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7/77)

6

서늘하면서도 부드러운 감촉이 입술에 닿았다. 그것은 지그시 내 입술을 누르는가 싶더니 이내 물러났다. 하지만 아쉬움을 느낄 여유도 없이 무심코 벌어진 입 안으로 혀가 들어왔다.

젖은 혀가 얕게 열린 치아를 벌려 안쪽의 혀와 맞닿았다. 나는 놀라 나도 모르게 혀를 끌어당겼다. 그저 스쳤을 뿐인 촉촉한 감촉이 혀끝에 여실히 남아 버렸다. 그리고 곧바로 쫓아온 혀가 주저하는 내 혀를 핥고, 뒤이어 입술이 맞물렸다.

“……!”

나는 질끈 눈을 감고 황급히 숨을 삼켰다. 가볍게 입술을 빨아들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키이스가 내 아랫입술을 지근거리며 깨물었다. 도저히 버틸 수가 없는데 그는 내 몸에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다. 맞닿아 있는 건 오직 입술뿐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온몸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벽에 기대어 있지 않았다면 그대로 쓰러졌을 것이다. 나는 벽에 바짝 온몸을 붙이고 선 채 정신없이 그의 키스에 응했다. 다시 입술이 닿고, 떨어지고, 빠져나가는 혀를 쫓아 나도 모르게 혀를 내밀자 그대로 키이스가 그것을 이로 물더니 곧바로 다시 입술을 겹쳤다.

“…….”

입 안의 침이 꿀떡꿀떡 넘어갔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하아, 하아.

밭은 숨이 계속해서 입 안에서 맴돌았다. 숨결이 온통 뒤섞여 내 것인지 그의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빈틈없이 틀어막은 입술이 내 입 안을 전부 빨아들일 것처럼 거칠게 비벼졌다. 키이스는 진심으로 나를 먹어 치울 것 같았다. 두려우면서도 흥분됐다.

키이스.

나는 입 안으로 그의 이름을 뇌까렸다. 무심코 파닥인 혀를 그의 혀가 감아 밀어 올렸다. 타액이 질펀하게 섞여 입가로 흘러내렸다. 목 안쪽까지 혀로 애무당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대로 사정할 것 같았다. 하지만 억제제의 덕인지 고작 간신히 발기하는 게 전부였다. 애가 타면서도 직접 앞을 훑을 수는 없었다. 나는 엉덩이 안쪽이 저릿거리며 달아오르는 감각을 처음으로 느꼈다.

하아, 아, 응.

나는 소리 없이 탄식을 연거푸 뱉었다. 자꾸만 그를 안고 싶어졌다. 나는 벽을 짚고 있는 손을 다급하게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두려웠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지금 이 순간이 먼지처럼 사라질 것 같았다. 아니, 분명히 그럴 것이다.

이 상황이 현실일 수가 없으니까.

키이스가 이를 세워 내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무심코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선명한 통증만이 이것을 현실이라고 일깨워 줬다. 흐릿하게 피 맛이 났다. 키이스가 입술을 겹치며 그것을 빨아들였다. 타액과 피가 뒤섞여 미끈거리며 입술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입 안에 들어온 혀가 안쪽의 여린 살을 핥고 문지르고, 다시 입술이 돌아와 겹쳐지더니 거칠게 누르며 빨아들였다.

문득 코끝으로 키이스의 페로몬이 느껴졌다. 그가 흥분한 것이다. 굳이 만지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의 발기를.

“……하.”

한숨 같은 신음을 흘린 것은 키이스였다. 그때까지 나는 신음조차 억누른 채 그저 떨고만 있었다. 젖은 입술에 그의 숨결이 스치는가 싶더니 키이스가 입술을 뗐다. 간신히 눈을 뜨자 키이스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을 감기 전과 달라진 것은 전혀 없었다. 그와의 거리도, 내 머리 위로 팔을 기대고 선 그도, 벽에 찰싹 붙어서 서 있는 나도.

다만 흐트러진 숨결과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표정만이 달랐다.

키이스는 어딘지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나는 멍한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페로몬.”

이윽고 키이스가 입을 열었을 때, 나는 그저 멍하니 눈을 깜박여 그를 보기만 했다. 어느새 그의 표정은 평소처럼 냉담하게 되돌아가 있었다.

“너부터 없애 보지 그래?”

빈정거리는 말에 정신이 들었다. 키이스는 불쾌하다는 듯이 나를 노려보더니 곧바로 몸을 돌려 나가 버렸다.

탁.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은 다음에야 비로소 나는 혼자 남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나마 요란하게 문을 닫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아마도 남은 인내심을 쥐어짠 것이겠지만.

오늘 저 남자는 자신이 같은 남자에게 키스했다는 사실을 저주하며 입 안을 알코올로 소독할지도 모른다.

“……하.”

나는 탄식과 함께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을 억지로 들어 간신히 입술을 더듬었다. 아직 그것은 젖어 있었다. 집 안 가득히 은은하게 퍼져 있는 키이스의 페로몬 향기와 젖어 있는 입술만이 그의 자취를 느끼게 했다.

갑자기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도 키이스는 나를 유혹했었다. 그리고 그다음에 내게 불같이 화를 내며 나를 밀어냈었지.

참 한결같구나, 저 남자도.

“하하…….”

허탈하게 웃었던 나는 곧 입을 다물었다. 나를 기억하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이렇게 똑같은 방법으로 내게 상처를 줄까.

* * *

“연우!”

출근을 한 엠마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감격해 소리쳤다. 전날 모두에게 미리 메시지를 보내긴 했지만 직접 나를 보기 전까지는 실감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언제나처럼 가장 먼저 출근했던 나는 연이어 들어온 비서실의 직원들을 일일이 맞이하며 인사를 했다.

“그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갑자기 자리를 비워서 미안해요. 앞으로 다시 잘 부탁하겠습니다.”

모두는 한 명도 빠짐없이 눈에 띄게 안도하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고작 열흘도 안 되는 시간이었는데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굳이 묻지 않아도 뻔했다. 하지만 꼭 듣고 싶은 얘기가 하나 남아 있었다.

“파티가 난장판이 됐었어요.”

엠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보고를 했다.

“그날 연우가 전화했을 때, 전 연우의 전화를 받느라 몰랐는데 제인이 받은 전화가 엘리사 씨의 것이었나 봐요. 워낙 차분하게 물어봐서 전혀 생각도 못 했지 뭐예요? 키이스 씨의 스케줄을 물어봐서 어느 파티에 갔는지만 알려 줬다는데. 하긴 엘리사 씨에겐 그 정도 정보면 충분하죠. 거기서 애비게일 씨랑 둘이 한판 붙었던 모양이에요.”

쉴 틈 없이 말한 엠마가 키득거렸다.

“듣자니까 서로 엉망이 될 정도로 싸웠다던데요. 뒤늦게 연락을 받고 뛰어가 봤더니, 어머 글쎄, 피트먼 씨는 사라지고 없는데 둘은 머리가 산발이 돼서 온몸에 할퀴고 때린 자국이 어마어마한 거예요. 난리도 아니었어요, 경찰이 오지 않은 게 다행이에요. 아마 그런 사건이 있었다고 알려지면 파티를 연 사람도 난감하니까 최대한 감추려고 한 거겠죠? 그래 봤자 곧 기사가 뜰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닌 데다 피트먼 씨가 중심에 있는 스캔들이잖아요. 아, 그 장면을 봤어야 했는데! 가 보니까 벌써 다 끝나고 정리 중이었던 거 있죠?”

엠마는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탄식했다. 이렇게 흥분해 말을 쏟아 내는 그녀의 모습은 흔치 않았다. 그럴 만도 한 게 전날의 일을 떠올려 보면 상황을 짐작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키이스의 눈앞에서 그렇게 난동을 부렸다면 그가 질릴 만도 하다. 지금껏 그런 사태가 오기 전에 내가 온몸으로 막아 왔다는 걸 키이스도 깨달은 모양이었다. 굳이 알아 달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어쨌든 덕분에 질려 버린 그가 백기를 들고 날 찾아왔던 것이다.

키스는 예정에 없었겠지.

“연우?”

엠마가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무심코 입술을 쓰다듬고 있었다. 황급히 손을 내리자 엠마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괜찮아요? 입술은 어쩌다 이런 거예요? 입술을 깨무는 버릇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아, 이건, 그냥…… 어쩌다가.”

당황해 말을 얼버무리자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대신 핸드백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발라요, 또 피가 날 것 같은데. 그냥 두면 큰일 난다고요. 암에 걸릴지도 몰라요.”

위협적인 말을 하며 그녀는 립밤을 건네주었다. 마침 새것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말과 함께.

하지만 불필요한 친절이었다. 나는 이 상처가 아물기를 바라지 않았다. 내게 있어서 유일한 그의 흔적이 사라질까 봐 오히려 두려웠다. 나는 하루라도 더 오래 이 입술이 찢겨 있기를 원했다.

“……고마워요.”

나는 립밤을 받아 들었지만 뚜껑도 열지 않았다. 그대로 서랍에 넣은 후 모른 척 프린트를 시작했다. 다행히 엠마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고 자리로 갔다. 이제 일을 시작할 때라는 나의 무언의 메시지를 눈치챈 것이다.

평소처럼 하루의 스케줄과 보고할 문건들을 정리해 들고 나는 비서실을 나섰다. 고작 며칠을 쉰 것뿐인데도 익숙했던 복도는 묘하게 낯설게 느껴졌다. 규칙적으로 울려 퍼지는 나의 구둣발 소리 또한 그랬다. 마침내 키이스의 사무실 문 앞에 섰을 때는 첫 출근 했을 때만큼 긴장했다.

똑똑.

가벼운 노크를 한 후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문을 열었다. 곧바로 전면 창을 향해 서 있는 키이스의 뒷모습이 보였다. 고층 빌딩 아래로 납작하게 웅크린 도시를 내려다보며 그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매캐한 담배의 향이 그의 페로몬과 어지러이 뒤섞여 공기 속을 떠돌았다.

“으흠.”

일부러 소리 내어 헛기침을 하자 그때까지 등을 돌리고 있던 키이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무심코 숨을 죽였다.

잠시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키이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로서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다만 전날의 키스를 떠올리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만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저 그가 먼저 말을 꺼내 주기만 기다렸다.

후우…….

길게 연기를 뱉어 냈던 키이스가 다시 담배를 입으로 가져가며 몸을 움직였다. 단조로운 구둣발 소리를 내며 그가 자리로 가 앉는 것을 나는 묵묵히 지켜보았다.

“오늘 스케줄입니다.”

키이스가 자리에 앉은 후 발걸음을 떼고 다가간 내가 넓은 데스크를 사이에 두고 서서 프린트한 일정을 내려놓았다. 담배를 입술로 지그시 문 채 일정을 확인하는 키이스의 모습을 나는 잠자코 지켜보았다. 그가 지시를 내리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어?

문득 나는 의아해졌다. 담배 연기와 함께 섞여 있던 페로몬 향이 약해졌다. 그래서인지 담배 향이 더욱 짙어져, 나는 나도 모르게 기침을 했다. 깊이 담배 연기를 들이켜던 키이스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뭐야?”

“죄송합니다, 숨을 잘못 쉬어서.”

나는 곧바로 사과했다. 키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건성으로 서류를 휙휙 넘길 뿐이었다. 그는 어쩐지 집중을 못 하는 것 같았다. 그 증거로 후, 하고 담배 연기와 함께 한숨을 내쉬었던 키이스가 뒤적이던 서류 뭉치를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오늘 일정은 전부 취소해.”

갑작스러운 지시에 나는 순간 멈칫했다. 키이스는 내 쪽은 보지도 않은 채로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저녁에 이안의 파티에 갈 거야. 리스트를 뽑아서 올려.”

파트너로 데려갈 상대의 리스트를 말하는 것이다. 나는 처음 입사했을 때부터 이런 일을 질리도록 해 왔다. 이 남자가 돈이 썩어 날 정도로 많으면서 굳이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운영하는 이유는 그저 취미로 돈을 쓰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섹스할 상대를 찾기 편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나는 종종 했다.

그는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소유주라는 이유로 상대가 모델이든 배우든 연예인이기만 하면 아무리 무명일지라도 갖지 못할 정보가 없었다. 필요에 따라 누구든 그의 취향에 맞춰 상대를 고를 수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나는 지겹도록 해 왔던 작업을 또다시 해야 할 것이다. 내 손으로 그와 잘 상대를 고르는 일.

굳이 데이트 따위의 귀찮은 절차를 거칠 필요도 없었다. 준비할 것은 보석과 그의 이름이 적힌 카드가 전부였다. 그것만으로도 선택된 상대는 감격해하며 부르는 곳 어디라도 갔다. 단순히 섹스 파트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기꺼이 그렇게 했다. 그것은 키이스 나이트 피트먼이라는 상대가 그만큼 그들에게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P 엔터테인먼트의 소유주, 극알파, 거기다 그의 상대로 선택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은 곧바로 레벨이 올라갔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저 남자가 동전 한 닢 없는 거지 신세라고 할지라도 저 남자를 얻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온몸을 던질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줄의 맨 앞에 내가 서 있겠지.

나는 씁쓸한 생각과 함께 알겠습니다, 하고 짧게 대답했다. 지금부터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가장 중요한 건 스케줄을 다시 정리하는 것이었다. 엠마에게 대충 짜 맞춰 보라고 하고 제인에게 파티에 대해 다시 연락하라고 하고. 나는 사무실을 나오자마자 바쁘게 머리를 움직였다.

“그 파티는 안 가신다고 거절하지 않았나요?”

엠마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나는 급히 서랍 안에서 스케줄 파일을 꺼내 주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마음이 바뀌었나 보죠. 일단 오늘 일정은 전부 취소니까 우선 그것부터 다시 정리해요. 연락할 곳에 다 전화하고, 언제 다시 일정을 잡을지 확인해 보고. 정리되면 나한테 보여 줘요. 점검은 내가 할 테니까. 제인, 앤더슨 씨 비서에게 전화해서 피트먼 씨가 파티에 참석할 예정이라고 전하십시오. 명단에 올려 달라고. 레이첼, 부서마다 전화해서 오늘 회의 취소라고 전하고 티파니에 다녀오세요. 피트먼 씨 대리로 왔다고 하면 알아서 보석을 골라 줄 테니 그냥 받아 오면 됩니다. 결제는 안 해도 되고…….”

쏟아지는 지시에 모두는 급하게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맡은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직원들을 뒤로하고 나는 가장 중요한 일을 시작했다. 바로 키이스의 취향에 맞는 상대를 고르는 일이었다.

*

*

똑똑.

나는 속으로 3초를 센 후 문을 열었다. 키이스는 내가 사무실을 나갔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상태로 앉아 있었다. 다만 그의 앞에 놓인 재떨이에 담배가 수북하게 쌓였다는 것만 달랐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사무실 안은 담배 연기가 부옇게 내려와 있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선뜻 사무실을 가로질러 걸어가 그의 앞에 섰다. 문득 그의 페로몬과 담배 냄새 중 어느 쪽이 견디기 힘들까를 생각했다. 이제 와서 말을 바꾸는 것도 우스운 일이라 고민해 봤자 별로 의미는 없었지만.

“우선 뽑아 봤습니다.”

나는 세 명의 후보를 그의 앞에 내밀었다. 아까보다는 훨씬 성의 있는 태도로 키이스는 포트폴리오를 훑어보았다. 곧 그는 그중 하나를 펼쳐 다시 내게 돌려주었다. 나는 나머지 파일을 들어 아래쪽에 놓고 선택된 파일을 가장 위에 올려놓았다. 다음에 급하게 상대를 찾아야 할 경우를 대비해 남은 두 명도 따로 관리할 생각이었다. 나는 즉시 다른 파일을 내밀었다.

“스케줄은 재조정했습니다. 이쪽입니다. 혹시 또 변경할 사항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키이스는 흘긋 그것을 내려다본 게 전부였다.

“두고 나가.”

다시 담배를 피우는 그의 모습에 나는 잠자코 책상 위에 파일을 내려놓았다. 보고를 할 게 몇 가지 더 있었지만 급하지 않았다. 굳이 서서 몇 마디를 더 보탰다가 안 그래도 좋지 않아 보이는 심기를 더 거스를 생각은 없었다. 나는 그의 명령대로 즉시 사무실을 나왔다.

복도로 나와 혼자가 되고 나자 뒤늦게 가슴 한구석이 욱신거렸다. 손안에 든 파일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반으로 접혀 펼쳐져 있는 파일에서는 글래머의 화려한 미인이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어차피 나는 꿈도 못 꿀 일인데.

가만히 입술을 쓸었다. 심장의 둔한 아픔이 입술의 날카로운 통증으로 번져 갔다.

그건 단지 페로몬 때문에 우연히 얻은 행운이었을 뿐이야.

나는 멍하니 사진 속의 여자를 응시했다.

다시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겠지.

* * *

한동안 평온한 일상이 흘러갔다. 조용하지는 않았지만 딱히 큰 사건도 없었다. 키이스는 계속해서 상대를 갈아 치웠고, 그때마다 나는 새로운 여자를 찾았고, 다른 비서들은 번갈아 티파니에 가거나 상대의 집으로 찾아가 카드와 보석을 전달하곤 했다.

괴로운 일은 당연하지만 전부 내 차지였다. 스케줄을 멋대로 바꾸는 바람에 상대에게 사과를 하며 억지로 약속을 다시 잡아 달라고 매달린다거나 구하기 어려운 물건을 어떻게든 찾아내 키이스의 책상 위에 갖다 놓는다거나 갑작스러운 이별 선언에 히스테리를 부리는 상대에게 냉정하게 현실을 주지시키며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거나.

그만두기 전과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단지 주기가 너무나 짧아졌을 뿐.

“다녀왔습니다.”

엠마의 음성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피곤한 기색이 엿보이는 그녀의 안색에 나는 내심 동정심을 느꼈다.

“고생했어요, 엠마. 별일은 없었습니까?”

“네, 물론.”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는 여전히 지친 기색이었다. 엠마만이 아니었다. 비서실의 다른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보다 지친 건 나였다. 최근 헤어졌던 상대에게는 뺨과 정강이를 맞았다. 그 전에는 머리채를 잡혔고, 그 전에는 꽃병의 물을 뒤집어썼다.

그냥 주식을 받겠다고 할 걸 그랬어.

나는 지친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그 정도 받을 만큼의 업무량 아닌가? 차라리 격무에 시달리는 건 낫다. 키이스의 잠자리 상대를 찾는 것도 괴로운데 거기다 더해 당치 않은 학대까지 감수해야 하다니.

다시 그런 기회가 온다면 꼭 100만 주를 불러야지.

내심 생각했던 나는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지, 무슨 소리야. 그땐 정말로 그만둬야지.

“연우?”

부르는 소리에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엠마가 의아해하며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무안해져 황급히 다른 일을 하는 척했다. 그런 내게 엠마가 말했다.

“미안해요, 연우. 항상 힘든 일은 연우가 하네요.”

갑작스러운 말에 고개를 들자 그녀가 죄책감이 서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뒤늦게 나는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오늘 그녀는 새로운 여자에게 보석을 선물하고 왔다. 그것은 곧 이제 과거가 되어 버린 여자에게 가서 내가 이별을 통보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제 일인데요, 마음 쓰지 마십시오.”

나는 선뜻 말하고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몇 번을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라는 게 있다. 눈앞에서 모욕적인 말을 듣는 것은 아무리 내가 마음을 비운다고 해도 거듭 반복되면 역시나 지치게 마련이었다. 거기다 기간이 너무 짧았다.

“요즘 피트먼 씨가 너무 자주 상대를 바꾸지 않아요?”

내가 생각했던 말을 엠마가 갑자기 입 밖에 냈다. 뜻밖에 생각이 통한 듯했지만 그것은 엠마와 나만의 일이 아니었다. 제인과 레이첼 또한 동조하며 말을 거들었다.

“맞아요, 심해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다니까요.”

“일이라니…….”

나는 부정하고 싶었지만 나라고 해서 키이스에 대해 그녀들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런 것이 전부였다.

“원래 피트먼 씨는 방탕하지 않았습니까. 수시로 상대를 바꾸는 일은 계속 있었던 일입니다.”

“하지만 너무 짧다고요.”

엠마가 다시 지적했다.

“그래도 전엔 최소 두세 달은 가지 않았어요? 어쩔 땐 6개월까지 간 경우도 몇 번 있었고요. 그런데 요즘은 어때요, 한 달이 멀다 하고 갈아 치우고 있잖아요.”

미처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는 새 제인이 끼어들었다.

“설마 피트먼 씨가 새롭게 보석 사업을 하려는 건 아니겠죠? 티파니를 사들이려고 하는 걸까요?”

레이첼이 곧바로 그녀에게 핀잔을 줬다.

“팔찌 하나 목걸이 하나 이런 식으로 해서 언제 티파니를 사겠어? 바보 같은 소릴 하네.”

“그걸 매우 자주 사잖아.”

“아니라고, 틀렸다고.”

레이첼은 짜증을 내며 제인의 코를 쥐었다 놓았다. 제인이 눈을 흘기는 것을 보고 나는 입을 열었다.

“어쨌든 그건 피트먼 씨의 사생활이고, 우리가 할 일은 피트먼 씨를 편안하게 해 드리는 거니까……. 일적으로든 사생활적으로든. 우린 우리 할 일만 하면 됩니다.”

엠마는 썩 내키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그건 그렇죠.”

나는 대화를 마무리하자는 의미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난 애너벨 제임스 씨를 만나러 가겠습니다. 이후 피트먼 씨의 스케줄은 차질이 없게 잘 마무리해 주십시오.”

“그대로 퇴근하시나요?”

제인의 물음에 나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별일 없으면 물론 다시 돌아올 겁니다만, 그럴 것 같진 않군요.”

쓴웃음을 짓는 나를 보고 레이첼이 제인을 팔꿈치로 꾹 찔렀다. 나는 모른 척 돌아서서 사무실을 나왔다. 갑자기 피로가 전신을 짓누르는 듯했다.

*

*

“그래요? 그럼 어쩔 수 없죠.”

나는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너무나 산뜻한 대답이었다. 이렇게 흔쾌히 이별을 받아들인 상대가 있었던가? 그만 멍하니 뚫어져라 얼굴을 바라보고 만 나를 보고 그녀는 까르르 웃었다.

“왜요? 내가 히스테리라도 부릴 줄 알았어요? 실망이에요, 날 그런 사람으로 봤다니.”

“아, 아뇨. 그런 건…… 죄송합니다.”

나는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애너벨은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피트먼 씨의 악명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어요. 이런 기회가 내게 오다니 오히려 감사해야죠. 기대보다는 오래 못 갔지만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요? 어차피 항의해 봤자 그 남자가 돌아올 것도 아니고. 그럼 어쩌겠어요, 현실에 충실해야죠.”

그녀의 말에도 나는 여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눈앞에 있는 여자는 작년까지 최고의 모델 1위에 당당히 자리 잡고 있던 슈퍼 모델이었다. 떠오르는 신예에게 타이틀을 빼앗기고 말았지만 여전히 위상은 건재했다.

역시 최고의 지위에 올라갔던 사람은 다른 걸까?

이런 여유와 품위라니, 상상도 못 했다. 당연히 온갖 욕설과 비난을 각오하고 왔던 나는 허망한 기분마저 느꼈다.

이런 여자를 고작 3주 만에 차 버리다니.

내심 안타까움마저 느껴졌다. 이번에 시작한 상대도 이 사람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건 뭐죠? 저에게 주는 건가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들고 있던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아, 네. 이건 그간 피트먼 씨께 즐거움을 주신 데 대한 보답으로 드리는 선물입니다.”

애너벨은 우아한 손동작으로 서류 봉투를 받아 들었다. 잘 손질된 손톱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얘긴 들었어요. 피트먼 씨는 아주 후하게 사례를 한다고.”

후후, 웃으며 그녀는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

불현듯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누가 들어도 평범한 인사치레일 뿐인데 왜 이렇게 거슬리는 걸까?

거슬리는 것은 또 있었다. 그녀는 봉투 안을 슬쩍 손톱 끝으로 벌려 보더니 그대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내용물이 뭔지 전혀 흥미가 없는 것 같은 태도였다.

내가 보는 앞에서 안을 확인하는 것은 품위 없는 짓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

생각의 방향을 바꿔 봤지만 그래도 역시 꺼림칙했다. 애너벨은 너무나, 너무나 태평했다. 마치 이런 건 전혀 관심 없는 일인 것처럼.

뭔가 있다.

그것은 추측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그녀는 뭔가 숨기고 있는 것이다. 회원 수가 엄격히 제한된 컨트리클럽 회원권이라든가 고가의 보석이라든가 필모그래피에 큰 도움이 될 어느 영화의 배역 같은 시시한 물건이 아니라 뭔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것을.

“그럼 이제 볼일은 끝난 건가요?”

애너벨의 목소리에 나는 정신이 들었다. 그녀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를 내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나는 급하게 머리를 굴렸다.

“네, 저 죄송하지만 물을 좀 마실 수 있을까요? 너무 긴장을 했던지 목이 마르는군요.”

어색한 미소를 덧붙이자 그녀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별의 뒤처리를 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죠.”

애너벨은 모두 이해한다는 듯이 말하며 주방으로 향했다. 잠시 뒤 그녀는 유리컵에 찬물을 담아 돌아왔다.

“여기요.”

“감사합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컵을 받았다. 그것은 섬세하고도 미묘한 타이밍이 필요한 행위였다. 불과 몇 초에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미소를 잃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몸의 솜털까지 바짝 곤두서는 것 같았다.

“어머나!”

“이런!”

나와 그녀는 거의 동시에 탄성을 내질렀다. 아슬아슬한 타이밍으로 그녀와 내 손이 어긋나고, 컵은 곧바로 기울어져 내 셔츠와 바지를 흠뻑 적시며 바닥으로 향했다.

퉁, 하고 둔탁한 소리를 내며 컵이 카펫 위로 떨어졌다. 나와 그녀는 떨어진 컵을 보고 잠시 굳어져 있다가 거의 동시에 고개를 들어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런, 죄송합니다. 긴장이 풀렸는지 그만.”

민망해하는 것처럼 두 손을 휘적이며 제스처를 취하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뇨, 괜찮아요. 그보다 어쩌죠? 옷이 흠뻑 젖었네요.”

얄궂게도 컵 안에 들었던 물은 내 셔츠 허리춤을 지나 가랑이 사이로 정확하게 쏟아졌다. 물론 그것은 내가 의도했던 대로였다. 나는 최대한 곤란해하는 표정을 꾸며 내어 말했다.

“아, 이런…… 하필 이런 곳에.”

뒤늦게 그녀는 시원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어쩔 수 없죠. 벗어요, 말려 줄게요.”

이번에는 진심으로 민망해졌다. 나는 몸을 돌려 주춤거리며 바지를 벗었다. 그 짧은 시간 나는 재빨리 집 안의 구조를 확인했다.

“와우, 당신 엉덩이가 굉장히 예쁘네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빤히 내 엉덩이를 보고 있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몸을 돌리자니 앞이 민망해져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엉거주춤 몸을 숙인 채 옆으로 바지를 건네주었다. 애너벨은 다 안다는 듯이 씨익 웃더니 바지를 팔에 걸치고 몸을 돌렸다.

“전남편이 입던 파자마가 어디 있을 거예요. 버리려고 모아 놨던 거지만, 그거라도 괜찮다면 옷이 마를 동안 입고 있겠어요?”

“아, 물론입니다. 감사합니다.”

황급히 인사를 하자 애너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져다줄게요. 잠시만 기다려요. 그걸 어디다 뒀더라?”

기억을 더듬는 듯 두리번거리는 그녀에게 나는 당부했다.

“바지가 마르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애너벨이 나를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 또한 웃더니 짓궂은 시선을 아래쪽으로 흘긋 던졌다.

“그쪽도 말려야 하지 않겠어요?”

그녀의 말대로 나는 속옷까지 젖어 있었다. 화끈 얼굴이 달아올라 황급히 두리번거린 내게 그녀가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드라이어는 저쪽 욕실에 있어요.”

“고맙습니다.”

거듭 인사를 하는 나를 뒤로하고 그녀는 세탁실로 향했다. 나는 욕실로 향하는 척하면서 슬쩍 다른 쪽으로 빠졌다. 지난번 보석을 전달하러 왔을 때 그녀는 그것을 받아 소중하게 안으로 가지고 들어갔었다. 대부분 그런 물건들은 서재나 침실에 두니까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서재는 두 번째 방이었다. 문을 열어 확인한 나는 재빨리 들어가 안을 뒤졌다. 멋대로 남의 집을 들쑤시다니, 정말 무례한 짓이었다.

하지만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여기 없으면 그만두고 일단 보고를 하자, 하고 생각했을 때 나는 마지막 서랍에서 내 의심을 확인시켜 주는 증거를 발견했다.

* * *

♩♬♩♬♬♩♬♬♩♩♪…….

벨 소리는 계속 울렸지만 받는 사람은 없었다. 이내 흘러나오는 기계음에 나는 전화를 껐다. 다시 버튼을 눌렀지만 전화를 받을지는 의문이었다. 아마 휘태커는 지금쯤 경호에 정신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전화를 안 받는 일은 드문데.

혹시 파티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키이스가 낮에 갑자기 일정을 바꿔 파티에 참석하는 바람에 경호 팀은 비상이었다. 어쩌면 지금 뭔가 곤란한 상황일지도 몰라, 하고 생각했을 때 갑자기 전화가 연결됐다.

“휘태커 씨? 연우입니다, 휘태커 씨?”

[……지…… 서…….]

소리는 자꾸만 끊겨서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주변이 소란스러워 그런지 연결이 안 되는 듯했다.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끊고 계속해서 차를 달렸다. 이 일은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안 돼.

*

*

파티가 열리는 저택에 도착했을 때 주변엔 경호원들이 가득 깔려 있었다. 모두 자신의 고용주를 지키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수의 감마를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건 극알파들이 모이는 장소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알파든 오메가든 모든 계층을 통틀어 페로몬의 영향을 가장 덜 받는 부류이니까. 이 사람들도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영향을 받는다고는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급히 휘태커를 찾았다. 이들이 페로몬에 영향을 받지 않는 이유는 그 향기를 맡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내가 굳이 밝히지 않으면 내가 알파인지 베타인지 전혀 구분하지 못했다. 이번에도 나를 가로막은 경호원은 내 신분을 확인하면서도 개인적인 호기심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시선을 보냈다. 익숙한 일이기 때문에 나는 서둘러 말을 했다.

“피트먼 씨의 비서입니다. 보고를 할 일이 있어서 경호를 맡고 있는 휘태커 씨를 찾아왔습니다. 전 오메가입니다.”

“……아.”

그의 미간이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이유는 뻔했다. 나는 곧바로 덧붙였다.

“무슨 파티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휘태커 씨만 만나고 바로 갈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페로몬 파티의 경우 몸을 파는 오메가들을 사 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간혹 나 같은 경우는 잘못해서 휩쓸리는 사고도 일어나곤 했다. 지난번의 일을 떠올리자마자 심장이 서늘해지는 것 같았으나 이제 와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 것 같더니 곧 몸을 비켜 길을 만들어 주었다.

“조심하세요, 지금 한창 난리니까.”

한마디 경고를 덧붙인 그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한 후 나는 서둘러 들어갔다. 향을 무마해 준다는 사탕도 한꺼번에 두 개나 입에 넣었다. 코끝이 땅겨 오는 것을 느끼며 나는 휘태커를 찾았다. 아마도 지정된 자리에서 대기하고 있을 것이다.

급하게 두리번거리는데, 키이스의 경호 팀 중 한 명을 발견했다.

“저기!”

서둘러 쫓아가 팔을 붙잡자 그는 곧 나를 알아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연우, 여긴 무슨 일입니까?”

“좀 급한 일이 있어서 휘태커 씨를 만나러 왔는데, 어디 있습니까? 전화가 연결이 잘 안 돼서.”

그는 자신의 휴대 전화를 꺼내 보더니 쯧, 혀를 찼다.

“페로몬 때문에 기계가 맛이 간 모양이에요. 자주 있는 일이죠. 사람도 맡지 못하는 페로몬에 기계가 홀리다니 정말 웃기죠?”

그는 웃었지만 나는 마주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별다른 반응이 없는 나를 보고 무안해진 남자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가시죠. 아마 주차장에 있을 겁니다.”

그를 쫓아 얼마간 걸어가자 들었던 대로 즐비해 있는 고가의 차량들 사이로 키이스의 벤틀리가 보이고, 휘태커는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서서 다른 경호원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휘태커 씨!”

나는 반가운 마음에 소리쳐 그를 불렀다. 무심코 뒤를 돌아본 그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연우, 여긴 무슨 일로? 몸은 괜찮습니까?”

지난번 파티에서 있었던 사고를 떠올리는 게 분명했다. 나는 보란 듯이 사탕을 볼로 밀어 불룩하게 만들어 보이고 웃었다. 휘태커 또한 하하 웃더니 마침 생각난 듯 주머니에서 사탕을 꺼내 비닐을 찢었다.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계속 전화했었죠?”

그는 사탕을 입에 넣고 얼굴을 찌푸렸다.

“오늘 아주 난리가 난 모양이에요. 듣자 하니 극알파 한 명이 아예 맛이 갔다던데. 러트가 왔다나 뭐라나. 그래서 지금 페로몬이 넘치는지 기계가 다 이상해요. 이거 차는 제대로 가려나.”

쯧, 혀를 찬 휘태커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키이스의 차를 돌아보았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오늘 애너벨 제임스 씨에게 이별을 통보하러 갔었는데 거기서 수상한 물건을 찾았습니다. 여기, 사진.”

나는 급히 휴대 전화로 찍은 사진을 찾아 내밀었다. 곧바로 정색을 하고 화면을 확인한 휘태커가 미간을 찌푸렸다.

“정자은행 위탁증? 이게 뭡니까?”

의아해하던 그가 사진을 넘겨 보더니 이내 눈을 깜박였다.

“아니, 그러니까 이분이 피트먼 씨의 정액을 훔쳤다는 겁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 정자은행에 보관 중인 겁니다. 찾아내서 조치하지 않으면…….”

나는 서둘러 말했으나 그의 반응은 어딘지 미묘했다. 음, 하고 턱을 쓰다듬던 그가 내게 휴대 전화를 돌려줬다.

“알겠습니다. 일단 확인해 보고 피트먼 씨에게도 보고를 하죠.”

뜻밖에도 미지근한 반응에 나는 당황했다.

“이건 서둘러야 하지 않습니까? 혹시나 인공 수정이라든가 매매라든가 하게 되면…….”

휘태커는 한쪽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매매라면 이게 피트먼 씨의 정자라는 걸 증명해야 하는데 피트먼 씨의 DNA를 어떻게 구하겠습니까. 그걸 대조하겠다고 하면 바로 훔친 게 들통날 테니 그런 바보 같은 짓은 할 리가 없고. 혹시 인공 수정을 하겠다고 하면.”

갑자기 그가 풋 웃음을 터뜨렸다.

“빈 정자로 얼마든지 해 보라고 하죠, 뭐.”

“빈 정자요?”

어리둥절해져 되물은 내게 휘태커는 오히려 놀란 표정을 지었다.

“몰랐습니까? 극알파는 수정을 조절한다는 걸. 이 정자들은 다 수정 능력이 없는 것들이란 말입니다.”

그는 내 얼굴을 보더니 이런, 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기 때문에 저렇게 방탕하게 놀아날 수 있는 거죠. 페로몬이 쌓이면 조절이 안 된다고는 하던데 그런 일이 흔하게 있겠습니까? 저 정도로 페로몬을 빼내면 쌓일 일이 없죠.”

그건 맞는 말이었다. 나는 당황해 눈을 깜박였다.

“그냥 극알파라는 걸 자랑하려고 페로몬을 내보내는 건 줄 알았는데…….”

“영역 표시라는 겁니까? 짐승이 따로 없네요.”

휘태커는 소리 내어 웃었지만 그도 나도 알고 있었다. 극알파라는 존재들은 여러 가지 의미로 짐승이나 마찬가지라는 걸. 그것도 먹이 사슬의 최상위에 위치한. 휘태커는 으흠,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말했다.

“아무튼 이 부분은 알아보겠습니다. 어쨌든 DNA 대조 없이 피트먼 씨의 빈 정자라도 사겠다는 수집가들이 있긴 있을 테니 그런 거래는 미연에 방지해야죠.”

휘태커는 불현듯 피식 웃었다.

“그게 빈 정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값어치가 훅 떨어질 테니 애너벨도 꽤나 실망하겠군요.”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 줄 알았다면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달려오지 않았을 텐데. 허탈한 표정을 드러내고 만 내게 휘태커는 위로하듯 어깨를 두드렸다.

“연우의 성실함은 누구나 알고 있어요. 항상 덕을 보고 있죠.”

“감사합니다.”

맥 빠진 인사말에 휘태커는 미소를 짓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제 그만 돌아가요, 연우. 아무래도 위험하니까.”

“네, 그래야죠.”

오래 있어 봤자 폐가 될 뿐이다. 이 사람들은 키이스를 경호하기 위해 있는 것이지 나의 안전과는 무관하다. 내 몸은 내가 챙겨야 하는 것이다.

또다시 전과 같은 사고에 휘말리는 건 절대 싫었다.

“그럼 이만 가겠습니다. 이 건은 잘 마무리 부탁드립니다.”

“잘 가요, 조심해서.”

걱정스러운 당부를 뒤로하고 나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긴장이 풀리고 나니 지금껏 느끼지 못했던 페로몬의 단내가 돌연 코끝에 와 닿았다. 입 안의 사탕은 이미 반 이상 녹아 있었다.

갑자기 위기감이 느껴졌다. 나는 사탕을 한꺼번에 두 개 더 털어 넣고 뛰다시피 정원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차를 주차해 둔 곳은 정문 밖의 거리였다. 어쨌든 거기까지만 가면 한숨 돌릴 수 있다.

어서, 어서 가야 해.

어서.

어느새 나는 달리고 있었다. 내 뒤를 쫓아오는 페로몬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면 곧바로 그것이 나를 덮쳐 그대로 한입에 먹어 치울 것 같았다.

한 번 자각한 공포는 나를 극한으로 몰고 갔다. 나는 숨을 헐떡거리며 미친 듯이 달려갔다.

막 대문을 통과하려던 찰나.

“……?”

갑자기 뭔가가 눈앞에 확 나타났다. 눈부신 헤드라이트의 불빛에 나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가렸다. 누군가 내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나는 숨을 삼키며 끌려갔다. 스포츠카는 내 바로 앞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괜찮습니까?”

위에서 들린 음성에 나는 경비를 맡은 경호원이 나를 구해 줬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아, 아, 네.”

간신히 더듬거리며 대답하자 그는 나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조심해요, 여기 오는 사람들은 죄다 하나같이 운전을 왜 저렇게 하는지.”

질렸다는 듯이 그는 말했으나 내 귀엔 제대로 와 닿지 않았다. 나는 인사를 하고 차를 세워 둔 곳으로 향했다.

기억하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현관 앞에서 문을 열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열쇠는 딸그락거리며 계속해서 손잡이를 긁기만 할 뿐 도대체 구멍을 찾아 들어가질 못했다. 한참 애를 먹다 부들거리는 손을 다른 손으로 잡고 간신히 열쇠를 끼워 맞췄다.

하아, 하아. 하아, 하아.

문이 열리자마자 나는 달려들어 갔다. 바들바들 떨면서 세 개의 자물쇠를 모두 잠그고 안쪽의 빗장까지 채웠다. 의자를 문 앞에 갖다 놨지만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서 다급하게 옷도 벗지 않은 채로 침실로 들어가 창문을 잠그고 문까지 걸어 잠갔다. 마지막으로 침대로 뛰어들어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래도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머릿속에 있는 건 내 앞을 스쳐 지나간 스포츠카에 앉아 있던 남자뿐이었다.

나를 강간하려고 했던 남자.

그날 있는 힘껏 물어뜯었던 그 남자의 성기가 입 안에서 느껴졌다. 나는 곧바로 구역질을 했지만 쓰디쓴 위액 말고는 나오는 게 없었다.

하아, 하아. 하아, 하아.

이겨 낸 줄 알았는데.

나는 공포에 질려 생각했다. 그것은 착각이었다. 그저 모른 척 묻어 놨을 뿐이다. 나는 결코 이겨 낸 적도 이겨 내려고 한 적도 없었다. 그저 무시했을 뿐.

그리고 그것은 지금 거대한 괴물이 되어 한입에 나를 삼켜 버린 것이다.

* * *

♬♬♩♩♪♪♬♬…….

흐릿한 벨 소리에 나는 정신이 들었다. 휴대 전화의 번호 위에 비서실이라고 써 있었다.

[연우, 어떻게 된 거예요? 지금 오고 있는 중인가요? 사고가 나거나 한 건 아니죠?]

다급한 목소리를 나는 잠시 알아듣지 못했다. 아직 부석거리는 눈을 어렵게 깜박이며 뜸을 들이다 나는 물었다.

“……엠마?”

[네, 연우. 지금 어디예요?]

다급한 목소리가 곧바로 뒤따라왔다.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 후우, 하고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가고 있어요, 무슨 일입니까?”

말을 하고 나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엠마는 주저하듯 물었다.

[항상 일찍 오는데 오늘은 늦어서…… 혹시 사고라도 났나 했어요.]

차 안의 시계가 출근 시간이 지났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나는 두 손으로 핸들을 꽉 잡고 심호흡을 했다.

“오늘은 좀 늦을 것 같습니다. 피트먼 씨에게는 제가 따로 해명할 테니 일단 스케줄대로 일을 시작해 주세요. 피트먼 씨에게 오늘의 일정을 먼저 드리고 하던 대로 하시면 됩니다. 곧 도착할 겁니다.”

엠마는 어리둥절해하며 전화를 끊었다. 나는 핸들을 붙잡은 채 이를 악물었다. 엠마에게 차마 말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아직도 주차장을 벗어나지 못했다. 집 밖으로 나와 차에 오르기까지 모든 힘을 다 써 버린 탓에 운전석에 앉은 채 벌써 한 시간이나 움직이지 못한 것이다.

출근을 해야 돼.

나는 두 손을 핸들에 고정하고 떨리는 한숨을 규칙적으로 내보냈다.

괜찮아, 괜찮아.

한 차례 눈을 감았다 떴을 때, 나는 하얗게 질린 채 생각했다.

괜찮지 않아.

*

*

쾅!

갑자기 창문을 때리는 소리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질렀다. 하아, 하아. 내 숨소리가 계속 귀를 때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

누군가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몇 번이나 눈을 깜박여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간신히 고개를 돌렸을 때, 믿을 수 없는 얼굴이 나를 보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너.”

짜증스럽게 나를 내려다보는 키이스의 얼굴을 나는 차창 너머로 그저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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