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6/77)

15

“안녕하세요.”

여느 아침처럼 습관적으로 인사를 하며 식당으로 들어가자 키이스가 내려와 있었다. 나는 안도함과 동시에 걱정이 됐다.

“저, 팔은 괜찮으십니까?”

의자에 앉은 후 조심스럽게 묻자 그는 대답 대신 흘긋 나를 보더니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입니다. 혹시 아프시면 진통제를 욕실에 뒀으니 꼭 챙겨 드세요.”

불필요한 말을 덧붙였지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키이스의 시선이 다시 내게로 향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건지 그저 의미 없이 시선을 멈춘 것인지 알 수가 없는 채로 나는 잠자코 그를 마주 보았다. 키이스가 말을 꺼내길 기다리며.

찰스가 걸어와 각자의 앞에 음식을 놓아 줄 때까지도 키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일부러 으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은근히 재촉을 한 것이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결국 모른 척하고 시선을 내리깐 채 포크를 들었다. 그제야 키이스는 고개를 돌렸다. 나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키이스 또한 식사를 시작했지만 어딘지 건성으로 보였다. 스크램블드에그를 의미 없이 뒤적이더니 곧 손을 멈췄다. 어딘지 멍하게 접시를 내려다보던 그는 포크를 그냥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흘긋 훔쳐보았던 나는 또다시 키이스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는 오늘 나를 지나치게 쳐다봤다. 나는 불안해졌다.

“저, 혹시 할 얘기라도…….”

견디다 못해 나는 물었다. 하지만 키이스는 민망해하는 기색조차 없이 똑바로 내 얼굴을 응시하며 말했다.

“아니.”

“…….”

“없어.”

한 번 더 강조한 그는 잠시 동안 나를 쳐다보더니 간신히 내게서 시선을 거둬 갔다.

“아, 식사는…….”

곧바로 일어서는 그를 보고 나도 모르게 말했다. 키이스는 됐어, 하고 짧게 말한 뒤 식당을 나갔다. 남겨진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약을 먹어야 할 텐데…….”

마침 찰스가 자리로 왔다. 키이스의 접시를 치우는 그에게 나는 말을 꺼냈다.

“저, 항생제를 처방받았는데…….”

“피트먼 씨 말씀입니까? 알고 있습니다. 제가 챙기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그제야 안심해 인사를 하자 찰스는 평소처럼 무덤덤하게 말했다.

“제 일이니까요. 집에서는 제가, 회사에서는 연우가.”

‘그렇죠?’ 하듯이 바라보는 시선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내심 점심 약을 챙겨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때 찰스가 덧붙였다.

“피트먼 씨가 회사에서 드실 약은 휘태커에게 맡겨 두었습니다. 나중에 놓치지 않고 드셨는지만 확인해 주십시오.”

“아, 감사합니다.”

빈틈없는 그의 모습에 감탄하며 나는 눈을 깜박였다.

“저도 찰스를 본받아야겠어요. 하마터면 잊을 뻔했습니다.”

그러자 찰스는 당연한 듯이 말했다.

“연우도 경력이 10년을 넘어가면 자연스럽게 몸에 배게 될 겁니다.”

위로인 걸까? 나는 묘하게 웃음이 나왔다. 과연 10년 뒤에도 키이스의 옆에 있을지 알 수 없었지만 겉으로는 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찰스가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피트먼 씨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으니 회사에서도 주의를 해야겠습니다.”

나는 집요할 정도로 나를 바라보던 키이스를 떠올렸다.

“테러를 당했으니 당분간은 좀 예민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키이스를 비롯한 극알파들이 그 정도로 섬세한 신경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들도 역시 사람이니 있을 수 있는 얘기였다. 나는 곧 덧붙였다.

“저도 더 신경 쓰겠습니다.”

찰스가 빈 접시를 가져간 뒤 혼자 남아 식사를 마쳤다. 잠시 뒤 현관에서 만난 키이스는 또다시 내 얼굴을 뚫어져라 보더니 먼저 차에 올라탔다.

문득 걱정이 됐다. 혹시 나처럼 트라우마가 생긴 건 아니겠지?

내심 불안해하며 나는 오전 내내 그의 상태를 살폈지만 특별히 평소와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간혹 보고를 하러 사무실로 들어가면 이전과는 달리 유난히 집요하게 나를 쳐다본다는 사실을 빼놓고는.

* * *

똑똑.

노크 소리에 고개를 들자 잠시 뒤 문이 열리고 엠마가 얼굴을 내밀었다.

“연우.”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반갑게 그녀를 맞이했다.

“어서 와요, 엠마. 보고할 일이라도?”

엠마는 책상 앞으로 걸어와 언제나처럼 웃으며 말했다.

“곧 점심시간이잖아요. 혹시 지시할 사항이 있나 해서요. 요즘 일이 많으니까요.”

최근 건강이 좋지 못하다는 핑계로 비서실은 물론 회사의 다른 곳도 가 보지 못했다. 키이스에게서 떨어지는 것이 두려웠다. 혹시나 혼자 돌아다니다가 또다시 발작을 일으키기라도 하면.

숨통이 조여 오며 눈앞이 까맣게 내려앉던 기억이 되살아나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발작이 올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더 큰 공포를 낳았다. 상상만으로도 숨이 꽉 막혀 오는 것 같았다. 나는 떨리는 몸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애쓰며 한껏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열었다.

“당장은 없습니다……. 비서실은 어떻습니까?”

“그쪽도 별일은 없어요. 지시하신 일들도 모두 차질 없이 시행하고 있습니다.”

나는 최근 엠마에게 빚을 진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발작이 생기기 전에는 아침마다 그날의 일을 정리하고 나눠 준 후 사무실에 올라오는 게 매일의 일과였던 데다 사이사이 지시를 한다거나 얘기를 듣기 위해 직접 내려가곤 했는데 요즘은 전혀 그러지 못했다. 아침에 일을 나누어 주는 것도 엠마가 항상 내가 출근한 것을 전화로 확인한 후 올라와 지시를 받은 뒤에야 진행을 할 수 있었다.

그녀에겐 번거롭기도 하고 내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한데 엠마는 한 번도 불만을 말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나를 걱정해 주며 흔쾌히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와 추가로 지시할 일이나 변동 사항은 없는지 묻는 것이다.

이번에도 역시 식사를 하러 가기 전에 혹시 뭔가 할 얘기가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하러 온 모양이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항상 고마워요, 엠마.”

“별 얘기를요, 제가 할 일인데.”

그쯤에서 그녀가 돌아서서 나갈 타이밍이었지만 이번에는 왠지 망설이는 듯했다. 묘한 느낌에 나는 먼저 말문을 열었다.

“할 얘기라도 있습니까? 괜찮으니까 편하게 얘기해 봐요.”

그러고 보니 전에 무슨 일 때문인지 늦게 출근했었지.

사생활에 대해 물을 수는 없었지만 혹시 말하기 어려운 화제라서 망설이는 거라면 내가 먼저 말을 꺼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머릿속으로 그녀가 이렇게 머뭇거릴 만한 화제란 뭘까, 하고 떠올리며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 받아들이겠다고 마음먹었을 때였다. 엠마가 살며시 얼굴을 붉히더니 뭔가를 내밀었다. 의아해하며 받고 나자 그녀가 말했다.

“요즘 식사, 제대로 못 하고 있을 것 같아서요. 음, 사무실을 비우지 않으니까…….”

내가 점심 식사를 하러 나가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엠마가 어떻게 알았을까? 가끔은 찰스가 간단히 점심을 준비해 주었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다. 바쁠 때는 그도 잊어버리곤 하는 것이다. 물론 당연한 것은 아니니까 챙겨 주면 감사히 받지만 내가 먼저 해 달라는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그 때문에 오늘도 당연히 점심을 거를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엠마가 이런 걸 가져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나는 잠시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 당황했다. 엠마는 눈치 빠르게 덧붙였다.

“부담 갖지 않아도 돼요, 그냥 제 걸 만들면서 같이 만든 것뿐이니까. 가볍게 생각해요, 우린 친구니까. 그렇죠?”

그녀는 빙긋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내가 입사하고 난 뒤 얼마 안 되어 들어온 그녀는 내가 팀장이 되어 죽도록 고생하는 것부터 보아 왔다. 남다른 유대감이 있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나는 그녀를 따라 웃어 보였다.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엠마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돌아섰다. 그녀가 멈칫한 것은 그 직후였다. 뒤따라 고개를 돌렸던 나는 문틀에 기대어 서 있는 키이스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당황해 눈을 깜박였다.

언제부터 저기 있었을까?

근무 시간에 딴짓을 하는 걸 상사에게 바로 들켜 버린 것 같았다. 나는 무안해졌지만 정작 키이스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일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피트먼 씨, 지시하실 일이라도…….”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엠마가 준 도시락을 책상 위에 내려놨다. 혹시 팔이 아픈 걸까? 내심 걱정하며 물었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 표정 없이 그대로였다. 키이스의 시선이 흘긋 책상 위를 향하는가 싶더니 이번엔 엠마의 얼굴로 향했다.

뒤늦게 나는 그의 페로몬 향기가 아까보다 진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무실에 있다 보면 시종일관 흐르는 단내에 코가 무뎌져 무감각해지곤 했다. 그 때문에 키이스가 나온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상황은 잘 모르겠지만 일단 엠마를 내보내야겠다. 나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엠마, 고마워요. 그럼 나중에 또.”

“네, 이만 전 내려갈게요. 피트먼 씨, 연우.”

엠마는 눈치 빠르게 번갈아 인사를 한 후 황급히 사무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고 나자 고요가 찾아왔다. 불편한 긴장감을 느끼며 나는 슬쩍 키이스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제가 계속 점심을 못 먹는 것 같다고 엠마가 걱정을 해서…….”

무거운 침묵을 못 이겨 말끝이 사그라들었다. 나는 다시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때까지 조용하던 키이스가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래서, 일부러 너한테 그걸 주러 온 거라고?”

빈정거리는 말투는 흡사 ‘너 따위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기분이 상하기도 하고 오기도 생겨서 나는 똑같이 빈정거렸다.

“피트먼 씨는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저를 좋아하는 여성들도 조금은 있거든요.”

물론 호감의 의미는 다르지만.

내심 덧붙이자 키이스는 생각도 못 한 말을 했다.

“그런 것 같더군.”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멍하니 눈을 깜박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키이스가 한 말을 반복할 리는 없었다. 뒤늦게 나는 그가 빈정거린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저 확인을 했을 뿐이다. 다만 내 속이 꼬여 있었기 때문에 의도를 다르게 파악했다. 그것을 알고 나자 나는 그만 부끄러워졌다. 급히 화제를 돌리려고 하는데, 키이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식사를 계속 못 했어?”

생각지 못한 화제에 나는 당황했다.

“아…… 뭐, 괜찮습니다. 아침 식사를 많이 하기도 하고 점심은 굳이 하지 않아도…….”

“그래서.”

키이스가 내 말을 가로막았다.

“안 먹었어? 계속?”

나는 할 말을 찾느라 잠시 애를 먹었다.

“항상 그런 건 아니고…… 찰스가 이따금 샌드위치를 싸 줄 때도 있으니까요.”

키이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가 탐색하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찰스가 주지 않으면?”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하, 하고 키이스가 막힌 듯한 한숨 소리를 냈다.

“왜 말을 안 했어?”

나는 당혹스러워 시선을 내리깔았다.

“신세를 지고 있는데 그런 것까지 말하기는…… 그건 배려일 뿐이고 당연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한 끼 정도는 굳이 먹지 않아도 괜찮으니까요.”

다시금 변명처럼 덧붙이자 키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흐르는 게 부담스러웠다. 뭔가 말을 해야 했지만 떠오르는 게 없었다. 어서 키이스가 나가 주기만 기다리는데, 불쑥 그가 몸을 움직였다.

나가려는 건가?

오늘 점심 스케줄이 뭐였지, 하고 내심 생각하는데 뜻밖에도 키이스가 내 쪽으로 성큼 다가왔다. 순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내게 그가 팔을 뻗었다.

미처 뭔가를 예상할 틈도 없이 키이스가 책상 위의 샌드위치를 집었다. 그리고 그대로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뭐, 뭐 하시는 겁니까?”

나는 놀라 그만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키이스는 전혀 태도에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귀찮다는 듯이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그는 말했다.

“나와.”

명령처럼 내뱉은 뒤 키이스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눈 깜짝할 새 그는 벌써 문을 열고 서 있었다. 뭐 하냐는 듯이 찌푸린 얼굴에 나는 당황해 입을 열었다.

“어딜 가시는 겁니까? 점심 약속이 있으신데요.”

“나오라고.”

키이스가 짜증을 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라 사무실을 나왔다. 뭔가 시킬 일이라도 있는 걸까? 서둘러 나오는 와중에도 나는 빈틈없이 태블릿을 챙겨 브리프 케이스에 넣었다. 내심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며 따라가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었다. 남이 받은 것을 멋대로 버려 버리다니. 모처럼 엠마가 직접 만들어 준 건데.

기분이 상했지만 키이스에게 항의를 한다든가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는 것은 역시나 할 수 없었다. 나는 엠마에게 죄책감을 느끼며 급하게 그의 뒤를 따라 차에 올라탔다.

*

*

아무런 설명도 없이 차는 예정된 장소로 향했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이 남자는 내게 뭐 하나 제대로 얘기를 해 주는 법이 없었다. 항상 내가 알아서 짐작하고 예상하고 추리해서 어떻게든 앞뒤를 꿰맞춰 이 남자가 뭘 원하는지 알아내야 하는 것이다.

이번에도 역시 이 남자는 내게 뭔가 바라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정신없이 머리를 굴려 도대체 그게 뭘까를 생각했다.

역시 팔이 아픈 걸까?

겉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불편하긴 할 것이다.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전과는 달리 찰스가 시중을 들어 주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실을 뽑으러 가야 하는데, 그날 별일은 없었나? 스케줄을 비워 놔야 할 텐데.

“어서 오십시오.”

입구에서 키이스를 알아본 지배인이 정중하게 인사를 한 후 우리를 자리로 안내했다. 오늘 키이스는 변호사와 함께 점심 식사를 하며 인수가 진행 중인 제작사의 상황이 어떤지 들을 예정이었다.

혹시 기록할 일이 있어서일지도 몰라.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브리프 케이스를 열어 휴대 전화와 태블릿을 꺼냈다. 지시가 내려오자마자 무슨 일이든 처리할 준비를 갖추고 있는데, 갑자기 내 눈앞에 뭔가가 불쑥 들이밀어졌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자 키이스가 메뉴 북을 내밀고 있었다. 잠시 눈을 깜박였던 나는 황급히 그것을 받아 들었다.

나한테 고르라는 건가?

나는 고민하며 메뉴를 살폈다. 변호사의 취향을 떠올려 봤지만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차라리 키이스의 메뉴를 대신 고르라고 했으면 나는 자신 있게 해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고개를 들었다.

“변호사님께 전화를 해서 물어볼까요?”

“뭘?”

메뉴를 보고 있던 키이스가 테이블 건너편에서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봤다. 나는 난처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대답했다.

“변호사님이 뭘 드실지 잘 알 수가 없어서요……. 변호사님의 주문을 대신하라는 것 아닙니까?”

조심스럽게 덧붙였던 나는 멈칫했다. 키이스가 뚫어져라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런 키이스의 표정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내가 그렇게 황당한 말을 했나?

잠자코 아무 말 못 하는 내게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기가 막힌다는 듯이.

“네 메뉴를 고르라는 거잖아.”

“저요?”

“그래.”

키이스는 이번에는 정말로 빈정거렸다.

“설마 널 여기까지 끌고 와서, 굶고 있는 널 앞에 앉혀 놓고, 네가 고른 메뉴를, 자랑하듯이 네 눈앞에서 먹어 치울 정도로 내가 파렴치한이라는 거야? 네가 지금까지 날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잘 알겠군, 고마워.”

그는 흔치 않게 말을 쏟아 냈다. 나는 말문이 막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런 건 아니지만, 하고 급하게 할 말을 찾았다. 겨우 말을 꺼낸 것은 몇 초의 공백이 더 흐른 뒤였다.

“그렇지만, 아무 설명도 없으셔서…… 당연히 일 때문에 데려오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키이스는 이를 갈았다.

“일을 하든 말든 점심은 먹어야 할 거 아냐? 다른 건 다 알아서 하면서 왜 이건 자꾸 헛소리를 지껄이는 건지 정말 모르겠군.”

욕설 섞인 비난에 나는 그만 얼굴이 화끈거렸다. 차마 당신이 내 식사를 챙겨 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하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걸 말했다가는 정말로 화를 낼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고개를 숙이며 기어가는 목소리로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했다.

하지만 이미 키이스의 기분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된 다음이었다. 보란 듯이 메뉴 북을 펄럭이며 넘기는 소리에 나는 흠칫 놀랐다. 조마조마해하며 눈치를 봤지만 그는 뚫어져라 종이 위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급히 책장을 뒤적이다 대충 하나를 골랐다.

“저…… 그럼 전 연어를.”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자 키이스가 여전히 메뉴 북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전채는?”

“아.”

뒤늦게 나는 다시 메뉴 북을 뒤적였다. 흘긋 훔쳐보자 키이스의 표정이 조금은 누그러진 것 같았다. 나는 그나마 마음을 놓고 내가 골랐던 코스가 적힌 페이지를 열었다. 잠시 뒤 웨이터가 와서 메뉴를 물었다. 나는 펼쳐 놓은 페이지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전 이것을…… 수프는 가재로, 메인은 연어로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음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는 탄산수를 주문했다.

“레몬도 함께 주시겠습니까?”

“아, 물론이죠.”

웨이터는 직업적인 미소를 지으며 내게서 메뉴 북을 가져갔다. 키이스의 주문을 받아 적은 그가 사라지자 잠시 뒤 변호사가 급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죄송합니다, 차가 밀려서 그만.”

먼저 키이스에게 사과한 그녀가 내 쪽을 보고 인사를 덧붙였다.

“안녕하세요, 연우. 잘 지냈어요? 오랜만이네요.”

“네, 덕분에. 잘 지내셨습니까?”

선뜻 그녀는 몸을 숙여 내 어깨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형식적인 허그를 나눈 뒤 변호사는 자리에 앉아 메뉴 북을 받아 들었다.

“고마워요. 두 분 뭘 주문하셨나요? 여긴 연어가 좋다던데.”

키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태도는 평소와 전혀 다를 바가 없었지만 나를 불편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나는 변호사의 말을 받아 대답했다.

“저도 연어가 들어간 런치 코스를 주문했습니다. 그게 유명한 줄은 몰랐네요.”

“이번 달 <코스모폴리탄> 추천 메뉴거든요. 저도 이걸로 하죠.”

그녀가 가볍게 손을 들자 곧바로 웨이터가 다가와 주문을 적어 갔다. 추가로 샴페인을 주문한 변호사는 키이스를 향해 물었다.

“가볍게 한 잔 정도는 괜찮겠죠?”

그녀는 애초에 키이스의 대답 따위는 기대도 안 했다는 듯이 이번에는 나를 돌아보았다.

“연어와 샴페인은 최고죠. 어때요? 연우도 같이 마셔요.”

“아, 전 근무 중이라…….”

“나도 근무 중인걸.”

그녀는 웃으며 내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직접 운전하는 게 아니니 한 잔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키이스도 별달리 제지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변호사가 고른 샴페인은 빈티지라 먹어 보고 싶었다. 분명히 아주 맛있겠지.

하지만 그녀는 그녀고 나는 나였다. 근무 중에 술을 마시는 건 안 된다. 나는 욕망을 억누르고 사무적인 태도로 정중히 거절했다.

“죄송합니다. 사양하겠습니다.”

잠시 뒤 웨이터가 오더니 각자에게 글라스를 놓아 주었다. 나는 괜찮다고 거절하려 했을 때였다.

“마셔.”

툭 던진 한 마디에 나는 멈칫했다. 키이스는 테이블 너머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 나한테 한 소린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에 웨이터가 샴페인을 따라 주었다. 변호사는 웃으며 글라스를 들어 보였다.

“한 잔 정도는 괜찮다니까요.”

슬쩍 눈치를 보자 키이스는 별다른 말 없이 샴페인을 마셨다.

술은 상처에 안 좋은데.

걱정이 됐지만 키이스에게 마시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다. 나는 망설이다 글라스를 입으로 가져갔다.

아.

입 안 가득히 퍼지는 상큼한 과일 향이 순식간에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다. 나도 모르게 입가가 허물어졌다.

“어때요, 훌륭하죠?”

변호사의 물음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선택은 아주 탁월했다. 나는 어느새 한 잔을 다 비워 버렸다. 사실 더 마시고 싶었지만 혹시나 술에 취해 대화를 놓치게 될까 봐 간신히 참아 냈다. 거기다 혹시 키이스가 취하거나 하면 내가 정리를 해야 한다.

극알파들은 술에 약을 타 마셔도 여간해서 취하지 않는다는 걸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내 일이 그런 것이니 어쩔 수 없다. 정중히 다음 잔을 사양할 때는 내심으로는 속상해서 그만 우울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식사는 무난하게 진행됐다. 이따금씩 일에 관한 얘기가 나오면 나는 잊지 않게 꼬박꼬박 간단히 휴대 전화에 기록을 남겨 놓았다. 나중에 본격적인 얘기가 진행되면 태블릿에 기록하게 될 내용과 비교해서 보고를 하면 될 것이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살이 좀 빠진 것 같아요, 연우. 아닌가?”

변호사가 내게 친밀하게 말을 걸었다. 나는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오랜만에 봐서 그럴 겁니다. 변호사님은 더 아름다워지셨군요.”

그러자 그녀는 까르르 웃으며 내 팔에 손을 얹었다.

“자주 봐야겠네, 난 연우가 이렇게 예쁘다고 말해 주는 게 좋더라.”

“사실을 말하는 것뿐인데요.”

나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다정하게 나를 바라봤다. 그윽한 시선이 왠지 불편했다. 거기다 내 팔 위에 여전히 얹혀 있는 손도.

불현듯 또 다른 시선을 느꼈다. 눈을 돌리자 곧바로 키이스와 마주쳤다.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우리를 보고 있었다. 짜증이 머리끝까지 올라온 게 여실히 보일 정도였다.

나는 황급히 그녀의 손을 무례하지 않게 떼어 냈다.

“매입 건은 식사가 끝난 후 얘기하실 겁니까?”

바쁜 스케줄을 쪼개 점심시간까지 일하러 나왔는데 정작 변호사와 비서가 희희낙락 놀고만 있으니 의뢰인 겸 고용주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기분이 나쁠 것이다. 재빨리 그녀를 감싸듯 말하자 변호사는 뒤늦게 기억을 해 낸 듯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오, 물론이죠. 미안해요, 피트먼 씨. 연우를 오랜만에 봐서 반가움에 그만.”

키이스는 그녀의 사과에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이후 식사는 죽은 듯한 침묵 속에서 진행됐다. 나는 차라리 일에 대한 얘기를 해 주길 바랐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이어질 뿐.

“잠시 실례해요.”

식사가 거의 끝나 갈 무렵 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간단히 파우치를 들고 화장실로 향하는 그녀를 보고 웨이터가 곧바로 다가와 빈 접시들을 치웠다. 순식간에 테이블은 텅 비어 버렸다.

웨이터는 디저트 메뉴 북을 자리에 각기 놓아 준 후 다시 사라졌다. 변호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태블릿을 꺼내 휴대 전화에 기록해 둔 내용을 정리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일에 대한 얘기를 나눌 것이다. 둘의 대화를 적을 준비를 끝내 놓고 고개를 드는데, 불시에 키이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계속 나를 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내 눈을 피하지도 않았다. 물론 그건 당연한 것이었지만. 나는 눈을 깜박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할 얘기라도 있으신지……?”

여전히 그는 말이 없었다. 침묵하는 그의 모습에 내심 조마조마해하던 나는 뒤늦게 약을 생각해 냈다. 황급히 브리프 케이스를 열어 미리 휘태커에게서 받아 안쪽 주머니에 잘 넣어 둔 약을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점심 약을…… 항생제입니다.”

이건 뭐냐는 듯이 약이 든 비닐을 손가락으로 부스럭거리는 그의 모습에 나는 덧붙였다.

“진통제도 같이 있어요. 드시지 않으면 상처가 덧날지도…….”

말을 하는 도중에 그 일이 눈앞에 되살아났다. 날카롭던 칼날도, 선연하던 핏빛도.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뜨자 키이스가 나를 보고 있었다. 미간을 찌푸린 얼굴에 나는 간신히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생각이 나서.”

키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봉투를 찢어 약을 한 번에 털어 넣고 물을 삼킨 게 전부였다. 나는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할 수 있는 게 고작 이런 거라니.

“……상처는, 어떠십니까? 아프지 않습니까?”

감정이 가득 담긴 음성이 내 귀에 들어왔다. 이게 정말 내 목소리인가? 이렇게 처량하고 이렇게 애달팠던가?

마치 남의 목소리를 듣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그를 바라보자 잠시 말이 없던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아무렇지도 않아.”

그는 정말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속이 상했다. 하지만 그것을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다행입니다.”

표정을 감추려 고개를 숙였다. 키이스가 계속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모른 척 고집스럽게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문득 시야 끝에 자리로 돌아오는 변호사의 모습이 비쳤다. 그와 함께 흘긋 시선을 향했던 키이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베타였던가?”

불쑥 묻는 말에 나는 한 박자 늦게 이해를 했다.

“아, 네. 변호사님이라면 베타가 맞습니다.”

그 순간 흐리멍덩하던 내 머릿속은 맹렬한 속도를 내며 돌아갔다. 키이스가 다음 상대로 그녀를 찍은 걸까? 지금까지 업무 관계로 엮여 있는 상대를 지목한 적은 없었는데. 만약에 관계를 갖다가 헤어지면 이후에 다시 일을 할 때도 어색하고 무엇보다 끝이라는 말을 어떻게 전하면 되지? 그 뒤에도 지속적으로 연락을 해야 하는 건 난데. 그보다 저분이 키이스의 취향이었던가? 아닌 거 같은데.

하지만 이어진 키이스의 물음은 혼란을 더 가중시켰다.

“엠마도 베타였나?”

“……? 네.”

나는 어리둥절했지만 키이스는 의문을 풀 틈도 없이 다시 물었다.

“그 여자도 베타지?”

“그 여자요?”

떠오르는 여자가 너무 많았다. 말문이 막혀 버린 내 반응에 키이스는 짜증을 냈다.

“나와 자는 여자.”

나오미를 말하는 거였구나. 나는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키이스는 말이 없어졌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나는 미친 듯이 떠오르는 생각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엠마는 대체 왜 물어본 거야? 나오미는 왜 또?

설마 주변에 베타인 여자가 몇이나 되나 갑자기 궁금해진 것도 아닐 텐데.

오늘 키이스는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평소에 하지 않는 행동들만 골라서 했다. 문득 찰스의 말이 떠올랐다.

혹시 테러를 당한 후 뭔가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던 걸까? 팔을 다쳤으니 머리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닐 텐데.

“……뭐야?”

내 시선을 눈치챈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서늘한 음성을 듣자 저절로 기가 죽었다. 슬쩍 눈치를 보고 있던 나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무슨 일로 그러시나 해서……. 죄송합니다만 질문의 의도를 잘 모르겠습니다.”

키이스는 아무 말 없이 빤히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괜히 말을 꺼냈나, 나는 불편함에 좀이 쑤셨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베타인 여자들이 오메가를 좋아하는 줄은 몰랐거든.”

그리고 키이스가 피식 웃었다. 명백히 나를 향해 조소했다.

“가끔 다루기 쉬운 남자들을 좋아하는 여자들이 있지.”

얼굴이 굳어지는 걸 스스로도 알 수 있었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자 키이스는 아무 일 없는 듯이 와인을 입으로 가져갔다. 마침 변호사가 자리로 돌아왔다.

“디저트를 먹어야겠네요.”

웨이터가 빼 준 의자에 앉으며 그녀는 산뜻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도 키이스도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뒤 디저트를 주문받으러 웨이터가 왔지만 나는 간단히 커피만 요구했다. 바쁘게 둘의 대화를 기록하는 동안에도 머리 한구석에는 내내 같은 생각을 반복했다.

원래 키이스는 저런 남자다. 새삼 상처받을 필요 없어.

무시하면 돼.

무시하자.

이후로 나는 그에게 일에 관한 얘기 외에는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키이스 또한 철저하게 나를 무시했다.

그날 저녁 그는 나오미와 만나지 않고 나와 함께 저택으로 돌아왔다. 물론 내 얼굴 따위는 쳐다도 보지 않은 채 곧바로 방으로 들어가 버렸지만. 아침과 마찬가지로 키이스는 방에서 식사를 했고 나는 여느 때처럼 혼자 식당으로 내려가 저녁을 먹었다.

* * *

“네, 약속 장소는 거기로 정하겠습니다. 시간은 2시로……. 네, 혹시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바로 연락해 주십시오.”

나는 전화를 끊고 곧바로 기록을 남겼다. 스케줄을 확인해 빈 공간에 체이스 밀러와의 약속을 채워 넣었다. 한 번 더 일정을 점검한 뒤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 건너편에는 키이스가 있었다. 심호흡을 한 뒤 조심스럽게 노크를 했다. 잠시 기다렸다가 문을 열자 서류를 검토하던 키이스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등 뒤로 문을 닫고 성큼성큼 걸어 책상을 사이에 두고 그의 앞에 섰지만 입을 열고 난 뒤에도 한 박자 늦게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지시하셨던 대로 올랜도 씨와 다시 약속을 잡았습니다. 날짜는 금요일이고 장소와 시간은…….”

키이스는 내가 보고를 하는 동안 아무 말 없이 듣기만 했다. 말을 끝낸 후 나는 그가 반응하기를 기다렸다. 키이스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간을 보니 점심을 먹을 때가 됐다.

오늘 키이스는 약속이 있었는데 갑자기 파기했다. 꼭 필요한 만남이었기 때문에 나는 빈 스케줄을 뒤져 다시 약속을 잡느라 진땀을 뺐었다.

무슨 일이 생겼거나 그저 변덕이겠지.

별생각 없이 그렇게 넘겼는데, 나를 지나쳐 사무실의 문을 연 키이스가 갑자기 말했다.

“나와.”

나는 황급히 그의 뒤를 따라 사무실을 떠났다. 하지만 키이스가 한 말의 의미는 다른 것이었다.

“뭐 하는 거야? 나오라고 했잖아.”

키이스의 사무실을 나와 내 책상으로 향하자 키이스가 다시 한번 말했다. 잠시 동안 어리둥절했다. 뭔가 시킬 일이라도 있는 건가?

나는 의아해하며 브리프 케이스를 챙겨 그의 뒤를 쫓아갔다. 점심시간까지 일을 시킨다는 불만 같은 건 없었다. 어차피 빈 시간이니까. 멍하니 앉아 있기만 하는 것보다 어쩌면 더 나을 것이다.

키이스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차에 오를 때까지도 말이 없었다. 나는 차에 타는 그를 보고 한 번 더 망설였다가 키이스가 미간을 찌푸리는 것을 보고 서둘러 뒤따랐다.

문득 약속은 취소했지만 예약한 레스토랑은 그대로 뒀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거기서 다른 약속을 잡았나? 나는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지만 차마 묻지 못하고 무릎 위에 놓인 브리프 케이스를 의미 없이 만지작거렸다.

*

*

벌써 3개월 전에 미리 예약을 해 둔 식당은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안내된 자리로 가면서 나는 누군가 먼저 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테이블은 비어 있었다. 웨이터가 각기 메뉴 북을 놔 주고 사라진 뒤 나는 더 이상 못 참고 입을 열었다.

“저, 다른 분은 늦으십니까?”

메뉴를 보던 키이스가 고개를 들었다. 희미하게 찌푸려진 미간에 나는 서둘러 덧붙였다.

“약속을 취소하셨지 않습니까. 다른 분을 급하게 만날 일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닙니까? 제가 동행할 만한 이유가 있는 분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일 관계라든가.”

어렵게 말을 맺었지만 키이스는 반응이 없었다. 그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었다. 묘한 침묵에 애가 탔을 때, 그가 입을 열었다.

“없어.”

“네?”

나도 모르게 되묻자 키이스는 한층 더 깊게 미간에 주름을 새기더니 내뱉었다.

“더 올 사람 같은 건 없다고. 약속을 새로 잡은 것도 아냐. 알았으면 닥치고 메뉴나 골라.”

터무니없이 거친 말을 들어 버리는 바람에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난데없이 약속을 취소하더니 다짜고짜 끌고 와서는 뭐라고? 닥쳐?

뒤늦게 화가 울컥 올라왔지만 상대는 직장 상사였다. 게다가 키이스의 이런 막말을 하루 이틀 들은 것도 아니었다. 나는 기분을 가라앉히고 메뉴를 살폈다.

“이 코스로 하겠습니다.”

웨이트리스에게 페이지를 보여 주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미소를 지었다. 극히 직업적인 미소에 나 역시 미소를 되돌렸다. 물을 마시려 고개를 돌리는데, 갑자기 키이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어째선지 싸늘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문득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다루기 쉬운 남자. 나한테 그렇게 말했었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나를 비웃고 있을까?

내 주문을 확인한 그녀가 키이스에게도 간단히 시선을 향했지만 쳐다도 보지 않았다. 나는 무안해져 그녀에게 웃으면서 “모두 맞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다시금 내게 미소를 지어 보인 뒤 자리를 떠났다.

테이블 위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애꿎게 물만 마시다 이내 컵을 비워 버렸다. 곧바로 어디선가 직원이 나타나 물을 채워 주었다. 그때까지 말이 없던 키이스가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 리스트를 내 쪽으로 쭉 밀었다. 나는 무심코 메뉴 북을 집어 들고 눈을 깜박였다.

“……저한테 고르라고요?”

키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는 의미였다. 나는 시종 그의 이런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점심시간이라고는 하지만 오후 근무가 남아 있다. 근무 중에 술을 마시는 건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변호사를 만났던 날은 키이스가 묵인했기 때문에 안심하고 마셨지만 그래도 자제하려 애썼다. 그런데 오늘 또 마시라니?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생각을 떠올렸던 나는 곧 키이스에게 와인 리스트를 내밀었다.

“근무 중입니다.”

“어젠 마셨잖아?”

나는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한 잔뿐이었습니다.”

말을 하고 난 후 나는 조금 말투를 누그러뜨려 덧붙였다.

“어제도 마셨으니까 오늘은 자제하겠습니다.”

“됐으니까 마셔.”

키이스는 귀찮다는 듯이 내뱉었다.

“오후 스케줄은 다 비우고. 식사 후에 바로 퇴근할 테니까.”

나는 눈을 깜박였다. 오후 스케줄이 뭐가 있었지? 잠깐 생각했던 나는 이내 사색이 됐다. 그걸 전부 다 취소하라고? 그럼 스케줄을 어떻게 다시 짜라는 거야?

이 남자가 지금 나를 괴롭히려고 작정을 했나?

머릿속에서는 전쟁이 일어났지만 정작 키이스는 태연하기만 했다.

고용주의 변덕에 맞춰 이리저리 전화를 돌리고 사정을 하는 게 내 일이지.

나는 내심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전 잘 모르니까 피트먼 씨가 골라 주시죠.”

머릿속이 복잡해서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었다. 키이스는 가만히 나를 보더니 손을 내밀어 메뉴 북을 가져갔다.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던 그가 입을 열었다.

“캘리포니아 와인 좋아해?”

“레드 와인요?”

조심스럽게 묻자 키이스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는 잠시 생각했다가 입을 열었다.

“네, 좋아합니다.”

“망설인 것 같은데?”

슬쩍 기색을 살펴보니 그다지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

“안 좋아하는 와이너리가 있어서……. 그곳 외에는 괜찮습니다.”

“왜 안 좋아한다는 거지? 맛이 없었나?”

키이스는 신기하게도 계속해서 질문을 했다. 나는 난감해졌다.

“그곳에서 생산한 와인은 훌륭하지만 창업자가 좀……. 그냥 제가 개인적으로 별로 안 좋아하는 타입이라서요.”

“창업자라고?”

당연한 얘기지만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망설이다가 결국 고백했다.

“불륜을 저질러서 이혼했거든요.”

“뭐라고?”

당연한 얘기지만 키이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 탄성을 내질렀다.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거기 와인이 맛있어서, 상도 받았다고 하고 그러니까 궁금했거든요. 어쩌다 창업자에 관한 책을 사서 봤는데 거기에 사생활이 나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람을 피웠다고 너무 당당하게 적혀 있으니까…… 와인까지 싫어져 버렸어요. 그게 답니다.”

키이스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입을 열었다.

“그게 그렇게 나빠?”

나는 저절로 표정이 굳어지고 말았다.

“사람에 따라 생각하는 건 다르겠죠. 전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를 기만하는 것이니까요.”

키이스가 다시 물었다.

“상대도 알고 있다면?”

나는 잠시 당혹스러워졌다.

“서로 합의한 것이라면…… 전 제삼자니까 뭐라고 할 순 없죠.”

대체 왜 이런 걸 묻는 거지? 불필요한 화제 아닌가?

내심 불편해하는데, 다행히 키이스가 대화를 멈췄다. 이것을 대화라고 할 수 있다면 하는 얘기지만.

키이스가 고른 것은 프랑스 와인이었다. 20년이나 된 빈티지 와인은 공기를 타고 흐르는 향기조차 넋을 잃게 만들었다. 이토록 그윽한 향기는 처음이었다. 문득 1800년대에 만들어졌다는 세계에 단 세 병뿐인 와인이 생각났다. 그 와인은 얼마나 향기로울까.

키이스의 페로몬만큼 내 가슴을 뛰게 만들까.

조심스럽게 글라스를 입으로 가져간 나는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입술 끝에 닿는 부드러운 맛이 내 모든 감각을 앗아 가 버렸다. 남은 건 그저 와인의 깔끔한 뒷맛뿐이었다.

“맛있어요.”

저절로 감탄사를 내뱉자 키이스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나는 눈을 깜박였다. 저렇게 부드럽게 웃는 사람이었나? 몇 년이나 그를 보아 왔지만 저렇게 다정한 얼굴은 처음이었다. 키이스는 자신이 저런 표정을 짓는다는 걸 알고 있을까?

하지만 그것은 신기루가 아니었다. 키이스는 식사가 나올 때까지도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자꾸만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저 미소에 어제부터 줄곧 나를 상처 입혔던 그의 말이 어느덧 희미해지고 있다는 사실에 내심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졌다.

*

*

또다시 와인 잔이 채워졌다. 글라스가 비자마자 어디선가 나타난 직원이 와인을 따르고 사라졌다. 처음에는 조심조심 입술만 축이던 나는 한 잔을 다 비울 무렵 다시 차오른 글라스에 마음이 약해졌다. 슬쩍 눈치를 보자 키이스는 보란 듯이 새로운 와인을 입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망설였다. 저 남자와 나는 다르다. 고용주는 취해도 되지만 난 아니었다. 단호히 시선을 떼어 내자 곧바로 키이스와 눈이 마주쳤다.

“뭐 해?”

왜 마시지 않느냐는 뜻이었다. 나는 무례하지 않도록 주의하며 대답했다.

“충분히 마셨습니다.”

키이스는 시끄럽다는 듯이 내뱉었다.

“됐으니까 마시고 싶은 만큼 마셔.”

나는 당혹스러워졌다.

“아직 낮이고…… 일하는 중이라서요.”

“연우.”

갑자기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순간 나는 멈칫했다.

지금까지 몇 년이나 그의 밑에서 일했지만 내 이름을 부르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물론 대부분은 좋은 일이 아니었다.

“네, 피트먼 씨.”

내심 긴장하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데, 키이스가 귀찮아하며 말을 이었다.

“마시라고 했잖아. 일 때문에 신경 쓰이면 조퇴해.”

“아, 아뇨. 그럴 수는…….”

나는 당황해 황급히 거절했다. 어떻게 하지? 이성과 감정이 맹렬하게 싸운다는 게 어떤 건지 실감했다.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한 번 더 거절하면 키이스가 화를 낼 것 같았다. 물론 그의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것은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다. 망설이는 내게 키이스는 등을 떠밀듯 말했다.

“식사가 끝나면 난 곧바로 퇴근할 테니까.”

나는 멈칫했다. 이렇게 갑자기 퇴근이라니, 이런 적이 있었던가? 오후의 스케줄을 모두 취소한 것과 관계가 있는 일이겠지?

키이스가 퇴근한다고 해도 나는 회사로 돌아가야 할 텐데.

그런 내 생각을 꿰뚫어 본 듯 키이스가 덧붙였다.

“너도 마찬가지야.”

나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댁에서 할 일이라도…….”

키이스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내겐 선택의 여지가 없는 듯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휴대 전화로 엠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후의 스케줄은 모두 취소하고 이후의 일은 나중에 정리해서 연락해 주겠다고.

딱 한 잔만 더 마시자.

식사가 끝나 갈 즈음 나는 취해 버렸다. 하지만 그것을 아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취했을 때 전혀 티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 지인들의 증언이었다. 내가 취하면 나오는 버릇은 단 하나였다. 물론 지금은 전혀 그 증상이 나올 때가 아니었다. 그 정도로 마시지는 않았으니까.

*

*

“……그래서 그만 웃어 버렸죠.”

말을 맺은 후 나는 미소를 덧붙였다. 키이스는 그런 내게 그런가, 하고 짧은 한 마디를 한 게 전부였다.

아.

나는 멍하니 생각을 떠올렸다. 정말 취한 모양이다. 키이스가 웃는 것처럼 보이다니. 저 남자가 저렇게 많이 웃는 남자였나?

문득 그날이 떠올랐다. 처음 키이스를 봤던 날.

그날 폴로 경기에서.

아직도 나는 기억이 난다. 청량하게 귓가를 어지럽히던 그 웃음소리. 왜 키이스는 더 이상 웃지 않을까.

“얼마나 됐지……?”

나는 중얼거렸다. 키이스가 나를 쳐다봤다. 하지만 나는 그냥 눈만 깜박거렸다. 남은 와인이 불현듯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글라스를 들어 마저 비워 버렸다.

와인 병은 이제 빈 병이었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다행이었다. 거의 반병을 내가 마신 셈이었다. 와인을 좋아하지만 주량이 그다지 세지 않기 때문에 조심해야 했다. 키이스가 뭔가를 말했다. 하지만 귀가 잘 들리지 않아 나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대답 대신 어색하게 웃어 보이자 키이스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민망해져 시선을 내렸다. 아, 약.

나는 황급히 브리프 케이스를 뒤졌다. 약을 찾아 테이블 위에 놓으려는데, 키이스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약이 든 작은 봉투를 그의 손바닥 위에 살짝 내려놓았다. 최대한 손이 닿지 않도록 주의하며.

키이스가 미간을 찌푸린 것은 그때였다. 아, 손이 닿았나? 기분 나빠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는 재빨리 손을 뺐다. 그러고 나서도 키이스는 한동안 그 상태로 나를 바라보았다.

사과하라는 건가?

내심 고민했을 때, 키이스가 약을 가져가더니 한 번에 털어 넣었다. 곧바로 물을 삼킨 그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만 갈까.”

곧이어 키이스는 벌떡 일어섰다. 나는 서둘러 키이스의 뒤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가 멈칫했다. 갑자기 움직였더니 순식간에 알코올이 몸 전체로 퍼져 나갔다.

잠깐 눈앞이 까맣게 내려앉았다.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정신을 다잡았다. 키이스는 벌써 저만큼 멀어져 있었다. 나는 서둘러 그를 대신해 계산서에 사인을 하고 키이스의 뒤를 쫓아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평소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걷는 것도 흔들리지 않았고, 사인도 똑바로 했고, 키이스의 뒤를 따라 차를 탈 때도 멀쩡했다.

문제는 거기까지밖에 기억이 안 난다는 사실이었다.

* * *

“……응.”

작게 웅얼거리며 머리를 뒤척였다. 뺨을 부비적거리자 서늘하면서도 부드러운 천의 감촉과 함께 단단한 뭔가가 느껴졌다. 문득 불편해져 다시 머리를 흔들었다. 뒤통수에 딱딱한 것이 닿았다. 벽인가? 그런 것치고는 닿는 면적이 좁은 거 같기도 하고. 나는 잠결에 생각했다.

뭔가 따뜻한 것이 슬며시 목에 와 닿았다. 나는 간지러워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자 그것은 잠시 그대로 머무는가 싶더니 천천히 목을 쓰다듬었다. 무심코 입 안에서 가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천천히 목을 어루만지는 느낌은 온몸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내 숨결이 더 깊어졌다. 목을 쓰다듬던 손가락이 벌어져 턱을 감싸고 천천히 어루만지며 입술로 올라왔다. 무심코 입을 열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그것이 들어왔다. 정확하게는 입술 안쪽을 지그시 쓰다듬었다. 나는 혀를 내밀어 그것을 핥았다. 그러자 그것이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입술을 오물거려 그것을 물었다. 달아나지 못하도록.

살며시 입술로 빨아들이고 혀로 핥자 그것은 가만히 머물렀다. 뒤통수에 닿는 단단한 것이 급속히 커지며 자꾸 뜨거워졌다. 나는 비몽사몽간에 안락하지만 동시에 불편한 침대 위에 누워 다가오는 불길을 등 뒤로 느끼는 꿈을 꿨다.

“응…….”

작게 중얼거리며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잠시 동안은 내가 어디에 있는 건지 깨닫지 못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짙은 색의 가죽 시트였다. 멍하니 눈을 깜박이며 나는 생각을 더듬었다. 입 안에는 여전히 뭔가를 물고 있는 채였다.

“……!”

갑자기 기억이 되살아나 눈을 크게 떴다. 숨을 삼키며 벌떡 일어났지만 동시에 차의 지붕에 머리를 쾅, 소리 내어 부딪쳐 버렸다.

“아악!”

저절로 나오는 비명과 함께 머리를 감싸고 웅크렸다. 눈앞에 별이 뜨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끼며 신음을 삼켰다. 간신히 어느 정도 정신이 들고 나자 이번엔 두려움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공포스러울 정도의 현실을 나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유일한 술버릇이 그만 밖으로 나와 버리고 만 것이다. 그래도 조금만 더 버틸 것이지 어째서 차에 타자마자 바로 잠들어 버렸을까. 이런 실수를 하다니. 어쩌자고 이렇게 많이 마셔서.

내가 키이스의 무릎을 베고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조심스럽게 시선을 향하자 키이스는 그새 다리를 꼬고 있었다. 도저히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패닉에 빠져 미친 듯이 머리를 굴렸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잠들어 버려서.”

간신히 말했지만 키이스는 대답이 없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할 말도 잃어버린 걸까?

나는 그 자리에서 딱 죽고 싶어졌다. 키이스와 식사를 한다는 사실에 너무 들떴다. 게다가 키이스가 직접 고른 와인이라니, 마시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이렇게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던가.

아무리 키이스가 허락을 했더라도 마시지 말았어야 했는데. 백 보 양보해서라도 이렇게 취할 정도로는 마시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래도 일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프로라고 자부하던 나였기 때문에 이 일은 충격에 가까웠다. 그나마 키이스가 남은 스케줄을 모두 취소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분명 큰 사고를 저지르고도 남았을 것이다.

다시는 평생 술을 먹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나는 자책에 자책을 거듭하며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키이스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창밖을 볼 뿐이었다. 내가 방금 전까지 입술로 물고 혀로 핥았던 손가락은 그의 단단한 허벅지 위에 대충 놓여 있었다. 바로 내가 베고 잠들었던 그 허벅지였다.

그것을 자각하는 순간 나는 발기할 뻔했다. 나의 파렴치함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만약 키이스가 빈정거리는 말을 하거나 나를 질책하기라도 했다면 주저 없이 차의 문을 열고 뛰어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차의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나는 탈출하는 것마저도 실패한 채 끌려가듯 차 안에 갇혀 저택으로 향했다. 술은 완전히 깨 버린 후였다.

*

*

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나는 의미 없이 브리프 케이스만 만지작거렸다. 용케 물건을 놓고 나오지는 않았구나. 내심 생각하면서도 전혀 안심이 되지 않았다. 제일 큰 사고는 바로 그 직후에 벌어진 것이다.

슬쩍 눈치를 봤지만 키이스는 여전히 다리를 꼬고 앉은 채 나를 외면하고 있었다. 꼴도 보기 싫다는 걸까? 나는 또다시 기분이 가라앉았다.

차가 멈추고 잠금장치가 해제되자마자 나는 즉시 차의 문을 열고 내려섰다. 고개를 돌리자 뒤차에서 내린 휘태커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잠깐 머뭇거린 사이에 불쑥 키이스가 말했다.

“난 좀 생각할 게 있으니까 차 문 닫아.”

“네?”

멈칫한 내게 그는 쳐다도 보지 않고 이를 갈며 내뱉었다.

“차 문 닫으라고. 안 들려?”

나는 황급히 아직 열려 있던 문을 소리 내어 닫아 버렸다. 곧이어 의아해하는 휘태커에게 그대로 말을 전하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뒤로 물러났다.

혹시 나한테 완전히 질린 걸까?

별생각이 다 머릿속을 떠돌았지만 곧바로 비참한 현실이 질러 왔다.

어차피 나한테 질리고 말고 할 것도 없을 텐데. 그저 비서일 뿐이니까.

나는 자학하듯이 덧붙였다.

키이스 나이트 피트먼의 화려한 인생에 작은 불쾌한 기억 하나쯤은 있어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이러나저러나 아무래도 상관없는 존재란 이럴 때 정말 편리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포자기한 마음과 함께.

*

*

키이스가 차에서 내린 것은 그로부터 30분 가까이 흐른 뒤였다. 도대체 차 안에서 30분이나 되는 시간 동안 뭘 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나는 그 시간을 최대한 활용했다. 곧바로 내 방으로 가 엠마에게 오후 스케줄을 취소했는지 확인하고 다시 스케줄을 짰다. 반나절의 일정을 취소하면 그 여파는 한 달까지도 이어지곤 했다. 나는 미친 듯이 머리를 쥐어짜며 약속을 변경한 상대에게 어떻게 양해를 구하면 좋을지를 떠올렸다.

그 와중에도 스케줄 사이사이에 있는 특별한 행사, 예컨대 사교적으로나 일적으로 필요한 상대의 생일을 챙기는 일 따위를 끼워 넣고 선물 리스트까지 확인해야 했다. 나는 다급하게 태블릿을 두드리고 전화를 돌렸다.

그사이에도 틈틈이 창밖을 확인하며 키이스가 언제 차에서 내리는지 살폈지만 그는 도통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30분이 넘어서야 비로소 차 문이 열린 것이다.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내 일도 1차적으로는 끝났다.

나한테 화가 났는지도 몰라.

나는 대충 지레짐작했다. 화를 삭이느라 차 안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진 걸지도. 속을 가라앉힐 시간이 필요했을 거야. 나 같은 건 꼴도 보기 싫었던 모양이지.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뭘 어쩌겠는가.

나는 냉정하게 스스로에게 현실을 일깨웠다. 어차피 키이스가 나를 옆에 두고 있는 이유는 일을 잘하기 때문이다. 정확하게는 그의 입맛에 맞게, 키이스가 말을 하기도 전에 먼저 손을 써 마무리를 해 놓는다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내 사생활 따위는 전혀 관심 대상이 아닐 게 분명했다.

내가 나체로 길거리에서 춤을 추다 잡혀갔다는 기사가 CNN 메인 톱뉴스로 떠들썩하게 올라온다고 해도 키이스는 그저 심드렁하게 ‘그래서 오늘 스케줄은 뭐야?’라고 물을 게 뻔했다.

키이스의 사생활 뒤처리를 하느라 맞고 터지고 온갖 욕을 다 먹었던 걸 생각하면 이 정도는 양반이지. 그저 허벅지를 베고 잠들었을 뿐이니까.

그 감촉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리고 아래가 화끈 달아오른다는 사실은 일부러 모른 척했다.

나는 스스로의 행동을 계속해서 합리화하며 그에게 말을 걸 기회만 기다렸다. 마침내 2층으로 올라온 키이스는 복도에 서 있는 나를 보더니 멈칫했다.

어째서인지 그의 페로몬은 한층 진해져 있었다. 정말 화가 났구나. 나는 내심 반신반의했던 것을 확인하고 나자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기분이었다.

“피트먼 씨.”

나는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짜 입을 열었다.

“스케줄은 모두 다시 정리했습니다. 프린트해서 서재에 둘까요?”

키이스는 짧게 고개를 끄덕인 게 전부였다. 대답조차 하지 않고 내 옆을 스쳐 갔다. 짙은 페로몬 향기가 순간 내 코끝을 스쳤다. 나는 또다시 정신이 멀어지려는 것을 가까스로 부여잡고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피트먼 씨!”

다급하게 부르자 키이스가 멈칫했다. 그가 돌아본 것은 몇 초의 공백 뒤였다.

문득 키이스의 얼굴이 무척 피곤해 보였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끼며 말문을 열었다.

“저,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취하지 않도록 잘 조절하겠습니다…….”

어색하게 사과를 하자 키이스는 잠시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뭔가 반응을 해 줬으면 좋겠는데, 하고 내심 조마조마해졌을 때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취하면 항상 자나?”

뜻밖의 물음에 나는 눈을 깜박였다. 순간 부끄러워졌다.

“아…… 네. 제 술버릇이 자는 거라서……. 잘 안 그러는데, 오늘은 좀 많이 마셨던 것 같습니다…….”

키이스는 아무 말 없이 내 얼굴만 쳐다봤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는 표정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를 지긋지긋해하는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하아.”

문득 한숨을 내쉰 키이스가 돌아섰다. 나는 어리둥절한 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는 키이스의 모습을 그저 보기만 했다.

키이스에게서 전화가 걸려 온 것은 한 시간여가 지난 후였다. 어째서인지 그는 또다시 기분이 나빠져 있었다.

[호텔 예약해. 지금.]

“아, 네. 알겠습…….”

대답을 하다 말고 나는 전화가 이미 끊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멍하니 있을 시간은 없었다. 급히 나오미에게 전화를 하고 이어서 호텔에 연락을 했다. 지금 즉시 방을 준비해 달라고 말한 후 휘태커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지금요? 귀가한 게 아닙니까?]

막 쉬고 있던 참인지 휘태커는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알겠습니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 모든 연락을 마치고 난 뒤 나는 방에서 나왔다. 보고를 해야 했지만 노크를 하는 데는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다.

휴대 전화 너머로 느껴지던 불쾌한 기운을 떠올리며 한 차례 심호흡을 했을 때였다.

“……?”

곧바로 진한 페로몬의 향기가 느껴졌다. 굳게 닫힌 문 너머에서도 이렇게 강한 향기라니. 화가 많이 난 걸까?

왜?

곧바로 내가 저질렀던 실수가 머리를 스쳤지만 이내 그것만이 이유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뒤따랐다. 만약에 그 일로 그렇게 화가 났다면 키이스 성격에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즉석에서 내게 온갖 비꼬는 말은 다 했을 것이다.

일말의 불안을 안고 나는 문을 두드렸다.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문을 열려고 하는데, 갑자기 안에서 키이스의 음성이 들려왔다.

“뭐야?”

거칠게 내지르는 목소리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지? 나한테 화가 나서, 그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의아해져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 연우입니다. 호텔에 예약을 했고 파커 씨도 그쪽으로 오시라고 했습니다. 지금 차를 준비하고 있는데 대략 10분 정도면 출발하실 수 있을 겁니다.”

키이스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망설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저, 피트먼 씨? 괜찮으십니까?”

문을 열어 볼까? 문득 생각했다가 이내 그 충동을 접어 버렸다. 만약 지시할 것이 있다면 키이스가 먼저 말을 할 것이다. 잠시 기다렸지만 그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나는 후퇴하는 쪽을 택했다.

“그럼 전 이만 방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지시하실 사항이 있다면 전화를 주십시오.”

나는 얼마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돌아섰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것은 계속해서 흘러넘치는 키이스의 페로몬 때문이기도 했다. 방으로 돌아가 등 뒤로 문을 닫자마자 나는 주저앉아 버렸다. 심장이 뛰고 몸이 뜨거워져 견딜 수가 없었다.

하아, 하아.

히트사이클이 다가오는 것이 분명했다. 자위라도 하고 싶은데 약 때문에 발기가 되지 않았다. 몸 안에서 떠도는 열 때문에 미칠 것 같았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

*

차의 엔진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비비며 시계를 보자 세 시간여가 지나 있었다. 키이스가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망설이다가 창가로 가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역시나 예상한 대로 키이스가 탄 차가 저택 앞에 다다라 속도를 늦추고 있었다.

나는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어쨌든 저 남자는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사는구나. 내심 부럽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하고 마음이 복잡해졌다.

좋아하는 건 내 자유지만 자유에 대한 대가는 보답을 바랄 수 없다는 것이지.

자신에게 주지시킨 후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문득 키이스가 위를 올려다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는 생각은 착각일 것이다. 그는 이내 고개를 숙이고 계단을 올라와 몸을 감춰 버렸다.

나는 후, 하고 떨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창가에 내 입김이 맺혔다가 이내 사라졌다.

이제 며칠 내로 스튜어드가 올 것이다. 그날 내 결심을 말하자. 그리고 드디어 나도 한 발짝을 내딛게 되겠지.

긴 시간 동안 내 마음을 차지하고 있던 저 남자를 하나씩 지울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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