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4/77)

13

나는 숨을 죽이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키이스 또한 말이 없었다. 침묵 속에서 그가 잡고 있는 손목만이 오롯이 타 버릴 것 같은 작열감을 일으키며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무심코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뭔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았지만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런 내 얼굴을 키이스는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한참 만에야 비로소 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 필요하신 거라도……?”

힘없이 말끝이 사그라들었다. 분명히 내 말을 들었을 텐데도 키이스는 반응이 없었다. 나는 긴장감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

손목을 잡고 있던 키이스의 손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나는 무심코 비명을 지를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하지만 미간이 일그러지는 것까지는 어쩌지 못했다.

왜 그러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키이스는 시선을 내려 처음 보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정확하게는 자신이 붙잡고 있는 내 손목을.

대체 뭘까. 복잡한 감정이 마구 뒤엉켜 있는 듯한 그의 얼굴은 그래서 감정을 짐작하기가 더 어려웠다. 나는 어째서 키이스가 저런 표정으로 나를 붙잡고 있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그가 번민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원인도 이유도 알 수가 없었지만.

하.

막힌 것 같은 한숨을 토해 낸 키이스가 갑자기 내 손목을 놔 버렸다. 나는 순간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키이스는 나를 보지 않고 돌아누워 버렸다.

“됐으니까 나가.”

나는 잠시 눈을 깜박이다 황급히 몸을 돌려 방을 나왔다. 등 뒤로 문을 닫고 나자 뒤늦게 손목이 시큰거렸다. 내려다보니 붉게 색이 변해 있었다. 나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살며시 손목을 들어 입술을 맞댔다.

아.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서 걸을 수가 없었다. 나는 키이스의 방 문에 기대어 선 채 한참 동안이나 눈을 감고 숨을 골라야 했다.

* * *

“으응.”

아침에 눈을 뜨면서 나는 무심코 신음을 흘렸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간신히 버석버석한 눈꺼풀을 들어 올렸지만 여전히 정신은 멍했다. 뒤늦게 떠오른 기억에 나도 모르게 손목을 확인하자 희미하게 멍이 들어 있었다. 나는 가만히 손목을 어루만졌다. 가슴 한편이 두근거렸다. 이 멍 자국이 남아 있는 동안은 난 키이스의 체온을 간직할 수 있겠구나.

가만히 입술을 대어 보는데,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는 황급히 손을 내리고 일어나 앉았다. 역시나 들어오는 사람은 찰스였다.

“일어나셨습니까. 아침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피트먼 씨는 방에서 하신다고 하더군요.”

“그래요……?”

내가 듣기에도 실망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나는 황급히 침대에서 나오는 척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숨겼다.

“전 내려가서 먹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언제나와 같은 주문을 확인한 뒤 찰스는 방에서 나갔다. 나는 그제야 후, 한숨을 내쉬고 어깨를 늘어뜨렸다.

매일 키이스와 함께 아침을 먹던 식탁은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하루 한 번 같이 식사를 하는 시간이었는데, 어느새 그것이 익숙해졌는지 혼자라고 생각하자 허전함은 더욱 커졌다.

“아.”

식기에 포크가 부딪치는 소리조차 너무 크게 울려 퍼져 나는 나도 모르게 탄식을 뱉고 말았다. 찰스가 반쯤 빈 주스 잔을 다시 채우려는 것을 사양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으로 돌아가 남은 준비를 끝내는데, 문득 현기증이 났다.

벽을 짚고 서서 잠시 숨을 돌렸던 나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이 느낌이 뭔지 알고 있다. 짧게는 한 달, 길게는 몇 달에 한 번씩 이럴 때가 있었다. 바로 히트사이클이 가까워지면 생기는 증세였다.

그것 외에도 몇 가지 증세는 더 있었다. 나는 심각한 얼굴로 약을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정량보다 많이.

*

*

출근하는 차 안에서도 키이스는 한 번도 내 얼굴을 보지 않았다. 나는 일을 하는 척 태블릿 화면을 바라보며 의미 없이 스케줄을 열었다 닫기만 반복했다.

침묵은 그 어느 때보다 길었다. 문득 전날 마지막으로 봤던 그의 표정이 떠올랐다. 오늘 아침 식사를 방에서 한 것은 단순한 변덕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전날의 일을 떠올려 보면 뭔가 심상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몇 번이나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닫기를 반복했다. 기분이 좋지 않은 이유를 물어본다고 해서 대답해 줄 것 같지도 않았고 괜히 물어봤다가 비꼬는 말을 듣게 되면 나만 상처받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경험은 입사 초기에 수시로 당했었다.

너 따위가 알 바 아냐, 하고.

그것은 직접적인 말로, 혹은 눈빛으로 내게 와닿았다. 그리고 몇 번의 상처 끝에 나는 더 이상 묻지 않는 쪽을 택한 것이다. 다행히 제법 눈치는 있는 편이라 지금까지 큰 무리 없이 잘해 왔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 모르겠다.

나는 생각하며 문득 나오미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에 그녀와 만났었지. 그때 호텔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만약 그랬다면 휘태커가 내게 귀띔을 해 줬을 텐데.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과 벨 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 휴대 전화를 꺼내 들었다. 누군지 확인을 하자마자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엠마, 무슨 일입니까? 이런 시간에.”

의아해하며 묻자 엠마는 당황한 듯 말을 골랐다.

[저, 미안해요 연우. 오전에 일이 생겨서 좀 늦을 것 같아요……. 오후에 출근해도 될까요? 아침 지시 사항은 레이첼에게 전달하도록 얘기해 둘게요.]

“그렇게 하십시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얘기하세요, 엠마.”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나는 진지하게 덧붙였다. 그녀는 조금은 누그러진 음성으로 대답했다.

[고마워요, 연우. 그렇게 할게요.]

전화를 끊고 시선을 돌리자 나를 보는 키이스와 시선이 마주쳤다. 나는 어색해하며 입을 열었다.

“엠마가 일이 생겨서 오후에 출근하겠다고 하기에 그러라고 했습니다.”

키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나를 응시하는 시선에 나는 불편해져서 가능한 한 일찍 오라고 할까요, 하고 다시 말하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먼저 말을 꺼낸 것은 키이스였다.

“넌 언제쯤 좋아지는 거지?”

갑작스러운 물음에 나는 잠시 당황해서 말문이 막혔다. 지금도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한다. 스튜어드가 했던 말을 이전에도 전달했었다.

하지만 바로 얼마 전 그레이슨과 마주치고 발작을 일으켰던 걸 떠올리면 자신 있게 곧 괜찮아질 거라고 장담할 수가 없었다. 나는 키이스가 없이는 사무실 밖을 나가지도 못했다. 할 말을 찾는 나를 지켜보던 키이스가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렸다.

“넌 정말 성가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잊고 있었다. 이 남자는 그저 편리하기 때문에 나를 가까이 뒀을 뿐이라는 걸.

발작을 일으킨 나를 안고 달래 주던 다정한 손길이라든가 부드러운 음성이 아련한 두근거림이 아닌 날카로운 상처가 되어 되돌아왔다.

거기에 뭔가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상상한 것은 그저 나의 착각이었다. 물론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저 모른 척 좀 더 오래 그런 환상에 빠져 있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잔인하게 나를 현실로 끌어낼 필요가 있었을까.

창문에 비친 내 건조한 얼굴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당연하다, 이 남자는 내 마음을 전혀 모를 테니까. 이런 말들이 나를 상처 입힌다는 걸 알 리도 없고 알 필요도 없겠지.

설령 안다고 해도 이 남자가 날 대하는 태도가 변할 리 있을까.

난 이 남자에게 아무것도 아닌데.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나는 평소처럼 무덤덤하게 사과했다. 키이스는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말을 하지 않았다. 아, 하고 나는 생각했다.

다음 상담에서는 스튜어드에게 꼭 언제쯤 나아질지를 확실히 얘기해 달라고 하자. 더 적극적인 치료 방법은 없는 거냐고. 만약에 그런 게 있다면 얘기지만.

차창을 통해 나를 마주 보는 얼굴은 여전히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언제까지나 키이스에게 의지할 수는 없는 거니까.

이러다 정말 이 남자가 내게 질려 버리면 난 이번에야말로 저 밑바닥까지 굴러떨어지게 될 테니.

* * *

체이스 밀러와의 약속은 몇 번의 실랑이 끝에 결정되었다. 이것 또한 쉽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나쁜 예감이 맞아떨어진다는 건 그리 좋은 일이 아니었다.

“분명히 수요일은 가능하다고 했지 않습니까?”

벌써 두 번이나 바뀐 약속에 나는 격앙된 음성을 감추지 못하고 따져 물었다. 건너편에서 매니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더듬었다.

[그게 말입니다, 스케줄도 비어 있고 몇 번이나 확인을 했는데 갑자기 날짜를 바꾸라지 뭡니까…….]

“이유라도 말해 보시죠, 이렇게 당일에 약속을 깨는 이유를!”

매니저는 앓는 듯한 소리를 낸 후 입을 열었다.

[나갈 기분이 아니랍니다…….]

“이……!”

나도 모르게 욕설을 뱉을 뻔했다. 가까스로 혀끝에서 말을 삼킨 나는 고개를 빼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감정을 억누르는 데는 몇 초의 시간이 필요했다.

“계약을 진행할 생각은 있는 겁니까?”

갑작스럽게 피로가 밀려와 나는 힘없이 물었다. 매니저는 황급히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체이스는 배역을 아주 마음에 들어 하고 있습니다. 아, 물론 바뀐 배역을요.]

“그런데 왜……!”

또다시 울화가 치밀어 내지르자 매니저는 우물쭈물했다.

[그게, 그냥 기분이 그때그때 달라져서인 걸로…….]

“…….”

나는 분을 참지 못해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속으로 숫자를 세고 어디선가 읽었던 명언 같은 것도 떠올려 봤다. 적지 않은 시간을 흘려보내고 난 뒤 나는 제법 침착하게 말을 꺼냈다.

“그럼 언제쯤 기분이 내켜서 계약을 완료할지 확인해 주십시오. 한 번 더 약속을 미룬다면 그때는…….”

멋대로 계약을 파기한다거나 하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내고 만 내게 그는 서둘러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번엔 꼭 약속을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정말이지, 이런 식으로 약속을 깨 버리면 스케줄을 관리하는 입장에서도 무척 곤란한데요…….]

그라고 해서 나와 처지가 별반 다를 건 없었다. 진심으로 위로를 하고 싶은 것을 참고 나는 다시 그와 스케줄을 맞췄다.

“이번에는 꼭 약속을 지켜 주십시오.”

한 번 더 당부한 후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역시나 신뢰가 가지 않았다. 또 약속을 깼다고 하면 키이스는 뭐라고 할까?

지금까지의 반응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시큰둥했다. 요즘 어딘지 정신이 나가 있는 것 같은 그였지만 지나칠 정도로 무심한 반응이었다.

남은 스케줄을 짜느라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나는 이를 갈며 다시 키이스의 일정을 정리하고 다급하게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 * *

체이스 밀러와의 약속 장소는 익히 알려진 호텔의 카페였다. 회원제로 운영되는 카페는 입구에서부터 철저하게 출입이 통제됐다. 물론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에게는 예외였다.

“어서 오십시오, 피트먼 씨.”

키이스의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깍듯하게 인사를 한 지배인이 직접 그를 예약한 자리로 안내했다. 휘태커를 비롯한 경호원들을 입구에 남겨 둔 채 나는 키이스의 뒤를 쫓아 카페 안을 가로질렀다.

몇 번이나 왔던 곳이지만 여전히 올 때마다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으리으리한 실내에 나는 주눅이 들지 않으려 일부러 등을 더 꼿꼿이 펴고 걸어갔다. 내심으로는 이런 장소에서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의 비위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창가에 마련된 자리에 먼저 키이스가 앉았다. 그의 뒤쪽 조금 떨어진 거리에 나를 위한 간이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나는 묵묵히 자리를 잡았다.

손목의 시계를 확인해 보니 약속했던 시간 정각이었다. 오전까지만 해도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당일에 약속을 깨 버린 경험도 몇 번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두 번이나 건 확인 전화에서 매니저는 “오늘은 틀림없습니다!” 하고 확실하게 대답했다. 이번만큼은 믿어도 되겠지, 나는 내심 불안해하면서도 자신을 다독였다.

체이스 밀러는 약속 시간을 잘 지키는 편이었던가?

나는 기억을 떠올려 봤지만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체이스 밀러라면 화면에서 본 게 전부였기 때문이다. 실물을 보게 되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떻게 생겼을까?

그렇게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내심으로는 호기심이 생겼다. 연예인들을 보고 기뻐하며 소리칠 나이도 상황도 아니지만 신기한 것은 사실이었다. 비록 엔터테인먼트 그룹 소유자의 비서라고는 해도 현재 최고의 몸값을 자랑하는 인기 절정의 톱 배우를 직접 보는 것은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 연말 파티에 체이스 밀러가 왔던가?

분명 초대장은 보냈을 것이다. 그레이슨이 왔던 것은 기억이 난다. 하지만 체이스에 대해서는 기억나지 않았다.

잠시 멍하니 생각을 뒤적이는데, 문득 직원이 와서 뭔가를 내밀었다.

“아, 감사합니다.”

뒤늦게 메뉴 북을 넘겨받은 나는 대충 음료를 찾았다. 흘긋 키이스를 봤지만 그의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피트먼 씨, 에스프레소로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차를?”

키이스는 나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전면이 유리로 된 한쪽 벽을 바라보며 던지듯 말했다.

“차로.”

“알겠습니다. 잎은 제가 선택해도 되겠습니까?”

키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승낙의 의미였다. 나는 사이를 두었다가 향을 테스트한 후 키이스의 취향일 것 같은 잎 몇 가지를 선택해 블렌딩해 달라고 주문했다.

“저도 같은 것으로 부탁드립니다.”

직원은 메뉴 북과 테스트용 찻잎을 가지고 물러났다. 나는 똑바로 앉아 키이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항상 보는 것과 똑같았다. 은은하게 흐르는 그의 향기도, 단정하게 정돈된 짙은 머리카락도, 강인한 목덜미도, 단단한 어깨도 전부 그대로였다.

아.

나는 문득 생각했다.

이제 슬슬 이 마음을 정리할 때도 됐는데.

처음 실연을 자각했을 때를 떠올려 보면 그날로부터 벌써 몇 해가 지났다. 그에게서 사랑받는 것을 포기했지만 그를 동경하는 것은 차마 포기하지 못한 채 어영부영 몇 년을 보낸 것이다.

이젠 정말로 끝이라고 결심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고작 하루도 가지 못해 다시 마음을 끓이는 게 반복됐다. 이 마음이 보답받지 못할 거라는 걸 너무나 잘 알면서도 미련을 끊지 못하는 것이다.

아주 당연하게,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그렇게 계속 마음을 숨겨 왔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이제 와서 허무한 기분이 드는 것도 아이러니하다.

<넌 정말 성가셔.>

다시금 심장을 찌르는 말에 나는 슬그머니 눈을 감았다 천천히 다시 떴다. 변하는 것은 없었다. 여전히 키이스는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고, 나를 외면하고 있었고, 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

나는 처음으로 이 사랑에 지쳤다고 생각했다.

이제 정말로 마음을 접어야 할 때가 온 게 아닐까, 하고.

*

*

달각.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벌써 키이스는 첫 번째 포트를 거의 비워 가고 있었다. 나는 추가로 주문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생겼다. 초조하게 시계를 봤지만 체이스 밀러가 나타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오다가 사고라도 난 걸까?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키이스를 두 시간이나 기다리게 만들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30분이 넘어갈 무렵 매니저에게 전화했지만 그는 “곧 갑니다”라고 말했다. 역시나 너무나 미안해하며.

다시 30분을 더 기다렸지만 이번에도 역시 같은 말을 했다. 그다음 통화에서는 급기야 낮은 소리로 화를 내고 말았다.

<정말 오고 있는 겁니까?>

내 질문에 그는 당황해하며 “가고 있습니다” 하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신뢰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두 시간째인 것이다.

설마 또 연기하는 건 아니겠지. 사람을 여기까지 나오게 해 놓고.

나는 초조해져 다시금 시계로 시선을 향했다가 키이스의 잔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재빨리 일어나 포트를 들었지만 예감이 좋지 않았다.

역시나 맥없이 들리던 포트의 무게를 증명하듯 남은 양은 찻잔을 절반도 채우지 못했다. 나는 포트를 내려놓고 키이스의 눈치를 살폈다. 주문을 다시 해야 할까, 어떻게 할까.

“저, 피트먼 씨.”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을 때, 갑자기 키이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나는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펄쩍 뛰듯이 뒤로 물러났다. 나의 반응에 키이스 또한 놀랐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라는 듯이 내려다보는 시선에 나는 무안해져서 황급히 자세를 가다듬었다.

“죄송합니다.”

키이스는 별말 없이 그대로 돌아서서 입구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여느 때처럼 그의 큰 보폭을 쫓아 바쁘게 뛰다시피 걸었다.

“또 방문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정중히 인사를 하는 입구의 직원을 지나 곧바로 홀을 가로질렀을 때였다.

……어?

문득 한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어딘지 불안해 보이는 모습으로 초조하게 서성거리던 그는 키이스를 발견하더니 멈칫했다. 이어서 그가 눈을 감고 두 손을 움켜쥐었다. 마치 기도라도 하는 것 같은 행동이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지……?

주의 깊게 보고 있는데, 불쑥 휘태커가 다가와 낮은 소리로 말을 걸었다.

“연우, 어떻게 된 겁니까? 체이스 밀러가 오지 않은 게 맞습니까? 혹시 우리가 놓친 건 아니겠죠? 입구를 계속 지키고 있었는데 그림자도 보질 못했단 말입니다. 설마 못 알아보진 않았을 테고…….”

그 역시 나만큼이나 당황한 것 같았다. 감히 키이스 피트먼을 바람맞히다니, 직접 겪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단체로 꿈을 꾼 게 아니고서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킨 후 고개를 끄덕였다.

“안 왔습니다.”

“지저스, 뭐 그런 녀석이……!”

휘태커가 짧게 욕설을 뱉었을 때였다. 불시에 수상한 남자가 뛰어들었다. 아까 본 그 남자였다.

어, 하고 나는 짧게 감탄사를 뱉어 냈다. 누구도 미처 그를 막을 틈이 없었다. 다짜고짜 키이스에게 덤벼드는 그의 모습을 나는 마치 느린 화면처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남자가 품 안에서 꺼내는 날카로운 흉기마저도.

“키이스……!”

내 비명 소리가 귀에 들려온 것은 한 박자 늦은 뒤였다.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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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리 떠십니까. ……두려워하지 마세요. 소자는 아바마마와는 다릅니다.”

나는 이물질이다 / bise 지음

3년간 진규와 파트너로서 생활하던 중 자신이 짝사랑 상대의 대타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정원.

그에 둘을 방해하려 하지만 외려 진규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에 처한다. 한데 위기의 순간, 최형석이라는 남자가 뜻 모를 호의를 베푸는데…….

“난 정원 씨를 다치게 하지 않습니다. 절대 당신이 상처 입게 하지 않아요.”

붉은 이야기꾼 : 기억 사냥꾼 / 한시원(pshaw) 지음

신비를 품은 골동품점의 주인. 소원을 이뤄 주는 물건을 팔며 대가로 상대의 가장 소중한 걸 가져가는 천사 혹은 악마, 이도.

그런 그에게 반한 도정후는 자신의 접촉 기피증에도 불구하고, 수상한 민화를 핑계로 이도의 뒤를 쫓아다니는데…….

“제 병이 다 나을 때까지 당신 시간을 사겠습니다.”

카주라호의 밤풍경 : 시인 편 (개정증보판) / 한시원(pshaw) 지음

마음속 열정이 사라지고 손에 펜을 들지 못하게 된 순간 시를 쓰지 못하는 시인, 김형원은 권태로움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추억은 화석이 되고 외로움이 덩치를 키워 가던 때, 그의 앞에 신비한 술집 <카주라호>의 모습이 홀연히 나타나는데…….

“원아, 내가 다 잘못했어. 그러니까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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