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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퍽, 하는 난폭한 소리에 이어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뭔가가 흐르는 기분에 손을 얼굴로 가져가자 손가락 끝에 선혈이 그대로 묻어났다.

가시를 모두 제거해 달라고 했는데 남은 것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뒤늦게 쓰라림을 느끼며 무심코 혀를 찰 뻔했다. 앞에 선 여자가 하이힐을 신은 몸을 꼿꼿이 펴고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장미가 싫으시다면 다른 꽃을…….”

“미친 새끼야,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욕설을 퍼부으며 펄펄 뛰는 그녀의 모습은 평소 ‘할리우드에서 가장 우아한 여배우’라는 칭송을 받는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최근 그녀가 찍었던 브랜드의 캠페인을 떠올려 봤지만 역시나 동일 인물이라는 실감은 들지 않았다. 내 얼굴을 때리고 바닥에 나동그라진 장미 다발을 마구 짓밟으며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끊임없이 늘어놓던 여배우가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이대로는 납득할 수 없어, 당장 키이스를 만나게 해 줘!”

“이미 말씀드렸지만 안 됩니다.”

나는 몸에 익은 사무적인 태도로 그녀를 가로막았다. 그녀가 다시 욕설을 퍼붓기 전에 나는 말을 이었다.

“앞으로 그분을 뵙고자 한다면 저나 변호사를 먼저 거쳐야 할 겁니다. 피트먼 씨는 최대한 조용히 관계를 정리하고자 하십니다. 호의를 받아들이시는 쪽이 배우로서의 커리어에도 도움이 될 테고…….”

“지금 날 협박하는 거야? 감히 네가?”

새파랗게 불꽃을 일으키며 득달같이 고함을 지르는 그녀에게 나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현실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피트먼 씨만이 아니라 본인에게도 득이 될 만한 선택을 하시는 게…….”

“웃기는 소리 하네, 내가 다른 년들처럼 고분고분 당할 줄 알아?”

나의 말을 가로막고 그녀가 고함을 질렀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 기자들 백 명은 불러 모을 수 있어. 거기서 전부 다 까발려 주겠다고. 키이스 나이트 피트먼이 얼마나 비열한 자식인지, 그 거지 같은 새끼가 어떻게 날 이용하고 버렸는지 다 말해 버릴 거야! 내가 못 할 줄 알아? 두고 보라고, 감히 날 뭘로 보고 이따위 수작질이야?”

흥분한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사무적으로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십시오. 피트먼 씨에게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순간 그녀가 멈칫했다. 내가 이렇게 말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나는 여전히 아무 감정 없이 기계처럼 말을 이었다.

“엘리사 씨의 뜻이 정 그러시다면 제가 더 이상 어떻게 하겠습니까? 피트먼 씨는 충분히 그간의 관계에 대한 호의를 표시했습니다만 엘리사 씨가 그걸로 만족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 또한 엘리사 씨의 선택인 거죠. 그렇다면 <빗속에서 너와>의 히로인 역할은 고사하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또 그간 사용하시던 말리부의 별장 또한 출입이 금지됩니다. 쓰시던 물품은 모두 포장해서 자택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제공하기로 한 컨트리클럽의 회원권과 J 호텔의 연간 이용권은 모두 없었던 일로…….”

“자, 잠깐만!”

당황한 그녀가 내 말을 가로막았다. 묵묵히 내려다보는 내게 엘리사는 창백한 얼굴로 더듬거렸다.

“그건 말도 안 돼. 주기로 한 거잖아? 그걸 다 없었던 걸로 한다고? 배역까지 전부? 기가 막혀서, 정말 더럽게 쪼잔하네!”

“깨끗이 관계를 정리하는 데에 대한 보상으로 드리는 것이죠. 다시 말씀드리는 거지만 이건 계약입니다. 조건에 맞지 않는다면 계약이 성립되지 않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쪽에선 제안을 했고, 엘리사 씨가 거절을 했으니 협상은 결렬된 셈이죠.”

“거절한 건 아냐! 난 그저, 키이스를 만나서 직접 얘기를 들으려고…….”

나는 냉정하게 지적했다.

“협상의 조건에 그 또한 포함이 된 겁니다. 피트먼 씨를 귀찮게 하지 말 것.”

처음으로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창백해진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나는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시다면 지금부터 3분 드리죠.”

그녀는 비명처럼 내질렀다.

“뭐라고? 고작 3분?”

“원래는 20분 정도 드릴 예정이었습니다만 17분을 이미 써 버리셨기 때문에.”

선뜻 말한 나는 보란 듯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아, 죄송합니다. 2분 10초가량 남았습니다. 그동안에 결정을 내려 주시길 바랍니다.”

무섭게 일그러지는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며 나는 들고 온 서류와 펜을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결정이 되시면 이 서류에 사인해 주시죠.”

그녀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마지막 30초를 남겨 놓았을 때, 그녀가 펜을 들었다. 마치 성가신 팬에게 억지로 사인을 해 주듯 신경질적으로 거칠게 이름을 휘갈겨 쓰는 것을 잠자코 기다렸던 나는 허리를 숙여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럼, 하고 인사를 하려 했을 때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미처 피할 틈도 없이 내 얼굴에 만년필을 집어 던졌다.

* * *

“세상에, 어떻게 된 거예요?”

나를 보자마자 엠마는 높은 소프라노로 소리쳤다. 그녀의 이런 격한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길게 설명을 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예정보다 15분이나 늦은 것이다. 나는 빠르게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회의 준비는 어떻게 됐습니까?”

그녀는 급히 내 뒤를 쫓아오며 대답했다.

“지시하신 대로 모두 끝냈어요. 임원진도 전부 참석하셨고…… 그보다 연우, 셔츠라도 갈아입는 게…….”

나는 망설임 없이 거절했다.

“됐습니다. 프린트는 모두 끝냈습니까? 여분으로 더 만들어 뒀겠죠?”

“아, 네.”

“좋습니다. 회의실에서 대기하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비서실을 나와 곧바로 사장실로 향했다. 미친 듯이 액셀을 밟아 왔지만 간신히 회의 직전에 도착한 게 고작이었다. 화장실에 들러 거울을 볼 시간조차 없었다. 차라리 그쪽이 나았다. 내 몰골이 어떤지 직접 확인하기라도 한다면 그대로 퇴근해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질 테니까.

만년필에 맞은 한쪽 눈이 자꾸만 욱신거리고 눈두덩이 묵직했다. 지금의 모습이 얼마나 엉망일지를 어렴풋이 떠올리며 나는 복도 끝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내 책상을 지나 곧바로 사장실 앞에 섰다.

똑똑.

짧은 심호흡 후 정확한 박자로 노크를 했다. 대답은 없었지만 나는 항상 그렇듯 잠깐의 사이를 두고 문을 열려고 했다.

그 순간 불시에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반사적으로 물러나자 마침 나오려던 남자가 멈칫했다.

“이런.”

그가 짧은 감탄사를 뱉었다. 그와 동시에 강렬한 극알파의 단내가 코끝으로 확 덤벼들었다.

이…… 같은……!

나도 모르게 욕설을 뱉을 뻔했다. 급하게 소매로 코를 막고 숨을 멈췄다. 하얗게 질려 간신히 숨을 억누르며 눈만 깜박이는 내 움직임을 그는 재미있다는 듯이 내려다보았다.

키이스 나이트 피트먼.

자신이 얼마나 불공평한지를 인간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만들어 낸 신의 결정판.

부친은 미국 금융계를 쥐고 흔드는 P 금융의 총재이고 그 또한 명망 높은 피트먼 가문의 후계자지만 현재는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덕분에 돈과 권력을 전부 다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데 거기다 이 남자는 전 세계적으로 0.1퍼센트도 되지 않는다는 극소수의 계층인 극알파였다. 말하자면 먹이 피라미드의 최상위층에서도 가장 상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까.

상대를 유혹하는 페로몬을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도 모자라 당연하게도 우월한 외모를 자랑하는 극알파답게 이 남자는 처음 본 순간 상대를 가리지 않고 넋을 빼앗아 버리기 일쑤였다.

덕분에 나는 비서로 취직한 이후 줄곧 이 남자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매번 불필요한 수고를 해야 했다. 파노라마처럼 지난 일들이 스쳐 가자 울컥 화가 치밀어 와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제 진정이 좀 됐어?”

간신히 숨을 가라앉힌 내게 그가 물었다. 문틀에 기대어 선 채 나를 내려다보는 얼굴은 그저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발견한 타인의 그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거기다 더해 키이스는 노골적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다시 얼굴로 시선을 고정했다.

“뭐야? 이 거지 같은 몰골은.”

입은 여전히 미소가 남았지만 빈정거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증거로 그의 시선에는 경멸하는 빛이 가득했다. 언제나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완벽주의자인 그는 타인이 흐트러지는 것 또한 용납하지 않았다. 물론 나도 이런 ‘거지 같은 몰골’로 돌아다니는 취미는 결코 없었다. 울컥 올라오는 화를 지그시 누른 채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엘리사 씨가 계약서에 서명을 했습니다.”

나는 딱딱한 말투로 보고를 시작했다.

“보상에 대한 처리는 이번 주 중으로 완료될 겁니다. 앞으로 피트먼 씨와의 관계에 대한 당부에 대해서도 납득했습니다. 사후 계약서는 법적인 절차를 거쳐 향후 있을지 모를 불필요한 분쟁을 차단하는…….”

“이봐.”

그는 짧은 한 마디로 내 말을 막아 버렸다.

“내가 그걸 일일이 다 알아야 하나?”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평소 무표정에 가까운 그의 얼굴에는 희미하게 짜증스러운 기색이 엿보였다. 그 증거로 아주 약하게 찌푸려진 미간을 확인한 나는 딱딱한 어조로 대답했다.

“아뇨.”

키이스가 다시 물었다.

“그럼, 내가 그걸 알고 싶어 한다고 생각해?”

나는 여전히 무뚝뚝하게 말했다.

“아뇨. 하지만 보고하는 것이 제 일이니까요.”

키이스는 이번에야말로 귀찮아하는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며 패널에서 몸을 뗐다.

“앞으론 그런 시시한 일 따위는 보고하지 마.”

지나간 상대가 어떻게 됐는지 따위 그에겐 눈앞의 먼지보다도 더 하찮을 정도로 관심 없는 일이었다. 익히 알고 있던 일이었음에도 나는 이럴 때면 그에게 환멸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단정한 얼굴에 지금 이토록 심장이 뛰는 내 자신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불쾌하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회의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한심하다는 듯이 키이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걸음을 옮기는 그를 따라 몸을 움직이는데, 갑자기 키이스가 흘긋 나를 돌아보았다.

“뭐야?”

“피트먼 씨를 쫓아가는 겁니다만.”

똑바로 올려다보며 되묻자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짧은 바람 소리를 냈다.

“그 꼴로? 지금 날 망신 주려고 작정했어?”

“제가 거지꼴인 게 왜 사장님을 망신 주는 게 되는 겁니까?”

아차. 뒤늦게 나는 그만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순간 멈칫하자 키이스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진심으로 몰라서 물을 만큼 멍청한 건 아니지?”

“……죄송합니다.”

나는 즉각 사과했다. 그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모으고 있었으나 곧 고개를 돌려 버렸다.

“어이.”

부르는 소리에 나와 키이스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멈칫한 키이스에게 가려져 상대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두 배로 강해진 단내에 나는 굳이 보지 않아도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유유상종이라더니 키이스는 친구도 딱 그런 부류였다. 엄청난 부호에 권력을 가진 화려한 외모의 극알파. 거기다 둘 다 폴로 선수였다. 다른 게 있다면 저쪽이 훨씬 가볍다는 걸까.

그레이슨 밀러는 매번 상대를 열렬히 사랑한다고 말하는 남자였다.

다만 그 사랑이 너무나 짧고 단호하게 끝나 버린다는 것이 문제일 뿐.

언젠가 그가 버린 여자가 자살극을 벌였을 때 그레이슨이 눈앞에서 웃어 버린 사건은 종종 구설수에 오르곤 했다. 섬뜩했던 사실은 그가 진심으로 너무나 유쾌하게 웃어 버렸다는 것이다. 이렇게 흥미진진한 쇼는 처음 본다는 듯이. 그리고 그레이슨은 절박한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맙소사, 그래 봤자 넌 나한테 먼지만큼의 가치도 없어. 하지만 날 1분이라도 즐겁게 해 주겠다면 좋아, 어서 뛰어내려. 그 정도 쓸모는 있겠지.>

그 말을 하고 그레이슨은 한참이나 웃어 댔다.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허리를 꺾어 가며.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에서 웃었던 건 그레이슨뿐이었다.

그것은 너무나 비참한 사랑의 종말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녀가 자살을 포기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그 뒤 꽤 오래 상담을 받았다는 뒷얘기가 있었다. 물론 그레이슨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또다시 새로운 사랑을 찾고, ‘역시 너도 아니었어’라며 하루 만에 말을 바꾸고, 또다시 새로운 사랑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그는 뻔뻔하게도 자신은 언제나 상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말하곤 했다. 저렇게나 차가운 눈을 하고서.

“이야, 연우잖아? 오랜만이야.”

요란하게 웃으며 말을 거는 남자의 얼굴을 나는 무미건조하게 올려다보았다.

“안녕하세요, 밀러 씨.”

“그레이슨이라고 부르라니까.”

아쉬운 듯 혀를 찼던 그가 손을 뻗었지만 나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키이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만둬, 이 녀석은 놀이 상대로는 적합하지 않으니까.”

“놀이라니, 난 항상 열렬히 사랑하는걸?”

“거절하겠습니다.”

단호히 말하자 두 남자가 동시에 나를 내려다보았다. 2미터에 육박하는 커다란 근육질 몸의 남자들을 둘이나 눈앞에 두고 있자니 위압감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나는 이 남자들에 비하면 어쩔 수 없이 왜소해지고 마는 몸을 힘껏 펴서 올려다보았다. 키이스는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다 피식 웃었다.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넌 정말 취향이 독특해.”

“내가?”

그레이슨이 진심으로 놀란 듯 그를 돌아보았다. 키이스는 노골적으로 나를 훑어보았다. 천천히, 가격을 매기기라도 하는 듯이. 그러더니 이내 그는 그레이슨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 녀석에게 작업을 거는 건 너뿐일 거야.”

사람을 앞에 두고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이 남자뿐일 것이다. 나는 순간적으로 표정을 관리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둘은 서로를 보며 쓸데없는 얘기를 나누느라 그런 나의 동요 따위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어째서? 아, 넌 남자인 오메가와는 자지 않지?”

그레이슨은 자문자답하며 웃었다.

“정말 웃기는 녀석이야. 오메가와 자지 않는 알파는 내 동생과 너밖에 보지 못했어. 어째서 오메가가 싫다는 거야?”

그 말에 키이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오메가건 뭐건 결국 남자잖아? 난 남자를 안는 취미는 없어.”

“그냥 남자와는 다르지, 오메가는. 너도 안아 보면 알게 될 텐데.”

그레이슨은 웃으며 키이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인생의 즐거움을 놓치는 거야, 키이스. 정말 안타깝네.”

“치워. 난 그런 즐거움 따위 필요 없어.”

그레이슨의 손을 뿌리친 키이스가 냉담하게 내뱉었다.

“무엇보다 다른 녀석의 페니스를 보는 것 따위 질색이야. 상상만 해도 짜증이 난다고. 그걸 보면서 발기하다니 네가 더 이상해.”

그레이슨이 갑자기 허리를 꺾으며 소리 내어 웃었다. 놀라울 정도로 유쾌한 웃음소리였다.

“이봐, 오메가와의 섹스는 그런 게 아냐. 아아, 네가 해 본다면 결코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을 텐데. 남자라고 해도 오메가라면 다르다고, 어째서 남자인 오메가와 자느냐면 말이지…….”

거기까지 말했던 그레이슨이 갑자기 나를 쳐다보았다. 그때까지 우두커니 서서 둘을 지켜보고 있던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뒤늦게 깜짝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차, 내가 무례한 짓을 했네. 이런 얘긴 여기서 할 게 아니지, 나중에 하자.”

실컷 할 말, 못 할 말 다 한 주제에 이제 와서 예의를 갖추는 척하다니 우습지도 않았다. 그것도 진심이라고는 전혀 들어 있지 않으면서. 무표정하게 바라보기만 하는 나를 대신해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상관없어, 이 녀석은 그런 말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으니까.”

무척 신경 쓰고 있지만 표현하지 않았다. 이 남자가 나를 이런 취급 하는 것 또한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항상 그렇듯이 아무렇지 않게 내게 상처를 줬다.

“이 녀석에게 대시해도 상관은 없지만 후회할 거야. 내가 아는 한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는 녀석이거든.”

“그럴까?”

그레이슨은 씨익 웃더니 의미심장하게 나를 내려다보았다.

“침대에서는 재밌을 것 같은데.”

키이스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더 이상 알 바 아니라는 듯 나가 버렸다. 그레이슨은 내게 가볍게 손을 흔들더니 뒤를 따라 사라졌다.

혼자 남겨진 뒤에야 비로소 나는 떨리는 한숨과 함께 책상에 기대어 앉았다. 문득 아래쪽이 축축하게 젖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색이 되어 다급하게 화장실에 가 보니 역시나였다. 저 오만한 족속들에게 페로몬을 숨기는 매너 따위를 기대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저들은 자신들이 극알파라는 사실을 숨기는 법이 없다. 오히려 자랑하듯이 아무 때나 향기를 뿜어 대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이렇게 피해를 입어야 하는 타인의 사정 따위는 전혀 고려해 주지 않은 채.

“빌어먹을.”

나는 낮게 욕설을 내뱉으며 변기 위에 앉아 다급하게 앞을 훑었다. 정말로 최악이었다.

극알파 따위 다 죽어 버려라.

문득 눈가가 시큰해져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키이스.

그의 향기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히트사이클이 올 것 같았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눈을 감고 그의 이름을 입 안에서 되뇌었다. 그가 알몸으로 내 위를 덮친다는 상상을 하자 곧바로 페니스는 딱딱하게 굳어져 일직선으로 일어섰다.

키이스가 그토록 혐오하는 페니스를 잡고 흔들며 미친 듯이 문질러 댔다. 저절로 다리가 넓게 벌어지고 뒤가 흠뻑 젖어 들었다. 뭔가 안에 넣어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몸 안에 뭔가를 넣는다는 건 무서웠다. 지금껏 나는 그 흔한 자위 기구조차 써 보지 못했다.

하지만 만약에, 키이스가 그 두꺼운 걸 내 안에 박아 준다면.

그러면 나는, 아마 좋아서 미쳐 버리겠지.

“아, 아아…… 하아.”

나는 참지 못하고 마구 신음을 흘려 냈다. 이제 뒤는 흠뻑 달아올라 미끈한 애액이 뚝뚝 길게 선을 그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선단에서 흘러내린 체액 때문에 페니스를 훑을 때마다 질척이는 소리가 났다. 나는 미친 듯이 성기를 문지르며 사정을 재촉했다.

“키이스……!”

마침내 정액을 길게 뿜어내며 나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항상 그랬다. 나는 자위를 할 때마다 그를 떠올렸고, 마지막엔 그의 이름을 부르며 사정했다. 만약 키이스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내 목을 졸라 죽일 것이다.

하아, 하아.

나는 멍하니 변기 위에 앉아 눈을 깜박였다. 흐린 시야에 내가 쏘아 낸 정액이 개인실 벽에 튀어 있는 것이 들어왔다. 닦아야 했지만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싫었다. 이렇게 격렬한 자위가 얼마 만이지? 나는 날짜를 세어 보다 그만뒀다. 조만간 히트사이클이 올 때가 됐다. 아마 그래서 더 예민하게 반응하고 만 것이다, 그 남자의 페로몬에. 미리 약을 준비해 둬야만 한다.

“후우.”

나는 피곤한 한숨을 내쉬고 마침내 몸을 일으켰다. 이미 엉덩이는 애액으로 엉망진창이었다. 변기 안에는 내가 쏟아 낸 체액이 혼탁하게 섞여 있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물을 내리고 바지가 젖지 않도록 조심하며 벗었다.

엠마에게 전화를 해 나 대신 회의에 참석하라고 지시한 후 나는 뒤처리를 시작했다. 키이스 전용의 화장실은 이럴 때 무척 유용했다. 그는 나가고 없었기 때문에 이곳은 오직 나만의 공간이었다. 나는 아랫도리를 훤히 드러낸 채로 연결된 욕실로 가 여유 있게 아래를 닦고 드라이까지 마쳤다.

다시 돌아가 자위의 흔적을 모두 말끔히 지운 다음 바지를 입고 나자 일단 표면상으로는 내가 보스를 반찬 삼아 음탕한 행위를 하기 전의 말끔한 공간으로 되돌아갔다. 물론 나에게서 나는 페로몬 향만은 예외였다.

킁킁, 하고 소리를 내며 냄새를 맡아 봤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스스로의 향기를 맡을 수 없는 탓에 확인은 불가능했지만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아무리 약을 먹어도 사정 후의 진해진 향기는 일정 시간이 흐르기 전에는 사라지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오늘 점심은 거르고 사무실 안에서 향이 누그러들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어차피 사정 후에 청소까지 마치고 나자 몇 배는 피곤해져서 아무것도 할 마음이 나지 않았다. 회의가 끝나면 키이스는 그레이슨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하러 곧바로 나갈 것이다. 여유는 충분했다.

사무실의 문을 잠그고 알람을 맞춘 뒤 편안한 손님용 소파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후 5분도 지나지 않아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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