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잠시 나는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 내가 들은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입을 벌렸지만 소리가 나온 것은 몇 초 뒤였다.
“피트먼 씨의 집으로요?”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음성이 귀를 때리고 지나갔다. 내 목소리가 원래 이랬던가? 그저 멍하니 눈만 깜박이자 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의 젖은 입술이 문득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내 집만큼 안전한 곳은 세상에 없어. 그럼 된 거 아닌가?”
“하, 하지만.”
왜 갑자기 얘기가 그렇게 되는 건지 알 수가 없었지만 대답은 곧 나왔다.
“스튜어드가 말하더군, 공포를 이기는 방법 중 하나가 그것에 노출시키는 거라고.”
키이스는 담배를 꺼내며 말했다.
“네 경우는 페로몬이겠지.”
바로 극알파의 페로몬을 말하는 것이다. 나를 강간하려고 했던 남자들과 같은 페로몬을 가진 남자. 그러면서도 내게는 결코 욕정하지 않을 유일한 남자. 내가 이토록 열망하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 남자.
바로 키이스였다.
그의 말대로 내 머릿속에는 더 이상 그날의 기억이 남아 있지 않았다. 대신 남아 있는 건 오직 눈앞의 남자뿐이었다.
“저한테 왜 그렇게까지…….”
자신감 없는 목소리가 사그라들었다. 키이스는 신경질적으로 라이터를 찰칵거렸다.
“지분 5퍼센트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저렴하잖아.”
내가 그토록 유용한 비서라는 게 기뻐해야 할 일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럼 제 증상이 나아질 때까지 계속 제게 페로몬을 쏟아붓겠다는 겁니까?”
희미하게 목소리가 떨렸다. 키이스도 눈치챘을까? 내심 조마조마해하는데 한 차례 연기를 빨아들인 키이스가 후, 하고 그것을 뱉어 내며 빈정거렸다.
“왜 아니겠어?”
나아 가고 있던 입술이 다시 욱신거렸다. 희미하게 피 냄새가 났다. 무심코 혀로 핥자 타액이 아닌 다른 것으로 혀가 미끄러졌다. 문득 키이스의 시선이 내 입술에 닿은 듯했다. 착각인지도 모른다. 그의 표정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키스는, 왜.”
나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또 내 페로몬 탓을 할까? 약은 정량보다 많이 먹었다. 향이 날 리가 없다. 내심 불안해하며 묻자 키이스가 짜증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스튜어드의 처방을 시험해 봤을 뿐이야.”
아, 하고 나는 납득했다. 페로몬을 주입하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은 섹스다. 이 남자는 나에게 넣는 대신 키스를 한 것뿐이다. 그저 나를 진정시키기 위해. 또한 스튜어드의 말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겠지.
의사의 처방은 확실했다. 그의 말대로 나는 더 이상 숨을 쉬는 것이 어렵지 않았고, 머릿속도 아까처럼 혼란스럽지 않았다. 내 번민의 원인은 오직 키이스뿐이었다.
페로몬의 단내는 여전히 고통스러웠지만 키이스의 것이라고 생각하면 견딜 만했다. 다른 의미로 견디기 힘든 이유는 오직 단 하나, 내가 오메가이기 때문이다. 발정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정량 이상의 약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만약에 그대로 노출이 됐다면 난 지금쯤 어떻게 됐을지 상상조차 하기 두려웠다.
그리고 그 즉시 키이스는 나를 해고하겠지.
씁쓸한 결말은 너무나 현실적이라서 오히려 내 정신을 맑게 만들었다. 이어서 나는 현실에 걸맞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였다. 어차피 이대로는 살아갈 수 없다. 어떻게든 치료를 받든 뭘 하든 증상을 없애야 한다.
“피트먼 씨의 페로몬은 괜찮다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나는 어렵게 입을 열어 위험한 질문을 했다. 그는 흘긋 내게 시선을 던졌다. 당혹해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내가 너한테 절대 손대지 않을 거라는 걸 너도 알잖아.”
그 말은 정답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심장이 뻥 뚫리는 기분을 느꼈다.
“……그렇죠.”
어렵게 인정하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키이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게 생각할 시간을 주려는 듯이.
키이스의 제안은 완벽했다. 최고의 의사에게 상담을 하고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데다 직장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거기다 키이스의 저택에서 살 수 있다니 이거야말로 최고의 행운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가장 문제였다. 키이스와 한집에서 살면서 내 마음을 감출 수 있을까?
약 또한 평소보다 많이 먹어야 할 것이다. 정량 이상의 약을 지속적으로 먹게 되면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 나는 알지 못했다. 언젠가 사례에서 약을 계속 과다 복용하다 어느 날 더 이상 제어가 듣지 않아 히트사이클이 멈추지 않아서 정신에 이상이 생긴 경우를 봤었다. 미친다는 건 무서웠다. 차라리 불임이 나았다.
전자의 경우는 드물고 대부분은 후자라고 하지만 과연 어느 정도 기간에 얼마나 많이 먹어야 그렇게 되는 건지 정확한 데이터는 나오지 않았다. 이 남자의 집에서 살게 되면 나는 언젠가 불임이 되거나 미칠 것이다. 어쩌면 둘 다 될지도 모른다. 이 남자의 페로몬에 뒤범벅이 되어 오메가로 변이했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이 독배를 마시지 않을 수 있을까.
차가 멈췄다. 나는 무릎 위에서 두 손을 꽉 쥐었다.
“알겠습니다.”
간신히 나는 더듬지 않고 입을 열었다.
“피트먼 씨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단숨에 말을 해 버리고 나자 긴장이 풀어졌다. 무심코 나는 농담을 했다.
“피트먼 씨가 남자와 키스라니, 이 일은 평생 비밀로 하겠습니다.”
어렵게 미소까지 지어 보이는 만용을 저질렀다. 하지만 키이스는 담배 연기를 깊숙이 빨아들였을 뿐 전혀 웃지 않았다. 후, 하고 연기를 길게 뱉어 낸 그가 짧게 냉소를 지었다.
“네 얼굴은 취향이야. 네가 여자였다면 잤을 거야.”
그랬다면 얼마 만에 나를 버렸을까?
문득 애너벨의 얼굴이 머리를 스쳤다. 가장 짧았던 기간이 얼마였더라. 나는 의미 없는 기억을 되새겼다.
키이스가 담배를 든 손으로 운전석을 가로막고 있는 패널을 짧게 두드렸다. 곧 차가 다시 출발했다.
“짐을…….”
뒤늦게 입을 열자 키이스는 비웃듯이 물었다.
“차에서 내릴 수 있겠어?”
그 말에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리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앉아 있는 것조차 힘들어 미끄러져 바닥을 구르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해 버텨야 했다. 키이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담배를 다시 입으로 가져갔다.
결국 나는 그대로 키이스의 차를 타고 그의 저택으로 향했다. 나는 무릎 위에서 손을 깍지 낀 채 의미 없이 손끝만 내려다보았다.
차 안에는 짙게 내려앉은 페로몬 향이 가득했다. 나는 발정할까 봐 무서웠지만 뜻밖에도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 이건 키이스의 페로몬이다.
눈을 감고 천천히 깊은숨을 들이켰다 내쉬었다. 폐 속 가득히 향기가 스며들 때마다 조금씩 몸의 긴장이 풀어졌다. 어느새 나는 깊은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
*
문득 몸이 흔들리는 느낌에 눈을 떴다. 초점이 맞지 않는 시야를 여러 번 움직여 간신히 짜 맞췄다. 그래도 여전히 정신은 몽롱했다. 그 증거로 나는 전신이 붕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직 잠이 덜 깬 모양이었다. 아니면 눈을 뜬 채로 선잠에 빠진 걸까?
멍하니 시선을 올렸던 나는 멈칫했다. 시야에 키이스의 얼굴이 들어왔다.
어……?
나는 멀거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런 각도에서 이 남자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내가 지금 누워 있는 건가?
시선을 눈치챈 키이스가 고개를 숙였다. 곧바로 눈이 마주치고, 나는 멍청하게 그를 마주 보았다. 문득 웃음이 나왔다. 웃은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그저 키이스가 나를 뚫어져라 내려다봤다는 것만 신기하게도 머릿속에 들어왔다.
아.
무심코 깊이 숨을 들이켰다. 페로몬과 함께 희미한 스킨 향이 느껴졌다. 산뜻한 시트러스 향. 이게 키이스의 향기구나.
나는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려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흡, 하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천천히 내쉬었다. 몸은 계속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안겨서 어딘가로 실려 가는 것처럼.
차가우면서도 부드러운 감촉이 등 뒤로 느껴졌을 때, 나는 또다시 반쯤 잠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누군가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알아듣는 것은 어려웠다. 그저 두 사람이구나, 하고 어렴풋이 떠올렸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곧 깊이 잠들었다.
* * *
똑똑.
노크 소리에 잠에서 깼다. 눈을 떴지만 잠시 동안 어리둥절했다. 여기가 어디지?
생소한 방의 풍경에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는데, 곧이어 문이 열리고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일어나셨습니까? 몸은 좀 어떠십니까?”
집사인 찰스였다. 나는 잠시 기억을 더듬느라 애를 먹었다. 어렵사리 전날의 일을 짜 맞추고 있는데, 찰스가 입을 열었다.
“피트먼 씨의 차를 타고 오시는 동안 의식을 잃었습니다. 아마 페로몬에 취해서 그런 걸 겁니다. 페로몬을 빼내면서 정신을 맑게 하는 차를 준비했습니다.”
그제야 아, 하고 납득이 됐다. 어쩐지 의식이 너무 몽롱해졌었다. 단순히 피곤해서만은 아닌, 머리가 아예 녹아 버린 것처럼.
그날 그랬듯이.
순간 심장이 싸늘하게 굳어지고 숨이 가빠졌다. 나는 급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본능적으로 아냐, 하고 떠올렸다. 그 향기와는 달랐다. 그 지독히도 단 향기에 희미하게 섞여 있던 또 다른 향기.
억지로 그것을 떠올려 봤다. 하지만 자꾸 머릿속을 맴돌기만 할 뿐 명확하게 생각이 나질 않았다.
“차를 드시면 머리가 맑아질 겁니다.”
찰스는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찻잔을 내 앞으로 슥 밀어 주었다. 나는 작은 테이블 위에 놓인 그것을 머뭇거리며 들었다.
“……아.”
뜻밖의 산뜻한 맛에 나는 눈을 깜박였다. 그의 말대로 정신이 맑아지면서 의식이 완전히 깨어나는 것 같았다. 내 반응을 확인한 찰스가 입을 열었다.
“옷은 세탁해 두었습니다. 짐은 직접 가지러 가실 겁니까? 필요하시면 별도로 준비를 해 드리라고 피트먼 씨가 지시를 하셨습니다만.”
“네?”
무심코 되물었던 나는 뒤늦게 내가 입고 있던 옷을 내려다보았다. 처음 보는 잠옷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내게 찰스가 말했다.
“준비해 둔 손님용 잠옷입니다. 갈아입히는 것은 제가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정신을 못 차리셔서.”
“아, 아뇨.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조금씩 기억이 돌아왔다. 그제야 나는 상황을 알 것 같았다. 찰스가 나를 안아서 여기까지 옮겨 주고 옷까지 갈아입힌 것이다. 무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서 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찰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내가 차를 마실 동안 서서 기다렸다.
“아직 시간은 충분합니다.”
내 생각을 꿰뚫어 본 듯 그는 말했다.
“피트먼 씨는 이제 일어나셨을 겁니다. 연우도 차를 다 마신 후에 준비를 시작하면 됩니다.”
“고맙습니다.”
나는 인사를 한 후 사이를 두고 말을 이었다.
“갑자기 이렇게 신세를 지게 돼서 죄송합니다. 어쩔 수 없이…….”
“괜찮습니다. 피트먼 씨의 저택이고 전 고용인이니 피트먼 씨의 결정에 따르는 것뿐입니다.”
그는 여전히 사무적인 태도로 내 말을 간단히 잘라 버렸다. 그 때문에 무안해하는 것이 더 무안해질 정도였다. 나는 묵묵히 찻잔을 입으로 가져왔다.
집사인 찰스는 스위스의 전문학교를 나와 평생 집사로 잔뼈가 굵었다. 그런 그가 속마음을 드러내는 일은 그다지 없을 것이다. 이번에도 찰스는 전혀 감정의 동요 없이 나를 대했다. 내가 차를 다 마시고 나자 트레이에 빈 잔을 옮기며 그가 물었다.
“약은 충분히 준비되어 있습니까?”
찰스가 나에게 물은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베타인 그 역시 변이의 위험이 있긴 했지만 언젠가 물어봤을 때 찰스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변이를 할 나이는 훨씬 지났습니다. 게다가 피트먼 씨는 모시는 보람이 있는 품위 있는 분이죠.>
대우도 아주 잘해 주시고요, 하고 덧붙이는 걸로 그는 내 호기심을 잠재웠다. 이따금 찰스가 사탕을 먹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가 하는 대비책은 그 정도가 다였다. 하긴 반백이 넘은 나이에 변이한다면 아마도 기네스북에 오를 것이다.
가지고 있던 약은 다른 내 물건과 함께 사이드 테이블 위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약의 개수를 눈으로 재빨리 훑어본 그는 여전히 사무적인 태도로 당부했다.
“우선 추가로 약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혹시 지내시는 동안 약이 모자라다거나 더 필요할 것 같으면 언제든 얘기해 주십시오. 뭐든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는 내가 뭔가 말하기 전에 곧바로 덧붙였다.
“피트먼 씨의 지시입니다.”
나는 그저 고맙다는 인사만 했다. 그의 이런 배려는 비서인 내가 그렇듯이 그 또한 집사로서 키이스를 위해 귀찮아질 만한 일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특히 약에 관해서는 더욱 그렇다. 어쨌든 내게는 안심이 될 만한 얘기였다. 감사의 말을 했지만 그는 별다른 반응 없이 방에서 나갔다.
후.
남겨진 나는 무심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방 안은 고요했다. 눈앞에 펼쳐진 생소한 풍경이 아니라면 나는 현실을 믿지 못했을 것이다. 혹시라도 눈을 깜박였다가 이 모든 일이 모래처럼 흩어져 사라져 버릴까 두려워 나는 눈조차 감지 못했다.
결국 시린 눈을 참지 못하고 급하게 깜박이고 난 후, 시야에 들어온 풍경이 그대로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자 비로소 조금씩 현실감이 들었다. 그리고 뒤늦게 내가 키이스의 저택, 그것도 침실 하나를 차지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키이스의 저택은 내가 살던 지역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었다. 일 때문이기는 해도 몇 차례 저택을 방문했던 나는 그때마다 위압감에 질려 볼일을 마치자마자 달아나듯 이곳을 빠져나가기 일쑤였다. 물론 키이스가 집 안에 없을 때도 항상 은은하게 남아 있는 그의 페로몬 향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 날은 어김없이 집에서 자위를 했다.
비록 비상사태라고는 해도 그런 저택 안에 내 발로 들어오다니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 내 발작을 멈추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라고 스스로에게 억지로 합리화하면서.
갑자기 오한이 들어 나는 오싹 몸을 떨었다. 이게 현실이라니. 곧바로 머릿속이 마구 뒤엉켰다. 키이스에게 눈이 멀어 여기까지 왔지만 그 원인은 다른 데 있었다. 키이스는 그저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뿐이다.
내가.
내가 정신이 나가서.
곧바로 의식이 되돌아가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다시 가빠지는 숨결을 어떻게든 거머쥐고 미친 듯이 생각을 떠올렸다. 다른 것, 뭔가 다른 것을 떠올려야 돼. 그때의 기억을 지울 만한 뭔가.
그 순간 내 입 안에서 느껴지는 것은 불쾌한 성기의 이물감이 아니었다. 진한 페로몬의 향기와 함께 안을 휘젓던 노련한 혀. 내 혀를 얽고 입 안의 여린 살을 애무하고 타액을 뒤섞으며 입술을 지근거리던 그 지독한 키스.
하아.
나는 눈을 감아 버렸다. 더 이상 입 안에서 느껴지는 것은 그때의 불쾌감이 아니었다. 지금 내 입 안에 남아 있는 것은 죽도록 달콤했던 그의 향기와, 부드러운 입술과, 아, 그 잔혹한 혀.
그만 히트사이클이 올 것만 같아서 나는 황급히 약을 찾아 물도 없이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이제 매일 이런 나날들이 반복될 것이다. 공기 속을 떠도는 키이스의 페로몬을 빗속에 구르는 가랑잎처럼 온몸으로 빨아들이며.
하지만 약이 흡수되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나는 조금이라도 더 깊이 그것이 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천천히 숨을 나누어 쉬었다. 숨을 마시고 내쉴 때마다 온몸으로 호흡을 세면서.
어느새 나는 카펫 위에 누워 있었다. 조금씩 맥박이 가라앉고 마침내 고요가 찾아왔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키이스의 향기는 곳곳을 떠돌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범해진 것 같은 배덕감을 느끼며 사정했다.
*
*
똑똑.
노크 소리에 나는 정신이 들었다. 눈을 뜨고 난 뒤 잠시 동안은 어리둥절했다. 멍하니 눈만 깜박이던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후다닥 침댓가에 앉아 휴대 전화를 확인하는 척했다. 간발의 차이로 문을 열고 찰스가 들어왔다. 그는 팔에 내가 전날 입었던 옷을 걸치고 있었다.
“연우, 곧 식사를 준비할 텐데 방으로 가져올까요, 아니면 내려오겠습니까?”
그의 중후하고 사무적인 음성에 나는 서둘러 대답했다.
“아, 저기…… 내려가겠습니다.”
내 대답에 찰스는 여전히 무뚝뚝하게 설명했다.
“2층 복도 끝의 티룸으로 오십시오. 피트먼 씨는 항상 그곳에서 아침 식사를 하시니까요……. 혹시 따로 드시길 원하신다면 자리를 만들겠습니다.”
“어, 아뇨. 괜찮습니다. 티룸으로 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서둘러 인사를 하자 찰스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의자 등받이에 내 옷을 걸쳐 놓았다. 곧 그는 몸을 돌려 방에서 나갔다. 탁, 하고 조용한 문소리가 들리고 난 뒤 나는 곧바로 준비를 시작했다. 키이스를 기다리게 만든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보다 먼저 티룸에 가기 위해 최대한 서둘렀다.
끼익.
문을 열자 단내 섞인 정체된 공기 대신 상쾌한 바깥 공기가 전신을 스치고 지나갔다. 안타깝게도 키이스는 먼저 와 앉아 있었다. 홍차를 마시며 노트북의 화면을 보고 있는 그의 모습에 나는 잠시 넋을 잃었다. 문득 마른침을 삼켰다. 이제 매일 이런 날들이 반복될 것이다. 나는 무심코 넋을 잃고 이 남자를 바라볼 테고, 그의 페로몬을 쫓아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하겠지.
하지만 절대 실수는 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나는 완벽하게 나를 감추고 살 자신이 있었다. 페로몬에 취한 호르몬이 미쳐 날뛰지만 않는다면. 그 증거로 나는 고개를 든 키이스에게 평소처럼 사무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하는 평범한 인사말과 함께.
키이스의 뒤로 쏟아지는 햇살과 바람에 나부끼는 나무와 희미하게 풍기는 달큼한 향내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