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9/77)

18

아침부터 하늘은 잔뜩 흐렸다. 내 기분 또한 엉망이었다. 나는 달력에 표시해 둔 날짜를 확인하고 찬장의 약을 점검했다. 찰스는 미리 장담했던 대로 약이 끊기지 않도록 항상 넉넉하게 준비를 해 주었다. 이번에도 역시 약은 충분했다.

혹시 모르니 남은 약을 둘로 나눠 하나는 다시 찬장에 올려놓고 남은 하나는 브리프 케이스에 넣었다. 만약의 경우 바로 약을 먹을 수 있도록.

나는 다른 때보다 일찍 일어나서 더 꼼꼼하게 외모를 정돈했다. 모든 사람이 그런 건 아니지만 히트사이클 시기가 오면 호르몬이 날뛰는 탓인지 상태가 변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내 경우는 기분도 컨디션도 점점 더 최악이 되기 때문에 더욱 신경 쓸 게 많았다.

거기다 뒤늦게 변이한 탓인지 주기도 일정치 않았다. 대략 이때쯤, 하고 생각하면 초조함 때문에 더더욱 예민해지는 것이다. 특히 키이스 나이트 피트먼에게서 ‘거지 같다’라는 말을 들은 이후로는 더욱 그랬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거울을 확인했다. 잘 다듬은 머리칼부터 넥타이의 빈틈없이 채워진 각까지 완벽했다. 안색이 창백해 보였지만 거기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음, 하고 고개를 끄덕인 후 욕실을 나왔다.

*

*

기분이 안 좋은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숨을 고른 뒤 식당으로 들어갔을 때, 나는 담배의 매캐한 연기 속에 뒤섞인 진한 페로몬의 향기에 곧바로 키이스의 기분을 눈치챘다.

최근 그는 계속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테러를 당한 이후로는 더욱 심해졌다.

그런 일을 당하고 나면 누구라도 얼마 동안은 기분이 안 좋겠지.

나는 지레짐작하며 모른 척 시치미를 떼고 그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평소처럼 아침 인사를 했을 때였다. 태블릿으로 기사를 보고 있던 키이스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평소에는 무시하기 일쑤였던 그였는데 뜻밖의 반응이었다. 나는 의자에 앉으려다 멈칫했다. 키이스가 평소보다 더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발정기 올 때가 됐어?”

“네?”

갑작스러운 물음에 나는 순간 놀라 되묻고 말았다. 키이스가 다시금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들었잖아? 발정기 때가 됐냐고.”

나는 동물이 아니다. 가차 없이 내뱉는 말에 무심코 주먹을 쥐었다 편 나는 평소처럼 단조롭게 대답했다.

“히트사이클이라면, 아마 곧 올 겁니다. 대비하고 있습니다.”

키이스가 낮은 소리로 뭔가를 중얼거렸다. 욕설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아들었다. 혹시 시기가 가까워져서 페로몬 향이 진해졌나? 그래서 약을 먹어도 향이 없어지지 않는 걸까? 지금까지 잘 감추고 있었는데. 약을 더 먹어야 하나? 하지만 이미 한계까지 먹고 있는데. 용량을 더 늘려도 되는 걸까?

문득 히트사이클이 오면 그때는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먹고 있는 양도 사이클 때 먹는 양보다 많은데. 더 이상 먹는다면 어떤 부작용이 생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향이 싫으시다면…….”

향수라도 뿌리겠다고 말하려다 멈칫했다. 페로몬 향이 다른 향과 뒤섞이면 더 불쾌할 것이다. 내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키이스가 말했다.

“향기는 나쁘지 않아. 오메가의 향기를 싫어하는 알파는 없을걸?”

그는 뜻밖에도 자조적으로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멈칫한 내게 그는 길게 담배 연기를 뱉어 내더니 신경질적으로 덧붙였다.

“다만 거슬리니까 자제해 줬으면 좋겠군.”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키이스의 회사에 입사해 함께 일한 지 여러 해 지났지만 페로몬 향기가 진해졌다고 비난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왜 갑자기 이런 지적을 받아야 하는 건지 납득하기 어려우면서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주의하겠습니다.”

내 대답에도 그는 썩 만족하는 것 같지 않았다. 또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단정한 미간을 일그러뜨린 채로 연거푸 연기를 들이마시기만 했다. 잠자코 의자에 앉자 잠시 뒤 찰스가 아침 식사를 가져다줬다. 나보다 먼저 왔던 키이스는 5분도 지나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 버렸다. 나는 드넓은 식탁에 혼자 앉아 꾸역꾸역 아침을 먹었다.

“피트먼 씨가 한 말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내 빈 잔에 주스를 채워 주며 찰스가 말을 걸었다. 흔치 않은 상황에 나는 나도 모르게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찰스는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곧 러트가 올 겁니다. 피트먼 씨도 예민한 시기니 어쩔 수 없겠죠.”

그제야 조금 납득이 갔다. 극알파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그런 시기가 오면 컨디션이 나빠지는 모양이었다. 뭔가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극알파들은 보통의 알파나 오메가와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존재 같았는데 공통점이 있다니.

혹시 그래서 향에 더 민감해진 걸까?

나는 곧 당혹스러워졌다. 시기가 지날 때까지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는 수밖에 없다. 난 미치고 싶지 않았다. 절대 약의 양은 더 이상 늘리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며칠 회사를 나가지 않는 게 낫다. 나는 다시금 다짐하며 주스를 입으로 가져갔다.

* * *

“안녕하세요.”

언제나처럼 활기차게 인사를 한 엠마가 물었다.

“어디 안 좋으세요? 안색이 창백한데.”

이런. 나는 내심 혀를 차며 대답했다.

“그냥 피곤할 뿐입니다. 괜찮습니다.”

“어제도 그렇게 보였어요.”

엠마는 안쓰러운 듯 말을 이었다.

“곧 주말이니까 조금만 힘내요, 연우.”

걱정스러워하는 말에 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고마워요. 노력해 보죠.”

대충 대화를 마무리한 후 자리로 가 오늘 할 일을 정리했다. 이후 3개월의 일정이 전부 짜여 있기 때문에 하나라도 빈틈이 생기면 바로 비상이었다. 키이스에게 보고하기 전에 바쁘게 점검을 하는데,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드니 엠마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할 얘기라도?”

무심히 묻자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많이 나았네요, 입술.”

엠마의 말에 나는 문득 입술로 손을 가져갔다. 손끝에 닿는 까칠한 감각이 훨씬 줄어 있었다.

“다행이에요, 오래가는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그 립밤, 효과가 있긴 했네요.”

엠마는 웃으며 말했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그것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나는 하루라도 더 오래 상처를 간직하고 싶었다. 그러나 언제고 상처는 아물고 기억은 흐릿해지게 마련이었다. 나는 아쉬움에 살며시 입술을 쓸었다.

그의 흔적은 매정하게도 사라지고 있었다. 이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일부러 입술을 물어뜯어 그의 흔적을 덮어 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저 사라지는 것을 소중히 애틋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엠마.”

엠마는 밝게 웃어 보이더니 곧 출근한 다른 비서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다시 일에 집중했다. 스케줄에 맞춰 각자에게 할 일을 정해 준 뒤 비서실을 나오는데, 문득 엠마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미소를 지었다. 나 역시 웃어 보인 뒤 비서실을 나왔다.

“……아.”

등 뒤로 문을 닫자마자 나는 탄식처럼 숨을 내뱉으며 눈을 감았다. 닫힌 문에 기대어 선 채 잠시 숨을 고르자 곧 현기증이 가라앉았다. 아무래도 며칠 내로 때가 올 것 같았다. 자리를 비우게 될 경우를 대비해서 미리 준비를 해 둬야겠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몸을 움직였다.

나오미에게 줄 보석을 사서 이별을 통보하러 가야 한다.

*

*

잔뜩 긴장했지만 다행히 별다른 일 없이 나는 숍에 도착했다. 스튜어드는 아직이라고 말했으나 이런 식이라면 조만간 예전의 생활로 돌아갈 것 같았다. 숍의 문을 직접 열면서 나는 자신감과 함께 아쉬움을 느꼈다.

“안녕하세요, 연우. 잘 지냈어요?”

과할 정도로 반갑게 인사를 하며 매니저가 두 팔을 넓게 벌렸다. 나는 그녀를 마주 포옹한 후 뺨을 맞대는 것으로 인사를 끝냈다.

“오늘은 무슨 일로?”

환한 미소는 누가 봐도 의도가 다분했다. 나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판에 박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피트먼 씨의 선물을 고르러 왔습니다. 오늘이 마지막 데이트이신데 적당한 물건이 있을까요?”

데이트라고 하는 것은 명목상의 단어일 뿐이었다. 키이스는 결코 스스로 이별을 선언한 적이 없었고 따라서 그로 인해 돌아오는 모든 불편함과 불쾌함은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어차피 길어야 한두 달, 그나마 최근엔 2주를 넘기기 힘든 상대인데 선물에 공을 들일 이유는 딱히 없었다. 비록 이번엔 예외적으로 길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저 키이스 나이트 피트먼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을 만큼 적당히 세련되고 적당히 값어치 있는 보석이면 되는 것이다. 단, 오해의 여지가 있으니 반지는 제외하고.

팔찌를 선물해도 오해할 사람은 하지.

그런 걸 보면 사람은 확실히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 같다. 내심 생각했을 때, 매니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 물론이죠. 이쪽으로 오세요. 그렇지 않아도 신상품이 나왔거든요. 요즘 아주 인기가 많아요.”

그녀가 안쪽에서 꺼내 준 여러 개의 보석 중 나는 대충 아무거나 한 개를 골랐다. 밖에는 운전사와 경호원 두 명이 문을 지키고 서 있었다. 나는 포장이 끝나자마자 밖으로 나와 그대로 차에 올라탔다.

나오미의 주소를 새로 알려 줄 필요는 없었다. 나는 항상 이럴 때면 가져가는 서류 봉투와 보석 상자를 만지작거리며 나오미에게 할 말을 열심히 떠올렸다.

* * *

외곽에 있는 나오미의 저택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두 번째 남편과 이혼하면서 위자료로 받은 그녀의 대저택은 고즈넉한 숲속에 위치해 화려한 그녀의 외모와는 달리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대문에서 신분 확인을 한 후 저택을 향해 달리는 동안 보이는 것은 그저 잘 다듬은 나무들뿐이었다. 의외로 그녀는 이런 조용한 일상을 더 원하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나는 현관의 벨을 눌렀다.

“어머, 웬일이에요? 여기까지.”

대문을 지키던 경호원에게서 미리 연락을 받은 나오미는 반갑게 나를 맞이하며 내가 들고 있는 물건을 재빨리 확인했다. 눈치 빠른 그녀라면 바로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나는 내심 긴장하며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때리는 건 안 했으면 좋겠는데.

뜻밖에도 나오미의 반응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일단 들어와요. 커피?”

나는 내심 조마조마해하며 대답했다.

“네, 부탁합니다.”

나를 때릴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뒤이어 애너벨이 정자를 훔쳤던 사실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키이스와 헤어지는 게 아쉽다고 하던 나오미의 말 또한 생각났다.

어쩌면 키이스 몰래 사진을 찍어서 딜도를 만들었을지도 몰라.

문득 떠올랐지만 이내 나는 그 생각을 접어 버렸다.

설령 그랬다고 해도 그것까지 뭐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내심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나오미가 안내해 준 응접실로 들어갔을 때였다. 거기엔 미리 온 손님이 먼저 홍차를 마시며 앉아 있었다. 나는 그 존재를 향기로 먼저 눈치챘다.

“어라.”

눈이 마주치자 그는 연극처럼 감탄사를 뱉었다. 순간 나는 굳어졌다. 등줄기에 오싹 한기가 달려가면서 손바닥에 식은땀이 뱄다.

그레이슨은 소파에 앉아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다음에 내가 할 행동을 흥미롭게 지켜보며. 마치 내가 발작을 일으킬지 안 일으킬지 배팅이라도 건 것 같았다.

괜찮아.

나는 급하게 호흡을 가라앉혔다. 난 이제 다 나았어. 약 없이도 괜찮아.

게다가 여기는 나오미의 집이다. 문밖에는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고 그레이슨도 굳이 이렇게 엉뚱한 장소에서 소동을 피워 자신의 이미지를 상하게 할 생각은 없을 것이다.

……과연 그럴까?

그레이슨이라면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보든 전혀 관심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퍼뜩 머리를 스쳤다. 그러자 나는 그 자리에 선 채 움직일 수가 없게 됐다.

하아, 하아.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버렸다. 나는 그만 손에 들고 있던 걸 놓쳐 버렸지만 그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어머, 무슨 일이에요?”

나오미의 놀란 얼굴이 순간적으로 눈앞에 어른거렸으나 거기까지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벌써 허겁지겁 저택을 뛰쳐나오는 중이었다.

저택 밖에는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세단의 옆에 서서 기다리던 운전사는 나를 보더니 즉시 뒷좌석의 문을 열어 주었다.

“가, 감사, 합니다.”

나는 헐떡이며 간신히 말을 했다. 차 안에 앉고 나자 뒤늦게 온몸이 덜덜 떨렸다. 눈을 감고 머리를 기대자 곧이어 운전석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실눈을 뜨고 보니 운전사가 자리에 앉아 차를 출발시키고 있었다. 나는 흔들림이 거의 없는 차 안에서 두 팔로 몸을 감싸고 다시 눈을 감았다.

실내에는 언제나처럼 은은하게 키이스의 페로몬 향이 떠돌았다. 나는 눈을 감은 채 깊이 숨을 들이켰다. 몇 번이나 심호흡을 했다. 떨림이 가라앉을 때까지. 하지만 연거푸 숨을 들이마셔도 몸은 진정이 되질 않았다.

항상 그랬듯이 나를 안정시키는 그의 향기가 오늘은 그러지 못했다. 이유는 아마도 내 사이클이 가까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차창 밖으로 빠르게 스치는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뇌까지 진동하는 듯 어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허겁지겁 키이스의 향기를 들이마셨다. 하지만 숨은 자꾸만 입 안에서 맴돌기만 하고 정작 내 안으로 들어오질 않았다.

“연우, 괜찮습니까? 연우!”

운전사가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보며 소리쳤다. 하지만 나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제어할 수 없이 숨이 마구 빨라지고, 어느 순간 갑자기 멈춰 버렸다.

*

*

……?

달큼한 향기가 아련하게 풍겨 왔다. 나는 다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진한 향기가 내 안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래, 다시 깊게 쉬어.”

머리 위에서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명령에 따라 다시금 심호흡을 했다.

“쿨럭.”

갑자기 기침이 나왔다. 온몸을 경련하며 밭은기침을 해 대는 나를 그는 묵묵히 안고 있었다.

하아, 하아.

눈물이 가득 괸 채로 간신히 눈을 뜨자 낯익은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여전히 차 안에 앉은 채였다. 다른 점은 내가 키이스의 가슴에 안겨 있다는 사실이었다.

“……!”

뒤늦게 현실을 깨닫고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실패했다. 순간 달아나려는 나를 키이스가 곧바로 세게 끌어안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내 머리를 눌러 꼼짝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나는 달아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키이스의 팔 안에 갇힌 채 딱딱하게 얼어 버렸다.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굳어져 있는 사이 키이스가 페로몬을 쏟아 내는 것이 느껴졌다. 달큼한 향기가 밀폐된 차 안 가득히 퍼져 나갔다. 나는 떨리는 숨을 천천히 뱉어 냈다.

조금씩 몸의 힘이 빠져나갔다. 키이스는 내가 긴장을 풀 때까지 그렇게 세게 나를 안고 있었다.

“이제 좀 괜찮아?”

“네에…….”

발작 후에 찾아온 현기증으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몽롱한 의식 사이로 생각했다. 나오미에게 말을 전했어야 했는데. 실패했다는 말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냥 돌아왔다는 걸 알면 키이스는…….

두서없이 생각을 떠올리는데, 키이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거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차분한 음성은 평소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나를 비난하지 않는 듯했다. 나는 말을 하려 입을 열었지만 도무지 마땅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다. 키이스는 그런 나를 잠자코 기다려 줬다. 한참 만에 나는 간신히 말을 꺼냈다.

“파커 씨한테…… 갔었는데, 지시를 하셨으니까요……. 티파니까지는 괜찮았는데, 저택까지도 아무 일 없이 갔었는데, 파커 씨의 저택에…… 응접실로 안내를 받았더니…… 거기에, 밀러, 씨가.”

그레이슨에 대해 얘기를 하기 시작하자 말이 이어지질 않았다. 그때의 공포가 되살아나 또다시 온몸이 굳어졌다. 키이스는 괜찮다는 듯이 내 등을 토닥여 줬다.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말은 못 했겠군.”

그의 품 안에서 나는 움칠 놀랐다. 그걸로 대답은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눈을 감아 버렸다.

“죄송합니다…….”

기어들어 가듯이 사과하자 키이스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직 나으려면 멀었잖아.”

순간 심장이 오그라든다는 말을 나는 실감했다. 한심해하는 걸까? 이대로라면 더 이상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나는 안간힘을 써 생각을 떠올렸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팔은 괜찮으십니까……? 실을, 뽑으러 가야 할 텐데…….”

간신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나 떠올려 물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저 무심하기만 했다.

“찰스가 알아서 할 거야.”

나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렇습니까…….”

내가 미덥지 못한 거겠지.

순간 눈물이 날 것 같아 눈을 감아 버렸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가 놓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여기까지 내려오시게, 만들어서.”

목이 메어 말이 끊어졌다. 키이스는 여전히 나를 안은 채 등을 쓰다듬었다. 문득 그가 내 머리에 코를 묻고 깊이 향기를 맡는 것이 느껴졌다. 한숨을 내쉰 건지도 모른다.

“할 수 없지. 넌 내가 없으면 안 되니까.”

나는 그만 절망해 버렸다. 다시금 죄송합니다, 하고 웅얼거렸지만 키이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대로 움직이지 않는 그의 품 안에서 나는 울고 싶은 걸 이를 악물고 참았다.

스튜어드가 말한 방법을 써 보자.

남은 건 이 방법뿐이었다. 어떻게든 낫지 않으면 안 된다. 키이스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 버려지고 싶지는 않았다. 최소한 마지막까지 나는 유능한 비서로 남고 싶었다.

지금도 이 향기가 이렇게나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데.

나는 눈을 감고 떨리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키이스는 그때까지도 나를 안은 채 그대로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무능하다고 나를 한심해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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