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이 남자가 왜 여기 있지?
나는 흐릿한 머릿속으로 간신히 생각을 떠올렸다. 뒤늦게 내가 아직 차 안에 앉아 있다는 사실과, 벌써 뉘엿뉘엿 해가 저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여전히 알 수 없는 일은 키이스가 눈앞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지금 환상을 보고 있나?
멍하니 쳐다만 보는 내 시선에 키이스는 기가 막힌 듯 짧게 혀를 찼다. 다음 순간 그가 주먹으로 차창을 또 한 번 세게 내리쳤다.
“악!”
비명과 함께 몸을 움츠리자 키이스가 이를 갈며 말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당장 이 문 열고 나오지 못해?”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덜덜 떨리는 몸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가 자꾸만 맞부딪쳐 입술을 깨무는 것도 애를 먹었다.
달칵.
간신히 차의 문을 열었다. 가까스로 차 밖으로 나가 허리를 펴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검은 정장의 사내들이 내 차를 빙 둘러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중에는 휘태커의 얼굴도 보였다. 어렵게 머리를 움직여 나는 말을 생각해 냈다.
“죄송합니다, 제가, 운전을 할, 수가, 없어서.”
말이 자꾸 끊기는 것은 내가 말을 더듬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 귀가 정상이 아니기 때문일까.
거기까지가 내 의식의 끝이었다.
* * *
희미한 단내가 느껴졌다. 내가 알고 있는 냄새였다. 뭐였지? 이건.
움칠 놀라며 깨어났다. 온몸이 전기에 맞은 것처럼 짧게 튀어 올랐다. 나는 멍한 눈을 깜박였다. 뒤늦게 이곳이 차 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내 오래된 차는 아니었다. 내 침대보다 편안한 가죽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던 나는 천천히 눈동자를 굴려 실내를 둘러보았다.
대리석으로 마감된 실내와 은은한 가죽 향에 뒤섞인 페로몬 향, 바닥에 깔린 우아한 카펫까지. 그리고 그리 달갑지 않은 사실이었지만 내 옆에는 키이스가 앉아 있었다. 희미하게 느껴지던 단내가 차에 밴 페로몬 향기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달칵, 그가 라이터를 켜는 소리가 들렸다. 주저하며 시선을 향하자 담배를 입에 문 키이스가 불을 붙이는 모습이 보였다.
천천히 빨아들이는 담배 끝에서 빨갛게 불꽃이 살아났다가 점멸했다. 후, 하고 길게 연기를 뱉어 낸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말해 봐, 이번엔 또 뭐가 문제야?”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키이스는 지긋지긋해하는 것 같았다. 나는 당혹스러워졌지만 마땅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머릿속이 온통 뒤엉켜서 문장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표현이 맞다. 다행히 차 안에는 그와 나 단둘뿐이었다. 운전석은 패널로 가로막아 완벽하게 독립된 공간을 만들었다.
전에도 기절한 적이 있었던가?
나는 제일 먼저 그것을 떠올려 봤다. 당장에는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키이스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득 현기증이 났다. 나는 어떻게든 그에게 상황을 설명하려 애썼다. 어렵게 기억을 짜 맞춰 입을 열었을 때, 나는 불현듯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별것도 아닌 일 가지고 유난스럽게.>
그 순간 나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이러쿵저러쿵 하소연해 봤자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키이스는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또다시 상처받겠지.
입술을 깨물어 하려던 말을 삼켜 버렸다. 두어 차례 심호흡을 한 뒤 나는 입을 열었다.
“……상담을 받고 싶습니다.”
내가 듣기에도 지친 기색이 역력한 음성으로 나는 말을 이었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미리 알려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갑자기 이렇게 되어서.”
다행히 평소처럼 무난하게 말을 끝맺을 수 있었다. 의미 없이 내 손끝만 보고 있는데, 문득 키이스가 전화를 거는 듯한 기척이 느껴졌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스튜어드에게 지금 간다고 해.”
키이스를 담당하는 주치의의 이름이었다. 평소 자신이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남자에게 무슨 상담이 필요할까, 나를 비롯한 모두는 생각했었다. 실제로 나는 한 번도 그 의사에게 키이스의 상담에 대한 예약을 잡아 본 적이 없다. 따라서 그저 이름만 기억하고 있는 의사일 뿐이었는데.
무심코 놀라 고개를 돌리자 키이스는 담배를 든 손으로 미간의 주름을 문지르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내가 아니라 내 비서라고. 무슨 상관이야, 그래, 지금.”
다른 때라면 내가 스튜어드에게 전화를 해야 할 상황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니 휘태커나 엠마에게 지시를 했을 것이다. 누가 전화를 했을까? 나는 무의미한 호기심을 느꼈지만 물론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키이스가 전화를 끊기를 기다려 고작 그 말만을 되뇌자 그는 찌푸린 얼굴로 짧게 나를 일별하더니 곧 시선을 돌려 버렸다. 그 뒤 우리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키이스에게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나는 입을 다물었고, 키이스 또한 말을 하지 않은 채 차는 병원에 도착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차에서 내릴 수가 없었다. 온몸이 굳어져 덜덜 떠는 내 모습에 키이스의 얼굴이 또다시 일그러졌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떨림이 계속됐고, 나는 급기야 과호흡까지 일으켰다.
하아, 하아. 하아, 하아.
휘태커가 급히 가져다준 비닐을 입에 대고 떨리는 숨을 가라앉혔다. 아득한 의식 너머로 키이스가 차 밖으로 나가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
나는 순간 비명을 삼키며 훌쩍 뛰어오르듯 뒤로 물러났다. 차창과 의자 사이에 바짝 달라붙어 덜덜 떠는 내 모습에 처음 보는 남자가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진정해요. 난 노먼 스튜어드. 의사입니다. 피트먼 씨의 비서라니 내 이름은 들어 봤겠죠?”
미소를 덧붙이는 그의 얼굴은 온화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온몸이 굳어진 채 움직이지 못했다. 스튜어드는 자신의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내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의 뒤에는 자동차의 문이 훤히 열려 있었다. 언제든 문제가 생기면 휘태커든 누구든 나를 도와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씩 긴장이 풀렸다.
“네, 좋아요. 잘했어요.”
스튜어드는 부드럽게 나를 격려했다.
“쿨럭, 쿨럭.”
갑자기 기침이 나왔다. 나는 밭은 숨과 함께 어깨를 들썩거렸다. 간신히 내가 얼마 정도 진정을 하고 나자 그제야 스튜어드가 입을 열었다.
“좀 괜찮습니까, 이제?”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려 애쓰며 간신히 대답했다.
“네.”
그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스튜어드는 별다른 변화 없이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공황 장애 같은데,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스튜어드는 그래요, 하더니 한층 더 부드러운 음성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원인이 될 만한 일이라든가 짐작이 되는 일이 있나요? 발작이 일어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즉시 대답을 할 수가 없어서 입술을 깨물었다. 그 일을 내 입으로 말하는 것은 죽도록 괴롭고 모멸감을 불러일으켰다. 다시 숨이 거칠어지는 내게 스튜어드가 급히 말했다.
“괜찮아요, 연우. 여긴 안전해요. 걱정하는 일은 절대 생기지 않을 거예요. 안심하고 천천히 숨을 내쉬어 봐요. 그래요, 잘했어요. 다시 천천히…….”
간신히 호흡을 되돌리고 나자 이번엔 엄청난 피로감이 밀려들었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문득 허탈해졌다. 이렇게 괴로워하는 것도 부끄러워하는 것도 모두 다 부질없는 일처럼 여겨졌다. 이성이 돌아오고 나면 난 아마 후회할 것이다. 수치심도 괴로움도 모두 몇 배로 커져서 내게 돌아오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난 너무 지쳤고, 그냥 다 끝내 버리고 싶은 기분뿐이었다.
“……그날 파티에서…….”
느리게 낮은 소리로 읊조리는 그날의 일을 스튜어드는 잠자코 듣기만 했다.
*
*
“……이상입니다.”
간신히 말을 끝맺었을 때는 탈진해서 또다시 기절할 것 같았다. 너무 지쳐서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더듬거리며 이어지는 내 말을 끈기 있게 묵묵히 듣던 스튜어드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랬군요.”
멍하니 눈을 깜박이는 내게 스튜어드는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온화하게 말했다.
“힘들었을 텐데 말해 줘서 고맙습니다. 이제 쉬어요, 피트먼 씨에게는 내가 얘기를 할 테니.”
내가 놀라지 않도록 그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자 뻥 뚫린 차의 문에 시선이 고정됐다. 누군가 당장 올라탈 것 같아 눈을 크게 떴을 때, 그것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스튜어드가 밖에서 차의 문을 닫았다.
후우.
확실히 혼자가 되고 나자 그제야 온몸의 긴장이 풀려 깊은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갑자기 피로가 밀려와 눈을 감고 차창에 기댔다. 문득 시선 끝으로 키이스와 얘기를 하는 스튜어드를 본 것 같았다. 하지만 의식은 금세 까맣게 내려앉았고, 나는 깜박 잠이 들었다.
덜컥.
불시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의식이 깨어났다. 화들짝 놀라 굳어진 채 눈만 크게 뜨는데, 담배 냄새에 섞인 희미한 페로몬 향기가 느껴졌다.
아.
갑자기 안심이 되면서 몸의 긴장이 풀렸다. 뒤이어 향기의 주인이 선뜻 차에 오르자 크게 떴던 눈도 제자리를 찾았다.
키이스는 곧바로 차의 문을 닫더니 잠시 말이 없었다. 나는 그와 단둘이 차에 남겨진 불안과 긴장 속에서 묘한 기쁨을 느꼈다. 혹시나 거품처럼 지금의 행복이 덧없이 사라질까 두려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용기 없는 나 대신 먼저 입을 연 것은 키이스였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의미를 알지 못해 눈만 깜박였다. 키이스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나는 이해했다. 입술을 깨물었다가 다시 놓으며 나는 입을 열었다.
“……이대로는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장기 휴가를 주시거나…… 퇴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마지막 말은 빠르게 덧붙였다. 곧바로 입을 다물고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키이스는 반응이 없었다. 나는 그를 볼 용기가 나지 않아 시선을 피해 버렸다. 페로몬에 섞인 담배 향기가 한층 진하게 느껴졌다. 이윽고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재계약을 한 게 언제지? 6개월은 됐나?”
“……다섯 달하고 20일 됐습니다.”
“계약 기간은 1년이야. 위약금을 낼 자신은 있어?”
“죄송합니다. 시간을 좀 주시면…….”
나는 망설이다 덧붙였다.
“저에겐 큰돈이지만 피트먼 씨에게는 푼돈이지 않습니까. 급하게 필요한 금액도 아닐 텐데요.”
그 말에 키이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괜히 기분만 상하게 만든 걸까? 내심 조마조마해졌을 때, 그가 신경질적으로 담배 연기를 마셨다 내뱉었다.
“넌 필요해.”
저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다. 그는 그저 비서인 내가 필요할 뿐이다. 귀찮은 일들을 처리하고, 싫은 일들을 대신해서 맡아 주고, 언제 어느 때든 그를 편하게 해 줄 눈치 빠른 누군가가. 그것은 꼭 내가 아니라도 되는 것이다. 단지 지금 당장 그의 요구에 가장 적합한 것이 나일 뿐.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심장이 아릿하게 저려 왔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출근을 할 수가…… 없습니다.”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리는 것을 나는 가까스로 붙잡았다.
“간신히 차에 타긴 했는데 그 이상은 도저히……. 지금은 진정이 됐지만 내일 또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말끝이 애매하게 흐려졌지만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솔직히 이 차에서 나갈 수 있을지조차도 모르겠다. 누군가 옆에 있다는 것은 안심이 됐지만 돌아가면 나는 또다시 혼자 남을 것이다. 그 공포를 이겨 낼 수 있을까.
아니, 다시 세상에 나갈 수 있을까.
잠시 동안 그는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는 전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이윽고 키이스가 몸을 움직였다. 손가락으로 차창을 똑똑, 노크하듯 두 번 두드린 것이 전부였지만.
고작 그런 사소한 동작으로 그는 세상을 움직였다. 그때까지 멈춰 있던 시간이 갑자기 급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운전석에 누군가 앉는 것 같은 기척이 느껴지고, 곧이어 시동이 걸렸다. 차창 밖을 보자 휘태커를 비롯해 경호원들이 다급하게 여기저기로 흩어지며 차 안에 오르고 있었다.
잠시 뒤 나와 키이스가 탄 차가 출발했다. 나는 목적지도 묻지 않은 채 그저 입을 다물고 있었다. 키이스 역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병원에 올 때와 마찬가지로 돌아갈 때도 우리는 침묵했다.
……아.
차창 밖으로 보이는 낯익은 풍경에 나는 우리가 탄 차가 내 허름한 보금자리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 시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내가 그만두겠다고 했던 말에 키이스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궁금했다. 나를 대신할 다른 비서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할까? 세상에는 많은 인재들이 있으니 또다시 붙잡는 일은 없겠지.
“……처음 얼마간은 불편하시더라도 곧 적응될 겁니다.”
무심코 말했다. 키이스가 흘긋 시선만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눈을 내리깐 채 말을 이었다.
“유능한 사람은 많으니까요……. 엠마도 이제 많이 익숙해졌으니 이번에는 크게 무리가 없을 거고요.”
나름의 대안을 제시하자 뜻밖에도 키이스가 피식 웃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로 나를 비웃듯이.
“지금 바로 나한테 맞춰서 일을 할 사람은 너뿐이지.”
그것은 사실이었다. 살면서 지금껏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일이란 결코 없었을 이 남자는 당장 눈앞에서 마음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그걸 참지 못했다.
애초에 키이스 나이트 피트먼은 다른 사람이 적응할 때까지 기다려 줘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나 역시 처음 몇 달은 고생이 많았다. 더욱이 내 선임이 키이스의 폭언에 질려 그만두고 소송을 걸었을 때, 날벼락처럼 떠밀리듯 팀장이 돼 버리고 말았던 나는 정말로 악몽에 빠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를 쓰고 키이스의 요구에 맞추려고 애썼다. 퇴근 시간을 넘기기 일쑤에 주말에도 전화 한 통화면 내 볼일 따위는 무시한 채 정신없이 뛰어다녔지. 생각해 보면 키이스가 얼굴을 찌푸린 것은 처음 며칠뿐이었던 것 같다. 그 뒤 그는 내가 일을 하는 것에 꽤 만족해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것은 당연했다. 난 이 남자를 위해 내 인생을 포기하다시피 했었고, 일을 하면서 이 남자의 취향과 생각을 하나하나 알아 갈 때마다 기쁨으로 몸을 떨었으니까.
정신없이 몰두해서 이 남자가 원하는 것을 해내는 것은 나에게 더없는 쾌감을 안겨 주었다. 비록 이 남자는 한 번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죄송합니다.”
내가 할 말은 그것뿐이었다. 키이스는 다시 말이 없어졌다. 어느덧 차의 속도가 느려졌다. 조만간 멈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숨이 가빠졌다. 차에서 내려야 한다.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혼자 침대에 누워서 공포와 싸워야 한다.
또다시 머릿속이 뒤엉키고 말았을 때, 불현듯 어떤 향기가 내 정신을 일깨웠다.
페로몬의 향기다.
동시에 나는 나도 모르게 키이스를 돌아보고 말았다.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나를 보고 있었다. 주변을 떠도는 공기는 그대로였다.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균일한 밀도 속에 오직 페로몬의 향기만이 강하게 이질적으로 파고들었다. 아, 하고 나는 입을 열었다. 믿을 수 없어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대답을 알고 있었다.
키이스의 보라색 눈동자가 간헐적으로 금빛으로 변색됐다. 그가 내보내는 페로몬이 삽시간에 몇 배로 증가했다. 온몸이 향기에 짓눌리는 것 같았다. 맥박이 급속도로 빨라지고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눈앞이 어지러웠다. 그날의 기억이 갑자기 나를 덮치는 듯했다. 벗은 남자들, 내게 덤벼들던 손, 입 안 가득 느껴지던 이물감까지.
하.
나도 모르게 깊이 숨을 들이켜고 말았다. 동시에 짙은 페로몬이 폐 속 깊숙이 빨려 들어와 갑자기 내 숨통을 막아 버렸다. 그대로 숨이 멈춰 버렸을 때, 갑자기 키이스가 내 머리를 잡아 끌어당겼다.
“……!”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곧바로 입술이 맞부딪치고, 혀가 입 안으로 들어왔다. 반사적으로 그를 밀어낼 뻔했다. 하지만 키이스는 간단히 내 손을 잡아 누르고, 반항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나는 버둥거렸지만 머리를 붙잡은 손의 악력을 이길 수가 없었다. 속수무책으로 입 안을 점령당하고 입술을 사납게 물어뜯겼다. 번지는 피를 문지르며 키이스가 집어삼킬 듯이 거침없이 빨아들였다.
목구멍 안으로 타액이 꿀꺽꿀꺽 넘어갔다. 동시에 악몽 같은 기억이 떠오르며 욕지기가 올라왔지만 피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었다. 나는 공포에 질려 헐떡이며 폭력에 가까운 키스를 온전히 받아들였다. 그동안 키이스는 마음껏 내 입 안을 핥고, 문지르고, 타액을 가져갔다.
“좋아.”
마침내 입술이 떨어졌을 때, 키이스의 숨결은 나만큼이나 거칠었다. 멍한 시야에 그의 금빛 눈동자가 신기할 정도로 강하게 각인되었다. 키이스는 낮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 집으로 들어와. 그럼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