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희는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느꼈지만, 몰려드는 욕구가 그녀의 눈을 가렸다. 그냥 어서 사랑받고 싶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이자, 세한의 눈이 묘하게 바뀌었다. 먹잇감을 앞에 둔 포식자의 눈이었다.
세한은 그대로 손을 뻗어 허벅지의 가터벨트를 매만지고 밑으로 이어진 얇은 검은 스타킹을 쓸어 냈다.
“어울리네. 진작 입혀 볼 걸 그랬다.”
익숙하게 허벅지 안쪽을 매만지는 손길에 재희의 몸이 배배 꼬이고 있었다. 좀 더 안쪽으로 들어와 주길 바라는 마음에 무릎을 살짝 굽히자, 세한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똑바로 서.”
어느 때보다 명령 투의 말이었다. 재희가 눈을 내리깔며 무릎을 펴자 세한이 살포시 웃었다.
“말 잘 듣네, 예쁘다.”
그리고 곧바로 다정한 투의 말이 이어졌다. 방금의 차가운 말투와 대비돼서일까. 그 말이 한결 더 달콤하게 느껴졌다.
“잘했으니까, 원하는 대로 해 줄게.”
허벅지 부근을 어루만지던 손이 짧은 치마 안으로 들어와 불쑥 중심부를 눌렀다. 꾹, 단번에 눌린 음핵에 반사적으로 다리가 오므라들었고, 동시에 세한의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재희는 그가 어떤 말을 하기 전에 곧바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냉정한 세한의 목소리는 무서웠고, 칭찬은 듣기 좋았다. 그게 취기에 단순해진 재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사고였다.
자신의 손목을 물었던 허벅지가 떨어지자, 세한은 느긋하게 속옷 위로 원을 그렸다. 몸은 벌써 다음을 기대하듯 한껏 예민해져 있었고, 기분 좋은 곳을 찾아 허리가 움직이고 있었다.
“흐읏….”
재희의 잇새로 뜨거운 숨을 담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세한이 아무 말 않자, 재희는 허리를 점점 더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기분 좋나 봐?”
“…응.”
“그럼 보답해야겠지?”
세한의 손이 한창 열기를 뿜던 그녀의 중심에서 떨어졌다. 스륵 허벅지를 쓸어내린 손이 완전히 떨어지자, 그녀는 아쉬운 마음에 침을 삼켰다. 동시에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다음. 빨리 이다음을 원했다. 좀 더 안을 파고들며 자신을 안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서 있기 힘들었지? 무릎 꿇고 앉아.”
다정한 말투였다. 하지만 처음 들어 보는 요구에 재희는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의심해야 했다. 바닥에 앉으란 건가.
재희가 쭈뼛대자 세한은 오금을 쓸며 다시 한번 말했다.
“앉으라고.”
조금 강하게 이야기하자 재희가 그대로 주저앉듯 엉덩이를 깔았다. 바닥은 저를 데우던 세한의 손길과는 달리 차가워, 달아오른 몸이 식는 것 같았다. 낮아진 높이 탓에 재희는 이제 완전히 세한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세한은 완전히 풀린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재희를 바라보며 더운 숨을 뱉어 냈다.
그녀가 토라진다면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것은 세한이었다. 그런데 재희는 자신의 욕심에 곧잘 따라 주고 있었다. 기특하면서도 이제껏 상상도 하지 못한 이 상황이 미치도록 흥분됐다.
“더 가까이 와.”
그는 자신의 허리띠를 풀며 말했고, 어느새 그의 발딱 선 페니스가 그녀의 눈앞에 가득하다 못해 얼굴에 닿았다.
검붉고, 핏줄이 잔뜩 선 흉흉한 그의 남근이 세한을 올려다보고 있는 재희의 얼굴 절반을 가렸다. 세한은 작게 헛웃음을 흘렸다. 예상했었지만, 이렇게 비교하니 배덕감이 밀려들었다. 언제나 버거워 보이던 재희가 조금 이해될 것도 같았다.
재희는 자신의 한쪽 눈을 가린 거대한 무언가의 정체를 뒤늦게 파악했다. 이미 서 있는 그의 것은 취기에 열이 오른 자신의 얼굴보다 더 뜨거웠다.
세한은 재희의 얼굴에 자신의 것을 몇 번 비비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미 완전히 스위치가 눌린 상태였다. 이제 재희가 거부한다고 해도 양보할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재희야, 핥아.”
“…….”
“잘하면 넣어 줄게. 내 거 넣고 싶잖아.”
세한이 늘 저를 배려해 이런 건 시키지 않았던 터라, 해 본 적은 없지만 대충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축축한 속옷이 기분 나빴다. 한시라도 빨리 그와 입을 맞추고 싶었다.
재희는 자신의 볼에 닿아 있는 세한의 것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유독 작은 편인 재희의 손은 세한의 것을 아슬아슬하게 감쌌다. 거부감은 없었다. 그저 생소했을 뿐이다.
빼꼼 나온 혀가 그의 귀두에 키스하듯 닿았다. 그 앞머리를 할짝거리던 그녀가 그를 빤히 올려다보다 쭙, 한 번 빨아 냈다.
처음 느껴 보는 재희의 따뜻한 입 안과 시각적 자극에 세한의 미간이 조금 구겨졌다. 재희는 그의 반응을 부정적인 것으로 해석했다. 언제 아까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고 턱을 최대한 벌려 그의 것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예상은 했지만 여유 없이 꽉꽉 들어찬 입 속에 침이 절로 흘러나오고, 입술은 주름 하나 없이 팽팽해졌다. 혹여 이라도 닿을까, 극한까지 벌린 턱이 덜덜 떨려 오고 있었다.
“우웁, 웁.”
“후우… 혀를 써, 재희야.”
눈을 뜰 수 없어 세한의 반응을 알기 어려웠다. 줄줄 새는 침 탓에 세한의 기둥을 잡은 손까지 축축했다. 세한의 말대로 혀에 그의 것을 비빈다고 생각하고 고개를 살짝씩 움직였다.
세한은 어느새 자신의 입가를 가린 채로 덜덜 떨면서 제 것을 빠는 재희를 감상하고 있었다. 솔직히 저를 사정까지 이끌기엔 부족한 실력과 자극이었다. 그러나 생소한 이 장면 자체에 아래에 점차 피가 쏠리고 있었다.
‘이재현이 이건 안 시켰나 보네.’
서툰 솜씨에 확신할 수 있었다. 꼬였던 기분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기둥을 잡아 쥔 재희의 손이 그를 자극하듯 위아래로 움직였고, 그럴듯한 자극에 세한은 다시 미간을 좁혔다.
‘아닌가.’
이제 없는 놈인데 난잡한 상상이 들 때면 눈앞이 깜깜해지고 속이 타들어 갔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재희와 재현의 시간이 미치도록 숨 막혔다.
‘내 거야. 어딜 감히.’
세한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재희의 머리통을 내리눌렀다.
“컥…!”
순간 목구멍까지 들어온 세한의 것에 고개를 빼려 했지만, 그의 손의 힘은 빠지지 않았다. 눈물이 핑 도는 고통에 한계가 온 턱까지. 엉덩이가 절로 들썩이며 고통을 표했다.
“후우….”
세한은 자신의 마른 입술을 축이며 멈춰 선 재희의 손을 매만졌다. 작은 손, 작은 입. 학대를 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서 더 흥분됐다.
좀 더 퍽퍽 박고 싶었다. 상대가 재희가 아니었다면 분명 머리채를 쥐었을 것이었다. 적절히 달아오른 몸이 그 이상을 바라고 있었다.
“욱, 우웁.”
재희의 질끈 감은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처음 느껴 보는 고통에 흐른 것이었다. 세한은 그제야 재희의 머리를 놓아주었고, 곧바로 재희가 연신 기침을 뱉어 냈다. 콜록콜록-그의 것이 빠져나왔지만, 입 안이 얼얼했다. 계속 움직였던 혓바닥도, 내내 떨리던 턱도, 한계까지 펼쳐졌던 입술도.
재희는 한참이나 숨을 돌리고 나서야 세한을 올려다보았다. 턱을 괴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세한의 눈은 조금 무미건조한 느낌이었지만, 그의 페니스는 분명 아까보다 커져 있었다.
“안 할 거야?”
조금만 더 하면 될 거 같은데. 재희는 두려움과 동시에 오기가 들었다. 처음이지만 서툴다는 생각이 들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좋아하는 여자가 되고 싶었다. 저도 만족감을 주고 싶었다.
재희는 다시 세한의 것을 움켜쥐고 혀를 꺼내 살 기둥을 핥아 올렸다. 더는 입에 물 자신이 없었다. 이걸로 세한이 만족할지는 알 수 없지만 혀와 입술로 그의 것을 키스하듯 머금고 빨기를 반복했다.
바짝 선 핏줄을 따라 혀가 움직이자, 세한이 다시 더운 숨을 뱉어 냈다. 재희라서일까. 원하는 자극의 10분의 1도 안 되는데 몸이 비정상적으로 흥분해 있었다.
“씨발….”
들려온 욕설에 재희가 어깨를 움츠렸다. 역시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세한은 재희의 턱을 억지로 들어 올려 눈을 맞추었다. 침으로 젖은 그의 페니스만큼이나 그녀의 입가도 번들번들했다.
“미안…. 미안해.”
재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왜 사과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조금 험악해지려는 분위기를 견딜 수 없었을 뿐이다.
예상치 못한 사과에 세한은 무언가가 뚝 끊기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그녀는 한없이 무력해 보여서 처음으로 갑이 된 것만 같았다. 오랫동안 묻어 놨던 나쁜 충동이 고개를 들었다.
“재희야, 그걸 알아? 너 우는 거, 엄청 흥분돼.”
“…….”
“이리 와.”
세한이 조금 다정하게 말하자, 재희의 얼굴이 아까보다 평온을 찾았다. 그녀는 곧바로 몸을 일으켰지만, 순간 눈앞이 핑 돌아 비틀거렸고 그걸 빠르게 눈치챈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는 몸을 끌어안았다.
익숙한 온기가 느껴지자 재희가 무의식적으로 세한의 가슴에 얼굴을 부볐다. 세한은 그런 재희의 턱을 들어 올려 눈을 맞추었다. 그의 엄지손가락은 아직도 축축한 그녀의 입가를 쓸었다.
“잘했어. 예뻐.”
그리고 마치 보상이라도 하듯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두 사람의 몸이 틈 없이 붙었고, 엉켜 드는 혀가 조금 난폭했으며, 바짝 선 그의 것이 그녀의 배를 눌러 댔다.
언제나처럼 버거웠지만, 재희가 기다리던 순간이기도 했다. 그가 지금만큼은 자신을 원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꾸욱. 세한이 자신의 것을 재희의 원피스에 대고 누르자 그녀의 배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저 좁은 안은 영원히 저만 탐할 수 있는 것이었다. 넣고 흔들고 싶다. 저급한 생각이 머리를 가득 메운 순간, 재희가 세한의 페니스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떨어진 입술 새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넣고 싶어.”
귀가 아닌 머리를 울리는 듯한 말이었다. 현실감이 안 느껴지는 말이기도 했다. 세한의 입꼬리가 조금 들썩였다.
“하…….”
그리고 웃음 섞인 한숨이 새어 나왔다. 지금의 재희라면 좀 더 끌어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더…. 더 유혹해 봐. 응?”
세한이 그녀의 척추를 노골적으로 쓸어내리며 보챘다. 재희의 입에서 달뜬 신음이 흘러나왔다. 잠시 식었던 밑이 다시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빨리… 박아 줘.”
녹아 버릴 것 같은 목소리, 귀가 참을 수 없이 가려웠다.
“잘했어. 박아 줄게.”
세한이 저한테 매달리듯 한 재희를 순식간에 안아 들었다. 능숙하게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몰아붙이듯 키스했다. 재희의 밑은 다시 기대감에 젖어 들고 있었고, 세한의 것은 한계에 달아 있었다.
세한은 시계도 풀지 않고 바지도 입은 채 페니스만 꺼낸 상태였지만 지금 그런 것을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곧바로 콘돔의 껍질을 벗겨 내며 붉은 얼굴의 재희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재희는 세한이 콘돔을 씌우는 것을 빤히 것을 보고 있었다.
세한은 자연스레 재희의 다리를 벌리며 속옷을 옆으로 젖혔다. 곧바로 귀두가 입구에 닿자 가만히 누워 있던 재희가 몸을 들썩였다.
“좀 더 풀어 줘. 나 아직….”
세한은 애원하듯 눈썹을 늘어뜨리는 재희와 흔들림 없이 눈을 맞추며 그대로 저의 것을 밀어 넣었다. 재희의 입이 그랬던 것처럼 팽팽하게 당겨진 소음순이 세한을 꾸역꾸역 받아 내고 있었다.
“으흑, 흐으….”
재희의 입에서 약간의 고통 섞인 신음이 새어 나왔다. 천천히 끝까지 밀어 넣은 세한이 재희의 배를 눌렀다. 마치 자신의 형태를 찾아 움직이는 듯한 손길이었다.
“내 거, 한 여기까지 들어갔을까.”
“세한아, 하지 마…. 아파.”
“싫다는 말, 하지 않기로 했잖아.”
세한이 목소리를 내리깔며 허리를 뺐다. 깊은 곳을 찍고 나온 세한의 것은 온통 젖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반쯤 빠져나왔던 성기가 다시 빠르고 세게 재희의 안에 처박혔다.
“흐윽…!”
“너무 조여서 움직이기 힘들잖아. 힘 풀어 봐.”
“그게… 될, 아, 흑…!”
재희의 고개가 뒤로 젖혀지고, 입에서 고통 어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세한이 이미 자신의 성기를 넣고 있는 재희의 안에 손가락 하나를 더 밀어 넣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넓히면 좀 괜찮아지려나.”
“세, 세한, 아……. 찢, 으흐흑, 찢어져…….”
세한이 남은 손으로 원피스를 밑으로 끌어 내렸다. 달라붙는 옷이었던 터라 속옷도 함께 내려져 재희의 가슴이 드러났다.
“아닌데. 너 엄청 잘 물고 있어. 안도 더 젖은 것 같고. 혹시 아픈 거 좋아해? 저번에 보니까 키스 마크도 엄청 달고 있던데.”
세한이 출렁이는 재희의 가슴께를 보며 말했다. 안 좋은 기억이 올라오자 심사가 뒤틀려 버렸다.
반면 재희는 숨을 고르며 세한을 달랠 생각으로 바빴다. 하지만 지금 그가 무슨 의도로 저런 말을 꺼냈는지, 오늘따라 왜 이렇게 구는지는 알 수 없었다. 키스 마크…?
“원하면 말하지 그랬어. 나도 해 줄 수 있는데.”
세한은 밑에 넣었던 손가락을 빼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재희의 것으로 젖은 손가락으로 유두를 빙빙 돌리다 세게 꼬집었다. 순간 재희의 몸이 요동쳤고, 세한은 들썩이는 그녀의 골반을 내리눌렀다.
“빠지잖아.”
“하, 하지… 마. 아, 아파.”
“그 말….”
재희가 아차, 하기도 전에 보복이라도 하듯 세한이 세게 허릿짓을 시작했다. 애당초 술 취한 세한과는 대화가 안 되곤 했다. 늘 감정 기복이 심한 그가 오늘은 대체 뭐가 마음에 안 들었던 걸까. 거친 허릿짓에 벌어진 입에선 여과 없는 신음만 흘러나왔다.
“으, 으흑, 흣, 싫, 아읏, 아…!”
“네 안, 오늘따라 뜨거워. 술 마셔서 그런가. 아니면 거친 게 좋아?”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목소리였다. 세한은 제 허릿짓에 흔들리는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저 새하얀 살결에 남았던 붉은 자국들의 잔상이 도무지 지워지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이 기분 나쁜 감정을 덜어 낼 수 있을까. 그 이후 단 한 번도 언급한 적 없지만, 재희에게 이 화를 표현하고 싶었다. 사실은 분노를 닮은 질투일 뿐이었다.
세한은 자신의 것을 빼내었다. 박아 달라고 했던 주제에 재희의 몸은 늘어져 있었다. 마치 이미 지쳤다는 듯.
“뒤돌아.”
“…읏, 싫.”
세한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재희의 골반 부근을 잡아 그녀의 몸을 뒤집었다. 재희는 뒤로 하는 것을 싫어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 그의 감정을 알기 어려웠고, 너무 깊은 곳까지 닿아 아팠기 때문이다. 이미 알고 있는 고통에 재희는 몸부림쳤지만 배를 받쳐 든 세한이 순식간에 자신의 것을 밀어 넣었다.
“아, 아흐윽, 안 돼, 싫어…!”
재희가 엉덩이를 움켜쥔 세한의 손을 밀어내려 한순간이었다. 엉덩이에 생소한 아픔이 밀려들었다. 짝-한 번의 날 선 소리와 함께 알싸한 고통이 짧게 전기처럼 온몸으로 퍼졌다. 새하얀 엉덩이에 붉은 손자국이 남았다.
“알고 싶다며, 내 밑바닥.”
“…윽.”
“역시… 엄청난 자극이야. 순간 너무 꽉 물어서 잘리는 줄 알았어.”
세한이 붉어진 재희의 엉덩이를 두어 번 달래듯 쓰다듬고, 자신의 것을 마저 밀어 넣었다. 재희의 안으로 깊게 들어갈 수 있어 세한은 좋아하는 자세였다. 다만 그다지 그녀를 배려하지 않는 체위라는 게 문제였다.
“흐윽, 윽, 흐으윽, 너무, 깊어.”
“아직 다 안 들어갔어.”
“하윽…!”
끝까지 밀어 넣자, 재희의 허리가 요동치듯 진동했다.
“안 돼, 앗, 아, 아파…. 흐윽.”
“응, 너 여기 닿는 거 싫어하지. 후우… 난 좋아, 재희야. 네 안, 너무 좋아.”
아까까지만 해도 뭐든 할 자신이 있었는데 뇌까지 퍼지는 고통에 온몸이 몸부림치고 있었다. 세한은 천천히 허릿짓 했다. 끝까지 밀어 넣을 때마다 어김없이 안쪽이 경련했다. 세한은 그 반응이 좋았다. 적나라하게 보이는 결합부도, 풍만한 엉덩이와 대비되는 가는 허리도, 밑으로 늘어져 흔들리는 가슴도, 모두.
“지금 너무 예뻐, 재희야.”
“흐윽, 읏, 아, 세하, 한, 제발….”
“어, 박아 달라고 했었지.”
세한이 그녀의 엉덩이를 양껏 움켜쥐고 조금 더 깊고 세게 허릿짓 하자 비명에 가까운 신음이 섞여 나왔다. 퍽퍽, 엉덩이와 허벅지가 부딪혀 자꾸만 그녀의 몸이 앞쪽으로 밀려났지만, 골반을 고정하듯 잡은 세한의 손에 계속 원상 복귀됐다.
세한은 목덜미가 뻐근해지며 정신이 아찔해짐을 느꼈다. 더 깊게 찔러 넣고, 자신의 냄새가 밸 때까지 그녀의 안에 채워 넣고 싶은 저급한 충동이 머리를 잠식했다. 이제껏 어떻게 참아 왔나 싶을 정도로 기분 좋은 쾌락이었다.
반면 재희는 아까 뱉은 말들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그의 밑바닥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술기운에 머리가 어지러웠고, 순간 언젠가의 기억이 스쳤다. 이렇게 술 취한 세한이 자기 마음대로 박아 대던 기억.
- 우리 아이 갖자.
분명 어딘가 화가 나고 뒤틀려 있을 때였다.
“세, 윽, 세한, 아….”
세한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대답하는 대신 재희의 가는 몸에 제 몸을 겹치며 속도를 높였다. 여느 짐승들의 교미처럼 세한의 커다란 몸이 재희를 집어삼키듯 감쌌다. 멀기만 했던 그의 숨소리가 겹쳐진 고개에 재희의 귓가에 울렸다.
“하아… 아….”
흥분에 잡아먹힌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좋았다. 아픈 건 여전했지만 세한을 가까이하니 아까보다 두렵지 않았다.
“재희야, 좋다고… 좋다고 말해 봐. 나랑 하는 거 미치게 좋다고.”
다정한 말투에 재희의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으며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지만, 그의 요구를 따랐다.
“좋, 좋아…. 세한아. 기, 흐윽…! 기분 좋아.”
“아…. 귀여워.”
세한은 마치 칭찬이라도 하듯 그녀의 클리토리스를 문지르며 허릿짓을 계속했다. 재희는 고통 속에서 작은 쾌락이 피어남을 느꼈다. 그것은 분명 자신이 경험해 본 한계를 뛰어넘을 것이라는 예상이 들었다.
이상했다. 분명 아픈데 왜…….
“아윽, 응, 으응.”
“귀여워. 귀여워, 정말.”
세한의 허릿짓이 급격히 빨라지고, 여느 때보다 깊은 곳에 닿더니 멈춰 섰다.
“하아… 으.”
세한의 나지막한 신음이 울렸다. 재희의 머리와 눈앞이 온통 하얗게 물들었고, 그가 느낄 수 있을 만큼이나 허리가 요동쳤다.
“으흐… 윽….”
한참이나 경련하는 그녀의 몸에 세한이 그녀의 허리를 쓸어 내며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목덜미에 입맞춤했다.
“예쁘다. 잘했어.”
세한의 것이 빠져나가자 재희의 안쪽으로 찬 공기가 밀려들었다.
세한은 콘돔을 가득 채운 자신의 것과 엉망으로 젖은 결합부를 보며 다시금 몸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재희는 여전히 작게 경련하고 있었다. 여운이 가시지 않는 모양이었다.
재희의 엉덩이가 풀썩 밑으로 늘어지고, 젖혀졌던 속옷이 다시 축축한 재희의 중심부를 가렸다. 세한은 숨을 헐떡이는 재희의 몸을 돌려 눈을 맞추었다.
땀에 젖어 엉망이 된 머리가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고, 입가는 축축해 보였다. 뒤통수만 보이는 탓에 재희의 얼굴을 상상했었는데 기대 이상으로 자극적이었다. 완전히 풀어진 눈이 간신히 저를 담아내고 있었고, 볼이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세한은 그녀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쓸어 올리며 젖은 그녀의 입에 키스했다.
재희는 밀려들어 와 엉키는 살덩이에 순순히 눈을 감았다. 혀끝에 단맛이 살짝 감돌자, 재희가 그를 끌어안듯 손을 뻗었다. 어린아이 같은 행동에 세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춥, 떨어진 입술 새로 여운이 담긴 신음을 뱉은 재희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화내지 마. 무서워…….”
“…….”
세한의 입이 조금 벌어졌다.
무슨 뜻일까. 오늘 자신이 명령조로 말해서? 거칠게 해서? 아니면 뒤틀린 저의 감정을 읽어 낸 걸지도 몰랐다.
“사랑해.”
재희의 이어진 말에 세한은 갑갑하던 마음의 응어리가 녹아내림을 느꼈다. 세한은 대답 대신 다시 입을 맞추며 그녀의 중심부를 매만졌다. 아까의 자극 탓인지 그녀의 돌기가 부어 있었다.
“아…. 싫….”
재희가 세한의 눈치를 보듯 말을 삼켰고, 그걸 눈치챈 세한이 젖어 있는 안쪽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으며 말을 이었다.
“왜 또… 읏.”
“한 번 더 하고 싶어.”
잘못돼도 한참은 잘못된 순서의 애무였지만, 재희의 안은 또다시 뜨거워지고 있었다. 떨어진 입술이 다시 포개어졌고, 또 한 번의 신음이 삼켜졌다.
한 번의 허릿짓에 세한의 욕심이 가득 담겼다.
‘재희야, 너는 내 거야.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 눈은 평생 나만 담아내고, 머리로는 내 생각만 해야 해.’
스스로가 보기에도 끔찍한 집착이었다. 이 심장이 멈추는 날에는 끝나게 될까. 아니, 분명 그 이후까지 이어질지도 몰랐다. 재희보다 딱 1초만 더 살고 싶었다. 그녀의 마지막 시선까지 모두 제 것이어야 했으니까.
긴긴밤은 기어코 재희가 엉엉 울고 나서야 끝이 났다.
“흐윽….”
“아, 야해. 너무 귀여워.”
세한이 재희의 눈물을 혀로 핥아 올리며 가슴을 주물럭거렸다. 그녀의 가슴에는 붉은 키스 마크와 손자국이 가득했다.
“그만, 흑, 해. 아, 아파. 흐으….”
저를 그렇게 만든 게 세한임을 알면서도 재희는 세한의 품을 파고들었다.
요즘 들어 세한이 안기는 일이 잦았던 터라, 재희를 이런 식으로 안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세한은 훌쩍거리는 재희의 뒤통수를 쓸어 내며 등을 토닥였다.
분명 저녁에 시작했는데, 창문으로 보이는 하늘에는 새벽의 푸른 기운이 돌고 있었다.
너무하긴 했나.
재희가 저자세로 나오는 게 흔치 않았기 때문에 욕심을 채우다 보니 너무 무리시켜 버렸다. 세한은 달랠수록 커지는 듯한 흐느낌에 헛웃음을 흘리며 제 품에 안긴 재희를 조금 밀어내 내려다보았다.
엉망이 된 얼굴이 세한을 마주하고 다시 폭, 그의 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게 퍽 귀여워 또 한 차례 엉덩이를 주물렀다.
“뭐가 그렇게 서러워. 많이 아팠어?”
다정한 목소리를 흘리자, 재희의 숨이 점차 진정되는 게 느껴졌다.
“왜…….”
그리고 웅얼거리는 재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흐, 화났던 거야?”
“…….”
“나… 오늘 열심히 했는데.”
서러운 목소리에 세한은 그제야 재희의 감정을 알아차렸다. 말을 잘 듣기에 제멋대로 해 버린 것도 있지만, 중간부터 화풀이를 한 것도 사실이었다.
원하는 옷까지 입어 주고, 하기 싫은 체위까지 참아 가며 저에게 맞춰 준 재희였다. 그런데 자신은 질투에 눈이 멀어서….
세한은 그럴듯한 거짓말을 떠올리다 그만두고 그녀를 힘껏 끌어안았다.
“질투 나서.”
“…….”
“잠깐 이재현한테 널 보냈던 기간이 자꾸 생각나서. 다 나로 덧칠하고 싶었어. 욕심은 끝도 없다더니. 네가 돌아왔는데도 화풀이나 하고…. 미안해.”
재희는 문득 아까 들은 세한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 혹시 아픈 거 좋아해? 저번에 보니까 키스 마크도 엄청 달고 있던데.
그렇게 생각하니 오늘따라 집요하게 가슴을 괴롭히던 그의 행동이 설명되는 것 같았다. 재희의 울음은 어느새 그쳐 있었다. 지금까지의 세한의 태도가 이해가 되니 서운함도 가시는 것 같았다. 가슴에서 피어오르던 불안감도.
“너도 전 애인…….”
재희가 말을 꺼내기 무섭게 세한이 입을 열었다.
“알아. 네가 그렇게 말할 거 알고 말 안 꺼냈던 거고.”
흥, 세한이 못마땅하다는 듯 콧소리를 흘렸다.
퉁명스러운 태도에 재희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어쩜 이리 서툰 사람들끼리 만났을까. 저도 세한도 다 어린아이 같았다.
“재현이는….”
“이재현.”
세한이 마치 교정하듯 말을 덧붙였다. 재희는 순순히 그 교정을 따랐다.
“이재현은….”
“아, 다 싫어. 네 입에서 그 이름 듣는 거 너무 싫어. 그냥 그 새끼라고 해.”
세한의 다리가 재희를 포박하듯 엉켜 들었고, 허리를 감싼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재희는 그를 달래듯 등을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듣기 싫어도 들어. 너도 확신 못 하고 있는 거잖아.”
“…….”
“여기 남은 게 널 향한 동정 때문은 아닌지. 정말 좋아했던 건 이재현 아닌지. 아니야?”
세한은 말없이 나지막한 숨을 내뱉었다. 분명 인정하기 싫지만, 긍정을 뜻하는 반응이었다.
“그땐 나도 혼란스러웠어. 나는 예상치 못하게 널 사랑하게 됐고, 그래서 힘들었지만 돌아갈 생각이었거든. 말했지? 널 좋아하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했었다고. 이 꼴 나서 나머지 다 팽개쳐 버릴까 봐. 넌 분명 스물세 살 구재희의 계획에는 없던 남자야. 부모도 친구도 내팽개치고 그토록 질색하던 사랑의 도피나 해 버리게 한 남자.”
“…….”
“음… 이재현은 내 첫사랑이야. 널 만나기 전에 만났던, 그리고 기꺼이 혼란스러운 내게 품을 내주었던……. 좋아했었고, 그래서 널 만들 때 참고했었고. 그걸 부정하고 싶진 않아. 넌 인정 못 하겠지만 걔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마주 볼 수 있었다고 생각해.”
세한은 미동 없이 재희의 말을 듣고 있었다. 세한의 반응 살피던 재희가 그의 등을 토닥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예전의 나는 분명 널 안아 주기엔 겁쟁이였거든. 네 곁에 남았어도 또 널 불안하게 했을 거야. 걔한텐 많은 걸 배웠어.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 도망치지 않고 맞서는 방법도. 걔 옆에 있을 때 내가 원하는 바는 명확했어. 이렇게나 좋은 사람인 이재현을 더 많이 좋아할 수 있길. 너에 대한 마음을 몽땅 덮을 만큼. 돌아가서도 네가 생각나면 그리울 거 같아서. 다 잊길 바랐어.”
“…….”
“그런데 생각대로 안 됐지. 네가 쓰러진 순간 내 세상이 멈춰 섰고, 이성적 사고보단 너한테 닿고 싶다는 충동이 먼저였어.”
“…….”
“내가 내 전부를 다 포기하고 나서야 감정에 솔직해질 수 있었어. 난 이 선택에 후회가 없어. 몇 번을 다시 돌아간대도 너를 향해 달렸을 거야. 난 그 충동이 사랑이었다고 생각해.”
재희는 말을 마치고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정리하고 나니 그간 겪었던 혼란들이 모두 추억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사랑 이야기기도 했지만 분명 구재희의 성장 이야기기도 했다.
“날 더… 좋아했다는 거지?”
그런 재희와 달리 세한은 여전히 근원적인 문제에 머물러 있었다.
“그놈보다 몇백 배, 아니 몇천 배는 나를 더….”
분명 술은 깬 지 오랜데 도무지 어른스러운 대화가 불가능했다. 재희는 분명 자신의 성장과 사랑에 대해 말했는데 여전히 세한은 재현과 경쟁 중이었다.
“세한아, 나 좋아해?”
재희의 물음에 세한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사랑에 미쳐서 이렇게 질투로 숨 막히는데.
“온몸이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못 느끼겠어?”
“나 무서웠단 말이야. 아까 네가 딱딱하게 굴어서.”
“아, 그건….”
“난 겁이 많아. 네 사랑이 끝날까 봐 무서워.”
역시 지금의 재희는 예전의 세한과 닮아 있었다. 불안하고, 눈치 보고,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하던 자신의 모습과.
이상한 일이었다. 이렇게 되어 버리면 이 관계에는 ‘을’밖에 없게 되는데…….
세한의 품에서 꼼지락대던 재희가 고개를 들어 세한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약간의 간질거리는 감각에 세한이 미간을 찌푸렸고, 재희의 입술이 떨어진 자리에는 연한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나도 널 갖고 싶어.”
“…….”
“사랑해.”
적절한 답이었던 걸까. 조금 멍하던 세한의 입가에 미소가 자리 잡았다. 처음 느껴 보는 그녀의 소유욕. 그 대상이 저라는 게 퍽 마음에 들었다.
“나도.”
을의 연애. 이 사랑에는 이제 약자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 이제 내 청혼 받아 주는 건가?”
세한이 재희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물었지만, 그녀는 그새 잠들어 있었다. 그가 너무 몰아붙인 탓에 몸이 한계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참 나.”
그가 기가 찬다는 듯 웃었지만 이내 다정하게 재희의 머리통에 자신의 얼굴을 부비며 눈을 감았다.
‘평생 갑으로 살아, 재희야. 언제나 내가 더 사랑할게.’
내일 더 지독하게 사랑할 것을 다짐하며.
^
마침내 모두의 힘이 소멸하자 세상은 다시 떠들썩해졌다. 1등을 가리는 기준이었던 ‘헌터’들의 능력이 이제 없어진 것이었으니까. 따라서 세한의 신분도 비교적 평범해졌다. 먼치킨 헌터에서 한라그룹 차남이자, KSH그룹 회장으로. 아니, 바뀐 후도 그다지 평범한 건 아니었지만 ‘비교적’ 말이다.
그에 따라 ‘헌터’ 회사였던 KSH도 붕 떠 버렸지만, 정작 본인은 아무런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위기를 느끼고 움직이는 건 S급들이었다. 김세한의 입에서 ‘어? 이제 쓸모없네. 해산해라.’라는 말이 나왔다간 꼼짝없이 실직자 신세가 될 테니까.
그들은 매일 매일 다른 사업 아이템과 아이디어를 세한에게 들이밀었다. 그럴 때면 세한은 재희를 무릎에 앉힌 채로, 그 종이 뭉텅이를 읽는 둥 마는 둥 하다 퇴짜를 놓곤 했다. 오늘도 사색이 돼서 방을 나서는 론의 뒷모습과 문밖에서 옹기종기 기다리는 나머지 S급들의 얼굴을 보며, 결국 재희가 입을 열었다.
“저기요, 백수 양반.”
그게 자신을 부르는 호칭인 줄 알긴 아는 건지, 재희의 배를 감싼 세한의 팔이 움찔거렸다. 하긴, 내내 자기 좋을 대로 살아오던 세한이 회장직에 앉은 것 자체가 문제였다.
“이 회사 접을 거야? 다들 불안해하잖아. 돈을 벌어야 운영이 되지. 너한테 딸린 식구가 얼마인데.”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 아무 생각 없던 건 재희도 마찬가지였다. 세한에게 돌아오고 나서부턴 둘만의 세계가 너무 커져 바깥을 잊고 지내기 일쑤였기 때문이었다. 재희가 세한의 무릎에서 일어나 책상에 걸터앉자 이번엔 그가 그녀의 허벅지에 얼굴을 부벼 왔다.
세한은 마치 봉인을 푼 것처럼 숨김없이 감정 표현을 해 오고, 어리광 부리고, 떨어지면 죽는 것처럼 굴었다. 그 때문에 회사 안에서 그의 코드 네임 탓에 지어졌던 ‘하데스와 페르세포네’라는 거창하고 오글거리던 별명이 흐려지고, 대신 ‘연산군과 장녹수’라는 또 다른 별명을 얻었다. 세한이 재희 때문에 일을 놓았다는 것이다. 하긴 그 전엔 일에 미쳤던 그가 지금은 그녀와 있는 시간에만 집중하고 있으니, 사정을 모르는 대다수의 회사 사람들 눈에 그렇게 보여도 딱히 이상할 게 없었다.
재희가 듣기 싫다는 듯 제 다리 사이를 파고들어 오는 세한의 고개를 잡아 들어 눈을 맞췄다.
“네가 이러고 있으니까 내가 장녹수라는 얘기나 듣잖아.”
“뭘 그런 걸 신경 써. 이리 와서 뽀뽀나 해 봐.”
세한은 입술을 내민 채 야릇하게 미소 지었다. 정말 나사 하나가 빠진 것처럼 능구렁이 같은 모습이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그 별명이 괜히 나온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자신이 장녹수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세한은 연산군이라는 이미지와 잘 어울리기는 한 것 같았다.
“나 장난하는 거 아닌데.”
“치이.”
재희가 세한의 입술을 손바닥으로 밀어내며 말하자, 노골적으로 토라진 티를 낸 세한이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형은 나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했는데. 평생 놀아도 된다고.”
“그건 네가 그냥 한라그룹 망나니 차남이었을 때고, 지금은 KSH그룹 회장이잖아.”
재희가 어린아이 타이르듯 말했지만, 회사 경영과 시장 원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건 세한이였다. 즉, 그는 그녀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은근히 재희가 자신을 혼내는 것을 즐기는 듯했다. 중간중간 피식거리는 것과 쫑알거리는 재희를 담고 반달로 휘어지는 눈이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그는 손깍지를 끼며 책상에 걸터앉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난 좀 더 이렇게 너랑 시간 보내고 싶어. 못 봤던 기간 메우려면 더 만지고, 대화하고, 느껴야겠다고.”
“지금도 충분히 하고 있으면서. 그리고 이제 나… 어디 안 가.”
“…….”
“네가 어디를 가도, 난 여기 있을 거야.”
열린 창문으로 싱그러운 바람이 들어와 세한의 머리가 흩날렸다. 오늘의 공기는 아주 신선하고 달콤했다. 재희는 세한의 볼을 감싸 입을 맞추었다. 세한은 순순히 눈을 감고 자신을 리드하는 그녀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들어온 햇살이 너무 간질간질하고 포근해서 주말 오후와 같은 나른한 분위기였다.
담백하게 떨어진 입술. 살짝 눈꺼풀을 들어 올린 그가 꿈결 같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말, 내가 제일 듣고 싶은 말이었어.”
“알아. 이제야 해서 미안해.”
세한은 마치 용서한다는 듯 살포시 미소 지었고 또 한 번 재희와 입술을 포개었다.
***
재희는 ‘김세한’이라는 인물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무력해지는 걸 싫어하는 인간이었고, 감투를 쓸 수밖에 없는 통솔력을 가지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걱정이 우습게 그는 주류 사업 쪽으로 능숙히 그룹을 이끌었다.
그 아이템이 뭐가 됐든 한라그룹을 등에 업고, 한때 헌터 회사이자 길드로 세상에 이름을 날렸던 KSH가 하는 사업이라면 사실상 성공은 따 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에 따라 한동안 걱정으로 잠 못 이루는 듯 보였던 S급들은 요즘 경영과 영업, 생산으로 팀을 나눠 한창 바쁜 모양이었다.
더군다나 ‘한국’이라는 특성 탓일까, 정말이래도 괜찮은 건가 싶을 정도로 빠르게 일상의 모습이 하나둘 갖춰지기 시작했다. 몬스터가 사라진 그날 당일, 라디오로 그간 어디 숨어 있었는지 모를 정치인들이 모여 앞으로의 나랏일을 논의했고, 너 나 할 거 없이 엉망이 된 길 청소에 나섰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단합력이었다. 무너졌던 군사와 정치를 다시 세우기 위해 장석현이 하나둘 영향력 있는 사람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그 명단엔 당연히 세한도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그에게 공동체로서의 단합은 어울리지 않았기에 나랏일은 거절했지만.
사업으로 세한이 바빠지자, 재희는 또 홀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고 있었다. 전과 다를 바 없이 세한을 기다리며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창밖을 내다보는 나날이지만 많은 차이가 있었다. 나갈 수 없는 것과 나가지 않는 것은 완전히 다르니까.
가장 달라진 건, ‘재희와 놀아 주기’가 주 업무였던 테리가 영업 쪽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우수 사원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요즘은 얼굴 보기가 어려워졌다.
세상이 평범해진 이후로 재희의 방문 앞을 지키는 사람은 없었고,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똑똑-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재희가 자연스레 읽던 책을 덮었다. 그리고 열리지 않는 문에 잠시 고민했다.
‘안 들어오는 걸 보니 김세한은 아니네. 내 허락이 필요한 거면…. 누구지? 테리인가?’
“들어와.”
재희의 짧은 대답에 문을 열고 등장한 건, 머리가 조금 길어진 듯한 지우였다.
그녀는 흰 셔츠에 일자로 떨어지는 검은 슬랙스를 입고 있었다. 그냥 본다면 직원 중 하나라고 해도 모를 복장이었다.
재희는 예상치도 못한 인물의 등장에 벌떡 몸을 일으키며 입을 벙긋거렸다. 반면 지우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 태연히 걸어와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뭘 그렇게 놀라. 내가 못 올 데 왔어? 앉아.”
지우의 외적인 것은 많이 바뀌어 있었지만, 시니컬한 말투는 여전했다. 재희는 오랜만에 본 얼굴이 반가우면서도 마음이 복잡했다. 익숙한 얼굴을 마주하자 순식간에 b.w길드 멤버들의 얼굴이 차례로 떠오르며 한동안 못 본 그들의 소식이 궁금해졌지만, 또 마냥 방방 뛸 수는 없는 묘한 상황이었다. 그녀와 대화하려면 ‘이재현의 행방’을 짚고 넘어가야 할 테니까.
“여기… 두 번째네. 그때는 창문으로 들어왔었는데.”
지우는 방을 둘러보며 회상에 잠긴 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멍하니 서 있는 재희를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넌 아직도 행동이 느리네. 손님으로 온 건데 차라도 내시죠, KSH 안주인님.”
“어? 어… 어! 뭐 마실래? 커피? 홍차? 녹차?”
“커피.”
재희가 황급히 포트 쪽으로 가 물을 담고 그 앞에 섰다.
슉슉-포트에서 김이 올라왔다. 재희의 머릿속은 이미 오만가지 변명을 생각 중이었다. 지우가 봤을 땐, 기껏 데리고 도망쳐 줬더니 다시 세한에게 돌아온 꼴 밖에 안 되는 것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지우는 세한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뭐, 커피 네가 볶아 오니?”
비꼬듯 재촉하는 말에 재희가 서둘러 커피를 내렸다.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재희가 잔을 내려놓으며 건넨 말에 지우가 피식 웃으며 잔을 들었다.
“뭐 이렇게 어색하게 대해. 우리 같이 살던 사이잖아.”
“…내가 어색하게 대했나?”
“응, 무지. 나한테 뭐 죄지었어?”
“아,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다리를 꼬고 여유롭게 커피를 홀짝이는 지우와 달리, 재희는 다리와 두 손을 모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딱 선생님에게 혼나는 학생 꼴이었다.
둘 사이에 벽이라도 쳐진 것처럼 적막이 흐를 때쯤, 발끝을 두어 번 까딱인 지우가 나긋한 목소리를 꺼내었다.
“너 잘 지내나 보러 왔어. 그때 약속했잖아. 어디 있어도 내가 찾아가겠다고.”
“…어?”
“예전처럼 불행하면, 그때처럼 또 데리고 도망쳐 줄까 생각하기도 했고.”
재희와 눈을 맞춘 지우는 보기 드문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긴장감에 두근두근 떨려 오던 재희의 심장이 순식간에 안정을 되찾았고, 입가에도 살포시 미소가 걸렸다.
재희가 대답을 꺼내기도 전에 지우가 턱을 괴며 말을 이었다.
“뭐, 다행히 그럴 필요 없어 보이네.”
“응, 나 행복해.”
확신이 담긴 말에 지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됐고. 나 여기 들어오는 거 힘들었어. 네 옛 동료라고 해도 여기 1층 데스크 완전 철벽이더라. 역시 대기업이라는 건가.”
“미안, 내가 찾아갔어야 하는 건데.”
“풉, 네가 우리 어딨는지 알고 와. 너야 눈에 띄는 데 있으니까 온 거지.”
b.w가 흩어진 그날로부터 반년이 지났고, 너무나 달라진 그녀의 복장이 지난 시간을 설명하고 있었다.
“우리라는 건… 유태영이랑 아직….”
“어. 아직 같이…. 살지.”
지우는 쑥스러운 듯 목 부근을 쓸며 눈을 돌렸다. 같이 사는 건 그전에도 마찬가지였는데, 남녀 둘의 동거는 느낌이 한참 다르긴 한 모양이었다.
“너희 그러니까, 사귀는 거지?”
“아…. 개 빡치네, 또.”
방금까지의 다정한 말투는 다 어디 갔는지, 지우가 머리를 쓸어 올리며 거친 말을 내뱉었다.
“몰라. 사귀자는 말을 못 들었어. 그놈이 스킨십을 먼저 하는 성격도 아니고, 이놈 진짜 날 아직 전우로 생각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
재희는 태영을 떠올리며 눈을 굴렸다. 눈치가 없지는 않던 거 같으나, 또 먼저 적극성을 보일 만한 성격도 아닌 것 같았다.
“그냥 대놓고 물어보면 안 돼? 우리 무슨 사이냐고.”
“지금은 물어보기 그래. 너무 오래되기도 했고…. 짹짹이 죽고 유태영이 우울증을 크게 앓았었거든.”
순간 잊고 있던 기억이 생생히 떠올랐다. 흑염룡의 부름에 폭주한 짹짹이를 제 손으로 쏴 죽였던 유태영. 사실 냉정히 본다면 꼭 그 일이 아니라도 예견된 이별이긴 했다. 사람과 마음이 통한 몬스터여도, 세상이 변한 지금은 존재하면 안 됐으니까. 재희의 마음 한구석에 아쉬움이 퍼질 때쯤, 지우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때 우울한 애 잡고 물을 이야기는 아닌 거 같아서. 그러다 보니 타이밍을 놓쳐서 애매모호하게 됐고…….”
서로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는 건 확인했지만, 아직 관계 정리가 덜 된 모양이었다. 다시 한번 커피를 홀짝인 지우가 재희와 눈을 맞추며 물었다.
“내 연애사는 이걸로 됐고, 네 연애사나 얘기 좀 해 봐. 너도… 많은 일이 있었던 거 같은데.”
꿀꺽, 재희가 침을 삼켰다. 드디어 올 게 온 모양이었다. ‘사망’, ‘행방불명’, ‘이별’. 나름 여러 가지 선택지가 있었으나, 어째선지 입이 열리질 않았다.
지우는 입술을 달싹이는 재희를 빤히 바라보다,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대신 입을 열었다.
“네가 말 못 하는 거. 이성재에 관한 얘기지?”
“…….”
“사실 답 못 들을 거 알고 한 물음이었어. 너희끼리만 뭔가 알고 있다는 거… 다들 눈치채고 있었거든.”
지우는 그녀가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덤덤한 목소리로 뱉어 냈다. 이미 다 지나간 이야기임에도, 그때 팀원들이 무언가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재희의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리고, 그게 아마… 남달랐던 너희의 비밀이겠지. 맞지?”
완벽한 추리였다. 학창 시절 적었던 허술하고 유치한 판타지 소설. 어쩌면 이 소설에서 가장 큰 빈틈은 작가인 재희 본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뭐 하나 제대로 한 게 없었구나.’
“…응.”
더 이상의 거짓을 만들고 싶지 않아, 재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우는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를 홀짝였다.
“엄청 궁금했었는데. 김세한이 알려고 하지 말라더라. 후회할 거라고. 그놈 말은 듣고 싶지 않았는데, 지친 눈에서 진심이 느껴져서 관뒀어. 그래서 끝까지 안 물어봤던 거야.”
“…김세한이?”
아마 세한이 이 세상의 비밀을 알고 난 이후, 재희는 모르는 팀원들과의 일화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지우는 담백하게 어깨를 털어 내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남녀 관계야 남이 참견할 일은 아니고, 두 가지만 확인하고 싶어.”
“두 가지……. 뭔데?”
“아까 말했듯이 지금 네가 행복한지, 그리고… 이재현, 그놈도 괜찮은 건지.”
지우의 입에서 뱉어진 ‘이재현’이라는 이름에 재희가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한 것뿐이었다는 걸 증명받은 셈이었다.
순간 마지막으로 저에게 뻗어졌던 재현의 손이 떠올랐다. 그는 분명 무사히 돌아갔을 것이다. 조금은 아쉽고, 슬펐을지 모르지만, 그녀가 아는 그 ‘이재현’이라면 분명 괜찮을 것이다. 살면서 만난 모든 사람 중 가장 이성적이고 단단한 사람이었으니까.
“응, 다 괜찮아. 너도 알다시피 ‘이재현’이잖아.”
확신이 담긴 재희의 말에 지우의 입가에 포물선이 그려졌다.
“하긴, 그놈은 어디서든 괜찮을 놈이지.”
마음의 짐 하나를 덜어 내자 알게 모르게 긴장에 굳었던 재희의 어깨가 완전히 늘어졌고, 편한 대화가 오갔다. 동료였던 그녀는 지금은 친구가 되어서 재희의 안부를 물었고, 팀원들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가장 가까이에서 이 이야기의 마지막을 봤던 김성민과 배준형은 한동안 사라진 이재현을 찾아다녔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빠르게 변하고 있는 세상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정신없이 보내고 있으며, 더 이상 그날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고 했다. 내게도 안부를 전해 달라고 했다는 거로 보아 두 녀석도 이 비밀을 더는 파고들지 않기로 한 모양이었다.
“박도윤 근황은 나보다 네가 더 잘 알지? 김세한이 아직 보육원 후원 중인 거 같던데.”
“어. 뭐, 딱히 들리는 건 없는데. 그놈도 우리가 굳이 걱정 안 해도 될 놈이잖아.”
재희의 무심한 말에 지우도 동의한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아니, 그나저나… 너도 참.”
지우가 묘하게 눈을 찌푸리며 재희를 훑어 내렸다. 재희는 지우가 갑자기 말을 멈추자 고개를 기울이며 되물었다.
“나? 뭐?”
“그냥… 네 팔자가 사납다는 생각이 들어서. 김세한, 이재현. 한 놈은 애새끼, 한 놈은 밑도 끝도 없이 음침하고…….”
애정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냉한 평가에 재희는 살포시 웃었다. 정말 친구로서 인간 구재희를 우선시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왜, 난 좋은데.”
“아, 그냥 네 취향이 문제였네. 난 내심 네가 좀 더… 유한 사람이랑 만나길 바랐는데. 너 혼자 땅굴 팔 때마다 꺼내 줄 수 있는.”
“예를 들면… 유태영 같은?”
재희가 눈썹을 들썩이며 묻자, 지우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얼마나 좋냐. 사람이 늘 한결같이 다정한 거. 근데 걘 이미 내 거니까 넘보지는 말고.”
재희는 지우답지 않은 말에 헛웃음을 흘렸다.
“유태영은 너 이러는 거 알아?”
“알려 주지 마. 자존심 상해. 아무튼, 네 친구로서 그랬다고.”
‘평범한 애인’이라는 것은 없다. 연애하면 그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한 사람의 인생에 작은 족적을 남기게 되고, 그건 인생을 통째로 바꾸기도 한다. 세한도, 재현도 재희에게 있어 지금의 저를 만든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내 연애를 쭉 봐 왔던 너한테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이재현이 내 인생에 찾아왔던 터닝 포인트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큼 좋은 사람이었어. 날 많이 성장시키기도 했고.”
“성장이라……. 예를 들면?”
“음…. 김세한은 안길 품이 필요한 남자였는데, 난 안아 주는 방법을 몰랐거든. 반면에 이재현은 날 안아 주던 남자였고, 걔한테 방법을 배운 거 같아. 어떻게 하면 상대를 아낄 수 있는지,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지. 친절하고 자세히 배웠어. 지금 세한이 옆에 있을 수 있는 것도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어.”
지우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입술을 삐죽였다.
“구재희 친구로서 이해가 되면서도, 이재현 친구로선 이거 정말 쌍년이네 싶기도 하고.”
“나도 그렇다고 생각해. 더 욕해 줘.”
재희가 살포시 미소 지으며 커피를 홀짝였다. 그런 재희를 다정히 눈에 담던 지우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나는 감정이란 건 온전히 개인의 영역이라고 생각해서 그만 덧붙일래. 원래 연애의 끝에선 한쪽은 악역이어야 하기도 하고, 또 연애가 별건가 싶기도 해서……. 네 말대로 김세한, 이재현을 겪었기에 네가 지금 행복한 거라면 그 자체로 가치 있다는 생각이 드네.”
세한에게 비슷한 말을 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답이 돌아왔다. 어딘가 다른 종류의 애정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재희가 감사 인사를 하려 입을 뗐을 때, 지우가 먼저 말을 이었다.
“언제 어느 때든 1순위는 너니까, 김세한 이놈도 영 아니다 싶으면 차 버리고 나와. 너 그냥 평생 쌍년으로 살아. 네 성격에 또 땅굴 팔 거 생각하면 일찌감치 손 터는 게 백배 천배 나으니까.”
“나 예전에 너한테 욕 들으면서 이거랑 반대되는 조언을 들었던 거 같은데.”
“그건 너도 이재현도 동료였으니까 최대한 객관적으로 봤던 거고. 지금 내가 챙겨야 하는 건 너 하나니까 편파적인 거고. 김세한? 알 바야?”
“풉. 아직도 김세한 싫어해?”
“그놈을 좋아할 이유는 또 뭐야.”
피식피식, 이유를 알 수 없는 웃음이 번갈아 새어 나오던 그때였다.
똑똑-끼익—
허락 없이 열린 문. 재희는 곧바로 노크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갑작스레 들려온 노크 소리에 지우의 고개도 문 쪽으로 향했고, 밝은 얼굴로 들어온 세한이 그녀를 발견하고 얼굴을 굳혔다.
‘아…. 하필.’
재희가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어 보려 어색한 미소를 띠었지만, 세한에 이어 방 안으로 들어온 그의 형, 세훈의 등장에 입꼬리가 굳어졌다.
‘이게 대체 무슨 조합이야?’
표정이 구겨진 건 지우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세훈만이 재희와 눈을 맞춘 채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세한은 껄렁하게 걸어 들어와 지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다지 안 반가운 손님이 와 있었네.”
누가 들어도 지우에게 하는 말이었다. 재희가 둘 사이에서 중재할 새도 없이,
“오랜만이네, 제수씨? 바쁜 거 같아서 내가 왔지.”
이쪽은 이쪽대로 곤욕이었다. 재희는 세훈에게 예의상 눈웃음을 지어 주고, 지우와 눈싸움 중인 세한을 당겨 앉히며 아주 작게 물었다.
“형님분은 갑자기 왜 오신 거야?”
“얘가 너랑 나랑 헤어지래?”
거의 동시에 나온 질문에 서로가 다른 것을 신경 쓰느라 바쁘다는 걸 확인했다. 서로에게 시가, 처가처럼 느껴지는 인물들이 한자리에 모인 셈이었다. 세한이 재희의 옆자리에 앉자 자연스레 세훈이 지우의 옆자리에 앉았다. 세훈은 지우에게 작은 묵례를 건넸고, 그녀도 얼떨결에 그 인사를 받았다.
“손님이 있는 줄은 몰랐네. 제수씨가 아는 사람 중 회사 사람이 아니라면…. 나가서 사귄 사람 중 하나인가? 그럼 b.w 소속 멤버?”
세훈은 재희에게 묻지 않고도, 그녀와 지우의 관계를 단번에 추측해 냈다. 사람 좋은 미소가 영 찝찝한 건, 저 미소 너머에서 끝없이 굴러가고 있는 머리가 징그러울 정도로 똑똑해서일지도 몰랐다. 지우도 세훈의 그런 면을 읽은 걸까? 그녀가 경계하듯 몸을 뒤로 빼며 물었다.
“누구신데? 이쪽.”
“아.”
재희가 입을 열기도 전에 세훈은 자신의 재킷 안쪽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건네었다. 화려한 한라그룹 로고 밑의 ‘회장’이라는 두 글자가 멀리서도 그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그와 달리 그의 입에서 나온 자기소개는 담백했다.
“세한이 형입니다.”
그녀는 받았던 명함을 짧게 한 번 내려다보곤, 흥미 없다는 듯 자신의 커피 잔 옆에 내려놓았다.
“한라그룹 회장이면, 요즘 정치계랑 얽혀서 한창 바쁘지 않나? 생각보다 한가한가 보네.”
마치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지우의 말에 세훈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답했다.
“저한텐 동생이랑 관련된 일만큼 중요한 게 없어서요.”
“허어. 동생 아끼는 형이라, 구재희 입장에선 좋을 게 없네.”
지우는 무심하게 턱을 괸 채 말했고, 재희는 땀이 나기 시작했다.
정확히 관계를 파악한 듯한 지우가 등을 꼿꼿하게 세운 재희를 한 번 훑으며 본인은 몸을 더 삐딱하게 늘어뜨렸다. 세훈의 눈이 지우를 빠르게 훑어 내리는 게 보였고, 그의 얼굴엔 아까보다 비릿한 느낌의 미소가 자리 잡았다. 저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얼른 끊어 내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판단한 재희가 황급히 물었다.
“저한테 용건 있으신 거죠?”
세훈은 또 한 번 재킷 안쪽에 손을 찔러 넣으며, 지우 쪽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믿을 만한 동료지?”
“…네.”
“그럼 지금 줘도 상관없겠네. 이거.”
세훈이 테이블 위로 ‘구재희’라는 이름이 박힌 주민 등록증을 꺼내어 놓았다. 사진과 생년월일은 같았지만, 발급 일자와 뒷 번호는 달랐다.
“이게 뭐….”
“이제 여기 머물기로 한 거잖아. 신분이 필요할 테고, 그래서 만들었어.”
다시 말해, 이게 앞으로 재희의 신분이라는 것이었다. 이 세계에 없던 사람인 그녀가 이제 공식적으로 존재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긴, 신분을 만든다면 사망자와 생존자가 정확히 파악되지 않아 전산이 엉망인 지금이 적격이었다.
아무리 이상함을 알아차렸다고 해도 이런 상황까지 자세히 알 리 없는 지우는 조금 놀란 얼굴로 눈치를 살폈다. 재희가 얼떨떨한 기분에 휩싸여 있을 때, 그녀의 머릿속을 읽은 것처럼 세훈이 말을 이었다.
“참고로, 그거 만든 지는 한참 됐어. 언제더라, 세한이가 당신을 좋아한다고 했을 때부터였나.”
“…….”
“본인 입으로 내 동생 옆에 있겠다고 하는 순간을 계속 기다렸어. 난 제수씨의 출신이 궁금하지 않아. 오래 돌아왔지만, 이제라도 머물기로 한 거면 그걸로 됐어.”
어딘가 가시가 돋친 말에 재희의 등이 서늘해질 때쯤 세한이 언성을 높였다.
“형, 쓸데없는 말 하지 말라고 했지.”
세한의 목소리는 정말 화가 난 듯했지만, 세훈은 특유의 미소와 함께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뭐. 제수씨 입장에선 내가 별로였겠지만, 상처받을 게 뻔한 길을 가려는 동생 둔 형 입장도 생각해 본다면 지금까지 내가 보였던 태도, 이해 가지?”
“아. 네, 뭐.”
세훈은 재희에게 화해하자는 듯 악수를 청했고, 그녀는 얼떨결에 그의 손을 맞잡았다. 담백하게 두어 번 흔들린 손이 떨어졌을 땐, 세한보다 짙으면서 화한 향수 냄새가 손에 딸려 왔다.
“아, 결혼 의향 생기면 말해 주고, 부담 갖지 마. 강요 아니고 그냥 궁금한 거뿐이니까.”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세한은 둘 사이의 문제를 대놓고 이야기할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건 예전처럼 저를 떠보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아니나 다를까, 반응 살피는 듯한 세훈의 눈이 여전히 재희의 얼굴에 닿아 있었다. 재희는 일부러 눈을 피하지 않은 채 빤히 응시했다. 한동안 흐르는 적막에 세한이 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분위기를 파악하고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얌전히 대화를 듣고 있던 지우가 커피 잔을 세게 내려놓았다. 탁-하고 테이블을 울리는 소리에 세훈과 재희 사이로 흐르던 긴장감이 깨어졌다.
“구재희, 재벌가 며느리 노릇 하는 거 딱 봐도 쓸데없이 머리 아플 거 같은데, 돈에 욕심 있는 거 아니면 기어 나와서 연락해. 뭐든 도와줄 테니까.”
너무 든든한 말이었지만, 문제가 있다면 너무 대놓고 한다는 점이었다. 흐르는 정적 속에 세훈은 몸을 뒤로 뺀 채 팔짱을 끼었고, 졸지에 사이에 끼게 된 재희의 피는 차갑게 식어 갔다. 그 와중에 세한은 지우에게 맞불을 놓았다.
“이제 가실 때 되지 않았나? 직원을 싹 다 갈든지 해야지. 뭐 하는데 아무나 회사에 들여.”
“아무나라니. 애인을 존중하면 그런 식으로 얘기해선 안 되지, 구재희는 친구 하나 못 만나나?”
분명 설정 초기엔 히어로와 히로인 설정이었던 두 사람이 만나 으르렁대는 건 봐도 봐도 신기한 그림이었다.
“누가 그렇대? 그게 왜 하필….”
“네놈한테 또 잡혀 있는 거면, 내가 데리고 나가려고 왔는데. 뭐, 아직은 간당간당하게 예쁨 받고 있나 보네. 이재현 없다고 늘어지지 말고 항상 긴장해. 구재희한테 선택지는 너만 있다는 착각하고 있을까 봐 경고하는 거야.”
세한은 갑작스레 재희의 손을 꾹 쥐었고, 지우는 그걸 보고 눈썹을 까딱이다 세훈을 흘끔거리며 말을 이었다.
“장담하는데, 너한테 편한 사람이 구재희한테도 편할 거라는 속 편한 애새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거라면, 그 손 놓치는 건 순식간이다. 으… 재수 없어.”
세한을 바라보며 한 말이었지만, 웃음소리는 세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는 자신의 입을 가린 채 한참을 웃었다.
‘이 새끼 미친 거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생소한 모습이었다. 재희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인지 지우의 미간도 좁아지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웃겨요?”
날 선 그녀의 물음에 세훈은 손을 내저으며 심호흡을 했다. 어느새 그의 몸은 완전히 지우 쪽으로 향해 있었다.
“권지우 씨? 예상했던 것보다 성격이 시원시원하시네요.”
“내 이름은 또 어떻게 아시려나. 그쪽이랑 달리 유명인도 아닌데.”
“제가 한동안 b.w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워낙 특이했잖아요. 멤버 수도 쥐똥만 한데 랭킹 1위 헌터도 있고, 사실상 랭킹 1위 힐러도 있고, 몬스터를 타고 다니는 남자에 가면까지. 당신도 저한텐 특이한 멤버 중 하나였는데. 남자들 사이에 껴서 기 안 죽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여자 하나.”
세훈이 턱을 괸 채 묘하게 미소 짓자 모두가 숨을 죽였다. 아무도 그가 무슨 생각으로 저런 이야기를 꺼낸 것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연히 사냥하는 장면을 본 적 있는데, 가면 때문에 목소리만 들었었거든요. 근데 오늘 이렇게 보니 상당히 미인이시네요.”
“저기요. 왜 제가 지금 그쪽한테 평가받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작작 하시죠. 항상 높은 위치에 계셔서 모르시나 본데, 꽤 실례되는 말이거든요.”
“그럼 지우 씨도 나 평가해 봐요. 그럼 공평하겠다.”
세훈은 다리를 꼬며 말했고, 광나는 구두가 아래위로 까딱였다. 턱을 괸 손 밑에선 가격을 가늠할 수 없는 시계가 짤깍거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걸 걸친 세훈에게서 흘러나오는 여유는 사람을 압도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 건 본인뿐인 모양인지 지우와 세한의 얼굴이 구겨졌다.
“형. 뭐 하는 건데?”
“지금 뭐 하자는 건데요?”
두 사람의 입에서 같은 물음이 흘러나왔고, 이어진 그의 답은 명확했다.
“그쪽 맘에 들어서 작업 거는 건데요? 아, 오해할까 덧붙이면 내 밑에 두고 싶은 거 아니고, 내 옆에 두고 싶은 거예요.”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도 재주라면 이 사람은 타고난 재주꾼이었다. 단 몇 초 만에 또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으니까. 세한이 답지 않게 놀라 입을 벙긋거렸고, 지우는 크게 한숨을 내쉬다 그를 훑어 내렸다.
“별로네요. 그쪽 잘생기고, 돈 많고, 똑똑한 거 같은데 전 좀 세련됨과는 거리가 먼, 멍청하면서 편한 타입이 취향이라.”
태영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는 말이었다. 물론 알아들은 건 재희뿐이었다.
“야, 더 있다 가려 했는데, 대기업 공기가 영 나랑 안 맞나 봐. 온몸에 두드러기 나기 전에 가 볼게.”
지우가 몸을 일으키며 재희의 앞쪽 테이블 위로 작은 쪽지를 건네었다.
“여기 내 번호. 무슨 일 있거나, 오늘 같이 만나고 싶으면 연락해.”
여전히 무심한 듯한 목소리였지만, 눈엔 살짝 미소를 담고 있어서 재희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우는 세한을 바라보며 고개를 두어 번 젓다가 그대로 방을 나섰다. 뚜벅뚜벅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완전히 들려오지 않게 될 때쯤, 세한의 한숨 소리가 방을 울렸다.
“언제부터 여자 취향이 저따위였어?”
“왜, 멋있잖아.”
세한의 고성에도 세훈은 서글서글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곤 재희가 막을 새도 없이 앞에 놓인 흰 종이를 펼쳐 들었다. 세한은 마른세수를 하며 창백해진 얼굴로 부탁하듯 말했다.
“제발 평범하게 형이랑 비슷한 여자 만나. 난 죽어도 쟤 형수라고 부를 생각 없으니까.”
세훈은 보던 종이를 다시 재희 앞으로 가져다 놓았다. 번호를 모두 외운 게 틀림없었다. 재희는 종이를 받아 들며 경고하듯 말했다.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는데, 제 친구한테서 관심 꺼 주시면 좋겠어요. 쟤 좋아하는… 아니, 사귀는 남자도 있고.”
“미혼인 거잖아?”
보통 애인 있느냐고 물을 테지만, 그는 특이하게 결혼 여부를 물었다. 재희는 예상치 못한 물음에 어버버 거리며 말꼬리를 늘였다.
“뭐… 결혼은 아직이지만….”
“그럼 됐어. 그리고 난 손대면 뭐든 항상 진지하게 하는 타입이니까, 걱정 마.”
세훈은 지우가 비워 낸 커피 잔 옆에 놓인 자신의 명함을 챙겨 들며 느긋하게 몸을 일으켰다.
“가 볼게. 아직 할 일이 많아서.”
그는 재희에게 작은 눈인사를 건넸지만, 이미 신경은 다른 데에 쏠린 듯 보였다.
“형, 인생에 자극이 필요한 거면 예전처럼 내가 사고 쳐 볼게. 저 여자는 진짜 아니야. 아니면 내가 다른 여자….”
탁-세한의 다급한 말에도 담백하게 문이 닫혔다. 얼굴이 창백해진 세한과 달리 재희의 입꼬리는 씰룩거리고 있었다. 원래라면 이 이야기의 히로인인 지우와 주인공 형의 조합이라니, 꽤 흥미로운 만남이었기 때문이다.
‘유태영, 긴장 좀 해야겠네. 김세훈이 대시하는 거 알면 질투나 경계 좀 하려나.’
아침 드라마를 보던 엄마의 기분을 조금 알 것도 같았다. 재희에겐 이들의 삶 그 자체가 긴 외전인 셈이었고, 그렇기에 앞으로 지루할 틈은 없을 것 같다는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그녀의 어깨에 쓰러지듯 몸을 기댄 세한은 눈을 끔벅이며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니까… 평범한 여자 만나라는 말, 형이 나한테 하던 말인데 내가 하고 있네.”
“풉, 그랬어?”
재희도 세훈의 입장에선 ‘평범’과는 거리가 먼 여자였을 것이다. 신분이 없는 여자였으니까. 세한은 떼쓰듯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부볐다.
“웃지 마. 겉으론 멀쩡한 저 인간한테도 나랑 같은 아버지의 피가 흐른다고. 예감이 안 좋아.”
‘김세한이랑 같은 타입이면….’
어째서일까, 재희의 머릿속에 그간 세한과의 연애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갈 때쯤이었다.
“난 권지우 맘에 안 들어. 쟤도 이재현 그림자 같아…. 그래서 말인데, 나 오기 전까지 둘이 무슨 얘기 했어?”
제 손을 빈틈없이 꽉 쥐어 오는 세한의 손을 내려다보면서, 그녀는 조만간 태영을 만나 당장 결혼하라는 말을 건네야겠다고 생각했다. 베프를 지켜야 했다.
***
세한은 거의 모든 시간을 재희의 방에서 보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재희와 같이 책을 읽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녀가 침대에 누워 스릴러 소설을 보고 있으면, 그도 재희의 몸 어딘가를 베고 누워 책을 읽었다. 그가 요즘 읽는 건 로맨스 소설이었다. 좋은 남자란 어떤 남자인지 알기 위해서라나.
“구재희.”
한창 그녀가 소설에 빠져 있을 때,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부터 그렇게 예뻤어?”
문제는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런 쓸데없는 말을 해 온다는 것이었다. 재희가 나지막한 한숨을 쉬며 다시 소설에 집중하자, 불만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여자 주인공이 너무 철벽인데, 어떻게 꼬셔.”
아무래도 재희가 아직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어지간히 스트레스인 모양이었다. 들으라고 하는 말임이 분명한 투정. 그게 조금 귀여워 재희의 입꼬리가 올라갔지만, 대꾸는 하지 않았다. 금방 포기하고 잘 줄 알았던 세한은 침대에 쌓아 놓은 책 중 다른 책을 펼치며 중얼댔다.
“내가 포기하나 봐. 이 중 하나에는 설레겠지 뭐.”
그의 열정이 돋보이는 말이었다. 자꾸 배운 그대로 써먹는 탓에 재희의 집중력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의 다음 대사를 기다리는 상황까지 와 버렸다.
“구 대리, 이번 실수 눈감아 줄 수 있어. 나랑 하룻밤 자면.”
이번에 오피스 물인 모양이었다. 게다가 분명 19금.
“내가 대리면 넌 뭔데.”
“회사 내 최연소 본부장.”
“이야, 개새낀데. 직급 이용해서 그런다고? 사내 성희롱으로 신고해야지.”
“치이.”
상황극을 안 받아 주자, 그가 또다시 불만 가득한 얼굴로 다른 책을 펼쳐 들었다. 정말 포기할 생각은 없는 모양인지 툴툴거리면서도 책장은 빠르게 넘어갔다.
재희는 한참 소설에 몰입하고 있는 그의 얼굴을 감상했다. 어디를 가나 눈에 띌 만큼 잘난 외모, 훤칠한 키, 재산. 이대로 로맨스 소설 속에 데려다 놔도 안 꿀릴 것 같은데 본부장이라니. 오히려 자신의 직급을 낮춘 상황극이었다.
곱씹을수록 귀여워 그의 머리에 손을 뻗었을 때였다.
“오늘 밤, 내 거처로 오거라.”
세한은 또 맘에 드는 대사를 발견한 건지 다시 입을 뗐다. 이번엔 꽤 본격적인 느낌으로 책도 내려 둔 채였다.
“또 뭔데.”
“어허, 무엄하도다.”
이번엔 사극인 모양이었다. 새삼 로맨스에도 여러 장르가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슬금슬금 제 위로 올라타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오늘 밤, 짐의 수청을 들라.”
“또 19금이야?”
“원래 로맨스의 끝은 에로 아니겠느냐.”
슬쩍 세한이 읽는 소설들의 표지를 살폈다. 모두 오른쪽 상단에 붉은 글씨로 ‘청소년 관람 불가’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의 능글능글한 목소리에 그녀가 눈썹을 까닥이며 불만을 표했다.
“왜 맨날 남자가 더 지위가 높아?”
“그럼 네가 여왕 해. 내가 노예 할게. 여왕 폐하, 오늘 밤 당신의 개가 되겠습니다.”
역할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듯 그가 줏대도 없이 낮은 자세를 취했다. 번뜩이는 눈동자엔 어느새 어렴풋이 욕망이 어려 있었다. 덮어 놓은 책의 의미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재희는 완전히 제 위에 올라탄 세한을 올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어느 개가 주인 위에 올라타.”
“발정 난 개새낀가 보지. 맹견 사육에 실패하면 물리는 거야, 자기야.”
그는 한 손으로 침대에 올려진 책들을 밀어내며 완전히 몸을 포개었다. 맞닿은 허벅지에서 어느새 부풀어 오른 그의 것이 느껴지고, 그녀의 목덜미에 닿은 입술에서도 뜨거운 숨이 뱉어졌다. 자신의 몸을 그대로 비비며 여기저기 뽀뽀를 퍼부은 그가 애원하듯 말했다.
“구재희, 사랑해.”
“…….”
“사랑한다고, 응?”
허락을 구하는 듯한 말에 재희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뜻이 정확히 전달되었는지 무언가를 참아 내듯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쉰 그가 데굴, 한 바퀴 몸을 굴려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등을 돌리고 몸을 한껏 웅크린 게 어딘가 삐진 듯한 반응이었다.
“뭐… 앞으로 우리 장르는 로맨스라고 했던 거, 벌써 다 잊었지?”
비꼬는 목소리에도 재희는 태연히 이불을 덮고 누우며 하품을 했다.
“난 로맨스라고 했지, 에로라고는 안 했거든.”
“나한텐 똑같아. 사랑하는 만큼 닿고 싶은 게 정상 아니야? 아직도 나만 애타지?”
이놈의 인생.
마치 인생 다 산 할아버지가 푸념하듯 덧붙인 말에 기가 차 웃음을 흘렸다.
“왜애애애. 왜 싫어? 내가 싫어?”
최근 들어 세한에게 안 좋은 습관이 생겼다. 머리가 좋고 눈치 빠른 이 녀석이 아무래도 그녀가 떼쓰고 버티는 것에 약하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잠자리에 들려고 이불을 덮고 누운 재희의 배를 베고 침대에 대각선으로 누워 어린아이 떼쓰듯 우는 소리를 내기 시작한 그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김세한, 너 계속 조를 거면 네 방 가.”
“맨날 왜 내가 보채야 해? 불공평해. 못됐어. 울 거야. 흐으으윽.”
장난감을 사 달라 조르는 아이처럼 침대에서 발버둥 치는 세한이 원하는 건 분명 잠자리였다. 그녀가 거절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제도 어제도, 시간이 날 때마다 하는 바람에 남은 성욕이 없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세한의 성욕은 재희의 것을 웃돈다.
“자기도 하면 좋잖아. 나만 좋은 거야?”
“아니. 좋긴 한테….”
“나만 사랑하는 거야? 난 아직도 짝사랑이야….”
대자로 누워 버티는 그를 보고 있자니 잠이 싹 가신 재희가 한숨을 내쉬었고, 그에 반응한 듯한 세한이 몸을 일으켜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까의 작전은 어디 갔는지, 어딘가 위압감을 풍기는 얼굴이었다.
“나랑 하자. 나, 너랑 하고 싶어.”
재희는 자신이 대답하기도 전에 잠옷 단추를 풀기 시작한 손을 잡아 냈다. 어차피 멈출 생각은 없어 보였고, 한 번뿐이라면 어려운 부탁도 아니었다.
“대신 내가 원하는 대로 하면….”
재희의 조건부 허락에 세한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렸다는 듯 그녀 위에 올라타 키스를 퍼붓고, 몸을 데우는 데 여념이 없던 그를 재희가 슬쩍 밀어냈다. 그리고 어제 세한이 방에 두고 간 넥타이로 수갑을 채우듯 그의 두 손을 묶었다. 재희가 어리둥절한 얼굴의 세한을 침대 헤드에 기대앉게 했다. 그제야 그녀가 하려는 게 뭔지 눈치챈 모양인지 나지막한 한숨이 들려왔다.
“나한테 가만히 있으라는 거지?”
“잘 아네, 허리 움직이면 그만둘 거야.”
“고문이라고, 이거.”
“안 할 거야?”
“…할 거야.”
불만스럽다는 듯 입을 툭 내민 것과 달리 긍정의 답을 뱉는 주둥아리가 귀여워 짧게 입을 맞추자, 세한은 또 알기 쉽게 입꼬리를 씰룩였다. 항상 세워져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운 그의 것이 이번에도 딱딱히 부풀어 있었고, 콘돔을 씌우는 재희의 손이 닿을 때마다 움찔거렸다. 세한이 저를 괴롭히는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은 반응이었다.
“기분 좋은가 봐?”
놀려 줄 생각으로 물은 말에 세한은 고개를 삐딱이 하고 눈을 게슴츠레 뜨며 미소 지었다.
“어. 좋아. 구재희 손이잖아.”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능글대는 세한 때문에 재희의 얼굴만 달아올랐다. 그녀는 손바닥으로 그의 눈을 가렸다. 그리고 남은 손으론 빠르게 자신의 밀부를 문질렀다.
“내가 해 주고 싶은데…. 좀 풀어 주지?”
눈을 가리고 있는데도 다 보인다는 듯한 말이었다.
“됐어. 내가 하면, 흐으… 후.”
“손이 싫으면 입으로라도. 응?”
세한의 붉은 혀가 유혹하듯 자신의 입술을 훑었다.
“아, 됐다니까. 이제 다 젖었어.”
“벌써?”
재희가 세한 위에 올라타 천천히 내려앉자, 빳빳이 서 있는 그의 것이 미끄러지듯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읏… 하아….”
배 안이 가득 찬다고밖에 설명 안 되는 압박감에 입술을 깨물었지만, 신음이 새어 나왔다.
쯧, 세한이 짧게 혀를 찼다. 무언가 불만이 느껴지는 반응이었지만, 재희는 무시한 채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접합부에서 나는 외설적인 소리와 그녀 입에서 새어 나오는 신음이 한데 뒤엉켜 고요한 방을 채웠다.
“흐으…! 으, 하아….”
“흐, 하…. 나 참. 언제부터 이런 취향이었어. 손도 묶고, 눈도 가리고. 소리만 들려주는 거야?”
세한은 묶인 손을 들어 눈을 가리고 있는 재희의 손을 밀어내듯 떼어 냈다. 지금까지 가리고 있던 탓일까, 마주친 눈에 평소보다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보지 마.”
불 끄고 시작했어야 했는데. 세한이 급하게 굴어 차마 생각하지 못했다. 적나라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녀의 허릿짓은 빨라지고 있었다. 재희의 엉덩이가 세한의 허벅지에 비벼질 때마다 안이 휘저어져 찔꺽거리는 소리가 났다.
재희를 관찰하듯 위에서 아래로 훑어 내린 세한이 낮게 욕을 읊조렸다.
“젠장. 이건 또 이거대로 고문이네.”
땀에 젖은 머리와 상기된 두 뺨, 꾹 깨문 입술. 얼굴만 봐도 미칠 것 같은데 예쁘게 흔들리는 가슴과 제 것을 품고 흔들리는 허리가 목을 타게 했다. 당장이라도 저 허리를 잡아 한 번에 끝까지 박아 넣고 그녀를 한계까지 몰아붙이고 싶었다.
“하흣, 흐….”
“구재희, 허리… 좀 더 움직여 봐.”
“흐으… 조용히 해. 읏… 하아, 흐, 내가 원, 으읏… 하는 대로 할, 거야.”
재희는 눈을 감은 채 하체에 쏠린 감각에 집중했다. 그런 재희를 말없이 구경하듯 바라보던 세한은 그녀의 허릿짓이 격해지자 나지막이 속삭였다.
“키스해 줘. 나 지금 죽을 거 같아.”
재희는 절정에 다다른 감각에 머리가 아찔했지만, 그의 말이 너무나 애절해서 무시할 수 없었다. 재희가 세한의 목에 두 팔을 두른 채 입을 맞추자, 부드럽게 밀려들어 온 혀가 그녀의 신음을 삼켜 냈다. 목마른 짐승이 샘을 찾듯 세한의 혀는 조급하게 재희를 옭아맸다.
마침내 그녀의 아래가 더 축축이 젖어 들고 둔부에 힘이 들어갔을 때, 세한은 입술을 떼어 낸 채 미소 지었다.
“가는 거 빠르네. 하기 싫다더니, 기분 좋았어?”
“흐으…! 으읏. 하아, 좋아.”
재희는 여운을 달래듯 몇 번 뭉근하게 허리를 흔들며 말했다. 그리고 곧 엉덩이를 들어 세한의 것을 빼내었다. 그녀의 액으로 젖은 그의 페니스는 여전히 꼿꼿하게 세워진 채 번들거리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아까보다 더 부풀어 있는 것 같았다.
하아-하아—
세한은 열병을 앓듯 거친 숨을 뱉어 내고 있었다. 조금 좁혀진 미간은 화를 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반쯤 풀린 눈으로 묶인 손을 내밀었다.
“이제 풀어 줘. 내 차례잖아.”
평소와 같은 말투이지만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떨려 오고 있었다.
“…싫어.”
“너만 기분 좋으면 안 되지. 네가 날 생체 딜도나, 말하는 성인용품으로 취급하는 게 아니라면. 나한테 이럴 순 없지.”
세한의 말에도 재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성욕과 체력이 확실하게 바닥나서였다. 눈썹을 까딱인 세한이 입으로 매듭을 풀어냈다. 두둑-천 끊어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거로 보아, 푼다기보다는 뜯는 것에 가까웠다.
“이런 데 힘쓰지 말라고…. 넥타이 아깝잖아.”
뜯어진 넥타이가 바닥으로 던져졌다. 자유로워진 손으로 재희의 어깨를 잡은 세한이 그대로 그녀를 밀어 넘어뜨리며 콧방귀를 뀌었다.
“아까우면 진작 풀어 줬어야지.”
“너… 이럴까 봐. 봐, 또 이 모양이잖아.”
“한 번만.”
세한은 재희의 입과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오늘은 정말 한 번만 할게.”
묵직하게 입구를 누르던 귀두가 다시 안으로 밀려들어 오고, 그녀는 체념한 채 질끈 눈을 감았다.
세한은 더운 숨을 내뱉었고, 기다렸다는 듯 허리를 느릿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세한이 밀려들어 올 때마다 재희의 몸은 반사적으로 도망치듯 미세하게 위쪽으로 움직였다. 그걸 눈치챈 세한이 그녀의 골반을 잡아 단번에 끌어 내리며 작게 웃었다.
“왜 자꾸 도망가.”
“나 이제 더는 못 가. 그러니까 빨리….”
재희는 세한이 절정에 다다를 때까지 버텨 볼 생각이었다. 그는 그저 그녀의 배를 매만지며 작게 웃었다.
“그래, 해 보면 알겠지.”
세한이 본격적으로 허릿짓을 시작하자 그녀의 몸이 위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벌어져 흔들거리는 다리와 발끝이 우스워 그의 허리에 감아 내자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포기했어?”
“응, 읏, 네 거 하… 너무 커.”
착각이 아니었다. 그의 것은 아까보다 훨씬 부풀어 있었다. 숨이 턱 막히는 압박감에 그녀의 눈이 또다시 질끈 감겼다.
“아직… 다 안 들어갔어. 다 넣어도 되지?”
“잠, 깐…! 읏…!”
세한이 하중을 실어 재희의 다리 사이로 내려앉았고, 아까와는 비교가 안 되는 큰 자극이 배 안쪽 가득 밀려들었다. 발버둥 치듯 요동치는 그녀의 몸을 자신의 무게로 짓누른 세한이 저를 밀어내는 손을 모아 머리 위로 잡아 올렸다.
“너어! 흐으…!”
재희가 눈물 고인 눈으로 세한을 쏘아보며 말했다. 그는 밑에서부터 올라온 만족감을 즐기다 그녀를 달래듯 귓바퀴를 핥아 냈다.
“왜. 너도, 하아… 아까 나 묶고 좋을 대로 했잖아.”
“그건… 읏.”
재희의 말이 다시 허릿짓을 시작한 세한에게 잡아먹혔다. 밀려드는 그의 것이 안쪽 깊은 곳을 긁어 내고 빠져나가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그녀의 입에선 의지와 상관없이 비명 비슷한 신음이 흘러나왔고, 허리가 이리저리 튕기었다.
“하으, 윽…! 아, 흑.”
“너, 후우. 깊게 넣는 거 좋아하잖아.”
“싫, 흐으응, 싫어.”
“무서워?”
세한은 본인보다 그녀의 몸을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말대로 재희는 밀려드는 쾌락에 이성이 잡아먹히는 게 두려웠다. 머리가 새하얘지질 때면 말 그대로 미쳐 버릴 것 같았으니까.
무거워진 눈이 시리고, 몽롱해진 시야 너머로 저를 잡아먹을 듯 으르렁대는 세한의 풀린 눈이 보였다. 허용 범위 이상의 쾌락에 손끝과 발끝까지 전기가 퍼져 나갔고,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어 애원하듯 말했다.
“싫, 어…! 이제, 읏, 그, 응, 만…! 아흣.”
울듯이 말하는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이 조금 다정하게 휘어졌다.
“알려 줬잖아, 재희야. ‘싫어’ 대신 해야 할 말.”
나긋한 목소리와 달리 허릿짓이 격해지고 있었다. 머릿속이 아득해진 그녀의 입에선 아직 낯선 표현이 뱉어졌다.
“좋아. 으흐, 거, 기…! 읏.”
세한은 뭐든 솔직하게 표현해 주길 원했다. 원하는 게 뭔지, 뭘 좋아하는지 말해야 알 수 있을 테니까. 그녀는 조금씩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었다.
“읏, 윽… 하아… 세, 흐읏…! 세, 한아… 키스, 윽, 해 줘….”
흔들리는 몸에 뇌까지 휘저어져 정신이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입에서 토해 내듯 뱉어진 말에 세한의 입꼬리가 또 한 번 포물선을 그렸다.
“아, 귀여워.”
나지막한 목소리를 흘린 그가 허리를 깊게 쳐올리고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안도, 그의 몸도 작은 진동을 만들었다. 기분 좋은 열기가 몸을 데우고 긴긴 여운에 한참이나 골반이 들썩였다. 그런 그녀의 몸을 달래듯 세한이 여기저기 입을 맞추었다. 쾌락에 푹 젖어 버린 몸이 무겁게 늘어지자, 그가 마지막으로 쇄골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사랑해.”
세한이 겹쳤던 몸을 떨어뜨린 순간, 재희가 그의 목에 팔을 둘러 끌어안았다.
“아직…! 아직 떨어지지 마.”
그러곤 가쁜 숨을 내쉬며 아직 가시지 않은 흥분과 여운을 느꼈다. 재희의 안쪽은 아직도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고 있었다. 재희의 이런 행동은 또 처음인지라 뻣뻣이 굳었던 세한은 천천히 숨을 고르다 이내 그녀 위로 늘어졌다.
“넣은 채로 자고 싶어. 그냥 너랑 평생 이러고 있고 싶어.”
세한이 한 차례 사정해 늘어진 자신의 성기를 더 안쪽으로 밀어 넣듯 하중을 실었다. 그는 항상 그녀가 예상한 것보다 그 이상을 바랐다. 하지만 그럴수록 재희의 마음은 안정되어 갔다. 어쩌면 그의 집착을 누구보다 바라고 있는 건 재희일지도 몰랐다.
숨조차 쉴 수 없게 더 밀어붙여 줬으면, 불안할 틈도 없게 떨어지지 않았으면, 늘 나를 갈망했으면.
지독한 사랑을 하고 있는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말마따나 빌어먹을 병에 걸려 버린 걸지도 모른다.
그날은 한참이나 서로를 안고,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였다.
***
세한은 매일같이 그녀를 자신의 무릎에 앉혀 놓고 밥을 먹었고, 독서 시간엔 옆에서 같이 책을 읽었고, 식후엔 같이 차를 마셨고, 잠도 한 침대에서 잤다. 이미 부부나 다름없었기에 재희는 그가 왜 그렇게 결혼에 집착하는지 의문스러웠다.
“그럼 너희 어머니랑 아버지는 그때 공연장에서 손님이랑 발레리나로 만난 거야?”
“응, 대충 듣기론.”
“뭐야. 너무 로맨틱한데.”
두 사람은 잠들기 전까지 계속 대화를 나누곤 했다. 감춰야 할 비밀이 사라지자 대화는 즐거웠고 또 끝없었다. 재희가 세한의 부모님 이야기에 눈을 빛내자, 그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뭐야. 나에 대해 다 아는 듯 굴더니, 모르는 게 산더미네.”
“뭐, 이야기의 시작이 그 사고부터니까. 너 어릴 때랑 주변 인물 서사는 잘 모르지.”
더군다나 10년도 더 된 이야기였다.
“잠시만. 사고부터면… 너, 내가 만난 여자들 안다는 것도 뻥이지?”
세한의 눈이 예리하게 가늘어졌다. 이래서 눈치 빠른 인간은 성가신 법이다.
세한의 복잡한 여자관계는 그렇게 중요한 설정이 아닌지라 자세히 쓴 적이 없었다. 그녀가 말없이 눈을 피하자 또다시 숨 섞인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 뭐야. 괜히 쫄았네.”
“알거든? 뭐… 가볍게 여자 갈아치우고….”
사실 대략 경험이 적지 않다는 것만 알 뿐, 자세히는 몰랐다. 세한은 재희를 흘끔대다 손깍지를 끼며 말했다.
“누구랑 다르게 내 첫사랑은 너야. 그 정도만 알아 둬.”
뼈가 담긴 말에 재희는 기가 찬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허. 첫사랑은 개뿔.”
“진짠데. 처음 사랑한 게 첫사랑 아니야? 게다가 그쪽으로 얘기가 커지면 너만 불리한데. 뭐 그놈… 아씨. 말 안 할래.”
어김없이 그 얼굴이 떠오른 듯 세한이 도리질 치며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왜 또. 없는 사람한테 질투해?”
“동창이면… 너 교복 입은 것도 다 봤겠네.”
예상치 못한 질투 포인트였다. 나이는 먹어 가는데 세한은 점점 어려지는 것 같았다. 이 또한 표현이 늘었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걸까.
세한의 시무룩한 얼굴에 헛웃음이 흘러나왔지만, 재희의 눈엔 그마저도 귀여워 보여 맞잡은 손을 끌어다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게 신호가 된 듯 자연스레 다가와 짧게 입을 맞춘 그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교복, 까짓거.”
그땐 그게 ‘그래. 교복, 까짓거 뭐가 중요하다고.’란 의미인 줄만 알았는데, ‘그래. 교복, 까짓거 입히면 되지.’라는 의미였단 것을 바로 다음 날 알 수 있었다.
곧 퇴근인가. 재희가 시계를 확인하며 같이 마실 차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다녀왔어.”
세한이 소리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와 인사를 건네었다. 그를 발견한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는 문 앞에 멈춰 서 팔을 벌렸고,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세한의 품에 안기었다. 따뜻한 온기를 담은 익숙한 향기가 그녀의 폐부를 채웠다.
세한의 품에 얼굴을 부비던 재희가 까치발을 들어 입술에 짧은 키스를 했다. 정해진 웰컴 인사인데도 늘 그의 얼굴엔 행복한 미소가 가득했다. 예쁘게 올라간 입꼬리에 그녀의 얼굴도 한껏 환해졌다.
“어서 와.”
“잘 있었어? 못 본 사이에 더 예뻐졌네.”
“응, 넌 못 본 사이에 너 능구렁이가 됐네.”
그가 일하는 여섯 시간 동안 못 본 것뿐이었다. 세한은 재희의 이마와 볼에 쪽쪽 입을 맞추고 들어가자는 듯 어깨를 밀었다.
“차 내리고 있었어? 냄새 좋다.”
“어. 너랑 마시려고. 그때 산 꽃차…. 근데, 그건 뭐야?”
재희가 세한의 손에 들린 쇼핑백을 바라보며 물었다.
“자. 네 거야.”
그는 곧바로 쇼핑백을 건네었고, 그녀는 영문도 모른 채 일단 받아 들었다.
“뭔데? 선물?”
“응. 선물인데, 널 위한 건 아니고 날 위한 선물.”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말이었다. 재희가 고개를 갸웃하며 쇼핑백을 열었을 땐, 체크무늬 치마가 보였다.
“이게 뭐야? 옷?”
“응,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 교복. 아직 연 교복점이 없어서 구하는 데 꽤 힘들었대, 테리가.”
세한은 아직도 테리에게 무리한 명령을 하곤 했다.
“테리한테 구해 달라고 했어?”
“음. 부탁 아니고 명령이었는데? 구해 달라고 안 하고 무조건 구해 오라고 했어.”
테리는 둘 사이를 가장 잘 안다는 이유로 여전히 세한에게 시달리고 있었다. 재희는 저와 세한의 사이, 특히 이런 민망한 부분까지 알고 있을 그를 생각하면 얼굴 보기가 미안할 지경이었다.
“야, 오해라도 하면 어쩌려고.”
“무슨 오해?”
세한이 눈을 깜박이며 되물었다.
“…….”
재희가 별생각 없어 보이는 그를 마주 보다 아차, 하고 조용히 고개를 떨구었다.
“혹시… 야한 생각 했어?”
세한은 둘뿐임에도 목소리를 줄이며 물었다. 솔직히 했다. 하필 어제도 로맨스 소설을 본 그가 각종 상황극을 하기도 했고, 그 이유가 아니라면 저에게 교복을 내밀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세한은 눈을 유독 순진무구하게 끔벅이며 자신의 입을 가렸다.
“나는 순. 수. 하게 입혀 볼 생각만 한 건데. 넌 다른 생각 하고 있었구나. 언제는 상황극 작위적이고 부끄러워서 싫다더니.”
말렸다. 재희는 헛기침을 하며 교복을 꺼내 들었다.
크림색 조끼와 갈색 계열의 체크 치마, 질 좋아 보이는 블라우스에 리본까지 한 세트인 듯했다.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예쁜 교복이었다. 역시 세한이 다녔던 사립 학교의 교복답게 디자인에 돈 쓴 티가 났다. 번지르르한 돈의 위력에 새삼 감탄할 때쯤이었다.
“입어 봐. 보고 싶어.”
“아… 이 나이에 교복은 좀.”
재희가 고개를 저으며 교복을 훑어 내리자, 세한이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
“내가 모르던 네 시간, 다 내 걸로 만들고 싶어. 선물해 주면 안 돼?”
부탁이라기엔 협박하는 듯한 말투였다. 그리고 그 협박조가 겨우 자신의 교복 입은 모습이 궁금해서 나온 것이라 생각하니 조금 우스웠다. 뭐, 옷을 입는 것뿐이라면 못할 것도 없었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어김없이 이를 보이며 환히 웃었다. 뭐가 그리 좋을까. 세한은 요즘 들어 웃음이 헤펐다.
“어?”
다 꺼냈다고 생각했던 쇼핑백이 아직도 묵직했다.
“뭐야?”
재희의 손에 아까보다 훨씬 큰 사이즈의 셔츠와 베이지색 바지가 끌려 나왔다. 세한은 아, 하고 외마디를 던지며 재희가 꺼내 놓은 쿠키를 베어 물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 교복 구해 달랬더니, 내 것까지 가져왔나 보네.”
순간, 재희의 눈이 빛났다. 연인의 과거 모습이 궁금한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세한아, 너도 입어 보면 안 돼?”
“…나?”
재희는 답지 않게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 휘말려 얼떨결에 교복을 받아 든 그는 미묘한 표정이었지만 곧 군말 없이 단추를 풀었다.
그리고 잠시 후, 둘은 같은 학교의 교복을 걸친 채 서로를 마주했다.
재희는 저도 모르게 입가를 가리고 세한을 위아래로 훑었다.
세한은 셔츠를 주로 입었기에 평소 차림과 별반 다를 것 없으면서도 조금 다른 느낌을 풍겼다. 옅은 베이지 톤의 바지와 셔츠 깃에 새겨진 체크무늬 때문이었다. 셔츠 안으로 야무지게 받쳐 입은 흰 티까지 제대로 앳된 느낌이었다.
대충 걸친 셔츠, 발목 아래로 보이는 흰 양말, 은은한 색채의 교복과 어울리는 옅은 색감의 김세한. 딱 가슴 한쪽이 잔잔히 울릴 만큼의 설렘에 새삼 그가 학창 시절의 로망을 자극하던 주인공이었음을 자각했다. 그녀가 그를 찬찬히 뜯어보며 조용히 만족감을 느낄 때쯤, 세한이 재희에게 다가와 조심스레 목 부근 리본을 매만졌다.
“묘하다, 정말.”
그 말대로 세한은 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재희는 자신의 치맛자락을 매만지며 되물었다.
“왜? 안 어울려?”
한동안 말없이 그녀의 머리카락 끝을 돌돌 말아 올리던 그가 손가락을 들어 봉긋한 가슴을 꾹 찌르며 대답했다.
“널 학창 시절에 봤어도 반했을 거 같아서 묘해. 내가 네 외모에 반했던가.”
다정한 눈은 여느 드라마 주인공처럼 아련한 느낌이었지만, 어느새 가슴을 주물럭거리고 있는 손은 그렇지 못했다.
“뭐지, 무슨 기분인지 모르겠는데. 뭔가 딱 한입 베어 물고 싶네.”
“아까는 이런 의도 없었다며.”
“아니야, 그런 의도 아니고, 그냥 귀여워서. 말랑말랑. 여기도 말랑말랑.”
세한이 재희의 볼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느슨하면서도 매서운 긴 눈매가 훅 아래로 휘어지자 일순 소년 같은 얼굴이 되었다. 새삼 잘생긴 얼굴과 평소 하지 않던 스킨십에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할 때쯤.
“여기도.”
엉덩이를 움켜쥔 손길에 재희는 평정을 되찾았다. 물 흐르듯 치마 속을 파고드는 손을 단호하게 내친 그녀가 그에게서 두어 걸음 물러나며 얼굴을 굳혔다.
“떨어져서 보기만 해. 나 오늘 생리 시작했어.”
“아…. 아… 아….”
허망하게 벌어진 세한의 입에서 한탄을 담은 외마디가 연속으로 쏟아졌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반응. 눈에 보일 만큼이나 내려간 어깨에 재희는 팔짱을 끼고 짝다리를 짚었다.
“이거 봐. 그럴 생각 없다며. 너야말로 야한 생각 했지?”
“정말…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또 막상 보니까….”
세한은 재희가 벌려 놓은 거리를 단번에 좁혔다. 그녀의 시야 가득 그의 넓은 가슴팍이 들어찼다.
“야, 오지 말라고….”
밀어내려 허공을 가른 손이 쉽게 잡히었고, 곧 손깍지를 낀 채 밑으로 늘어졌다.
“응, 알겠어. 건전하게 놀자, 오늘은.”
“건전하게…?”
재희가 되묻기 무섭게 다시 둔부를 주무르는 손길이 느껴졌다.
“아까 못 만진 거까지만 만지고.”
“왜 분위기가 이런 식으로 흘러?”
“이 방에 사랑하는 사람끼리 있으니까.”
일리 있는 말이었다. 사랑은 성욕을 동반하니까. 능글능글한 태도는 여전한데 교복 하나 입혀놓았다고 섹시하기보단 귀엽게 느껴졌다. 재희는 습관처럼 저를 조물조물하는 손을 탁탁 쳐내며 한걸음 물러났다.
“건전하게 놀자며.”
“건전하잖아. 왜 자꾸 도망가.”
세한은 그녀가 물러선 만큼 다가가며 입술을 삐쭉였다. 재희는 저에게 뻗어지는 손을 마주 잡으며 아이 달래 듯한 말투로 말했다.
“오늘은 15세 관람가 수위로 맞춰. 우리 교복도 입었잖아.”
“15세는 애인 엉덩이도 못 두드려?”
“두드리는 게 아니라 주물렀잖아.”
“그거나 그거나. 난 15세 관람가는 취급 안 해.”
얼굴엔 불만이 한가득했지만, 그의 손은 겨우 그녀의 리본 끝자락을 만지고 있었다. 티는 안내지만 눈치를 보고 있는 게 뻔했다. 재희는 세한의 손등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었다.
“이런 거.”
“……”
그녀가 까치발을 들어 그의 입에도 입술 도장을 찍었다. 그리곤 배시시 웃으며 마주 잡은 손을 흔들었다.
“이런 스킵십은 싫어?”
한동안 멍하니 재희를 내려다보던 세한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자리 잡았다. 언제가 그녀에게 반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이미 한번 경험했던 일인데 지겹지도 않은지 감당이 안될 만큼 심장이 뛰고, 눈두덩이 뜨거워지다 못해 눈물이 날 거 같았다.
“어어, 오지 마.”
세한이 거리를 좁히자 재희가 장난스레 웃으며 물러났다.
“도망가지 마.”
세한은 손쉽게 그녀를 잡아 품에 안으며 말했다. 뜨거운 손이 머리칼 사이를 파고들어 뒤통수를 쥐었다.
“좋아해. 정말.”
“……”
“사랑해.”
언어의 한계를 이렇게 느끼게 될 줄이야. 좋다는 말도 사랑한다는 말도 지금 감정을 표현하기엔 한없이 모자랐다. 이렇게 매번 닿고 싶은 건, 부족하게나마 이 넘쳐흐르는 욕심을 그녀가 알아주길 바라서 일지도 몰랐다.
세한이 더 힘주어 안았고, 재희는 말없이 그의 등을 감쌌다. 팔이 모자랄 정도로 큰 덩치를 가진 남자가 이럴 때면 저보다 작게 느껴졌다. 제가 다 품을 수 있다고 자신할 만큼.
“나도.”
예전과 달라진 게 없는 말들은 한층 더 묵직해져 가슴을 울렸다. 언제가 진심이 되길 바랐던 그녀의 답이 세한의 불안을 녹였다. 피식, 동시에 터진 웃음과 함께 포개진 두 인영이 양옆으로 뒤뚱뒤뚱 흔들렸다.
“뭐, 가끔은 15세도 좋네.”
“다행이네. 마음에 든다니.”
“가끔이니까.”
‘가끔’이란 단어를 유독 힘주어 말하는 세한에 재희가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며 엉덩이를 팡팡 두드렸다.
“어, 넌 막 만지네.”
“때린 거야.”
“어, 막 때리네, 변태.”
또 무슨 상황극인지 모르겠지만, 제법 새침하게 제 가슴을 감싸는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은 냉담했다. 이제껏 각종 남자 주인공을 연기하던 세한이 이제 여주 자리까지 넘보는 모양이었다.
“너 자꾸 이상한 상황극 하면 책 다 태워버린다?”
“그게 협박이야? 책 다 태우고 너랑 이러고 놀 수 있으면 얼마든지.”
세한이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돈이 많으면 책이 소중하지 않을 걸까. 아끼는 책에는 커버까지 꼭꼭 씌어놓는 재희가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삐뚤어졌다.
“나한테 손가락도 못 대게 할 거야.”
그녀가 꺼내든 카드가 정확히 세한에게 먹혀든 건지, 어깨가 힘없이 늘어졌다.
“못 됐어.”
쉽게 백기를 꺼내든 세한이 그녀를 놓아주고 소파에 주저앉았다. 재희는 뽀로통한 얼굴을 내려다보다 부드러운 머리를 한번 헝클어뜨리고 포트 앞에 섰다.
“나 차 준비하던 중이었는데 마실래? 아니다, 우리 코코아 마시자.”
재희가 내리려던 차대신 코코아 분말을 들었고, 곧 잔 두 잔을 들고 세한의 옆자리에 앉았다. 세한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코코아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웬 코코아. 학생이라는 컨셉 계속하는 거야? 상황극 싫다더니.”
“삐졌어?”
“응.”
“넌 이미 주인공이니까, 남 흉내 안 내도 돼. 내가 좋아하는 건 너라니까.”
덤덤하게 말하는 재희를 훔쳐보던 세한이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누르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근데 왜 청혼은 안 받아줘? 말로만 좋아하면 다야?”
재희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코코아를 들이켰다.
“나 학창 시절에 초코우유 끼고 살았거든.”
말을 돌리는 게 뻔했지만, 세한은 어느새 귀를 기울였다. 그녀에 관련된 이야기가 그에겐 가장 의미 있는 것이니까.
“그래서 너랑 마시면 의미 있겠다 싶어서. 왠지 어릴 때 기억이랑 겹쳐질 거 같기도 하고. 네가 그랬잖아. 덧씌우고 싶다고.”
“말 돌리네, 그래도… 그럴 듯해서 합격.”
세한은 그녀를 따라 코코아를 한 모금 마셨다. 예상만큼이나 달아 눈이 질끈 감겼다. 그걸 눈치챈 재희가 엉덩이를 들었다.
“아 단 거 싫어하지? 딴 거….”
세한이 황급히 재희의 손목을 당겨 앉히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코코아가 좋아.”
“…누가 봐도 안 좋아하는 얼굴이야.”
“코코아가 아니면 싫어.”
같이 마시고 싶어 한 이유를 들어버린 이상, 단순한 코코아 아니었다. 코코아가 아니라 사약이라도 들이켜야만 했다. 잔을 내려다보는 눈이 몬스터를 앞에 두었을 때 보다 날카로웠다.
이유가 뭐든 그의 고집을 잘 알고 있는 재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삼켰다.
“알았어.”
의도치는 않았지만, 저 때문에 애쓰는 모습은 무의식중에 발끝이 까딱일 정도로 귀여웠다. 교복 탓에 더 그런 것 같았다.
“넌 학교 다닐 때 어떤 학생이었어?”
재희의 물음에 코코아에 머물러 있던 시선이 허공을 한번 비행했다. 잠시 과거를 떠올린 탓이었다.
“잘생기고 인기 많은 재벌 3세?”
“양아치에, 바람둥이에, 변태였네.”
“우리 방금 대화한 거 맞아?”
새하얀 세한의 얼굴이 그녀에게로 기울어졌다. 교복 탓인지 한없이 청초한 모습이었다. 평소처럼 두어 개 풀어진 단추가 불량스러우면서도 어딘가 관능적이게 느껴졌다. 팽팽히 당겨진 어깨 부근, 교복과는 안 어울리는 진한 향수 냄새, 이미 너무 많은 걸 알아 버린 순수하지 못한 눈까지. 어디 하나 모순적이지 않은 게 없었고, 그 때문에 자극적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재희는 그의 셔츠를 당겨 목덜미 부근을 쓸어내렸다. 그녀의 손길이 닿자 순간 놀란 듯 몸을 움찔거린 그가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물었다.
“이거… 뭐야?”
“그냥. 좀 만져 보고 싶어서.”
“자기는 못 만지게 하면서. 15세니 뭐니 하면서….”
점점 가까워지는 재희의 얼굴에 새한이 말끝을 늘어뜨렸고, 곧 입술이 포개어졌다. 재희가 세한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머금었다. 같은 걸 마셨는데 입 안 가득 단맛이 감도는 건 착각일까.
“키스까지는 괜찮을걸?”
재희가 나지막하게 말하자, 입꼬리를 올린 세한이 천천히 다시 입을 맞추었다. 평소라면 급하게 안을 파고들었을 혀가 그녀를 약 올리듯 입술만 훑고 떨어졌다.
“너, 엄청 달다.”
“너도… 달아.”
“근데, 그래서 안 돼. 이 이상해서 멈출 자신이 없어.”
세한이 중얼거리듯 말했고, 재희는 왠지 모를 아쉬움에 제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곧바로 그녀의 갈증을 읽어내고, 축축이 젖은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짓눌렀다.
“거봐. 자기야. 로맨스는 19금이어야 해.”
아까만 해도 코웃음 쳤던 그의 말에 설득력이 생긴 순간이었다.
“너 학생 때 얘기해 줘.”
쪽, 담백하게 입을 맞춘 세한이 마치 동화책을 잃어달라는 듯 말했다. 재희는 아쉬움을 애써 감추고 다시 잔을 들었다.
“나 그냥 평범했어. 공부도 적당하고, 존재감 없고, 눈에 잘 안 띄고.”
근데 왜 이재현 눈엔 띄었어. 잘 숨어있었어야지.
말을 삼킨 세한이 한창 추억에 젖은 듯한 재희를 훔쳐보았다. 별안간 웃음을 띠는데, 그게 재현과 관련된 기억일까 덜컥 겁이 났다. 그때였다. 재희가 세한을 보며 어린아이같이 해맑게 웃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던 시간이 점심시간이었는데, 왜인지 알아?”
“…왜?”
“널 상상할 수 있어서.”
재희는 한껏 상기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니까, 내 학창 시절 절반 이상이 너였어. 덧씌우지 않아도 이미….”
혼자 올려다보았던 하늘, 거기엔 늘 세한이 있었다. 오직 제 추억 속에. 그는 그녀의 로망이었으니까. 문득, 꿈에 그리던 그에게 인사를 건네고 싶어졌다.
“보고 싶었어. 세한아.”
재희의 목소리가 귀가 아닌 몸 전체를 울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매번 상상 이상으로 그를 고조시켰다. 방금까지 질투할 뻔했던 저를 비웃기라도 하듯.
세한은 재희의 손을 잡으며 입을 뗐다.
“내 학창 시절은 늘 지루했어.”
며칠 내내 로맨스 소설을 읽으면서 심심치 않게 본 표현이 있었다. 운명. 사랑에 빠진 남녀가 우린 만날 운명이었다고 서술하는 부분. 다 듣기 좋게 포장할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우습게도 지금은 누구보다 믿고 싶어졌다.
이 사랑은 어쩌면 더 오래전부터 시작됐던 건 아닐까. 우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서로를 그리워했던 게 아닐까 하고.
그녀가 저를 떠올리던 시각, 그도 어쩌면 언젠가 만날 그녀를….
“기다렸어. 재희야.”
어느새 세한의 얼굴도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의 입술이 포개어졌다. 벅차도록 뛰어오는 심장 박동이 머리를 울렸다.
***
“짠, 선물.”
여느 때와 같이 퇴근을 반기던 재희 앞으로 세한이 무언가를 내밀며 발랄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는 여전히 어딘가 나갔다 올 때면 바리바리 선물을 사 오곤 했다. 이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어… 이거. 아직 한국어로 정식 번역 안 된 건데.”
나눈 대화가 쌓여 서로를 더 깊이 알게 된 덕에 세한이 주는 선물이 재희의 취향에 꼭 맞는다는 것이었다. 재밌게 읽었던 독일 작가의 추리 소설 세 권. 아직 우리나라엔 번역본이 없는 책이었다.
“맘에 들어? 제일 유명한 번역가한테 맡겼는데.”
“응! 너무너무, 너어어어무 고마워!”
워낙 매니악한 작품이라 번역이 될지도 확실치 않았고, 된다 해도 한참을 기다려야 볼 수 있을 줄만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볼 수 있다니. 재희가 방방 뛰며 즐거움 표하자 세한이 자연스레 거리를 좁히고 입술을 내밀어 왔다. 그녀는 곧바로 까치발을 들어 입술을 포개었다. 쪽, 경쾌한 소리가 나며 떨어진 입술에 세한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그렇게 좋아?”
“응!”
“아. 진작 이런 선물 해야 했는데.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그녀는 반질반질 광이 도는 표지를 매만지며, 곧 읽을 생각에 두근대는 가슴을 짚었다.
“이거, 완전 궁금한 데서 끝나서 엄청 아쉬웠단 말이야. 이번 편에 범인이 꼭….”
재희가 한껏 올라간 입꼬리로 흥분한 이유와 이 선물의 특별함에 대해 종알댔다. 세한은 듣고 있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재희의 허리를 감쌌다. 그녀의 착각이 아니라면 그의 손길과 눈빛이 은근했다. 밀착한 몸. 세한에게선 특유의 씁쓰름한 향기 대신 비누 향이 나고 있었다.
“응, 더 말해 봐.”
“어…? 아무튼, 엄청… 고맙다고.”
“그래? 엄청 고맙구나. 근데 자기야, 기브 앤 테이크라고 혹시 아나?”
축축하다고 느낄 만큼 무거운 목소리가 묘했다. 재희의 허리를 더 바짝 당긴 세한 때문에 서로의 하체가 붙어 그녀의 아랫배 부근에 묵직한 그의 앞섶이 닿았다. 익숙한 패턴이었다.
“나, 이거 선물한다고 좀 고생했다? 이 시국에 제일 좋은 번역가 찾는 것도 그랬고, 최대한 다음 권처럼 주려고 표지 디자인한 것도 그렇고. 어때? 엄청 고맙지.”
그답지 않은 생색이었다. 그리고 세한이 이럴 때면 늘 원하는 것이 있었다.
감상이라도 하듯 재희의 얼굴을 천천히 훑어 내린 세한이 그녀의 손에 들린 책을 뺏어 옆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끝났지?”
아주 짧은 물음이었지만, 닿아 있는 몸에서 뿜어지는 열기와 욕망을 담은 눈동자에 그가 무엇을 묻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월경, 사실 이틀 전에 끝났지만 말해 주지 않았다. 그간 얌전히 제 배에 얼굴을 묻고 한숨만 쉬던 밤들이 머리에 스쳤다. 재희는 테이블에 놓인 책을 내려다보며 되물었다.
“이러려고 저거 선물한 거야?”
“응, 너 거절 못 하게 하려고.”
뻔뻔하게 느껴질 정도로 솔직한 대답에 그녀가 입을 벙긋거리며 인상을 구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금 부근에 팔을 끼워 넣어 그대로 재희를 안아 든 세한이 콧노래를 부르며 침대로 향했다. 그녀를 조심스레 침대에 눕히고, 조금의 틈도 없이 몸을 겹친 그가 입술을 포개 왔다. 마치 아직 살아 있는 사냥감의 숨통을 끊는 것처럼, 조급함이 느껴지다 못해 어딘가 포악하게 느껴지는 키스였다.
진득하게 섞이던 축축한 살덩이가 빠져나가자 재희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세한 또한 숨이 거칠었다. 그러나 그녀와는 다른 이유일 게 분명했다. 그가 그녀의 목과 얼굴 부근에 입맞춤을 퍼부었다. 너무 흥분했다 싶을 정도로 뜨거운 숨결이 조금 예민해진 살갗에 스쳤다.
“구재희, 사랑해.”
“야, 읏, 잠깐…!”
마치 넣고 흔드는 것처럼 자신의 하체를 그녀의 허벅지에 비비던 그가 쇄골과 목을 핥아 올리며 말을 이었다.
“일주일째야. 기다리기 너무 힘들었어.”
“대체 뭐가… 윽…!”
세한이 원피스 아래로 드러난 재희의 허벅지를 매만지다 예고 없이 속옷 위를 꾹 눌렀고, 덕분에 ‘일주일이 뭐가 그리 오래라고.’라는 말이 삼켜졌다.
“하게 해 줘. 응? 너도 젖었잖아.”
아까부터 은근히 맞닿게 비비던 하체 탓이었다. 자존심에 부정하고 싶지만, 그녀 또한 세한이 뿜는 열기에 반응하고 있었다. 재희가 대답 없이 눈을 감자 그걸 긍정으로 받아들였는지, 속옷 안으로 파고들어 온 손이 곧바로 안을 휘저었다.
“이게 뭐야. 너 진짜….”
세한이 거보라는 듯 한쪽 입꼬리만 올려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찌걱찌걱-손가락이 안에서 원을 그릴 때마다 외설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제 몸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을 만큼이나 수치심이 밀려들었다. 그녀의 이성은 차분했지만, 몸은 착실하게 세한의 움직임에 반응하고 있던 모양이다.
아까까지만 해도 비 맞은 강아지처럼 끙끙대던 세한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난 네 몸이 너무 좋아. 어쩜 이렇게 솔직하고 귀여운지.”
“더 말하면 그만, 하읏… 흐. 한, 다.”
“이렇게 젖어서 그만할 순 있고?”
재희가 한껏 비아냥대는 세한을 쏘아보자 그는 알겠다는 듯 장난스레 고개를 끄덕이곤 계속해서 그녀의 안을 휘저으며 목덜미에 입술을 비볐다.
“네가 매일 배란기였으면 좋겠어. 넣어 달라고 보채는 거 진짜 야했는데.”
일주일 전의 잠자리를 떠올린 듯, 세한이 뜨거운 숨을 뱉으며 말했다. 생리 전, 한창 성욕이 왕성할 때. 재희가 잠자리에 적극적인 기간이었다.
“나만 맨날 발정기야. 이건 너무 불공평한 거 같아.”
“일주일이, 읏, 뭐가… 하아, 하윽…!”
“뭐라고 했어? 네 신음이 너무 커서 못 들었네.”
아래쪽 돌기를 꾹 누른 손길이 노골적이었다. 순간 아찔해진 눈앞에 재희가 반사적으로 몸을 버둥대자 그가 포박하듯 무게를 실어 몸을 짓눌렀다.
“맨날 이렇게 좋아하면서… 하기 싫대.”
“잠, 깐, 하윽….”
몰려드는 쾌락에 재희가 침대 시트를 움켜쥐며 고개를 젖혔다. 머리가 뜨거워서 뇌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계속해서 치밀어 오르는 충동이 성욕 때문임을 그녀도 자각하고 있었다.
누구보다 그녀가 불붙기 기다렸을 세한은 똑바로 눈을 맞춘 채 안을 휘젓던 손가락을 빼내었다. 밀려드는 아쉬움에 재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왜? 더 하고 싶어?”
세한은 놀리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이제 재희가 말할 차례였고, 그가 원하는 답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자존심은 좀 상하지만 이미 승기는 세한의 것이었다.
“넣어 줘. 네 거, 넣고 싶어.”
씩-시원하게 휘어지는 세한의 입매가 예쁘다고 생각할 때쯤, 그가 깊숙이 입을 맞춰 왔다.
힘이 들어간 혀가 조금 위험할 정도로 깊이 들어와 입천장을 쓸었고, 순간 온몸이 가려워졌다. 맞닿은 입술 새로 재희의 신음이 흐르자 자신의 하체를 그녀의 중심에 눌러 비비던 그의 움직임도 격해졌다.
“넌… 내가 세워 줄 기회를 안 주네.”
“네 애인이 아직 혈기 왕성해서. 고맙다고 해.”
속삭이는 듯한 대화에 작은 웃음소리가 섞였다. 세한이 재희의 원피스와 속옷을 능숙하게 벗겨 내고, 그녀의 귀와 목, 가슴에 차례로 입을 맞추며 자신의 허리띠를 풀었다.
재희의 몸은 한껏 달아올라 어서 빨리 그가 이 열기를 풀어 주길 바라고 있었다.
‘콘돔이 어디 있더라.’
그녀의 시선이 침대맡 협탁으로 향했을 때, 밀부에 묵직한 열기가 닿았다. 그는 어느새 바지를 내리고 자신의 성기만 꺼내 그녀의 음부에 비비고 있었다. 마치 넣으려다 미끄러진 듯 잠시 그녀의 배 위로 올라온 세한의 페니스는 이미 쿠퍼액을 뱉어 내고 있었다.
“아… 씨발. 너무 오래 참았나.”
세한이 작게 욕을 읊조리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재희는 자신의 배에 남은 그의 흔적을 보고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세한아… 콘돔.”
이상한 일이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녀보다 더 피임에 신경 쓰던 그였는데. 세한의 귀두가 쿠퍼액으로 젖어 번들거리고, 꼿꼿하게 선 검붉은 살 기둥엔 금방이라 터져 나올 듯한 핏줄이 서 있었다. 그녀의 불안함을 읽은 세한이 낮은 목소리로 달래듯 말했다.
“괜찮아.”
뭐가 괜찮다는 걸까, 아무런 의문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순간 그의 성기가 단번에 밑동까지 들어와 그녀의 안을 채웠다. 예상치 못한 삽입에 재희는 입을 벙긋대며 밀려들어 온 쾌감에 몸을 떨었다.
“세, 세한아, 잠깐, 읏…! 안 돼.”
재희가 버둥대며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평소와 다른 세한의 행동에 아주 조금 공포심이 밀려들었을 때였다. 여유롭게 그녀의 손등에 입 맞춘 그가 달아오른 숨을 뱉으며 입을 뗐다.
“걱정 마, 이제 피임 안 해도 돼. 나 수술했거든.”
“뭐…?”
“아. 진짜 너무 좋다. 진작 할걸. 이제 아무것도 우릴 못 갈라놔.”
앞뒤를 따져 물을 새도 없이 그가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을 쑤실 때마다 나는 마찰음이 오늘따라 적나라했다. 낯선 자극이 두려우면서도 그녀의 입에선 달뜬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가 고환까지 처박을 기세로 허릿짓을 하자 안쪽 고여 있던 무언가가 터지듯 뜨거운 쾌감이 퍼져 나갔다.
“하윽…!”
“어때, 너도, 윽, 좋지?”
세한은 재희의 몸을 잘 알고 있었다. 안쪽 깊은 곳만 찔러 댄 탓에 얼마 되지 않아 그녀에겐 절정이 찾아왔다. 머리가 아득해지고, 순간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으며, 골반이 경련하듯 움직였다. 한껏 수축했던 질이 푹 젖어 드는 느낌과 함께 이완됐을 때, 그가 옅은 웃음을 흘렸다.
“좋다는 대답을 몸으로 해 주네. 같이 가고 싶었는데, 넌 항상 너무 빨라.”
“네가… 하아… 너무 세게… 으흣…!”
다시 한번 쳐올린 허리에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둘의 잠자리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재희가 먼저 절정에 다다르고 나면 세한이 사정할 때까지 끔찍한 쾌락이 계속된다. 한 번의 절정으로 열기가 가시지 않은 내벽에 문질러지는 커다랗고 딱딱한 살덩어리. 감당할 수 없는 자극에서 도망가려는 듯 그녀의 골반이 위아래로 흔들렸지만, 그는 가는 허리를 두 손으로 단단히 고정하고 깊이 처박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그…만, 윽…! 빨리… 빨, 리…! 가 줘, 아흣…!”
눈앞이 가물가물해질 정도로 어지러워졌을 때, 재희 입에선 흐느낌에 가까운 부탁이 흘러나왔다. 세한은 자신의 몸에 애원하듯 닿아 있는 손에 손깍지를 끼고, 그녀 위로 몸을 포개었다.
“재희야… 이름 불러 줘.”
그는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애원하듯 말했다.
“세, 읏, 세한아.”
“더, 더 말해 봐.”
“하윽…! 김세한…!”
콱, 재희의 목에 이를 박아 넣은 세한이 거칠게 허릿짓 하기 시작했다. 뇌까지 퍼지는 고통과 척추를 타고 내리는 전류에 그녀의 고개가 좌우로 도리질을 반복했다. 제발 그만해 달라는 신호였다. 견디다 못한 그녀가 그를 밀어내기 위해 발버둥 쳤을 때였다.
“윽….”
세한의 입에서 외마디가 뱉어지고, 거칠게 움직이던 허리가 느릿하게 흔들렸다. 작게 움직이던 허리가 마침내 멈춰 서며 그가 절정에 다다랐음을 알렸다. 배 안쪽에 남은 열기, 예민한 내벽이 그가 움직이지 않음에도 아직 안에 있는 페니스를 어루만지듯 꿀렁거렸다.
“하아… 정말. 너무 좋다.”
그는 뜨거운 손으로 아직 자신의 것을 품은 그녀의 배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리고 다시 작게 허리를 흔들었다. 그러자 엉덩이 사이로 뜨뜻미지근한 것이 흘러내렸다.
“진짜… 안에다 한 거야?”
이 느낌, 분명 예전에도 느껴 본 적 있었다. 자꾸만 흘러내리는 게, 보이진 않아도 엄청난 양이었다. 그도 그걸 느꼈는지 그녀의 입술에 짧게 입맞춤하며 웃었다.
“일주일만이라서 그런지 양이 좀 많다.”
“야…!”
이런 상황이 그저 당황스러운 재희가 일단 그를 밀어내려 했다. 가볍게 그녀의 손을 저지하듯 내리누른 그가 자신의 얼굴을 뺨에 부비며 달래듯 말했다.
“이따 내가 다 씻겨 줄게. 응? 지금은 그냥 너랑 미친 듯이 하고 싶어.”
세한이 작게 허릿짓 할 때마다 맞닿은 허벅지 부근이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액에 끈적하게 젖어 질척였다. 그는 자신이 깨물었던 그녀의 목덜미를 살살 핥아 올리며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다 내 걸로 채우고 싶어. 너한테 내 냄새가 밸 때까지.”
“김세한, 넌 정말 이상해….”
“응, 이게 내 밑바닥이야. 욕심이 밑도 끝도 없이 나. 매 순간 널 갖고 싶어.”
재희는 손을 뻗어 세한의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마주한 그의 눈에선 갈증이 비쳤고, 내쉬는 숨에선 욕구가 느껴졌다.
“너랑 있으면… 나까지 이상해지는 것 같아.”
“…….”
재희가 고개를 살짝 들어 입술을 포개었다. 한없이 다정하게 느껴지는 입맞춤이었다.
“네 욕심이 끝없는 걸 알면서도 널 채워 주고 싶어. 나도 꽤 이상하지?”
그녀의 물음에 작게 미소 지은 세한은 대답 대신 깊게 입을 맞추었다. 배 안에서 그의 성기가 다시 부풀어 오르는 게 느껴질 때쯤, 다시 허릿짓이 시작됐다.
그 이후로는 기억이 잘 안 날 만큼이나 두 사람은 ‘미친 듯이’ 몸을 섞었다.
접합부에선 언제 뱉어졌는지 모를 그와 그녀의 체액이 뒤엉킨 채 밀려 나와 하반신을 엉망으로 적시었고, 체위를 바꾸어도 맞춘 눈은 떨어지지를 않았다. 철퍽철퍽, 외설적인 마찰음이 계속되고, 재희의 입에선 저 자신조차 뭐라고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뇌가 녹아내리는 듯했고, 눈앞이 점점 흐려졌다.
“읏, 으, 으흐응…!”
몇 번째 오르가슴인지 알 수 없었다. 크고 작은 절정이 지나가, 하반신은 도무지 제 것이 아닌 것 같이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허리는 기분 좋을 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쾌락에 함락된 이성이 제 역할을 못 해 발정 난 짐승만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젠 분명 한계였다.
세한은 제 위에서 허리를 흔드는 재희를 올려다보며 느긋하게 배를 쓸어내렸다.
“아, 또 혼자 갔어. 같이 가자니까. 좀 더… 더 움직여 봐.”
“그만, 흐윽…! 미친 새끼야… 흐으…읏, 그만해…. 며, 몇 번을…!”
아까의 애틋함은 깨진 지 오래였다. 몸이 힘들자 재희의 입에선 자연스레 욕이 새어 나왔다. 마음이 편해서인지, 딱히 절정에 다다르지 않더라도 세한의 성기는 계속 꿀렁이며 정액을 뱉어 내고 있었다. 그의 붉은 살 기둥과 그녀의 대음순엔 하얗고 끈적한 액체가 생크림처럼 묻어 있었다.
“음, 글쎄. 콘돔이 없으니까 못 세겠네.”
세한은 추삽질을 할 때마다 조금씩 밀려 나오는 자신의 것을 매만지며, 천연덕스레 답했다. 그리고 얌전히 있기로 했던 약속을 깨고 자신의 골반을 쳐올렸다.
“으응…! 읏, 싫어. 이제, 으흣, 못 해…!”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아.”
퍽퍽, 엇박자로 쳐올린 탓에 세한의 페니스가 예상보다 깊은 안쪽을 찔러 왔다. 또 한 번 쾌락이 머리에서 발끝까지 퍼지자, 그녀의 입에선 자지러지는 비명이 흘러나왔다.
세한의 복근에 힘이 들어가고, 그를 품은 음순 새로 또 끈적한 액체가 질질 새어 나왔다. 그가 움직임을 멈추자, 재희가 쓰러지듯 세한의 어깨에 이마를 박았다. 눈앞이 하얀 것인지 검은 것인지도 구분이 안 될 만큼 오감이 엉망이었다.
“하아… 재희야, 너 정말 미친 거 같아.”
“흐으… 읏.”
미친 것 같기도 했다. 작은 쾌락이 여진처럼 아직도 그녀의 몸을 떨리게 만들고 있었다. 세한은 그 작은 움직임을 느끼며 재희의 척추를 쓸었다.
“네 안, 기분 좋아.”
재희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추자, 세한이 늘어진 그녀를 억지로 바로 세웠다. 두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잡아 올리자 코르크 마개 뽑히듯 내내 안을 채웠던 그의 것이 빠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회음부 사이로 하얀 액체가 줄줄 새어 나와 그의 허벅지에 떨어졌다.
“와… 이거 너무 야한데.”
세한이 감탄하듯 말했지만, 재희에게 대꾸할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속도 겉도 그의 것으로 엉망이었다.
“으… 며, 몇 시야.”
그 한마디를 묻는데도 발음이 다 뭉개졌다. 세한은 뭐가 그리 웃긴지 킥킥대며 웃음을 삼켰고, 그 작은 진동에 또다시 살갗이 마찰했다. 날 선 감각은 그마저도 자극으로 받아들였고, 그녀의 입에선 또 한 번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잠시 탁상 위의 시계를 확인하듯 고개를 돌린 그가 그녀의 허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세 시. 이제 씻어야지?”
“으, 읏. 너어… 허리 만지지 마.”
성감대를 자극하는 손길이 열 받도록 집요했다. 화를 내듯 말하자 순순히 떨어진 손이 엉덩이를 움켜쥐고 힘을 가했다. 그 때문에 조금 벌어진 음순 사이로 공기가 닿아 안쪽의 열이 식는 게 느껴졌다.
“예뻐 죽겠어, 구재희.”
“그만 만져. 하아… 나 너무 힘들어.”
“알겠어. 가자. 내가 씻겨 줄게.”
땀벅범에 정액 범벅이라 씻고 싶은 욕구가 간절했지만, 늘어진 몸에는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세한은 그런 그녀를 눈치챈 듯 단번에 자신에게 들러붙은 몸을 떼어 내 일으켜 세우고, 다시 안아 들었다.
“너는… 너무 적당히가 없어.”
저를 안아 들고 욕실로 향하는 그의 가슴께에 얼굴을 묻은 그녀가 웅얼댔다. 시름시름 앓으며 말하는 재희는 환자가 따로 없었다.
“내가 이래서 하기 싫은 거라고. 알아?”
“오늘은 오랜만이니까. 게다가, 콘돔 없이 하는 거 너무 좋아서. 너도 평소보다 야했고.”
욕실에 도착하자 커다란 거울에 제 음부가 비쳤다. 언뜻 희미하게 보이는 백색 액체가 자신의 안을 채웠던 게 정액임을 실감케 했다.
“다리에 힘줘. 나한테 기대서 서 있기만 해.”
그가 조심스레 그녀를 내려놓으며, 서 있을 수 있는지를 확인하듯 조금씩 받치고 있던 손을 빼내었다. 가뜩이나 좁은 샤워 부스 안에서 가까이 붙어 있자 몸에 또다시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재희는 그를 밀어내며 한숨에 가까운 목소리를 뱉었다.
“됐어. 내가 할게.”
샤워기를 들고 물 온도를 체크하던 그가 조심스레 그녀의 가슴에 물을 뿌리며 고개를 저었다.
“싫어. 내가 씻길래.”
‘싫어’라니. 그녀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지만, 설마 그렇게 했는데 또 일이 벌어질까 싶어 그대로 놔두었다. 아까부터 뻑뻑한 눈꺼풀이 몸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알려 왔다. 딱 따뜻한 정도의 미온수가 몸을 타고 흘러내리자 잠이 몰려들었다. 당장에라도 침대에 몸을 던지고 싶은데, 비누칠도 아직이었다.
“김세한… 이렇게 해서 언제….”
힘들어서 감고 있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땐, 힘이 들어간 듯 선명히 보이는 복근 밑으로 반쯤 서 있는 그의 것이 보였다.
“이거, 왜….”
“그대로 서 있어.”
재희를 벽 쪽으로 몰아세운 그가 그녀의 허벅지를 들어 올리고 다리 사이로 물을 뿌렸다. 한껏 예민해진 밑쪽을 두드리는 자극에 순간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을 뻔했지만, 허벅지를 단단히 지탱한 팔 덕분에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으읏…! 안 돼, 그렇게 하지 마.”
“아니야. 이렇게 하는 거 맞아.”
흩뿌려지는 물이 노골적으로 음핵을 노리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부릅뜨며 그를 올려다보았고,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마치 그녀의 반응을 관찰하는 듯한 눈이었다.
“기분 좋아?”
“…뭐?”
“어떡해. 너 오늘 너무 예뻐.”
말이 통하지 않는다. 불길한 감각이 들 때쯤, 세한의 손에 들렸던 샤워기가 바닥으로 떨어져 이리저리 물을 뿌려 댔지만,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진득하게 입을 맞춰 온 세한이 순식간에 재희의 아래쪽으로 손가락을 넣어 휘저었다. 안 그래도 습한 샤워 부스 안이 입술 새로 뱉어지는 숨과 닿은 몸에서 뿜어지는 열기로 순식간에 후끈해졌다. 숨 쉬기가 힘들어지자 눈앞이 아찔해졌다.
“읍, 응, 읏, 야! 너 뭐 하는, 으윽…!”
재희가 언성을 높였지만, 안을 휘젓는 손가락은 멈추지 않았다.
“씻겨 주는 거야. 네 안쪽 엄청 미끄럽다. 이거 정말 다 내 거야?”
“하, 지마…. 흐으… 나 정말 못 서 있겠어, 세한아.”
“곤란하네. 나는 씻겨 주려는 건데, 느끼고 있고.”
귓가에 입을 맞춘 그가 그녀의 몸을 지탱하듯 허리를 끌어안았다. 재희의 배 부근엔 어느새 꼿꼿이 세워진 그의 것이 닿았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그를 밀어내려 발버둥 쳤지만, 이미 힘이 빠진 탓에 그마저도 무리였다.
“나, 정말 못 해…. 세한아, 흐으… 이제 싫어. 힘들어.”
세한은 저에게 기대는 재희의 턱을 잡아 올렸다. 강제로 마주한 그의 반쯤 내리깔린 눈엔 또다시 욕망이 감돌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에 힘없는 그녀의 두 다리가 벌벌 떨렸다.
“재희야….”
나지막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물소리와 섞여 욕실을 울렸다.
“아까 그 책, 곧 4권 출간된다더라.”
“…뭐?”
의미를 알 수 없는 음흉한 미소를 지은 세한이 재희의 귓바퀴를 혀로 훑어 올리며 속삭였다.
“잘하면 내가 또 가져다줄 수 있는데.”
그녀를 너무 잘 파악한 그의 설탕 발린 말이었다.
재희의 의사는 이어진 키스에 집어삼켜졌다. 덜덜 떨리는 다리를 지탱하듯 그의 허벅지가 그녀의 허벅지 사이로 들어왔고, 힘이 빠지면 빠질수록 음부가 짓눌렸다.
“못 서 있겠으면 나한테 매달려.”
세한이 또다시 입을 맞추었고, 재희의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물이 흩뿌려지는 욕실의 바닥과 벽을 필사적으로 짚었던 장면만 머리에 스칠 뿐이었다.
***
세상이 안정화되고 나서야 깨달은 사실이 있다. 늘 세한에게서 벗어나 나갈 생각을 하던 그녀와 그런 재희를 가두던 그의 모습과는 대비되게 둘의 성향이 정 반대라는 것이었다. 재희는 집순이인 반면, 세한은 밖돌이였다.
“자기야, 날씨도 좋은데 나가서 데이트할까?”
어느 주말 낮 두 시, 눈을 뜨자마자 들은 말에 재희는 다시 자는 척을 했다. 아직 어젯밤의 여파로 욱신거리는 허리와 팔다리를 주무르는 손길에 다시 눈을 떠야 했지만.
“이거 봐, 맨날 집에만 있고, 운동 안 하니까 근육이 하나도 없잖아. 너 이러다 늙어서 고생한다?”
“으으….”
“책도 맨날 엎드려서 읽고. 이러니까 허리가 아프지.”
“허리 아픈 건 너 때문이거든?”
재희가 짜증스러운 말투로 앙칼지게 말했다. 세한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이불 안으로 다리를 겹쳐 왔다. 헐벗은 몸에 적나라하게 스치는 피부가 어젯밤의 기억을 불러와 미열이 도는 것만 같았다.
“알겠어. 그건 내 탓이라 칠게.”
“…뭘 웃어.”
“그냥. 좋아서.”
그녀에게 짧게 입을 맞춘 그가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 커튼 사이로 들어온 미약한 빛에 세한의 하얗고 근육 잡힌 석고상 같은 몸이 예술 작품처럼 빛나고 있었다. 가운을 대충 걸친 그가 커튼을 걷어 내자 햇살이 파도치듯 밀려들어 왔고, 재희는 급히 이불 안으로 대피했다.
“구재희, 오늘은 못 넘어가.”
허물없이 마주한 인간 김세한은 생각보다 잔소리쟁이였다. 그는 기어코 그녀가 잡아 올린 이불을 힘으로 걷어 내고 눈을 맞추었다.
“너 오래 끼고 살려면 내가 관리 좀 해야겠어. 챙겨 먹으라던 영양제 또 안 먹었지.”
“으으으…….”
“나랑 같이 운동해. 너 맨날 먼저 나가떨어지는 거, 다 체력 부족 때문이야.”
마지막 이야기는 잠자리에 관련된 말이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재희가 인상을 구기며 입을 열었다.
“양심 어디 있어. 그건 네가 너무 비정상적인 체력이랑 성욕을 가져서 그런 거고.”
“성욕은 너도 만만치 않은 거 같은데. 너 하는 족족 느끼잖아. 어제만 해도 몇 번을…….”
“아… 그건….”
재희가 말을 잇지 못하자 그녀의 엉덩이를 두어 번 두드린 그가 정말 엄마라도 된 것처럼 이불을 완전히 걷어 냈다. 마지못해 몸을 일으킨 그녀 앞으로 물을 가득 채운 컵이 내밀어졌다.
“하루에 여덟 잔.”
“…커피.”
“물. 카페인 줄여. 이따 밥 먹고 또 마실 거잖아.”
“아…. 김세한 짜증 나.”
그는 그녀가 잔을 다 비워 낼 때까지 감시하듯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재희가 눈치를 보며 물을 꿀꺽꿀꺽 넘기고 빈 컵을 건네자,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밥은 나가서 먹을까? 먹고 올라가자.”
세한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재희는 찌뿌둥한 몸을 풀기 위해 기지개를 켜며 물었다.
“어딜 올라가?”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