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진정해요. 연우. 그래요, 숨을 천천히……. 됐어요, 이제 내쉬어요. 그래요.”
스튜어드의 지시에 따라 나는 간신히 호흡을 가라앉혔다. 까맣게 내려앉았던 시야에 천천히 흐릿하게 상(象)이 맺히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고 나자 스튜어드가 약과 물컵을 내밀었다.
주저하며 내민 손 위로 스튜어드가 알약을 떨어뜨렸다. 다행히 접촉하지 않고 물컵을 받는 것까지 성공했다. 내가 물을 마시고 약을 삼키기를 기다렸던 스튜어드가 입을 열었다.
“많이 좋아졌어요, 연우. 확실히 피트먼 씨가 도움이 되는군요.”
나는 힘없는 시선을 들어 스튜어드를 바라보았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났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나는 키이스와 함께 출퇴근을 했다. 문제는 내가 전처럼 아무렇지 않게 회사 안을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발작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갑자기 그런 상황이 올까 봐 두려웠다.
공포심에 사로잡힌다는 게 어떤 건지 나는 처음 알았다. 결국 나는 키이스의 사무실과 연결된 내 방에서 거의 떠나질 못한 채 전화로만 모든 일을 처리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부터 스튜어드가 집으로 찾아왔다.
“피트먼 씨가 1주일 줄 테니까 고쳐 놓으라고 하더군요. 참, 극알파들이란.”
웃으며 그렇게 말한 스튜어드는 매일 두 시간가량 상담을 하고 약을 줬다. 나는 잘 모르겠지만 그의 말로는 내가 상당히 좋아졌다고 했다. 고작 나흘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스튜어드를 만날 때마다 놀라는 게 줄어든다고.
그냥 약 때문인 게 아닐까.
나는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생각했다. 조금씩 어깨의 힘이 빠졌다. 숨을 쉬는 것도 훨씬 편해졌다.
계속 이런 식이면 결국 해고를 당하고 말겠지.
키이스가 참아 주는 데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나는 조바심이 나는 것과 동시에 불안해졌다. 나와 마찬가지로 1인용 소파에 앉은 스튜어드는 잠자코 내가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상담하는 동안 스튜어드는 항상 나를 문과 가까운 쪽에 앉히고 문을 열어 놨다. 단둘이 있는 것보다 그쪽이 훨씬 더 나를 안심시켰다.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찰스를 비롯한 집 안의 사용인들이 도와줄 것이다. 그런 생각은 저택에 온 이후로 나를 가장 안도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스튜어드의 조언대로였다.
의외로 그는 꽤 실력이 좋은 의사였다. 듣기로는 꽤 고위급의 사람들을 전문으로 상담한다고 하던데 나 같은 소시민은 아예 전화 예약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까다롭게 대상을 고르는 모양이었다. 키이스의 담당 의사라고는 하지만 정작 키이스는 10대 이후로 단 한 번도 상담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저 형식적인 거죠. 극알파들은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대수롭지 않게 하는 말이었지만 나는 호기심이 생겼다.
“뭔가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스튜어드는 내 눈에 초점이 돌아오는 것을 확인하고 물었다.
“피트먼 씨의 비서가 된 지 얼마나 됐죠?”
“2년이 좀 넘었습니다.”
“피트먼 씨 외의 극알파를 만나 본 적은?”
문득 그레이슨 밀러가 떠올랐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가끔 얼굴을 내미는 게 전부인 키이스의 친구일 뿐이니까 질문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야말로 ‘본 적’이 있을 뿐이므로.
“없습니다.”
“그럼 모를 수밖에 없겠군요. 하긴, 일반인들이 극알파에 대해 알기란 쉽지 않지.”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극알파들의 가장 큰 무기는 페로몬이지 않습니까? 뇌에 어떻게 영향을 미쳐서 그런 결과가 나오는 건지 정확한 기전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페로몬의 영향으로 이런저런 특징들이 나온다는 건 거의 정설이죠. 특별히 높은 지능이라거나, 뛰어난 운동 신경이라거나, 화려한 외모라거나, 소시오패스에 가까운 기질 같은 것들 말입니다. 전부 다 극알파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특질 같은 거죠.”
스튜어드는 싱긋 웃더니 농담처럼 덧붙였다.
“최근에 나온 연구 결과 봤습니까? 극알파들은 면역력이 뛰어나잖아요? 그래서 병에 걸리는 일도 거의 없고 다쳐도 금방 낫는다고. 거기다 약이나 술을 해독하는 속도도 몇 배나 빠르답니다. 그래서 코카인과 엑스터시를 와인에 섞어 마셔도 쉽게 취하지 않고 중독도 되질 않는다더군요. 단지 얼마간 운동 신경이 저하되는 게 전부라는데, 재밌죠? 그게 다 페로몬의 영향이라니. 뭐 드물게는 극알파들에게도 통하는 약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거야 정말 몇 종류 안 되고 그나마 그 약들도 술에 타서 먹는다거나 몇 가지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하니까요.”
“……듣고 보면 극알파의 페로몬은 만능인 것 같네요.”
조금은 기가 죽어 버렸다. 낮게 중얼거리자 스튜어드는 묘한 미소와 함께 손가락을 휘저었다.
“세상에 장점만 가지고 있는 존재란 없는 법이죠. 신도 양심이라는 게 아주 조금은 있으니까요.”
나는 의아해져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스튜어드가 재미있다는 듯이 가볍게 말을 이었다.
“페로몬이 강하다는 건 득도 있지만 그만큼 위험도 큰 거거든요……. 쌓이면 독이 되죠.”
그는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이게 망가져 버려요.”
“네?”
뜻밖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스튜어드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미친다고 할까, 뭐라고 할까. 페로몬을 충분히 소비할 때까지 제정신이 아니게 되는 거죠. 그렇게 되지 않도록 평소에 미리 페로몬을 빼 두는 겁니다. 상시 쌓이는 양에다 러트 기간의 페로몬까지 합해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뇌가 페로몬에 절어 버린다고요.”
아무 말 하지 않는 내게 스튜어드는 싱긋 웃었다.
“이제 알겠죠? 극알파들이 어째서 그토록 섹스를 포기하지 못하는 건지. 뭐, 원하면 단시간 동안 엄청난 양을 쏟아 낼 수도 있다고는 하지만 인위적으로 방출을 하는 데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나는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문란함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걸로 들리는데요. 그렇다고 해서 굳이 상대를 그렇게까지 수시로 갈아 치울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딱딱하게 지적하자 스튜어드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상관이냐는 듯이. 나는 사이를 두고 다시 물었다.
“미친다는 건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내 물음에 스튜어드는 선선히 대답했다.
“그 순간에는 아예 정신이 나가 버린다더군요.”
스튜어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눈앞에 개가 있다면 개와도 한다던데.”
그 말에 나는 하마터면 컵을 떨어뜨릴 뻔했다. 진심인가? 놀라서 바라보자 그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미소를 지었다.
“상대가 정 없으면 할 수 없잖아요? 어차피 정신을 차리고 나면 기억도 못 할 테고.”
나는 믿을 수 없는 기분에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저런 말을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을까. 입을 열었지만 소리가 나온 것은 그다음이었다.
“이를테면 그렇다, 비유인 거죠?”
나는 그가 웃으며 농담이라고 말할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그는 내가 생각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흐음, 하고 잠깐 고민하는 것 같던 스튜어드가 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냥 떠도는 말이지만 밀러가의 형제 중 하나가 개와 했다는 소문이 있어요.”
나는 아예 말문이 막혀 버렸다. 설마, 하고 눈만 깜박이는 내게 그는 대수롭지 않게 덧붙였다.
“듣기로는 로트바일러였다고 하던가. 러트를 맞았는데 준비를 못 해서 개와 했다고. 그 정도 크기의 개라면 극알파들의 피지컬하고도 맞겠죠. 설마 포메라니안을 덮치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덩치가 아무래도 좀 그렇잖아요. 사이즈가 안 맞는다고 할까? 헤비급과 라이트급이 붙는 것 같은.”
그는 자신의 비유가 마음에 드는 듯 껄껄 웃었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소문치고는 너무나 구체적이었다. 도대체 그 형제들 중에서 누구였을까. 믿고 싶지 않은 스캔들이었지만 반대로 어두운 호기심이 일어났다.
밀러가의 6남매는 모두가 극알파인 걸로 유명했다. 거기다 부친은 거대 로펌의 소유자였으나 정계로 진출하면서 첫째 아들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 바로 법조계의 악마라고 불리는 냉혈한 기업 전문 변호사 나사니엘 밀러다. 집안도 혈통도 최고인 셀레브리티 가문. 그 때문에 그들 가족은 모두가 얼굴이 알려져 있다. 단 한 명만 빼고.
부친과 가장 많이 닮은 첫째 나사니엘 밀러, 그리고 항상 웃는 얼굴의 플레이보이 둘째 그레이슨, 미친개라고 소문난 셋째 체이스 밀러. 넷째와 다섯째 역시 극알파지만 여자였다. 형제라고 한다면 딸인 그들은 제외다.
막내는 아들이었지만 세상에 얼굴이 공개된 적이 없었다. 다만 낳아 준 극오메가를 제외한 가족 모두가 극알파인 집안이니 그 또한 극알파일 거라고 당연시되고 있을 뿐이었다.
하나씩 얼굴을 떠올려 봤던 나는 곧 몸서리를 쳤다. 누구라고 해도 상상이 가지 않았다. 차가운 인상의 나사니엘은 물론이고 능글거리는 그레이슨도, 성질 더럽기로 유명한 체이스마저도.
그럼 설마 그 막내가……?
딱.
눈앞에서 갑자기 뭐가 번쩍했다. 화들짝 놀라 눈을 깜박이자 스튜어드가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뒤늦게 나는 그가 내 눈앞에서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죄송합니다. 잠깐 다른 생각에 빠져서…….”
황급히 사과하자 스튜어드는 싱긋 웃었다.
“괜찮습니다, 그런 건. 그보다 봐요, 방금 전 아무렇지도 않았죠?”
나는 깜짝 놀랐다. 그의 말이 맞았다. 스튜어드는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이제 요령을 조금씩 깨우치게 될 겁니다. 정신을 다른 데 집중해 봐요. 그럼 발작이 줄어들 거예요.”
“그렇군요.”
나는 무심코 안심해 미소를 지었다.
“이제 알겠습니다. 아까 밀러가의 얘기는 그래서 지어내신 거군요, 제 신경을 다른 쪽으로 돌리려고.”
“어, 아닌데. 그건 진짜예요.”
스튜어드는 해맑게 내 말을 부정했다. 미소를 지은 채 굳어진 내게 그는 웃으며 덧붙였다.
“그런 얘기를 지어낼 순 없죠. 진실 여부는 미확인이지만 어쨌든 그런 소문이 돌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거기다 극알파라면 뭐, 알잖아요? 그런 짓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거.”
안타깝게도 나는 부정할 수 없었다. 결국 잠자코 입을 다물어야 했다.
“으흠.”
때마침 들린 헛기침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열린 문밖에 찰스가 서 있었다.
“상담 시간이 끝났습니다. 더 연장하실 겁니까?”
“아뇨, 됐습니다. 오늘은 이걸로 충분합니다.”
스튜어드는 웃으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선뜻 안으로 들어온 찰스가 내 앞에 서더니 허리를 숙였다.
“실례합니다.”
정중한 한 마디에 이어 그는 내 손에서 빈 컵을 가져갔다. 아주 우아한 몸짓으로.
스튜어드는 그를 기다렸다가 뒤따라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의 등에 대고 인사를 했다.
“오늘도 감사했습니다.”
“내일 또 보죠, 연우……. 아, 주말이구나.”
스튜어드는 뒤늦게 깨달은 듯 정정했다.
“월요일에 봐요.”
웃으며 인사를 하는 그에게 나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월요일에.”
찰스와 함께 스튜어드가 나가고 난 뒤 나는 잠시 멍하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처음 알게 된 사실에 마음이 뒤숭숭했다. 머리로는 코웃음을 치면서도 마음은 자꾸만 키이스를 이해하고 싶어진다.
어쩔 수 없어, 생리적으로 그렇게 타고난 사람이니까.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것도, 그렇게 상대를 갈아 치우는 것도, 그러면서도 나는 그 상대로 결코 봐 주지 않는 것도 전부 다 페로몬 때문이야.
……그냥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
이렇게까지 합리화를 하려고 애쓰는 내 자신이 한심해졌다. 코끝이 찡해져 훌쩍, 숨을 삼켰을 때였다.
“왜 그래?”
불쑥 들려온 음성에 나는 기겁을 하고 의자에서 튀어 올랐다. 열린 문 너머로 키이스가 서 있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바쁘게 눈까풀을 파닥거렸다. 그런 나를 바라보며 키이스가 물었다. 찌푸린 얼굴로.
“울었어?”
나는 당황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키이스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뒤늦게 입을 열었다.
“아뇨.”
키이스의 미간에 잡혀 있던 주름이 한층 깊어졌다. 갑자기 그가 발을 떼더니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나를 향해 걸어왔다. 어쩔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키이스는 내 바로 앞에 섰다. 나는 그의 섬세한 긴 손가락이 얼굴로 다가오는 것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우아하게 구부러진 손마디가 내 눈가를 쓸었다.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낮은 음성으로.
“빨갛잖아, 눈이.”
나는 정말로 울고 싶어졌다. 대답을 해야 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급히 헛기침을 했다.
“조금, 피곤해서. 지금 오셨습니까? 찰스는 스튜어드 씨를 배웅하러 나갔는데요.”
서둘러 화제를 돌리자 잠시 말이 없던 키이스가 내 눈가를 쓰다듬었던 손을 가져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의 짙은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휘감겼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나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스튜어드가 뭐라고 했어?”
“네?”
“들었잖아.”
키이스는 차분히 내 대답을 재촉했다. 뒤늦게 나는 그가 오해를 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치료 과정에서 뭔가 잘못돼서 내가 울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별다른 얘기는…… 그냥 제가 좀 힘들었을 뿐입니다.”
나는 맥없이 웃어 보였다. 내심으로는 내 거짓말에 그가 속아 넘어가길 바라며.
그것은 의미 없는 바람이었다. 애초에 키이스는 내가 거짓말을 하건 안 하건 전혀 눈치챌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럴 정도로 내게 관심이 있을 리 없으니까.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나는 황급히 말을 꺼냈다.
“데이트는 어떠셨습니까? 일찍 오셨네요.”
화제를 돌리려다가 지뢰를 밟았다. 키이스는 오늘 호텔에서 상대와 만났다. 그녀와의 약속도 호텔 예약도 전부 내가 했다. 그리고 퇴근 후 키이스는 나를 저택에 내려놓은 후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곧바로 호텔로 향한 것이다. 그 목적이 뭐였는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 이런 질문을 하다니.
역시나 키이스가 짧게 코웃음을 쳤다.
“데이트?”
나는 할 말이 없어져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고 ‘아차, 제가 실수를 했군요. 섹스는 어땠습니까?’ 하고 다시 물을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나로서는 전혀 알고 싶은 정보가 아니었다.
아.
문득 눈앞이 몽롱해졌다. 나는 그제야 키이스의 페로몬을 눈치챘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숨결 사이에 섞여 들어서 깨닫지 못했다. 흐릿한 시야가 휘청거렸을 때, 갑자기 키이스가 내 팔을 붙잡아 세게 끌어당겼다. 탁, 하고 온몸이 부딪쳤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달큼한 향내에 눈을 감은 게 전부였다.
“언제쯤 익숙해지는 거야?”
정말로 궁금한 건지 투덜거리는 건지 나는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그저 인형처럼 늘어져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게 전부였다. 키이스는 팔을 놨지만 나는 그대로 그에게 기대어 있었다. 그는 굳이 나를 밀어내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뒀다. 내가 마음껏 그의 향기를 맡을 수 있도록.
슈트의 선뜻한 감각과 함께 느껴지는 페로몬 향. 거기엔 희미하게 보디 워시의 향과 서늘한 스킨의 향이 섞여 있었다. 바로 섹스의 잔향이었다. 조금 울적해졌다.
페로몬에 취해 나는 중얼거렸다.
“스튜어드 씨는, 많이 좋아졌다고…….”
나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천천히 내쉬었다. 키이스의 페로몬이 내 안 깊숙이 퍼져 갔다. 정신이 점차 몽롱해졌다. 안심해도 된다. 나는 매일 정량보다 많은 약을 먹고 있었다. 이 남자 앞에서 발정하지 않도록, 그래서 이 남자가 나를 혐오하지 않도록.
미치면 어떻게 될까.
극알파들이 그렇듯이 나도 아예 기억을 잃어버릴까?
차라리 그렇게 된다면 좋겠는데.
……하아.
나는 탄식처럼 심호흡을 했다. 익숙해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나는 오메가니까. 그것도 이 남자한테 미친 오메가다.
언젠가 이 마음이 사라지는 날이 오면 그때는 이 남자의 향을 맡아도 아무렇지 않게 될까?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지금 이토록 아프게 뛰는 심장은 도저히 그런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할 수 없게 만들었지만.
발정은 막을 수 있지만 정신이 아련해지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깜빡 의식이 내려앉아 간신히 버티고 있던 무릎이 꺾여 버렸다. 훅 아래로 꺼지는 듯한 감각에 급하게 의식이 되돌아왔다. 키이스가 곧바로 양팔을 붙잡았다. 다행히 바닥에 널브러지지는 않았지만 나는 꼴사납게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나는 키이스에게 죄송하다고 말하려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나를 키이스 또한 아무 말 없이 내려다봤다.
하아.
문득 키이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저 눈꺼풀을 나른하게 깜박였다.
갑자기 몸이 훌쩍 떠올랐다. 키이스가 나를 들어 곧바로 소파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난폭하게 몸이 부딪쳤지만 여전히 정신은 멍하기만 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소파의 양 팔걸이에 두 손을 얹고 기대선 키이스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무심코 숨을 죽였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키이스를 본 적이 있었던가? 머리가 멍해서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다만 그의 보라색 눈동자가 오늘따라 유독 진하게 물들어 있다는 사실만 어렴풋이 깨달았다.
아이리스.
문득 자색의 우아한 꽃잎을 떠올렸을 때, 키이스가 고개를 숙였다.
키스하려는 걸까.
서툰 기대로 눈을 감았지만 틀렸다. 문득 목덜미에 숨결이 닿았다. 나는 그만 호흡을 멈추고 말았다.
깊게 숨을 들이켜는 것이 느껴졌다. 키이스가 내 향기를 맡는 것이다. 알파와 오메가들이 짝을 맺을 때 종종 그러듯이. 목에서 맥박이 미친 듯이 뛰어 댔다. 대부분 상대의 향기를 맡고 자신의 상대로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그저 짐승 같은 욕망을 숨기려는 최소한의 인간적인 명분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것은 짐승의 행위 그 자체였다.
<짐승이 따로 없네요.>
휘태커의 말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지금 내가 다를 게 뭐지……?
깊게 숨을 삼켜 키이스의 페로몬을 몸속 가득히 받아들였다. 마약을 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온몸이 공기보다 가볍게 느껴졌다. 이대로 영혼까지 저 우주로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두려움은 전혀 없었다. 기분 좋은 탈력감과 부유감이 나를 취하게 만들었다. 나를 현실로 되돌린 것은 키이스의 음성이었다.
“……왜 향기가 나지 않지?”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어느새 키이스는 고개를 들고 나를 보고 있었다. 너무나 가까운 거리에 있는 그의 얼굴에 잠시 넋을 잃었다. 아주 조금만 입술을 내밀면 그대로 닿을 것 같았다. 종잇장보다 얇은 이성이 한사코 나를 말리지 않았다면 나는 저지르고 말았을 것이다. 다행히도 아직 그 정도로 미치지는 않았다.
“약을, 먹고 있으니까요. ……정량보다, 많이.”
꺼져 들어 가는 음성으로 말하자 키이스는 잠자코 나를 응시했다. 속을 전혀 알 수 없는 눈동자가 한층 더 짙게 물들었다.
“……언제부터?”
나는 여전히 멍하게 대답했다.
“피트먼 씨가…… 페로몬을 없애라고…… 하셨을 때부터.”
잠시 키이스는 반응이 없었다. 미간에 희미하게 주름이 생기는가 싶더니 “아아……” 하고 뒤늦게 그는 탄식처럼 내뱉었다. 기억을 하긴 하는 모양이었다. 당연히 까맣게 잊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원래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니까.
나는 여전히 흐리멍덩하게 생각했다.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그때부터 향기가 없었다고?”
마치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말에 나는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난감해졌다. 그래서 그냥 네, 하고만 대답했다. 키이스는 또다시 말이 없어졌다.
문득 그의 표정이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감한 것 같은, 당황한 것 같은, 불쾌한 것 같은, 짜증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난처한 것 같기도 한. 키이스가 저렇게 표정이 풍부한 사람이었나 의아할 정도로 복잡한 얼굴이었다.
갑자기 키이스가 몸을 일으켰다. 곧바로 장신의 탄탄한 몸이 일직선으로 곤두섰다. 앉은 채로 올려다보는 그는 몽롱한 의식에도 위압감을 느끼게 했다. 스스로가 한없이 작아지는 듯한 기분에 나는 무심코 어깨를 움츠렸다. 그는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더니 이내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올라가.”
키이스는 던지듯 내뱉더니 곧바로 돌아서서 나가 버렸다. 나는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 * *
희미한 두통을 느끼며 잠에서 깼다. 나는 누운 채로 잠시 눈을 깜박였다.
“아! ……아.”
순간 반사적으로 소리치며 일어나 앉았다가 이내 어깨의 힘을 뺐다.
일요일이지.
무심코 머리를 긁적였다. 시계를 보니 항상 일어나는 시간에서 5분이나 빨랐다. 알람이 울리기 전에 먼저 버튼을 눌러 꺼 버린 나는 잠시 정신을 차리려 멍하니 앉아 있었다.
정확히 5분이 지난 후 침대에서 벗어났다. 곧바로 침실과 연결된 욕실로 들어가 찬장에서 약을 꺼냈다. 항상 그렇듯이 제일 먼저 약을 챙겨 먹어야 한다. 물론 정량보다 많이.
간단히 샤워까지 끝내고 옷을 갈아입었다. 출근을 하지 않는 날이다 보니 평소보다 훨씬 더 여유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시간은 언제나와 똑같았다. 시계를 본 나는 문득 쓴웃음이 나왔다.
문을 열고 나가자 마침 저쪽에서 찰스가 걸어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찰스.”
내 인사에 눈이 마주친 그는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안녕하십니까, 하고 말했다.
“일찍 일어나셨군요.”
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네, 그냥 깨서.”
습관적으로 깨지 않았더라도 알람을 맞춰 놨으니 눈을 뜨긴 했을 것이다. 비록 휴일이라고 해도 신세를 지고 있는데 아침에 일어나는 것까지 신경 쓰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최소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알아서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찰스는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아무 생각이 없을지도 몰라. 나는 생각했다. 찰스가 무감정한 얼굴로 물었다.
“차를 드시겠습니까? 아니면 커피를.”
나는 선뜻 대답했다.
“커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계란은 스크램블로 만들어 주시고 팬케이크는 한 장만, 베이컨은 살짝만 구워 주시면 됩니다.”
이어서 찰스가 항상 하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알아서 덧붙였다. 집사는 순간 멈칫하는 듯하더니 이내 평소의 얼굴로 돌아가 네, 하고 대답했다. 나는 무심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몇 걸음 걸어가던 찰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곧바로 시선이 마주치고, 그가 물었다.
“하실 말씀이라도?”
“어, 아뇨. 음.”
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도와 드릴 건 없을까 해서.”
찰스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도무지 생각을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에 당혹해하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피트먼 씨를 깨워 주시겠습니까? 계란과 베이컨을 어떻게 요리해 드릴지도 물어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아, 네.”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찰스는 허튼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보란 듯이 선뜻 걸음을 옮겨 벌써 저만큼 멀어진 그의 뒷모습에 나는 잠시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키이스의 방이라니.
나는 뒤늦게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저택에 머물게 된 지 여러 날이 지났지만 그의 방에는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이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갑자기 기회가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 때문에 나는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내겐 그리 많은 시간이 주어진 건 아니었다. 머뭇거리다가는 찰스가 돌아와 곧바로 ‘괜찮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하고 뜻밖의 기회를 허망하게 가져가 버릴 것 같았다. 나는 이것저것 생각할 여유도 없이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똑. 또독.
노크를 하는 손이 떨려서 창피한 소리가 났다. 나는 황급히 두 손을 꽉 움켜쥐고 심호흡을 했다.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키이스는 아직 잠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는 전날 꽤 늦게 잠든 것 같았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도 문득문득 찰스가 복도를 오가는 기척을 느꼈다. 그렇게 늦은 시간까지 찰스를 부릴 수 있는 사람은 집 안에서 오직 키이스뿐이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킨 뒤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아…….
폐 속 가득히 달큼한 냄새가 스며들어 왔다. 나는 공기 속을 은은하게 떠도는 페로몬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점차 방 안의 정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마침내 문을 활짝 열어젖혔을 때, 온몸에 흐르는 페로몬과 함께 나는 정신이 아련해졌다.
방 안은 단순했다. 침대가 특히나 거대하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침대 맞은편 벽에는 부게로의 유화가 걸려 있었다. 막 탄생한 비너스가 기지개를 펴는 우아하면서도 유혹적인 그림이었다. 침실에는 그림 외에 이렇다 할 장식이 그다지 없었다. 간단한 가구 몇 점이 전부였다. 나는 용기를 내어 침대로 다가갔다.
키이스는 아직 잠들어 있었다. 거대한 침대 위에 혼자 누워 있는 그를 보자 나는 터무니없이 안도감이 들었다. 전날 그가 혼자 귀가했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당치 않은 두려움이 있었다. 눈으로 확인하고 나자 자신이 한심해져 쓴웃음이 나왔다.
몸을 덮고 있는 얇은 시트가 가슴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다. 나는 무심코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벗은 몸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얼핏 지나치면서 벌어진 셔츠 사이로 훔쳐본 게 전부였던 키이스의 가슴을 이렇게 당당하게 볼 수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갈색으로 그을린 피부는 당장 만져 보고 싶을 정도로 탄탄했다. 근육이 잘 잡힌 목덜미부터 쇄골, 그 아래 가슴까지 시선을 옮기면서 나는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넓은 어깨와 팔은 잠든 동안 느슨하게 풀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강한 근육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천천히 내려가던 시선이 시트에 가로막혔다. 하지만 나는 차마 그 아래로 시선을 옮길 수가 없었다. 얇은 천은 키이스의 몸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밑으로 시선을 내린다면 분명 그의 전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얄팍한 시트를 걸치고 있다고 해도 키이스의 탄력적이고 우아한 근육질의 몸은 숨겨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비록 시트 위로 드러난 대략적인 형태뿐이라고는 해도―그의 페니스까지 보게 된다면 난 어떻게 될지 상상하는 것조차 두려웠다. 지금도 충분히 한계였다. 도저히 거기까지는 용기를 낼 수가 없었다. 나는 가쁜 숨을 간신히 억누르며 떨리는 손을 몇 번이나 쥐었다 폈다. 그를 깨워야 하는 것이다.
“피, 트먼, 씨.”
목소리가 갈라져 나는 그만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키이스는 단번에 눈을 뜨지 않았다. 나는 안도하며 급히 헛기침을 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겨우 숨을 돌린 나는 간신히 평소처럼 무덤덤한 음성을 낼 수 있었다.
“피트먼 씨.”
다행이다. 여느 때와 전혀 다르지 않은 목소리가 내 귀로 흘러들어 왔다. 나는 한층 더 용기를 내어 손을 뻗었다. 그의 맨가슴을 쓰다듬고 싶은 욕망을 필사적인 인내심으로 억누르며 간신히 팔에 손가락을 얹었다. 이어서 조심스럽게 손을 내렸다. 단단한 근육이 손바닥에 느껴지는 순간 나도 모르게 신음을 흘릴 뻔했지만 다행히 그때까지도 키이스는 깨지 않았다.
“피트먼 씨.”
나는 한 번 더 부르며 드디어 그의 팔을 흔들었다. 마치 애무하듯이 부드럽게 근육을 어루만진 걸 키이스는 눈치챌까? 나도 모르게 저질러 버린 행위에 당황한 나는 조마조마해하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던 키이스의 긴 속눈썹이 움칠했다. 나는 그 자리에 선 채 키이스가 잠에서 깨어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으음.”
신음처럼 목 안 깊은 곳에서 소리를 내보냈던 키이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뒤척였다. 똑바로 누워 잠들어 있던 그가 갑자기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나도 모르게 움칠했다. 키이스가 눈을 뜬 것은 그다음이었다.
눈을 깜박일 때마다 보라색 눈동자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키이스는 초점을 맞추려는 것처럼 몇 차례 더 눈을 깜박였다. 아직 잠이 덜 깬 듯 멍한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나는 그 순간 그에게 완전히 빠져 버렸다.
헝클어진 짙은 머리카락도, 나를 바라보는 무방비한 얼굴도, 시선이 맞닿은 몽롱한 자수정 빛의 눈동자도, 단단하고 넓은 어깨와 탄탄한 가슴까지도.
어떻게 이 남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지.
그 순간 키이스를 맘껏 끌어안고 키스할 수 있다면 나는 악마에게 영혼까지도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
갑자기 키이스가 상체를 일으키더니 손을 뻗어 내 뒤통수를 잡아 끌어당겼다.
불시에 일어난 상황에 나는 놀라 그대로 끌려갔다. 전날 그랬듯이 바로 코앞에서 키이스와 시선이 마주쳤다. 나는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어쩌지 못하고 눈을 크게 뜬 채 그를 보기만 했다.
아.
달콤한 향이 한층 더 진해졌다. 키이스가 페로몬을 발산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가 내게 페로몬을 내보낸 것은 딱 두 번이었다. 처음은 화가 나서, 다음은 나를 진정시키려.
그럼 지금은 뭘까.
여태까지와는 달랐다. 무겁게 나를 내리누르던 페로몬이 지금은 너무나 부드럽게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마치 나를 유혹하기라도 하는 듯이.
설마, 말도 안 되는.
무심코 떠올린 단어를 곧바로 부정했을 때, 갑자기 키이스가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뒤늦게 그가 눈을 깜박였다. 나는 남자의 눈이 급격히 현실로 돌아오는 것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가슴 아프게도.
키이스는 곧바로 나를 밀어내고 욕설을 뱉어 냈다.
“망할, 네 페로몬……, 아니, 얼굴, 아니, 망할, 지저스!”
나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가 그렇게 거칠게 고함을 지르며 화를 내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처음 그를 만난 날 텐트에서도 저렇게 화를 냈었다는 걸 나는 어렴풋이 떠올렸다. 키이스는 화를 참지 못하고 베개를 던져 버렸다. 묵직한 베개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침대 끝자락에 떨어져 바닥으로 낙하했다. 부드러운 카펫 위로 소리도 없이 나동그라진 베개에서 시선을 떼고 키이스를 돌아보자 그는 이를 악물고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야?”
이윽고 기분을 가라앉힌 듯 키이스가 한결 진정된 음성으로 물었다. 그래도 여전히 눈빛은 차가웠지만. 나는 최대한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찰스가 부탁했습니다. 피트먼 씨를 대신 깨워 달라고. 베이컨과 계란은 어떻게 요리할까요?”
습관처럼 준비했던 말을 덧붙이자 키이스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바짝 굽고 계란은 완숙으로 삶아서.”
이미 알고 있는 대로 그는 자신의 기호를 말했다. 나는 형식적으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커피를 드시겠습니까? 아니면 홍차를.”
“에스프레소, 트리플로.”
던지듯 말한 키이스가 갑자기 시트를 확 걷어 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불시에 심장이 미친 듯이 튀어 올랐다. 키이스는 그런 내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 바로 옆을 스쳐서 욕실로 가 버렸다.
탁.
문소리가 들린 다음에야 비로소 나는 혼자 남았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제야 씁쓸함이 섞인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리자 불현듯 그림 속의 여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액자 속에 살아 있는 아름다운 여신이 거만하게 고개를 들고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나는 황급히 그림에서 시선을 떼고 달아나듯 방에서 나왔다.
* * *
식탁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키이스는 잠시 뒤 옷을 갈아입고 내려왔지만 표정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찰스는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꼿꼿이 서서 키이스와 내 시중을 들었다.
“아, 고맙습니다.”
마침 손을 뻗으려던 나를 대신해 메이플 시럽을 따라 준 찰스에게 나는 인사를 했다. 팬케이크를 시럽에 찍어 입으로 가져오면서 나는 슬쩍 키이스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내려온 이후 한 번도 내 얼굴을 보지 않았다.
굳이 봐야 할 이유도 없지만.
내심 씁쓸해하며 베이컨을 찍어 입으로 가져오는데, 불쑥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그레이슨은 몇 시에 오기로 했었지?”
순간 나는 멈칫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자 찰스가 대신 대답했다.
“5시에 방문하실 겁니다. 다른 분들도 그쯤 오실 거고요.”
뒤늦게 나는 상황을 눈치챘다. 저택에서 모임이나 파티가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찰스가 파티에 대한 모든 걸 책임지기 때문에 모처럼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 애초에 이렇게 돌발 상황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나는 나의 좁고 초라한 셋집에서 뒤늦게 잠에서 깨어나 냉장고에 먹을 게 뭐가 있나 뒤적거리고 있을 것이다.
사람 일이란 정말 알 수가 없는 거구나.
나는 계란에 신경 쓰는 척하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휴일에 키이스가 어떤 일정을 어떻게 소화하든 내게 별도의 지시가 떨어진 게 아니라면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다만 그레이슨이 저택에 방문한다는 얘기는 신경이 쓰였다. 내가 여기 머물고 있다는 걸 그는 알고 있을까?
밀러가 특유의 화려한 마스크를 가진 그를 떠올렸던 나는 곧 생각을 지워 버렸다. 중요한 건 그레이슨이 아니다. ‘다른 분들’이라고 한다면 어떤 모임이 있는 게 분명하다.
문득 선상 파티를 떠올리고 등골이 오싹해졌다. 키이스는 내게 파티를 맡길 때도 어떤 목적인지 상세하게 말해 준 적이 없었다. 대충 ‘친목’이라거나 ‘사업’ 정도의 짧은 언급이 전부였다. 그러면 손님 명단이나, 그 외 특별히 준비할 것이나 주의 사항이 있는지를 물어보고 그것에 맞춰 대략 눈치껏 파티를 진행하곤 했다. 이번엔 내가 아예 빠져 있는 파티니 더욱 목적을 알 수 없었다. 또한 이건 내가 내건 조건에 속하는 파티도 아니었다. 따라서 굳이 내게 얘기를 해 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날도 그래서 방심했다가 그런 일을 당했지.
문득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레이슨만이 유일하게 내게 경고를 했었다. 그런 일이 있을 거라고 예상이라도 했던 것처럼. 그날 뒤늦게 나타나 내게서 남자를 떼어 낸 것도 그레이슨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알면서 내게 한 마디도 해 주지 않았을까.
키이스는 지금껏 항상 그래 왔던 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레이슨의 태도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 걱정을 해 준 것 같으면서도 나 몰라라 한 것도 같은.
머릿속이 복잡해져 무심코 미간을 찌푸렸을 때, 갑자기 의자가 물러나는 소리가 들렸다. 생각 없이 고개를 들자 키이스가 몸을 돌려 나가고 있었다. 식당에는 나 혼자 남았다. 얼마 남지 않은 음식을 뒤늦게 속도를 내어 먹어 치우는데, 키이스의 식기를 치우고 돌아온 찰스가 입을 열었다.
“커피를 좀 더 드시겠습니까?”
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찰스는 묵묵히 내 빈 주스 잔에 오렌지 주스를 채웠다. 유리병 바깥쪽에 흐른 주스를 능숙하게 천으로 닦아 낸 찰스가 아, 하고 입을 열었다.
“오늘 피트먼 씨의 모임은 일상적인 것입니다만 오시는 손님들을 연우가 불편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응접실에서 접대를 할 예정인데 혹시 페로몬을 견디기 힘드시면…….”
그는 곧 말을 멈췄다. 음, 하고 심각하게 생각에 잠겼지만 뾰족한 수가 없을 것이다. 저택 밖을 나간다는 건 모험이었다. 나 역시 엄두가 나지 않는 데다 그렇다고 내 방에 숨어 있다가 키이스 아닌 누군가의 페로몬에 발작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이도 저도 못 하게 됐다.
“……정원이라도 산책을 하죠.”
나는 머리를 쥐어짜 간신히 하나를 생각해 냈다. 찰스의 얼굴에 아주 순간적으로 연민이 스쳐 갔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져 버려서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내가 뭘 봤지?
잠시 동안 내 눈을 의심하며 눈을 깜박이는데, 찰스가 여느 때처럼 감정이 없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휴대 전화 잊지 마시고, 손님들이 돌아가시면 환기를 충분히 한 후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제 번호는 알고 계시죠? 혹시 전화를 받지 못할 경우에는 에밀리에게 연락을 해 주십시오. 에밀리의 번호를 적어 드리죠.”
그는 곧바로 만년필과 종이를 품에서 꺼내 능숙하게 숫자를 적더니 테이블 위로 슥 밀어 내 앞에 정지시켰다. 고맙습니다, 인사를 하고 쪽지를 집어 들자 찰스가 만년필의 뚜껑을 닫고 정복의 윗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간단한 간식과 음료를 챙겨 드리겠습니다. 특별히 원하시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나는 잠시 생각했지만 배가 부른 상태라서인지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고민하는 내게 그는 나중에 생각나면 얘기해 주십시오, 하고 말한 후 자리를 비웠다. 혼자 남은 나는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여유로우면서도 고즈넉한 시간이 천천히 흘러갔다.
*
*
“혹시 괜찮다면 빈방에서 쉬고 있겠어요? 고용인들을 위한 방이긴 하지만.”
에밀리의 제안에 나는 반가워하는 표정을 감추기 어려웠다.
“그런 곳이 있습니까?”
에밀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한결 밝아진 얼굴로 말했다.
“뒤쪽 별채가 고용인들이 쓰는 숙소예요. 이따금 파티라든가 특별한 일이 있으면 임시로 고용하는 일꾼들이 쓸 수 있도록 항상 빈방을 여러 개 준비해 두거든요. 새로 일하러 오는 사람이 바로 방을 사용하게끔 매일 청소를 해요. 연우가 그런 거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잠시 거기 머물러도 될 거 같은데.”
“아, 물론이죠. 제가 사용할 수 있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황급히 인사를 덧붙이자 에밀리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별채는 제가 관리하니까 찰스도 미처 생각을 못 했을 거예요. 잘됐네요, 1층의 세 번째 방이 비어 있어요. 열쇠는 현관 입구에 걸려 있을 거예요. 방의 순서대로 걸어 놨으니 세 번째 열쇠를 빼서 쓰면 돼요. 이쪽 일이 마무리되면 연락해 줄게요. 너무 늦게 끝나지 말아야 할 텐데.”
걱정스러운 덧붙임에 나는 그저 감사합니다, 하고만 응답했다. 정처 없이 정원을 떠돌아다닐 걸 상상하니 암담했는데 다행이었다. 정원은 상당히 넓어서 보통 걸음으로 한 바퀴를 돈다면 두 시간도 금방일 테지만 마냥 정처 없이 걸어 다니기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던 차에 앉아서 편히 쉴 수 있는 곳이 있다니 다행이었다.
시간을 때울 만한 게 뭐가 있을까.
갑자기 생긴 공백에 나는 잠시 당황했다. 이 기회에 못 읽었던 책이라도 읽어야 할까. 평소 책을 많이 읽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최근 특히 더 책을 읽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문득 키이스의 서재가 떠올랐다. 처음 저택에 들어와 지내게 됐을 때 찰스가 집 안 곳곳을 직접 안내해 줬었다. 그때 서재 또한 알게 됐다. 당시 들어가 보지는 않았지만 대충 밖에서 본 바로는 넓은 실내 가득한 책장이 꽤 빽빽하게 차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시간을 끌지 않고 곧바로 방을 나왔다. 아직 그레이슨이나 다른 손님이 올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었지만 꾸물거리다 나중에 허둥거리는 것은 달갑지 않았다.
서재는 키이스의 방과 내 방 중간쯤에 있었다. 나는 무심코 키이스의 방 쪽을 쳐다봤다가 황급히 고개를 돌려 버렸다. 지금 그 남자가 뭘 하고 있는지 내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당장 나 살기도 바쁜데. 나는 자꾸만 키이스에게로 향하려는 관심을 접어 버리려 황급히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아…….”
눈앞에 보인 장관에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뜻밖에도 서재의 천장은 아주 높았다. 보란 듯이 한쪽에 세워져 있는 사다리의 모습은 이 안의 책들이 장식용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게 만들었다. 저택 밖에서 봤을 때 유독 높은 지붕이 보였는데 아마도 여기 같았다. 안쪽의 천장은 돔 형태로 둥글었지만 바깥의 지붕은 고딕 양식의 성처럼 뾰족했다.
높은 지붕의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책장 한쪽을 환하게 밝혔다. 나는 공기 속을 떠돌아다니는 먼지를 멍하니 바라보다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떤 책을 읽어야 하지?
너무나 많은 장서에 압도되어 선뜻 결론을 내지 못했다. 하지만 머뭇거리며 책장을 둘러보는 사이 나는 책들이 배열되어 있는 규칙을 알게 됐다.
이쪽이 고전이구나.
나는 현대 소설을 찾으려 두리번거렸다. 현대 소설을 찾고 나서는 또 어떤 작가의 작품을 읽을지 정해야 했다.
난감한 것은 같은 작가라도 시집과 소설이 같이 놓여 있기도 하고 어떨 때는 떨어져 있기도 하고 어떤 책은 두 권씩 꽂혀 있기도 해서 결론적으로 책장이나 책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으면 원하는 것을 찾기가 어렵다는 점이었다.
같은 책이 여러 권 있는 경우는 연도가 다르거나 해석이 다른 경우였다. 물론 어느 쪽이 더 나에게 맞는지 나는 감을 잡기 어려웠다.
결국 내가 고심해서 뽑아 든 책은 영화로도 제작이 된 바 있는 독일 작가의 소설이었다. 영화를 아주 재밌게 봤기 때문에 소설도 읽을까 생각했었는데 바쁜 일상 속에 그대로 잊어버렸다.
이렇게 생긴 사람이구나.
작가의 사진을 보고 나는 호감을 느꼈다. 무심코 미소를 짓는데, 불현듯 정신이 들었다. 뒤늦게 시계를 보니 한 시간여가 흐른 뒤였다. 꾸물거리다간 늦겠다. 나는 허둥지둥 복도로 나갔다.
“연우.”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찰스가 걸어오고 있었다. 나와 마주 선 그는 여느 때처럼 무심히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까? 곧 시간이 될 텐데요.”
“아, 네 그러지 않아도 이제 나가려고요.”
찰스는 내 손에 들린 책을 보더니 곧 납득한 듯 말을 이었다.
“에밀리가 별채에서 쉬라고 했다던 말 들었습니다. 혹시 시간이 늦어지면 저녁 식사는 그쪽으로 갖다 드리죠.”
“고맙습니다.”
나는 인사를 하고 서둘러 달아나듯 자리를 벗어났다.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어찌어찌 도망치듯 별채의 빈방을 찾아 들어온 나는 뒤늦게 막혔던 숨을 뱉어 내며 빈 침대에 드러누웠다. 꽤 오래 비어 있던 방인지 희미하게 먼지 냄새가 났다. 여기서 몇 시간이고 하릴없이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벌써부터 마음이 답답해졌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자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 버린 것처럼 공허했다. 뒤늦게 책을 주섬주섬 펼쳤지만 활자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18세기 프랑스, 한 남자가 살았다…….
나는 몇 번이나 같은 줄을 반복해서 읽었다. 하지만 여전히 텍스트는 눈앞을 떠돌기만 하고 도무지 머릿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
*
♪♪♩♬♬♬♩♪…….
문득 들려온 벨 소리에 잠에서 깼다. 나는 누운 채로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황급히 번호를 확인해 보니 에밀리였다.
“아. 미안합니다, 에밀리. 일은 다 끝났습니까?”
서둘러 사과하며 묻자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늦게 받길래 잠이라도 들었나, 생각했어요. 지루하죠?]
사실이었기 때문에 나는 무안해졌다. 손님맞이를 하느라 한창 바빴을 그녀를 생각하니 더더욱 마음이 불편했다.
“괜찮습니다. ……손님들은 가셨습니까? 이제 본채로 갈까요?”
[네, 이제 와도 돼요. 지금 정리 중이니까 좀 어수선하긴 할 거예요.]
에밀리는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아, 그래요. 아직 저녁 식사를 못 했죠? 방으로 가져다줄까요?]
거기까지 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나는 황급히 거절했다.
“제가 적당히 만들어 먹겠습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에밀리. 고맙습니다.”
인사를 덧붙이자 에밀리는 간단히 말을 맺고 전화를 끊었다. 창밖은 이미 캄캄했다. 손님들은 당연히 저녁 식사를 했겠지? 모두들 얼마나 바빴을까?
비록 내 업무는 아니었다고는 해도 다들 바쁜데 혼자 잠들었었다니 죄책감이 들었다.
청소라도 좀 돕는 게 낫겠어.
나는 생각하며 급히 매무새를 가다듬고 짐을 챙겨 나왔다. 그래 봤자 책 한 권에 휴대 전화가 전부였지만.
별채엔 사람이 없는지 고요했다. 지금 한창 뒤처리를 하고 있다면 본채에 모두 모여 있을 것이다. 나는 최대한 폐를 끼치지 않도록 신경 쓰며 대충 사람들이 있을 만한 곳을 추측해 봤다.
머릿속으로 동선을 그려 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손님들이 온다면 어떤 식으로 움직일까를 생각해 보니 답은 금방 나왔다.
응접실에서 접대를 한 후 식당으로 갔다가 다시 티룸으로 갔을까?
그렇다면 지금 가장 바쁜 곳은 주방이겠지.
언제나 돕고 싶다는 내 말을 간단히 거절하기 일쑤인 에밀리와 찰스를 떠올리자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일단은 물어보자.
정원을 비추는 것이라고는 저택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전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저택 전체를 환하게 비추는 전등은 정원까지 흘러넘쳐 별채 일부를 밝히고 있을 정도였다. 나는 선뜻 걸음을 옮겨 걸어갔다. 일단 책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
문득 뒤에서 들려온 불길한 소리에 멈칫했다. 정체가 무엇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냥 바람 소리겠지. 나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처음 시야에 들어온 것은 어둡고 광활한 정원이었다. 걸어온 길을 무심코 확인했던 나는 곧이어 시선을 내렸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나를 향해 이를 드러낸 채 온몸을 긴장시키고 있는 그것과 눈이 마주쳤다.
로트바일러.
사진으로밖에 본 적이 없는 거대한 투견이 나를 향해 으르렁대고 있었다. 나는 온몸이 굳어진 채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된 거지? 왜 이런 개가 여기에 있는 걸까. 손님 중 누군가가 끌고 왔나? 하지만 에밀리는 모두 돌아갔다고 했는데.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일시에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것은 전부 다 무의미한 질문에 불과할 뿐 지금 이 상황에서 도움이 되는 생각은 하나도 없었다.
누군가 불러야 돼.
간신히 나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도와 달라고 하지 않으면. 동시에 불안이 엄습했다. 그럼 누군가 올까? 언제? 얼마나 걸릴까? 혹시 모든 게 끝나고 난 다음에 온다면.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널브러져 숨을 껄떡거리는 내 모습이 환영처럼 시야에 비쳤다. 나는 순간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거의 동시에 개가 거칠게 짖으며 튀어 올랐다. 두 팔로 머리를 감싸고 웅크리면서도 머릿속은 그저 하얗게 비어 있을 뿐이었다. 대형견의 육중한 무게에 공기마저 무겁게 내려앉았다. 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얼어 버렸다.
그때였다. 난데없이 날카로운 고함 소리가 날아들어 왔다.
“알렉스, 멈춰!”
근육 덩어리인 묵직한 몸이 내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나는 그만 휘청거리며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걸로 끝이었다. 더 이상 공격은 없었다.
나는 한 박자 늦게 상황을 인지했다. 누군가의 명령으로 개가 나에 대한 적의를 거둔 것이다.
잠시 동안 나는 정신이 멍했다. 그저 깜박이기만 하는 눈꺼풀 너머로 검은 개가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멀지 않은 곳에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서 있었다.
“앉아, 알렉스.”
아까와 같은 목소리였다. 서릿발처럼 차가운 음성에 개는 방금 전 나를 공격했을 때의 모습과는 딴판으로 순한 양이 되어 명령에 따랐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개의 목줄을 쥐고 있는 것은 내가 이미 알고 있던 남자였다. 그도 나를 알아봤다.
“연우?”
그가 익숙한 웃는 얼굴로 물었다.
“여기서 뭐 하고 있어?”
그레이슨.
나는 주저앉은 채 멍하니 장신의 그를 올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