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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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떠 보니 아득하게 높은 천장이 보였다. 그제야 나는 내가 쓰러져서 바닥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나는 더 이상 생각을 떠올릴 수조차 없었다. 그저 가쁜 숨을 쉬며 그 자리에 누워 헐떡거릴 뿐이었다. 멍하니 열린 시야에 그들의 모습이 비쳤다. 정확히는 뒤엉켜 있는 모습이.

그곳은 난장판이었다. 그들은 열락에 빠진 듯 신음과 비명을 번갈아 내지르고 있었지만 내 눈에는 아수라장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나의 오메가를 둘러싸고 여러 알파들이 몸 여기저기에 성기를 넣고 문지르거나 알파 하나에 몇 명의 여자와 오메가들이 달라붙어 온몸을 핥고 애무하는 모습, 또는 몇 명의 알파와 몇 명의 오메가가 서로서로 엮여 성기를 빨고 아래를 쑤시고 주무르는 광경이 여기저기 흔하게 널려 있었다.

그제야 나는 이 파티의 정체를 깨달았다.

극알파들의 난교장.

마음껏 페로몬을 쏟아 내고 바닥까지 타락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소.

흐릿한 시야에 샴페인 병을 통째로 들이켜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초대받은 손님인 극알파로, 그 장소의 다른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완벽한 나체였다. 그는 위로는 샴페인을 꿀꺽꿀꺽 마시며 아래로는 페로몬에 눌려 완전히 넋이 나가 버린 오메가의 머리를 움켜쥔 채 자신의 성기를 물리고 있었다.

아직 약간의 이성이 남아 있던 나는 그 모습을 보자 순간 역겨워졌다. 대체 지금 뭘 먹이고 있는 걸까. 상상하는 것조차 끔찍했다. 발기한 성기를 빨아들이며 목울대를 울컥거리는 모습을 보자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을 감아 버렸다. 하지만 눈을 감는다고 상황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그게 다였을 뿐.

그러나 이미 늦었다. 아스라이 감기는 시야 너머로 샴페인을 마시던 남자가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불행히도 그는 나를 발견했다.

천천히 오르내리는 눈꺼풀 너머로 남자가 뭔가를 말하는 것이 보였다. 아닐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흐리멍덩했다. 확실한 것은 지금 상황이 결코 좋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안간힘을 써서 몸을 일으켰다. 남자가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지만 그것은 당연했다. 이런 내 꼴을 본다면 그 누구도 급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차마 일어서지 못하고 엉거주춤 주저앉은 채 뒤로 물러났다. 엘리베이터에 다시 타야 한다. 손을 뒤로 빼 벽을 더듬었다. 버튼을 눌러야 했지만 벌써 남자의 눈에 사로잡혀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극알파들이 내뿜는 페로몬에 질식할 것 같았다. 멍한 머릿속으로 어째서 이 남자들이 하필 지하의 수영장을 택한 것인지 납득이 됐다. 밀폐된 너른 공간에서 마음껏 뿜어내는 페로몬이 오메가들을 미치게 만들었다. 여기저기 페로몬에 취해 자위를 하고 바닥을 기는 오메가들이 무수히 많았다. 미리 약을 먹어 두지 않았다면 나도 진작에 저런 꼴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지금 간신히 의식을 붙잡고는 있지만 언제 저렇게 될지 모른다. 점차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고, 이성보다 본능이 먼저 그것을 경고해 왔다.

“……!”

뒤늦게 내가 또다시 의식을 놔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그런 걸 생각할 때인가? 정신 차려!

나는 무거운 손을 필사적으로 움직여 버튼을 찾았다. 뭔가 이물감이 느껴지고, 힘을 주자 안으로 쓱 들어가는 느낌이 났다. 등 뒤로 희미하게 기계가 움직이는 듯한 진동이 느껴진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 남자는 벌써 지척까지 와 있었다. 나는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벽을 잡고 주춤주춤 일어섰다. 눈을 떼면 바로 당할 것 같았다. 마치 맹수와 대치하듯 나는 그렇게 그를 바라보는 채로 똑바로 섰다.

남자가 손을 뻗는 것이 보였다. 어깨를 붙잡힌 순간 섬뜩한 감각에 눈을 번쩍 떴다.

하아, 하아.

자꾸만 가빠지는 숨을 억지로 누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남자가 가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키이스의 비서 맞지?”

동굴 속에서 말하는 것처럼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 고막이 잘못된 건지도 모른다. 나는 애써 평정을 가장하고 대답했다.

“맞습니다. 혹시, 필요하신 거라도?”

내 목소리가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왔다. 신기하게도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최대한 미소를 지어 보이려 애썼다.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여 내 목덜미로 코를 가져왔을 뿐이다. 흡, 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와 함께 차가운 피부가 목을 스치자, 오싹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지나갔다. 그때 남자가 귓가에서 속삭였다.

“오메가구나, 너.”

낮은 음성에 이어 남자가 내 어깨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줬다. 곧바로 나는 바닥에 널브러졌다. 쿵, 하는 소리가 아련히 들려왔지만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멍하니 눈을 깜박이며 올려다보자 발기해 있는 남자의 성기가 시야에 들어왔다.

“뭐 하는 거야? 거기서.”

다른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마찬가지로 벗고 있었고, 또한 초대받은 극알파였다. 좋지 않았다. 그들이 하나둘씩 내 주변에 모여들고 있었다. 정말로 좋지 않았다.

“키이스의 비서가 오메가라더니, 정말이었네.”

비웃는 것 같은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까 입구에서 봤던 녀석이잖아? 이 녀석이 그 오메가야?”

“키이스 자식, 오메가라도 남자랑은 안 한다고 헛소리를 지껄이더니 역시 거짓말이겠지?”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당연하지, 이 새끼 얼굴을 봐. 남창이라고 써 있잖아.”

순간 멈칫했다. 불길한 예감이 당장 현실로 이루어질 것 같았다. 바닥에 쓰러져 어떻게든 이 자리를 벗어나려 바르작거리는 나를 내려다보며 남자들은 느긋하게 음탕한 말을 지껄여 댔다.

“사실 아까 입구에서 봤을 때부터 꼴리긴 했어.”

“여기 왔다는 건 이 새끼도 그럴 마음이 있다는 거지.”

“오메가들이 밝히는 거야 본능이니까.”

“그런데 괜찮아? 키이스가 쓰는 구멍 아냐?”

누군가 걱정스러운 듯 묻자 곧바로 그를 비웃는 음성이 뒤따랐다.

“키이스는 오늘 데려온 여자가 따로 있잖아. 게다가 평소에 그렇게 남자랑은 안 잔다고 떠들어 대던 녀석이니 우리한테 뭐라고 말도 못 할걸.”

“그렇지! 맞는 말이야. 하하하하.”

남자들은 나를 둘러싸고 박수를 쳐 대며 웃었다.

하아, 하아.

스멀거리며 올라오는 공포와 전신을 짓누르는 페로몬에 점점 더 의식이 아득해졌다. 여길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나는 덜덜 떨며 바닥을 기었다. 엘리베이터는 아직 오지 않았나? 온다고 해도 달아날 수 있을까?

내가 이 페로몬을 끝까지 거부할 수 있을까……?

마음 한구석에 의문이 들었을 때, 누군가 필사적으로 기어가던 내 뒷덜미를 잡아 내던졌다. 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한쪽 벽에 그대로 전신을 부딪혔다가 바닥에 쓰러졌다.

“쿨럭, 쿨럭.”

반사적으로 기침이 나와 나는 온몸을 들썩였다.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어딜 가려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누구부터 할지 정해 줄 테니까.”

곧바로 불만이 제기됐다.

“농담이겠지? 지금 순서라도 정하겠다는 거야? 네가 박을 동안 우린 그럼 뭘 하고 있으라고?”

“어쨌든 전부 다 한 번에 넣지는 못하잖아.”

“왜 못 해?”

누군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난 세 개까지 한 번에 넣어 봤어.”

“와우.”

“가능해? 둘을 한꺼번에 넣는 건 해 봤지만.”

놀란 감탄사가 이어지자 그는 거만하게 되물었다.

“팔도 들어가는데 페니스 세 개를 못 넣겠어?”

“그건 좀 역겨운데. 그걸 받아 낸 오메가도 대단하군.”

“이봐, 그걸 말이라고 해? 당연히 죽었지.”

남자의 말에 모두는 그것이 대단한 농담이라도 되는 것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들이 죄다 미친 것 같았다. 자신들의 페로몬에 스스로가 취해 뇌가 이상해진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런 대화를 나누며 저렇게 웃어 댈 수 있을까. 그러면서 그들은 너무나 태연하게 말을 나눴다. 마치 날씨를 얘기하듯 여상하게.

“어쨌든 키이스의 비서잖아? 죽이는 건 곤란하니까 적당히 하자고. 한 번에 셋이면 되나? 둘은 아래에 넣고 하나는 위를 쓰고.”

“나쁘지 않네.”

태평한 담소 사이로 거친 음성이 난데없이 끼어들었다.

“씨발, 지금 무슨 정상 회담 해? 너희들끼리 순서를 정하든 말든 알아서 해, 난 시작할 테니까.”

그때까지 간신히 일어선 게 전부였던 나는 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는 알몸의 남자를 경악에 가까운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머릿속에는 방금 전 그들이 나눴던 대화가 어지럽게 떠돌아다녔다.

그것은 내가 생각지도 못한 힘을 끌어내게 만들었다. 이대로 있으면 죽을 것이다. 아니, 죽진 않더라도 최소한 그 근처까진 갈 것이다. 물론 난 그렇게 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이, 어딜 가는 거야?”

웃음기 섞인 음성으로 누군가 소리쳤다. 필사적으로 달아나려고 휘청휘청 뛰는 나를 비웃는 것이었다. 와르르 웃음소리가 이어졌지만 누구도 뒤를 쫓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조롱하며 휘파람을 불어 댔다.

“조심해, 넘어지겠어.”

“켄, 뭐 하는 거야? 그냥 해 버려.”

“달아나, 빨리! 어서 달려가라고!”

웃고 떠들며 박수를 쳐 대는 소리가 정신을 어지럽혔다. 그들에게는 놀이일 뿐이었으나 나는 절박했다. 멀지 않은 곳에 오메가를 피투성이가 되도록 때리며 강간하는 모습을 보자 더더욱 공포에 질려 버렸다.

드디어 엘리베이터 앞까지 도착했다. 나는 힘껏 손을 뻗어 연거푸 버튼을 눌렀다. 바뀌는 숫자는 곧 도착할 거라는 사실을 알려 줬다. 조금만 버티면 된다. 조금만.

“……아악!”

갑자기 머리채를 붙잡혀 나는 비명을 질렀다. 그대로 남자는 나를 바닥에 처박았다. 사정없이 재킷을 끌어 내리고, 뒤이어 셔츠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셔츠가 찢어졌다. 몸을 가리거나 반항할 여유조차 없었다. 한꺼번에 여러 개의 손이 덮쳐 와 내 팔을 붙잡고 입을 틀어막았다. 온 힘을 다해 다리를 흔들어도 봤지만 역시나 소용없었다. 사방에서 내 몸을 내리누르고 꼼짝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신음 소리조차 낼 수 없을 정도로 입을 세게 틀어막혀, 나는 간신히 코로만 거친 숨을 들이켤 뿐이었다. 그와 함께 달큼하고 진한 페로몬이 여과 없이 그대로 내 안에 들어왔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나를 결박한 채 페로몬을 쏟아 낸 것만으로도 나는 모든 의지를 잃어버렸다. 마지막 남았던 이성마저 날아가고, 눈앞이 흐릿해졌다. 나를 누르고 있던 힘들이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더 이상 불필요하게 나를 제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는 사지를 늘어뜨린 채 몽롱한 시선으로 나를 둘러싼 남자들을 올려다보았다. 누군가 내 바지를 벗기는 것이 느껴졌다. 순간 차가운 감각이 엉덩이로 느껴져서, 나는 내가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물론 그 차가움에도 곧 무감각해졌지만.

누군가 내 머리칼을 붙잡아 일으켰다. 흐릿하게 두피가 당겨지는 감각이 있었지만 그것뿐이었다. 개처럼 네 발로 나를 엎드리게 한 남자가 내 입으로 뭔가를 가져왔다. 입술에 닿고 나서야 그것이 성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쓴맛이 어렴풋이 느껴져서 나는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머리칼이 꽉 붙잡힌 상태라 그저 입술만 꾹 다문 채 고개를 조금 흔든 게 전부였다.

“이 새끼가.”

억지로 내 입에 넣으려다 실패하자 남자는 욕설을 내뱉으며 가차 없이 내 뺨을 후려쳤다. 눈앞이 번쩍하더니 순간적이나마 정신이 돌아왔다. 남자는 또다시 내 입술에 페니스를 밀어붙였다. 어쩔 수 없이 강제로 입을 벌리자 곧바로 그것은 목구멍까지 쑤셔 들어왔다.

“……으, 읍.”

욕지기가 격하게 올라왔지만 토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안간힘을 써서 그것을 밀어내려 애썼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그를 자극했을 뿐이었다. 남자가 깊은 신음을 지르자 뒤에서 누군가 내 허리를 잡는 것이 느껴졌다. 그 순간 나는 놀라 반사적으로 이를 세우고 말았다.

“……아아아악!”

처절한 비명 소리가 실내에 울려 퍼졌다. 갑자기 분위기가 돌변했다. 여기저기서 당황해하며 욕설을 뱉어 내고 우왕좌왕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이것이 기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를 떼어 내려고 남자는 발악을 했지만 나는 힘껏 문 채로 놓지 않았다. 뭔가 뜨끈한 것이 입가를 타고 흐르는 것 같았다. 정액은 아니었다.

“그만둬, 그만두라고! 연우!”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며 고함을 질렀다. 그는 계속해서 내게 소리쳤다.

“그만하라니까! 이러다 끊어지겠…… 맙소사, 켄!”

간신히 그가 나를 떼어 놓았을 때, 남자는 하반신이 흠뻑 피로 젖어 반쯤 의식이 나가 있었다.

* * *

후우…….

길게 뱉은 담배 연기가 일직선으로 날아가다 어느 순간 허공에서 흩어졌다. 나는 몽롱한 시선으로 그것을 지켜보았다. 더 이상 머리가 아플 정도의 진한 페로몬은 없었다. 희미하게 주변을 떠도는 향이 어렴풋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모포를 몸에 두른 채 침대 위에 앉아 한곳을 응시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키이스가 담배를 피우며 의자에 앉아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내 머릿속도 텅 비어 있었으니까.

“왜 그랬어?”

한참 만에 그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멍한 눈을 깜박였다. 키이스는 어딘지 기분이 나빠 보였다. 뜻밖의 사고로 파티가 난장판이 됐으니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섹스 도중에 방해를 받아 욕구가 쌓인 탓일 수도 있다. 둘 다인지도 모르겠다. 멍하니 이런저런 생각을 두서없이 떠올리고만 있는데, 키이스가 짜증스러운 듯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왜 이런 난리가 났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군. 실망이야, 연우. 넌 맡은 일만큼은 완벽하게 해내는 훌륭한 비서라고 생각했는데.”

“……죄송합니다.”

나는 어렵게 사과했다. 뒤늦은 떨림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내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모포 안으로 손을 감추고 바짝 마르는 입술을 열어 나는 변명했다.

“예상 못 했던 상황이…… 벌어져서. 제가, 더 주의를 했어야, 했는데.”

후우, 하고 다시금 키이스가 한숨처럼 긴 담배 연기를 뱉어 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분명히 상황을 다 알 텐데 저런 질문을 하다니, 혹시 내 입장을 들어 보려고 하는 건가?

처음으로 나는 그에게서 배려심을 느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것을 참고 입을 열었을 때였다.

“그냥 적당히 빨아 주고 원하는 대로 받아 줬으면 됐잖아, 대체 왜 그런 거야? 뭐 잘못 먹기라도 했어?”

이어지는 비난에 나는 입을 벌린 채로 굳어져 버렸다. 눈만 덩그렇게 뜨고 있는 내게 키이스는 계속해서 짜증스럽게 말을 이었다.

“별것도 아닌 일 가지고 유난스럽게. 켄의 페니스가 절반 가까이 잘렸다고, 하마터면 불구가 될 뻔했어. 꽤 오래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겠군.”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내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혹시 내가 꿈을 꾸나? 아니면 환청을 듣고 있는 건가?

지금 키이스가 나한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는, 저를…… 때렸어요.”

나는 간신히 소리를 내어 말했다.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그것까지 제어할 수는 없었다.

“때리고, 강간하려고 해서, 그래서 저는, 억지로, 저한테, 그래서.”

“그런데?”

키이스는 날카로운 음성으로 내 말을 가로막았다. 또다시 말문이 막히고 만 내게 그는 가차 없이 내뱉었다.

“그게 뭐가 그렇게 대단한 일이냐고. 오메가들은 항상 그러잖아, 싫은 척해 봤자 넣기만 하면 바로 좋아서 달라붙던데 대체 넌 왜 그래? 왜 아닌 척해? 넌 그래도 솔직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식으로 날 실망시키다니. 정말 기가 막혀서 할 말이 없어.”

고개까지 젓는 그를 보자 그냥 말문이 막히고 머리가 텅 비어 버렸다. 순간 눈가가 뜨거워졌지만 입술을 깨물고 참았다. 모포 안에서 움켜쥔 주먹이 아까와는 다른 이유로 부들부들 떨렸다.

하, 하고 고개를 젖히자 올라왔던 수분이 가까스로 내려갔다. 나는 잠자코 숨을 가다듬었다. 원래 이런 남자였다. 기대할 것도 실망할 것도 없었다. 애초에 파티의 목적 같은 걸 제대로 알려 준 적도 없었고, 내가 무슨 꼴을 당하건 그건 내 사정이고 내가 알아서 처리해야 하는 문제였다.

키이스에게 있어서 유능한 비서란 바로 그런 거니까.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 그가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도록 그렇게 일해 왔다. 결코 키이스가 나로 인해 어떤 불편도 느끼지 않도록. 내가 알아서 처리하고 내가 알아서 모든 걸 해결했다. 뒤에서 무슨 꼴불견이 벌어지든 그의 앞에서는 화려하고 정돈된 모습만이 보이도록.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이거다.

지금까지 얼마나 애써 왔든 아무 소용 없었다. 단 한 번의 실수만으로 저 남자는 나를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 무대 뒤의 난장판을 내가 봐야 하는 거냐고.

키이스가 담배를 피우며 말했다.

“어쨌든 피해 보상은 내가 할 테니까 넌 병원에 가서 켄에게 사죄하고…….”

“그만두겠습니다.”

순간 키이스가 담배를 입으로 가져간 채로 동작을 멈췄다. 시선만을 옮겨 나를 바라보는 그에게 나는 평소처럼 사무적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 파티를 망친 점은 사과드리겠습니다. 보상은 사장님께서 대신 해 주신다니 그럼 안심하고 떠나겠습니다.”

키이스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저렇게 넋이 나간 표정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다른 때라면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겠지만 지금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는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간신히 침대 밖으로 발을 내밀어 똑바로 섰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럼 이만 안녕히.”

몸에 밴 습관대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후 나는 선실을 나왔다. 맨발이라는 사실은 복도에 나온 다음에야 깨달았다. 키이스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비틀비틀 복도를 걸어가며 나는 아직도 그가 그런 표정으로 앉아 있을까 문득 생각했다. 아무래도 상관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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