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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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키이스를 만난 것은 대학에서였다. 정확히는 그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라고 표현하는 쪽이 맞다.

그는 처음부터 유명인이었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제일 먼저 듣게 된 이름이 ‘키이스 나이트 피트먼’이었고, 이후로 하루에 한 번 혹은 그 이상 어김없이 들려오는 이름 또한 그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베타였다. 대부분 10대에 발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그 시기를 지나 ‘변이’하는 경우는 드물었으므로 내가 오메가가 될 거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당시 나는 학기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 녹초가 되어 신경이 바짝바짝 곤두서 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성적은 뜻대로 나오질 않았고 대체 내가 읽고 있는 책의 내용이 뭔지 이해하는 것조차 힘겨워 초조함이 극에 달해 있던 시기였다.

모처럼 좋은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으니 학비는 신경 쓰지 말고 부디 졸업만 해 달라, 하는 게 부모님의 뜻이었지만 나는 심각한 압박감을 느꼈다. 생활비는 턱도 없이 모자랐고 아르바이트를 할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좋은 성적은 바라지도 못했다. 그저 학기를 패스하는 것만이 유일한 소원이 될 정도였다. 게다가 막냇동생은 피아노를 배우고 있어서 집안의 돈이 끝없이 부족했다. 나는 생활이 힘들다는 말은 꺼내지도 못했다. 유학생들끼리 모임을 만들어 족보를 돌려 본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처음 보는 상대에게 말을 거는 것조차 꺼려 할 정도로 낯가림이 심했던 당시의 나로서는 거기에 낄 수조차 없었다. 그저 매일 버거운 수업을 쫓아가기에도 바빴다.

그저 골방에 틀어박혀 책만 들여다보는 것이 매일 반복되다 보니 어느새 현실적인 감각을 잃어버렸다. 물을 사러 편의점에 갔다가 학생 카드를 내밀고 멍하니 서 있는 바람에 점원에게 싫은 소리까지 들었다.

<어라, 연우. 벌써 왔어?>

안되는 공부를 꾸역꾸역 붙잡고 있다가 포기하고 일찌감치 집으로 향하자 하우스 쉐어를 하고 있는 리웨이가 내게 알은척을 했다. 거의 집에 붙어 있질 않아서 얼굴을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녀석인데 웬일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이라 부러 말을 거는 그에게 나는 그저 어색하게 반응했다.

<어, 뭐…… 또 나가?>

가벼운 셔츠와 반바지에 테니스화를 신은 그의 모습을 보고 묻자 리웨이는 웃으며 말했다.

<오늘 경기가 있는 날이잖아. 넌 안 가?>

<경기? 무슨?>

테니스인가, 하고 다시금 리웨이의 차림새를 훑어보자 그는 짧게 소리 내어 웃었다. 이번에는 황당한 듯이. 그리고 리웨이는 곧 자신이 웃은 이유를 말했다.

<폴로 경기 말이야. 몰랐어?>

<어…… 그래? 그런 게 있었어?>

나는 어색하게 되물었다. 폴로 경기는 말로만 들어 봤지 실제로 본 적도 없고 관심도 없었다. 학교에서 이런저런 스포츠 경기를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일일이 그런 곳을 쫓아다닐 여유가 없었으므로 아예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경기 규칙은커녕 몇 명이서 하는 경기인지조차도 모르는데 흥미가 생길 리 만무했다. 나의 무심한 반응에 리웨이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머리도 식힐 겸 구경이라도 가지?>

공부 때문에 너무나 우울했던 나는 잠시 흔들렸다. 기분 전환이 하고 싶었다. 뭔가 다른 걸 보면서 잠시라도 이 일에 대해서는 잊게 된다면 좋겠는데.

<리웨이, 준비됐어. 나가자!>

묵묵히 고민하는 새 뒤에서 리웨이의 여자 친구가 나타났다. 무심코 몸을 비켜 길을 내 주는데, 리웨이가 물었다.

<갈 거면 같이 가자, 태워 줄게.>

나는 망설였다. 남은 공부가 너무 신경 쓰였지만 어딘가로 달아나고 싶은 충동 또한 만만치 않았다. 머뭇거리는 내게 리웨이가 덧붙였다.

<거기다 오늘은 키이스 피트먼이 선수로 뛴다고. 극알파를 실제로 볼 수 있는 기회인데 놓칠 거야? 피트먼은 졸업반이라 이번에 안 보면 평생 못 볼걸.>

<갈게.>

말을 하고 난 후 나는 내가 승낙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 *

폴로 경기가 예정되어 있는 경기장에는 이미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멀찍이 떨어진 장소에 간신히 차를 주차한 리웨이는 북적거리는 사람들을 보고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생각보다 더 대단한데? 이거 경기나 제대로 볼 수 있을까 싶네.>

음, 하고 생각에 잠겼던 그의 여자 친구가 말했다.

<잠깐만, 제니퍼가 진행 요원이라고 들었어. 얘기하면 자리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

리웨이의 팔을 잡고 가려던 그녀가 나를 돌아보았다.

<넌 어떻게 할래? 같이 갈래?>

<나도? 그래도 괜찮아?>

뜻밖의 기회에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괜찮지. 너도 같이 가자. 그런데 확답은 못 해, 제니퍼가 정말 자리를 줄지 어쩔지.>

<아, 그거야 당연히 그렇지.>

나는 수긍하고 황급히 그들을 쫓아갔다. 사람들을 헤쳐 간신히 진행 팀을 찾아가자 곧 제니퍼가 얼굴을 내밀었다.

<진행을 도와준다면야 얼마든지 가능해.>

그녀는 흔쾌히 말한 후 할 일을 알려 주었다. 사실 별건 없었다. 내가 맡은 일은 선수들이 마실 물이라든가 중간중간 필요한 물품을 조달해 주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선수들은 그들의 경기를 도와줄 보조자가 있었으므로 별도로 개개인을 챙겨 줄 일은 없었다. 보조자들이 바로바로 보급할 수 있도록 물건을 미리미리 채워 놓는 게 내 주된 일이었다. 나는 경기 시작 전 바쁜 진행 요원을 도와 이리저리 부산하게 움직였다.

<자리 하나 얻기 힘드네.>

한참 일을 하던 리웨이가 불평을 했지만 돌아온 것은 여자 친구의 가벼운 눈 흘김뿐이었다.

<모두 대기해, 시간 다 됐으니까.>

제니퍼의 지시에 따라 우리는 하던 일을 마무리 짓고 정해진 자리로 향했다. 심판들이 자리에 서는 모습이 보였다. 여기저기 부산한 움직임과 함께 어수선한 소음이 계속됐다. 리웨이는 여자 친구와 경기장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뭔가를 말하고 있었고, 주변 사람들 또한 같이 온 일행과 음료를 마시거나 수다를 떨면서 즐기고 있었다.

혼자 온 것은 나뿐이었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그리 넉살이 좋은 성격은 아니다. 리웨이와도 하우스 메이트이긴 하지만 어쩌다 인사를 할 뿐 데면데면한 관계였다. 이런 장소에 함께 왔다고 해서 갑자기 친밀감이 생길 리 없다. 역시나 리웨이와 여자 친구는 둘만의 세계에 흠뻑 빠져 버렸고 나는 혼자 멀뚱거리며 어색한 상황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고민했다.

괜히 왔나, 집중이 안 되더라도 일단 책상에 앉아 있을걸.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제 와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어쨌든 돌아갈 때도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리웨이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생각할수록 시간이 아까웠다. 그깟 극알파가 다 뭐라고.

<그레이슨도 나온다면서?>

뒤쪽에서 누군가 말했다. 이어지는 목소리가 들렸다.

<키이스와 그레이슨을 한자리에서 보다니 상상도 못 했어. 둘 다 이번에 졸업하지?>

<응응, 그러니까 말이야. 세상에, 이런 행운이 어딨겠어? 나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어.>

<거기다 그레이슨은 밀러가 사람이잖아. 세상에, 밀러가의 극알파를 실제로 보게 되다니! 이 학교에 오길 정말 잘했어. 나 어제 한숨도 못 잤다니까.>

잔뜩 들떠 높아진 음성에 뒤이어 한풀 꺾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같은 학교라고는 하지만 난 한 번도 못 봤어, 둘 다.>

<나도 그래. 출석을 하긴 하는 거야? 아니면 극알파들은 그런 거 프리 패스인가?>

<몰라, 어서 보고 싶다. 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극알파들은 다 그렇게 미치게 잘생겼다면서.>

<알파나 오메가들은 기본적으로 예쁘고 잘생겼잖아. 극알파라면 더하겠지.>

점점 소리가 멀어졌다. 그들이 이동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또다시 소음에 묻혀 버렸다. 좀처럼 정리되지 않는 들뜬 분위기 속에서 나 또한 정처 없이 시선을 배회하고 있을 때였다.

……어?

처음 맡는 달큼한 향기가 느껴졌다. 무심코 고개를 든 나는 향기의 근원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나와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다급하게 사방을 훑고 있었다.

주변이 고요하게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깨달음과 동시에 나는 그를 발견했다.

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는 눈에 띄는 검은 말 위에 높이 앉아 있었으니까. 마치 세상의 모두를 내려다보듯이.

그날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시간이, 공기가, 세상이.

내 온 우주가 그대로 멈춘 그 순간을.

다각. 다각. 다각. 다각.

검은 말이 여유롭게 말굽 소리를 울리며 천천히 다가왔다. 향기는 더 진해지고 그의 얼굴은 비례해 점차 가까워졌다.

헬멧 아래에 드러난 짙은 머리칼이 말의 발걸음에 맞춰 부드럽게 흔들렸다. 굳이 그 아래의 보라색 눈동자를 확인하지 않더라도 그의 존재감은 너무나 확연했다. 만약 베타라 하더라도 저 남자는 누구든 손쉽게 사로잡을 게 분명했다.

폴로 경기를 위해 흰 바지를 입은 그는 고삐와 폴로 채찍을 한 손에 가볍게 쥐고 다른 손에는 맬릿을 들고 있었다. 말이 느긋하게 발을 뗄 때마다 우아하게 흔들리며 키이스는 다가왔다. 단정한 얼굴은 똑바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아.>

누군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너무나 공감이 가는 소리였다. 하마터면 나도 그럴 뻔했으니까. 내가 감탄과 탄식이 뒤섞인 그 소리를 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린 채 숨을 멈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뒤늦게 그것을 깨달았지만 나는 여전히 시선을 돌리지도 숨을 쉬지도 못했다. 그저 넋을 잃고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비단 나만이 아니었다. 그의 모습은 한눈에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렇게 숨이 막히도록 아름답고 품위 있는 존재를 본 적이 있었던가?

처음으로 신의 존재를 실감하게 되는 기분이었다. 불현듯 키이스의 얼굴이 희미하게 변화했다. 무표정했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나를 비롯한 사람들 모두가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단 한 사람을 향한 것이었다.

<그레이슨.>

키이스는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내 앞을 스쳐 갔다. 거대한 말 위에 올라탄 채, 그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 키이스는 있었다. 나는 키이스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태양에 차마 그를 올려다볼 수도 없었다. 내게 허락된 것은 그저 달큼한 향기가 전부였다. 나만이 아니라 그 순간 그 장소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평하게 가질 수 있는 키이스의 페로몬.

그렇게 생각하자 터무니없게도 나는 질투를 느꼈다. 도대체 저 남자와 내가 무슨 관계라고.

그 증거로 키이스는 아무렇지 않게 내 앞을 지나쳐 버리더니 곧바로 다른 남자에게 갔다. 역시나 폴로 선수인 듯 복장을 갖추고 말 위에 앉아 있는 남자는 그와 같은 부류였다. 남자의 얼굴을 본 사람은 누구나 한 번에 그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의 보라색 눈동자 때문에.

남자는 학교 내에서 단둘뿐이라는 극알파 중 다른 한 명이었다.

나는 달콤한 벌꿀 같은 허니블론드에 극알파의 상징인 자수정 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또 다른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키이스 나이트 피트먼의 진한 머리색과는 전혀 다른 금발을 가진 그는 웃는 얼굴이 아주 근사한 미남이었다. 화려한 외모의 남자가 둘이나, 그것도 한자리에 모이다니 이런 상황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거기다 둘 다 극알파였다.

<세상에, 나 지금 죽을 것 같아.>

누군가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이며 탄식했다. 아마도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옆에서 다급하게 사진을 찍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한 명도 아닌 두 명의 극알파를 한 컷에 담을 수 있다니 이거야말로 하늘이 준 기회였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나는 망설였다. 왠지 부끄러워서 다른 사람들처럼 아무렇지 않게 휴대 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나는 휴대 전화를 꺼내는 대신 정신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내 눈 안에 키이스를 영원히 담아 두고 싶은 것처럼.

한동안 뭔가 말을 나누던 둘은 가볍게 손바닥을 마주치더니 곧 떨어졌다. 각자의 자리로 가는 듯 멀어지는 모습을 사람들은 아쉬워하며 지켜보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는 소리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푸르륵, 푸르륵 하며 키이스의 말이 투레질을 했다. 탁, 탁 의미 없이 바닥을 쳐 대는 발굽 소리가 내 귀에는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사실 키이스에 관련된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정신없이, 그야말로 핥듯이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경기가 시작되고, 말 위에 올라탄 남자들이 맬릿을 높이 들고 달려가는데도 내 눈에는 키이스만 보였다.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오직 그와 나 단둘뿐인 것처럼.

능숙하게 고삐를 당기는 모습, 맬릿을 휘둘러 공을 날리는 모습, 말을 달리며 상대방을 위협하는 모습까지.

하다못해 그의 이마에서 떨어지는 땀방울마저도 내 눈에는 너무나 확실히 들어왔다. 아플 정도로 심장이 뛰어 나도 모르게 가슴을 지그시 눌러야 했을 만큼.

아득히 먼 곳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내 감정이 무엇인지.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키이스가 남자라는 것도, 극알파라는 것도, 그에 반해 나는 너무나 평범한 베타라는 것도 그 순간 내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저 이토록 격렬히 키이스만을 향해 뛰는 심장이 온 힘을 다해 소리치고 있었다.

아, 난 저 남자에게 반해 버렸구나.

전율이 일듯이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불현듯 그가 나를 향해 달려오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마치 최대한 속도를 늦춰 화면을 되새기듯 천천히 키이스는 내게로 오고 있었다. 나는 그저 멍하니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바라보기만 했다. 주변에서 내지르는 소리도, 그가 뭔가 고함을 지르는 것도 듣지 못했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느리게 가까워지는 키이스를 쳐다보고만 있을 뿐.

따악!

예리한 소음에 깜빡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하지만 반응을 한 것은 또다시 몇 초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뒤이어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시야에 가득 차오른 광경을 내 뇌는 잠깐의 공백 뒤로 하나씩 필름을 넘기듯 되새겼다.

콰당, 요란한 소리를 내며 눈앞에서 키이스가 낙마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비명이 연달아 터졌다. 여기저기서 진행 요원들이 달려왔다. 경기는 중단되었다. 키이스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앉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저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뒤늦게 나는 내 눈앞으로 공이 날아왔다는 것과, 그것을 전속력으로 달려온 키이스가 맬릿으로 쳐 날려 버렸다는 것, 그로 인해 균형을 잃고 말에서 떨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 *

경기는 다시 진행되었지만 키이스는 예외였다. 한쪽 이마가 찢어졌고, 피를 흘렸다. 모두가 긴장한 채 그를 의무실로 데려갔다. 경기는 잠시 뒤에 다른 선수를 투입한 후 재개되었지만 어딘지 맥이 빠져 버린 듯한 분위기였다. 나는 키이스가 진행 요원들과 함께 사라진 방향을 정신없이 바라보다 무리에서 빠져나왔다.

<저쪽으로 가면 돼.>

제니퍼를 찾아 키이스가 간 곳을 물어보자 그녀는 선뜻 의무실 방향을 알려 주었다.

<어, 나 때문에 다쳤으니까 괜찮은지 궁금해서…….>

불필요한 설명을 덧붙였지만 그녀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대수롭지 않게 경기에 몰두하고 있는 그레이슨에게로 시선을 향하는 그녀를 보고 나는 조금은 안심했다.

의무실은 한적하고 외진 천막 안에 있었다. 이 정도 거리에 이렇게 숨어 있다면 일반인들이 부상당한 선수를 찾아오기도 힘들 것이다. 안정이 필요한 부상자들을 위한 배려인지도 모른다. 특히나 그 부상자가 극알파라면 더욱 그런 열성 팬들이 있을 테니.

실제로 오는 동안 몇 명의 사람들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봤다. 역시나 키이스가 실려 간 곳이 어딘지 묻는 누군가에게 진행 요원은 무심히 대답했다.

<당연히 병원에 갔죠.>

그 말에 그들은 실망해 돌아섰다. 내가 진행 요원이 아니었다면 나 또한 같은 대답을 들었을 것이다. 비록 키이스가 나로 인해 다친 거라고 해도. 나는 왠지 특권을 부여받은 설렘을 느끼며 천막으로 향했다.

하지만 정작 천막을 찾아낸 후에도 나는 선뜻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여러 가지 준비가 필요했다. 무엇보다도 마음의 준비가.

간신히 할 말을 정한 뒤 나는 발을 뗐다. 한 발자국 뗄 때마다 어마어마한 중력의 힘을 느끼면서 아주 천천히 천막의 입구를 향해 갔다. 늘어져 있는 허름한 천 안에서는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 분명히 있었다. 그 어떤 것보다도 확실한 증거를 나는 찾아냈다. 바로 그의 향기였다.

참을 수 없이 달큼한 그의 페로몬이 주변을 하릴없이 떠돌고 있었다.

꿀꺽.

나는 소리 내어 마른침을 삼켰다. 자꾸만 목 안이 따끔거리고 아파 왔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그를 만날 기회란 다시 없을 것 같았다. 마치 무언가에 등이 떠밀리듯, 아니면 끌어당겨지듯 나는 한 걸음씩 그에게 다가갔다. 조금씩 향은 짙어지고, 내 머릿속 또한 비례해 멍해졌다.

…….

묵직하게 내려와 있는 천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자 예상외로 꽤 넓은 공간이 시야에 들어왔다. 의료 기구가 질서 정연하게 쌓여 있는 카트에서 시선을 돌리자 안쪽에 놓여 있는 간이침대가 보였다.

제법 커다란 간이침대 위에는 키이스가 누워 있었다. 이마에 넓은 거즈를 댄 상태였다. 창백한 안색과 감고 있는 두 눈을 보자 나는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혹시 뭔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불안해졌지만 곧 이성이 감정을 억눌렀다. 심각한 상태라면 이렇게 아무도 없이 덜렁 키이스만 남겨 두고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런 임시 천막에 대충 눕혀 놨을 리가 없지. 병원에 갔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의 단정한 이마에 둘러져 있는 붕대는 여전히 내 시선을 잡아 끌었다.

저 얼굴에 흉터라도 생기면 어쩌지.

상상만으로도 극심한 죄의식이 느껴졌다. 복잡한 마음에 미간을 찌푸렸을 때였다. 불시에 키이스가 눈을 떴다. 순간 나는 너무 놀라 숨을 멈춰 버렸다.

넓게 기워진 천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이 천막 안을 군데군데 환하게 만들었다. 빛 사이로 유영하는 먼지가 나풀거리며 주변을 떠돌고, 황금빛의 그늘 너머로 키이스가 나를 바라보았다.

아.

나는 멀거니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기만 했다. 그토록 열심히 준비했던 말들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서 있을 뿐이었다. 맥 빠지게도 먼저 입을 연 것은 키이스였다.

<……응?>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나는 바보처럼 되물었다. 키이스가 피식 웃었다. 나도 모르게 무릎에 힘이 풀려 그대로 넘어질 뻔했다. 아득한 의식을 간신히 붙잡자 키이스의 목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안 다쳤어?>

순간 멈칫했다. 그는 내 얼굴을 알고 있었다. 그 찰나의 순간 자신이 구해 준 상대의 얼굴을 기억하다니, 나는 왠지 가슴이 벅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겨우 고개만을 끄덕이자 그는 미소를 지었다. 온전히 나만을 위한 미소였다. 나는 심장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아파 왔다.

고맙다고 말을 해야 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입만 벌린 채 주저하는 내게 키이스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얼굴만 바라보며 발을 뗐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설 때마다 맥박이 몇 배로 빨라졌다.

마침내 손이 닿았을 때, 나는 그만 온몸을 떨고 말았다.

<……?>

갑자기 그가 내 손목을 잡아 끌어당겼다. 뜻밖의 상황에 놀라 나는 그대로 그의 가슴 위로 쓰러졌다. 곧바로 그는 내 허리에 한 팔을 감아 바짝 안았다. 나는 얼떨결에 그의 무릎 위에 앉고 말았다.

흡, 하고 그가 내 목에 코를 묻고 깊이 숨을 들이켰다. 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로 그저 떨고만 있었다. 다시 확인하듯이 킁킁, 냄새를 맡은 그가 입을 열었다.

<……베타야?>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그래?” 하고 갸우뚱하더니 이내 빙긋 웃었다. 나는 헐떡거리는 숨을 참지 못하고 산소를 입 안에서 모아 간신히 삼키기를 반복했다. 키이스가 입을 벌리고, 내 목을 물었다.

<……하.>

나는 순간적으로 날카롭게 숨을 삼켰다. 느슨하고도 집요하게 여린 살을 빨아들이는 감각에 온몸이 부들거렸다. 덜덜 떨리는 손을 주저하며 키이스의 어깨로 올리자 그는 곧바로 그것을 잡아 자신의 목에 감게 했다. 키이스가 내 목을 와작 깨물었다. 흠칫 놀라자 그는 허리를 안고 있던 손을 옮겨 내 셔츠를 잡아 끌어 올렸다. 능숙하게 등을 쓰다듬은 손이 앞으로 돌아왔다.

<아무리 동양인이라도 가슴이 너무 없는 거 아냐?>

어느새 밑으로 옮겨 간 그가 쿡쿡거리며 웃었다. 하지만 말릴 틈도 없이 키이스는 이를 세워 내 유두를 붙잡았다. 나는 버티지 못하고 다급하게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부드럽게, 혹은 난폭하게 내 젖꼭지를 빨아들이며 키이스는 맨살을 더듬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키이스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페로몬 향에 척수까지 절어 버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거듭 숨을 몰아쉬며 정신없이 그의 몸을 더듬었다.

바지 속으로 들어간 손이 엉덩이를 꽉 잡았을 때, 나는 그만 크게 입을 벌리고 말았다. 하지만 정작 고함을 지른 것은 키이스였다.

<뭐야, 이게?>

그때까지 달콤함에 푹 빠져 있던 나는 즉각 반응하지 못했다. 난폭하게 그가 나를 밀치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전신에 통증이 느껴졌다. 형편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진 다음에야 비로소 나는 일부나마 정신이 돌아왔다.

키이스는 벌떡 일어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죽일 듯이 노려보며 그는 이를 악물었다. 방금 전까지 그렇게 달콤하던 향내가 지금은 어지럽게 흩어져 정신을 사납게 만들었다. 주춤거리며 주저앉은 채로 물러나는 내게 키이스가 악문 잇새로 내뱉었다.

<너, 남자였어?>

나는 당황해 눈만 깜박거렸다. 하지만 그는 굳이 내게 대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반쯤 벗겨진 바지 위로 남자라는 증거가 너무나 명백히 드러나 있었으니까.

형편없이 움츠러든 페니스를 본 그가 갑자기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다음 순간 몸을 돌리고 미친 듯이 구역질을 해 대는 그의 넓은 등을 나는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이 망할 변태 새끼, 나한테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갈라진 음성으로 키이스가 고함을 질렀다. 그의 보라색 눈이 돌변해 현란하게 빛을 냈다. 나는 순간 놀라 숨을 멈췄다.

눈동자가……?

극알파 특유의 보라색 눈이 아니었다. 마치 쏟아지는 햇살을 받은 사막의 모래알처럼 빛나는 금색의 눈동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정신이 하나도 없는 와중에 나는 의아해졌다. 기분에 따라 눈동자 색깔이 변하는 사람이 있다는데 그런 경우인가?

극알파들이 다량의 페로몬을 방출할 때 눈동자의 색깔이 변한다는 사실을 그때의 나는 몰랐다. 망연해져 멀거니 주저앉아 있는 사이 분노에 찬 키이스의 페로몬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천막 안을 가득 메웠다. 숨을 쉬기가 힘들 정도로 나는 페로몬에 짓눌렸다.

뭔가 무기를 찾는 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그의 모습에 나는 뒤늦게 겁에 질려 온 힘을 다해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있으면 무슨 꼴을 당할지 몰랐다. 물론 무엇을 상상하든 결과는 처참할 것이다.

먼저 유혹한 쪽은 키이스라는 걸 말해 줄 여유 같은 건 없었다. 이내 폴대를 찾아 움켜쥐는 그의 모습에 나는 기겁을 하며 달아났다. 다리가 꼬여 비명과 함께 바닥에 얼굴을 처박았지만 아픔도 느끼지 못했다.

그는 당장 나를 때려죽일 것처럼 날뛰고 있었다. 달아나지 않으면 정말로 그렇게 할 것이다. 그에겐 그러지 못할 이유가 단 하나도 없었다.

간신히 일어나 다시 달리기 시작한 내 뒤로 그는 온갖 욕설과 저주의 말을 퍼부었다. 나는 휘청거리면서도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은 채 온 힘을 다해 달아났다.

마침내 그의 향기가 느껴지지 않는 거리까지 달려왔을 때, 나는 숨이 끊어질 것처럼 괴로워하며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 * *

집에 돌아왔을 때는 자정이 지나 있었다. 리웨이 일행을 놓친 결과로 혼자 걸어서 돌아와야 했던 것이다. 간이 패널을 세워 거실 한쪽을 방으로 만든 공간에 나는 비틀거리며 들어갔다. 너무나 지쳐서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었다. 그냥 잠에 빠져 모든 걸 잊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문득 미열이 오르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무시하고 침대 위로 쓰러졌다.

자꾸만 가슴 한구석이 비참하게 젖어 들었다. 키이스는 나를 여자로 착각한 것이다. 그래서 나를 구해 준 거고, 내게 키스했고, 나를 안으려 한 거였다.

그 정도로 경멸하다니.

무심코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문득 그가 내 페로몬을 확인하던 것이 떠올랐다. 베타라는 걸 알고 그는 실망했을까? 만약에 내가 오메가였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내가 남자라도 상관이 없었겠지? 내가 오메가였다면.

이제 와서 대답을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베타였고, 거기다 남자였고, 그는 나를 경멸했다.

나는 그대로 눈을 감은 채 씻지도 않고 잠이 들었다. 죽도록 피곤했다. 그저 간절히 바라는 것은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 일을 모조리 잊어버리는 것뿐이었다.

그 순간 나의 보잘것없는 선택이 내 인생을 바꿔 버렸다. 그날 나는 가까운 약국에 가서 임시로라도 페로몬을 빼내는 약을 사서 먹었어야 했다. 하다못해 전신을 공들여 씻어 몸에 남아 있는 페로몬을 모두 없애기라도 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내 전신에 무겁게 내려앉아 있던 그의 페로몬이 피부와 호흡을 통해 내 안에 흡수되지 않았을 테고, 그랬다면 내 몸이 변이하지 않았을 테고, 꼬박 이틀 가까이 고열에 시달리다 눈을 떴을 때 오메가가 되어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괴로운 것은 타인의 인생이 완전히 뒤바뀌었는데도 불구하고 정작 그렇게 만든 당사자는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졸업 후 얼마간의 경험을 쌓아 키이스 나이트 피트먼의 비서로 채용되었을 때 나는 그것을 깨달았다.

그는 전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키이스에게 나는 그저 ‘남자 비서’일 뿐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그의 앞에 섰을 때, 키이스는 너무나 무심한 얼굴로 이렇게 말한 게 전부였다.

<네가 오메가든 알파든 관심 없어, 난 남자는 상대하지 않으니까. 일이나 제대로 하라고.>

안심하라는 건지 꿈도 꾸지 말라고 경고를 하는 건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지난 2년 동안 철저히 나를 무시했다. 수시로 여자를 바꿔 가며. 상대는 베타일 때도 있고 오메가일 때도 있었지만 남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내가 베타인 것은 애초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내게 가슴 대신 페니스가 달려 있다는 것이 오직 유일한 문제였다. 이것이 있는 한 그는 결코 나를 돌아봐 주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간신히 받아들였던 날, 나는 첫사랑에 안녕을 고하고 만취해 울다 잠들었다.

* * *

…….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나는 몇 초의 공백이 흐르고 난 뒤에야 비로소 현실로 돌아왔다. 아직 정신은 멍했지만 피로는 훨씬 줄어들어 있었다. 이물감이 느껴지는 눈가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일어나 앉았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알람이 울리기 10분 전이었다.

느릿느릿 일어나 머리를 가다듬고 옷을 점검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실내를 확인한 뒤 사무실의 잠긴 문을 열었을 때, 나는 여느 때와 전혀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 증거로 마침 지시한 보고서를 완성한 비서 팀의 직원이 나를 보더니 평소처럼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했다. 나는 가볍게 인사를 받으며 서류를 확인했다.

이제 5분 뒤면 저 문이 열리고 그 남자가 들어올 것이다. 언제나처럼 자신감 있는 걸음으로 성큼성큼 들어와 나를 지나쳐 가 버리겠지. 처음 본 그날 그랬던 것처럼.

나는 무심한 얼굴을 들어 복도에서 들려올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서서히 그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 비례해 나의 마음도 하나씩 문을 닫는다.

아련히 착각처럼 느껴지던 발소리가 현실이 됐다. 나는 두 손에 보고서를 가볍게 쥔 채 똑바로 서서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잠시 뒤 그 순간이 왔다. 키이스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평소처럼 입가에만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했다.

“회의는 잘 끝나셨습니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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