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피트먼 씨.”
엠마가 당황한 듯 중얼거렸다. 그게 전부였다. 셋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갑자기 여긴 왜 왔을까?
나는 제일 먼저 그것을 떠올렸다. 키이스는 눈조차 깜박이지 않고 나를 보고 있었다. 할 말 있으면 해 보라는 듯이. 물론 그런 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럴 때는 팀장인 내가 나서는 게 당연했다. 나는 애써 머리를 굴리며 말문을 열었다.
“피트먼 씨, 무슨 일이십니까? 곧 사무실로 돌아가려고 했는데요. 급하게 지시하실 일이라도?”
다행히 내 목소리는 평소와 똑같았다. 아마 표정도 그럴 것이다. 나를 보는 키이스의 얼굴에 전혀 변화가 없다는 걸로 나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흘긋 벽의 시계를 확인하자 아직 점심시간은 15분 가까이 남아 있었다. 벌써 오다니 이상했다. 왕복에 식사까지 하면 점심시간 한 시간으로는 모자랄 텐데.
“……왜 전화 안 받았어?”
“전화요?”
조용한 음성에 나는 서둘러 휴대 전화를 확인했다가 작게 숨을 삼키고 말았다. 부재중 전화가 세 통이나 와 있었다. 전부 키이스의 번호였다. 뭘 잘못 눌렀었는지 무음으로 설정이 되어 있던 전화를 황급히 소리와 진동으로 전환한 후 고개를 들었다.
“죄송합니다. 설정이 잘못되어 있어서 미처 몰랐습니다…….”
사과를 했지만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내심 조마조마해하는데, 키이스는 나한테 따라오라는 듯 가볍게 손가락을 까딱이더니 돌아섰다.
“그럼.”
나는 간단히 인사를 하고 비서실을 나왔다. 닫히는 문 너머로 엠마가 걱정스럽게 나를 보고 있었다.
*
*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키이스는 한 마디도 말이 없었다. 나는 묵묵히 뒤를 따라 걸었다. 키이스가 먼저 말을 꺼내기 전에는 침묵할 생각이었다.
“아.”
나는 무심코 감탄사를 뱉었다. 내가 미처 앞지르기 전에 키이스가 먼저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른 것이다. 곧 가벼운 벨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문이 열렸다. 나는 급히 손을 뻗어 문이 닫히지 않도록 지지를 하며 옆으로 비켜섰다. 키이스가 먼저 탄 후 나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기계가 움직이는 동안 나는 묵묵히 숫자만 바라봤다. 하나씩 변하는 숫자를 의미 없이 되새기는데,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향기가……?
뒤늦게 나는 나도 모르게 키이스를 올려다보았다. 거의 동시에 키이스 또한 나를 내려다보았다. 우리는 잠시 동안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다. 마치 누가 먼저 못 참고 입을 여는지 승부라도 내려는 것처럼. 물론 나는 키이스를 이길 수 없었다.
“저, 페로몬 향기가 평소보다 짙어지신 것 같아서…….”
키이스는 곧바로 되쏘았다.
“문제 있어? 약을 먹고 있다면서.”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내 질문이 잘못됐나?
“아…… 네.”
나는 머쓱해져 시선을 내렸다. 그가 페로몬을 많이 내든 적게 내든 그건 그의 선택이었다. 전에 줄여 달라고 말한 적이 있긴 했지만 내가 발작을 일으키기 전의 일이었다. 요즘은 오히려 키이스에게 페로몬을 맡게 해 달라고 부탁해야 할 처지였다. 키이스 쪽에서 페로몬을 흘려보낸다면 오히려 잘된 일일 텐데.
섹스를 할 때만이 아니라 기분에 따라 향기가 짙어지거나 옅어지는 일은 종종 있었다. 덕분에 원치 않아도 그의 기분을 알게 될 때가 드물지 않았다. 과거의 경험으로 비추어 보면 최소한 지금 키이스가 유쾌한 기분은 아닌 게 분명했다. 무슨 이유인지 이런 상황에서 본인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대신 나는 말을 돌려 물었다.
“지시하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뭐라고?”
마침 짧은 벨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나는 황급히 먼저 내려 문이 닫히지 않도록 버튼을 눌렀다. 키이스가 복도로 나온 후 뒤따라 걸어가며 나는 말을 이었다.
“직접 비서실까지 오셨으니까요. 혹시 지시하실 일이 있으시다면…….”
순간 키이스가 멈칫했다. 아주 짧은 찰나였으나 나는 그의 등이 움칠하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우뚱하는데, 여전히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로 키이스가 걸음을 옮겼다.
“다음 스케줄이 뭔지 확인하려고 했을 뿐이야.”
“어…….”
나는 무심코 얼빠진 소리를 냈다. 뭐였지? 급히 머릿속을 뒤적였던 나는 또다시 의아해졌다.
“4시에 신작 프로모션에 대해 보고가 있을 거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아까 식사하러 나가실 때.”
이번에는 눈에 보일 정도로 키이스가 멈칫했다. 나는 망설이다 덧붙였다.
“3시 반까지 돌아오시면 된다고도 말씀드렸습니다…….”
키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표정이 무척 궁금해졌지만 그것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한동안 반응이 없던 키이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의 뒤를 쫓아가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긴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키이스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결국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스케줄을 변경할까요? 아니면…….”
“됐어.”
짧게 내 말을 막아 버린 키이스는 직접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급히 뒤를 따라 들어가는데, 갑자기 그가 내 책상으로 향했다. 미처 뭔가를 생각할 틈도 없이 그가 내 책상 위에 있는 처음 보는 종이봉투를 집어 들더니 그대로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저게 뭐지?
그냥 쓰레기인가, 당황해하며 눈만 깜박이는데, 불쑥 키이스가 말했다.
“점심 약속은 취소됐어. 다시 스케줄을 잡아.”
“아, 네. 네?”
나는 나도 모르게 되물었다. 그녀가 약속을 취소했나? 감히 키이스를 상대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몇 명 없었다. 물론 변호사는 그럴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거기다 변경할 수 없는 스케줄이라서 키이스도 그렇게 알고 나갔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당황했지만 키이스에게 상황을 물어볼 수도 없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알겠습니다”가 고작이었다.
서둘러 자리로 돌아가는데, 키이스가 연결된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려다 문득 멈춰 섰다. 또다시 긴장해 그의 말을 기다리자 뒤를 돌아본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혼자 갔어?”
“네?”
나도 모르게 되물었다. 키이스가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급하게 머리를 굴렸던 나는 이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스튜어드 씨가 슬슬 활동 반경을 넓혀 보자고 하셔서……. 일단 복도에 나가 보고 괜찮으면 건물 안을 혼자 다녀 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주의 깊게 말을 골라 대답했다.
“혹시 위험할 것 같으면 먹으라고 약을 처방해 주셨는데 그걸 먹고 나니까 괜찮았습니다.”
아무 말 하지 않는 키이스에게 나는 어렵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피트먼 씨 덕분에 많이 좋아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내 덕분이라고?”
오늘따라 유난히 내게 되묻는 말이 많은 키이스였다. 나는 내심 의아해하며 대답했다.
“네……. 저택에 머물게 해 주신 것도 그렇고 제가 익숙해질 때까지 지속적으로 페로몬을 맡게 해 주셨으니까요.”
무심코 나는 농담을 했다.
“피트먼 씨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극알파일 겁니다, 제게는.”
뒤늦게 내 말이 나를 상처 입혔다. 하지만 미간을 찌푸리는 키이스의 반응에 덧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결코 제겐 손대지 않으실 테니.”
키이스는 이번엔 되묻지 않았다. 단지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또다시 향기가 진해졌다.
주변을 떠도는 달큼한 향기에 현기증이 일어났다. 그대로 가서 그의 가슴에 코를 묻고 깊이 향기를 들이켜고 싶은 욕망이 일어나 참기 힘들었다. 나는 주먹을 힘껏 쥐었다 펴기를 몇 차례 반복한 뒤 결국 입을 열었다.
“……향을, 좀 줄여 주시겠습니까? 제가…… 피트먼 씨에게 달려드는 걸 원치 않으신다면.”
키이스는 잠시 반응이 없었다. 마치 뭔가 고민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잠시 뒤 그는 곧 몸을 돌려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혼자 남아 책상에 걸터앉았다. 떠도는 향에 취해 눈을 감고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왠지 마음 한구석이 저려 왔다.
*
*
[모르겠어요, 갑자기 피트먼 씨가 약속을 취소해 버린걸요.]
전화를 받은 변호사는 볼멘소리로 말했다.
[저도 스케줄이 바쁜데 이런 식으로…… 하긴 누가 감히 그 대단하신 분한테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어요? 이쪽에서 무조건 맞춰야지. 그래서 또 언제죠?]
퉁명스러운 태도였지만 이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간신히 비운 날짜를 읊으며 그녀와 스케줄을 맞췄다.
전화를 끊고 난 후 나는 무심코 굳게 닫힌 사무실의 문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취소했다니 무슨 변덕이었을까.
“아.”
나는 뒤늦게 키이스가 버려 버린 종이봉투가 떠올랐다. 혹시나 갑자기 그가 나오지 않을까 조마조마해하며 슬며시 휴지통에 들어 있는 봉투를 꺼내 열어 본 나는 멈칫했다.
그 안에는 참치 샌드위치와 캔 음료가 담겨 있었다.
설마, 말도 안 돼.
나는 믿을 수 없는 사실에 황급히 떠오른 생각을 부정했다.
키이스가 고작 이걸 주려고 되돌아왔다는 건 말도 안 돼.
혼란에 빠졌던 나는 근원적인 질문에 도달했다.
애초에 비서실엔 왜 온 걸까.
점심 약속은 왜 갑자기 취소했지? 따로 어딜 간 것도 아니고.
혹시 나한테 샌드위치를 사다 주려다 시간이 늦어져서 약속을 취소했다는 건 아니겠지.
가장 그럴듯하게 앞뒤가 맞는 얘기였다. 하지만 여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근본적으로 키이스가 내게 샌드위치를 일부러 사다 줬다는 것부터 말이 안 됐지만 억지로 그것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가장 큰 의문이 남아 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럼 그냥 샌드위치를 두고 갔으면 됐을 텐데 비서실까진 왜 굳이, 어떻게 알고 온 걸까.
시간에 늦어 약속을 취소하고 세 번이나 내게 전화를 걸면서까지.
* * *
그날 저녁 나는 스튜어드에게 훈련의 성과를 말했다. 아래층의 비서실을 혼자서 찾아갔던 것과 오후에는 건물의 옥상까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올라갔다가 내려왔다는 얘기를 하자 스튜어드는 눈에 띄게 흥분했다.
“아주 훌륭해요. 정말 잘했어요, 연우. 이 정도면 곧 혼자서도 일상생활이 가능하겠는데요.”
어린아이도 아닌데 고작 걸음마 몇 번 했다고 온갖 소리를 다 듣는 기분이었다. 과도한 칭찬에 나는 쑥스러워져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래도 아직 당장은 어렵겠죠?”
조심스럽게 말하자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조급해하지 말고 마음 편히 먹어요. 첫발을 내딛는 게 어렵지 그다음부터는 금방이니까.”
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도 이건 약 덕분이라서……. 주신 약을 먹었기 때문에 가능한 거였는지도 몰라요.”
조금은 자신감이 사라져서 웅얼거리자 스튜어드가 묘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나는 의아해져 그를 바라보았다. 왜 저러지? 소리 없는 물음에 스튜어드는 음, 하고 말하기 곤란한 듯 사이를 두었다가 입을 열었다.
“그건 가짜예요.”
순간적으로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깜박거렸다. 스튜어드는 멋쩍게 웃었다.
“플라세보라고요. 처음 몇 번 준 약만 진짜였고, 그 뒤로는 쭉 비타민이었죠.”
나는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처음 몇 번만 진짜였다고요? 그럼 상담하는 내내 먹었던 것도 전부 가짜였습니까?”
“그래요.”
너무나 담담한 반응에 나는 혼란에 빠져 버렸다.
“하, 하지만 이번에만 먹은 게 아니라 그 전에도 먹었었는데…… 효과가 분명히 있었거든요. 그래서…….”
당황해 말을 더듬자 네, 하고 스튜어드는 당연한 듯이 대답했다.
“처음에 효과를 알고 나면 약에 대한 믿음이 생기니까. 이런 경우는 자주 있죠.”
나는 말문이 막혀 입만 벌린 채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럼 약 때문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저 내 착각이었다는 거야? 소리 없는 질문에 답이라도 주듯 스튜어드가 말했다.
“뇌란 정말 신기해요. 안 그렇습니까?”
나는 그저 그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으흠, 하고 계면쩍은 헛기침을 한 스튜어드가 말을 이었다.
“그럼 다음 단계로 갈까요?”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
*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에 나와 스튜어드는 함께 문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시간이 꽤 지난 모양이었다. 문을 연 사람은 찰스였다.
“상담 시간이 다 됐습니다. 그만 끝내시겠습니까, 아니면……?”
일부러 뒷말을 흐린 찰스에게 스튜어드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끝났습니다. 앞으로는 연우가 제 진찰실로 올 거예요.”
찰스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그의 표정은 전혀 변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왠지 찰스가 놀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상태가 많이 좋아져서…… 조만간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내 말에 찰스는 여전히 무뚝뚝하게 말했다.
“다행이군요.”
“조금은 웃으면서 말할 타이밍 아닙니까?”
스튜어드가 너스레를 떨었지만 찰스는 여전히 감정이라고는 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차를 준비해 놓겠습니다. 필요하신 건 없으십니까?”
스튜어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찰스는 곧 몸을 돌려 사라졌다. 스튜어드가 다시 나를 보고 입을 열었다.
“그럼 연우, 내가 얘기한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 봐요.”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즉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네.”
간신히 소리를 내어 말하자 스튜어드는 그것만으로도 훌륭하다는 듯이 가볍게 팔을 토닥였다.
“힘내요. 정말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나는 이번에는 겨우 고개만 끄덕일 수 있었다. 스튜어드를 배웅하느라 현관 앞으로 나가는데, 마침 키이스가 호텔에서 돌아왔다.
“아, 피트먼 씨.”
차에서 내리는 그에게 스튜어드가 반갑게 알은체를 했다. 허리를 쭉 편 키이스는 먼저 나를 보더니 뒤이어 스튜어드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기분이 엉망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 증거로 평소보다 진한 페로몬 향기가 야외인데도 불구하고 주변에 넓게 퍼졌다. 스튜어드 또한 그것을 눈치챘는지 그에게 다가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섰다.
이리저리 흩어지는 경호원과 고용인들을 뒤로한 채 키이스가 몸을 돌렸다. 계단을 올라오려던 그는 스튜어드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거리에 멈췄다.
“할 얘기라도 있어?”
짜증스럽게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그에게 스튜어드는 손을 저었다.
“아뇨, 그냥 인사라도 할까 해서. 늦었군요, 피트먼 씨.”
키이스는 미간을 찌푸리고 그를 노려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스튜어드는 당황한 듯하더니 어영부영 인사를 마무리하고 찰스가 준비해 놓은 자신의 차로 서둘러 걸어갔다.
“그럼 연우, 준비되면 연락해요.”
나는 네, 하고 그에게 인사를 했다. 스튜어드의 차가 떠나는 것을 무심코 보고 있는데, 불쑥 그림자가 생겼다. 고개를 들자 어느새 키이스는 내가 있는 계단에 마주 서 있었다.
아.
문득 밤바람에 섞여 스며드는 달큼한 향내가 정신을 어지럽혔다. 나는 헝클어진 머리칼을 어쩌지 못하고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키이스는 그런 나를 잠자코 내려다보았다.
“……네?”
순간적으로 그의 말을 놓친 나는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들었다. 곧바로 키이스와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한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는 여전히 기분이 나빠 보였고, 미간을 찌푸린 채였고, 그의 페로몬 향기는 줄곧 주변을 진하게 떠돌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순간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 지속됐으면 싶었다. 이렇게 마음껏 키이스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기회란 많지 않으니까. 그가 나를 봐 주는 것도.
문득 키이스가 손을 들었다. 뺨에 손가락이 스치고, 달라붙은 머리칼을 그가 부드럽게 귀 뒤로 넘겨주었다.
잠시 키이스의 손가락이 내 귀에 머물렀다. 정확하게는 귓바퀴를 천천히, 엄지와 검지로 쓰다듬었다. 아무 표식도 없는 그곳을 바라보며. 나는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새 여자를 찾아.”
키이스의 손가락이 멀어진 다음에야 비로소 나는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오미 파커 씨는 그럼…….”
나도 모르게 묻자 그는 짧게 웃었다. 빈정거리듯이.
“이젠 멋대로 돌아다닐 수 있잖아?”
나는 당황해 말문이 막혔다. 그럼 내가 혼자 돌아다닐 수 없어서 이별 통보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녀와 관계를 계속했다는 건가?
갑자기 의문이 풀려 버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후련하다거나 기분이 좋아진 것은 아니었다. 곧바로 나오미의 얼굴을 떠올렸을 때, 키이스가 몸을 돌렸다. 달큼한 향기는 그가 가 버린 후에도 한동안 내 주변을 떠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