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4/77)

3

회의실 안은 고요했다.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그저 묵묵히 눈치만 볼 뿐이었다. 나는 허리를 똑바로 펴고 앉아 키이스가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 다른 임원들과 마찬가지로.

“하아.”

키이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지난번 <포브스>에 실린 기사 다들 보셨습니까?”

갑작스러운 물음에 다들 당황해하며 서로를 돌아보았다. 키이스는 보고서를 내려놓고 대신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 톡 박자를 맞춰 두드렸다.

“거기 보시면 제 재산이 얼마 정도인지 대략 알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발표된 것보다 더 많겠죠.”

왜 회의하다 말고 갑자기 돈 자랑인지는 곧 밝혀졌다. 키이스는 입가를 일그러뜨리고 냉소를 지었다.

“고작 이런 기획으로 제 전 재산을 말아먹을 수 있겠습니까? 할 거라면 이보다 더 구질구질하게 만들어 와야죠. 내 요트를 사느라 쓴 돈이 이 영화를 제작하는 데 쓴 돈보다 많습니다. 아니면 이 허접쓰레기를 1,000편 정도 만들 겁니까? 평생을 이 영화만 만들다가 끝나겠군요. 아주 멋집니다.”

신랄하게 비꼰 키이스가 “와우” 하고 탄성까지 내지르며 보란 듯이 박수를 쳤다. 누구도 말을 하지 못했다. 고개만 숙인 채 눈치만 보는 임원들 사이로 정적이 내려앉았다. 키이스는 그나마 짓고 있던 조소마저 거두고 이를 갈았다.

“고작 이런 걸 만들겠다고 1년을 잡아먹었습니까? 이런 거지 같은 건 하루에도 수백 편씩 쏟아집니다. 돈만 처들이면 쓰레기가 명작이 됩니까? 쓰레기는 쓰레기일 뿐이죠. 그냥 돈을 처바른 쓰레기일 뿐. 재미가 없으면 작품성이 있든가, 작품성이 없으면 흥행성이 있든가. 도대체 여기서 뭘 기대해야 하는 겁니까?”

보란 듯이 보고서를 쓰레기통에 던져 버린 키이스가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작품을 보는 눈도 없고 생각하는 머리도 없고. 그 해골 속에 든 게 스파게티가 아니라 뇌라면 생각을 좀 해 보시죠?”

온갖 폭언이 쏟아져도 그것에 반박하는 소리는 하나도 없었다. 나는 잠시 머릿속을 비우고 그의 말을 귀에서 귀로 떠내려 보냈다. 신이 인간에게 두 개의 귀를 준 이유는 하나는 듣고 하나는 흘리라는 용도이니까. 키이스는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흘러내리지도 않은 머리칼을 난폭하게 쓸어 넘겼다.

“이 기획은 전부 백지화하고 다시 처음부터 만들어 오십시오. 3일이면 충분하겠죠. 다시는 이런 쓰레기로 내 귀한 시간을 빼앗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키이스는 말을 맺은 뒤 주저 없이 일어섰다. 나는 곧바로 그의 뒤를 쫓아갔다.

걸어가면서 그는 담배를 꺼내 입술에 물었다. 자연스럽게 불을 붙이고 첫 연기를 뱉어 낼 때까지 키이스는 한 번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물론 나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휘태커에게.”

“네.”

나는 즉각 대답했다. 키이스는 여전히 앞만 보고 걸어가며 말했다.

“이번 주말에는 인원을 증원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주말 선상 파티의 경비를 말씀하시는 거죠? 또 추가하실 사항은 없으십니까?”

그는 아직 내게 파티의 목적이 무엇인지조차 말하지 않았다. 슬쩍 속을 떠보자 처음으로 키이스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래 봤자 흘긋 시선을 향할 뿐 걸음은 멈추지 않았지만.

“그건 네가 알아서 해야지, 차질 없이.”

“알겠습니다.”

나는 같은 대답을 한 후 입을 다물었다. 일반적인 사교 파티인 경우에는 이렇게 대충 말을 하고 넘어갈 때가 많았다. 특별히 신경 쓸 것은 초대객들의 명단뿐이었지만 그것은 키이스가 알아서 줄 것이다. 이런 파티는 오히려 부담이 적어 좋았다.

키이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정면을 향했다. 문득 나는 그가 미소를 지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심 궁금해하는데,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넌 눈치가 빨라서 좋아.”

“감사합니다.”

순간 진심으로 나는 그렇게 말했다. 이 까다로운 남자가 나를 인정하다니, 생각도 못 했다. 불시에 찾아온 칭찬에 어리둥절했을 때 그가 말했다.

“아주 편리해.”

그것은 혼잣말에 가까웠지만 그래서 더욱 진심으로 느껴졌다. 이 남자에게 난 정말 유용한 비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당연한 일인데도 순간적이나마 멈칫했다. 나는 기분을 감추고 평소처럼 웃어 보였다.

“그렇습니까? 다행이군요.”

나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신경 쓰며 덧붙였다.

“앞으로도 노력하겠습니다.”

키이스가 나를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확실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문제를 일으킨 적도 없고, 항상 성실한데 그럴 수 있는 이유가 뭐야? 혹시 밤이 되면 돌변해서 남자 사냥이라도 하나?”

그는 정말로 궁금한 모양이었다. 하루도 섹스 없이는 살지 못하는 극알파라면 당연히 궁금할 것이다. 하지만 틀렸다. 나와 그는 자석의 양극(兩極)처럼 전혀 달랐다.

“그런 건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왜 상대가 꼭 남자일 거라고 생각하시죠?”

그 말에 키이스는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넌 오메가잖아? 여자 알파는 드물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상대라면 남자겠지. 베타라도 상관없을 테니까.”

난 그의 말 어디를 정정해 줘야 좋을지 아주 잠깐 난감해졌다. 변이하기 전에는 여자 친구를 사귄 적이 있지만 키이스에게 반한 후에는 누구와 관계를 맺어 본 적이 없었다. 더욱이 오메가가 된 후에는 대체 내 정체성이 뭔지조차도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여자를 좋아하는지 남자를 좋아하는지조차.

단지 확실한 것은 눈앞의 이 오만한 남자만이 언제나 나를 설레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바로 이 순간에도.

“어쨌든 틀렸습니다. 전 밤놀이 같은 건 하지 않습니다. 밤에 숙면을 취하지 않으면 낮에 사장님의 업무를 보좌하는 데 큰 차질을 빚을 테니까요.”

“와우.”

키이스는 일부러 느릿하게 감탄사를 뱉어 냈다. 나는 재빨리 그를 앞질러 먼저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다시 한 발짝 물러나 기계가 올라오기를 기다리는데, 불쑥 키이스가 말문을 열었다.

“그럼 넌 낮이나 밤이나 똑같다는 얘기야?”

“네, 달라져야 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무심코 반항적으로 되묻자마자 후회했다. 괜히 이 남자의 성질을 건드렸을까 봐 조마조마해졌다. 다행히도 키이스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저 피식 웃으며 여느 때와 똑같이 나를 비웃었을 뿐이다.

“낮이나 밤이나 재미없는 남자군.”

이번에는 용케 대꾸하지 않고 참았다. 그는 나를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나는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다. 그레이슨처럼 유흥에 능하지도 않고, 재치 있는 농담도 하지 못한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으니까.

“제 유일한 장점은 성실함이니까요, 사장님.”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장님께도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하지만 키이스는 뜻밖에도 올라타지 않고 그대로 멈춘 채 나를 내려다보았다. 문이 닫힐세라 황급히 손을 뻗어 제지한 내가 예의 바르게 다른 손을 들어 어서 타라는 표시를 해 보였다. 그제야 키이스가 발을 떼고 승강기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미처 따라 타기 전에 그는 먼저 입을 열었다.

“점심시간이야.”

어, 하고 멈칫한 사이에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고 그가 버튼을 누르는 모습이 보였다. 뒤늦게 나는 오늘 그의 점심 약속을 기억해 냈다.

*

*

[아, 그렇습니까? 혹시 파티에 오실 손님의 명단과 수를 먼저 보내 주시겠습니까?]

키이스의 말을 전하자 휘태커는 즉시 직업적인 자세로 물었다. 나는 오늘 중으로 참석 인원을 확인해서 메일을 보내겠다고 대답했다.

전화를 끊고 난 후 알파벳순으로 초대 인원을 분류해서 비서들에게 각각 나눠 줬다. 각자 참석 여부를 확인한 후 내게 보고하도록 말하고 내 몫의 리스트를 들었다.

점심시간이 끝나자마자 우리는 일을 시작했다. 나는 사장실과 연결된 내 사무실의 자리로 가 한 사람씩 전화를 돌렸다.

[물론 갈 거야.]

비서에게서 전화를 넘겨받은 그레이슨이 불쑥 말했다.

[연우도 와?]

“저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나도 모르게 되물었다. 건너편에서 웃음기를 머금은 그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래, 관리자가 필요하니까. 아니면 이번엔 찰스가 오나?]

그 부분은 아직 변경의 여지가 있긴 했지만 아마도 내가 전반적으로 관리를 하게 될 것이다. 키이스의 자택에서 이루어지는 파티라면 집사인 찰스가 관리하겠지만 이번에는 선상에서 열리기 때문에 얘기가 달랐다. 자택이 아닌 곳에서 파티를 열 경우는 대부분 파티 플래너나 내가 파티의 전반적인 관리를 맡았다.

하지만 파티 플래너를 섭외한다거나 찰스가 파티를 책임진다고 해서 내가 할 일이 없는 건 아니었다. 혹시 예기치 못한 사건이 터진다거나 하면 수습을 해야 하니 나는 어떤 파티라도 어차피 참석을 해야 했다.

물론 이번 파티에는 파티 플래너를 섭외하지 않았고, 찰스에게 관리를 요청하지도 않았다. 키이스는 전적으로 내게 일임했고 내 판단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가 대답했다.

“아마 제가 갈 것 같습니다.”

[……그래?]

석연치 않은 침묵 후에 돌연 그가 물었다.

[약은 언제나 가지고 다니지?]

“네, 물론.”

이번에도 역시 뜬금없는 질문에 나는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그는 됐어, 하고 말했다.

[파티에서 만나, 연우. 혹시 못 볼 꼴을 보게 되더라도 너무 놀라지 말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당부를 덧붙인 뒤 그레이슨은 전화를 끊었다. 나는 무심코 끊어진 전화의 수화기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다시 전화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을 수는 없었다. 찝찝한 기분이 남았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무시하고 다음 전화의 번호를 눌렀다.

* * *

파티의 준비는 순조로웠다. 벌써 몇 번이나 치렀던 일이기 때문에 특별할 것도 없었다. 다른 게 있다면 이번에는 선상 파티라는 것뿐.

키이스가 자랑하는 초호화 요트는 승객을 300명이나 태울 수 있을 정도로 거대했다. 오늘 파티에 초대된 사람은 50명이었고, 따라서 훨씬 여유가 있었다. 그들이 각자 파트너를 데려올 것까지 감안하더라도 최대 200명은 넘지 않을 것이다. 혹시 몰라 250명분의 음식과 음료를 준비했다. 중간에 몸이 불편하거나 휴식이 필요한 손님이 있을 경우를 대비해 객실도 모두 정리한 상태였다. 준비는 완벽했다.

파티는 7시부터였지만 언제나 이르게 오는 손님도 늦게 오는 손님도 있는 법이었다. 사실 이 파티의 목적은 그저 ‘친목’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키이스에게 이렇게 많은 친구가 있는 줄은 몰랐지만 그의 개인적인 인맥 같은 걸 내가 알 리가 없어 그냥 단어 그대로 받아들였다. 어쩌면 친구라는 단어의 의미도 나와 그는 다를지 모른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와 나는 같은 점을 찾는 게 더 어려울 테니까.

“어서 오십시오, ……노먼 씨.”

입구에서 나눠 주는 이름표 따위 그는 달지 않았다. 습관적으로 가슴에 시선을 줬다가 위를 올려다봤을 때 나는 곧바로 납득했다. 보라색 눈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행히 파티 전 참석하는 손님들을 대충 외워 둔 것이 도움이 됐다. 나는 한 박자 늦게 그의 이름을 덧붙였다.

처음 명단을 받았을 당시에도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오늘 파티의 손님들은 모두가 극알파였다. 평생 한 번도 보기 어렵다는 극알파를 이렇게 떼로 보게 되다니 오늘은 복권을 사야 할지도 모른다. 만약에 내가 우연히 이 광경을 보게 됐다면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상황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따라서 별다른 행운은 기대할 수 없었다.

이 극알파들에게 치여서 사고가 나지 않기만 빌어야지.

나는 내심 기도하고 싶은 기분으로 생각했다. 아마 그레이슨의 경고는 이것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많은 극알파들이 내뿜는 페로몬에 버틸 수 있는 오메가는 세상에 없다. 극오메가라면 또 모르겠다. 언젠가 극오메가는 극알파의 페로몬을 조절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말을 들었다.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난 평범한 오메가다. 그것도 발현이 늦어 ‘변이’를 한 탓에 주기조차 뒤죽박죽인. 나는 새삼 다짐했다.

그저 내가 조심하는 수밖에.

양팔에 한 명씩 일행을 데리고 온 손님에게 가벼운 인사를 하고 돌아서자 마침 들어오던 그레이슨과 눈이 마주쳤다.

“연우.”

그는 반갑게 인사를 하며 다가왔다. 나는 정중하게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밀러 씨.”

“그레이슨.”

그는 지치지도 않고 정정했다. 나는 굳이 그의 뜻에 따르는 대신 사무적으로 말을 이었다.

“피트먼 씨는 앞으로 15분 내에 도착하실 겁니다. 먼저 파티를 즐겨 주십시오.”

“물론 그렇게 할 생각이지만.”

그레이슨은 저쪽에서 손을 흔드는 금발의 글래머 미녀에게 마주 웃어 보인 후 다시 나를 내려다보았다.

“미리 말해 두겠는데, 난 오늘 이 파티에 대해서 경고했었어. 연우한테도, 키이스한테도.”

“네?”

뜻밖의 말에 눈을 깜박였지만 그는 그저 쓴웃음을 지으며 돌아선 게 전부였다.

“대체 자꾸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는 기분이 나쁘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해서 무심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오늘 파티가 다른 파티와 다를 게 있나? 선상에서 열린다는 것? 손님이 모두 키이스의 친구라는 것? 초대객들이 전부 극알파라는 것……?

마지막으로 떠올린 사실에 멈칫했을 때, 경호원이 키이스가 도착했다는 걸 알려 왔다. 나는 생각을 접고 재빨리 그를 맞이하러 나섰다.

키이스는 엘리사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새로운 여자와 관계를 시작했는데, 그녀는 최근 가장 핫한 모델이었다. 늘씬한 글래머의 금발 미인이 키이스의 팔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모습을 보자 위가 아파졌다. 나는 극히 사무적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들은 아직 몇 분 안 오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애비게일 씨. 오늘은 특히 아름다우시군요.”

입에 발린 칭찬의 말은 키이스가 여자를 바꿀 때마다 하던 그대로였다. 언젠가 키이스는 “좀 바꿔 보지 그래?” 하고 빈정거렸었다. 물론 난 따르지 않았다. 내가 어째서 키이스의 섹스 파트너를 다양한 언어로 찬양하기 위해 고민해야 한단 말인가. 내게 무슨 득이 있다고.

차라리 키이스 본인을 찬양하라고 하면 그건 좀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

내심 생각하며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키이스에게 시선을 향했다. 그는 오늘 짙은 슈트를 입고 있었는데, 언제나 베스트까지 완벽하게 갖춘 모습이었던 것과는 달리 타이도 매지 않은 러프한 차림새였다. 셔츠의 단추마저 두어 개 풀려 있어서, 나는 자꾸만 그의 섹시한 가슴 근육에 꽂히는 시선을 온 힘을 다해 떼어 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그 위에 있는 단정한 얼굴과 강한 목을 보는 찰나 저절로 탄식이 흘러나온 것이다. 나는 놀라 황급히 숨을 멈췄다.

다행히 그런 나의 순간적인 동요는 별 무리 없이 넘어갔다. 키이스가 아예 내 쪽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짧게 갑판을 훑어본 그는 별다른 반응 없이 내게 시선을 돌렸다. 나는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지시하신 대로 경호 인원도 늘렸고, 파티에 필요한 여러 가지 준비도 순조롭습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업체에도 연락을 해 두었습니다. 술이라든가 여러 가지 필요한 것들이 소진되지 않도록…….”

“그랬겠지.”

나의 지루한 설명을 그는 한 마디로 잘라 버렸다. 곧바로 키이스는 걸음을 뗐다. 멀거니 선 나를 남겨 두고 그는 여자와 함께 가 버렸다. 씁쓸함과 민망함에 무심코 표정이 흐트러졌을 때, 갑자기 그녀가 나를 돌아보았다. 짧은 순간 나는 그만 그녀에게 내 민얼굴을 그대로 드러내고 말았다. 곧바로 표정을 바꿔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내심 조마조마했다.

혹시 눈치챈 건 아니겠지……? 괜찮아, 못 봤을 거야. 정말 잠깐이었으니까.

불과 몇 초에 지나지 않을 시간이었지만 내 머릿속은 온갖 생각으로 마구 뒤엉켰다. 그때 마침 조리장이 내게 말을 걸었다.

“연우, 잠깐 요리를 좀 확인해 주겠어요?”

“아, 네. 그러죠.”

자연스럽게 나는 자리를 떠났다. 흘긋 뒤를 보자 그녀는 벌써 키이스와 함께 사라지고 없었다.

*

*

파티 중반부까지는 특별한 점이 없었다. 손님들은 계속해서 띄엄띄엄 찾아왔고, 나는 미친 듯이 머리를 뒤적여 그들의 이름을 틀리지 않기 위해 애를 먹었다. 빌어먹게도 애써 준비한 이름표를 다는 손님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특이한 점은 파트너가 둘이나 셋 혹은 그 이상인 손님이 여럿 있다는 사실이었다. 파티에 초대받은 당사자 뒤로 줄줄이 따라오는 파트너를 보고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떠 버린 일도 있었다. 물론 곧 무표정을 가장하긴 했지만. 파트너가 여자일 때도 있었고 남자일 때도 있었으나 오메가가 월등히 많은 것만은 확실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곧 무시했다. 오늘 여기서 내가 할 일은 파티를 별일 없이 끝내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초대받은 손님이 어떤 사생활을 가지고 있든 파트너가 몇이든 그저 파티를 망칠 만한 진상을 부리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다.

나는 파티 초대객 리스트를 확인해 온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확인했다. 시간을 보니 아직 오지 않은 몇 명은 아마도 불참할 모양이었다. 따로 그 사람들을 체크해 둔 후 입구를 지키는 경호원에게 혹시 추가로 손님이 오면 꼭 내게 연락을 달라고 미리 당부를 해 두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진행은 순조로웠다. 특별히 문제를 일으키는 손님도 없었고 밤바다도 평온해 배는 흔들림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파티와 다른 점이라면 손님들이 어딘지 따로 노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대부분 파티란 친목을 나누거나 새로운 정보를 얻는 것이 주된 목적이라 여기저기서 얘기를 나누는 크고 작은 무리들이 당연히 있어야 하는데 여기는 없었다. 갑판 위에 나와 있는 사람 자체가 많지 않았다. 극알파들이 으레 내보내는 페로몬 때문에 긴장했지만 크게 영향이 없을 정도였다. 평소보다 약을 더 먹어 둔 게 아까울 지경이었다.

어쨌든 별일 없다는 건 좋은 일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갑판을 둘러보는데,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너무 적었다. 테이블 위의 음식이나 술은 남아도는데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니.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나는 그냥 모른 척 계속 마음을 비웠다. 굳이 일일이 짚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내 입장에서는 그저 사고만 나지 않으면 된다.

마침 시야에 한 커플이 다른 커플과 뭔가를 말하는 것 같더니 함께 선실로 향하는 모습이 비쳤다. 갑판 외에 라운지나 홀에도 모두 빈틈없이 준비를 해 두긴 했지만 조금 걱정이 됐다.

혹시 뭔가 모자라기라도 하면.

선실 내에는 모두 인터폰이 있으니 필요한 게 있다면 바로 준비실로 연락이 갈 것이다. 각각 파트너를 데리고 왔으니 다들 즐기러 간 건지도 모른다. 어차피 저렇게 따로 놀 거라면 왜 굳이 이런 파티를 열었는지 의문이지만.

키이스는 이런 상황을 알고 있을까?

문득 떠올랐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키이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난 일부러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여긴 대충 괜찮은 것 같고, 선실을 둘러볼까.”

굳이 입 밖으로 소리를 내어 말한 나는 평소보다 힘을 준 발걸음으로 뚜벅뚜벅 갑판 위를 걸어갔다. 슬쩍 한쪽에 놓인 긴 비치 체어 위에 앉아 있는 남자가 보였다. 오늘 파티에 초대받은 손님으로, 역시 극알파였다. 자신이 데려온 세 명의 오메가와 함께 몸 여기저기를 주무르며 핥아 대는 모습을 못 본 체하고 나는 서둘러 엘리베이터를 찾아 버튼을 눌렀다.

혼자가 되고 나자 그제야 얼굴이 화끈거렸다. 정말, 극알파들이란 수치심도 없다. 저렇게 아무 데서나 아무렇지 않게 욕망을 드러내다니.

저렇게나 섹스가 좋을까?

나는 천천히 상승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와 관계를 가진 적은 있지만 저렇게 이성을 잃을 정도로 좋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서툴렀고, 그녀는 물론 만족하지 못했다. 관계를 진전시키기도 전에 사소한 일로 싸우고 헤어지는 바람에 첫 경험은 그걸로 끝났다.

그다음에 사귄 여자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잘 맞았고 자주 어울려 다녔다. 고백했을 때 그녀 또한 흔쾌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좋았던 건 키스까지만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섹스에는 익숙해지지 않았다. 나는 하는 만큼 했다고 생각하지만 상대방은 아닐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서서히 멀어져서 아주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그것이 내 연애 경험의 전부였다. 그 뒤 공부에 쫓겨 정신이 없다가 갑작스럽게 오메가로 변이해 버렸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누구를 사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여자하고 사귀자니 어색했고, 남자하고 사귀자니 그것 또한 두려웠다.

결국 나는 풋내기 시절의 연애를 마지막으로 몇 년째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못한 것이다.

딩동.

가벼운 벨 소리에 나는 정신이 들었다. 잠시 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나는 최상층의 복도로 발을 내디뎠다. 문득 달큼한 향내가 느껴졌다. 너무나 익숙한 극알파의 페로몬 향기였다. 파티의 손님 중 누군가 이 층에 있는 것이다.

실내는 고요했다. 나는 일부러 소리 내어 으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사방엔 또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는 어색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한 묘한 기분을 느끼며 한 걸음씩 평소보다 조금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별일이 없는지만 확인하고 얼른 내려갈 생각이었다.

아.

발을 옮길 때마다 향기는 몇 배씩 진해졌다. 이렇게 강한 페로몬은 처음이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페로몬을 쏟아 내고 있었다. 어렴풋이 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는 걸 기억해 냈다. 내가 오메가로 변이했던 날, 키이스가 내보낸 페로몬에 흠뻑 절었을 때 나는 이렇게 강한 페로몬 향기에 거의 기절할 뻔했었다.

하지만 그때는 베타였다. 당시에 그나마 집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오메가보다는 영향을 적게 받았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는 그로 인해 오메가로 변이해 버렸지만.

문제는 지금은 내가 오메가라는 사실이었다. 영향은 그보다 훨씬 클 것이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도 하기 어려웠다. 아무리 정량보다 많은 약을 먹었어도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소매로 코를 가리고 무심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멀지 않은 거리에 선실의 문이 보였다. 페로몬 향기는 거기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망설였다. 그대로 돌아서서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사실 예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처음 목적대로 이 층 전체를 훑어보는 게 맞다.

그러나 주저하게 되는 것은 페로몬의 향기가 예상보다 훨씬 강했기 때문이다. 벌써 다리가 후들거려 주저앉을 것 같았다. 자꾸만 숨이 가빠졌지만 그럴수록 더 많은 페로몬이 호흡기로 흡수되어 악순환은 계속되었다.

안 되겠다.

나는 포기하기로 하고 급하게 몸을 돌렸다. 어서 여길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다른 걸 떠올릴 수가 없었다. 지금껏 규칙적으로 이어 가던 발소리를 난폭하게 울리며 복도를 뛰다시피 걸어가는데, 갑자기 뒤에서 문이 열렸다.

“가져왔어요? 이봐요, 어딜 가요?”

뒤에서 부르는 하이 소프라노에 나는 멈칫했다. 그것은 분명히 내가 아는 목소리였다. 그녀는 계속해서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내 말 안 들려요? 어딜 가는 거냐고요! 왔으면 주고 가야지.”

뭔가 인터폰으로 요구를 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최대한 숨을 몰아쉬며 뒤돌아섰다.

“애비게일 씨.”

어렵게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벌써 등 뒤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이마 한쪽에는 맥박이 몰아쳤다. 선실의 문을 열고 반쯤 몸을 내밀고 있던 그녀는 나를 알아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놀란 반응은 순간이었다. 이내 그녀는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가더니 신경질을 냈다.

“뭐 하고 있는 거예요? 왜 빈손이죠? 샴페인을 가져오라고 했을 텐데.”

“선실 내에, 준비가 되어 있었을 텐데요.”

애비게일은 기다렸다는 듯이 내질렀다.

“바보예요? 더 필요하니까 가져오라고 한 거잖아요. 그럼 지금 안 가져왔다는 거예요? 대체 여긴 뭐 하러 온 거예요? 샴페인을 가져올 것도 아니면서.”

뒤늦게 나도 내가 말을 잘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머릿속이 온통 젤리처럼 말랑거리고 흐물흐물 늘어져서 도무지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고작해야 말을 더듬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다.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어서 빨리 여기서 달아나고 싶었다. 나는 급히 사과하고 그 자리를 떠나려 했지만 그녀는 그런 나를 봐주려 하지 않았다.

“거기 서요, 누가 가라고 했어?”

날카롭게 내질러 오는 소리는 차마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컸다. 하다못해 주변이 시끄럽기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복도는 너무나 고요했고 그녀의 목소리는 아련한 에코를 남길 정도로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소매로 코를 막은 채 뒤돌아섰다.

“네, 애비게일 씨. 더 필요하신 거라도?”

간신히 사무적으로 말하자 그녀는 대답 대신 선뜻 내게로 걸어왔다. 그녀는 아슬아슬하게 중요 부위만 가린 속옷 위에 덜렁 나이트가운을 걸친 게 전부였다. 그 정도 노출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애비게일은 주저 없이 걸음을 옮겼다. 하이힐의 높고 히스테릭한 굽 소리가 또각또각 시계 침처럼 가까워졌다. 나는 꼼짝 없이 서서 그녀가 다가오기만 기다렸다.

마침내 내 바로 앞에 멈춰 선 그녀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워낙 장신인 애비게일은 높은 힐을 신은 탓인지 키이스의 키와 비슷하거나 조금 작은 것 같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애비게일은 가는 눈으로 나를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당신 말이야, 무슨 생각을 하고 여기 온 거야?”

“생각이라니, 뭘 말입니까?”

“시치미 떼지 마, 남창 같은 게.”

순간 놀랐다. 그녀가 이런 단어를 입에 담을 거라곤, 그것도 내게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당황해 눈을 깜박이자 그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너 오메가지? 아까 봤어, 키이스를 정신없이 보고 있더라. 웃겨, 무슨 말도 안 되는 꿈을 꾸고 여길 올라온 거야?”

역시 그녀는 아까 내 표정을 본 것이었다. 내가 오메가라는 걸 알고 경계심을 갖게 된 모양이었지만 완전히 틀렸다.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애초에 키이스 나이트 피트먼에게 내가 섹스의 대상이 되는 일은 죽었다 깨나도 없을 것이다. 나는 애비게일의 오해를 풀어 주고 싶었지만 숨을 쉬는 것도 어려웠기 때문에 머릿속의 말이 잘 정리가 되질 않았다.

“오해입니다, 애비게일 씨. 전 그저 손님들에게 불편한 게 없는지 둘러보러…….”

“하!”

그녀의 히스테릭한 코웃음이 내 말을 가로막았다. 애비게일은 무섭게 눈을 치뜨며 내게 욕설을 내뱉었다.

“핑계를 대려면 그럴싸하게 대야지, 이 도둑고양이야! 누굴 바보로 보고 그런 헛소리를 지껄여?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다니, 내가 있는데 키이스가 너 같은 걸 상대해 줄 줄 알아? 어림도 없는 생각을 하네. 너 내가 우스워? 어디서 감히 그따위 수작질을……!”

“지금 뭘 하고 있어.”

낮은 목소리가 애비게일의 하이 소프라노를 가로질렀다. 그때까지 나를 몰아세우며 때릴 듯이 고함을 질러 대던 애비게일이 순간 뒤를 돌아보았다. 열린 선실 문 사이로 문틀에 기대어 서 있는 키이스의 모습이 보였다. 애비게일은 당황한 듯 입을 가렸고, 나는 멍한 눈을 깜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 샤워를 한 듯 그의 머리칼은 아직 젖어 있었다. 짙은 머리카락은 불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을 내고 천천히 흘러내린 물방울이 그의 뺨을 거쳐 턱으로, 바닥을 향해 일직선으로 떨어졌다. 느슨하게 묶은 목욕 가운 사이로 내가 그토록 외면하려 애썼던 가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피연한 보라색 눈이 긴 속눈썹 아래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탄탄하게 근육이 잡힌 두꺼운 가슴과 아직 젖어 있는 목덜미에 나는 무심코 마른침을 삼켰다. 나의 절박한 움직임을 그는 곧바로 눈치챘다. 물론 고맙게도 내 속마음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내 비서를 붙잡고 뭘 하고 있는 거야?”

평소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듯하면서도 묘하게 짜증이 섞인 음성에 애비게일은 당황해 서둘러 변명했다.

“내 말 좀 들어 줘요, 키이스. 이 남자가 무슨 시커먼 속셈으로 여길 온 건지. 보세요, 빈손이잖아요?”

“그런데?”

키이스는 귀찮아하는 기색을 역력히 드러냈다. 애비게일은 더더욱 초조해져 다급하게 나를 가리켰다.

“당신을 유혹하려고 한 거라고요. 당신의 러트 기간이 가까워졌으니까 그걸로 어떻게 해 보려고 한 거겠죠! 감히 누굴 속이려고!”

마지막 말은 기세등등하게 덧붙여졌으나 키이스의 반응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비웃듯이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도대체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거야? 미치기라도 했어?”

“네, 네?”

키이스의 날카로운 음성에 애비게일은 멈칫했다. 키이스는 거칠게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내뱉었다.

“저건 그저 내 비서야. 내가 남자랑 잘 것처럼 보여? 정말 어이가 없군.”

“하, 하지만.”

애비게일은 더듬거리며 항의했다.

“하지만, 오메가잖아요.”

키이스가 이를 갈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남자잖아.”

애비게일은 그제야 할 말을 잃고 머뭇거렸다. 눈치를 보는 그녀에게 키이스가 말을 이었다.

“오메가건 뭐건 상관없어, 연우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것 때문에 여길 온 게 아니라고.”

‘그렇지?’ 하듯이 바라보는 시선에 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손님들이 모두 흩어지셔서 혹시 필요하신 거라든가 문제가 있나 살펴보려고…….”

키이스는 내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잘라 버렸다.

“들었지? 그럼 이제 시끄럽게 굴지 말고 들어와. 어이가 없군,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 건지.”

그는 정말로 나를 신뢰하고 있었다. 설령 내가 애비게일의 생각대로 꿍꿍이를 가지고 여기 왔다고 해도 절대 그런 건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 생각의 근거는 곧 밝혀졌다.

“난 남자와는 절대 자지 않아. 그리고 연우는 주제 파악을 할 줄 알지.”

페로몬에 절어 있던 뇌가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나는 숨을 멈춘 채 그를 바라보았다. 얼마간 떨어진 거리에 서 있던 키이스가 여전히 나를 응시하며 물었다.

“안 그래?”

애비게일이 숨을 죽이고 나를 훔쳐보았다.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나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네.”

간신히 숨을 뱉으며 나는 덧붙였다.

“물론이죠.”

미소까지 지을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그럴 여력은 없었다. 마침 뒤에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달그락거리는 카트의 소리가 이어졌다. 애비게일이 말한 샴페인을 가지고 직원이 올라온 것이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애비게일의 태도가 돌변했다.

“달링, 미안해요. 내가 그런 터무니없는 오해를 하다니 무슨 짓을 저지른 거람. 오 제발, 용서해 줘요. 뭐든지 할 테니. 나를 노예처럼 바닥에 굴려도 좋아요…….”

그녀가 설령 안 된다고 말해도 키이스는 자신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녀를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진흙탕에 처박을 것이다. 굳이 아무 의미 없는 허락의 말을 하며 애비게일은 키이스에게 달라붙었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긴 팔이 키이스의 목을 끌어안고, 선뜻 뛰어오른 두 다리가 키이스의 허리를 휘감았다. 그대로 선실 안으로 사라지는 둘의 모습을 나는 그 자리에 선 채 보기만 했다. 이젠 눈앞까지 흐릿할 지경이었지만 이게 페로몬의 영향인지 아니면 다른 것 때문인지 나는 구분할 수 없었다.

“저, 연우. 괜찮으세요?”

걱정스럽게 묻는 직원의 얼굴에 나는 그제야 내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네, 괘, 괜찮, 습니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위기는 급격하게 찾아왔다. 나는 쓰러질 것 같은 현기증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하지만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온 힘을 다해 버티고 서서 나는 말했다.

“난, 내려갈 테니까, 피트먼 씨에게, 음, 료, 아니, 샴, 페인, 을, 드리고, 더 필요하신 건, 없었습, 니까? 혹시, 더 없는, 지.”

“연우, 알았으니까 그만 내려가요. 쓰러질 것 같아요.”

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베이터까지가 너무 멀었다. 약 같은 건 아무 소용 없었다. 고작 두 배 먹은 것 가지고 안심하다니. 세 배, 다섯 배, 아니, 열 배는 더 먹었어야 했다. 나는 다리를 질질 끌며 걸었다.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떠오르는 것은 단 하나, 억제제뿐이었다.

당장 내려가서 내 브리프 케이스를 찾아야 한다. 약을 꺼내서, 먹고, 진정을 할 동안, 아, 누구에게 부탁을 하지. 그래, 휘태커, 휘태커 씨에게. 브리프 케이스, 그게 어디 있더라. 어디에 뒀었지? 스태프들이 짐을 보관해 둔 곳, 지하에. 그래, 지하였지. 지하가 몇 층이더라? 지금 여기가 몇 층이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어떻게 버튼을 누른 모양이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고, 고철 덩어리가 잠깐 흔들리더니 아래로 몸을 움직였다. 벽에 온몸을 기대고 섰다. 주저앉고 싶었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못 일어날 것 같았다. 눈을 감은 채 엘리베이터가 지하에 도착하기만 기다렸다.

딩동.

“하아…….”

마침내 엘리베이터의 도착 음이 들렸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이제 약만 먹으면 된다. 진정될 때까지는 휘태커 씨에게 부탁을 하고…….

계획은 간단했다. 너무나 단순해서 실패하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하지만 거기에 커다란 함정이 있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서서히 열리는 엘리베이터의 문 너머로 환하게 펼쳐진 광경에 나는 그대로 굳어졌다.

지하에는 거대한 풀장이 있었다. 갑판에 있는 것보다 두 배는 큰 것이었고, 따라서 수용할 수 있는 인원도 훨씬 많았다.

……!

갑판에서 사라졌던 극알파들이 대부분 거기에 모여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내 온몸으로 그들의 페로몬이 쏟아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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