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퇴근 후 키이스는 나를 저택에 내려놓고 곧바로 호텔로 향했다. 자주 있는 일이었지만 멀어지는 모습을 보니 씁쓸함에 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이후의 스케줄은 다른 때와 똑같았다. 찰스가 준비해 준 저녁 식사를 하고 그 뒤에 방문한 스튜어드와 상담을 했다.
“이제 상담은 1주일에 두 번 정도로 빈도를 조정하고 약으로 치료를 해 보죠.”
그렇게 말하며 그는 주머니에서 약을 꺼냈다. 항상 내가 자제심을 잃으면 주는 약이었다.
“혹시 발작이 일어날 것 같으면 이걸 먹어요. 진정이 되지 않으면 이걸 하나 더 먹고.”
두 번째로 준 약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신기해하며 이리저리 돌려 보자 스튜어드가 말했다.
“이쪽은 첫 번째 약이 듣지 않을 경우에만 먹어요. 그래도 가능하면 먹지 않는 게 좋아요. 효과가 좋은 만큼 부작용도 크니까. 일단 첫 번째 약을 먹어 보고 정 안되겠다 싶으면 먹되 우선은 본인이 진정을 하려고 노력하는 게 중요해요. 그리고 두 번째 약을 먹고 나면 나한테 전화를 줘요. 상태도 확인하고 효과가 어떤지도 알아야 하니까.”
재차 당부한 스튜어드에게 나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인 후 한 번 더 약의 순서를 확인했다.
“후우.”
크게 어깨를 들썩여 심호흡을 하자 스튜어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내 어깨를 토닥였다. 무심코 움칠하긴 했지만 전처럼 굳어지진 않았다. 스튜어드는 기특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튜어드를 배웅하고 나는 응접실로 돌아왔다. 혼자 남게 되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앉아 있는데 아련히 음악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그것이 뭔지 깨닫지 못했다. 그저 눈만 깜박이고 있다가 뒤늦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황급히 휴대 전화를 꺼내 상대를 확인했다. 체이스 밀러의 매니저였다.
“네, 늦게 받아서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서둘러 전화를 귀로 가져와 사과하자 건너편에서 입을 열었다.
[이쪽이야말로 늦은 시간에 미안해요. 체이스가 얘기한 걸 빨리 전해야 할 것 같아서.]
“네, 물론 그렇죠. 괜찮습니다.”
나는 재빨리 메모할 준비를 했다. 곧이어 매니저가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조건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하네요.]
순간 나도 모르게 신음을 내지를 뻔했다. 잊고 있었다. 체이스 밀러는 그리 만만한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배역을 바꾼다는 게 배우 입장에서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 타협이 가능한 상대가 있고 그렇지 않은 상대가 있다. 체이스 밀러는 절대 그렇지 않은 상대였다.
“조건이 마음에 안 드신다고요?”
나는 되묻고 말았다. 매니저는 수화기 건너편에서 난처한 듯 대답했다.
[네, 체이스가 이번 계약은 파기하겠다고 합니다. 먼저 계약 내용을 변경한 것은 그쪽이니 저희 쪽의 과실은 없는 걸로…….]
“잠시만, 잠시만요!”
나는 황급히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낮에 전화드렸을 때 납득한 게 아니었습니까? 역할을 변경한다고 얘기드렸었고 서류로 자세히 변경 사항을 전달받으신 후 계약 내용은 다시 조율하는 걸로…….”
[그러기로 했습니다만, 체이스가 계약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걸 어떻게 하겠습니까.]
다시금 그의 깊은 한숨 소리가 수화기 건너편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잠시 막막함에 할 말이 없어졌다. 대체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든단 말인가. 모든 조건을 처음보다 훨씬 더 좋게 제시했는데. 오직 체이스 밀러의 역할 변경만을 위해 회의를 열고 변호사를 통해 계약서를 다시 만들었다.
역할 변경에 따른 계약서의 수정 내용은 다행히 그다지 큰 반발 없이 넘어갔다. 다만 체이스 밀러가 어째서 주연이 아닌 조연으로 발탁된 건지는 임원들 사이에서 여전히 납득이 안 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근래 수차례 세부 사항에 대해 이런저런 비난을 들었던 터라 아무도 감히 키이스에게 질문을 할 수가 없었다.
거기다 키이스가 한 선택은 언제나 옳았다. 모두가 납득하지 못하고 결사반대를 했던 어느 영화의 엔딩이 그해 최고의 라스트 신으로 극찬을 받는다거나, 무명의 배우를 캐스팅해 일약 스타로 만드는 일도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키이스의 선택이 통할까? 모두는 반신반의하면서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역할 변경에 따른 대가도 몇 배로 지불하도록 배려했다. 나는 계약서 안에 0이 무수히 찍혀 있는 출연료를 떠올렸다가 뒤늦게 덧붙였다.
“그럼 원하는 걸 얘기해 주십시오.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어떻게 수정하길 원하는지.”
그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음,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입을 연 매니저가 주저하며 말을 이었다.
[그건 직접 얘기하겠다고, 만날 약속을 정하자고 했습니다.]
“하아.”
나는 그만 소리 내어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인기 스타가 멋대로 조건을 내걸며 제작사를 곤란하게 만드는 건 이 바닥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키이스 나이트 피트먼을 상대로 이런 오만이라니, 이건 체이스가 밀러가의 사람이기에 가능한 행패인 걸까?
“알겠습니다. 일단 보고를 드리긴 하겠습니다만 이것이 받아들여질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렇겠죠.]
내 경고에 상대방 또한 기운 없는 음성으로 수긍했다. 이 남자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처지라는 생각에 동정심이 들었다. 어쩌면 극알파라는 인종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걸까.
“하아.”
다시금 깊은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밖에서 희미하게 차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키이스가 귀가를 하는 것이다. 나는 서둘러 일어나 응접실을 나갔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자 찰스가 계단 아래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키이스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멀지 않은 거리에서 달려오던 차가 중앙의 작은 정원을 끼고 크게 원을 그렸다. 차가 멈추고 키이스가 내리는 동안 나는 찰스의 옆에 서서 대기했다.
제일 먼저 내린 휘태커가 곧바로 키이스가 탄 차로 뛰듯이 다가가 문을 열어 주었다. 가장 마지막에 차에서 내린 키이스는 고개를 들었다가 나를 발견하더니 멈칫했다. 아마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대한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나를 봤다고 저렇게 멈칫할 필요까지 있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찰스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오셨습니까. 씻으실 준비를 할까요?”
키이스는 억양이 거의 없는 말투로 정해진 질문을 하는 집사의 옆을 무심히 스쳐 지나가며 아니, 하고 짧게 대답했다. 이런 날은 대개 샤워를 마치고 오기 때문에 저택에 돌아와 다시 씻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예상했던 대답을 한 키이스가 평소처럼 무심하게 덧붙였다.
“됐으니까 가 봐.”
찰스는 짧게 고개를 끄덕인 후 돌아섰다. 그런 그를 뒤로하고 키이스는 똑바로 내게 걸어왔다. 정확하게는 그가 걸어오는 길에 내가 서 있었던 것뿐이지만.
차 안에서부터 피웠던 듯 키이스는 담배를 입술에 물고 있었다. 그가 가까워질수록 익숙한 담배 연기에 섞여 희미하게 페로몬 향기가 났다. 나는 거기에 묻어 있을 보디 워시의 향기를 의식적으로 맡지 않으려 노력했다. 물론 의지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줄곧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기다리던 내게 마침내 같은 계단에 올라선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뭐야?”
여전히 담배를 입술에 문 채로 그는 물었다. 입술이 달싹일 때마다 담배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문득 저 담배가 나였으면, 하고 당치도 않은 생각을 했다. 용도가 다 되면 주저 없이 바닥에 내던져지는 마지막 순간이 뒤이어 떠올라 이내 현실로 돌아왔다.
키이스는 아직 나를 보고 있었다. 서늘한 시선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애써 참으며 나는 평소처럼 대답했다.
“체이스 밀러 씨의 매니저와 통화를 했습니다만,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직접 만나 얘기를 하겠다고 합니다.”
키이스의 눈썹이 짧게 꿈틀했다. 그가 입술에서 담배를 떼어 냈다.
“체이스가 날?”
“네.”
나는 내심 조마조마해하며 눈치를 살폈다. 화를 내면 어쩌지. 키이스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나는 급하게 그럴 경우 내가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를 떠올렸다. 다행히 찰스도 있으니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내심 안심하는데, 뜻밖에도 키이스는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긴 손가락에 걸려 있는 담배를 다시 입술에 물었다가 떼어 내며 그가 입을 열었다.
“언제?”
“네?”
그만 또다시 얼빠진 반응을 내보이고 말았다. 키이스의 얼굴이 이번엔 진심으로 험악해졌다. 다시금 성질에 불을 붙이기 전에 나는 황급히 일정을 읊었다.
“정확한 날짜나 시간을 그쪽에서 말한 건 없지만 일단 이쪽의 일정은 다음 주 화요일 점심시간이 비어 있습니다.”
“그럼 그렇게 정해.”
“……알겠습니다.”
너무나 어이없이 끝나 버린 얘기에 나는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당연히 엄청나게 화를 내거나 그와 비슷한 반응을 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시시하게 마무리되다니. 키이스는 이런 상황이 있을 거라고 예상이라도 했던 걸까?
그사이 찰스는 현관문을 열고 키이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찰스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뒤늦게 그의 뒤를 쫓아 급히 걸음을 옮겼다. 키이스는 2층의 자기 방으로 가기 위해 긴 계단을 올라갔다. 내 방 또한 그의 방에서 멀지 않았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그를 쫓아가는 뉘앙스가 되어 버렸다. 계속해서 뒤를 따라가는 발걸음에 그는 멈칫하는 것 같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더 할 얘기가 있어?”
그저 가는 방향이 같았을 뿐이지만 나는 사실을 말하는 대신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저, 밀러 씨가 무슨 조건을 내세우려고 그러는 걸까요?”
황급히 나는 질문의 이유를 합리화했다.
“혹시 예상하는 게 있으시다면 미리 준비라도 해 두려고요. 그러면 계약도 빨리 진행이 될 테니까요.”
그러자 키이스는 전혀 표정의 변화 없이 무심하게 말했다.
“별거 없어.”
나는 또다시 ‘네?’ 하고 되묻는 것은 가까스로 참았지만 대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키이스는 성가시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그냥 나를 골탕 먹이고 싶어 하는 것뿐이야. 그런 녀석이니까.”
“네에…….”
나는 어리둥절해져 고개를 갸우뚱했다. 키이스가 담배를 꺼내며 말했다.
“그레이슨한테…….”
말을 하다 말고 그는 멈칫했다. 그레이슨의 이름을 듣는 순간 나 역시 움칠했지만 이건 일이었다. 나는 묵묵히 키이스가 다시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말했다.
“상관하지 마. 됐으니까.”
“……알겠습니다.”
더 이상 내가 할 말은 없어서 나는 입을 다물었다. 침묵 속에서 그와 나의 발소리만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2층의 복도에 다다를 무렵 키이스가 후, 하고 한숨처럼 길게 담배 연기를 뱉었다. 나는 무심코 말을 꺼냈다.
“피곤하십니까?”
키이스가 흘긋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주제넘은 질문을 던진 것 같아 급히 화제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키이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조금.”
요즘 업무가 많았던가?
나는 같은 속도로 계속해서 걸어가는 키이스의 뒷모습을 보며 서둘러 머릿속으로 생각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최근 키이스는 컨디션이 좋지 않아 보였다. 뭔가 말을 하면 한 박자 늦게 반응을 한다든가 어딘지 멍해 보인다거나 하는 일이 잦았다. 그걸 지적하기는 어려웠지만 키이스가 직접 그렇다고 말할 정도라니.
원인을 생각해 봤지만 떠오르는 게 없었다. 문득 스튜어드의 말이 생각났으나 곧 부정했다. 페로몬이 쌓여 머리에 이상이 생길 일은 없었다. 키이스는 이전보다 더 자주 나오미를 불러내고 있었으니까. 당장 오늘도 호텔에서 돌아오는 길이지 않은가. 나는 씁쓸한 기분에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저, 괜찮으시다면 조금 주물러 드릴까요?”
그 말에 키이스는 민망할 정도로 우뚝 멈춰 섰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그가 내 얼굴을 쳐다봤다. 나는 무안해져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저……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배웠던 적이 있어서…….”
키이스가 입술에서 담배를 뗐다. 후, 짧게 연기를 뱉은 그가 물었다.
“마사지를?”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활비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거든요……. 아, 자격증도 있습니다. 혹시 실력이 못 미더우신 거라면…….”
키이스는 천천히 담배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가 다시 연기를 뱉어 낼 때까지 고작 몇 초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침묵은 무거울 정도로 내 어깨를 짓눌렀다.
“10분 후에 내 방으로 와.”
키이스의 말을 분명히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귀를 의심했다. 탁, 하고 조용히 문이 닫히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10분 후.
나도 모르게 비명이 나올 것 같아 나는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 * *
10분은 마음을 가라앉히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나는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하고 애국가를 부르다가 가사를 잊어버려서 급하게 인터넷을 찾고 그러다 시를 읽고 다시 심호흡을 했다. 진정을 하기 위해 썼던 방법들은 오히려 나를 더 정신없게 만들 뿐이었다. 뒤늦게 시간을 보니 13분이 지나 있었다.
하필이면 13일 수가.
나는 불길한 기분을 느끼며 급하게 내 방에서 뛰쳐나왔다. 이럴 때면 꼭 키이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덕분에 그 와중에도 내 꼴이 어떤지 살펴보는 걸 잊지 않았다.
<뭐야? 이 거지 같은 몰골은.>
다시금 가슴이 욱신거리는 것을 참고 키이스의 방문 앞에 섰다. 지금쯤이면 15분이 다 됐을 것이다. 5분이나 늦어 버렸다. 나는 후우, 하고 한 차례 더 심호흡을 한 뒤 노크를 했다.
똑똑.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확연히 보일 정도였지만 용케 문을 두드리는 건 제대로 했다. 나는 몇 초의 공백을 두고 문을 열었다.
그날 아침에 보았던 방의 정경이 똑같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나를 내려다보는 여신의 비웃음조차도 그대로였다. 나는 사랑과 미의 여신을 모른 체하고 똑바로 고개를 들었다.
키이스는 옷을 갈아입은 후였다. 아래는 편안한 면바지를 입고 위는 벗은 채였다. 마사지를 해 준다고 했으니 당연한 것이었지만 나는 그만 시선 둘 곳을 정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버렸다. 그러나 이미 봐 버린 그의 상체는 너무나 깊게 머릿속에 각인된 후였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심장 소리 때문에 귀가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온몸의 신경이 키이스를 향해 곤두서 있지 않았다면 그가 움직이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키이스는 그저 나를 흘긋 보더니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가 침대 위로 올라가는 것을 나는 곁눈으로 훔쳐보았다.
“저, 로션이 있다면…… 으흠, 좋겠는데요.”
그만 쉰 목소리가 새어 나와서 급하게 헛기침을 했다. 키이스는 별다른 말 없이 한쪽의 욕실을 가리켰다. 나는 서둘러 몸을 움직여 욕실로 향했다.
욕실의 배치는 내 방에 딸려 있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지 훨씬 더 넓었을 뿐이다. 안에 들어 있는 물품도 대략 비슷했다. 내가 약을 놓는 자리에 똑같이 간단한 진통제 같은 상비약들이 놓여 있는 것을 보고 나는 곧 로션이 있는 곳을 찾아냈다.
보디로션을 찾아 방으로 돌아오자 키이스는 침대 위에 엎드려 있었다. 한쪽으로 돌려져 있는 얼굴이 내가 있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다행히 눈을 감고 있어서 나는 안심했다. 침대에 누워 있는 키이스와 눈이 마주친다면 더는 버티지 못하고 주저앉았을 것이다.
카펫이 내 발소리를 삼켜 버려서, 나는 일부러 으흠, 하고 한 차례 헛기침을 한 뒤 그에게 다가갔다. 기척을 느꼈을 텐데도 키이스는 눈을 뜨지 않았다. 그의 몸에 손을 대기 전에 나는 먼저 말을 걸었다.
“피트먼 씨, 주무십니까?”
작은 소리로 물은 것은 혹시나 그가 잠에 빠져들었다면 그냥 나가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피곤하다고 말한 그를 굳이 깨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키이스는 곧 대답했다.
“아니.”
나는 무심코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 그럼 시작해 보겠습니다……. 혹시 불편한 곳이 있으시다면 말해 주세요.”
경고처럼 덧붙였지만 이번에는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로션을 적당히 덜어내 손에 문질렀다.
키이스의 등에 손바닥을 가져가는 것엔 어마어마한 용기가 필요했다. 나는 광고에서나 봤던 탄탄한 근육질의 등을 눈앞에서 보고 숨을 쉬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세상에 이런 완벽한 몸이 또 있을까.
곧게 뻗은 척추를 중심으로 마치 수영 선수처럼 꽉 짜인 등 근육은 테스토스테론의 결정체를 보는 것 같았다. 거기다 넓은 어깨부터 좁은 허리까지 이어진 잔근육은 단 1퍼센트의 지방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촘촘하게 엮여 있었다.
맙소사, 이 남자의 몸을 만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일생의 행운을 전부 써 버리는 것 같았다. 과연 그래도 되는 건지 두려워질 정도였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나는 이미 이 행운을 선택해 버렸다. 무를 수는 없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려다 황급히 숨을 다잡았다. 지금 상태에서 키이스의 페로몬까지 맡게 되면 그야말로 끝장이었다. 나는 상상하기조차 두려운 상황을 미연에 차단하기 위해 억지로 숨을 눌러 참았다.
떨리는 손끝에 키이스의 피부가 닿았다. 그 순간 심장이 멈춘 듯한 착각을 느꼈다.
하지만 내가 흥분한 것을 들킬 수는 없었다. 나는 곧바로 손바닥을 내려 그의 등을 지그시 눌렀다. 마사지를 한 지가 오래돼서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꽤 어려웠다. 키이스에게 정신을 빼앗기면서도 동시에 배운 것을 기억해 내느라 뇌가 타 버리는 듯했다.
근육을 따라 몇 차례 압력을 준 뒤 나는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더 세게 할까요? 아니면 약하게.”
잠깐 키이스는 생각하는 듯했다. 고민할 정도라니, 역시 그만두라고 말할까? 내심 그렇다면 다행이다, 하는 생각과 행운이 너무 빨리 끝나 버렸다는 애석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키이스의 등에 두 손바닥을 댄 채 머물러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이 기분을 느끼고 싶다는 파렴치한 감정과 그에 따른 죄책감을 애써 모른 척하며.
“……계속해.”
그 말에 나는 기쁨과 당혹감을 동시에 느꼈다. 이러다 심장이 터져 죽을지도 몰라, 하는 생각과 함께 그래도 죽는 순간에는 행복하겠지, 하는 생각이 들어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목소리에 감정이 섞이지 않도록 주의하며 나는 입을 열었다.
“그럼, 계속하겠습니다.”
키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그를 나는 흘긋거리며 훔쳐봤다. 혹시나 정신없이 보다가 갑자기 눈을 떠서 그런 나를 들킬까 봐 대놓고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 와중에도 손은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근육을 따라 손가락에 힘을 줘 천천히 문지르며 목과 어깨를 쓰다듬었다.
몸으로 익힌 것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되살아나는 모양이었다. 시간이 흐르자 기억을 떠올리기도 전에 먼저 몸이 움직였다. 애써 머리를 쥐어짜지 않아도 저절로 손이 움직이니 나는 마음 편하게 죄책감과 함께 손에 닿는 키이스의 감촉을 하나하나 새겨 넣을 수 있었다.
아.
나는 문득 코끝이 찡해졌다.
내가 여자였다면 당신은 나와 잤을 텐데.
그랬다면 나는 이렇게 죄책감을 가질 필요 없이 당당하게 이 몸을 만지고 키스하고, 당신을 좋아한다고도 고백할 수 있었겠지.
비록 그게 단 몇 달, 아니, 고작 몇 주 만에 끝나는 관계라고 해도 아예 꿈조차 꿀 수 없는 지금보다는 낫지 않았을까.
“……하.”
문득 키이스가 짧게 웃음소리를 냈다. 나는 퍼뜩 정신이 들어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키이스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였지만 입가에는 희미하게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뭔가 재미있는 일이 생각난 걸까? 의아해하는 내게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이건 얼마나 오래 했어?”
나는 잠시 기억을 떠올려 본 뒤 대답했다.
“햇수로는 3, 4년 정도 되지만 방학 때만 가끔 한 거니까…… 달수만 따지면 1년 내외일 겁니다.”
회사를 옮길 때 실직 기간 동안 일한 게 그나마 가장 길었지만 그래 봤자 4개월 정도였다. 거기다 마지막으로 했던 게 벌써 몇 년 전의 일이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물었다.
“저, 아무래도 제가 서툴러서…….”
“아냐, 잘해.”
키이스가 다시 웃었다. 나는 순간 두근거렸다.
“잘해서 물어본 거야. 역시나 넌 성실하구나, 하고.”
“……열심히 배우긴 했습니다.”
내심 안도하며 말하자 키이스가 눈을 떴다. 반쯤 들어 올린 눈꺼풀 아래의 보라색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나도 모르게 손을 멈추고 그를 마주 봤다. 정말 피곤했었는지 키이스는 평소의 칼날 같던 냉정한 얼굴이 어느 정도 사라져 있었다. 대신 그의 표정은 편안하게 누그러져 엷은 미소까지 띠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만 넋을 잃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말았다.
핫.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마사지에 몰두했다. 손의 감촉을 음미할 타이밍은 아니었다. 키이스가 계속해서 나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최대한 마사지에 몰두한 사무적인 태도를 유지하려 안간힘을 썼다. 어색한 침묵을 견디기 힘들어 필사적으로 할 말을 찾았다. 간신히 나는 한 가지를 떠올렸다.
“파커 씨와는 꽤 오래 만나시는군요.”
말해 놓고선 혹시나 질투하는 것을 들킬까 봐 조마조마했다. 나는 표정을 감추려 애쓰며 일부러 그의 시선이 닿지 않도록 상체를 숙여 최대한 먼 곳을 주물렀다.
“누구?”
불쑥 묻는 말에 당황했다. 진심으로 몰라서 물어보는 건가? 나는 반신반의해 대답했다.
“나오미 파커 씨요. 최근 만나고 계신 상대 말입니다. 오늘도 호텔에서 만나신.”
나는 뒤늦게 생각나 덧붙였다.
“내일도 호텔로 예약을 잡을까요?”
“아…….”
그제야 키이스는 알겠다는 듯이 묘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곧바로 그의 얼굴에서 모든 흥미가 사라져 버렸다. 나는 뜻밖에 심드렁한 반응에 의아해졌다. 키이스는 다시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내일은 됐어.”
키이스가 매일같이 상대를 만나는 건 아니었다. 어쩔 땐 3일에 한 번, 길게는 4일에 한 번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근래에는 3일을 넘기지 않은 데다 최근엔 거의 매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내심 어리둥절해졌다. 그래서 그만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괜찮으십니까?”
나도 모르게 물은 말에 키이스가 다시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무슨 의미냐는 듯이. 나는 당황해 말을 더듬거렸다.
“저, 그러니까…… 모처럼 마음에 든 상대이신데, 근래 매일 만나고 계셨으니까요…….”
횡설수설 어떻게든 무마해 보려는 내게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마음에 들었다고? 누가?”
말을 할수록 수렁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상당히 오래 자주 만나고 계셔서 그런 거라고 짐작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 말에 키이스의 표정이 변했다. 정확하게는 나를 비웃었다.
“섹스가 즐거워서 하는 경우도 있어?”
나는 또다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이번에는 할 말을 찾는 데 꽤 애를 먹었다. 그럼 뭐지? 나오미를 계속 부르는 이유는 그래서가 아니었나? 게다가 섹스를 즐기지 않는다고? 스튜어드의 말대로 그저 페로몬을 빼기 위한 게 이유의 전부라는 거야?
문득 나오미가 키이스의 스킬을 극찬했던 것이 떠올랐다.
즐기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잘한다니.
복잡한 기분을 느끼는 가운데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키이스는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다. 대답을 요구하는 듯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서 나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섹스는 행복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
키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저 한심하다는 듯이. 물론 그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정말로 한심한 녀석이었다. 왜 하필 이 남자에게 이런 말을 해 버렸을까.
침묵이 길어질수록 나는 점점 더 민망해졌다. 열이 오르는 두 뺨을 어쩌지 못한 채 어색하게 웃자, 키이스가 입가를 비뚤어뜨렸다.
“망상에 빠져서 사는 건 그레이슨뿐인 줄 알았는데.”
명백하게 나를 비웃는 말이었다. 죄송합니다, 하고 말했어야 했지만 나는 그만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망상에 빠진 게 아니라 로맨티스트인 거죠.”
아차, 했지만 늦었다. 키이스가 불쾌한 듯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죄송합니다.”
사과를 받아들였는지 더 이상 나를 상대하지 않겠다는 건지 키이스는 고개를 돌렸다. 잠시 동안 마사지에만 열중했던 나는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지금이 아니라면 결코 물어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즐기시는 게 아니라면 그렇게 자주 상대를 바꾸실 필요가 있을까요?”
“하아.”
키이스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또다시 사과하려 입을 열었다. 내가 왜 이런 쓸데없는 질문을 했을까, 역시나 후회하며. 하지만 미처 말을 하기 전에 먼저 키이스가 대답을 했다. 피곤하다는 듯이.
“어차피 누구랑 하든 마찬가진데, 한 명만 계속 상대하면 그쪽에서 착각을 할 거 아냐. 매스컴에서도 쓸데없는 추측을 해 댈 테고.”
그 말에 나는 아, 하고 깨달았다. 그는 그저 귀찮은 것이다. 누군가 키이스에게 진심이 되어 매달리는 것이.
단 두세 달만으로도 그토록이나 이 남자에게 빠져 버리니까.
굳이 그들을 떠올릴 필요도 없었다. 나조차도 첫눈에 반해 지금까지 몇 년이나 이 열병을 앓고 있지 않은가. 수차례나 포기했다가도 그저 지나가는 눈길 한 번에 다시 사랑에 빠지면서 끝없이, 끊임없이.
거기다 요즘은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이 남자와 같은 집에서 살고, 같이 식사를 하고, 이렇게 대화를 하고.
나를 안아 주기까지 했었지.
비록 내가 발작을 일으켜서 어쩔 수 없이 했던 행위라고 할지라도 나는 그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벅차 울고 싶어질 정도였다. 이전보다 몇 배, 몇십 배나 더 뜨겁게 이 남자를 향해 타오르는 심장은 어쩌면 영원히 식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다정하게 대해 주지 않았다면 난 철없는 열병처럼 언젠가 이 마음이 식을 거라고 믿었을 텐데.
하지만 이런 내 마음을 안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키이스가 얼마나 멀리 있는가를 새삼 깨달았다. 가질 수 없는 상대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마치 도장이라도 찍어 확인시켜 준 기분이었다.
넌 절대 안 돼, 하는 듯이.
애초에 이 남자는 누구에게도 얽매일 생각이 없으니까.
특히나 나에겐 더더욱 그렇다. 아예 나를 상대로는 상상조차도 해 본 적이 없겠지.
나는 일부러 부산하게 손을 움직였다. 일에 집중해서 쓸데없는 생각을 떨쳐 버리려 했지만 생각은 자꾸만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그럼 왜 그녀와 이렇게 오래 만나는 걸까.
거기다 횟수도 다른 때보다 잦다. 분명히 그녀가 마음에 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음이 어수선하면서도 묘하게 손끝이 저릿거렸다. 나는 내가 상처를 받은 건지 기대를 품은 건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는 상태에서 그저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였다.
“……하아.”
문득 키이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움직임을 멈추고 그의 얼굴을 봤다.
“이제 그만할까요?”
피곤함이 진하게 섞인 숨소리였다. 이제 슬슬 잠이 들 것 같아 조심스럽게 물었다. 일부러 작은 소리로 물어본 것은 혹시라도 그의 잠을 깨우는 건 아닌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키이스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잠이 든 걸까? 나는 생각하며 슬며시 손을 뗐다.
소리를 죽여 침실을 나오려는데, 갑자기 손목을 붙잡혔다. 나는 놀라 숨을 삼키며 뒤를 돌아보았다. 키이스가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