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16)

“이성재 그놈 새끼, 초반엔 서로 사사로운 감정 만들지 말자면서 로봇 생활 강요하더니……. 자기가 제일 먼저 선 넘는 거 진짜 열 받네.”

나는 모르는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열 받는다고는 하지만, 얼굴에는 그다지 화난 기색이 드러나진 않았다. 그래도 어쩐지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해 어깨를 움츠리며 힐끔 눈치를 보았다.

“아. 미안.”

그리고 나도 모르게 사과를 내뱉었다.

“네가 미안할 게 뭐 있어. 네가 아니라 이성재한테 화나는 거야. 네가 아니라고 해서 믿고 있긴 했는데, 이성재 쪽은 이상한 게 한둘이 아니긴 했지. 네 앞에서 등신같이 굴 때도 그랬고, 같잖게 유태영이랑 배준형한테 눈치 줄 때도 그랬고, 둘만 있는 시간 만들 때도…….”

영문 모를 말에 이해 못 한 부분을 되물었다.

“눈치 주다니?”

“아…… 있어. 내가 유치해서 말은 안 하는데. 아무튼, 좀 여우 같아. 그 자식.”

한참 거친 욕설을 뱉으며 이재현을 씹는 권지우 옆에서 나는 죄인이 된 것처럼 고개를 숙여야 했다. 내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권지우에게 이재현은 그냥 ‘로봇 같은 꼰대 새끼’였던 것 같은데 지금은 수많은 타이틀을 가지게 되어 버렸다.

“아무튼.”

달아오른 속을 가라앉히듯 숨을 길게 내뱉은 권지우가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그날…… 자진 않았더라도 뭔가 있었던 거지? 기회를 못 잡을 놈은 아닐 텐데.”

여전히 이재현에게 적대심을 보이는 말투였다. 또다시 그날의 일이 떠오르자 온몸을 긁어 내고 싶은 충동에 휩싸여 몸을 작게 떨었다. 입을 맞추었던 감촉이 아직도 생생했지만, 아무 말도 못 한 채 입을 달싹이자 권지우가 말을 이어 왔다.

“뭐, 나도 남의 연애사 자세히 알고 싶은 건 아니고. 그저 둘 사이에 관계 발전이 있었는지를 묻는 거야.”

관계 발전. 이재현이 나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그 또한 내 감정을 알고 있다는 듯 늘 은근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굳이 어떤 사이라는 말이 오가지는 않았어도 입도 맞추었고, 손도 잡는 사이. 이미 친구 단계는 훌쩍 넘어 버린 관계였다.

“좀…… 있었지? 없지는 않았어.”

“그랬겠지. 이성재인데.”

‘그럼 그렇지.’라고 생각하는 듯한 말이었다. 팀원들에게 이재현은 목표한 건 꼭 이루는 인물이었고, 그 특징이 일과 별개인 부분까지 이어진 모양이었다.

“그래서 뭐, 사귀는 거야?”

그 물음엔 또다시 물음표가 떠올랐다. 딱히 사귀자는 말을 한 것도 아니었고, 2주간 평소와 같은 일상을 보냈다. 다른 게 있다면 이재현이 조금 더 어린아이같이 군다는 거뿐이었지만, 확신할 만한 어떤 사건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김세한은 당일부터 자잘한 스킨십이 많았고, 거기에 움찔거리는 내게 ‘괜찮지? 우린 연인이니까.’라며 안심시켰으니 헷갈릴 일이 없었다. 하지만 이재현의 경우는 더 은근한 느낌이라 내 입으로 먼저 이렇다 관계를 정의하기 힘들었다.

“……걔랑 나, 사귀는 건가?”

혼잣말처럼 내뱉은 말에 권지우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걔가 들이댔을 때 네가 밀어내지 않았으면 사귀는 거지.”

“음. 그렇겠지, 보통은.”

간질거리는 느낌이 더 커졌고, 이재현의 표현이 더 노골적으로 변했고, 질투를 숨기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사귄다는 말이 거창하게 느껴지는 건 ‘그’ 이재현과 내가 사귄다는 게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생각에 잠긴 나와 달리 권지우는 단호히 그 문제를 끊어 냈다.

“아무튼, 난 그런 거로 알고 있는다.”

“애들한테 말할 거야?”

“딱히 말할 생각은 없는데. 다 눈치채고 있을걸? 대놓고 독점하려는 게 눈에 보여서.”

쯧, 짧게 혀를 차며 말하는 권지우에게 되물었다.

“독점?”

잠시 망설이듯 눈을 굴리던 그녀가 한숨을 내뱉으며 되물었다.

“요즘 배준형이랑 대화한 적 있어?”

배준형은 혼자 있는 내 옆에 거리낌 없이 다가와 놀아 달라며 떼를 쓰는 남동생 같은 팀원이면서, 친구인 채연이와 비슷한 느낌으로 밝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약하기도 했고, 편하기도 해서 합류 초반에 권지우 다음으로 친해진 사람이기도 했다. 권지우의 질문에 돌이켜 생각해 보니, 요즘은 배준형이 저녁을 먹고 곧바로 자러 들어가 딱히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긴 했다.

“아. 요즘은 바빠서 딱히.”

“그렇지? 왜 갑자기 바빠졌을까. 누구 눈치를 보는 걸까?”

권지우는 마치 생각해 보라는 듯 문제 아닌 문제를 냈다. 생각해 보니 배준형은 소파에서 잘 때가 많았다. 항상 누군가와 떠들다 자곤 했으니까. 물론 거기엔 그 근처에서 책을 읽는 나도 포함되었다.

“그게 이성재 때문이라고?”

되묻는 나에게 권지우는 대놓고 얼굴을 구겨 보였다. 지친 듯한 표정이었다.

“이성재가 치밀한 건지, 네가 둔한 건지. 너희 은근 환상의 짝짜꿍이다. 둘이 백년해로해.”

“축복은 아닌 거 같은데.”

비꼬는 듯한 말에 인상을 쓰던 그때였다. 빗소리 사이로 들려오는 사람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가면을 썼다. 권지우도 마찬가지로 가면을 쓰며 몸을 일으켰다.

“환자 왔나 보네.”

“그러게. 오늘은 안 오고 끝날 줄 알았더니.”

“여덟 시까지 하는 거지? 2층에서 기다릴 테니까, 끝나면 올라와.”

흘끔 시계를 확인한 그녀가 문고리를 잡은 순간이었다.

탁탁-삑- 삑—

비에 젖은 구두가 병원 바닥에 미끄러지는 소리, 꽤 많은 사람의 발소리와 숨소리, 다급한 느낌의 소음이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진료실이라고 쓰인 걸 읽을 정신도 없는 건지 다른 병실 문을 여는 소리도 들렸다.

‘많이 위급한가 보네.’

내가 안내해야겠단 생각에 막 진료실을 빠져나간 권지우를 따라나서려던 순간이었다. 이미 복도 쪽에 서 있는 권지우가 내게 손바닥을 뻗어 보였다.

“뭐…….”

의미를 알 수 없어 입을 뗀 내게 그녀는 손가락을 하나 펼쳐 들어 자신의 가면 위로 가져다 댔다. 그제야 내가 생각 없이 목소리를 내었음을 깨달았다. 탁탁탁-그와 동시에 가까워진 구두 소리 위로 거친 숨소리가 흘러들었다.

“b.w 힐러님…… 지금 계신가요?”

날 저지하듯 뻗어진 권지우의 손바닥에 방 안에 애매하게 서 있어 복도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권지우가 막아선 이유도, 얼어 버린 이유도. 나에겐 너무 익숙한 목소리, 테리의 것이었다.

“죄송한데 빨리요!”

“…….”

다급한 목소리에 나는 굳어 버린 듯한 권지우의 손을 밀쳐내며 방을 나섰다. 나를 발견한 테리의 눈은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왜…… 무슨 일이지, 이게.’

테리의 뒤쪽으로는 론과 릴리 등 익숙한 얼굴들도 보였다. 상황을 파악해 보려 이리저리 움직이던 시야에 테리가 업은 남자의 머리통이 들어왔다. 옅은 갈색의 머리칼에서 뚝뚝, 빗물 섞인 피가 떨어져 내렸다. 나는 조금 멍하니 바닥을 수놓은 물방울을 확인했다. 잘못 봤나 싶었지만 선연한 붉은색은 분명 피었다. 그럼 이쪽을 잘못 본 걸까. 테리에게 업힌 남자는 고개를 늘어뜨려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안타까울 만큼이나 눈에 익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비 오는 늦은 시간 찾아온 손님은 김세한이었다. 그 순간 하늘에선 번개가 내리쳐 번뜩였고 눈앞이 가물가물 일순 어지러웠다. 거세진 빗소리에 엉켜 든 천둥소리가 유독 귀를 세차게 때렸지만, 머리는 침묵에 잠식당한 듯 고요했다.

김세한에게 힐러는 필요 없다. 내 소설의 주인공은 이야기 내내 피를 흘리지 않으니까. 그렇게 ‘설계’되어 있고, 압도적인 강자라는 ‘설정’을 가지고 있다. 비록 내 앞에선 감정 문제로 피를 내는 일이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다쳐 오는 건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김세한이 다쳤다고……?’

심장 소리도 들려오지 않게 조용해진 내 안에선 잔잔한 물음만이 울리고 있었다.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삐이-길게 이어지는 이명이 머리를 울렸다. 마치 신호 없는 텔레비전처럼 아무런 사고도 할 수 없었다.

“저희 보스가 좀 위험한 거 같은데…… 빨리요!”

“…….”

멍하니 서 있는 내가 갑갑한 건지 테리가 고함을 질러 왔다. 김세한의 길드 내에 있는 치료 시설이나 힐러들은 어찌 두고 여길 찾아왔는지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다. 나는 한 걸음 물러나 진료실 안쪽을 가리켰다. 테리는 나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고, 론은 내 어깨를 잡아끌어 애원하듯 말했다.

“잘 부탁하겠습니다. 돈은 얼마라도 드릴 테니까요.”

그 목소리가 한없이 절박해서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에도 온몸이 구름 속에 있는 듯 멍했다. 그렇게 하나둘 진료실로 들어가는 S급들을 따라 몸을 옮기려던 순간 팔이 확 당겨졌다.

돌아본 곳엔 권지우가 고개를 저으며 서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옆에 있는 빈 병실로 나를 이끌었다. 쾅-문이 거칠게 닫히고, 불도 켜지 않아 어두운 병실 안에 권지우의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둠 속에서 다짜고짜 나를 벽 쪽으로 몰아세운 그녀가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살릴 거야? 김세한이잖아, 저거.”

확실한 건 이재현이 모아 놓은 b.w 팀원들은 김세한을 좋아하지 않는다. 김세한은 너무 많은 걸 독점하고 있고, 선하지 않으며, 가진 사상 자체가 b.w와 반대였다. 애초에 다들 김세한에게 반하는 움직임을 보이다 죽임당했어야 할 인물들이었다.

“지금은 환자야.”

“잘 생각해. 지금 죽으면 이 걸리적거리는 가면도 벗을 수 있을걸. 다 김세한 때문이잖아, 너도 이성재도 눈치 보는 거. 이거…… 기회 아니야?”

권지우는 마치 나를 유혹하는 듯 ‘기회’라는 단어를 뱉었다. 권지우에겐 굳이 위험을 떠안고 김세한을 찾아가 죽여야 할 이유도 없지만, 죽어 가는 놈을 살려야 할 이유도 없었다. 김세한이 죽어 간다면 오히려 두 손 들고 반가워할 인물이었다. 이야기 초반, 자신의 앞길을 막는다면 사람이건 짐승이건 망설임 없이 죽이던 김세한이 정의로운 사람에게 미움받는 건 당연했다.

“……나한테 온 내 환자라고, 지금은.”

불안정한 호흡 사이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권지우의 고개가 조금 삐딱이 기울여졌다.

“그놈이 네 애인이었기 때문은 아니고?”

“……뭐?”

“아직도 미련이 남았어?”

원래도 말을 예쁘게 하는 인물은 아니었지만, 오늘따라 공격적으로 들리는 건 내 마음이 조급한 탓이려나.

“아니야. 김세한은 살아야 할 이유가 있어.”

“그게 뭔데. 결국 네 마음이 불편해서잖아.”

김세한이 살아 있어야 할 이유. 그가 선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는 주인공이고, 헤쳐 나가야 할 숙제가 있다. 마지막 등장하는 몬스터는 특별히 주인공만 잡을 수 있게 설계되어 있다. 애초에 설정이 그랬기에 몇 명이 덤비든, 이재현의 전략이 얼마나 뛰어나든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 몬스터를 잡지 못하면 인간은 멸종 위기에 놓이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김세한의 죽음은 인류의 패배와 멸망을 상징했다.

“정말 아니야. 비켜, 급하니까.”

“……모르겠다. 저걸 살리는 게 맞는 건지. 왜 좋은 기회를 걷어차는 건지.”

강경한 대답에 한숨을 내쉰 권지우가 내게 먼저 가라는 듯 문을 열어젖혔고, 병실을 나오자마자 날 찾으러 나온 듯 진료실 앞에 서 있던 론과 눈이 마주쳤다.

“지금 당장 봐 주셔야 합니다. 기다릴 시간이 없어요!”

론은 다급하게 내게로 달려와 손목을 잡아끌었다. 진료실 안에선 나를 기다린 듯한 S급들이 하나둘 고개를 돌렸고, 길을 터 주듯 뒤로 물러났다. 그렇게 순식간에 진료실 침대에 늘어지듯 눕혀진 김세한 앞에 서게 되었다. 새하얀 베개 커버가 온통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역시 피가 나오는 곳은 머리 쪽이었다. 갈색 머리카락을 걷어 내자 조금 파인 듯한 상처에서 유독 검고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의식이 없으신데……. 아직 살아 계신 건 맞죠? 힐러님은 고칠 수 있는 거죠?”

테리는 애처롭게 내 소매에 매달리며 말했고, 나는 그 손을 뿌리치곤 치료에 들어갔다. 테리의 심정은 알았지만, 어차피 답을 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김세한의 몸은 차가웠지만 분명 숨을 뱉고 있었다. 급한 마음에 벌벌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려 입술을 깨물었다.

‘떨지 마. 내가 겁먹으면 다 끝이야.’

비릿한 피 맛이 입 안을 가득 채웠고, 알싸한 고통에 흐릿하던 눈앞이 또렷해졌다. 최대한 감정을 지워 내고 상처를 객관적으로 분석하려 애썼다. 머리를 다쳤다고 했을 땐 몬스터에게 당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기엔 상처의 범위가 너무 특정되어 있었다. 마치 노리고 쏜 것에 맞은 거처럼.

“이해가 안 되네. 당신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크게 사업하는 놈들 아니야?”

팔짱을 끼고 문 쪽에 삐딱하게 기대선 권지우가 방 안의 S급들을 훑으며 말했다. 그녀의 신분에 의문을 품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 누구냐고 되묻지 않았다. 나와 같은 가면이 그녀의 소속을 대충 설명하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다쳤으면 당신들이 고용한 힐러한테 먼저 가야지 뭐가 아쉬워서 이런 조그만 병원에 와?”

권지우가 나 또한 품었던 의문을 던졌다. 하지만 김세한의 상처를 파악한 지금은 대충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미 가 봤지만 불가능하다는 답만 얻었거나, 치료에 진전이 없었거나, 죽기 직전이라 파악해서 포기했거나.

‘나도 딱히 다르지 않을지도…….’

죽지만 않았으면 살릴 수 있다는 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상처에 해당했다. 힐을 하고 있음에도 피가 멎지 않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건 일반적인 상처는 아니었다. 권지우의 질문에 내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론이 답해 왔다.

“이게 몬스터에게 당한 게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제 탓입니다……. 주변을 다 뒤져서라도 발포자를 잡았어야 하는 건데, 보스가 쓰러진 상황이…… 너무 당황스러워서.”

약간 떨려 오는 론의 목소리가 나는 보지 못했을 그 장면을 상상케 했다. 김세한이 쓰러진다. 그건 내 소설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이야기였다. 따라서 지금 이 상황은 작가인 나를 포함해 아무도 예상 못 한 것이었다.

“왜 발포자를 못 잡은 게 문제가 되는 건데?”

“의료진은 상대가 쓴 스킬이 뭔지 특정할 수 없을 경우, 섣불리 손을 댔다간 위험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대로 두는 것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였고요. 그러던 중에 테리가 b.w 힐러는 혹시 치료할 방법을 알지도 모른다고 해서…….”

대충 머리에 그렸던 스토리가 들어맞은 순간이었다.

‘역시 헌터한테 맞은 거라는 거네. 김세한을 노리는 헌터……. 충분히 있을 수 있지.’

결론을 내리고 나서야 지금의 상황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왜 진작 이 생각을 못 했을까. 나는 테리가 자신의 역할을 못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테리를 제외하더라도 김세한은 충분히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오산이었다.

‘마지막으로 봤던 김세한…… 지쳐 보였어.’

이재현의 공격에 조금 둔한 반응을 보였을 때부터 상황은 예견되어 있었다.

“어느 길든지만 알면 물어보면 되잖아? 뭐 협박을 해서든…….”

“그걸 특정할 수 없어서……. 워낙 미움받을 일이 많아서요.”

“아, 뭐…… 그렇긴 하네.”

론의 대답에 조금 겸연쩍은 듯하던 권지우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뜸 들이다 나지막이 말했다.

“혹시 그놈들인가? 며칠 전에 우리랑 싸웠던…… 그놈들도 이상하게 우리를 죽일 것처럼 굴었거든. 피하지 않았으면 스킬을 머리에 맞을 뻔하기도 했고.”

권지우의 말에 나는 입술을 깨물고 속으로 탄식했다. 그제야 이재현과 함께 보낸 그날 밤, 무전기 너머로 들려오던 고함이 떠올랐다. 역시 그날의 갈등은 아무 일도 아닌 게 아니었다. 이재현이 방관한 그 싸움의 상대 길드 정체를 이제 알 수 있었다. 그건 단순 밥그릇 싸움이 아니라 박도윤이 1위를 달아서 생긴 해프닝이었던 것이다.

- 다쳐 오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가끔 무력엔 무력으로 대응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

-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거구나?

- 당하고만 있을 필요 있나 싶기도 하고.

‘헌터 킬러.’

잘나가는 헌터를 사냥하는 괴짜 또라이 집단이었다. 어딜 가나 있는, 사는 데에 불만 많고, 세상을 삐딱하게 보는 인간들을 본떠 만든 조연들이었고, 원래대로라면 그 자리에서 김세한에게 죽임당하는 역할이기도 했다.

‘그래. 이맘때였어.’

당장 내일 죽어도 상관없는 미친놈들이 장석현이 만든 순위를 흔들어 놓겠다며 등장할 타이밍. 김세한이 공식적인 랭킹 1위를 달고 난 이맘때쯤이었다.

‘이재현, 그래서 싸움을 허락한 건가? 걔네가 어떤 애들인지 이미 눈치채고?’

눈치챘다면 나한테도 알려 줬으면 좋았을 텐데. 이재현은 항상 설명이 부족한 경향이 있었다. 만약 권지우의 말대로 그때 그놈들이 쓴 스킬이라면 작가인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원래라면 테리의 총알에 맞아 예쁘게 공중에 흩어졌을 가장 화려한 공격 스킬, 추락하는 샹들리에.

아니나 다를까, 치료 경로를 수정하자 흰 빛에 황금 빛이 섞여 들며 피가 멈추기 시작했다. 무언가에 쫓기듯 다급했던 마음이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했다. 옆에선 상황의 진전을 알아볼 수 없어서인지 S급인 릴리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정장을 입은 김세한의 S급들은 저마다 눈을 감거나 고개를 떨군 채 괴로워 보이는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내 시선을 끈 사람은 명확했다.

‘테리…….’

아까부터 침대 앞에 쪼그려 앉아 고개를 떨군 테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대충 짐작됐다. 김세한이 다친 건 본인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해서일 거라 자책하고 있을 것이다. 아까의 절박했던 얼굴이 모든 걸 설명한 지 오래였다.

“그렇게 세지는 않던데…… 그 머리로 향하는 스킬. 우린 피했는데 왜 당신네는 못 피해? 그것도 ‘보스’라는 사람이.”

김세한의 강함은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다소 까끌까끌한 느낌이 드는 권지우의 질문에도 론은 차분함과 예의를 잃지 않았다.

“피로도가 누적돼 있으셔서 그런 것 같습니다. 불면증이…… 심각하셨거든요.”

놈을 마주했을 때마다 느꼈던 몽롱한 분위기,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이 반쯤 뜨인 눈, 꿈속을 헤매는 듯한 목소리의 원인을 알 수 있는 답이었다. 그렇다면 떨어진 집중도도, 느린 반응 속도도 다 설명할 수 있었다.

“몸이 지쳐야 잘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셔서…… 일을 늘리신 것도 원인이었던 거 같습니다.”

과로도 피로의 원인인 듯했다. 자지 않고 움직인다는 건 보통 사람이라면 이미 쓰러졌어야 정상인 생활 패턴이었다.

“그래. 자주 보이더라, 당신네랑 같이. 괴물은 괴물이다 했더니…….”

권지우의 목소리에도 어느새 한숨이 섞여 들었다. 인간으로서 가지는 측은지심 정도의 마음인 듯했다. 어느샌가 진료실을 가로질러 내 옆으로 다가온 권지우가 김세한을 내려다보며 작게 물었다.

“어때? 살릴 수 있겠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권지우는 내 등을 쓸어내렸다. 나를 다독이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돈 많이 받아서 맛있는 거 사 줘.”

영문 모를 말을 뱉고 몸을 돌린 그녀가 무전기를 들고 진료실을 나섰다.

“우리 좀 늦을 거 같아. 늦게 온 환자가 있어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상황이 팀원들 귀에 들어가서 좋을 건 없었다. 김세한의 이름을 꺼내지 않았다는 건 이 일은 나와 권지우 선에서 끝낼 해프닝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내심 팀원들 반응을 신경 쓰고 있었던 모양인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좁은 진료실에 열 명이 족히 넘는 사람들이 있는데 고요하기만 했다. 침대 밑으로 주저앉은 테리는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 알지 못할 말을 중얼거렸고, 론은 붉게 부어오른 눈으로 내가 치료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며칠 전만 해도 놈들 앞에 손을 꺼내 놓는 게 신경 쓰였는데 지금은 그런 것을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게다가 그나마 내 손을 가장 많이 접했을 테리는 정신적 충격이 큰 건지 무너지는 자아를 잡는 것에 급급해 보였고, 론 또한 내 손이 아닌 김세한의 상처를 보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피가 완전히 멈추었을 때, 황금빛의 파동이 잔잔하게 원을 그리며 작게 퍼져 나갔다. 힐은 빛의 형태로 물리적인 힘이 전혀 없지만, 아직 상처 부위에 남은 스킬의 여파를 상쇄시키는 데에서 오는 미동이 느껴졌다. 가장 화려한 스킬에 당한 만큼 지루하기 짝이 없는 내 힐도 꽤 볼만한 형태로 뿜어졌다. 산들바람 정도의 파동이 김세한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듯 퍼져 나갔고, 피 냄새에 섞인 그의 체취가 코를 간질였다. 피로 물든 검은 숲이 연상되는 냄새.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냄새였다. 김세한과 그의 피. 다시는 보지 않길 바랐던 그 조합이 또다시 내 앞에 놓였다.

‘나만 사라지면 이제 이런 일 없을 줄 알았는데.’

째깍. 째깍. 초침 소리만 들리기를 한참, 황금빛 파동이 사라졌을 때 내 손도 거두어졌다. 여전히 눈을 감은 김세한의 숨이 전보다 안정되게 뱉어지고 있었다. 아마도 못 잤던 잠을 지금 청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감은 눈 밑으로 보이는 붉고 어두운 그늘, 야윈 듯 파인 볼, 푸석해진 듯한 피부. 누가 봐도 아픈 환자가 따로 없었다. 스륵-손에 스치는 머리카락을 무의식적으로 매만지다 황급히 손을 거두어 냈다. 젖은 머리칼에 스쳐 축축해진 손가락을 내려다보며 묘한 기분에 휩싸일 때쯤이었다.

“저기…… 치료는 다 끝났나요?”

뒤에서 들려온 론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두어 발 물러났고, 진료실 곳곳에 퍼져 있던 모두가 하나둘 김세한의 주위로 다가왔다. 벌떡 몸을 일으킨 테리가 가장 먼저 김세한의 상태를 확인하고 눈물을 떨궜다. 그런 녀석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도 잠시, 내 앞에 무릎을 꿇은 론을 발견하자 자동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 말 말고는…….”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하는 론에게 최선을 다해 손사래를 치던 그때였다.

“보스!”

“보스, 괜찮으십니까?”

진료실 안이 아까와 다르게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김세한을 둘러쌌던 S급들은 내게 길을 터 주듯 비켜섰고, 훤히 보이게 된 하얀 얼굴의 나른한 눈은 나를 담은 채 천천히 깜박였다. 꼭 잠에서 덜 깬 듯한 느낌이었다.

“어라…… 당신.”

“…….”

“또 보네.”

쩍쩍 갈라지고 잠긴 목소리, 희뿌옇고 몽롱한 눈. 내가 마주한 김세한 자체가 꿈처럼 느껴졌다. 나에게 인사하듯 뻗어졌던 팔이 허공을 가르다 힘없이 떨어졌고, 김세한은 다시 의식을 잃은 듯 눈을 감았다. 침대 밑으로 늘어진 김세한의 팔목엔 익숙한 목걸이가 두어 번 감겨 빛을 내고 있었다. 주위는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지만, 내 심장은 죄악감에 낮고 묵직하게 뛰어 왔다.

“어, 어떻게 된 건가요? 보스가 다시…….”

론의 다급한 물음에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저었지만, 손이 떨어져 늘어지는 극적인 장면 때문인지 뜻이 다르게 전해진 모양이었다. 한껏 커진 눈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고, 진심으로 그의 감정 낭비가 걱정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나와 론 사이로 끼어든 권지우가 내게 물었다.

“괜찮다는 거지?”

고개를 끄덕이며 머리를 두드리곤 손가락으로 오케이 사인을 하자 그녀가 론을 돌아보며 나 대신 말해 주기 시작했다. 말을 못한다는 컨셉을 유지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울지 마. 머리 치료 잘됐고, 문제없대.”

번역기로서 권지우의 성능은 꽤 괜찮은 듯했다.

“그럼…… 왜 다시 쓰러지신 겁니까?”

론의 질문에 권지우는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두 손을 모아 잠을 청하는 자세를 취했고, 권지우는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잠이 부족해서 처자는 거뿐이니까, 호들갑 떨지 말래.”

다소 거칠게 번역되는 것만 빼면 완벽했다. 안도감을 담은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론의 어깨 위로 권지우의 손이 올라와 까닥였다.

“시간이 늦어서 야간 진료 비용도 추가해서 받아야겠는데……. 오. 역시 돈 있는 기업 간부들은 달라. 양복 좋네?”

다소 깡패 같은 게 김성민이 할 법한 대사였다. 보육원 봉사를 같이 다니더니 그새 옮은 걸까. 론이 조금 당황한 눈으로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저건 내가 한 말이 아니라는 걸 부디 알아주길 바랐다.

원래 병원으로 쓰이던 건물이라 널린 게 병실이었지만 실제로 병원을 운영하다 보니 선천적 지병이나 암, 감기 같은 질병 쪽은 내가 못 고치는 영역이었고, 외상은 그 자리에서 내가 고치면 그걸로 그만이었기에 병실은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처음으로 테리에게 입원하면 안 되겠냐는 물음을 들었다. 다시 눈을 감은 김세한이 어지간히 불안한 모양이었지만 여긴 이전에 존재하던 대학 병원같이 24시간 운영되는 곳이 아닐뿐더러 내가 해 줄 조치도 더는 없었다.

“우리 퇴근해야 해. 다들 나가.”

“하지만…….”

“푹 재워. 잠이 보약이라는 말 몰라?”

왔을 때처럼 테리가 김세한을 업었고, 권지우는 진료실을 나서고도 자꾸 뒤돌아보는 테리를 밀어내듯 손을 휘휘 저었다.

“따로 받아 갈 약이라든가……. 없겠죠?”

“여기가 병원이 줄 알아? 아니, 병원이긴 한데.”

둘이 실랑이하는 것을 보고 있던 론이 테리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그만 가자는 것이었다. 병원의 정문 앞에는 KSH 건물 앞에서 보았던 탱크 같은 검은 차들이 여러 대 세워져 있었다. 병원을 나서기 직전, 론이 몸을 완전히 내 쪽으로 돌려 허리를 숙였다.

“신세 많았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 인사에 다른 S급들도 동시에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우렁차게 울리는 목소리가 병원 전체를 흔들 기세였다. 그러곤 미련 없이 뒤돌아서 검은 우산을 쓰고 빗속을 걷기 시작했다. 나는 멀어지는 김세한의 뒷모습에 의미 없이 시선을 두었다. 테리가 걸을 때마다 우산 아래로 보이는 김세한의 긴 다리가 흔들렸다. 놈이 힘없이 늘어진 건 몇 번을 다시 보아도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그의 뒷모습은 얼마 안 가 차 안으로 사라졌고, 힘차게 들려온 차 시동음과 함께 멀어졌다. 마치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것 같이 가슴도 머리도 얼얼했다. 차 엔진 소리가 완전히 들려오지 않게 되자, 권지우가 가면을 내리곤 기지개를 켰다.

“저런 각 잡힌 인사 받으니 이상한 기분이네. 하긴 그 김세한을 살렸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

“……너 아까 나한테 살리지 말라고 한 애 맞아?”

나 또한 가면을 벗으며 눈썹을 까딱였다.

“내가?”

론에게 받은 하얀 돈 봉투 안에 바람을 불어 넣던 권지우가 옅게 미소 지었다. 돈 때문인지 처음 보는 해맑은 미소였다.

“이 정도로 받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확실히 대기업 통이 크네. 내일 단체로 휴업해도 될 금액인데?”

“…….”

돈을 만지작거리던 권지우가 날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돈 때문만은 아니고. 또 막상 사람들 울고, 죽어 가는 놈 눈앞에 두니까 영 냉정하질 못하겠더라고. 난 평소에 김세한 안 좋아했는데도 그런데…… 넌 오죽할까 하는 생각도 들고.”

“…….”

마음이 조급했던 건 사사로운 감정 때문이었다. 그녀의 말은 그런 내 나약함도 이해한다는 듯 들려서 위로가 되었다. 권지우는 병원 문 옆에 덩그러니 놓인 우산꽂이에서 놈들이 썼던 검은 우산과 상반되는 알록달록한 무지개 우산을 집어 들며 내게 손짓했다.

“우리도 이만 가자. 열 시 다 돼 간다. 너무 늦게 가면 이성재한테 한 소리 들어.”

병원을 나서는 순간, 김세한에 대한 걱정과 생각을 완전히 내려놓을 것이다. 그게 저 우산 밑에 있을 수 있는 조건이었다. 숨을 크게 내쉬며 발을 뗀 순간이었다.

[어디야? 왜 이렇게 늦어?]

딴생각한 걸 알기라도 한 건지 기가 막힌 타이밍에 무전 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리다 지쳤다는 듯 미묘하게 늘어지는 목소리에 살포시 웃음이 났다. 눈을 감고 떠올린 얼굴에 김세한의 걱정으로 가득했던 머리가 깨끗하게 비워졌다.

“거봐.”

권지우는 나를 보고 고개를 저으며 무전기를 들었다.

“이제 가려고. 먼저 자든가.”

[잠이 안 와……. 내가 데리러 갈까?]

이재현의 무전에 권지우는 나지막이 욕을 뱉었다. 그다지 맘에 들지 않는 대답인 모양이었다. 나 또한 우리 관계를 눈치챈 권지우 앞에서 들으려니 좀 낯간지러웠다.

“뭐라는 거야, 이 새끼?”

토하는 시늉을 하는 권지우 대신 내가 무전기를 잡았다.

“됐어. 금방 갈게. 밖에 비 많이 와.”

[뭐야. 구재희네.]

멎는 법을 잊은 듯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병원 문을 잠그고, 권지우가 펼친 우산 밑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빨리 와.]

나지막이 들려온 목소리를 무시할 수도 있었는데, 어쩐지 답해 주고 싶었다.

“응, 빨리 갈게.”

만족하며 무전기를 다시 권지우에게 돌려주었고, 날 빤히 바라보는 그녀는 마치 구더기라도 씹은 것처럼 표정을 구겼다.

“제발 남들 다 듣는 무전으로 닭살 좀 떨지 마.”

“어…… 어디가 닭살이었어?”

“몰라.”

몸을 털어 내듯 부르르 떠는 권지우 대신 우산을 들었다. 한참을 더 생각해야만 할 줄 알았는데 발을 적셔 오는 비, 옆에 있는 권지우, 이재현의 목소리가 오늘 있던 엄청난 일을 흐릿하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아마 이 생활을 꽤, 아니 아주 많이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있고, 집에 가면 같이 밥 먹을 사람들이 있고,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일상을 말이다.

“김세한 맞힌 놈들, 역시 우리랑 싸웠던 그놈들 맞을까?”

권지우는 내게 집히는 게 있느냐는 듯 물었다.

“글쎄?”

“근데 너 대단하더라.”

“나?”

“뭐 네가 꽤 능력 있는 힐러인 건 알았지만, 오늘 일로 보니까…… 네가 특별하다는 걸 알겠어. 특정할 수 없는 스킬에 공격당하면 치료가 어렵다는 걸 난 오늘에서야 알았어. 그 어려운 일을, KSH 힐러들도 못한 걸 네가 해낸 거잖아.”

그건 힐러로서의 능력보단 스토리를 아는 작가의 특권일 뿐이었다. 만약 권지우가 아무런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더라면 ‘헌터 킬러’라는 존재를 파악하지 못했을 거고, 정말 김세한이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보통 글을 구상할 때 특정 장면들을 떠올리고, 그 장면들을 구체화하기 위해 다른 설정을 끼워 맞추는 형태로 쓰게 되는 경향이 있다. 헌터 킬러 소동 또한 그저 테리의 유능함과 흩어지는 스킬 아래서 여유로운 주인공을 보고 싶어 쓴 장면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스킬은 추락하는 샹들리에로 제한되어 있었다. 요약하면, 이 소설에선 헌터 킬러라는 등장인물보다 추락하는 샹들리에를 방어하는 장면이 더 중요했고, 덕분에 어렵지 않게 스킬을 특정할 수 있었다.

“그보다, 그놈들이랑 그날 싸운 거 맞아? 이성재가 대충 그럴지도 모른다고만 말해서 난 아는 게 없는데.”

그날 무전으로 대충 들었던 고함의 뒷이야기를 묻는 것이었다.

“역시 그놈, 그냥 싸우라고 눈감은 거였구먼.”

“……나 지금 말실수한 건가?”

본의 아니게 이재현이 숨기려던 부분을 멋대로 내보인 것 같았다.

“됐어. 이성재가 적극적으로 안 말리길래 우리도 대충 눈치채고 있었어. 그리고 결론적으로 몸싸움으로 가기 전에 이겼어.”

“어? 진짜?”

그놈들이 말이 통하는 인간들이었던가를 떠올리던 때에 권지우가 답을 알려 주었다.

“김성민이랑 박도윤이 각 잡고 주둥이 터니까 진짜 감탄만 나오더라. 말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걸 그때 알았잖아.”

순식간에 보지도 못한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김성민은 화가 나면 고성을 치며 머리를 들이미는 불도저 타입이었고, 박도윤은 반대로 나지막한 목소리로 살인 예고를 하는 협박형 타입이었다. 공통된 건 둘 다 비꼬는 능력이 수준급이라는 것이었다. 그 둘이 편을 먹었다면 오디오 비는 일이 없어 상대에겐 말할 기회가 돌아가지 못할 게 뻔했다.

“잘못 걸렸다 싶었는지, 꼬리 내리고 도망가더라고.”

“어……. 그랬겠지.”

다행히 별일은 없이 끝난 사건이었던 모양이다. 대화하다 보니 어느새 가까워진 집 앞에 우산을 든 이재현이 나와 있었다. 밤이 되어 어두웠지만 노란 우산 아래의 이재현은 혼자만 빛을 받은 것처럼 밝게 보였다. 개나리를 뒤집어쓴 듯해 어울리지 않게 순수해 보이기도 했다.

“저게 뭐 하는 짓거리야…….”

권지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음…… 잠 안 온다더니, 비 구경하는 건가?”

“비 구경은 지랄. 언제부터 그렇게 감성 넘쳤다고.”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던 이재현이 인기척을 눈치챈 듯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극적인 표정 변화가 마치 내게 반가움을 표현하는 강아지처럼 보였다.

“뭐하러 나와 있어? 옷 다 젖었잖아.”

“참을성이 없어서. 밥은?”

자연스레 오가는 대화에 권지우는 나를 그대로 이재현의 우산 밑으로 떠밀었고, 그대로 우리를 지나쳐 집 안으로 들어갔다. 쿵-세게 닫히는 문에 이번엔 어떤 게 닭살이었는지를 되짚어야 했다.

“뭐야? 쟤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뭐, 딱히.”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우리 사이를 눈치챈 거 같아.’라고 말하면 ‘우리 사이가 뭔데?’라는 질문으로 집요하게 나를 놀릴 이재현이 뻔히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뭐. 같이 우산 쓰고 있는 것도 나쁘진 않은데…….”

스륵, 뱀처럼 허리를 감싼 이재현이 나를 자신의 쪽으로 당겼다. 흠칫 놀라 허릴 세운 나를 눈치채기라도 한 듯 능글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해하지 마. 그냥 너 젖을까 봐 당긴 거야. 원래 우산 같이 쓸 땐 몸이 닿을 정도로 붙어야 안 젖거든.”

“……어. 그렇네.”

“그래도…… 너 감기 걸릴지도 모르니까 일단 들어갈까?”

“응.”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로봇처럼 삐걱대는 내가 웃긴 건지 문 쪽으로 몸을 돌린 내 뒤에선 웃음을 참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밖의 기온과 확연히 다른 포근한 온기가 가장 먼저 반겨 주었다. 그리고 거실에 늘어진 팀원들이 파도 타듯 차례로 손을 들어 소소한 인사를 건넸다.

“뭐 하다 이제 와?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환자가 있었어?”

배준형이 다정하게 인사하고 나면.

“이야. 구재희 노벨 평화상 받아야 하는 거 아니냐? 쥐똥만 한 돈 받으면서 인류 보호에 힘쓰는데.”

무심한 느낌으로 쓸데없는 말을 하는 김성민이 있고.

“노벨상 아직 주고 있긴 해?”

그 쓸데없는 말을 궁금해하는 유태영이 있다.

“우산을 발로 들었나. 너나 권지우나 바닥에 물 다 흘리고…… 자, 닦아.”

잔소리를 담당하고 있지만 그래도 실질적으로 도움 되는 일을 하는 건 역시 박도윤이었다.

“어, 고마워.”

박도윤이 건넨 수건을 받아 들려 했을 때, 나보다 먼저 이재현이 수건을 낚아챘다. 그리고 자연스레 내 머리를 닦아 주었다. 그런 이재현의 행동에 모두 굳어 버린 듯 우릴 보고 있었다.

“야……! 내가 할게.”

모두가 놀랐지만 가장 놀란 건 당사자인 나였다.

“왜? 가만히 있어. 거의 다 돼 가.”

주목받는 게 느껴져 얼굴에 열이 올랐다. 지금 일로 한 가지 확신할 수 있었다. 이재현은 우리 사이를 딱히 숨길 생각이 없다. 아니, 지금 행동으로 봐선 오히려 광고하고 싶어 하는 건가.

몸이 작게 떨리며 등줄기로는 식은땀이 흘렀다. 나조차도 이재현과 사귀는 게 맞는 건가, 하고 생각할 정도로 확신이 없어 이런 상황 자체가 매우 당황스러웠다.

“……씨발.”

묵직하게 들려온 목소리는 권지우의 것이었다. 속이 안 좋다는 듯 가슴 부근을 잡고 화장실로 뛰쳐 들어가는 권지우에게 김성민이 소리쳤다.

“씨이발. 야…… 권지우! 적당히 쓰고 나와, 나도 게워 내야겠으니까.”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던 유태영은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딱 한 마디를 내뱉었다.

“개수작.”

아수라장이 된 분위기와 달리 이재현은 태연히 나를 돌려세우며 귀 뒤로 머리를 넘겨주었다. 그러곤 만족스러운 듯한 웃음을 지었다.

“다 됐어.”

이놈은 대체 무슨 생각일까.

“자, 이제 옷 갈아입고 나와서 밥 먹어.”

깡통처럼 잔뜩 굳어 버린 나를 인형 다루듯 다시 돌려세운 이재현이 집 안으로 마저 밀어 넣으며 말했다.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여러 눈동자가 나를 따라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빨리 여기서 벗어나자.’

그런 판단이 서자 방으로 향하는 걸음이 빨라졌지만, 짓궂게도 내 손이 문고리에 닿기 전에 박도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냐, 너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저런 질문은 피하고 싶었는데. 결국 들어 버렸다. 이대로 무시하고 방에 들어가면 한층 더한 의심만 키울 뿐이었다. 뭘 잘못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교무실에 끌려가는 학생이 된 듯한 기분으로 뒤를 돌아보았고, 내게 향해 있을 거로 생각했던 박도윤의 시선은 이재현에게 닿아 있었다.

“뭐냐니?”

이재현은 태연히 반문했고, 박도윤의 얼굴이 한층 더 구겨졌다. 팔짱을 낀 박도윤은 짝다리를 짚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꼭 대답을 듣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너희 무슨 사이냐고.”

좀 더 명확해진 질문에 이재현은 생각하듯 눈동자를 위로 크게 굴리며 입을 열었다. 입가에 옅게 보인 미소가 불길한 기운을 풍겨 왔다.

“글쎄. 대개 ‘어떤 사이’라는 걸 정의하려면 두 사람의 합의가 필요한 거니까…….”

박도윤을 향해 있던 이재현의 고개가 내게로 돌려졌다. 똑바로 눈이 마주치고, 나른한 미소를 담은 이재현의 얼굴이 약간 기울여졌다.

“네가 생각하기에 우린 무슨 사이야?”

“…….”

악마를 보았다. 이놈은 확실히 날 도망 못 치게 하는 법을 깨우친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완벽하게 애써 회피해 오던 질문의 퇴로를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이재현의 눈이 내 목을 조르듯 조금씩 가늘어졌고, 거실에 있는 팀원들의 시선은 모두 내게 닿아 있었다. 내 대답만 기다리는 침묵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뻣뻣하게 굳어 입술만 오물거리던 중에 배준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해. 구재희 창피해하잖아. 쟤 이런 거 싫어하는 거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거지?”

이재현 앞에 선 배준형은 얼굴을 마구 찌푸리며 인상을 썼다.

“너 그런 거 다 악취미야, 사람 괴롭히는 거. 사귈 거면 조용히 사귀어.”

배준형답지 않게 나름 날이 선 말이었다. 그 말로 이재현이 만들어 냈던 숨 막히는 분위기가 깨어졌다. 배준형은 나를 보며 눈썹을 까딱이곤,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딱 보면 아는 거지. 박도윤, 너는 뭘 또 그런 걸 묻고 있냐? 네가 그러니까 내가 맨날 융통성 없다고 하는 거야.”

“……왜 나한테 시비야? 물어볼 수도 있지.”

험악해지려는 분위기를 옆에서 흥미롭다는 듯 지켜보고 있던 김성민이 깨 버렸다.

“뭐. 솔직히 젊은 암수가 같은 지붕 아래서 같이 사는데 정분 안 나는 게 더 이상하지. 안 그러냐? 배준형.”

불붙으려는 갈등에서 배준형을 빼 오는 물음이었다. 그런 의도를 박도윤도, 배준형도 눈치챈 듯 순순히 서로에게서 눈을 돌렸다. 배준형은 고갯짓으로 권지우가 들어간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다기엔 권지우는 별거 없었잖아. 4년째 같이 지내는데.”

“왜 없어, 우리 옆에 있는 놈 있잖아.”

“아, 맞네.”

상황을 살피던 유태영이 대화의 주인공이 자신임을 눈치챈 모양인지 키득대는 놈들에게 안고 있던 쿠션을 던졌다.

“아니라고. 언제까지 엮을래?”

“하긴, 너넨 사귀는 게 아니지. 거의 40년 차 부부지. 그렇지? 매일 같이 다니잖아.”

“그런 걸로 따지면 넌 배준형이랑 사귀냐?”

어느 순간부터 대화의 주제가 변한 것 같았다. 나는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 문고리를 돌렸다.

“나…… 그럼 들어간다.”

그런 내 말이 스위치가 된 듯 방 안에 들어서기 무섭게 아직 닫히지 못한 문 너머로 김성민과 배준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앞으로 이성재 방문 열 땐 노크해라. 서로 민망해지기 싫으면.”

“그만 좀 놀리라고. 너도 진짜…….”

“왜. 재밌잖아.”

탁-문이 닫히자마자 주저앉아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이제야 긴장감으로 뻣뻣이 굳었던 몸에 힘이 풀렸다. 문득 당황하는 나를 보며 웃음을 참듯 입꼬리를 씰룩이던 이재현의 얼굴이 스쳤고, 손끝이 분노로 바들바들 떨려 왔다.

“이재현. 나쁜 새끼…….”

왤까. 놈이 내 소설을 읽었을 때처럼 민망하고 뼛속부터 패배한 기분이 들었다.

- 애들한테 말할 거야?

- 딱히 말할 생각은 없는데. 다 눈치채고 있을걸?

아까 권지우와 나눴던 대화가 뇌리에 스쳤다. 이제 보니 무슨 사이인지 묻기는 했지만,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다. 새삼 다른 팀원들도 이미 이재현과 나의 관계를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어디라도 숨고 싶어졌다.

‘가만 안 둔다.’

마저 몸을 닦아 내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는 내내 안에서 끓어오르는 화를 느꼈다. 멱살이라도 잡아 줘야 풀릴 분이었다.

벌컥—

다소 거칠게 문을 열고 나온 나를 힐끔대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걸 다 무시한 채, 성큼성큼 거실 한편 벽에 기대서 있는 이재현에게 다가갔다. 날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인지 놈은 곧바로 몸을 바로 세웠다.

“어, 갈아입었으면 밥…….”

“아니, 이제 잘 예정이라서 밥은 됐고, 얘기 좀 하지?”

놈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는 나와 이재현 사이에 찬 바람이 부는 듯했다.

“어후. 얘들아, 그만 얘기하고 자자. 열두 시 다 돼 가는데 내일 일하려면 자야지? 어? 빨리 일어나. 자자.”

분위기를 가장 먼저 읽은 건 배준형이었다. 소파에서 일어난 녀석은 마치 쓰레기를 줍듯 거실에 늘어진 유태영과 김성민을 잡아 일으켰다.

“지금 드라마 한창 재밌어지려는데, 좀 더 보면 안 돼?”

김성민이 말하는 ‘드라마’란 지금 나와 이재현을 두고 얘기하는 게 뻔했다.

“적당히 해. 내일 이성재한테 갈굼 당하기 싫으면.”

박도윤은 그런 김성민의 등을 떠밀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탁-방문이 닫히고, 웅성거리던 거실이 텅 비고 나서야 이재현이 입을 열었다.

“너랑 하는 대화는 언제나 환영이지.”

끽-타이밍 좋게 화장실에서 나온 권지우는 하필 지금 이재현이 한 말을 들은 건지, 또 한 번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장애물이라도 피하듯 나를 지나쳐 방으로 들어갔다. 쾅-귀가 아프도록 세게 닫힌 문이 권지우의 불쾌함을 대신 표현하고 있었다. 이재현은 어느새 자신의 방문 앞에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얘기든, 들어가서 할래?”

끼익-하는 소리를 내며 열린 문 너머로 여느 때와 같이 어두운 방을 비추고 있는 초 하나가 보였다. 이재현과 단둘이 어두운 방 안에 있게 된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조금 위험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걸 인정하기 싫어 태연히 발을 옮겼다.

“자, 먼저 들어가.”

까딱-문고리를 잡고 서 있는 이재현이 양보하듯 비켜서며 고갯짓했고, 내가 방에 들어서기 무섭게 방문이 닫혔다.

“화났어?”

뒤쪽에서 가까이 울리는 낮은 목소리에 놀라 몸을 움찔거렸고, 그런 내 반응을 즐기듯 이어 들려온 작은 웃음소리에 아까의 분노가 되살아났다. 그대로 뒤돌아 이재현을 손목을 거칠게 잡아끌어 책장 쪽으로 몰아세웠다.

“너, 무슨 생각으로…….”

“그 말, 꺼내도 괜찮겠어?”

내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이재현이 말을 잘라 왔다. 미묘한 눈으로 날 내려다보던 얼굴에 다시 옅은 미소가 자리 잡았다.

“내가 생각했을 때 네가 화난 이유를 설명하려면, 언급하기 부끄러워하는 우리 관계도 스스로 정의해야 할 텐데. 괜찮겠어?”

내가 화가 난 이유, 이재현이 애들 앞에서 티를 내서? 나를 몰아세워서? 대답을 강요해서? 모두 정당성이 애매했다. 잘못 이야기를 꺼냈다간 ‘내가 무슨 티를 냈는데?’ 하고 아까와 같은 궁지에 몰릴 게 뻔했다.

“……너 진짜 못됐어.”

“어. 좀 그런 편이지.”

한풀 꺾인 내가 고개를 숙이자,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젖은 내 머리끝을 매만지던 이재현이 나지막이 말했다.

“불안해서 그랬어.”

이해할 수 없는 답이었다.

“뭐가?”

“난 널 잘 알아서 어렴풋이 돌아봐 줬다는 걸 알지만…… 역시 확인받고 싶었거든.”

머리를 매만지던 손이 내 턱을 들어 올렸고, 곧 아랫입술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이 입으로 마침표 찍힌 답을 듣고 싶었어.”

“…….”

“도망갔으면 놔줄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먼저 찾아왔으니까 안 놔줄래.”

도망간다는 건 아마 내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구는 걸 의미하는 듯했다. 내가 이 일을 따지기로 마음먹었을 때부터 완벽히 이재현의 수에 걸려든 것이었다.

“대답해 줘. 네가 생각하는 우리는 무슨 사이인데?”

“…….”

상처받을 걸 고려해 미리 선을 그어 두는 비겁함. 타인에게 정서적 거리를 두는 나쁜 버릇. 그냥 가까운 사이 정도라면 티 나지 않지만, 연인처럼 깊은 관계까지 갔을 땐 상대도 그걸 눈치챌 수 있는 듯했다.

이재현의 불안감은 아마 내 모호한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겠지. 쑥스럽다는 이유로 계속 피하기만 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내가 말을 다정하게 하는 편도 아니었고, 스킨십에 적극적인 것도 아니었고, 애교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좋아한다는 표현을 나름 에둘러 하고 있었지만 확신을 주기엔 역부족일 게 뻔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묘한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이런 상황을 만든 건 나구나. 내가 불안하게 해서.’

서로를 신경 쓰고 좋아하는 사이. 그게 곧 사귀는 사이인가. 사귄다는 건 애인 사이인가? 다 비슷한 말이지만 미묘하게 단계가 다른 느낌이었다. 게다가 뭐든 입 밖으로 꺼내기엔 하나같이 낯간지러운 말들이었다. 어깨를 잡은 이재현의 손엔 점점 힘이 들어갔고, 마주친 눈은 올가미처럼 내 시선을 강하게 옥죄었다. 놈은 날 놓아줄 생각이 없었고, 지금 여기서 뭐든 대답을 내주어야 했다.

‘그래도 다 이해한다는 듯 자비롭게 웃다가 이렇게 몰아넣다니, 네 방식은 얄미워.’

울컥 올라온 감정에 이재현의 멱살을 잡아 내렸다. 날 내려다보던 놈의 얼굴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왔고, 당황한 듯 벌어진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대답…… 이걸로 됐어?”

구구절절 설명하거나, 낯간지러운 말을 꺼내는 것보다 빨리 끝낼 수 있는 답이었다. 이재현은 한 손으로 자신의 입가를 감싸듯 가린 채 몸을 세웠다. 내게 향했던 시선은 허공에 향해 있었다.

“어. 된 거 같아.”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보이는 빨개진 귀가 대답에 신빙성을 주었다. 힐끔 나를 돌아보는 이재현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놈의 시선은 다시 허공으로 향했다.

“너…… 가끔 사람 당황하게 하는 거 알아?”

“내가?”

“예상도 못 한 대답이야, 이런 건…….”

그대로 되돌려주고 싶은 말이었다. 항상 내가 예상한 범위 이상으로 수를 짜는 건 이재현 쪽이었다. 당하는 것도 거의 내 쪽이었고. 억울한 기분이 들던 찰나 또 한 번 그가 예상외의 말을 건네왔다.

“몰아붙여서 미안해.”

“……뭐?”

“나한테 그 말 듣고 싶었던 거잖아.”

역시 날 꿰뚫고 있었다. 항상 비슷한 패턴으로 흘러가는 대화였다. 놈은 원하는 답을 얻고 난 다음에서야 나를 달래듯 원하는 답을 준다. 철저히 이재현이 승리하는 구조였다.

“진실한 사과 맞아? 뭐 이렇게 맨날 쉬워.”

이번에도 패배한 듯한 느낌에 툴툴대자 달래듯 손끝을 매만져 왔다.

“언제나 진심이야. 아까도 그냥 장난이었는데, 당황한 반응이 귀여워서 못 멈췄어.”

“너…….”

“더 하면 네가 어떻게 나올지가 궁금했어. 좋아해서 괴롭힌다는 거 좀 이해되려 그래. 미안, 변탠가 봐.”

배준형이 악취미라고 했던 걸 스스로 먼저 인정하는 이재현을 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당황한 반응이 귀엽다는 것은 조금 알 것 같았다. 아까 내가 입을 맞췄을 때 멍해진 그의 얼굴도 조금 귀여웠으니까.

“너도 귀여워.”

“……내가?”

날 내려다보는 기다란 눈이 조금 동그래진 듯했다. 귀여워서 놀려 주고 싶다는 감정을 아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발을 살짝 들어 아까와 같이 짧게 입을 맞추었다. 시선을 피할 거란 예상과는 달리 날 빤히 바라보는 이재현의 목울대가 한 번 움직였다.

아까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듯한 느낌에 한 발 물러서려 할 때였다. 자세를 낮춘 놈이 내 손목을 잡아끌어 움직임을 저지하고 입술을 포개었다. 쪽. 짧은 입맞춤이었다. 입술은 떨어졌지만, 여전히 가까운 거리에서 눈을 두어 번 깜박이던 놈이 다시 입을 맞췄다. 아까보다 긴 듯 짧은 입맞춤.

이상한 기분이었다. 밀어내기엔 어딘가 조심스럽고, 시간도 짧아서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게 하는 귀여운 느낌이었다. 떨어졌다가 다시 닿은 입술도 5초 정도를 닿아 있다 떨어졌다. 잠깐이지만 감겼던 눈이 떨어진 입술에 다시 뜨였고, 조금 나른해진 듯 보이는 이재현의 시선은 내 입술에 닿아 있었다. 왜일까? 내게 허락을 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을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고, 여전히 코앞에 있는 그의 얼굴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난 네가 날 귀엽다고 생각하는 게 귀여워.”

낮게 울리는 목소리. 닿은 입술에 반사적으로 눈을 감을 때쯤, 이재현이 이제까지와 달리 나를 깊게 파고들어 왔다. 조심스럽게 얽혀 드는 살덩이에 허리가 세워졌다. 이재현은 나를 탐미하듯 한참이나 내 안을 유려하게 유영했다. 조금 숨이 막혀 그의 가슴께에 손을 올린 순간, 이재현이 뜨거운 숨을 토해 내며 내게서 떨어졌다.

내뱉는 숨이 조금 거칠다고 생각할 때쯤, 몽롱해진 눈을 한 그가 나를 책장 쪽으로 밀어 가두었다. 서 있던 자리가 바뀌자 아까까지만 해도 보였던 이재현의 얼굴이 촛불을 등져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그의 시선이 내 입술에 닿아 있을 것만 같았다.

“조금만 더…….”

느리지만 어딘가 조급한 느낌이 드는 역설적인 목소리가 귀를 울렸고, 그림자처럼 보이는 그의 얼굴이 내게 내려앉았다. 어느새 비집고 들어온 혀가 강하지만 부드럽게 엉켜 들었다. 서서히 젖어 들 듯 조심스러웠던 아까와는 달리 이브를 꼬시는 뱀처럼 집요하고 가히 유혹적인 움직임이었다. 내가 뱉어 내는 숨도 삼키겠다는 듯 이재현은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입을 맞췄다.

혀끝엔 미약한 단맛이 느껴졌고, 거칠어지는 놈의 숨만큼이나 내 숨도 가빠지고 있었다. 등에 책장이 닿았다. 더는 밀릴 곳도 없는데 자꾸 깊숙이 파고드는 놈 때문에 몸이 배배 꼬여 왔다. 그런 내 몸을 묶어 두려는 듯 허리를 잡아당기는 단단한 팔에 몸이 꽤 대범하게 밀착했고, 키스는 점점 더 거칠어졌다. 이재현의 체온에 몸이 달아오르고, 숨이 모자라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느낌이 들었을 때, 다리 사이로 밀려들 듯 들어온 놈의 허벅지에 낮은 신음을 토하며 고개를 돌렸다.

“읏, 그만…….”

거친 숨을 뱉는 이재현의 가슴께는 눈에 보일 만큼이나 오르내리고 있었다. 내 허리를 잡았던 손이 미끄러지듯 떨어지고, 이어 이재현이 내게서 두어 발 물러섰다. 욕망에 삼켜진 듯 보이는 눈은 떨어진 몸과 달리 여전히 내게 닿아 있었다.

“아…….”

머리를 짜증스럽게 털어 낸 이재현이 외마디를 뱉고, 바닥에 주저앉듯 쪼그려 마른세수했다.

“미안. 멈출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역시 손대니까 자제가 안 돼.”

“…….”

“안 밀어냈으면…… 끝도 없었을 거야. 지금도 솔직히 좀 그런 상황이거든?”

여전히 얼굴을 가리고 얘기하는 탓에 목소리가 웅얼거리듯 들려왔다.

“나한테서 도망가 줘.”

등을 둥글게 말고 어깨를 구긴 이재현은 어디엔가 자신을 가두려는 것처럼 보였다. 벌어진 입술로 새어 나오는 한숨에선 아직 들끓는 열기가 느껴졌고, 새하얗고 붉은 손끝은 조금 떨리고 있었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 신선하면서도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목구멍이 간질거렸다.

방금까지 날 잡아먹을 듯했던 눈이 지금은 들리지도 않고 있었다. 나는 한 걸음 다가가 한참을 낮아진 그의 머리를 매만졌다. 그러자 바닥을 향해 있던 이재현의 고개가 서서히 들렸다. 낮은 높이에서 날 올려다보는 이 구도 탓인지, 부드러운 머리카락 탓인지 강아지 한 마리를 앞둔 듯 사랑스러웠다.

쪽-허리를 숙여 짧게 입을 맞추었다. 하고 나서야 입맞춤했다는 걸 자각했다. 적어도 이번 건, 목적이 아닌 감정이 담긴 입맞춤이라는 것이었다. 조금 멍하니 날 올려다보는 놈이 귀여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까도 이 얼굴을 보고 싶었던 것 같다. 답지 않게 당황한 듯한 얼굴을.

“나 도망갈게. 잘자.”

볼을 두어 번 두드리곤 발을 옮겼다. 이재현은 내 손이 떨어진 얼굴 부근을 매만지며 우는소리를 내었다.

“못 자. 설레서 어떻게 자.”

“너…… 이제 아무렇지 않게 그런 얘기 하네.”

“몰라. 내가 못됐다고? 네가 제일 못됐어.”

안 어울리는 투정을 부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왜냐면 지금은 내가 이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갈게.”

“가지 마……. 라고 하고 싶지만, 오늘은 보내 줄게.”

“나중엔 안 보내 주겠다는 거처럼 들리네.”

“음……. 그냥 내 침대가 혼자 눕기엔 넓다는 것만 알아 둬.”

짓궂은 말에 그대로 뒤로 물러나 가볍게 손을 흔들며 답했다.

“넓게 써.”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려 문을 나서는 순간까지 이재현은 그 자리에 앉아 나만 응시하고 있었다.

“잘자.”

문이 닫히기 직전 들려온 속삭이듯 숨 섞인 목소리가 감미롭고 다디달아 잠시 꾹 눈을 감아야 했다.

공식적으로 우리 관계가 드러나고 달라진 게 있다면, 남들 앞에서도 애정 표현을 서슴없이 한다는 것이었다.

“더 먹고 가.”

“아침이라 안 넘어간다니까.”

“한 입만 더 넣어, 아니면 사과라도.”

내 밥에 집착하거나.

“저녁에도 비 온다던데 이따 데리러 갈까?”

“짹짹이 때문에 유태영이 올걸?”

“그래도…….”

“뭐 하러 와. 시간 낭비…….”

“내가 더 움직이면 그 시간만큼 더 볼 수 있잖아.”

오글거리는 대사를 아무렇지 않게 뱉어 냈다.

“왜…… 구재희만 달걀이 두 개야? 애인이라고 차별하냐?”

“응.”

그뿐 아니라 팀원들과도 대놓고 차별했다.

“많이 먹어. 오늘은 다 먹어야 해.”

대사와 안 어울리게 높낮이 없는 건조한 말투였지만, 날 보는 눈은 확 띌 정도로 가늘게 휘어졌다. 사랑받고 있다는 게 온몸으로 느껴질 정도의 태도. 우스운 건 처음엔 부담스럽기만 했던 놈의 애정 표현에 점차 적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항상 두 걸음 먼저 다가와 주는 이재현은 나는 움직이지 않아도 괜찮다는 듯 굴었지만, 그럴수록 한 걸음은 무리라도 반걸음 정도는 다가가 주고 싶어졌다.

“너도…… 너도 많이 먹어.”

내가 용기를 내면, 그는 나를 칭찬이라도 하듯 환히 웃어 주곤 했다. 날 아는 사람, 내가 노력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 주는 사람. 늘 불안했던 가슴 한쪽이 따뜻이 채워지는 것만 같았다.

“앞으로 아침저녁 따로 먹을 생각 없어? 내가 비위가 약해서. 욱…….”

“몰랐는데, 나 커플 알레르기 있나 봐. 온몸이 가렵네. 젠장.”

“자꾸 식탁 위로 핑크색 기운 뿜지 마라. 부정 탄다.”

물론 나와 별개로 팀원들은 이재현의 애정 표현에 아직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권지우는 일주일 내내 오만상을 쓰며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

김세한이 다녀가고 일주일이 흘렀다. 나는 여느 때와 같이 진료실 의자에 앉아 창밖을 구경하고 있었고, 밖에선 중간에 잠시 멈춘 듯했던 비가 또 지겹게 내리었다. 날씨 탓인지 오늘도 한가한 날이었다.

돈이 어지간히 걸린 게 아니라면 이런 날은 헌터들이 보통 사냥을 안 하기도 했고, 비각성자도 집에만 있어서 다쳐 오는 손님도 현저히 떨어졌다. 그마저도 이렇게 어두워지는 시간이면 아예 방문이 없는 수준이었다.

“요즘 장마야?”

“그러게. 비 안 맞고 일하는 날이 거의 없네.”

김세한이 왔던 날처럼 진료실에는 또다시 손님 대신 권지우가 들어와 있었다.

“콜록. 콜록. 아, 미안.”

저번과 달리 이유 있는 조기 퇴근이었다. 내내 비를 맞으며 일한 탓에 감기에 걸린 모양이다.

“아침에 표정 안 좋던 게 아파서였구나. 난 또…….”

“아냐. 표정은 너희 닭살에 속이 안 좋았던 거고.”

그럴듯한 추측에 단호히 선을 그은 권지우 때문에 나는 머쓱히 머리를 긁으며 화제를 돌렸다.

“너 빠져도 괜찮대?”

“뭐. 괜찮으니까 이성재가 허락했겠지? 물론 내가 있는 편이 낫긴 한데, 오늘 아침부터 몸이 으슬으슬하더니 격하게 움직이면 머리가 아프더라고.”

“내내 비 맞더니 감기 기운 있나 보네.”

감기 같은 병은 내가 치료할 수 없기 때문에 괜히 손쓸 게 없었다. 춥다는 듯 어깨를 손으로 감싸 안은 권지우가 두리번거리다 침대 쪽으로 향했다.

“나도 웬만해선 안 빠지려고 말 안 했는데도 유태영이 알아채는 바람에 이성재 귀에 들어갔나 봐.”

“아, 유태영이……?”

권지우는 풀썩 침대에 누워 이불 안으로 들어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걔가 은근 눈치가 빠르잖아.”

“……음, 뭐. 너희 관계는 너희가 알아서 하겠지.”

권지우에게도 동료 사이에 베풀 수 있는 다정함과 배려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기준이 필요한 듯 보였지만, 내 관계도 벅찬 마당에 남의 관계까지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약은 먹었어?”

“응. 네가 감기 같은 것도 고칠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게…… 나도 아쉽다.”

힐러가 고칠 수 있는 건 외상뿐이었다. 병원이 몇 없는 오늘날의 내과 진료는 모두 약으로 해결했다. 암 같은 병을 치료하려면 답은 아고라에 남은 대학 병원뿐이었지만, 치료비가 너무 비싸 사실상 부자가 아니면 죽어야만 하는 실정이었다.

“진짜인지는 모르겠는데, 배준형이랑 이성재가 힐 받으면 힘 난다고 했거든. 해 줄까?”

“그다지 믿음 안 가는 실험체들이긴 한데…… 콜록. 받아 볼까……?”

생각보다 궁금하긴 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녀가 누운 침대 앞에 손님용 바퀴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못 이기는 척 내민 권지우의 손 위로 내 손이 얹어졌다. 침대에 누워 있어서인지, 오늘따라 혈색 없는 입술 때문인지 진짜 환자를 보는 것 같았다. 빛이 새어 나오자 권지우의 눈이 점점 감겨만 갔다. 약을 먹었다더니 꽤 졸린 건가. 얼마 안 가 완전히 감긴 눈에 잡았던 손을 조심스레 떼어 냈다.

‘잠들었나 보네. 진짜 효과가 있는 걸지도…….’

한가로운 분위기의 진료실 안에서 듣는 빗소리가 나쁘지 않았다. 가만히 잠든 권지우를 내려다보다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원래라면 깨워서 2층으로 올려 보내야만 했지만, 오늘도 날씨 탓에 환자가 올 것 같지는 않아 보여 그대로 두기로 했다.

딸랑—

순간 병원 유리문 앞에 달린 벨이 울렸다. 손님이 왔음을 알려 주는 벨. 진료실 안에 있는 내겐 가면을 쓰라는 뜻이기도 했다.

‘하필 이럴 때…….’

가면을 쓰고 잠든 권지우를 한 번 내려다본 뒤 진료실을 나섰다. 남아도는 게 병실이었고, 치료를 위한 도구는 내 손 하나뿐이었으니 환자를 다른 병실로 안내하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진료실이라고 해 봤자, 내 방에 불과했으니까.

복도 쪽에서 들려오는 걸음 소리는 한 사람의 것이었다. 삑-삑- 젖은 신발이 바닥에 쓸리는 소리가 발걸음 소리에 이따금 섞여 들었다.

‘제대로 걷는 거 같네. 다친 게 다리 쪽은 아닌가?’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 환자의 상태를 대략 상상할 때쯤이었다. 생각보다 높은 위치에서 손님의 머리가 등장했다.

‘키가 크네.’

비가 와서 어두운 하늘, 딱히 불을 켜 둘 리 없는 복도, 그래서일까. 멍청하게도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체형, 걸음걸이, 실루엣만으로도 누군지 알 법한 익숙한 느낌. 상대도 나를 발견한 모양인지 두리번거리던 고개가 내쪽 방향에서 멈추어 섰다.

“어. 찾았다.”

어둠 속, 검은 정장을 입은 김세한이 뚜벅뚜벅 내게로 걸어오고 있었다.

쏴아아—

빗소리가 스산하게 들렸다. 나는 귀신이라도 만난 것처럼 가까워지는 그림자 같은 실루엣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힐끔-아직 열린 진료실 안 권지우를 돌아보다 그대로 문을 닫았다. 그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지만 아프기도 했고, 가면도 쓰고 있지 않았다. 진료실에서 흘러나오던 빛이 닫힌 문에 가려지자 복도는 한층 더 어두워졌다.

‘전에도 만났었어. 혼자서도…… 괜찮아.’

자신을 달래면서도 얼굴에 가면이 잘 붙어 있는지 확인했다. 탁-나를 두어 걸음 앞에 두고 멈춰 선 놈이 허리를 낮춰 눈높이를 맞추었다. 불쑥 시야 가득 들이밀어 진 얼굴에 꿀꺽 침을 삼켜야만 했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김세한의 하얀 피부는 공기마저 차갑게 만드는 듯해서 팔의 털이 쭈뼛쭈뼛 솟아났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듯한 물음. 나와 안부를 주고받을 사이 정도는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대체 내 어떤 점이 마음에 들어서 이렇게 살갑게 구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특유의 우디 향이 밖에서 묻혀 온 비 냄새와 어우러져 더 짙게 풍겨 왔다. 나는 습관적으로 상대를 위아래로 훑었고, 작게 움직인 고개 탓인지 내 행동의 의미를 알아챈 듯한 김세한이 어깨를 으쓱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다친 데 없어. 오늘은 그냥 감사 인사 하러 온 거야. 아, 이건 선물.”

걸어오던 내내 뒷짐 지고 있던 한쪽 팔이 내 앞으로 뻗어졌다. 그의 손엔 해바라기 한 송이가 예쁘게 포장되어 들려 있었다. 햇빛 하나 없는 비 오는 날 해바라기라니. 묘한 느낌이 드는 선물이었다. 밝은 분위기의 노란 꽃이 김세한과 참 안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장미는 아니네.’

그에게 받았던 커다란 장미 꽃다발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과 비교한다면 아는 지인에게 주는 선물 정도로는 적당한 것 같았다.

‘이 정도는 받아도 되겠지? 안 받으면 더 이상할 테고.’

조심스레 꽃을 건네받자 옅은 미소를 지은 그가 이번엔 반대 손을 내밀어 왔다.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은 손이 내게로 뻗어졌다.

“인사로 악수.”

“…….”

내 앞의 새하얗고 커다란 손을 바라보다 천천히 손을 등 뒤로 숨기며 고개를 저었다. 보이는 건 몰라도 닿고 싶지는 않았다. 김세한은 내게 들으라는 듯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순순히 손을 거두었다.

“거, 엄청 비싸게 구네.”

머쓱한 듯 벅벅 목덜미를 긁는 김세한을 살폈다. 혼자 온 건지 딱히 뒤에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일주일 사이 휴식을 많이 취했는지 테리에게 업혀 왔을 때보단 눈 밑의 그늘이 옅어진 것 같았고, 본인의 주장대로 사지도 멀쩡해 보였으며 나른하던 목소리에서도 힘이 느껴졌다.

“다 봤어?”

“…….”

“놀랐지? 나 보던 거 들켜서. 내가 원래 감이 좋거든, 가면 안에 있는 당신 눈이 어디를 보고 있는지 정도는 알지.”

보일 리 없었다. 눈 쪽에 뚫린 작은 구멍이 있다 해도 가면 속 모든 건 검게 보일 뿐이니까. 하지만 마주친 눈은 정말 나를 꿰뚫어 보고 있는 듯 빛나서 고개를 돌렸다. 거짓말일 게 뻔한데도 김세한이라서일까,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어 마른침을 삼켰다.

“왜 아무것도 안 해? 안으로 들어오라든지, 아니면 차라도 들라든지 해야지. 여기 주인은 당신이고, 난 손님인 거잖아.”

김세한이 빛이 새어 나오는 진료실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는 것이다. 여전히 뒷짐을 쥔 채 가만히 서 있자, 그가 답답한지 짝다리를 짚으며 물었다.

“설마…… 빗길 뚫고 꽃까지 사서 온 날 여기서 돌려보낼 건 아니지? 비 오는 날이 그나마 한가하다고 해서 딱 맞춰 왔더니…….”

어디서 들은 소문인지 몰라도 꽤 정확한 정보였다. 결국 날씨와 더불어 이 시간에 나타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것이었다. 탁탁-김세한이 발끝을 까딱였고, 바닥에 구두 부딪히는 소리가 초라한 병원 복도를 울렸다. 그가 무언가 불만이 있거나 재촉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눈썹을 까딱이던 김세한이 진료실 문을 당장에라도 열어젖힐 듯 손을 뻗었다.

‘권지우 보여서 좋을 건 없을 텐데. 가면도 안 쓰고 있고, 혹시라도 그때의 기억과 연결된다면…….’

처음 KSH 건물에서 벗어나 만난 사람, 그리고 내가 ‘페르’였을 때 기대려고 했던 사람, 권지우. 날 미행했던 김세한이 그때 그녀의 얼굴을 봤을지도 몰랐다. 아니, 봤다고 해도 기억할 리 없었지만 페르와 관련된 인물을 굳이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김세한의 소매 끝자락을 잡아당겨 이끌었다. 널린 게 병실이었고, 차는 타 주면 그만이었다. 그는 마치 솜사탕처럼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만큼, 내가 끄는 대로 바짝 따라왔다. 드륵-병실의 문을 열자 그가 나를 지나쳐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여기 잘 안 쓰지? 텅 빈 창고 느낌이야.”

어두운 병실에서는 창고 같다는 김세한의 묘사가 와닿을 정도로 눅눅한 냄새가 났다. 불을 켜자 새하얀 천장에 외로이 달린 시린 느낌의 형광등 하나가 방 안을 비추었다.

“당신이 일하는 방을 보고 싶었는데…… 환자가 아니면 안 된다는 건가. 아니면 진료실에 숨겨 놓은 거라도 있어?”

잘도 정답만 짚어 오는 놈에 또 한 번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내 표정이 보이지 않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고개를 젓자 김세한은 굳이 캐내지는 않겠다는 듯 병실 안쪽에 덩그러니 놓인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곳의 침대를 사용하는 이는 김세한이 처음이었다. 그간 주기적으로 침구 관리를 해 온 게 다행이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자, 다음은 차만 내오면 되는 건가?’

여기서 기다리라는 뜻으로 손바닥을 내밀고 몸을 틀려던 순간이었다.

“잠깐.”

김세한이 나를 불러 세웠다. 원하는 차 종류라도 말하려는 건가 싶어 돌아보자 침대에 삐딱이 앉아 다리를 꼰 김세한이 가까이 오라는 듯 손을 까딱였다.

“말이 그런 거지. 차는 필요 없어.”

“…….”

“그냥 당신이랑 얘기하고 싶어서 만든 구실이니까. 무슨 뜻인지 알았으면 이리 와 봐.”

무슨 뜻인지 이해 못 했으면 안 가도 되는 걸까. 김세한은 여전히 곧 나갈 것처럼 문 앞에 서 있는 내가 못마땅한 듯 이번엔 인상을 쓰고 침대를 팡팡 두드렸다.

“빨리.”

역시 내 이해는 그다지 필요 없는 모양이었다. 어차피 무력이든 지력이든 김세한을 이길 리 만무했기에 침대에 앉은 그의 앞에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그렇게 서 있게? 이러니까 대화하는 게 아니라 내가 당신 혼내는 거 같잖아.”

그는 내가 경계하는 모습에 눈썹을 찌푸리고 불만을 내비쳤다. 그렇다고 해도 정말 김세한의 옆자리에 앉을 자신은 없었다. 고민하던 내가 짝다리를 짚고 팔짱을 끼자 괜찮은 피드백이 되었는지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었다.

“당신이랑 있으면 신기해. 함께 대화하는 것도 아닌데 엄청 통하는 느낌이야. 표정도 안 보이고, 목소리도 안 들리는데. 이상하네.”

글쎄. 다 떠나서 우리가 남남으로 만나 복잡한 대화를 하지 않아도 되는 데서 오는 편안함일지도. 그러나 김세한이 본능적으로 느끼는 감은 꽤 날카로웠고, 이 이상 가까워지는 것은 위험했다.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내쉬었을 때 그가 말을 이었다.

“근데…… 당신이 가면을 벗고 말을 한다고 해도 이 이상 통할 거 같지 않은 느낌이다?”

김세한은 비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차라리 당신 표정과 목소리를 못 읽는 지금이 더 피로도 없이 대면할 수 있는 거 같아. 아무튼, 난 당신이 꽤 맘에 든단 말이야.”

김세한이 나를 마음에 들어 하는 이유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제한된 정보를 가진 내게 피로감을 덜 느끼기 때문인 듯했다. 사람을 잘 파악하고 눈치가 빠른 게 장점이지만 본인에겐 스트레스로 다가오는 면이 있을지도 몰랐다. 혹은 그저 묘한 행색 때문에 호기심을 사 버린 걸지도 몰랐지만.

“게다가 이제 내 은인이기도 하고.”

“…….”

“살려 줘서 고마워.”

그가 나를 보며 환히 웃었다. 좀처럼 보기 힘든 얼굴에 내 입가에도 미소가 감돌았다. 가면 너머로 둥글게 보이는 김세한이 온전히 스크린 속의 찬란한 주인공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지금 이 상황도 한결 편안해졌다. 처음부터 이 정도 사이로 만났더라면 좀 더 괜찮은 관계가 되었을까?

“그래도 우리 좀 친해진 거 같지 않아? 당신도 이제 나 보고 안 떨고……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지?”

김세한답지 않은 조심스러운 물음에 작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다행이네.”

내리깔린 눈, 안도감이 느껴지는 얼굴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러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김세한이 입을 열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순간이었다. 창 너머론 여전히 빗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미동 없는 김세한을 살피다 손에 들린 해바라기를 바라보았다. 새하얗고 서늘한 이 공간과는 어울리지 않는 따뜻한 느낌의 꽃이었다. 그래서 역시 김세한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힐끔 다시 시선을 옮겼을 땐, 어느새 재킷을 벗은 채 베개를 만지작거리는 김세한이 보였다.

“감사 인사는 다 했고, 이제 본론.”

곧 돌아갈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침대에 앉은 그의 자세는 점차 더 편해지고 있었다.

“당신, 불면증 치료도 해?”

이어지는 질문에 나는 잠시 멍해졌고,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 이상하네. 아주 오랜만에 푹 잤거든, 당신한테 치료받았던 그날.”

“…….”

“악몽도 안 꾸고…….”

그건 조금 나아진 그의 몰골이 이미 설명해 주었다. 약간 늘어진 자세로 날 바라보는 그의 눈꺼풀이 아까보다 무겁게 보이는 건 착각이려나.

“뭐. 당신이 내 스카우트도 단번에 거절했으니까 고용하는 건 포기했고. 단골손님이나 해 볼까 해서.”

불길한 느낌의 서두였다.

“나 좀 재워 주라.”

불길한 느낌은 틀리지 않는다는 가설을 증명하는 본론이었다. 그 황당한 요구에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고개를 젓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이미 베개를 베고 반쯤 누운 김세한은 신발을 벗고 있었다.

“어차피 여기 병실 많잖아. 당신은 의사고, 치료한 환자 경과를 살피는 것도 의사가 할 일이고…….”

“…….”

“나 환자 맞아. 겉만 멀쩡하지, 안은 다 망가져 있거든. 솔직히 좀 한계야.”

비스듬히 누워 날 바라보는 김세한의 눈이 천천히 끔벅거리는 속도를 늦추었다.

“딱 이 상태야. 깨어 있는 내내 몽롱하거든. 근데 자려고 누우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사람 때문에 잠이 안 와.”

“…….”

김세한의 눈은 그리움에 잠긴 듯 애상에 젖어 흐릿했다. 생각나는 사람이라면 페르일 게 뻔했다. 다쳐선 안 되는 주인공이 다치고, 병들었다. 역시 내가 개입해 주인공과 스토리를 망쳐 놓은 듯했다.

‘뭐, 지금까지 마주하면서 어느 정도 눈치는 챘었지만,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 생각했는데…….’

대체 언제쯤 흐름이 원작에 가깝게 돌아올까.

“근데. 이상하게 지금은 잘 수 있을 거 같아, 당신이 옆에 있어 주면.”

“…….”

잔뜩 낮아진 목소리는 물에 잠긴 것처럼 아득하게 들렸다. 그는 어느새 한껏 나른해진 눈을 하고 내 쪽으로 백골처럼 창백한 팔을 뻗어 왔다. 닿기에는 요원한 거리였다.

“이리 와 줘.”

“…….”

“어차피…… 지금 한가하잖아. 잠시라도 좋으니까 옆에만 있어 줘. 응?”

금방 꺼질 촛불처럼 떨리는 목소리, 어리광이라기엔 애절함이 묻어나는 말이었다. 그만큼 괴롭다는 걸까. 나는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발을 옮겨 침대 앞으로 다가갔다. 확 뻗어진 김세한의 손이 내 손목을 낚아채 당겼고, 그 때문에 중심을 잃어 침대에 걸터앉는 꼴이 되었다.

“됐어, 딱 이 정도. 이거면 충분해.”

“…….”

손목을 쥐었던 김세한의 손이 순순히 내게서 떨어졌다. 그가 닿았던 곳엔 소름 돋을 만큼 익숙한 온기가 남아 목덜미가 저릿했다. 숨을 크게 뱉은 그는 완전히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고마워.”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차분한 숨을 규칙적으로 뱉어 냈다. 잠들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이 사실이었던 모양이었다. 좁은 병원 침대, 퀴퀴한 냄새가 나는 병실, 각 잡힌 셔츠와 무거워 보이는 벨트. 뭐하나 잠들기 편한 요소가 없는데도 눈을 감은 김세한은 아이가 울다 지쳐 잠든 것처럼 온순하게 숨을 뱉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늘어진 창백한 손은 침대를 짚은 내 손과 아주 약간의 거리만 떨어져 어렴풋이 온기가 느껴졌다. 일부러 이러는 걸까. 마치 선을 그어 놓고 철저히 지키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니 거절하기도 모호한 상태였다. 물론 거절 해 봤자였지만.

내게 불면증을 치료하는 능력 따위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불면증으로 인한 고통은 알고 있었다. 그럴 땐 옆에서 온기를 뿜어 주는 사람이 위로가 되어 준다는 것도. 그러니 아마 김세한에겐 지금 옆에 있어 줄 사람이 필요한 거뿐이었다.

‘알겠는데. 그게…… 왜 하필 나냐고.’

처음엔 꼿꼿이 세웠던 허리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늘어졌다. 김세한이 옆에 있는 위험천만한 상황이었지만 순한 양처럼 곤히 자는 탓인지 긴장감이 다 빠지는 듯했다. 여전히 셔츠 안쪽 손목엔 어울리지도 않는 목걸이가 감겨 있었고, 많이 야윈 탓인지 손목의 뼈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밥도 제대로 못 먹는 건가……. 자지도 못해, 먹지도 못해. 거기에 몸은 혹사하고. 안 쓰러지는 게 이상하지, 김세한…….’

이래서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안쓰럽다고 생각하면 걱정될 테고, 그러면 손을 뻗고 싶어질까 봐. 하지만 손을 잡아 줄 수 없다면, 결국 김세한이 스스로 페르의 기억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분명 페르는 그날 죽었고, 영영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낮은 한숨을 내쉬던 그때, 김세한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싶더니 이내 눈물이 흘렀다. 길게 늘어진 눈매를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그의 콧대를 넘어와 베개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 장면을 눈에 담은 순간, 머릿속이 백지가 되어 버렸다. 충혈되거나 울 것 같은 눈은 본 적 있지만 정말 눈물을 흘리는 김세한을 눈에 담는 건 처음이었다. 베개를 적신 눈물이 유리 조각처럼 가슴을 저미는 것 같았다.

‘김세한이 울 리가 없는데. 울면…… 안 되는데.’

피도 눈물도 없는 냉랭한 주인공,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는 주인공. 그게 내가 만든 김세한인데. 지금 눈앞에서 우는 이 남자는 대체 뭘까. 대체 무슨 꿈을 꾸는 걸까. 작가로서 나는 지금 너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왜 그랬을까. 무의식적으로 움직인 손이 김세한의 손끝에 닿은 순간이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내 손을 잡고 오므라지는 손에 잠시 놈이 자는 게 맞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 움직임 이후 미동 없는 몸과 일정한 간격으로 오르내리는 가슴이 그가 의식이 없음을 증명했다. 잠결에 손을 쥐다니, 갓난아이 같은 반응이었다. 감싸 쥐어진 두 손가락을 타고 포근한 온기가 전해져 왔다.

‘뭐 하는 거야. 정말.’

지금 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건 자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손을 빼면 김세한이 깰 것만 같았고, 애초에 먼저 닿은 것은 나였다. 단순히 지금 당장 우는 애를 달래듯 뭐라도 해 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이건 그냥……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측은지심이자 작가로서의 책임감이었다. 어쩌면 페르였던 자의 죄책감도 포함되어 있으려나.

흐르던 눈물이 멈춰 젖은 속눈썹이 완전히 마르게 될 때까지 나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멍하니 자는 얼굴만을 바라보았다. 병실에는 시계가 없어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콜록-콜록—

그때 밖에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권지우의 것이었다. 그 소리 탓인지 김세한의 눈꺼풀이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몽롱한 기운이 가득한 숨이 크게 뱉어지고 건조해 보이는 입이 열렸다.

“손님 왔나 보다……. 약속대로 가 볼게.”

아직 잠기운이 남은 눈은 조금 붉었고, 풀리지 않은 피로가 얼굴에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옮아 버린 나른한 기운에 뒤늦게 잊고 있던 잡힌 손을 빼내었지만, 김세한의 시선은 이미 떨어진 내 손에 닿아 있었다.

“아.”

김세한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작은 탄성을 뱉고는 다시 눈을 감은 채로 입을 열었다.

“미안……. 잠결에 잡았나 보네.”

잠이 덜 깬 듯한 목소리는 조금 갈라져 있었고, 눈꺼풀도 아직 무거운 듯 보였지만 그는 곧바로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목이 뻐근한 듯 이리저리 매만지던 김세한이 눈을 내리깐 채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웃음을 흘렸다.

“역시 오길 잘했네. 잘 잤어.”

“…….”

“그나저나 잠들면 가 버릴 줄 알았는데, 계속 같이 있어 준 거야? 그런 거면 좀 감동인데.”

“…….”

“아니면 아까 그 손, 내가 못 가게 잡은 건가…….”

대답을 바라는 말은 아닌 듯, 혼잣말 같은 크기의 목소리였다. 신발을 신고 몸을 일으키는 그를 따라 나도 엉덩이를 뗐다. 옷매무새를 점검하던 김세한이 벗어 놓았던 재킷을 걸치곤 언제 어디서 꺼냈을지 모를 흰 봉투를 건넸다.

“자, 오늘 치료비.”

아니나 다를까, 봉투 안에는 노란색 지폐들이 그득 들어 있었다.

“어때? 나 꽤 쓸 만한 손님이지. 원하면 더 줄 수 있어. 이 정도면 여기 병원 VVIP는 할 수 있지 않겠어?”

구겨진 내 표정을 알 리 없는 김세한은 조금 거들먹거리듯 말했다. 봉투를 다시 가져가라는 뜻으로 내밀자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손을 밀어냈다.

“좀 받지? 안 받으면 당신이 나한테 아무런 대가도 없이 몇 시간 정도는 써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버릴 거 같은데. 당신, 나한테 그 정도로 마음 안 열었잖아.”

“…….”

“아니면 그쪽, 대가 없는 친절을 아무한테나 베풀 만큼 착한 사람이야?”

어딘가 비꼬는 듯한 말투에 순순히 봉투를 챙기자 그제야 놈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지어졌다. 그때였다. 드륵-문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뭐야. 손님 있…… 어?”

안으로 들어서려던 권지우가 김세한을 보고 멈추어 섰다. 그나마 그녀가 가면을 쓰고 있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콜록, 콜록-”

권지우의 기침 소리가 방 안을 울리고, 김세한은 그제야 상황이 이해된 듯 나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아. 이 기침 소리, 손님 게 아니었구나. 좀 더 잤어도 됐는데 아쉽네.”

억지로 기침을 삼키는 듯 막힌 소리를 내던 권지우가 성큼성큼 병실로 들어와 나와 김세한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리고 나를 자신의 뒤로 감췄다.

“김세한, 당신 뭐야. 왜 또 왔어?”

“흐음…… 왜 또 왔냐고 묻는 걸 보니까, 저번 주에도 여기 있었나 보네. 여기 원래 둘이 운영해?”

“콜록-쓸데없는 거 묻지 말고! 왜 또 왔냐고!”

권지우는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로 소리치듯 물었고, 김세한은 그녀의 목소리에 묻은 적대감을 읽은 것인지 살짝 뒤로 물러서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테니 경계를 풀어도 된다는 의미의 모션인 듯했다.

“병원에 아파서 오지, 다른 이유가 있겠어? 그보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렇게 소리를 질러. 나도 여기 손님인데, 조금 상처받으려고 하잖아.”

“여긴 당신 같은 사람 위해서 만든 데 아니야. 아프면 아고라 대학 병원을 가든, 당신이 고용한 힐러한테 가든 하라고. 괜히 애 딸린 유부녀 찾아와서 찝쩍대지 말고.”

애 딸린 유부녀. 언젠가 팀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김세한이 나를 그렇게 알고 있다고 했었는데, 거기서 따온 호칭인 것 같았다. 언제 들어도 낯선 칭호에 그 단어가 뇌에 흡수되지 못하고 귀 언저리를 맴돌았지만, 김세한은 다른 단어가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찝쩍대?”

“그래. 이 해바라기도 당신이 준 거지? 그렇게 좋게 보이지는 않는데. 얘 남편이 보면 딱 오해하기 좋은 상황이거든, 지금.”

여기서 남편이라면 이재현을 뜻하는 게 분명했다. 김세한은 무언가 짜증 난다는 듯 휙휙 눈을 돌리다 혀를 차며 권지우를 노려보았다.

“나도 임자 있어.”

“……뭐?”

보이는 건 그녀의 뒤통수뿐이지만, 목소리만 들어도 당황해 구겨졌을 얼굴이 훤히 그려졌다. 김세한은 여전히 불쾌하다는 듯 권지우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나도 사랑하는 사람 있다고. 그니까 걱정 마. 그 사람 이외의 여자한텐 성적으로 관심 없으니까. 그쪽 말대로 찝쩍…… 대는 것처럼 보여도 ‘그런’ 의미는 없다고.”

그의 시선이 권지우 너머의 내게로 향했다가 권지우에게로 되돌아갔다. 그러곤 작게 말을 이었다.

“뭐. 좋은 사람이라곤 생각하지만.”

권지우는 기가 찬다는 듯 작은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얘 남편이 우리 리더인데, 또라이인 데다가 질투가 아주 많은 놈이거든. 특히 딴 놈이랑 있는 꼴을 못 봐. 이 장면도 그놈이 목격하면 또 식탁 위 분위기 안 좋아질 거 같은데 빨리 좀 돌아가 줄래요? 손님.”

비꼬는 게 뻔한 말투에도 김세한의 눈은 느긋하게 허공을 응시하다 돌아왔다.

“아. 애 아빠라는 사람?”

김세한도 ‘자신에게 몬스터를 날린 건방진 남자’가 꽤 기억에 남은 모양인지 누군지 알겠다는 듯 되물어 왔다. 다행히 권지우는 ‘애’라는 말에는 집중하지 않은 듯 계속 김세한을 향해 삐딱한 말을 보냈다.

“그래. 안 그래도 얘 데리러 온다는데 괜히 마주치지 말고 협조 좀 하지?”

“그렇다면 뭐.”

김세한은 순순히 등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권지우가 들어와 이미 열린 병실 문을 통해 유유히 빠져나가며 나를 돌아보았다.

“또 봐.”

뭐라고 대꾸할 겨를도 없이 은근한 미소 띤 얼굴이 닫힌 문 너머로 사라졌다. 탁-문 너머로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흐릿해지고, 딸랑-벨 소리가 들려와 그가 떠났음을 알렸을 때쯤, 허, 하고 외마디를 뱉은 권지우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마지막에 저놈, 뭐라고 한 거야? 또 보자는 건 또 오겠다는 거 아냐?”

“……그럴지도.”

“미친 새끼 아니야. 지금 내 말 콧구멍으로 들었나! 콜록콜록! 아씨…… 골 울려.”

내 손엔 그가 남기고 간 돈 봉투와 해바라기가 들려 있었다. 권지우에게 돈 봉투를 건네자 바로 열어 볼 거란 추측과는 달리 이미 내용물은 알고 있다는 듯 꾹 움켜쥐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주 돈을 물 쓰듯 쓰네. 이거면 다 용서되는 줄 아나. 콜록-아파서 왔다고 하던데, 쟤 또 어디 다친 거야?”

“아…… 살려 줘서 고맙다고 감사 인사하러 온 거 같아.”

어느새 해바라기는 아까보다 조금 시들어 고개를 떨궜고, 생생한 색감도 바래 있었다. 나는 그녀를 지나 진료실로 자리를 옮겨 쓰지 않는 긴 물 잔에 물을 채워 넣었고, 포장을 벗긴 해바라기를 담가 놓았다. 삐딱이 진료실 문 앞에 기댄 권지우는 그런 나를 관찰하듯 바라보았다.

“그놈이 준 거 소중히 하지 말지? 보기 좀 그렇다.”

“뭘. 그냥 보면 좋은 게 꽃 아니야? 그냥 살려 준 게 고마워서 준 감사 선물 정도야. 나한테도 그 정도의 의미고……. 아, 그보다 아까 머리 잘 썼더라.”

“뭐가?”

권지우는 여전히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되물었다.

“유부녀라고 한 거. 김세한이랑 같이 있으면 안 된다는 이유로 괜찮았던 거 같아.”

“갑자기 너랑 이성재 닭살 떨던 게 생각나서 말한 건데 뭐. 사실이기도 하잖아.”

“뭐가? 나 아직 결혼 안 했는데.”

“아니. 그거 말고 그 나머지 말은 다 사실이라고. 내가 봤을 때 이성재는 너랑 김세한이 같이 있는 꼴 보면 질투가 아니라 분노할 수도 있어. 그놈 특유의 사람 쥐어짜는 형태로 툴툴댈걸.”

일리 있는 말이었다. 감자를 사러 갔던 나를 데리러 왔던 그날에도 대놓고 질투 나고 불안하다고 말했었으니까.

힐끔힐끔 나를 살피던 권지우는 머리를 넘기며 말을 이었다.

“너희 셋 감정 문제 다 떠나서, 김세한이랑 이 이상 가까워지면 위험한 건 말 안 해도 알지? 제대로 거리 둬. 네가 페르라는 걸 들키면 사실상 우리도 위험…….”

“응, 알아.”

“안다니 다행이네.”

“오늘 일…….”

말이 끝나기도 전에 권지우가 세차게 고개를 저어 왔다.

“당연히 말 안 해. 이성재 때문에 피 마르기 싫어. 너희 싸우면 같이 일하는 우리 등 터져 나가니까 부탁 좀 하자.”

“응. 알겠어.”

나를 빤히 바라보던 권지우는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넌지시 물었다.

“김세한한테 미련 남았어?”

“……걱정 마. 만약 남아 있다고 해도 길은 정해져 있고, 번복될 일 없어.”

나와 그의 관계에 마음은 아무런 힘이 없다. 김세한을 떠나 거리를 두고 나서는 더더욱이 체감했다. 우리는 처음부터 맞닿을 수 없는 평행선이었다. 우리 둘에게 차이가 있다면, 나는 그 사실을 알지만, 김세한은 모른다는 것뿐이다. 정해진 진리는 아무도 거스를 수 없다. 따라서 나는 이재현의 손을 잡은 데에 후회가 없다. 감정적인 모든 걸 떠나 이 길이 맞는다는 확신이 있다.

권지우는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대답 말고, 네 감정이 궁금해서 한 질문이었어.”

“얼마 전에도 너한테 그런 질문 받은 적 있는 거 같은데……. 계속 묻는다는 건 내가 애매하게 굴고 있다는 건가?”

내 말에 그녀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돌려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네.”

입 안이 쓰디쓴 초콜릿을 머금은 듯 텁텁해졌다. 김세한이 억지를 부린다 한들 최선을 다해 밀어냈다면 오늘 같은 일은 없었을 것이다. 저번이야 주인공의 목숨을 살렸을 뿐이라고 한다면 오늘은 정말…… 내가 거절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날 바라보는 눈과 부드러운 목소리가 내내 내게 애원하는 듯 보여서 매몰차게 굴 수 없었다. 평생 옆에 있어 줄 수도 없으면서, 괴로워 보이는 놈이 안쓰러워 오늘만큼은 손을 뻗어 재우고 싶다고 생각했다.

“다음엔…… 다음번엔 이런 일 없도록 할게.”

해바라기의 꽃말은 기다림. 마음에 품었던 사람을 완전히 잊는 데에는 나도, 김세한도 시간이 더 필요했다.

“완전히 지워 볼게.”

불청객인 김세한이 몰고 왔던 비는 어느새 그치었고, 나는 조금 생생해진 노란 꽃잎을 멍하니 매만졌다. 무언가 하려던 말을 삼킨 듯한 권지우의 한숨 소리가 고요한 진료실을 울렸다.

-다음 권에 계속—

SSS급 집착남에게서 도망치는 방법 5

9. 불청객(2)

권지우는 약속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듯했다. 김세한이 내 병원으로 왔다는 다소 큰일은 두 번 다 비밀이 되어 버렸다. 애써 더 미안한 일만 만들지 않으면 된다고 스스로를 다그쳤지만, 내 노력이 무색하게 김세한은 해바라기가 다 시들기도 전에 다시 날 찾아왔다.

잠깐 비가 그쳤던 3일의 시간이 지나, 먹구름 낀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할 때쯤이었다. 딸랑, 손님이 왔음을 알리는 종소리에 가면을 쓰고 읽던 책을 덮었다.

“안녕.”

드륵-노크도 없이 진료실 문을 연 김세한이 태연하게 인사를 건네왔다. 몇 번이나 철렁한 가슴은 이제 지친 듯 그의 등장에도 이전만큼 뛰어 오지 않았다. ‘또 봐.’라는 예고를 하고 갔던 터라 언젠가 또 올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 그 간격이 너무 짧았다. 나는 꾹 한숨을 삼키며 시계를 돌아보았다. 저녁 여섯 시. 저번과 비슷한 시간대였다.

“또 온다고 했잖아. 꽤 피곤한데, 오늘도 치료 좀 해 줘.”

“…….”

“여기 어쩐지 낯익네. 처음 왔을 땐, 나 여기서 치료한 거지?”

느긋하게 진료실로 들어온 그가 주변을 살피듯 두리번거리기 시작했고, 곧 책장 앞에 멈춰 섰다. 워낙 별거 없는 진료실이어서 그런지 책장이 가장 눈에 띄는 모양이었다. 별 흥미 없는 눈을 하고 책들을 훑어 내리던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를 흘렸다.

“죄다…… 소설책이네.”

쿵-나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3년간 원하는 소설을 구해다 줬던 김세한이 내 취향을 모를 리 없었다. 역시 내 흔적이 묻어 있는 이곳은 위험했다. 요란스레 일어난 나를 보는 김세한의 눈에는 당황스러움이 담겼다.

“보면 안 되는 거였어? 무슨 책이 이렇게 많나 싶어서.”

“……후.”

“당신 지금 한숨 쉬었지? 화났나 보네. 안 건들게.”

김세한은 책장에서 두어 발 물러나 항복한다는 듯 양손을 올려 보였다. 대답 없는 내 반응을 기다리듯 눈치를 살피던 그가 이번엔 책상 끝에 놓인 해바라기를 보며 미소 지었다.

“잘 관리해 줬구나. 아직 살아 있네.”

무언가를 들킨 듯한 느낌에 김세한을 일단 여기서 나가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침없이 다가가 옷깃을 잡아끌자, 저번과 똑같이 고분고분 따라왔다. 진료실을 벗어나자마자 나는 놈의 옷깃을 놓아주며 병원 정문 쪽을 가리켰다. 나가 달라는 말이었다. 내 뜻을 단번에 알아들은 듯한 김세한은 눈썹을 늘어뜨리다 이내 불만스럽다는 듯 입술을 삐죽였다.

“싫어.”

“…….”

“당신한테 피해 안 주려고 사람 없을 때 온 거야. 내가 비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을 거 같아?”

그제야 저번과 비슷한 날씨, 비슷한 시간에 찾아온 게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 팔짱을 끼었고, 놈은 내 방어적인 자세에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 사람 살리는 사람이잖아. 그럼 나도 살려. 저번에 당신 동료 말이 신경 쓰이나 본데, 나 지금 환자로 온 거야. 나도 당신 고객이라고. 날 치료할 수 있는 게 당신뿐인데 진짜 이럴 거야?”

“…….”

“왜 그렇게…… 나를 싫어해?”

한껏 처진 어깨와 달리 나를 바라보는 눈에는 원망이 담겨 있었다. 억울하다는 태도였다. 하지만 이번엔 나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팀원들에게 김세한의 방문을 숨기고 싶다는 건 뭐가 됐든 떳떳하지 못하다는 것이었으니까. 작가로서 주인공에게 해 줄 건 다 해 주었다. 한 번 살려 주었고, 한 번 휩쓸려 줬다. 이 이상으로 베푸는 건 더 둘러댈 핑계도 없이 감정의 문제였다. 나약해지고 싶지 않았다. 3일간 혹여 김세한이 다시 찾아왔을 때 어떻게 대할지 상상하며 다짐했다. 여기서 확실히 선을 긋고 내치겠다고. 서로의 은인으로 잠시 닿았던 우리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다.

설령 날 미워하고 원망하더라도 이 이상은 허락할 수 없다.

다시 한번 병원 문 쪽을 가리키자, 잔뜩 힘이 들어갔던 김세한의 눈꺼풀이 느슨해졌다. 더 화내지 않는 건가. 포기한 건가. 예상한 반응이 아니라 오히려 불길한 기운이 감돌 때쯤이었다.

“아니면…… 이대로 내가 쓰러져서 죽기 직전인 상태가 되어야…… 날 살리려고 달려오려나?”

지금까지와 결이 다른 나지막한 목소리가 서늘한 복도를 울렸다. 순간 김세한의 눈에 예전과 같은 광기가 비쳤다고 생각할 때쯤이었다. 보란 듯 앞으로 뻗어진 손에 작은 빛과 함께 익숙한 검이 들렸다. 그 저의를 파악할 새도 없이 그가 나를 향해 비릿한 미소를 보였다.

“상처가 필요하면 내고…….”

귀가 시릴 만큼 날 선 소리가 났다. 모든 게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챙-그의 손에서 떨어진 검이 병원 바닥과 부딪혀 요란한 소리를 내다 빛이 되어 사라졌을 때, 후드득-떨어지는 검붉은 액체가 바닥을 적시기 시작했다. 비릿한 냄새가 폐부를 가득 메우고, 내 손까지 튄 무언가가 미적지근한 온기를 남기며 주룩 흘러내렸지만, 도저히 사고가 감각을 뒤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붉게 물든 바닥에 나는 뒤늦게 그 근원지를 찾아 시선을 올렸다. 그의 새하얀 셔츠가 온통 붉었고, 옆구리에선 붉다 못해 검게 보이는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김세한은 스스로 옆구리를 베어 냈다. 피가 쏟아져 내리는 와중에도 그의 시선은 집요하게 내게 닿아 있었다.

‘이…… 미친 새끼가.’

진하다 못해 역하게 풍겨 오는 피 냄새에 작게 입술이 떨려 왔고.

“아. 아파.”

그는 마치 나에게 들으라는 듯 우는소리를 내었다. 순식간에 숨이 가빠 왔고, 손끝이 서늘해졌으며, 동시에 참을 수 없을 만큼 무서워졌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고, 그저 살려야겠다는 생각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놈의 손목을 잡아끌어 진료실로 밀어 넣었다. 내게 떠밀려 진료실 침대에 눕혀진 김세한은 눈을 감은 채 웃고 있었다.

울컥울컥 뿜어져 나오는 피에 방울방울 눈물이 떨어졌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두렵고, 당황스러웠고, 미웠다. 상처에 손을 올리곤 치료를 하는 내내 시야가 뿌옜고, 턱이 덜덜 떨려 왔다.

“당신…… 울어?”

“흐으…….”

김세한이 다치는 건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는데, 이런 식으로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상처 내는 놈이 원망스러워서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불안정한 숨소리와 떨리는 몸을 눈치챈 듯한 김세한은 한숨을 크게 내쉬며 건조한 입술을 열었다.

“미안해. 착한 사람 이용해서.”

“…….”

“근데…… 난 정말 간절했거든. 당신이 날 그대로 돌려보냈으면 또 몇 날 며칠이 지옥일 게 뻔해서. 그것보단 차라리 좀 아픈 게 나아.”

김세한의 사과에도 울어서 거칠어진 숨은 진정될 줄을 몰랐다. 치료가 완전히 끝나고 나서야 떨어지던 눈물도 멈추었다. 잠이 든 건지 의심스러울 만큼 고요히 눈을 감고 있던 김세한이 재킷의 안주머니를 뒤적이다 작은 수첩과 볼펜을 꺼내 내밀었다. 모두 새것인지 은은한 광이 돌았다.

“당신이랑 대화하고 싶어서 가져왔어. 글은 쓸 수 있잖아.”

“…….”

김세한 앞에서 글을 적어 본 적은 없었다. 따라서 글씨체를 알아볼까 봐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순순히 그가 내민 수첩과 볼펜을 받아 들어 지금 이 순간 가장 하고 싶은 말을 적었다.

[치료 끝났으니까 나가 주세요.]

코를 훌쩍이며 수첩을 보이자, 가늘게 뜬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당신, 말 못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나가라는 말밖에 안 하네.”

“…….”

“다른 얘기 하자. 아……! 아들 이름이 뭐야? 당신, 일할 때는 다른 데에 있는 건가?”

사각사각, 펜이 움직였고, 그는 눈을 느릿하게 끔벅이며 대답을 기다리는 듯했다.

[사적인 건 묻지 마세요.]

김세한은 뭐가 그리 웃기는지 작게 킥킥댔다.

“이거 봐……. 말할 수 있어도 그전이랑 달라질 게 없을 거 같긴 했어. 오히려 단호함만 늘었네.”

“…….”

“당신…… 이름은? 그 정도도 못 알려 주나.”

이름. 어차피 김세한은 알지 못할 내 이름. 펜을 들었지만 이내 아까와 같은 페이지를 보여 주었다.

[사적인 건 묻지 마세요.]

난 여전히 김세한에게 남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고, 혹시라도 내가 사라진 이후에 내 이름을 기억할까 두려웠다. 나는 이 소설에 없는 등장인물이니까.

“칫, 치사하네. 당신은 내 이름도 알고, 얼굴도 알면서. 당신네, 그 가면 쓰는 이유는 뭐야? 지독한 컨셉 같던데. 다들 얼굴이 별로인가.”

“…….”

본의 아니게 외모 비하 공격을 받아 버렸다.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쉬곤, 혼잣말하듯 한 질문에 또 같은 페이지를 보이려 하자 김세한이 수첩을 잡아 내렸다.

“됐다, 됐어. 당신같이 딱딱한 사람한테 뭘 물어.”

팔짱을 끼고 돌아누워 내게 등을 보인 김세한이 들으라는 듯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삐졌다는 듯 구는 태도에 기가 찰 뿐이었다. 상처는 다 치료했지만, 김세한의 흰 셔츠도 흰 침대 시트도 피에 젖어 점차 짙게 굳어 가고 있었다. 그가 여기 누워 있다는 건 결국 내가 김세한의 피를 두려워한다는 걸 다시금 확인해 버린 셈이었다.

‘가랬다고 자기 몸에 상처 내는 또라이가 어디 있어. 나쁜 새끼.’

병원이라는 특징을 이용한 듯한 행동이었지만, 자해를 하면서도 나와 마주친 눈은 오직 정답을 찾았다는 듯 빛나고 있었다. 아마 내가 가만있지 못할 걸 염두에 두고 벌인 일이겠지.

‘다시는 이런 일 안 만들겠다고 했는데.’

결국 김세한의 뜻대로. 또, 내 결심과는 다른 결과가 나와 버렸다. 차라리 병원에 잠시간 나오지 말아야 할까. 이렇게 막무가내로 찾아온다면 또 이런 상황이 반복될지도 몰랐다.

진료실 침대에 눌어붙은 김세한은 일어날 생각이 없는지 작은 미동도 없었다. 많이 야위었음에도 넓은 뼈대 탓인지 여전히 거대한 등이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 큰 덩치를 힘으론 밀어낼 수 없었고, 여기 누운 순간부터 그의 승리였으니 남은 시간 동안 재우는 수밖에.

체념하고 발을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다시 몸을 돌려 누운 김세한이 반쯤 감긴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뭐 향초 같은 거 피웠어?”

“…….”

“이 냄새 좋다. 내 방에도 피우면 잠 잘 올 거 같아.”

향, 자연스레 내 시선이 책상에 놓인 향초로 향했다. 몇 시간 전에 피워 뒀는데 냄새가 아직 남은 모양이었다. 나는 순순히 책상에 놓인 향초를 집어 그에게 내밀어 보였다. 시트러스 계열의 향이었다.

‘김세한 취향이 이쪽이었던가. 우디 계열 쪽일 텐데.’

김세한은 내게서 초를 건네받아 이리저리 살피다 코를 가져다 댔다. 숨을 크게 들이쉰 그가 미묘한 표정으로 다시 내 손에 초를 쥐여 주었다.

“이거 아닌데.”

이상한 일이었다. 이 방에 향이 나는 건 이것밖에 없는데. 너무 가까이에서 맡아서 다르게 느껴지는 거 아닌가. 무의식적으로 나도 향초 냄새를 맡을 때쯤이었다. 한쪽 팔이 잡아당겨지는 게 느껴져 돌아보았을 땐, 김세한이 내 손목에 코를 가까이하고 숨을 들이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 이거 당신 냄새구나.”

“…….”

이 역시 이상한 일이었다. 난 향수 같은 거 뿌리지 않으니까. 느리게 눈을 끔벅이며 또 냄새를 맡듯 크게 숨을 들이쉰 김세한이 내 팔을 놓아주곤 손등으로 눈을 덮었다.

“졸려. 잠만 자다 갈게. 다른 손님 오면 바로 나갈 테니까…….”

“…….”

“좀 봐줘. 오늘 피 흘린 환자잖아.”

놈은 내게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했고, 나는 마지못해 책상에 향초를 내려 두고 침대 곁으로 향했다. 손님용 의자를 끌어다 침대 가까이에 두고 앉아, 이제 만족하냐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자 김세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

“잘 자.”

나는 잘 수 없는 처지임을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인 인사였다. 곱게 내리깔린 눈꺼풀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고, 숨도 안정되어 있었다. 아주 금방 잠이 든 것이었다.

‘불면증…… 이라더니.’

‘불면증’이라는 병명과 달리 빠른 속도였다.

어느덧 저녁 일곱 시. 한 시간 동안 겪은 너무 많은 일에 몸도, 마음도, 정신도 너덜너덜해진 것 같았다. 새삼 눈앞에 둔 김세한이라는 남자가 얼마나 무모한 인간인지를 체감했다.

피 냄새와 김세한의 향기가 방 안에 가득했다. 나는 코가 예민한 편이었다. 그런 사람들도 본인 냄새는 잘 못 맡는다더니, 내 경우에도 그런 건가. 김세한은 정말 다른 냄새를 맡은 걸까. 적어도 내 코엔 그의 향수 냄새밖에 나지 않았다.

‘내 냄새라고?’

나는 놈이 코를 가져다 대었던 손목 부근을 킁킁댔지만 별다른 냄새를 맡지는 못했다. 하다못해 땀을 흘린 기억도 없었다.

‘잠꼬대였나?’

팔짱을 낀 채 김세한의 자는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테리에게 업혀 왔던 그날에 비하면 얼굴에 생기가 도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렇게라도 잠을 좀 자면 더 나아지려나. 이번엔 악몽도 꾸지 않는 건지 미동도 없는 놈의 얼굴을 보며 째깍거리는 시침 소리를 들었다.

별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책을 읽기엔 집중이 되지 않을 게 뻔했고, 다른 일을 한다 해도 시선은 김세한에게 머물 게 뻔했기에 옆에 있을 뿐이었다. 김세한은 내게 그런 존재였다. 아예 보지 않는 것과 계속 보는 것. 철저히 양극단의 선택지를 택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존재. 그러니 놈이 내 앞에서 알짱댄다면 난 또…… 이렇게 시선을 둘 것이다.

시간은 끝없이 흘러 어느새 일곱 시 오십 분을 향해 가고 있었다. 아직 무전은 없었지만, 유태영이 도착할 만한 시간대였다.

‘유태영에게 보여서 좋을 건 없지.’

이제 깨워서 돌려보내야 할 때였다. 하지만 곱게 잠든 김세한을 보고 있자니 조금 망설여졌다. 1분만 더…… 재울까. 이대로라면 한 시간도 못 잔 셈이었으니까. 이런 걱정을 하는 스스로에게 놀랄 때쯤이었다. 예고도 없이 드륵-열린 진료실 문으로 유태영이 등장했다.

“야, 구재희! 집에 가자. 어우, 복도에 웬 피가…….”

유태영은 뒤늦게 김세한을 발견한 듯 얼어붙었고, 실수했다는 듯 입을 틀어막았다. 놀란 건 사실이었지만 그리 큰일도 아니었다. 어차피 김세한은 내 이름을 알지 못하니까.

“구재희…….”

어느새 깨어난 김세한이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내 이름을 불렀다. 몽롱한 목소리 탓일까. 묘한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고, 그는 작게 뜨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게 당신 이름이구나.”

잠이 덜 깬 건지 반쯤 뜨인 눈은 멍하면서도 조금 붉었다. 숨을 크게 들이쉰 김세한은 다시 잠들 것처럼 눈을 감았다. 김세한은 여전히 미동 없이 누워 있었고 유태영은 얼어 버렸다. 진료실엔 적막이 돌았다.

“구재희. 이름 예쁘네.”

꿈속에서 중얼거리듯, 작게 움직인 입이 낮고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를 흘렸다. 김세한의 목소리로 듣는 내 이름은 마치 들어선 안 되는 것을 들은 것처럼 불편하게 머리를 맴돌아 귀를 막고 싶은 충동을 들게 했다.

‘……아니지. 이제 와서 그깟 이름이 무슨 소용 있다고.’

마지막까지 이름을 알려 주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던 때였다. 꾹 눈을 감은 김세한이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피로 젖은 침대를 벗어나 다 망가진 재킷 매무새를 점검하듯 더듬다, 또 내게 흰 봉투를 들이밀었다.

“자. 오늘분 치료비.”

“…….”

“받아. 팔 떨어져. 거절이 소용없다는 건 저번에 겪어 봐서 알 거 아니야.”

예전과 같은 상황, 다른 게 있다면 나를 보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한 손으론 목 부근 셔츠 깃를 정리하고 있었다. 뻔한 실랑이가 싫어 순순히 봉투를 받아 들었고, 그때 잠시 맞닿은 손이 오늘따라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봉투를 가져가고도 그의 손이 꽤 오래 공중에 머물러 있었다.

“갈게. 고마웠어.”

그가 진료실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언뜻 보인 눈은 내리깔려 있었다.

‘잠이 덜 깬 건가. 아니면 권지우 말을 신경 써서 유태영 앞에서 날 배려해 주는 건가.’

유태영은 몸을 움츠린 채로 진료실 문에서 비켜섰다. 문에 반쯤 걸쳐 선 김세한은 옅은 미소를 걸고 나를 돌아보았다.

“또 봐.”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다음을 기약하는 인사를 남기고 그대로 진료실을 나갔다. 유태영은 복도에서 김세한 쪽을 바라보고 있었고, 나 또한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있었다. 문을 나서는 종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유태영이 가면을 벗고 내게 달려왔다.

“어떻게 된 거야? 왜 김세한이 여기 있어?”

“……어디로 들어왔어? 종소리 못 들었는데.”

“옥상. 아니, 그보다…….”

“아, 짹짹이 데려갔었구나.”

입은 움직였지만 머리는 무슨 말을 하는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머릿속이 온통 김세한의 묘한 얼굴로 가득 차 다른 사고가 불가한 상태였다. 그런 나를 눈치챈 듯한 유태영이 어깨를 흔들어 왔다.

“김세한이 뭐라고 했어? 왜? 무슨 일인데!”

“아…….”

모든 상황을 아는 권지우와 달리 아무것도 모르는 유태영에게 지금 상황을 설명하려고 하니 까마득한 느낌이 들었다. 그간 쌓아 온 침묵을 가장한 거짓이 그만큼 크다는 걸 의미했다.

“걱정하지 마. 별일 없었어. 그냥…… 아픈 거 치료해 줬을 뿐이었고.”

틀린 말은 없었다. 김세한의 말대로 피를 흘려도, 흘리지 않아도 그는 환자였다. 그대로 두었다면 분명 또 다쳐 올 게 뻔했고, 주인공을 죽일 수 없으니 치료해 줬을 뿐이었고, 일을 크게 만들기 싫어 다른 팀원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유는 완벽했다.

“이거 봐. 치료비도 받았잖아.”

두서없이 중얼거리는 나를 보던 유태영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야.”

“…….”

“이거 너한테 줄 때, 김세한이 오늘분이라고 하더라. 너 대체 뭔데. 이런 일…… 또 있었어? 근데 왜 나는 들은 얘기가 없냐?”

날이 서 있는 목소리였다. 유태영도 눈치가 빠른 편이었고, 모든 걸 덮어 버리기엔 날 붙드는 시선이 집요했다.

[오고 있어? 저녁 다 돼 가는데.]

유태영의 허리에 채워진 무전기에선 이재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동조차 하지 않은 그가 무전기를 내려다보다 다시 나를 마주 보았다.

“이성재는…… 이런 상황 다 알아?”

“……몰라.”

“구재희, 뭐 하는 거야, 너. 우리가 가면 쓰는 게 뭐 때문인데!”

“미안. 나도 알아. 뭔가 잘못됐다는 거……. 그냥…… 아픈 사람이었어. 응.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 들키지도 않았고.”

횡설수설한 내 말은 스스로 느끼기에도 변명과 같이 들렸고, 어김없이 유태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짜증스럽게 머리를 넘기는 거로 보아 조금 화가 난 것도 같았다.

“말했어야지.”

“……괜히 큰일 만들기 싫었어.”

“……그 말, 좀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해? 뭐가 큰일인데. 김세한이 찾아온 게 큰일이야? 아니면 우리가 그걸 알게 되는 게 큰일이야? 뭘 감추려고 우리한테 비밀로 하는 거야? 난 이해가 안 돼. 너, 우리 속이고 뒤로 김세한이랑 만나고 있었던 거야? 아이러니하게 우린 그런 널 감추려고 평소에도 가면을 쓰고 다니는데 말이야.”

푹. 푹. 유태영의 말이 화살이 되어 가슴에 꽂히는 듯한 고통을 주었다. 이재현에게 알렸다면 분명 한동안 내 옆에 다른 팀원을 붙이거나, 병원을 접거나 뭐든 하나는 달라졌을 것이었다.

팀원들에게 이 이상의 부담도 주고 싶지 않았고, 이 생활도 이어 가고 싶었다.

그럴듯한 이유에도 당당하지 못한 건, 다시 기회를 준다고 해도 김세한이 찾아온 세 번 모두 같은 선택을 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난 똑같이 그놈이 신경 쓰이고 외면할 수 없었을 테니까.

“김세한한테 미련 남았냐, 너……?”

“……아니야.”

“후…….”

짧게 숨을 뱉은 유태영이 내 어깨를 놓아주며 혀를 찼다.

“그러면 태도 똑바로 해. 내가 이렇게 배신감 느끼는데 이성재는…….”

“말하지 말아 주라. 앞으로 절대 이런 일…….”

“……싫어. 그럼 정말 배신이야. 지금 네 말도…… 난 정말 맘에 안 들었어. 가서 똑바로 설명해. 필요하면 사과하고, 납득시켜. 그게 지금 네가 해야 하는 일이야. 나와, 집에 가자.”

유태영이 단호하게 말하곤 진료실을 나섰고, 나는 책상 끝자락에 놓여 있는 해바라기를 바라보다 주저앉았다. 머리도 가슴도 복잡해서 몽땅 게워 내고만 싶었다.

병원에서 집으로 가는 길 내내 유태영은 아무 말이 없었다. 무전을 치지 않았던 걸까. 삭막할 거라 예상했던 집안 분위기는 평소와 같았다. 늘 그랬듯 소소한 인사가 오가고,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자리에 앉아 밥을 먹었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말없이 밥만 먹는 이재현과 유태영 정도였다. 분위기로 보아 아직 나머지 팀원들에게 상황이 전해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는 건 이재현 선에서 잘라 냈다는 것이다. 유태영은 아마 이재현의 판단에 맡긴 걸 테고.

“다 먹었으면 내 방으로 와.”

“그래.”

상황을 알 리 없는 김성민이 평소와 같은 야유를 보내왔지만, 이재현을 따라 방으로 들어가는 걸음마다 머리가 새까맣게 물들어 갔다. 뒤에선 탁-닫히는 문소리가 간결하게 들려오고, 눈앞에서 촛불이 일렁였다.

“일단 앉아.”

“응.”

이재현은 생각보다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아끌어 침대에 앉히곤 그 옆에 앉았다. 그리고 내 손을 만지작거리며 말없이 한참을 있었다. 먼저 말을 꺼내 주길 기다리는 걸지도 몰랐지만 차마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를 보는 시선이 느껴지고, 결국 그의 입이 먼저 열렸다.

“김세한이 병원에 찾아왔다. 그게 내가 들은 전부야. 나머지는 네 입으로 들으라고 하던데. 얘기해 줘, 전부.”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어딘가 단호함이 느껴졌다. 들은 게 그것뿐이라니. 개인적인 추측이나 의견은 배제하고 눈으로 본 사실만 전한 모양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유태영은 날 충분히 배려했다. 여기서 못나고 철부지인 건 나뿐이었다. 더 별로인 인간이 되기 싫어 주먹을 꾹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럴게.”

나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다 꺼내 놓았다. 김세한이 테리의 등에 업혀 왔던 것부터, 꽃을 들고 찾아왔던 날,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일까지. 모든 일에는 내가 놈을 거절하지 못한 이유가 포함되어 있었다. 여러 단어로 표현하고 있었지만, 한 가지 공통적인 건 ‘김세한을 살리고 싶었다’라는 것이었다. 이야기하는 내내 이재현은 내 손에 시선을 고정한 채 쓰다듬기를 반복했다.

“그게 전부야.”

“음…… 나한테 얘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네가 걱정할까 봐.”

조금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던 이재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김세한이 찾아왔던 첫날 말해 줬다면……. 분명 두 번째, 세 번째는 없도록 내가 조치했겠지.”

“응, 미안. 그땐 또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

“두 번째엔? 그땐 다시 온다고 했다며.”

“……내 힘으로 거절할 수 있을 줄 알았어.”

내 말에 거짓은 없었다. 화를 낼 줄만 알았던 이재현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이 덤덤했다. 눈동자만 조금씩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타이밍에 작게 웃었다.

“왜…… 웃어?”

“김세한이랑 내 처지가 바뀐 거 같아서. 피로 네 마음 흔드는 거, 예전엔 내가 썼던 방법이기도 하고…….”

나를 만나기 위해 총을 맞고 왔던 이재현이 뇌리에 스쳤다. 나는 이재현을 치료했고, 김세한은 분노했다. 그 때문에 론의 손목이 잘렸고, 내가 밖으로 나가는 등 직접적인 갈등을 만들었던 사건이었다.

“이해해. 넌 착하니까 외면할 수 없던 것도. 여기서 화내면 김세한이랑 똑같은 놈 되는 건데…….”

“…….”

“아무튼, 널 가두려고 했던 김세한 마음도 이해 가네.”

내 손을 잡은 이재현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이 손이 김세한이랑 닿는 게 싫어.”

고개를 돌려 나를 마주 본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네 머릿속에 김세한이 있는 것도 싫고, 네 목소리로 그놈 이름 듣는 것도 싫어.”

“…….”

“좋아하는 건 독점하고 싶잖아.”

지금까지와 달리 낮게 깔린 목소리였다. 달라진 분위기에 내가 침을 삼키자, 이재현은 한숨을 크게 내쉬고 손깍지를 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해는 되는데, 짜증 나.”

“……난 네가 좀 더 화낼 줄 알았어.”

유태영의 말이 맞았다. 이재현이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내게 배신감을 느낀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한 일이었다. 밥을 먹는 내내 언성을 높이거나, 목소리를 내리까는 이재현을 상상했었는데, 막상 마주한 그는 내게 툴툴대기만 할 뿐이었다.

“화났어. 이유가 뭐든 나한테 비밀을 만든 거, 그거 우리가 했던 약속을 깨뜨린 거잖아.”

길드 모임에서 김세한을 다시 만났던 그날, 무슨 일이 생기면 숨김없이 다 말하겠다고 약속하며 손가락을 걸었었다.

“그래도…… 생각해 봤지. 나한테 말 안 한 이유가 있겠지 싶어서. 뭐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에 하나는 ‘지금 이 자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난 네가 갈등을 두려워한다는 거 알거든.”

“…….”

“그러니까 안 혼낼래. 솔직하게 털어놔 줘서 고마워. 다음에 혹시 이런 일이 또 생긴다면 그땐 꼭 먼저 얘기해 주기야. 저번에도 말했지만, 많이 서운해.”

날 파악하고 있다는 걸 떠나서, 참 대단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단단하고, 솔직하고, 어른스럽고, 여러모로 내게 과분하다.

“불안하기도 하고…….”

뒤늦게 이어진 말이었다.

“아…… 아마 들킬 일은…….”

“아니. 그냥 널 좋아하는 남자로서 네 전 애인이 거슬린다는 거야.”

이재현은 또 한 번 덤덤하게 부끄러운 말을 꺼내놨다. 화끈거리는 얼굴에 푹 고개를 숙이자 옆에선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한 말인데 왜 네가 부끄러워해.”

“몰라. 그런 말을 어떻게 당당히 해? 대단하다, 진짜.”

“그런가. 그냥 적어도 감정엔 솔직해지고 싶어. 솔직하지 못해서 널 찾는 데에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으니까.”

감정에 솔직했다면, 어린 날 불편하고 거슬리던 그 감정이 사랑인 줄 알았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치기 어린 사랑을 하고 헤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쓸데없는 상상이 이별로 끝났을 무렵, 이재현은 그런 내 생각을 귀신같이 읽어 낸 듯 깍지 낀 손을 올려 보였다.

“진짜 힘들게 잡은 거니까. 안 놔줄 거고, 뺏길 생각도 없어.”

예전에 김세한에게 들었던 말과 비슷한 말을 하는 것 같은데 무슨 차이일까. 언뜻 듣기엔 구속을 예고하는 것 같은 말이 내게 평생을 약속한다는 말처럼 들려 오히려 안정감을 주었다. 영원한 관계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난 누구보다 영원이란 단어를 믿고 싶은 인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상처받을까 봐 기대하지 않았을 뿐.

“그니까 너도 계속 잡혀 있어 줘. 도망가면 안 돼.”

다정한 말에 자꾸 기대하게 된다.

“이재현.”

“응?”

너라면 기대를 걸어 봐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좋아해.”

내 인생 최초의 고백이었다. 동시에 나도 솔직해지겠다는 결심이기도 했다.

***

김세한이 오면 바로 연락하기. 그게 이 생활을 계속하길 원하는 나에게 이재현이 건 최소의 약속이었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장마가 다 지날 때까지 김세한은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또 봐.’라는 인사를 하던 묘한 얼굴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때 느꼈던 위화감은 그게 작별 인사여서였을까.

“박 사장님, 요번 의뢰 김세한 쪽에 넣었다는 거 같던데.”

여느 때와 다름없는 저녁 식사를 하던 도중, 한동안 소식 없던 김세한의 이름이 올랐다. 배준형이 툭 하고 던진 말에 김성민이 포크로 접시를 깨뜨릴 기세로 찍으며 입을 열었다.

“아, 단골손님 하나 잃었네. 의리고 나발이고, 뭐 결국 믿음과 신뢰의 대기업이라는 건가?”

박 사장. 내가 길드에 합류할 무렵, 즉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을 때부터 의뢰를 맡기던 고객이었다. 이재현의 영업력 덕인지, 인재 발굴에 힘쓰는 인간인지 몰라도 창문 하나 없는 곳에서 잠을 잘 때부터 먹여 살려 주다시피 해 줬던 사람임은 분명했다.

‘그 박 사장이…… 이제 와서 갈아탄 이유는 뭘까.’

자본가들이 헌터를 쓰는 데에는 자기 구역에서 몬스터를 깨끗이 없애기 위한 청소나 갑작스럽게 나타날 수 있는 몬스터로부터의 엄호, 그 몬스터를 잡아 팔아 수익을 얻기 위함 등 다양한 목적이 있었지만, 뭐든 강한 몬스터일수록 값비싼 의뢰가 되는 건 매한가지였다. 그리고 이번에 새로 등장한 몬스터 의뢰는 김세한이 맡게 된 것 같았다.

“의뢰비.”

가만히 듣고 있던 이재현이 툭 던진 한 단어였다. 모두의 시선이 이재현에게로 쏠렸다.

“우리보다 낮게 불렀대.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새로운 몬스터인데 타당한 가격은 아니었어.”

똑같이 무조건 잡는다는 가정하에 가장 먼저 고려하게 되는 건 다른 부가적인 것보다 역시 가격이었다. 의뢰자와의 협상은 언제나 이재현의 몫이었기에 구체적인 이유를 듣는 건 모두 지금이 처음이었다.

“시세 다 흐려 놓네. 아니, 어차피 걔네가 1등인데 뭐 하러 그런 짓을 하지? 괜히 밑으로 내리면 우리 같은 길드만 더 힘들게 되는 거잖아?”

김성민이 턱을 괴고 인상을 찌푸리며 불만을 표했고, 모두가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에 잠긴 듯 입 안에서 혀를 굴리던 이재현이 이내 작게 미소 지었다.

“상대 고객을 뺏어 오는 데 쓰는 방법이기도 하지. 우리가 김세한 쪽 고객을 뺏어 왔을 때도 같은 방법을 썼고.”

이재현의 말에 김성민이 되물었다.

“김세한도 그렇다는 거야? 새로운 몬스터 잡을 수 있는 길드, 사실상 걔네랑 우리뿐이니까.”

“뭐…… 지금 길드 순위로 치면 그렇지.”

“아니, 뭐 하러? 그럼 그냥 우리 공격하는 거밖에 더 돼?”

“맞아. 이유는 몰라도 내 생각엔 우리에게 타격을 주려는 것 같아.”

이재현의 분석은 틀린 적이 없다. 그렇다면 김세한이 우리를 경제적으로 공격하는 이유는 뭘까. 정말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그저 일을 늘리고 싶어서일 수도 있다. 어차피 돈이라는 건 김세한에게 그다지 의미가 없고, 지금보다 더 많고 자극적인 ‘사냥’이 필요한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이유가 아니라면, 어떤 이유로 우리가 맘에 들지 않아 가하는 압박이거나, 경쟁자를 떨구려는 전략일 수도 있었다.

‘혹시…… 나와 관련된 이유는 아니겠지.’

우리 길드가 찍히게 된 이유가 경쟁 업체라서가 아니라면, 나나 다른 팀원들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어서일 가능성도 있었다. 김세한이 마음먹는다면 그런 사소한 이유로 개구리 정도는 돌로 맞혀 죽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재현이 있는 이상 우리가 ‘개구리’는 아닐 것이다.

“뭐, 이유가 뭐든 시비를 걸어 왔으니 상대해 줘야지. 수입은 좀 줄더라도 고객을 지키는 게 우선시 될 거야.”

가격 경쟁. 결국 의뢰의 시세가 내려가게 되는 셈이었지만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재현의 결론에 가만히 입 다물고 있던 박도윤이 묵직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아, 그놈 자식 때문에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박봉 되게 생겼네.”

지금 우리 상황을 정확히 표현한 한마디였다. 하지만 그다지 걱정은 되지 않았다. 여기 있는 모두가 그럴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돼 있겠지…….’

그냥 막연히 문제의 끝엔 답을 찾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우리에겐 이재현이 있으니까.

***

가격을 낮추기 시작하면서 달라진 게 있다면 바로 아래 단계 길드가 맡았던 일까지 우리가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구멍 난 수익을 메꾸기 위해선 일을 늘려야 했고, 자연적으로 팀원들은 바빠지고 있었다. 체력적으로 간당간당한 탓에 보육원 원장님에게도 당분간은 도와드리지 못한다는 뜻을 전해야 했다. 물론 사냥과 관련 없는 나만 빼고 말이다.

바빠진 팀원들에 비해 나는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병원을 운영하고, 수요일이 되면 보육원에 가 원장님을 도왔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팀원들의 크고 작은 생채기나 삔 곳을 치료하곤 했지만, 다행히 최근엔 크게 다쳐서 일하는 도중 병원에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늦여름이 지나고 지겹던 장마도 끝나, 높은 가을 하늘엔 비가 내릴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일상에 불쑥 나타났던 초대하지 않은 손님, 김세한은 사라지는 듯했다.

저녁 일곱 시, 바쁘게 돌아가던 하루가 끝나 가는 듯 보이는 시간이었다. 지금 치료하는 남자가 들어온 후로 벨 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니, 밖에 대기하는 손님 또한 없을 것이었다. 남자의 어깨 치료를 마쳤을 때였다.

“고마워, 아줌마.”

감사 인사는 좋았지만, 아줌마. 미혼인 20대가 듣기엔 거슬리는 호칭에 흘끔 손님의 행색을 살폈다. 상대야말로 나이 지긋해 보이는 아저씨였다. 하긴 목소리도 알지 못하고, 얼굴을 가려서 붙은 호칭이겠거니 대충 생각하려던 찰나 남자가 말을 이었다.

“밖에서 남편이 기다리던데. 꽃다발 들고 있는 거 보니 이벤트하려고 그러나 봐? 좋겠어.”

“…….”

남자는 툭툭 어깨를 두드리며 내 손에 돈을 쥐여 주었다.

“허허. 이만 가 볼게.”

탁-진료실 문이 닫히고, 혼자 남겨진 나는 돈을 움켜쥔 채 고개를 기울여야 했다.

“남편이라고……?”

힐끔-무전기를 쳐다보았다. 대충 유부녀나, 애 엄마라는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내 남편으로 추측할 수 있는 인물은 나와 동일하게 가면을 쓴 남자밖에 없을 터였다. 그럼 이재현일까?

‘오늘 일이 빨리 끝났나? 웬 꽃다발?’

무전기를 들려다 비집고 나오는 웃음에 다시 내려놓았다. 바쁜 와중에 애써 준비한 이벤트라면 초장에 초를 치고 싶지는 않아서였다. 물론 아저씨의 오지랖으로 알게 되었지만, 내 반응을 기대하고 있을 얼굴이 궁금했다. 둘이 있게 되면 가면도 벗을 수 있을 테니까.

‘아니, 그보다 왜 밖에 서 있는 거지? 왔다면 들어오면 될 텐데…….’

웅성거리는 소리가 작게 열린 창밖을 통해 들려오고 있었다. 손님이 오는 소리겠거니 했지만, 들려온 고함은 더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까지 고조되는 듯 보였다. 머리를 긁적이며 창밖을 내다보았을 땐, 이미 어두워진 하늘 아래, 그 어둠과 닮은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병원 밖 곳곳에서 보이었다. 내가 상대하는 손님이라기엔 질 좋은 양복을 입은 남자 무리는 모두 멀쩡한 상태였다. 아파서 병원을 찾아온 게 아니라면 볼일은 과연 뭘까. 묘한 긴장감을 느낄 때쯤이었다.

드르륵—

진료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고개를 돌려 확인한 문 앞엔 하회탈 가면을 쓴 남자가 꽃다발을 들고 서 있었다. 순간 얼굴 근육이 딱딱히 굳고,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

가면을 썼다 한들 아무 소용없었다. 이재현이 아닌 걸 떠나서 누구인지도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김세한이었다.

가만히 서 있는 그를 바라보다, 망설임 없이 책상 위의 무전기에 손을 뻗었을 때였다.

픽-김세한의 손에서 예리하게 쏘아진 불꽃이 무전기를 뚫고 지나가 파열음을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굳이 줍지 않아도 망가진 건 분명했고, 무전기에 닿지 못한 손이 동그랗게 말려들었다. 몸이 기억하고 있는 궁지에 몰린 상황. 내 핸드폰을 망가뜨리던 김세한의 모습이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뚜벅뚜벅—

진료실 안엔 김세한의 구둣발 소리가 울렸고, 내 앞엔 꽃다발이 들이밀어졌다. 커다란 꽃다발은 온통 새하얀 안개꽃으로 채워져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중앙에 딱 한 송이의 장미가 끼워져 있었다. 확실한 건 평범한 디자인은 아니었다. 얼어 버린 내 앞에서 김세한은 이미 망가진 듯한 무전기를 발로 밟았다. 우지끈-플라스틱 부서지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진료실 안을 울렸고, 이어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 당신네 동료들 만나는 거, 좀 성가셔서 말이야.”

가면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는 평소보다 냉랭한 듯했다.

“약속이라도 한 거처럼 다 나를 싫어하는 거 같더라고.”

김세한은 내 손을 들어 올려 꽃다발을 쥐여 주었다. 그러곤 자세를 낮춰 눈높이를 맞추었다.

“당신은 어때? 당신도…… 내가 싫어?”

“…….”

아무 반응도 없이 가만히 서 있자, 김세한은 천천히 쓰고 있던 가면을 벗으며 내게서 뒤돌아섰다. 가면은 무전기가 있었던 책상 위에 올려졌고, 입고 있던 재킷은 손님용 의자에 걸쳐졌다.

“다른 누구로 오해라도 할 줄 알았는데. 단번에 나인 걸 알았나 봐? 나 참……. 신경 쓴 장난이었는데, 김빠지게 끝났네.”

“…….”

“왜? 오랜만에 와서 놀랐어? 이리 와. 예전이랑 똑같이 자러 온 거뿐이니까.”

머리를 털어 낸 김세한은 침대에 걸터앉아 자신의 옆자리를 두드렸다. 나는 손에 들린 안개꽃을 책상에 내려놓으며 아직 소란스러운 듯한 창밖을 가리켰다. 김세한은 내 뜻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비 오는 날을 기다리기엔…… 장마가 끝났잖아. 난 참을성이 없어서 그냥 내 방식대로 했어. 난 당신 환자들의 목숨 같은 건 눈곱만큼도 관심 없거든. 그냥 당신이랑 있을 시간이 필요해.”

난 그제야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김세한의 부하들이 찾아온 손님을 막아서면서 생긴 갈등이라는 것이었다. 머릿속엔 어느 정도로 심각한 상황인지 모를 환자에 대한 생각이 들어찼다.

‘상황을 보고 오자.’

낮은 한숨을 쉬며 밖으로 향하던 발이 침대를 지나던 순간 김세한에게 잡혀 멈춰졌다. 휙-강한 힘으로 당겨진 손에 기우뚱 몸이 기울어 본능적으로 넘어지지 않으려 손을 뻗었고, 하필 김세한의 가슴을 짚었다.

“어디 가. 내 차례잖아.”

“…….”

의도치 않게 가까운 얼굴. 가면 속 나를 꿰뚫어 보는 듯한 옅은 갈색 눈이 시야를 한가득 채우고 있었다. 거두려던 손은 그대로 손목을 잡혀 여전히 김세한에게 닿아 있었다. 역시 오늘의 김세한은 이전에 찾아왔던 때와 조금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내가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해.”

쿵쿵거리기 시작한 심장과 복잡한 머리를 대변하듯 눈앞이 어두워졌다 밝아지기를 반복했다. 흔한 전기의 문제인지 아니면 전구의 문제인지 깜박깜박하던 진료실의 전등이 완전히 나가 눈앞이 어두워졌을 때였다. 다시 한번 놈을 밀어내려 했지만, 여전히 꼼작하지 않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김세한은 손목을 놓아주었고, 나는 순순히 김세한의 옆에 앉았다.

“어둡다. 역시 아고라랑 거리가 있어서인지, 전기가 엉망이구나.”

김세한의 말대로였다. 아고라에서 멀면 멀수록 전기나 수로가 제대로 정비된 곳이 없기 마련이었고, 해가 진 시점에 전기가 나간다면 눈앞이 새까말 뿐이었다. 촛불이라도 켜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김세한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지금이 더 편하겠다는 생각과 지금 여기서 움직이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른침을 삼키며 차분히 머리를 굴렸다. 연락할 수단이 사라진 지금은 그저 시간이 빨리 흘러 유태영이 여기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병원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혹시 몬스터와 만날지 모르고, 다른 것보다 유태영은 어차피 병원 3층에 짹짹이를 두어야 하므로 늘 함께 귀가하곤 했다. 따라서 유태영이 올 때까지만 김세한의 비위를 맞추면 되는 일이었다.

“정말…… 잘 안 보여.”

어둠 속에서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을 자러 왔다면서 김세한은 침대에 누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시간은 일곱 시. 지금 일곱 시 삼십 분쯤 됐다고 친다면 유태영이 여기 오기까지는 삼십 분이나…… 요즘은 일이 바빠 그 이상이 걸릴지도 몰랐다. 뭐가 됐든 김세한만 잠이 들어준다면 오늘도 별일 없이 넘길 수 있을 텐데 놈은 신발도 벗지 않고 있었다.

‘대체 뭐 하자는 거야.’

낮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을 땐, 마찬가지로 나를 보고 있는 듯한 검은 인영을 마주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김세한과 눈이 마주쳤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이면 괜찮지 않을까?”

“…….”

“이 가면, 벗어도.”

날 보고 있을 김세한의 눈에 집중한 탓이었을까. 그의 손이 가면이 닿았음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몸을 뒤로 빼내려 했지만 어느샌가 붙잡힌 어깨에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읏.”

위기감에 숨 섞인 외마디가 흘러나왔고, 잔뜩 움츠러든 몸을 느낀 건지 어깨에 닿은 김세한의 팔이 놀란 나를 달래듯 작게 쓸어내렸다.

“알겠어. 싫으면 안 벗어도 돼.”

생각보다 가까이에서 들려온 목소리.

“어차피 이런 건 아무 의미 없어.”

반쯤 가면을 들어 올린 손이 떨어졌다. 드러난 입가가 휑하게 느껴질 때쯤 느슨해진 가면이 완전히 벗겨졌다. 마지막 방어선이 사라져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을 때, 다시 김세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널 얼마나 안았다고 생각해?”

그 말을 해석할 시간도 없이 따뜻한 감촉의 무언가가 입술에 닿았다. 익숙한 향기가 풍겨 오고, 째깍거리는 초침 소리와 달리 머리와 심장이 모두 멈춰 선 듯 고요했다. 그래, 아주 잠시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대체 이게…….’

간질간질할 만큼의 거리에서 입술에 스치고 닿기를 반복하는 게 김세한의 입술이라는 걸 알아차렸을 때쯤, 그가 크게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보고 싶었어…… 자기야.”

내 어깨에 닿아 있는 손도, 들려온 목소리도, 가늘게 뱉어진 숨도 모두 작게 떨리고 있었다. 조심스레 어깨를 쓸고 내려온 김세한의 손이 내 손끝을 움켜잡았고, 그 위론 축축한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어깨에 느껴지는 무게감, 볼에 스친 머리카락, 간간이 들려오는 흐느낌. 김세한은 내게 기대 울고 있었다.

“구재희…….”

“…….”

들려온 내 이름에 코가 매워졌고, 시린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확신이 담겨 있는 목소리였다. 비정상적인 심장의 울림이 도망가라는 경고를 보내왔다.

어디서 들켰는지, 언제부터 나인 줄 알고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보다, 김세한의 목소리로 들은 내 이름에 케케묵은 기억들이 물밀듯 흘러 들어왔다.

- 사랑하는 사람 이름도 몰라, 나는.

고함치고, 매달리고, 끝끝내 망가졌던 관계의 기억들이 마치 방금의 일처럼 생생했다. 도무지 조리 정연한 사고를 할 수 없었고, 감당할 수 없는 범위의 일이 벌어진 것 같아 그저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었다.

‘안 돼. 넌 날 알면 안 돼.’

김세한을 밀쳐 내고 몸을 일으켰다. 힘없이 밀쳐진 몸과 달리 잡고 있던 손은 아직 나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또한 역시 힘이 들어가 있지는 않았다. 매달려 있는 게 고작일 뿐인 힘이 나를 잡고 늘어지듯 빌고 있을 뿐이었다.

“가지 마…… 제발.”

애원하는 목소리엔 여전히 흐느낌이 섞여 있었다. 말 못하는 힐러가 아닌 ‘구재희’의 입장에서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기에 무언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너무나 낯선 모습이었다. 울며 애원하는 김세한 따위 난 쓴 적도, 상상한 적도 없었으니까. 두려웠다. 너와 나의 관계도, 앞으로의 이야기도.

김세한의 손을 뿌리치곤 가면을 다시 얼굴에 쓴 뒤 진료실을 빠져나와 마찬가지로 어두운 복도를 내달렸다. 손은 생각보다 쉽사리 떨어졌고, 날 쫓아오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바르르-턱이 작게 떨려 왔고, 어둠 탓인지 눈앞이 흐렸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흐느낌이 입 밖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맹목적으로 밖을 향해 내달렸다. 여기서 벗어나고 싶었다. 김세한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고 싶었다. 달린 탓인지 숨은 금방 거칠어졌고, 가슴은 뻐근히 아팠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숨을 내뱉었다. 심장을 토해 내고 싶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이 고동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이 이름 모를 고통을 진정시킬 시간도 주지 않겠다는 듯, 출구라고 생각했던 밖으로 향하는 병원 유리문 앞에서는 또 한 명의 익숙한 인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페르 님…….”

테리였다. 놈의 목소리 또한 확신이 느껴졌다.

깜빡-깜빡- 나갈 때와 같이 깜박이던 등이 다시 그 빛을 찾았다. 목소리와 실루엣만으로 알아챘던 테리의 얼굴이 선명히 보였다.

가쁜 내 숨소리가 병원 복도를 울렸고, 머리가 아찔해질 정도로 심장이 요동쳐 왔다. 도망칠 곳이 사라져 완전히 궁지에 몰린 상태였다.

“보스는…….”

“…….”

“아.”

테리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곤 손목의 시계를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딱 30분이면 됩니다. 그냥 제 말을 들어주세요.”

“…….”

“저와 함께했던 시간을 아주 조금이라도 기억하고 계신다면 제발 그렇게 해 주세요.”

덤덤한 목소리였다. 테리의 뒤로 늘어선 검은 정장 무리로 보아 내가 여기서 달아날 가능성은 없었다. 무전기도 고장 났고, 결국 팀원들의 일이 끝날 때까지 나는 꼼짝없이 여기에 잡혀 있어야 했다.

“어차피…… 앞으로 한 시간 이상은 도망 못 치십니다.”

테리도 이미 내 상황을 알고 있는 듯 보였다.

“보스보단 제가 편하신 거 아닙니까?”

잠시 진료실 쪽을 바라보던 테리가 조금 작전을 바꾼 듯 물어 왔다. 정답이었다. 둘 중 하나를 한 시간 동안 마주해야 한다면 적어도 김세한은 아니어야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없이 등을 돌려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테리는 그런 내 뜻을 이해한 듯 뒤쪽에 늘어선 남자들에게 손바닥을 펼쳐 보이곤 뒤를 따랐다.

서늘한 공기가 느껴졌고, 1층과 달리 따뜻한 느낌의 노란 조명이 방 안을 비추었다. 당구대와 다트판, 늘어진 옷가지, 정갈하게 개어진 침구류, 만화책, 그리고 각종 차와 먹을거리가 있는 쉼터 같은 공간은 바빠지기 시작한 이래로 사용한 적이 거의 없어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다.

“2층도 병실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요. 아지트…… 그런 느낌인가요?”

테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고, 나는 다 무시한 채 가장 안쪽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낮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소파 두 채가 마주 보고 있는 구조였다. 테리는 당연하다는 듯 내 맞은편에 앉아 테이블 위로 자신의 무전기를 내려놓았다.

“b.w 길드원이 근처에 오면 무전이 올 겁니다. 그때까지만요.”

역시 오늘은 작정하고 온 모양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막무가내로 끌고 가지 않았다는 것인가. 내가 알던 김세한이라면 무력을 쓰고도 남았을 텐데 말이다.

언제 어떻게 눈치챈 걸까. 이제 와 돌이켜 보면 김세한의 눈빛이 묘하게 느껴졌던 순간은 셀 수 없이 많았다.

- 당신…… 나한테 올래?

그 때문에 긴장해 몸이 얼어붙을 때면 이어서 안심할 만한 말이 따라 들려오곤 했다.

- 당신 아들도 데리고 와. 애 아빠도 살아 있으면 데려오고.

말 못하는 애 있는 유부녀. 모든 특징이 ‘페르’와는 동떨어져 있으니 김세한이 눈치챌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실제로 유부녀라거나, 아들이라는 말을 꽤 자주 뱉었으니까. 혹 그 모든 게 연기였다면……? 아니지, 연기를 해야 할 이유가 없다. 나인 줄 알았다면 억지로 가면을 벗겨 내고 데려가면 그만일 테니까. 아,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려나. 정답을 알 수 없으니 여러 의문만 쌓여 갔다. 더군다나 정체를 눈치챈 시점에서 대화라니, 대체 나에게 원하는 게 뭘까.

“그리고 오늘은 그냥 온 거니까 너무 경계 안 하셔도 됩니다. 보스랑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순순히 보내 주셨으니까 여기 계신 거잖습니까.”

내 손에 매달리듯 했던 김세한의 온기가 아직 손끝에 남아 있는 듯했다. 테리의 말대로 지금 진료실에 있는 김세한은 내가 알고 있는 놈과는 다른 사람 같았다. 원래의 그라면 나라는 걸 눈치챈 순간 놓아줄 일은 없었으니까.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입을 열자 테리의 눈이 조금 커지는 듯 보였다. 아마 내가 입을 열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얼굴을 덮은 가면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왜. 어차피 나인 거 알았던 거 아니야?”

테리는 눈을 내리깐 채 목 부근을 쓸어내렸다.

“아……. 너무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라 놀랐을 뿐입니다.”

입가엔 어렴풋이 미소가 보였다.

“시답지 않은 말하지 말고…….”

“살아 계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

“너무…… 오래 힘들었거든요.”

테리는 머리를 쓸어 넘기고, 마른세수를 했다. 김세한에게서 탈출했던 그날 밤, 불타던 방이 머리를 스쳤다. 나는 그날 죽은 것이 되었고, 아마 모든 게 테리 탓으로 돌아갔을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힐끔, 테리의 눈에 길게 나 있는 흉터를 바라보았다.

“눈은…… 김세한이 한 짓인가?”

내내 궁금해하던 질문이 나도 모르게 새어 나왔고, 테리는 예상치 못했다는 듯 흉터를 손으로 덮어 냈다. 그러곤 당황한 얼굴로 입을 달싹였다.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보스가 의도하신 건 아닙니다. 치료도 충분히 받을 수 있었고요. 다만 한쪽 눈을 잃는 고통을 감수한 건 아주 조금이나마 속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보스가 잃은 것에 비하면 보잘것없었지만요.”

“…….”

내내 내리깔렸던 눈이 똑바로 내게 향했다.

“보스는 페르 님이 죽었다고 생각한 그 자리에서 자살하려고 하셨습니다.”

자살. 김세한이 자살? 이질적인 단어에 머리가 새하얘졌고, 심장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찌푸려진 미간이 뻐근해질 때쯤 테리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 상처는…… 그걸 막을 때 생긴 상처입니다. 아뇨. 사실은 제가 막은 것도 아닙니다. 멈추신 건 페르 님이 살아 계실지도 모른다는 의심 때문이니까요.”

나는 그날 그곳을 벗어나면서 김세한이 분명 분노하거나 슬퍼할 것으로 생각했다.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짧지는 않았고, 그동안 우린 분명 감정을 나눴으니까. 다만 그게 딱 키우는 개를 향한 감정 정도일 것이라 예상했고,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었다.

“페르 님이 떠나시고 1년 반이 지날 동안 보스는 산송장이셨습니다. 보는 사람이 안타까울 정도로 불면증에 시달리셨고, 밥도 못 드셨고, 머리를 비우고 싶다며 몸을 혹사하셨으니까요.”

그가 아주 힘들다는 것쯤은 더 창백해진 피부와 눈 밑에 내려앉은 그늘, 야윈 몸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저는…… 그 옆에서 살아 숨 쉬는 게 너무 죄스러우면서도 죽을 수 없었습니다. 아마 이 삶이라는 것 자체가 그날 보스가 제게 내린 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요.”

위태로워 보였던 테리가 꿋꿋이 S급 자리를 지키려던 이유도 방금의 말로 설명되었다. 모든 게 날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속죄였단다. 다 나로 인해 생긴 비극이었다.

‘하지만 그게 뭐. 내가 알아서 달라질 게 있나? 그럼 나는……?’

가슴을 쿡쿡 찔러 오는 예리한 고통을 무시한 채 최대한 덤덤히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이 그거야? 나 때문에 많이 힘들었다고 원망하는 말?”

약간의 피로감과 냉한 기운이 느껴지는 얼굴을 한 테리는 가면 속 나를 들여다보듯 느리게 눈을 깜박이다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돌렸다.

“원망…… 하죠. 너무 잔인한 방법을 쓰시고 떠나셨으니까요. 그래서 페르 님이 반가우면서도 밉습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