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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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슨은 여전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대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그 순간 내 머릿속을 지배한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그의 발치에 얌전히 엎드려 있는 개의 존재였다.

왜 하필 지금 스튜어드의 말이 떠올랐을까.

나는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레이슨은 그런 내가 이상한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미소 짓고 있는 얼굴이 왠지 위화감을 느끼게 했다.

처음으로 나는 그의 웃는 얼굴이 만들어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간신히 말을 하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도저히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위압감에 질려 버린 건지도 모른다. 흐릿하게 풍겨 오는 페로몬 향이 자꾸만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실내에서 저 향기를 맡았다면 또다시 자제심을 잃었을 것이다. 나는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내심 감사했다.

정신 차리자.

나는 황급히 주먹을 쥐었다 펴며 어떻게든 의식을 잃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괜찮아, 여긴 도와줄 사람이 많아. 정말 괜찮아.

순간 키이스의 냉혹한 말이 귓가를 스치고 갔으나 나는 무시했다. 괜찮아. 이를 악물고 간신히 일어섰을 때, 나는 그걸로 온몸의 기운을 소진해 버린 것 같은 탈력감마저 느꼈다.

“안녕하세요, 밀러 씨. 오늘 모임은 잘 끝났습니까?”

간신히 말을 할 수 있었다. 힘껏 몸을 펴긴 했지만 그레이슨이 주는 위압감은 별반 줄지 않았다. 그는 잘생긴 눈썹을 살짝 치켜뜨더니 나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여전히 웃는 얼굴로.

“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는데.”

순간 당황했다. 이 남자가 나한테 뭘 물어봤었지?

미친 듯이 머리를 뒤적여 간신히 그의 말을 기억해 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열었다.

“모임이 있다고 들어서 잠시 나와 있었습니다. 제 일이 아니라서.”

“네 일이 아냐?”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이 그레이슨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무뚝뚝하게 네, 하고 대답했다.

“오늘은 휴일이니까요.”

“아하.”

그제야 그레이슨은 납득한 듯이 짧은 감탄사를 뱉어 냈다. 굳이 내가 왜 이 남자를 납득시켜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어쨌든 위기는 넘긴 것 같았다. 그럼 이만, 하고 자리를 피하려는데, 그레이슨이 불쑥 말을 꺼냈다.

“다들 돌아갔는데 난 이 녀석 때문에.”

웃는 얼굴로 내려다본 자리에는 아까 나를 공격하려 했던 로트바일러가 얌전히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아까의 흉포함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순한 얼굴로. 그레이슨은 사랑스럽게 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잠깐 눈을 뗐는데 어디론가 사라져 버려서 찾고 있었지. 이 녀석, 오메가라면 사족을 못 쓰거든.”

그는 하하 웃었지만 나는 전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하마터면 물려 죽을 뻔했다. 이 상황에서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하지만 저택에 있는 오메가는 나만이 아니다. 고용인들 중에도 몇 명이 있는 걸로 알고 있었다. 거기다 지금 나는 페로몬 냄새가 거의 안 날 텐데, 역시 개라서 민감한 걸까? 다른 고용인들은 괜찮은가? 내심 걱정하는데, 마치 내 생각을 꿰뚫어 본 듯 그레이슨이 말했다.

“그래도 이렇게 공격을 하는 일은 별로 없는데. 연우가 무척 마음에 들었나 봐.”

그는 히죽 웃더니 물었다.

“생각 있으면 히트사이클 때 알렉스랑 짝짓기할래? 이 녀석 꽤 절륜하다고.”

순간 등 뒤로 소름이 쫙 올라왔다. 그만 표정이 무너져 내리고 만 것을 스스로도 알 수 있을 지경이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내게 그레이슨은 한쪽 어깨를 으쓱했다.

“농담이었어.”

그러나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진담이었다. 최소한 농담 섞인 진담이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나는 자꾸만 숨이 차오르는 것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럼 밀러 씨, 전 이만…….”

“잠깐만.”

갑자기 불러 세우는 바람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저 바라보기만 한 이유는 소리를 내는 것조차 이제 힘겨웠기 때문이었다. 그레이슨이 말을 이었다.

“그럼 왜 여기 있는 거야? 애초에 네가 할 일도 없는데.”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건지 그냥 장난을 거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이 남자의 진심을 단 한 번도 알 수 없었고 알려고 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 여기서 그걸 알아내야 하는지 납득되지 않았다.

“……실례하겠습니다.”

간신히 그 말만을 하고 돌아섰다. 어서 집 안으로, 정확히는 내 방 안으로 들어가 숨고 싶었다. 계속해서 흘러오는 그의 단내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기다려 봐, 연우. 뭐가 그렇게 급해?”

웃음이 가득 섞인 음성으로 그레이슨이 나를 불렀다. 그는 별다른 사심은 없었을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가볍게 장난으로 내게 허튼소리를 몇 마디 더 하려는 속셈이었다. 머릿속으로는 분명히 알고 있는데, 도저히 몸이 그것에 따라 주질 않았다.

“……히익!”

“……?”

그레이슨이 내 어깨를 잡는 순간, 나는 그만 비명처럼 숨을 삼키고 말았다. 시야에 놀란 그레이슨의 얼굴이 들어왔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나는 자지러지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연우, 연우? 왜 그래?”

그레이슨이 당황한 듯 연거푸 물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밭은 숨이 계속해서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꿀떡꿀떡 숨이 넘어가는데 호흡이 이어지지가 않았다. 머릿속이 꽉 막히고 눈앞이 점멸했다.

죽는 건가.

공포가 온몸을 움켜잡았다. 입을 크게 벌렸지만 산소는 들어오지 않았다. 점차 의식이 흐릿해졌다. 그 와중에도 그레이슨의 향기는 여전히 달콤하게 코끝을 맴돌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허리를 안아 낚아챘다.

그대로 품 안 가득히 끌어안기고, 불시에 진한 페로몬 향기에 전신이 휘감겼다.

“괜찮아.”

나직하고 차분한 음성이 귓가에 흘러들어 왔다.

“괜찮아, 천천히…… 그래.”

달래듯 조용한 음성은 분명 귀에 익은 것이었다. 난 이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다. 너무나, 너무나 잘 알았다.

“……헉!”

갑자기 공기가 물밀듯이 들어와 나는 비명처럼 숨을 삼켰다. 연거푸 기침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경련하는 것은 호흡기만이 아니었다. 나는 온몸을 덜덜 떨며 이를 딱딱 마주쳤다.

아, 다행이다.

문득 눈가가 뜨거워졌다. 나는 떨리는 손을 참지 못하고 남자의 셔츠를 움켜쥐었다.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는 힘껏 숨을 들이켰다. 호흡기에 경련이 일어날 것 같았지만 계속해서 반복했다.

키이스다.

키이스의 페로몬이다.

“흐으…….”

나는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감정을 누를 수가 없었다. 어깨를 떨며 숨죽여 울자 그때까지 말이 없던 그레이슨의 음성이 들려왔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그래?”

“좀 조용히 해, 그레이슨.”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날이 선 음성으로 키이스가 내뱉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페로몬 없애.”

“뭐?”

황당한 듯 그레이슨이 되물었다. 하지만 키이스는 여전히 냉정한 음성으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없애라고, 네 페로몬.”

짧은 순간 침묵이 흘렀다. 그레이슨은 평소와 다르게 너스레를 떨지 않았다. 잠시 말이 없다 싶더니 불현듯 공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주변에서 느껴지던 페로몬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나는 떨리는 숨을 어렵게 몰아쉬며 주의 깊게 숨을 들이켰다. 키이스의 향기가 온전히 내 안으로 들어왔다. 조심조심 천천히 점점 더 깊게 호흡을 조절했다.

하아, 하아. 하아, 하아.

거친 숨을 간신히 가라앉혔다.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몸에 힘이 풀렸다. 뇌가 완전히 녹아 버린 것처럼 흐물흐물해졌다. 완전히 풀어져 버린 몸을 키이스가 안아 들었다.

“왜 그러는 거야?”

그레이슨이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물었다. 몽롱한 시선을 들어 올리자 키이스는 나를 보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됐어. 다른 페로몬을 맡으면 발작을 일으켜.”

“어쩌다?”

키이스는 귀찮다는 듯이 간단히 대답했다.

“켄에게 사고가 났던 날. 그 일 때문에.”

잠시 그레이슨은 말이 없다가 뒤늦게 깜짝 놀랐다.

“벌써 몇 달 전 일이잖아?”

키이스는 대답 대신 흘긋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멍하니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레이슨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네 페로몬만 괜찮다고? 다른 페로몬에는 다 저러는데?”

키이스는 짧게 답했다.

“그래.”

그레이슨은 다시 말이 없어졌다. 불길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럼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네가 진정을 시켜 줘야 하는 거야? 언제까지?”

키이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레이슨도 굳이 대답을 원하지는 않는 듯했다. 곧이어 그는 농담처럼 덧붙였다.

“그냥 자 주지 그래? 좋아할 것 같은데.”

키이스는 이를 갈며 내뱉었다.

“닥쳐, 그레이슨.”

“하하하하.”

그레이슨은 소리 내어 웃었으나 곧 그것은 쓴웃음으로 변했다.

“불쌍한 연우.”

나는 흐린 눈으로 그레이슨을 훔쳐보았다. 그는 뚫어져라 나를 보고 있었다. 여느 때와 똑같이 웃는 얼굴로.

알았구나.

나는 아련한 의식 사이로 희미하게 떠올렸다.

저 남자는 눈치챘어, 내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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