
“뭐, 나도 잠이나 자라고?”
놈은 금방이라도 감길 것 같은 눈을 하고 또 옆자리를 두드렸다.
“그냥……. 옆으로 와 줘. 그러면 잘 수 있을 거 같아.”
높낮이 없는 건조한 목소리였지만, 어딘가 어리광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잠을 못 잔다는 정보까지 알아 버려서일까, 마음이 무거워 순순히 몸을 일으켜 침대 앞으로 갔다. 유태영의 말대로 수면 시간 부족으로 집중력이 약해져 다친 거라면 분명 문제가 있는 듯 보였다.
놈은 나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서라고 하긴 했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어렴풋이 못 자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외로움을 안 탄다고 자부했던 나조차 혼자 누운 침대가 차게 느껴졌던 때가 있었으니까. 놈도 그냥 옆에서 온기를 뿜어내 줄 사람이 필요한 걸지도 몰랐다. 굳이 연인이 아니어도 말이다.
그런 이유라면 곁에 못 있어 줄 것도 없었다. 근데 망설여지는 건 왜일까. 아무 일도 없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조금 머뭇대다가 놈이 두드린 곳에 걸터앉아 언뜻 보이는 벽시계를 살폈다. 두 시간은 재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돌아본 녀석은 아직 부족한 듯 여전히 옆자리를 두드리고 있었다.
“진짜 누우라고? 이 좁은 데에?”
“왜. 내가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반쯤 감긴 눈, 몽롱함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속마음을 들킨 듯해 작게 고개를 숙였다.
“아니, 그런 것보다…….”
“그런 게 아니라면 괜찮잖아. 어차피 나, 남자로 안 보인다며.”
이재현은 보육원 옥상에서 있던 일을 그렇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그러니 여기서 부정한다면 내가 놈을 남자로 의식하고 있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말이었다.
“그럼 북이 옆이나 내 옆이나 다 똑같잖아. 아니면 더 떼 써야지 들어줄 거야?”
확실히 나를 다루는 방법을 깨우친 모양이었다. 귀찮게 굴기 전에 해 줘 버리는 내 성격을 말이다. 놈의 재촉에 못 이겨 몸을 눕힌 순간 후회했다. 좁은 침대 탓에 몸 전체에 놈의 열기가 느껴져 왔다.
“자, 됐어?”
“응. 잘자.”
약간의 웃음 섞인 인사가 귀를 울렸다. 최대한 몸이 닿지 않게 한껏 웅크렸지만, 어느샌가 들려오는 규칙적인 숨소리에 점차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슬쩍 돌아보니 시야에 눈을 감은 이재현의 새하얀 얼굴이 가득 들어찼다. 쓰고 있는 가면 탓인지, 가까운 거리에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