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하아.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밤공기는 쌀쌀해 팔에 소름이 돋았지만 겉옷을 가지러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넓은 정원을 한 바퀴 돌았지만 정작 집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저택 주변을 서성거리는 이유는 키이스가 현재 그의 상대와 섹스를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킁킁, 하고 냄새를 맡았다. 역시나 페로몬이 넘치고 있었다. 저택 밖으로 이렇게 흘러나올 정도라면 집 안의 공기는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젖어 있을 것이다. 나는 저택으로 들어가는 게 두려웠다.
“연우, 아직 여기 있었습니까?”
찰스가 나를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나는 망설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평소처럼 건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곧 끝날 겁니다. 춥지 않습니까? 따뜻한 음료나 겉옷이라도?”
“아, 감사합니다. 겉옷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찰스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오죠.”
그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나는 팔을 문지르며 그 자리에 섰다.
몇 시쯤 됐을까?
나는 무심코 빈 손목을 내려다봤다가 씁쓸하게 시선을 돌렸다. 키이스는 어떨 땐 호텔로, 어떨 땐 집으로 상대를 불렀다. 주기는 불규칙했지만 공백은 3일을 넘기지 않았다. 이번에는 1주일째 매일 상대를 부르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라 크게 실망할 것도 없었다. 다만 저택으로 부르는 날은 당당하게 그의 침실로 들어가는 상대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괴로웠을 뿐.
처음 몇 번은 일찍 잠드는 척 핑계를 대고 초저녁부터 방에 틀어박히곤 했지만 넘치는 페로몬 때문에 보지 않아도 상황을 알 수가 있어 이젠 저택 밖을 떠돌기 일쑤였다. 마음은 죽도록 괴로운데 페로몬 냄새에 반응해 자위를 하는 것도 비참했다.
……춥다.
나는 부르르 떨며 어깨를 움츠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체감상으로는 세 시간도 훌쩍 넘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못할 것이다.
키이스는 섹스 상대와 자는 일이 없었다. 말 그대로 섹스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 저택에 머물게 되면서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덕분에 그가 호텔에서 상대를 만날 때면 나는 항상 차 안에서 최소 세 시간은 그를 기다려야 했다. 가끔은 나를 저택에 내려놓고 호텔로 갈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때는 몇 시간 뒤 새벽이면 어김없이 그가 돌아오는 차 소리가 들렸다.
……이제쯤 끝났을까?
그녀가 예정보다 일찍 오는 바람에 허겁지겁 나오느라 시계를 잊은 것이 안타까웠다. 얼마나 다급했는지 휴대 전화까지 놓고 나왔다. 나는 씁쓸해하며 한 차례 저택을 올려다봤다.
다급하게 밖으로 빠져나왔을 때 마침 키이스 방의 열린 창문에서 비명처럼 여자의 교성이 흘러나왔다. 연거푸 터지는 애타는 신음과 거친 교음에 나는 허겁지겁 달아나 정원을 정처 없이 떠돌다 이제야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연이은 비음은 꽤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거기다 나를 더욱 괴롭게 만든 것은 이번 상대인 나오미가 이전의 여자들보다 훨씬 더 오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벌써 갈아 치울 시기가 지났는데도 키이스는 새로운 상대를 찾으란 말을 하지 않았다.
키이스 또한 나오미가 마음에 든 건지도 모른다.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제법 긴 시간을 소요하고 돌아와 보니 숨 가쁘게 이어지던 높은 신음과 비명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저택은 고요했다.
후, 하고 한숨을 내쉬는데 뒤에서 문소리가 들렸다. 찰스가 겉옷을 가지고 돌아온 거라고 생각했지만 틀렸다. 문을 열고 나온 것은 나오미였다.
“어머나.”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깜짝 놀란 듯이 감탄사를 뱉었다. 늘씬한 몸매에 가슴이 훤히 드러나는 얇은 드레스를 걸친 나오미는 흘러내린 어깨끈을 손톱 끝으로 걷어 올리며 휘청휘청 내게 다가왔다.
“피트먼 씨의 비서죠? 마침 잘됐네요. 여기 집사는 어디 있어요? 일이 끝나면 집까지 바래다준다고 했었는데.”
“……곧 오실 겁니다. 이제 끝나셨나 보죠.”
굳이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그녀의 온몸에서 진한 페로몬 향기가 풍겼다. 나오미는 베타였다. 따라서 이것은 완벽하게 키이스의 페로몬이었다.
순간 나는 맹렬한 질투를 느꼈다. 표정을 감추려 급히 고개를 숙이자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작은 핸드백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후, 하고 길게 연기를 뱉어 낸 나오미가 말했다.
“당신, 오메가죠? 당신도 피트먼 씨와 잤나요?”
그녀의 음성에는 섹스 후의 나른함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느슨하게 기울어지는 피로한 눈매를 보니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아뇨. ……피트먼 씨는, 남자와는 자지 않습니다.”
신기하게도 내 목소리는 너무나 평온하게 내 귀로 흘러들어 왔다. 나를 바라보는 나오미는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내 본심이 들킨 건 아니었다.
“정말? 오메가인데도?”
나는 한 번 더 같은 말을 반복했다. 메마른 음성으로.
“남자와는 섹스하지 않으십니다.”
그녀는 휘파람과 함께 길게 담배 연기를 뱉어 냈다.
“저런, 불쌍하게도. 저렇게 섹스를 잘하는데 못 자 봤다니.”
나오미의 표정에는 자만심과 동정이 동시에 떠올라 있었다. 호기심과 거부감이 동시에 맹렬히 올라왔다. 나는 그런가요, 하고 말을 얼버무렸지만 그녀는 누구한테든 말하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말을 계속했다.
“비밀 유지 조항만 없었다면 정말……. 애너벨이 정자를 훔쳤었다던데, 이해가 가요. 하다못해 클론이라도 만들고 싶다니까. 같이 잠이라도 자면 저 남자가 잠든 사이에 페니스를 사진으로 찍어서 똑같이 생긴 딜도라도 만들 텐데. 애너벨은 어떻게 정자를 훔쳤을까, 비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면 뺨을 얻어맞겠죠?”
그녀는 목적을 이루자마자 쫓겨난 데에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회상이라도 하듯 멍한 표정이 된 그녀를 보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키이스와의 잠자리에 대한 소감은 지금까지 거쳐 간 상대들에게서 몇 번인가 들었었다. 하지만 애써 무시하고 한 귀로 흘리거나 급히 화제를 돌리곤 했는데 이번에는 꼼짝없이 잡혀 버렸다.
그런 내 속마음을 알 리 없는 나오미는 서운해하는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아무리 잘 만든 딜도라도 테크닉은 역시 따르지 못하겠죠. 헤어질 땐 헤어지더라도 그전에 실컷 해 주기라도 했으면 좋겠네.”
나는 그녀의 아름다운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남성 편력이 대단한 것으로 유명한 여배우는 처음 보석과 함께 키이스의 메시지를 전했을 때도 그다지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거만하게
<그래요? 얼마나 대단한지 궁금했는데 잘됐군요.>
하고 말하며 웃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날 밤 호텔에서 키이스와 만나고 나더니 이튿날부터 수시로 비서실에 연락해 다음 약속은 언젠지를 물었다. 언제나 키이스의 상대들은 그랬기 때문에 나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이유를 이렇게 난데없이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알게 되다니.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 나는 그저 입만 다물고 있었다. 솔직히 궁금했다. 어차피 난 평생 알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듣고 나면 난 더욱 비참해질 것이다. 나는 호기심보다 자존심을 택했다.
“만족했다니 다행이군요.”
“만족이라고요?”
나오미는 후, 하고 웃음과 함께 연기를 뱉어 냈다.
“하긴 당신은 자 보질 못했으니 그렇게 덤덤할 수 있는 거겠죠. 키이스는 내가 자 본 남자들 중에서 최고예요. 맙소사, 왜들 그렇게 난린가 했더니. 아쉬워라, 나중에 헤어지자고 하면 나 역시도 울고불고 매달릴 게 뻔해요.”
찰스는 언제 오는 걸까.
나는 초조해져 무심코 본심을 내뱉었다.
“매달리더라도 저를 때리지는 말아 주셨으면 좋겠군요.”
“때린다고요?”
그녀의 놀란 음성에 나는 아차, 싶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동그래진 눈으로 보는 나오미에게 나는 하아, 한숨을 내쉰 뒤 솔직하게 그러나 무뚝뚝한 어조로 대답했다.
“아쉬움이 지나쳐서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피트먼 씨는 마지막까지 성의를 다하시지만 그래도 물질로는 만족이 되지 않는 게 있겠죠.”
나는 굳이 그것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은 채 입을 다물었다. 나오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나오미는 담배를 입으로 가져가며 여상하게 말했다.
“누구나 만만한 사람한테 화풀이를 하죠. 차마 키이스 나이트 피트먼에게는 할 수 없을 테니. 당신도 참 힘들게 사네요.”
천천히 연기를 빨아들였다 내뱉은 그녀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나도 어떨지 약속은 못 하겠는데. 모든 건 닥쳐 봐야 알지 않겠어요?”
옳은 말이었지만 당사자인 나로서는 그렇군요, 하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수도 없었다. 잠자코 아무 말 하지 않는 내게 나오미가 물었다.
“때리지 않고 만지는 건 돼요?”
“네?”
순간 잘못 들었나 했다. 어리둥절해 눈을 깜박이자 그녀는 후후 웃으며 말했다.
“오메가라도 여자와 잘 수는 있잖아요? 아이를 못 가질 뿐이지. 그저 즐기려면 그쪽이 낫기도 하고.”
나는 당황해 잠시 말문이 막혔다. 남성 편력이 대단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내가 그 대상이 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그녀는 그런 뜻으로 한 얘기가 아니었다.
“귀여워라. 내 아들하고 닮았어요, 당신.”
“아들이라고요?”
나오미에게 자식이 있었던가? 결혼은 두 번 했지만 현재는 싱글일 텐데. 아이가 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고 방문했을 때도 집 안에서 그녀 외의 사람은 고용인밖에는 보지 못했다. 급하게 기억을 더듬었던 나는 곧 의심스럽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혹시 집에서 키우는 그 조그만 개.”
“맞아요, 미키!”
순간적으로 나는 표정을 관리하지 못했다. 맙소사. 개하고 닮았다는 소리나 듣다니. 하지만 내 일그러진 얼굴을 본 그녀는 재밌다는 듯이 까르르 소리 내어 웃었다.
“정말 닮았네. 미키는 나한테 화가 나면 그런 표정을 짓거든요. 이거 봐요, 정말 귀엽죠?”
나오미는 휴대 전화의 사진을 찾아 내게 보여 주려고 했다. 물론 나는 거절했다.
“사양하겠습니다. 잠깐 실례합니다.”
찰스를 찾아오겠다고 말하려는데, 갑자기 그녀가 휘청거렸다. 나는 놀라 반사적으로 나오미를 붙잡았다.
느닷없이 그녀를 뒤덮고 있던 페로몬이 호흡과 함께 내 안으로 훅 들어왔다. 황급히 숨을 멈췄지만 벌써 심장은 마구 뛰고 손바닥이 젖어 들었다. 나는 억지로 진정을 하려 애쓰며 나오미를 부축했다. 나를 쳐다보는 그녀의 시선이 어딘지 몽롱했다.
뒤늦게 나는 상황을 눈치챘다. 나오미는 페로몬에 취한 것이다. 이 정도로 페로몬에 절여지면 아무리 베타라도 영향을 받는 모양이었다.
하긴, 나도 그랬지.
베타이기 때문에 당장은 영향이 없어도 시간이 흐르면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처음 저택에서 나왔을 때는 멀쩡했으니 아마 뒤늦게 페로몬이 흡수된 거겠지. 씁쓸한 기분으로 나는 나오미의 팔을 꽉 붙잡았다. 아픔에 그녀는 조금 정신이 든 듯 얼굴을 찌푸렸다.
“페로몬 때문입니다. 돌아가면 꼭 몸을 씻고 자요. 약을 챙겨 줄 테니까 그것도 먹고. ……오메가로 변이할 수 있으니까.”
씁쓸하게 덧붙이자 멍하니 눈을 깜박였던 나오미가 갑자기 싱긋 웃었다.
“친절하네요, 강아지 씨.”
이어서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불시에 그녀가 내 얼굴을 붙잡고 입술을 들이민 것이다.
피할 틈도 없이 입술이 부딪쳤다. 그것은 그야말로 사고에 가까웠다. 나는 순간 굳어져 곧바로 대응을 하지 못했다. 그사이 나오미가 부드러운 입술을 내 입술에 꾹 눌렀고, 뒤이어 혀를 내밀었다.
촉촉한 감촉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황급히 그녀를 떼어 내며 나는 소리쳤다.
“무슨 짓입니까? 정신 차려요.”
“하하하.”
그녀는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물론 나는 전혀 웃지 않았다. 황급히 입술을 닦는데, 마침 찰스가 밖으로 나왔다.
“찰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그를 반기며 알은체를 했다. 내 겉옷을 챙겨 왔던 찰스는 이내 나오미를 발견하고 곧바로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연우, 이만 들어가시죠.”
그는 선뜻 내게 가져온 겉옷을 건네주고 나오미를 데려가려 했다.
“저.”
나는 급히 찰스에게 말했다.
“이분이 페로몬에 취한 것 같습니다. 약을…….”
찰스는 평소처럼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항상 있는 일이죠. 걱정하지 마십시오.”
집사의 담담한 반응을 보자 내가 불필요한 당부를 한 것 같아 무안해졌다. 하지만 나오미는 전혀 상황을 눈치채지 못했다.
“또 봐요, 강아지 씨.”
나오미가 낄낄대며 손 키스를 날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찰스가 나오미를 끌고 멀어지는 모습을 그 자리에 선 채 지켜보는데, 문득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키이스가 발코니의 난간에 기대어 앉아 담배를 피우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만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며 그를 올려다봤다.
키이스도 나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언제부터 저기에 있었을까? 어디서부터 봤을까? 왜 저렇게 나를 보고 있을까?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모든 것이 궁금했지만 차마 물을 수 없었다. 그는 셔츠의 버튼을 두어 개 푼 채 머리칼을 흐트러뜨린, 지금까지 본 그 어느 때보다 러프한 모습이었다. 나는 생소한 키이스의 모습에 어리둥절하면서도 가슴이 뛰었다.
외로운 밤공기가 한차례 스쳐 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손을 들어 바람에 어지럽혀진 머리칼을 붙잡았다. 망설이다 고개를 들자 키이스는 아직 거기에 있었다.
후, 하고 그가 길게 연기를 뱉어 냈다. 일직선으로 흐르는 희뿌연 연기가 순간적으로 공기를 가르는가 싶더니 이내 사방으로 흩어졌다. 문득 키이스가 희미하게 미간을 일그러뜨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심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키이스가 몸을 움직였다. 나는 그가 내게서 시선을 거두고 침실로 들어가 모습을 감추는 것을 지켜봤다.
아.
적적한 심장에 아릿한 통증을 느끼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황량한 정원에 나 혼자 남겨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 *
“……해서 오늘까지 보고를 올리기로 했습니다. 다시 감독에게 연락을 해서 진행 상황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점심 약속은 없고 3시에 변호사와 약속이 있습니다. 이번에 체이스 밀러 씨와의 계약 건으로 계약서를 작성해 올 겁니다. 마지막으로 그레이슨 밀러 씨가 연락을 해 달라는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출근을 하는 차 안에서 감정이라고는 전혀 들어가지 않은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보고를 하는 동안 키이스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오늘 스케줄을 끝까지 같은 어조로 읽어 내려갔다. 그레이슨 밀러라면 ‘너무 지루하잖아, 날 재우려고 그러는 거야?’라며 넉살 좋게 꼬집었을 테지만 키이스는 물론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저 담배를 피우며 정면을 보고 있을 뿐이다. 나는 읽는 것을 마치고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키이스는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나는 전날 발코니에 기대어 앉아 있던 그의 모습이 꿈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별 의미가 없는 사건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그는 아래를 내려다봤을 뿐이고, 우연히 시선이 마주친 게 전부일 수도.
그저 내 헛된 기대가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뿐.
문득 쓴웃음을 지었던 나는 황급히 표정을 되돌렸다. 슬쩍 눈치를 봤지만 키이스는 역시나 내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내가 무심코 표정을 흐트러뜨린 일 따위는 전혀 모를 것이다. 나는 안도하는 한편 언제나처럼 씁쓸해졌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에 본 약통의 약이 훌쩍 줄어 있었던 게 생각났다. 평소보다 많은 양을 먹고 있으니 예정일보다 빨리 떨어지는 게 당연하다. 찰스의 말을 떠올리며 나는 휴대 전화를 꺼냈다. 혹시 약국에 갈 시간이 없을 경우를 대비해 그에게 약을 채워 달라고 메시지를 보낼 생각이었다. 어차피 이 속도로 먹어야 한다면 약은 많이 준비해 둘수록 좋을 테니까.
짐도 가지러 가야 할 텐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필요한 물건은 모두 찰스가 준비해 줬다. 하다못해 출퇴근 시 입을 슈트까지도. 키이스의 지시였지만 어쨌든 썩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상태가 좋아지는 대로 쇼핑을 가서 직접 사든가 짐을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럴 정도로 호전된다면 아예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게 아닐까.
문득 생각했던 나는 곧 그것을 무시해 버렸다. 지금 당장 눈앞의 일에 집중하자. 급하게 메시지를 찍는데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그레이슨은 용건이 뭐라고 했지?”
재빨리 메시지를 보낸 나는 곧바로 휴대 전화를 다시 넣고 키이스의 질문에 대답했다.
“내용은 없었습니다. 그저 연락해 달라는 메시지만.”
키이스는 미간을 찌푸릴 뿐 말이 없었다. 평소에도 그는 그다지 말이 많은 스타일이 아니었지만 전보다 가까이 있다 보니 그런 사실이 더 확실하게 와닿았다. 아침이면 나는 그와 같은 차를 타고 출근한다. 매일같이 차 안에서 하루의 스케줄을 보고하고 지시를 기다리지만 반복되는 침묵은 익숙해지지 않고 매번 마음을 어수선하게 만들었다.
“……체이스 밀러에게.”
“네, 피트먼 씨.”
즉각 대답하자 그는 마지막으로 연기를 빨아들이더니 다 피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역할을 바꾸라고 해. 세바스찬이 아니라 크로우 역으로.”
“네?”
나도 모르게 되물었다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나는 한 박자를 쉬었다가 다시 말을 꺼냈다.
“주연이 아니라 조연인데요.”
키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시선만을 돌려 나를 흘긋 본 게 전부였다.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주연은 어떻게 할까요?”
“그건 적당히 후보를 찾아서 올려.”
“알겠습니다.”
나는 깍듯이 대답한 후 재빨리 메모를 했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전화를 돌릴 곳이 많아졌다.
체이스 밀러.
나는 문득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잘나가는 배우이자 밀러가의 셋째인 그는 역시나 극알파였다. 극알파 특유의 보라색 눈에 밀러가의 화려한 금발을 가진.
“검은 머리로 염색을 해야겠군요.”
무심코 중얼거린 나는 서둘러 덧붙였다.
“물론 어울리겠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키이스는 묵묵히 서류를 들여다볼 뿐이었다. 무안해진 나는 황급히 스케줄을 확인했다. 필요한 사항을 간단히 펜으로 적어 넣다가 별생각 없이 입을 열었다.
“저녁에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오미 파커 씨를 호텔로 초대할까요?”
그는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기다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뭔가 생각에 잠긴 것 같은 옆모습에 나는 한 번 더 물었다.
“피트먼 씨, 파커 씨를 호텔로 부르면 됩니까?”
“뭐라고?”
뒤늦게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키이스가 내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시에 전혀 예고도 없이 그와 나는 시선이 맞부딪쳤다.
느닷없이 심장이 내려앉더니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나는 숨을 죽였지만 정작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키이스 또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갑자기 세단의 넓은 실내가 터무니없이 좁게 느껴졌다. 호흡이 곤란해져서 밭은 숨을 내쉬면서도 나는 눈조차 깜박이지 않았다. 키이스는 그런 나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정확히는 내 입술을 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입술이 바짝 말라붙었다. 나는 순간 참지 못하고 혀를 내밀어 핥았다. 희미하게 상처가 남아 있던 입술이 아릿하게 저려 왔다. 그의 시선에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문득 키이스가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뭔가 말을 하려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너 말이야…….”
나의 모든 감각이 청각으로 돌변한 것처럼 긴장했다. 키이스의 낮은 숨소리마저도 놓치지 않기 위해 온몸을 굳혔다.
하지만 키이스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여전히 찌푸린 얼굴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그저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기만 했다.
키이스는 더는 말을 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나는 그가 손을 드는 것을 눈조차 깜박이지 않고 지켜봤다. 그의 섬세한 손가락이 내 뺨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숨이 너무 거칠어져서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페로몬 때문이라고 할까? 키이스는 이번에도 속아 넘어가 줄까?
아니, 내가 거짓말을 할 수 있을까?
저 손이 내게 닿는다면.
♪♪♬♬♩♩♩♪…….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말았을 때, 갑자기 벨 소리가 들렸다. 나는 주저하다 눈꺼풀을 들었다. 키이스는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다. 손을 내게로 향한 채.
전화벨은 계속 울렸다. 적막 속에서 오직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만이 공기 속을 불안정하게 떠돌았다.
하아.
짧게 한숨을 내쉰 것 같던 키이스가 들었던 손을 가져갔다. 허망하게도 그의 손은 내게 닿지 않은 채 멀어져 갔다. 그 손을 잡아 키스하고 싶은 것을 한사코 참느라 나는 힘껏 주먹을 쥐어야 했다.
키이스가 통화를 하는 동안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머릿속을 가라앉혔다. 천천히 숨을 고르자 은은하게 흐르는 페로몬 향이 그제야 새삼 코끝으로 느껴졌다. 차창 밖으로 낯익은 건물이 보였다. 곧 도착할 것이다.
“호텔로 오라고 해.”
전화를 끊은 키이스가 불쑥 말했다. 잠깐 멍해졌던 나는 이내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파커 씨에게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시간은 7시로 할까요? 저녁 식사 약속은 없으신데요.”
평소처럼 사무적으로 묻자 키이스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내 쪽을 보지는 않았다. 나는 간단히 알겠습니다, 하고 말한 뒤 재빨리 스케줄 한쪽에 메모를 했다. 일부러 시선을 내려 어수선한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