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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의욕이 생긴 겁니까? 그건 아주 좋네요.”
스튜어드는 나의 말을 듣자 환하게 웃으며 격려해 주었다. 동기는 자세히 말하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나는 그저 ‘어서 증상이 나아져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말한 게 전부였다.
“이렇게 멋진 대저택이라도 역시 마음이 불편하죠? 자기 집이 최고라니까요.”
<즐거운 나의 집>의 한 소절을 짧게 부른 스튜어드가 웃었다. 나는 어색하게 마주 웃어 보였다. 스튜어드는 이런저런 주의 사항을 얘기한 뒤 방법을 제시했다.
“연우가 적극적으로 나와 주니 아주 좋습니다. 사실 본인의 의지가 가장 중요한 거라 먼저 얘기를 꺼내 주길 기다렸거든요……. 그럼 내일부터 당장 조금씩 반경을 넓혀 보죠.”
그러면서 그는 회사 안을 혼자 돌아다니는 것부터 시도해 보도록 조언했다. 먼저 사무실을 나오는 것부터 시작하여, 그다음에는 그 층을 전부 돌아다녀 보고 괜찮으면 다른 층을 시도해 보는 걸로.
스튜어드가 불쑥 손을 뻗었다. 움칠한 나의 손을 맞잡고 그는 가볍게 토닥였다.
“괜찮아요, 정말 많이 좋아졌으니까.”
그제야 나는 스튜어드가 내 긴장을 풀어 주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아닌 게 아니라 무심코 몸에 힘이 들어갔는지 문득 몸 구석구석이 뻣뻣하게 느껴졌다. 조금씩 내가 전신을 이완하는 것을 지켜본 스튜어드가 손을 놓고 미소를 지었다.
“그럼 연우, 다음 상담을 할 때 만나서 결과를 들어 보죠. 너무 무리하진 말고. 알았죠?”
나는 네, 하고 대답했다. 긴장한 목소리가 마치 타인의 그것처럼 기묘하게 내 귀를 울려왔다.
* * *
점심시간이 되자 키이스는 곧바로 사무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나는 잠깐 머뭇거렸다.
갑자기 점심 식사에 끌려간 이후로 매일 그는 나를 데리고 나갔다. 덕분에 점심 식사를 거르지 않게 되긴 했지만 그는 꼭 내가 필요하지 않은 자리까지, 이를테면 내가 술을 마시고 취했던 그날 점심처럼 키이스에게 아무런 약속이 없는 그런 날까지도 날 데리고 나가 식사를 했다.
물론 그날 이후로 나는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고 오로지 탄산수만 마셨다. 키이스도 내게 술을 권하는 일은 없었다.
키이스의 이런 행동은 나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저 작은 배려일 뿐이다. 나는 절대 착각하지 않았다. 내가 머뭇거린 이유는 근래 항상 그가 나를 데리고 나갔기 때문에 오늘도 쫓아가는 게 맞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매일 내가 주저하면 그는 짜증을 내며 뭐 하는 거냐고 묻곤 했다.
하지만 오늘 키이스는 내 쪽을 보지도 않고 그대로 나가려 했다. 오늘 점심은 변호사와 하기로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취소하라고 했으나 아무리 해도 스케줄을 조정할 수가 없었다. 난감해하며 사실 그대로 보고하자 그는 짜증스러운 듯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오늘 약속은 지난번 일의 연장으로, 나를 데리고 가도 상관은 없었지만 키이스가 혼자 가 버린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나는 망설이다 급하게 입을 열었다.
“저, 피트먼 씨.”
키이스가 멈칫했다. 오늘 처음으로 그가 내 얼굴을 쳐다봤다. 이상하게도 오전 중에 그는 한 번도 내 얼굴을 보지 않은 것이다. 나는 침착하게 이후의 스케줄을 읊었다.
“4시에 신작 프로모션에 대해서 보고가 있을 겁니다. 그때까지 다른 일정은 없으니 3시 반까지 오시면 될 것 같습니다. 시간 맞춰 전화를 드릴까요?”
나의 물음에 키이스는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리더니 아니, 하고 짧게 말한 후 돌아서서 나가 버렸다. 나는 이내 혼자 남아 버렸다.
역시나 오늘은 아니구나.
혹시라도 나를 데려갈 생각이었다면 분명히 말을 했을 것이다. 나는 당찮은 서운함을 느끼며 나의 뻔뻔함을 자책했다.
키이스가 나를 챙겨 준다는 게 기뻤던 거지만.
내심 씁쓸한 기분에 나는 깊은숨을 들이켰다 천천히 내쉬었다.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스튜어드가 말한 방법을 시험해 볼 좋은 기회였다.
처음 복도로 나가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나는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놓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런 내 등을 떠민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키이스였다.
<성가셔.>
키이스의 말을 떠올리자 떨리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고도 행동에 옮기는 것은 얼마간 시간이 더 필요했지만 어쨌든 해냈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과 함께 나는 복도에 섰다. 순간 현기증이 일어나 눈을 감고 말았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다시 눈을 뜨는 데까지 또다시 어느 정도 시간이 소요됐다. 나는 두 주먹을 힘껏 쥐고 간신히 발을 하나 떼어 놓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는 결심을 하고 약을 꺼내 먹었다. 입 안이 바짝 말라 버려서 물 없이 삼키는 것은 곤욕이었지만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었다. 급하게 알약을 식도로 넘기고 난 후 약효가 돌기를 기다렸다.
10여 분이 지나고 나서 나는 다시 발을 떼어 놓았다. 현기증은 훨씬 줄어들었고 발을 움직이는 것도 한결 나아졌다. 약의 힘을 빌려 휘청휘청 복도를 걸어갔다. 그리고 드디어 아래층의 비서실까지 오게 되었을 때는 상당히 시간이 흐른 뒤였다.
하지만 해냈다. 나는 혼자서 사무실을 나와 복도를 걸었고, 엘리베이터를 탔고, 마침내 여기까지 온 것이다. 문을 열고 엠마의 얼굴을 봤을 때는 그만 몸의 긴장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어머, 연우!”
나를 보자마자 엠마는 반가운 듯 소리쳤다. 나는 휑한 비서실을 둘러보고 물었다.
“제인과 레이첼은, 아직입니까?”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큰 성취감을 느끼며 물었다. 엠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직 30분이나 남았는걸요. 연우는 식사했나요?”
“아뇨, 아직. 엠마는요?”
“전 샌드위치를 싸 왔어요.”
그녀는 보란 듯이 책상 위에 올려놓은 종이봉투를 들어 보였다.
“아직 안 했으면 같이 먹겠어요?”
나는 당황해 손을 저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사무실에 먹을 게 있어요…….”
엠마는 내 말에 속지 않았다.
“나야말로 괜찮아요. 그렇지 않아도 너무 많이 싸 와서 나눠 줄까 하던 참이었어요. 잠깐 기다리세요, 차를 끓여 올게요. 뭘 마실래요? 탄산수?”
내 기호에 맞게 묻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고맙습니다.”
몸을 돌려 탕비실에 들어갔던 엠마는 잠시 뒤 탄산수와 캔 주스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돌아왔다. 엠마가 나눠 준 샌드위치를 보자 지난번 어이없게 쓰레기통에 들어간 그것이 떠올랐다. 엠마 역시 같은 날의 기억을 떠올린 것 같았다. 물론 마지막에 대한 기억은 나와 달랐겠지만.
“그날 샌드위치는 어땠어요? 괜찮던가요?”
“아, 네. 맛있게 잘 먹었어요. 솜씨가 좋더군요. 혹시 요리를 배우거나 했습니까?”
나는 미안한 마음에 칭찬의 말을 필요 이상으로 덧붙였다. 사실 맛이 어땠는지 내가 알 리 없었다. 하지만 어떤 맛이든 무조건 맛있게 먹겠다고 내심 생각했다. 입에 발린 말이었지만 엠마는 기쁜 듯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물론 아니죠. 엄마가 요리를 잘해서 좀 배웠을 뿐이에요.”
“그렇군요. 배운다고 다 잘하는 건 아닌데 엠마에게 재능이 있는 거겠죠.”
나는 칭찬을 더한 후 샌드위치를 입으로 가져갔다. 햄과 계란이 듬뿍 들어간 샌드위치는 다행스럽게도 아주 맛있었다. 나는 음, 하고 새삼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어요. 이런 걸 그냥 얻어먹어도 되는 겁니까?”
“미안하면 다음에 영화라도 보여 주세요.”
엠마는 웃으며 말을 받았지만 나는 멈칫했다. 영화관이라니, 내가 거기까지 갈 수 있을까?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나를 보고 엠마는 급히 말을 돌렸다.
“농담이에요, 진지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아, 그게 아니라…… 지금 제가 알다시피 몸이 안 좋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런 거고…… 몸이 괜찮아지면 그때 같이 가죠.”
미안해하며 사정을 설명하자 그녀는 다 이해한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네, 괜찮아요. 부담 갖지 말아요.”
조금은 마음을 놓은 내게 이내 엠마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럼 계속 점심을 못 먹고 있었을 텐데, 어떻게 했어요? 얘길 했으면 좋았을 텐데. 어차피 내 걸 만들면서 같이 만드는 거니까 부담 갖지 않아도 돼요.”
“아, 아니. 괜찮습니다.”
나는 서둘러 사양했다.
“최근엔 피트먼 씨 점심 약속에 계속 동행했기 때문에 거르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일이 종종 있을 것 같은데,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녀가 서운해하지 않도록 나는 길게 덧붙였다. 그래도 엠마는 어딘지 아쉬운 기색이었다. 나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요즘은 어떻습니까, 별다른 일은 없나요?”
그날 이후에도 엠마는 몇 번 오후에 출근을 했다. 그녀 역시 같은 것을 떠올린 듯 미안해하며 입을 열었다.
“네, 덕분에. 실은 어머니가 몸이 안 좋으셔서 병원에 가셔야 하는데 혼자 가시기 힘들어하셔서요. 편의를 봐주셔서 감사해요.”
나는 깜짝 놀랐다. 엠마에게 그런 일이 있었는 줄은 전혀 몰랐다. 비서 팀의 다른 직원들은 알고 있었을까?
팀장이라고 하면서 정작 내려와 보지도 못했으니 모르는 게 당연하지.
나는 자책하며 물었다.
“많이 안 좋으십니까? 복지 팀에 지원을 요청해 볼까요?”
“아, 그래도 되나요?”
엠마는 반색을 하며 눈을 깜박였다.
“실은 보험이 다 됐거든요. 한계까지 다 타서 더 이상은 지원이 어렵다고 하더라고요…….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었는데 그것도 더는 안 된다고 하고…….”
엠마의 사정이 이렇게 안 좋은 줄은 몰랐다. 나는 안쓰럽기도 하고 미처 챙기지 못한 데 대한 미안함도 생겨나 그녀의 손을 토닥여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진작 말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오후에 제가 알아보죠. 혹시 더 필요한 건 없습니까? 다니는 병원은 어디죠?”
엠마가 말한 병원은 신장 전문 병원이었다. 이어진 몇 마디 말로 나는 그녀의 모친이 투석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식을 기다리고 있는데 연우도 알다시피 쉽지가 않아요.”
후우, 엠마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보다 어린 그녀가 갑자기 나이 들어 보였다. 혼자 고민을 싸안고 있었을 걸 생각하니 안타까웠다.
“다른 혈육은 없습니까? 동생이라든가.”
의지할 사람이 있으면 좋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묻자 다행히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가 하나 있긴 해요. 보스턴에 살고 있었는데 이번에 이쪽에 일을 따서 건너왔어요. 급한 치료비를 조쉬 덕분에 해결했죠.”
엠마는 잠깐 생각하는 것 같더니 이내 대수롭지 않게 덧붙였다.
“경호원인데 카사노바가 따로 없다니까요. 주변에 여자가 끊이질 않았는데 요즘은 기특하게도 조용하게 살더라고요.”
“저런.”
가족이라서 할 수 있는 가벼운 험담에 나는 짧게 웃었다. 어쨌든 의지할 혈육이 있다니 다행이었다. 엠마가 건네준 샌드위치를 탄산수와 함께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저, 그런데 연우. 요즘 계속 피트먼 씨와 함께 출퇴근을 하는 것 같던데 맞나요?”
엠마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나는 멈칫했다. 그녀는 당혹해하며 말을 이었다.
“기분 나쁘다면 미안해요. 제인이 연우가 피트먼 씨의 차를 타고 같이 퇴근하는 걸 봤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우리들 모두 연우 몸이 많이 안 좋은 건가 걱정하고 있거든요.”
이미 그들은 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제 와서 숨기거나 변명을 하는 것도 이상해서 나는 솔직히 얘기했다.
“엠마가 말한 대로 출퇴근이 좀 힘들어서 상황이 나아질 때까지만 피트먼 씨의 댁에 머물기로 했습니다.”
“어머, 정말로요?”
엠마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그녀의 반응은 새삼스러웠다.
“괜찮겠어요, 연우? 차라리 임시로 간병인을 고용하는 건 어때요? 저의 어머니도 1주일에 두 번 간병인이 와요. 알아봐 줄 수 있는데.”
그녀가 걱정하는 이유는 곧 뒤따라왔다.
“보스와 출퇴근을 함께 하다니 그런 악몽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어요? 퇴근을 해도 퇴근한 것 같지 않을 거예요. 시간 외 근무도 명확하지 않고, 이것저것 잔심부름을 하다 보면 결국 잠들기 직전까지 온갖 일들을 다 해야 할걸요.”
거기다 상대는 키이스였다. 엠마가 상상하는 것이 어떤 건지 나는 충분히 짐작이 가능했다. 고개까지 내젓는 엠마의 반응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이미 나는 그녀가 염려하는 모든 걸 해내고 있었다. 정확히는 출퇴근의 구분이 없었다.
물론 나도 모든 단점을 알고 있었다. 세상 누구도 직장 상사와 같이 출퇴근을 하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어떤 의미에서는 바라는 바이기도 했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마침 엠마가 정곡을 찔렀다.
“여자 문제가 얽히면 전보다 더 골치 아플 텐데요. 피트먼 씨, 집으로도 상대를 부르지 않나요?”
거기에 대해서는 나 역시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나마 최근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는 해도 만약에 키이스가 변덕을 부려 또다시 상대를 집으로 부르기 시작한다면 나는 역시나 정원을 떠돌아다녀야 할 것이다. 이제 곧 겨울이 올 텐데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되겠죠.”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나 자신도 그것에 대해서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무시할 수 있을까?
그러나 온갖 불합리한 처사에도 불구하고 직장을 그만두는 건 불가능했다. 돈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지만 나는 이렇게라도 그 남자를 보고 싶었다.
아무 말 없이 침묵하는 내 모습에 엠마는 미안한 듯이 입을 열었다.
“괜한 참견을 한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걱정이 돼서…… 저, 우린 친구잖아요.”
그녀의 덧붙임에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압니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엠마가 괜한 말을 옮길 사람도 아니고 내 입장에서는 상당히 신뢰할 만한 직장 동료였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엠마 역시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
“피트먼 씨가 좀 더 배려를 해 준다면 좋겠지만 그럴 일은 없겠죠?”
안쓰러운 표정이 그대로 드러난 그녀에게 나는 무심히 대답했다.
“그래도 피트먼 씨 정도면 나쁘지 않은 상사라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직장이란 다 거기서 거기다. 그렇다면 싫은 점보다는 좋은 점을 찾는 게 낫다. 나는 그동안 그만두고 싶어질 때마다 떠올렸던 장점을 나열했다.
“저한테 부당한 요구를 한 적도 없고, 언제나 일에 대한 대가는 확실히 지불하시니까요. 제대로 일을 처리하면 그걸 인정해 주기도 하고.”
“하긴 직장 상사들이란 죄다 하나같이 재수 없으니까요.”
엠마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의 말을 정정했다.
“좋은 분들도 계시지만 드물죠. 그리고 그런 자리는 전임자가 쉽게 그만두질 않으니 공석이 나질 않죠.”
그 말에 엠마가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웃긴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맞아요, 그게 문제예요.”
여전히 웃음이 남은 얼굴로 그녀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연우가 상사라서 다행이에요. 피트먼 씨의 기분을 맞추는 게 정말 힘들었거든요, 그때 잠깐이지만 연우가 그만둔다고 했을 때……. 피트먼 씨가 그렇게 고함을 지르고 화를 내는 건 처음 봤어요. 피트먼 씨 성격이 그 정도로 대단할 줄은. 거기다 이것저것 챙겨야 할 건 많은데 수시로 지시가 내려오고, 더 문제였던 게 피트먼 씨는 제대로 얘기를 안 하더라고요. 한 마디 휙 던지면 다 제가 눈치껏 처리를 해야 하고 말 나오기 전에 미리미리 알아서 해야 할 것도 너무 많아서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일 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또 소리를 지르고.”
다시 생각해도 악몽이라는 듯이 엠마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연우가 얼마나 보고 싶던지.”
동생이 생각나 무심코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려다 멈칫했다. 엠마는 내 동생이 아닌 직장 동료였다. 나는 어깨를 두드리는 대신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쨌든 걱정해 줘서 고맙습니다. 당분간은 그만둘 예정이 없고 혹시 사직서를 쓰게 된다면 그때는 충분히 시간을…….”
말을 하다가 나는 멈칫했다. 물론 사직서를 쓴 후 인수인계를 위해 어느 정도 시간을 두는 것은 당연한 매너였다. 하지만 어째선지 순간적으로 인생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지난번에도 그렇게 그만둘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했지 않은가?
그때였다. 갑자기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나와 엠마는 놀라 동시에 한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하지만 상대가 누군지를 확인하고 나자 우리는 더더욱 놀라고 말았다.
거기엔 키이스가 창백한 얼굴로 굳어져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