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 14화 (1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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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찰나에 가까운 순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몇 년이 지난 후에도 그 순간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키이스에게 칼을 들고 덤비던 남자, 뒤늦게 달려오는 경호원들, 뒤로 물러나는 키이스, 그리고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까지.

“키이스!”

공포에 질려 고함을 질렀다.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키이스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저 남자를 막아야 돼, 저 칼을 빼앗아야 돼, 키이스를 지켜야 돼……!

나는 온 힘을 다해 달려갔다. 손을 뻗어 남자를 막으려 했다. 신기하게도 파노라마처럼 서서히 눈앞에서 장면이 펼쳐졌다. 아주 느리게 남자는 움직이고 있었다. 조금만 노력하면 될 것 같았다. 아주 조금만 더 손을 뻗으면. 남자가 칼을 든다. 크게 라운드를 그린다. 키이스가 물러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늦었다. 내 눈앞에서 남자의 칼이 키이스의 팔을 길게 그었다.

“……!”

눈앞에서 선혈이 터져 나갔다. 비명 소리가 한층 더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경호원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남자는 경호원들에게 제압당해 바닥에 깔린 뒤에도 알 수 없는 구호를 외쳐 댔다.

“저주받아라, 너희들은 악마야! 극알파 따위 다 죽어 버려! 멸망이 온다, 신께서 너희를 다 벌하실 거야! 신이시여, 저 악마들에게 천벌을 내리소서……!”

나는 잠시 멍해졌다. 실패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온 힘을 다해 팔을 뻗었지만 늦었다. 이미 키이스는 한쪽 팔에 부상을 입어 피를 흘리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즉시 그에게 다가가며 넥타이를 풀었다.

“지혈하겠습니다.”

재빨리 상처를 확인하고 그 위로 넥타이를 꽉 묶었다. 이어서 주변에 구급차를 불렀는지 혹은 가까운 병원이 어딘지를 확인했다.

“직접 병원으로 가는 쪽이 빠를 것 같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빠른 어조로 묻자 키이스는 전혀 표정의 변화 없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곧바로 휘태커를 돌아보았다.

“지금 바로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가죠. 도착 즉시 치료를 받으시도록 제가 연락하겠습니다. 범인은 경찰에 넘기고 처리가 어떻게 됐는지 보고해 주십시오.”

나는 다시 키이스를 올려다보았다.

“괜찮으십니까? 차까지 걸으실 수 있겠습니까?”

내 목소리는 너무나 사무적이었다. 스스로가 듣기에도 소름 끼칠 정도로. 키이스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흘긋 나를 내려다보더니 대답 없이 몸을 돌렸다. 나는 곧바로 그를 쫓아가 차에 몸을 실었다.

“……네, 키이스 피트먼 씨가 지금 테러를 당했습니다. 앞으로 10분 후에 도착할 겁니다. 자상이고 대략 4, 5인치 정도 됩니다. 깊이는 잘 모르겠지만 움직이는 데 이상은 없고 일단 지혈을 해 놨습니다. 네, 도착하는 대로 치료를 부탁드립니다.”

응급실에 전화를 한 후 나는 키이스에게 그대로 보고를 했다. 옆자리에 앉은 키이스는 통화 내용을 모두 들었을 테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나는 혹시나 출혈이 심해 그가 기절하지나 않을까 조마조마해졌다.

“보도 통제를 하겠습니다. 이번 테러가 이슈가 되는 일이 없도록.”

굳이 보고를 할 필요도 없는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일부러 키이스에게 말을 걸었다. 키이스는 대답이 없었지만 그가 창밖을 보며 눈을 깜박이는 모습에 내심 안도했다.

힘껏 묶었는데도 넥타이 위로 점점이 피가 배어 나왔다. 나는 냉정을 유지하려 입술을 깨물었다.

* * *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은 곧바로 키이스의 상처를 치료했다. 다행히 큰 혈관이나 신경을 건드리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흉터가 남을 수도 있습니다만 아닐 수도요……. 아시다시피 일반인과는 다르시니까.”

의사는 그다지 자신감이 없는 말투로 덧붙였다. 상처가 빨리 낫는다니 그건 다행이었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출혈 과다나 다른 불상사도 없었다. 그저 상처를 꿰매기만 하면 된다고 의사는 말했다.

“그래도 다음에 실을 뽑으러 한 번 더 오셔야 합니다. 꽤 여러 바늘을 꿰맸거든요…….”

그는 다음에 방문할 날짜를 알려 준 후 자리를 떠났다. 나는 이것저것 절차를 끝마친 뒤 바쁘게 사방으로 전화를 걸어 보안을 유지하도록 주지시켰다. 찰스에게도 전화를 해 상황을 알렸다. 앞으로 키이스의 시중을 들 때 이 부분을 참고할 것이다. 상처도 더 주의 깊게 살피겠지. 혹시나 해서 다음 방문할 날짜도 빈틈없이 일러 주었다.

갈아입을 셔츠를 사서 키이스가 있는 병실로 향했다. 문 앞에는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었다. 나는 간단히 인사를 한 후 노크를 했다.

똑똑.

사이를 두었다가 문을 열자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키이스가 곧바로 시야에 들어왔다. 문소리에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나는 문을 닫고 곧바로 그에게 걸어가 새 셔츠를 내밀었다.

“갈아입으시죠. 상처는 어떠십니까?”

차마 그의 상처를 볼 용기가 없어 얼굴만 쳐다보며 물었다. 하지만 키이스는 그런 내 마음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보란 듯이 팔을 들어 보였다.

근육질의 단단한 팔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하얀 천이 둘러져 있는 모습을 보자 나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키이스가 무심히 입을 열었다.

“몇 바늘 꿰맨 게 다야. 의사 말로는 지혈을 아주 잘했다던데.”

그는 피식 웃었다. 나를 칭찬한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상자에서 셔츠를 꺼내 펼쳤다. 키이스는 걸치고 있던 찢어진 셔츠를 벗어 버리고 팔을 내밀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상처를 건드리지 않으려 최대한 애쓰며 셔츠를 입는 것을 도왔다.

셔츠의 버튼을 잠그려던 키이스가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팔을 굽히려는 순간 상처가 당겨져 통증이 온 모양이었다. 나는 급히 말했다.

“제가.”

서둘러 앞으로 돌아온 나는 키이스와 마찬가지로 침대에 걸터앉아 버튼을 잠그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채워 나갈 때마다 조금씩 현실이 다가왔다.

애써 덮어 놨던 기억이 일시에 되살아났다. 키이스에게 덤벼들던 남자, 크게 휘두르던 칼날, 점점이 흩어지던 붉은 피.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기력했던 나 자신까지.

그만 버튼을 채우던 손을 멈추고 말았다. 정확히는 자꾸만 손이 떨려 실패를 거듭했다. 새하얀 붕대가 망막에 맺혀 다른 게 보이지 않았다.

“……왜 그래?”

키이스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보이는 건 하얀 붕대뿐이었다. 덜덜 떨리는 두 손이 차마 그의 팔을 잡지 못하고 허공에서 멈췄다. 나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잔뜩 멘 음성이 흘러나왔다.

“미안, 합니다.”

“뭐가?”

키이스는 정말로 납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저 홀린 듯이 말을 이었다.

“제가, 지켜 드렸어야 했는데. 제가, 제가 막지 못해서.”

키이스는 말이 없었다. 그저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황당하다는 듯이.

“죄송합니다, 제가…… 당신을 다치게 만들다니. 이렇게, 상처를 입히다니.”

“네가 한 게 아니잖아.”

키이스는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제가 막았어야 했어요. 제가…… 제가 좀 더 빨랐어야 했는데. 더 빨리 움직였어야 했는데. 분명히, 그 남자를 봤었는데. 그 남자가 다가오는 걸 봤는데.”

급기야 눈앞이 흐려졌다. 나는 황급히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말이 없던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그건 휘태커가 할 일이야.”

나는 격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아니다. 내가 했어야 했다. 더 빨리 눈치챘어야 했는데. 당신이 다치지 않게, 내가 막을 수 있었는데.

“……제가 다쳤어야 했는데.”

나는 넋을 잃고 중얼거렸다. 키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득 눈앞이 어두워졌다. 무심코 눈을 감자, 눈꺼풀 위로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더니 빛이 사라졌다. 키이스가 그의 손으로 내 눈을 덮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그저 멍해져 가만히 있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게 나았다. 도저히 가슴이 아파 키이스를 볼 수가 없었다.

문득 눈 안쪽이 뜨거워졌다. 뺨 위로 수분이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진 후에야 비로소 내가 울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떨리는 숨을 흐느낌과 함께 간신히 들이켰을 때, 불현듯 입술이 겹쳐졌다.

아, 하고 나는 입술을 벌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습한 냉기와 함께 부드러운 혀가 입술 사이로 들어왔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닫지 못했다. 머릿속은 울어서 멍하고, 눈앞은 가려져 있고, 흐느낌 때문에 숨도 거칠었다. 나는 그저 맞닿은 입술이 지그시 눌리는 것을 잠자코 방관할 뿐이었다.

잠시 떨어지는가 싶더니 촉촉한 감촉이 입술 안쪽에 닿았다. 살며시 쓸고 지나간 혀가 치아를 넘어 입 안으로 들어오고, 이어서 입술이 맞물렸다.

“……!”

불현듯 내 위로 무게가 덮쳐 왔다. 나는 힘없이 뒤로 쓰러졌다. 매트리스의 둔한 반동이 등으로 느껴졌지만 눈앞을 가렸던 손이 뒤통수로 돌아와 머리를 감싸 줬기 때문에 별다른 충격은 없었다. 나는 어렵게 눈을 떴다가 시야에 가득 찬 형광등의 불빛에 황급히 다시 감았다.

그사이 입술은 떨어졌다가 다시 맞닿았다. 가만히 눌렸다가 떨어지고, 다시 고개를 돌려 반대쪽으로 맞물렸다.

이렇게 부드러운 키스는 처음이었다. 위로하듯이, 달래듯이, 쓰다듬듯이 그는 키스했다. 마치 내가 깨지기라도 할 것처럼 주의 깊게, 신중하게 거듭 입술이 겹쳐졌다.

아.

매트리스와 키이스 사이에 완전히 눌려 버린 나는 그의 몸을 전신으로 느낄 수 있었다. 키이스의 단단하고 탄탄한 근육과, 내 위로 전해지는 그의 무게와, 뜨거운 체온과, 아, 그 모든 것이.

떨리는 손을 들어 그를 끌어안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곧바로 이 환상이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나는 잠시라도 더 오래 간직하고 싶었다. 이 아픈 달콤함을. 그저 아릿하게 눈을 감고 숨을 몰아쉬며 그와의 키스에 몰두할 뿐이었다. 어떻게든 더 많이 가지고 싶어서, 이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서.

키스를 거듭하며 키이스가 내 목을 쓰다듬었다. 천천히 내려간 손가락이 셔츠 위로 쇄골을 더듬더니 그 아래로 향했다.

“……!”

단단한 손가락 끝이 유두를 눌렀을 때, 나는 겹쳐진 입술 사이로 숨을 삼키고 말았다. 잠시 멈췄던 손가락이 도드라진 젖꼭지를 얇은 천 위로 천천히 원을 그리듯 문질렀다. 나는 신음이 나오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하지만 숨결이 거칠어지는 것까지는 참을 수 없었다. 키이스가 내 젖꼭지를 쥐었을 때, 그만 나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아 그대로 숨을 멈춰 버렸다. 잡힌 곳이 얼얼하고 아래가 욱신거렸다. 나는 발기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간신히 눈을 뜨자 반쯤 열린 시야에 키이스의 얼굴이 보였다. 그가 입술을 떼고 나를 마주 봤다. 나는 그저 몽롱할 뿐이었다. 키이스의 손이 다시 내 눈을 덮었다. 까맣게 내려앉은 시야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살며시 눈을 감자 가늘게 떨리는 속눈썹이 그의 손바닥을 약하게 훑었다.

하아, 떨리는 한숨이 키이스의 입술에 부딪쳐 내게 되돌아왔다. 다시 겹쳐진 입술이 강하게 맞물렸다. 지근거리며 아랫입술을 무는가 싶더니 소리 내어 빨아들였다. 젖꼭지를 쥐고 손가락 사이에서 둥글리는 감각과 입 안을 헤집는 혀의 움직임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 사지가 축 늘어졌다. 오직 내 전신에 실려 오는 그의 무게만을 느낄 뿐이다.

이대로 하나가 됐으면 좋겠다. 이 남자의 전부가 내 안으로 들어왔으면 좋겠다. 나는 깊숙이 그의 페로몬을 들이켜며 아득한 의식 사이로 떠올렸다.

그렇게 해서 이 남자를 전부 가질 수 있다면 난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데.

똑똑.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에 나는 정신이 들었다. 현실을 깨달은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내 위에 올라와 있던 남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 온몸을 누르고 있던 남자의 몸이 즉시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키이스가 급히 현실로 돌아가는 것을 그저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입술을 떼어 내고, 몸을 일으켰다. 마치 순서대로 하나씩 그가 내게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 신기했다.

그러고 나서도 내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은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왠지 그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가만히 숨을 죽인 채 누워 있었다. 키이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어째서 손을 떼지 않는 건지 궁금했지만 반대로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그가 나를 보고 있고, 이 공간 속에 단지 우리 둘뿐이라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진심으로.

“……빌어먹을.”

키이스가 욕설을 내뱉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그의 목소리가 들리고 몇 초의 공백이 흐른 뒤였다. 그와 함께 내 눈을 덮고 있던 손이 떠나가고, 키이스가 완전히 몸을 일으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돌아서는 그를 망연히 지켜보았다. 우리가 한 일은 그저 키스를 나눈 것뿐인데 나는 마치 섹스 후 버려진 것 같은 황당한 허전함을 느꼈다. 성큼성큼 문 앞으로 걸어간 키이스는 손잡이를 잡더니 불현듯 입을 열었다.

“너 때문이야.”

씹어뱉듯이 내던진 키이스가 곧바로 병실의 문을 열었다. 잠깐 환하게 밝아졌던 시야는 그가 복도로 나가는 것과 동시에 다시 어두워졌다. 혼자 남았다는 것을 실감한 것은 죽은 듯한 고요가 나를 덮쳐 왔기 때문이었다.

나가야 돼.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고 싶지 않았지만 움직여야 한다. 키이스의 뒤를 쫓아가야 하고, 그의 저택으로 돌아가야 하고, 그가 지시하는 일은 무엇이든 해야 한다. 그게 나의 일이니까.

자꾸만 손이 미끄러져 매무새를 가다듬는 데 애를 먹었다. 간신히 옷을 정리하고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빗어 넘기며 대충 마무리를 했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도 마음을 잡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너 때문이야.

키이스의 말이 떠올랐다. 그의 말이 맞다. 나 때문이다.

키이스가 후회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진작 내가 막았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를 알면서도 그냥 내버려 둔 것은, 그 찰나의 달콤함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직 나의 욕심 때문에 그렇게 내버려 뒀다. 비참한 결말을 이미 알면서도.

간신히 용기를 내어 복도로 나왔을 때, 키이스는 휘태커와 뭔가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한참 시간이 흐른 것 같았지만 복도의 시계는 고작 20분도 지나지 않았다.

다행히 키이스는 내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나는 표정에 신경 쓰며 조용히 그의 뒤에 섰다.

인기척을 느꼈을 텐데도 키이스는 돌아보지 않았다. 잠깐 시선을 던지는 것조차도 없었다.

“……해서 그렇게 처리하는 걸로.”

보고를 마친 휘태커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키이스는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돌려 걷기 시작했다. 나는 급히 그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구둣발 소리가 섞여 들었다. 뚜걱거리는 소리가 귀를 울리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무거운 침묵을 느꼈다.

마치 필연처럼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등을 떠밀리듯이.

나는 키이스를 따라 차에 오르며 생각했다.

하루라도 빨리 이 마음을 정리하자.

은은한 페로몬 향기는 차 안을 여전히 떠돌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더 이상 이 향기에 가슴이 아프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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