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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엄마, 결혼은 아직 생각이 없다고요.”
나는 벌써 몇 번이나 했던 말을 또다시 반복했다. 수화기 건너편에서 초조한 음성이 들려왔다.
[하지만 연우야, 너도 이제 슬슬 나이가 되어 가잖니. 만나는 사람이라도 있어야 안심을 하지.]
“그러니까.”
나는 감정을 누르기 위해 한 차례 깊은숨을 삼켰다 내쉬었다.
“지금은 생각이 없어요.”
[생각이 없어도 사람은 만나 봐, 처음부터 결혼하겠다고 작정하고 만나니? 아무나 만나다 보면 이 사람이구나, 하는 거지.]
어머니는 잠시 눈치를 보는 듯 사이를 두었다 말했다.
[넌 저기, 더 노력해야 할 테니까.]
내가 뭔가 더 말하기 전에 어머니는 다급하게 말을 뱉었다.
[네가 오메가로 변이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걱정 하겠니? 네가 계속 베타였으면 좀 좋아, 하다못해 알파로 변이하지 그랬니. 너 좋아하는 여자애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그렇게 잘생기게 낳아 줬더니 하필이면.]
“엄마, 엄마!”
나는 더 이상 짜증을 참지 못하고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이미 돼 버린 거 그런 말씀하셔도 별수 없어요. 제가 원해서 된 것도 아니고.”
거기다 외모는 관계없는 것이고 부모 눈에 자식은 누구나 잘생기고 예뻐 보인다는 말을 간신히 목 안으로 삼켰다. 세상에 미남 미녀가 얼마나 많은데. 거기다 알파와 오메가들은 기본으로 외모가 좋으니 난 그중에서도 더욱 보잘것없는 존재일 게 분명했다.
나의 거친 음성에 어머니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거기다 꼭 알파와 결혼할 필요는 없잖아요. 베타도 있고, 오메가라도 좋다고 할 여자도 어딘가는 있겠죠.”
[여자랑 결혼하면 아이를 못 낳잖니.]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받았다.
[결혼을 하면 당연히 애를 가져야지. 그러려면 알파하고 결혼을 해야 하잖니? 여자 알파는 얼마나 찾기가 힘든데, 그렇다고 여자 베타나 오메가와 결혼하면 애도 못 낳고. 괜찮은 베타 남자를 얼른 찾아봐야지, 그나마 그쪽이 쉬울 게 아니니? ……알파라면 모를까 베타라니. 네가 남자와 결혼하는 것도 기가 막힌데. 차라리 연희나 연주가 변이했더라면 좋았을걸, 왜 하필 네가…….]
갑자기 그녀의 말이 뚝 끊기고 다른 음성이 끼어들었다.
[오빠, 잘 지내지? 별일 없고? 뭐 필요한 건 없어? 간식 같은 거 보내 줄까?]
속사포처럼 쏟아 내는 음성에 긴장이 풀렸다. 무심코 웃음을 지으며 나는 물었다.
“괜찮아. 너야말로 필요한 거 없어?”
[난 많지, 당연히! 아마존에 내 위시리스트 좀 봐 줘.]
키득거리며 여동생은 넉살 좋게 요구했다. 나는 그러겠다고 약속한 후 몇 가지 안부를 물었다. 동생은 시원시원하게 답하더니 곧 화제를 접었다.
[응, 알았어. 오빠도 고생 많네. 힘내, 월급 많이 받으면 그만큼 고생도 많이 하는 거지 뭐. 누가 쉽게 돈 주려고 하나. 그럼 쉬어, 끊는다. 바이 바이!]
[얘 연희야, 전화 나한테 바꿔 줘야지! 연.]
뒤늦게 어머니의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지만 전화는 그냥 뚝 끊어져 버렸다. 그제야 나는 막혔던 숨을 깊이 내뱉을 수 있었다.
처음 오메가로 변이한 것을 고백했을 때 어머니는 하얗게 질려 말을 하지 못했다. 그녀가 기절이라도 할까 봐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앉아 있던 자리에서 한참 동안 일어나지 않고 밭은 숨을 몰아쉬는 모습은 딱 기절하기 직전의 그것이었지만.
아버지 역시 충격에 말을 잇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가장 빨리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수습하러 나선 것은 고맙게도 첫째 동생인 연희였다.
<그럼 오빠, 히트사이클 때는 어떻게 해? 내 친구들은 약 먹고 집에서 안 나오던데. 오빠도 그래?>
<……비슷해.>
어렵게 대답하자 그녀는 그렇구나, 하고 이내 화제를 돌렸다.
<오빠는 어차피 계속 미국에서 살 거지? 그럼 뭐 딱히 문제 될 거 없지 않나? 그런 쪽 약이라든가 관리 같은 건 미국이 더 잘돼 있잖아.>
<딱히 그렇지도 않아. 어떤 건 더 낫고 어떤 건 아니고…….>
당시 막냇동생은 아직 어려서 우리가 무슨 말을 주고받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내 목을 끌어안고 어리광을 부리며 꺄르륵거리는 웃음소리를 낼 뿐이었다. 하나뿐인 아들이 오메가가 되었다는 사실에 어머니와 아버지는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고, 체질이 몸에 익을 때까지 1년간 휴학했던 나는 그동안 집 안에 틀어박혀 꼼짝하지 않았다.
그것은 다른 의미로 내게 고통이었다. 집안 분위기는 무거웠고 부모님은 시선을 피하거나 한숨을 내쉬기 일쑤였다. 동생들만이 위로가 돼 주었지만 변화한 몸에 적응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힘겨웠다. 약을 먹는다거나 몸을 진정시키는 것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후 간신히 다시 학교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는 눈에 띄게 안심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그 후로 집요하게 내 결혼을 강요했다. 처음에는 주변에 괜찮은 사람 없느냐부터 시작하더니 점차 강도가 심해져 이제는 아주 노골적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지만 과연 내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다들 이렇게 떠밀려서 결혼하게 되는 거겠지.
잠시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 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냉장고를 열어 보니 텅 비어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1주일 내내 집 안에만 있었으니.
나는 냉장고 문을 훤히 열어 둔 채 그 앞에 주저앉아 한동안 넋을 잃고 있었다. 그런다고 상황이 달라질 일은 없었다.
전날 마지막 즉석식품을 데워 먹으면서 내일 나가자, 하고 미뤘던 결과가 이렇게 눈앞으로 다가왔다.
“하아.”
고개를 푹 숙인 채 한숨을 내쉬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나가서 뭐라도 사 와야 하는 것이다.
평생 집 안에만 있을 수도 없으니.
나는 용기를 내어 나가 보기로 결심했다. 사실 별거 아니다. 내가 한 발만 내디디면 된다. 단지 그 한 발이 어려울 뿐. 계속 이렇게 집 안에만 있으면 나가는 게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자꾸만 밖으로 나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 나는 결심을 하고 몸을 움직였다.
준비를 하는 데만 한 시간이 넘게 걸린 다음에야 비로소 나는 현관 앞에 섰다. 페로몬 억제제도 먹었고, 혹시 몰라 몇 알을 종이에 싸서 주머니에 넣어 뒀다. 만약의 경우엔 바로 털어서 입에 넣을 수 있도록. 경보기도 챙기고, 호루라기도 챙기고, 혹시나 싶어 커터 칼까지 챙긴 다음에야 비로소 조금은 자신이 생겼다. 총을 사 뒀으면 좋았을걸, 뒤늦은 후회가 들었지만 지금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끼이…….
몇 번의 실패 끝에 간신히 문을 열었을 때, 해는 뉘엿뉘엿 저물 준비를 하고 있었다.
*
*
회사를 그만둔 지 1주일이 지났다. 나는 운전석에 앉아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며 의미 없이 핸들을 톡, 톡 천천히 두드렸다. 슬쩍 시선을 움직여 차 문이 잠겨 있는 것 또한 빈틈없이 확인했다.
바보 같은 짓 좀 그만해, 다 끝난 일 가지고.
상담을 받아 볼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곧 그만뒀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다. 무엇보다 실직한 상황에서 상담이라니. 당장 다음 달부터 대책이 시급한데 어떻게. 대출이나 생활비·집에 보낼 돈 등등과 현재 통장에 모아 둔 돈을 떠올리며 머리가 아파졌을 때, 신호가 바뀌었다.
퇴직을 선언한 그날 밤은 직원의 도움으로 어찌어찌 집까지 왔다. 솔직히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집 안에 들어오자마자 모든 자물쇠를 채우고 문 앞에 의자까지 갖다 둔 뒤 수면제를 먹고 정신없이 잤다. 저녁이 되어서야 정신이 들어서 간단히 아무거나 만들어 허기를 때운 후 다시 잠들었다.
그렇게 꼬박 주말을 보내고 난 후, 동면하듯이 잠들어 있던 나는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일어나 준비를 시작했다. 출근 준비를 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나 정작 문제는 집을 나서는 것이었다.
현관 앞에 서서 몇 번을 망설이다 겨우 문을 열었다. 택시를 부를까도 싶었지만 도저히 타인과 꽉 막힌 공간에 단둘이 있을 자신이 없었다. 혹시나 기사가 알파라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운전석에 앉아 몇 번을 문이 잠긴 것을 확인하고 나서도 회사에 가기까지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사방이 둘러싸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훤히 맨몸을 드러낸 것 같은 초조함에 자꾸만 입 안이 말라 왔다. 간신히 회사에 도착했을 때는 에어컨을 최대로 틀고 갔는데도 이마 한쪽에 땀이 맺혔을 정도였다.
<안녕하세요, 연우.>
출근과 동시에 활기차게 인사를 한 엠마는 자리를 정리하고 있는 나를 보고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 하고 있는 거예요? 사무실 이동이라도 있나요?>
<아뇨.>
나는 평소처럼 대답했다.
<퇴직하게 돼서 제 짐을 빼는 겁니다.>
<퇴직요?>
<퇴직이라고요?>
마침 출근하던 다른 직원이 엠마의 뒤에서 덩달아 소리쳤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계속해서 서랍의 물건을 빼냈다. 사장실과 연결된 내 사무실의 물건은 벌써 모두 정리한 후였다. 남은 건 비서실의 정리뿐이었다.
사무실이 따로 있었던 탓에 여기서 꼭 챙겨야 할 물건 같은 건 그다지 보이지 않았다. 쓸모없는 건 버리고 절반은 책상 위에 올려놓은 뒤 직원들을 돌아보았다.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가져요. 없으면 다 버려 주고.>
<연우!>
엠마는 물론 다른 직원도 당황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나를 쳐다봤다. 마침 들어온 또 다른 비서가 수상한 분위기에 머뭇거리며 문을 닫았다. 나는 그녀를 모른 체하고 말을 이었다.
<엠마, 내가 없으면 당신이 팀장이니까 인계를 주겠습니다. 앞으로는 사장실과 연결된 내 사무실이 당신 거예요. 물건은 모두 거기로 옮기고 그 자리를 쓰면 됩니다. 필요한 건 뭐든 구입하세요. 경비로 처리가 될 겁니다. 대략적인 건 모두 알고 있을 테니 급한 것, 중요한 것 위주로 알려 주죠.>
<연우, 이렇게 갑자기 무슨.>
<오늘부터 한 달간 피트먼 씨의 스케줄입니다. 색깔별로 구분해 놨으니 조정이 가능한 것은 피트먼 씨의 의사를 물어본 뒤 조정하면 되고 혹시 피트먼 씨가 불가능한 스케줄을 조정하라고 요구하면 이 색과 이 색을 조정해서 승인을 받으세요. 이건 연간 스케줄입니다. 우선 정해진 것은 표시해 뒀으니 앞으로 추가되는 스케줄을 적으면 됩니다. 그럼 이제 파트별로 인계를 해 드리죠…….>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내며 계속해서 서류를 넘겨 대는 내 옆에서 엠마는 사색이 되어 허둥지둥 말을 받아 적느라 바빴다. 나는 부서별로 특이 사항과 달마다 올라올 보고, 앞으로 있을 기획 등등에 대해 간략하고 빠르게 설명했다. 파트가 끝날 때마다 “질문은?”이라든가 “이해가 안 가는 부분 있습니까?”라고 물으며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침내 마지막 서류를 넘겨주고 말을 맺었을 때, 엠마는 넋이 나간 듯 멍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끝인가요?>
<그렇습니다. 혹시 기억이 안 나거나 궁금한 건 저에게 전화를 하면 됩니다. 바로 알려 주겠습니다.>
나는 간단히 마무리를 한 후 가지고 왔던 브리프 케이스를 손에 들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모두 안녕히 계십시오.>
<피, 피트먼 씨와 얘기는 된 건가요?>
다른 직원이 뒤늦게 소리쳤다. 나를 말리려는 의도가 분명한 그녀의 절박한 표정에 나는 무심히 대답했다.
<사직하겠다고 주말 전에 말씀드렸습니다. 피트먼 씨도 알고 계십니다.>
난감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에 나는 조금은 무안해져 쓴웃음을 지었다.
<갑자기 미안합니다, 사정이 생겨서. 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정말, 정말로 그만두는 건가요, 연우? 돌아올 가능성은 전혀 없이?>
엠마가 또다시 나를 붙잡았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나는 뒤를 돌아보고 짧게 웃었다.
<혹시 피트먼 씨가 P 엔터테인먼트 지분을 5퍼센트 정도 준다면 생각해 보죠.>
그것은 곧 절대 돌아오지 않겠다는 선언과 같았다. 모두가 할 말을 잃은 듯 서로를 마주 보았다. 나는 그저 웃어 보이고 다시 문을 열었다.
<저, 연우. 하다못해 오늘 아침 보고라도…….>
막 복도로 나온 나를 뒤늦게 불러 세우며 엠마가 말했다. 잔뜩 두려움에 찬 그녀의 얼굴을 본 나는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제부터 엠마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럼, 하고 돌아서자 더 이상 엠마는 나를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나는 그녀가 얼마나 곤혹스러워하는 얼굴로 그 자리에 서 있을지 훤히 알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겠지만 엠마는 눈치가 빠르고 그동안 내가 자리를 비울 때마다 대리를 하곤 했으니 금세 일을 따라잡을 것이다. 어차피 언젠가 내가 그만둔다면 그녀가 내 후임이 됐을 테니까 이르고 늦고의 차이일 뿐이다.
추천장은 누구에게 써 달라고 해야 하지.
출근을 할 때보다 조금은 덜 긴장한 채로 돌아오며 나는 생각했다. 물론 집 안에 들어온 다음에는 빈틈없이 자물쇠를 채우고 의자를 기대어 놓았지만.
*
*
그게 1주일 전의 일이었다. 그 뒤 나는 내내 집 안에서 빈둥거리며 지냈다. 이틀 정도는 엠마의 전화가 수시로 걸려 왔지만 그것도 점차 뜸해졌다. 조금은 서운한 기분도 느껴졌지만 현실은 그런 것이다. 누가 빠지든 거기엔 언제나 대체할 사람이 있는 법이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가장 위험하고 쓸데없다.
이제 슬슬 정신을 차려야지.
나는 가볍게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떨쳐 버렸다. 커브를 꺾어 주차장으로 들어가며 나는 생각했다. 내일부터는 일자리를 알아보자.
* * *
대형 마트에서 후다닥 장보기를 끝내고 짐을 트렁크에 넣는데, 갑자기 진동이 울려 왔다. 흠칫 놀랐다가 꺼내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 잠깐 망설였지만 곧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대답을 하기가 무섭게 건너편에서 째지는 고함 소리가 울려 왔다.
[야, 이 망할 새끼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다짜고짜 내질러 온 하이 소프라노에 고막이 쨍하고 아파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휴대 전화를 귀에서 떼고 아픈 귀를 막았다.
“……누구시죠?”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전화기를 얼마간 떨어뜨린 채 입을 열자 계속해서 새된 음성으로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
[개자식아, 이럴 수가 있어? 사람을 뭘로 보고! 이따위 취급을 받으려고 내가……!]
대답은커녕 계속 자기 말만 하는 바람에 나는 그냥 전화를 끊으려 했다. 무엇보다도 신경에 거슬리는 비명 소리가 가장 듣기 괴로웠다. 하지만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불현듯 그녀가 누군지 기억이 났다.
“케이트 엘리사 씨?”
잠시 소리가 멈춘 틈을 타 조심스럽게 부르자 그녀는 곧바로 내질렀다.
[그래, 이제 알았어? 이 멍청한 자식아.]
그녀가 눈앞에 있다면 때리고 싶어졌다. 물론 그것은 생각일 뿐 설령 그렇다고 해도 나는 그녀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할 게 분명했다. 현실에서는 그저 한숨과 함께 그녀의 감정이 조금이라도 가라앉을 때까지 그저 듣기만 할 뿐이었다. 내가 말을 할 틈이 생기기만을 기다리며.
전화기를 귀에서 떨어뜨린 채 차에 오르며 그나마 잠시 동안 정신이 팔려 두려움을 잊었다는 사실 따위를 떠올리고 있는데, 마침내 그녀의 음성이 잦아들었다.
“엘리사 씨.”
[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름을 부르자 그녀는 곧바로 잡아먹을 듯이 덤벼들었다. 나는 운전석에 앉아 빈틈없이 문을 잠근 뒤 일부러 평소보다 더 느리고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진정하고 제 말을 들으세요. 갑자기 무슨 일로 저에게 전화를 하셨는지 우선 그것부터 말씀해 보시죠. 이렇게 흥분하시면 제가 해결을 해 드릴 수가 없지 않습니까.”
기계적으로 말을 끝맺고 난 뒤 불현듯 내가 회사를 그만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하지만 정정하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말을 쏟아 냈다.
[할 얘기 있으면 너한테 하라면서? 어떻게 된 거야, 키이스가 왜 그런 년하고 데이트를 하는 거냐고? 감히 날 차더니 그 망할 창녀하고 놀아나?]
어딘가에 기사가 난 모양이었다. 일을 하고 있을 때는 매일 아침 제일 먼저 뉴스를 보거나 기사를 훑는 게 당연했지만 그날 이후 거의 침대에 누워만 있었기 때문에 전혀 몰랐다. 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엘리사 씨와의 관계는 깨끗이 정리된 걸로 아는데요. 서류에 서명하지 않으셨습니까? 피트먼 씨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더 이상 관여하지 않는 걸로.”
[그건 애비게일하고 놀아나기 전의 얘기지! 하필 왜 그년이야? 내가 그년보다 못한 게 뭐가 있어서, 당장 말해 보라고!]
그녀는 그야말로 펄펄 뛰고 있었다.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엘리사는 자존심이 상한 걸까 아니면 아직 키이스에게 미련이 남아 있는 걸까.
어느 쪽이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엘리사 씨.”
그녀가 잠시 숨을 돌리는 사이 나는 입을 열었다.
“사정은 알겠습니다만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퇴사했거든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니 무슨, 뭐?]
갑자기 그녀가 멈칫했다.
[퇴사했다고? 정말로?]
“네, 그렇습니다. 1주일 됐습니다.”
나의 차분한 대답에 그녀는 눈에 띄게 당황해하며 말을 더듬었다.
[그럼, 저기…… 어떻게 하면 되죠? 누구한테 연락해야 되는 거예요?]
느닷없이 그녀의 말투가 공손해졌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나는 내심 놀라워하며 대답했다.
“글쎄요, 회사에 전화해 보시죠. 아직 직원이 남아 있을 겁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그게 전부였다. 그렇다고 엠마의 연락처를 멋대로 알려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녀는 당혹스러운 듯 알았어요, 하고 대답한 후 전화를 끊었다. 끊기 직전엔 “미안해요” 하고 사과까지 했다. 나는 당황했지만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곧바로 번호를 찾아 엠마에게 전화를 했다.
“엠마?”
[어머, 연우. 웬일이에요? 잘 지내고 있어요?]
눈에 띄게 반가워하며 그녀는 물었지만 태평하게 안부를 나눌 때가 아니었다. 나는 재빨리 용건을 덧붙였다.
“엘리사 씨가 전화를 했는데 아무래도 피트먼 씨의 새로운 데이트 상대가 아주 마음에 안 드는 모양입니다. 분위기가 안 좋으니 잘 얘기해서 달래 보세요.”
[네? 제가요?]
사색이 되어 묻는 그녀에게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것 또한 엠마가 해야 할 일입니다. 어차피 앞으로도 계속 이런 일이 있을 테니 이번에 신고식을 치른다고 생각하세요.”
엠마는 풀죽은 목소리로 네, 하고 대답했다. 측은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만약 내가 퇴사하지 않았다면 이 일은 또다시 내 몫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높은 연봉을 포기한 게 결코 아깝지 않아졌다.
[고마워요, 연우. 미리 전화해 줘서.]
마침 뒤에서 사무실의 벨 소리가 들렸다. 다른 비서가 받는 듯했지만 사무적인 음성이 이어지는 걸 보니 다른 전화인 모양이었다. 나는 그녀를 격려한 후 전화를 끊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이젠 정말로 내가 퇴사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새로운 일을 찾고 그날의 기억은 잊어버리자. 시간이 흐르면 다 괜찮아질 거야.
나는 생각하며 냉장고를 정리하고 간단하게 파스타를 만들어 먹었다. 오랜만에 TV를 틀었지만 딱히 볼만한 건 없었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 시시한 시트콤이나 쇼프로 따위를 보며 시간을 때웠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침대로 가 잠이 들었다.
*
*
딩동딩동. 딩동딩동.
요란하게 울리는 벨 소리에 나는 번쩍 눈을 떴다. 정신을 차리기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나는 누운 채로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그러는 사이에도 벨 소리는 계속해서 요란하게 울려 대고 있었다.
“누, 누구십니까?”
저절로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시간을 보니 자정이 훌쩍 지났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이 없을 텐데. 근원을 알 수 없는 공포가 머릿속을 휘저었다. 거실 한복판에 서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굳어져 있는데, 문 건너편에서 생각도 못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 열어, 나야.”
키이스의 목소리였다. 나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말도 안 된다. 키이스가 왜 여길?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반신반의하며 그대로 서 있는데, 대답을 기다리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장 문 열어, 부숴 버리기 전에.”
이를 갈며 낮게 내뱉는 음성은 분명히 키이스 나이트 피트먼의 것이었다. 그래도 역시 믿을 수 없어 머뭇거리고 서 있자 잠시 침묵하던 그가 갑자기 문을 걷어차기 시작했다.
쾅, 쾅쾅!
요란한 소리에 나는 기겁을 했다. 하지만 멍하니 있을 때가 아니었다. 키이스는 정말로 문을 부술 듯이 두드려 대고 있었다. 조만간 저 낡은 문이 쓰러져 버릴 것 같았다. 그것은 공연한 걱정이 아니었다. 빈틈없이 채워 둔 삼중 자물쇠가 덜컹거리는 것을 보고 나는 비명을 질렀다.
“잠깐! 잠깐 기다려요, 지금 열 테니까! 연다고!”
같은 말을 반복하며 나는 허겁지겁 자물쇠를 풀었다. 키이스는 그사이에도 계속해서 문을 걷어차고 있었다.
간신히 문을 열었을 때는, 키이스가 긴 다리를 굽히고 막 문을 걷어차려던 찰나였다. 그는 굳어진 내 얼굴을 내려다보더니 그제야 다리를 내렸다. 마침 같은 층의 다른 사람들이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무안해져 급히 뒤로 물러났다.
“뭐야? 이건.”
현관문 앞을 막아 둔 의자를 보고 키이스가 얼굴을 찌푸렸다. 나는 서둘러 그것을 들고 거실로 돌아갔다. 그제야 앞이 트인 키이스가 집 안으로 들어오고, 나는 재빨리 그의 뒤로 가 현관문의 자물쇠를 빈틈없이 모두 잠갔다.
몸을 돌리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좁은 거실 한복판에 키이스가 우뚝 서 있는 것을 보자 갑자기 사방이 꽉 막힌 것처럼 느껴졌다. 특유의 단내도 한몫했다. 나는 자꾸만 숨이 흐트러지려는 것을 간신히 누르며 그에게 의자를 권했다.
“앉으시죠.”
차라도 줘야 하나, 생각하며 주방 쪽을 쳐다보는데 그 자리에 서서 한차례 집 안을 둘러본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집이 이게 전부야?”
갑자기 무슨 소린지. 나는 무심코 그를 올려다보았다. 키이스는 찌푸린 얼굴로 다시 물었다.
“여긴 현관이겠지? 어디야? 응접실은.”
나는 말문이 막혀 즉각 대답하지 못했다.
“……아까 들어오신 곳이 현관이고 여기가 응접실입니다.”
키이스는 내 얼굴에서 눈을 떼고 천천히 집 안 전체를 다시 둘러보았다. 굳이 걸어서 일일이 돌아다니지 않아도 충분히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집의 규모에 나는 왠지 부끄러워졌다. 키이스의 시선이 다시 내 얼굴로 돌아왔을 때, 그의 미간에 잡힌 주름은 한층 더 깊어져 있었다.
“대체 왜 이런 창고에서 사는 거야?”
나도 모르게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할 뻔했으나 곧이어 나는 내가 그 빌어먹을 회사를 때려치웠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피트먼 씨가 주는 월급으로 낼 수 있는 월세로는 여기가 한계니까요.”
조용히 말하자 키이스가 한쪽 눈썹을 가볍게 들었다 놓았다. 내심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 남자의 비서로 일하면서 단 한 번도 말대꾸를 한 적이 없었다. 마음속의 말을 한다는 것은 통쾌했지만 익숙하지 않은 일탈은 또 그만큼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다행히 키이스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내가 안내해 준 대로 소파에 앉았다. 그나마 지난번 큰마음 먹고 제법 좋은 소파를 사 뒀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나는 망설이다 그냥 그 자리에 서 있기로 했다. 다행히도 키이스는 내게 앉으라고 권하진 않았다. 대신 두 손에 얼굴을 묻더니 후우, 하고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너야?”
“네?”
갑작스러운 물음에 나도 모르게 되묻자 그는 다시 말했다.
“너냐고, 엘리사하고 통화한 게.”
순간 거짓말을 하고 싶어졌으나 그랬다가는 애꿎은 비서 팀 사람들만 벼락을 맞을 것이다. 어차피 난 그만뒀으니까.
“네.”
용기를 내어 인정하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웅크린 채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있는 키이스를 보자 무심코 그의 풍성한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뜨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잠시 넋을 잃고 있느라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멍하니 서 있던 나는 뒤늦게 키이스의 말을 알아듣고 눈을 깜박였다.
“여자들이 그렇게 싸우는 건 처음 봤어.”
그는 지친 듯했지만 물론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고개를 들었을 때, 키이스의 얼굴은 불쾌감으로 가득했다. 요컨대 감정을 누르느라 시간이 걸린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나중에 기사를 찾아볼 생각으로 호기심을 누르며 나는 차분히 말했다.
“전 자주 봤습니다.”
그 말에 키이스가 머리칼을 쓸어 넘기던 것을 멈추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널 두고 여자들이 싸웠다고?”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은 더할 수 없이 무례한 것이었지만 나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엄청나게, 자주.”
물론 그게 내 여동생들이라는 얘긴 하지 않았다. 의심스럽게 미간을 찌푸린 그의 반응에 나는 무심하게 덧붙였다.
“피트먼 씨처럼 잘생긴 남자들만 그런 일을 겪는 건 아니라는 얘기죠.”
그 말에 뜻밖에도 키이스가 피식 웃었다. 의외의 반응에 멈칫하자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네 외모는 나쁘지 않아. 다만 네가 여자 문제를 일으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어째서죠?”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묻자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전혀 주저하지 않고.
“넌 재미없잖아.”
본인은 참으로 유머러스하고 위트가 넘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전혀 아니라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나는 숨을 가다듬고 냉정하게 물었다.
“방탕한 게 재미있는 겁니까?”
“즐길 수 있는 건 뭐든 즐기는 게 좋지.”
최소한 본인이 방탕하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나는 위안으로 삼았다. 대신 나는 다른 걸 물었다.
“피트먼 씨는 외아들이시죠?”
키이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지?”
그가 슬쩍 대답을 회피했지만 미처 깨닫지 못했다. 굳이 장남으로서의 책임감 따위를 말해 봤자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라서, 나는 그저 고개만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 시간에 여긴 왜 오신 겁니까? 설마 여자들이 싸우는 게 무서워서 달아난 건 아니실 테고.”
나도 모르게 빈정거리며 덧붙이자 키이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번에는 전혀 웃지 않았다. 나는 으흠, 하고 헛기침을 한 후 말을 돌렸다.
“차라도 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집에 있는 싸구려 티백을 떠올렸지만 키이스는 고맙게도 거절했다. 이제쯤 용건이 나올 거라고 생각해 긴장하고 있는데, 마침내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5퍼센트는 안 돼.”
“네?”
갑작스러운 말에 나는 또다시 되물었다. 키이스는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고 긴 팔을 쭉 뻗어 등받이에 올려놨다.
“P 엔터테인먼트의 지분 5퍼센트를 달라고 했다면서? 그건 곤란해, 다른 조건을 말해 봐.”
“…….”
“엠마에게 그렇게 말했다던데.”
그제야 나는 그날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해 냈다. 정말 아무 의미 없이 던진 말이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키이스는 계속해서 내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인내심을 가지고.
“……저한테 다시 오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럼 아니겠어?”
키이스는 여지없이 비꼬며 되물었다. 나는 대체 이 남자가 무슨 일을 겪었길래 나를 찾아와서 저런 제안까지 할까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걸 듣게 되면 승낙해야 할 것 같았다. 거기다 저 남자가 순순히 기승전결을 짜 맞춰 내게 상황을 얘기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대답이나 하라고 화를 내겠지.
이미 알고 있는 결과에 나는 용암같이 끓어오르는 호기심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태연한 척 입을 열었다.
“싫다고 한다면요?”
“그럴 리가 없어.”
“왜요?”
“파격적인 제안을 할 테니까.”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지분 5퍼센트 아니면 안 된다고 해도 말입니까?”
키이스는 잠시 말이 없더니 이윽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골치 아픈 듯 관자놀이를 문지르는 그의 모습은 생소했다.
“20만 주.”
이윽고 낮게 흘러나온 음성에 나는 멈칫했다. 그는 시선만을 들어 나를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더 이상은 안 돼. 그 외에 말해 봐, 원하는 걸 모두.”
당신요.
순간적으로 나는 입술을 깨물어 간신히 그 말을 삼켰다. 하마터면 지분이고 뭐고 저 남자에게 목이 졸려 죽을 뻔했다.
자살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지.
나는 침착하려 애쓰며 심호흡을 했다. 무뎌졌던 코가 문득 그의 페로몬에 반응했다. 뒤늦게 나는 깨달았다. 약의 효과가 떨어질 때가 됐다는 걸. 나는 황급히 소매를 들어 코를 막았다.
“그것.”
“뭐?”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이 키이스가 물었다. 나는 다급하게 대답했다.
“그 페로몬 말입니다. 그것부터 어떻게 좀 해 보시죠? 저를 다시 채용하고 싶으시다면 앞으로 제가 있을 때는 그 망할 페로몬 냄새 좀 안 나게 해 주십시오.”
거친 말을 쏟아 냈지만 키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희미하게 미간을 일그러뜨렸을 뿐이었다. 나는 코를 막은 채로 급하게 거실을 가로질러 창문을 환하게 열었다. 동시에 매연이 훅 들어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창문을 닫았다.
의미 없는 행동을 하고 처음 서 있던 자리로 되돌아가자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끝인가?”
고개를 들자 그는 무심하게 물었다.
“요구할 건 그게 전부냐고. 더는 없어?”
나는 잠시 고민했다. 가끔 램프의 요정이 나타나 소원을 들어주는 상상을 하곤 했지만 그것이 현실이 되자 선뜻 떠오르질 않았다. 지니와는 다르다. 소원의 개수가 정해져 있는 건 아니지만 어떤 것이든 들어주는 것 또한 아니니까. 나는 무심코 심호흡을 했다. 잠시나마 바깥 공기를 마신 덕인지 페로몬 향기가 훨씬 옅어진 기분이었다. 나는 소매를 코에서 떼고 입을 열었다.
“지분에 대한 건 농담이었습니다. 그건 없던 얘기로 해 주십시오.”
키이스는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
“농담이었더라도 좋은 기회 아닌가?”
나는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세상 모든 일은 받은 만큼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지나친 호의를 받아들였다가 나중에 후회하고 싶지 않습니다. 또 피트먼 씨가 난 저 녀석의 요구를 이만큼 들어줬으니 할 만큼 했지, 하고 만족하는 것도 싫습니다. 거기다 그만큼 준다면 원하는 것도 훨씬 더 많아지겠죠? 솔직히 말해 주십시오, 그 제안을 하고 제게 뭘 요구할 생각이었죠?”
“…….”
잠시 말이 없던 키이스가 피식 웃었다. 물론 진심으로 재미있어서 웃은 건 아니었다.
“10년 근속.”
“절대로 사양합니다.”
나는 정색을 하고 거절한 후 덧붙였다.
“1년 계약, 해마다 갱신하는 걸로. 대가는 일을 하는 만큼만 받겠습니다.”
“하.”
키이스가 바람 빠진 소리처럼 어이없는 탄식을 뱉어 냈다.
“그럼 더 원하는 건 없다는 얘기야?”
“아뇨. 연봉은 올려 주십시오.”
나는 요구 조건을 내밀었다.
“피트먼 씨의 음란한 파티에서 제가 피해를 많이 봤습니다. 또 사장님의 난잡한 사생활의 뒤처리를 하느라 정신적 경제적으로 소모가 심합니다. 이번에 아셨겠지만.”
고의로 직설적인 표현만 골라 언급한 뒤 나는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키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재차 고용이 된다면 이런 얘기는 다시 못 할 것이다. 또 벙어리 냉가슴으로 돌아가기 전에 나는 작정하고 그동안 마음속에 쌓아 놨던 말들을 30퍼센트 정도만 하기로 했다. 내가 이 남자에게 받아 내고자 하는 요구 조건은 딱 그 정도였으니까.
“다시 저를 고용하고 싶으시다면 그 부분도 감안해서 연봉을 책정해 주십시오. 하나 더, 또 그런 파티가 있을 경우 미리 제게 어떤 목적의 파티인지 꼭 얘기해 주십시오. 그럴 때는 파티 플래너를 고용하고 전 빠지겠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이렇게 세 가지입니다.”
“……고작 그게 다야?”
뭔가 대단한 걸 요구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키이스는 눈에 띄게 실망스러워했다. 도대체 무슨 상상을 하고 온 건지 모르겠지만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키이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상대방의 요구가 적을수록 난 불안한데.”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응시했다.
“그만큼 책임을 덜 지겠다는 뜻으로 들려.”
나는 내심 뜨끔했다. 그 말은 정답이었고 굳이 숨길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제가 다시 그만두지 않게끔 피트먼 씨가 주의하시겠죠.”
“나한테 네 비위를 맞추라고?”
“그렇게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재빨리 물러섰다.
“그저 절 좀 더 배려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게 마음에 안 들면 다시 그만두겠다고?”
“세상에 영원이라는 게 있던가요?”
나는 되물었다. 키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계속해서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모든 건 다 끝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피트먼 씨가 절 해고하실 수도 있고, 전 더 다니고 싶지만 사정이 안 될 수도 있고. 예를 들면 P 엔터테인먼트가 부도가 난다거나.”
나는 재빨리 덧붙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예를 들어 그렇다는 겁니다.”
키이스는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묘한 시선으로 날 바라볼 뿐이었다. 하, 하고 그가 짧은 감탄사와 함께 웃음을 지었을 때 나는 그래서 깜짝 놀랐다.
“그렇게 할 말이 많으면서 지금까지 어떻게 참았는지 모르겠군.”
나는 솔직히 털어놓았다.
“일을 시작하게 되면 다시 참을 겁니다. 그러니 지금을 즐겨야죠.”
“하하하하.”
뜻밖에도 키이스가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가 이렇게 유쾌하게 웃는 모습은 처음이라 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주 예전에 처음 그를 봤을 때는 웃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저렇게 소리 내어 웃는 것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말문이 막혀 그저 보고만 있는 사이 그는 웃음을 멈추고 소파에서 일어섰다. 나를 보는 그의 얼굴에는 아직 웃음의 여운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산뜻한 미소에 그만 넋이 나가고 말았다.
그가 뭔가 말을 했지만 알아들은 것은 몇 초의 공백이 흐른 뒤였다.
“연봉을 재조정하고, 페로몬을 줄이고, 파티가 있을 때는 미리 어떤 목적인지 알려 줄 것. 그거면 되나?”
“네.”
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숨을 쉬기가 어려워졌다. 그는 약속대로 페로몬을 줄이고 있었다. 숨이 막힐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나는 호흡이 가빠졌다. 키이스의 말이 맞다. 거실이 너무 좁았다. 단지 소파에서 일어났을 뿐인데 그와 나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진 것이다. 나는 의식적으로 숨을 죽였다. 키이스가 말을 계속했다.
“……해서 마무리를 할 테니까 그렇게 얘기를 끝내지. 주말이 지나면 출근하는 걸로 하고.”
연봉이라든가 재계약에 관련된 서류를 어떻게 처리할지를 말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키이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방금 전까지 그렇게 환한 얼굴이었는데. 무심코 아쉬워했을 때, 그가 갑자기 내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불시에 나는 그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숨을 삼킬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황급히 고개를 숙이자 키이스가 한쪽 팔을 뻗어 벽을 짚고 여전히 의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911을 부를까?”
“아, 아뇨.”
나는 황급히 부정했다. 하지만 키이스는 믿지 않았다.
“얼굴이 빨간데 열이라도 있는 거 아냐?”
“그, 그냥, 감기 기운이 있어서 그런 겁니다. 쉬고 나면 괜찮아요. 너무 늦었지 않습니까.”
나는 당황해 바쁘게 말을 지어냈다. 과연 믿을까? 속아 넘어갈까?
조마조마해하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자 곧바로 키이스와 시선이 마주쳤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나는 벽에 기대어 선 채 무심코 마른침을 삼켰다.
불현듯 키이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나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현실감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내 초라한 거실에 키이스와 내가 단둘이 마주 보고 있는 것도, 그가 나를 저렇게 내려다보고 있는 것도, 입술이 가까워지는 것도.
이건 말도 안 돼.
입술이 겹쳐졌을 때, 나는 눈을 감으며 현실을 부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