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알람 음이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분명히 소리를 들었지만 눈이 떠지지 않았다. 우웅,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뒤척이는데 갑자기 소리가 사라졌다.
“연우, 더 자겠습니까? 아침 식사를 하지 않는다면 15분 정도 더 시간이 있겠습니다만.”
칼같이 냉정한 음성에 잠에서 깼다. 찰스가 방으로 들어와 알람을 끈 것이다. 정신은 깨어났지만 여전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나는 움칠했다가 곧 한숨을 내쉬었다.
“일어날 겁니다. 식사는…… 됐습니다.”
“알겠습니다. 주스라도 드시겠습니까?”
나는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부탁합니다.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이번에도 찰스는 알겠습니다, 하고 말한 후 방에서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자 방 안은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나는 한 차례 깊은 한숨을 내쉰 뒤 몸을 일으켰다.
“하아…….”
어렵게 일어나 앉자 다시금 한숨이 나왔다. 몇 차례 눈을 비비고 나서야 비로소 눈꺼풀이 위로 올라갔다. 그래 봤자 절반도 뜨지 못했지만.
샤워를 마치고 나자 비로소 눈이 완전히 떠졌다. 거울 한쪽에는 항상 습기가 차지 않도록 고용인이 약품을 뿌려 놓곤 했다. 역시나 부옇게 흐려진 면과 대조적으로 아무리 뜨거운 물을 들이부어도 언제나 깨끗한 표면을 유지하는 거울을 나는 생소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피곤해 보였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데다가 잠들기 전 울기까지 했으니 당연한 얘기였다.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손이 희미하게 떨렸다.
전날의 기억은 도막도막 끊겨 있었다. 어쨌든 그 이후로 일을 할 수가 없었다는 건 확실했다. 나는 사무실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키이스는 한 마디로 잘라 버렸다.
<민폐야.>
그 말은 마지막 남은 내 의지를 완전히 꺾어 버렸다. 어쩔 수 없이 엠마에게 전화하려 했으나 그것마저도 키이스는 휘태커가 대신 말을 전달하도록 명령했다. 결국 집으로 돌아와 그대로 내 방 안에 처박힌 나는 그 후 자기혐오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하룻밤이 지나고 나니 그나마 지금은 정신이 좀 들었다. 나는 세게 고개를 저은 뒤 거울 속의 나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넋을 놓고 앉아서 자책만 하는 건 질색이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바꿔야 한다.
“후우.”
나는 소리 내어 심호흡을 한 뒤 나 자신을 노려보았다.
다신 그런 바보 같은 짓 하지 마.
*
*
시간에 맞춰 현관으로 내려가자 키이스는 먼저 차에 타고 있었다. 나는 휘태커와 찰스에게 번갈아 인사를 한 후 차에 올랐다.
“안녕하십니까.”
항상 하듯이 입에 발린 인사말을 건네자 키이스는 흘긋 나를 훑어보았다. 내려오기 전 몇 번이나 내 모습을 점검했다. 어디에도 빈틈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극히 사무적인 태도로 입을 열었다.
“어제는 죄송했습니다. 조만간 파커 씨를 다시 만나 얘기를 전하겠습니다.”
운전사가 자리에 앉고 차가 출발했다.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할 수 있겠어?”
나를 비웃는 건지 시험하는 건지 뭔지 알 수 없었다. 왜인지 그가 웃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키이스의 얼굴은 평소와 다를 게 전혀 없었다. 나는 그의 생각을 어림짐작하는 것을 그만두고 말했다.
“제 일이니까요. 당장은, 힘들겠지만 가능한 한 빨리…… 노력하겠습니다.”
키이스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왜 자꾸 저렇게 나를 쳐다보지?
그의 시선은 예전과는 달랐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째서 저렇게 빤히 내 얼굴을 쳐다보는 걸까.
불편한 기분을 숨기고 묵묵히 시선을 돌리는데, 키이스가 뭔가를 내밀었다. 반사적으로 받아 든 나는 멈칫했다. 뭔가가 들어 있는 묵직한 종이봉투였다. 안을 열어 보니 뜻밖에도 런치 박스가 들어 있었다. 의아해하며 키이스를 돌아보자 그는 무심히 말했다.
“점심이야.”
“아…… 네.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면서도 어리둥절했다. 일부러 준비해 준 건가? 나를 위해서?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눈만 깜박거렸다. 멍청한 표정을 지어 버렸는지 키이스가 갑자기 피식 웃었다. 나는 더더욱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가 손을 들었다.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긴 손가락이 내 뺨에 슬쩍 닿는 순간 나는 그만 숨을 멈춰 버렸다.
키이스 또한 그대로 멈췄다. 따뜻한 체온이 희미하게 전해졌다. 고작 몇 초의 시간이 흘렀을 뿐이지만 그는 망설였고 나는 기대했다.
이윽고 그가 다시 손을 거두고 시선을 돌렸다.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것 같은 기분을 느꼈을 때 키이스가 말했다.
“오늘 점심은 동행하지 않아도 돼.”
“아…… 네.”
지난번 취소했던 변호사와의 약속을 오늘로 다시 잡았다는 걸 나는 뒤늦게 떠올렸다. 아무리 해도 시간이 나지 않아 먼저 잡았던 약속과 더블로 잡아 버렸다. 한 번에 두 건의 미팅을 해결하려면 바쁘겠지.
이럴 때야말로 내가 필요하지 않은가?
문득 생각했던 나는 곧 씁쓸하게 깨달았다.
쓸모가 없으니까.
“엠마에게 같이 동행하라고 전할까요?”
내 말에 키이스가 고개를 돌렸다. 미간을 찌푸린 표정은 그의 생각을 명백하게 드러냈다. 나는 당혹스러워졌다.
“저, 약속이 두 건이시니까 동행이 필요하실 것 같은데요……. 제가 안 된다면 엠마라도.”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천천히, 느릿하게 그의 입술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필요하다고 얘기했어?”
순간 말문이 막혔다. 당황한 내게 키이스는 불쾌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빈정거렸다.
“네 일이나 신경 쓰지 그래? 쓸데없이 돌아다니지 말고 사무실에 앉아 있어. 일이 생길 때마다 내가 달려갈 수는 없으니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지만 열이 오르는 얼굴을 감출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작은 소리로 네, 하고 간신히 대답했다.
침묵 속에서 차는 회사에 도착했다. 키이스의 뒤를 따라 차에서 내린 나는 한 손에 그가 준 봉투를 들고 급히 걸음을 옮겼다.
키이스의 말이 맞다. 때마다 그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나는 내심 마음을 굳혔다.
오늘 꼭 스튜어드에게 말하자.
* * *
오전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정신없이 흘러가 금세 점심시간이 됐다. 키이스는 별다른 말 없이 나가 버렸다.
혼자 남은 나는 그가 준 봉투를 열어 깨작거리며 식사를 했다.
사무실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나는 일부러 소리 내어 서랍을 열고 닫거나 키보드를 난폭하게 두드려 대기도 했으나 곧 포기했다. 공백이 생기면 바로 자괴감이 밀려왔다. 나는 서둘러 다른 생각을 떠올리려 애썼다.
그렇지. 스튜어드에게 전화를 해야겠다.
식사 시간이었지만 간단히 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괜찮을 것이다. 언젠가 그는 24시간 아무 때나 연락해도 된다고 말했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늦은 시간이나 휴식 시간에 메시지를 보낸 적은 없었으니 한 번은 해도 되겠지.
나는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메시지를 입력했다. 몇 번이나 문장을 수정하며 고심해 보낸 문자에 답은 5분도 걸리지 않아 돌아왔다.
[좋아요. 준비해 두겠습니다. 힘내요, 연우.]
마치 눈앞에서 격려해 주는 것 같았다. 스튜어드의 말투가 생각나 무심코 미소를 지었을 때였다.
벌컥.
갑자기 문이 열려서 나는 화들짝 놀랐다. 들어온 것은 키이스였다. 급히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은 10분이나 남아 있었다. 약속이 겹쳤는데 벌써 오다니, 어떻게 된 거지? 나는 당황해 서둘러 일어섰다.
“일은 잘 끝나셨습니까?”
그 말에 키이스는 대답하지 않고 내 책상 위를 흘긋 보았다. 그 시선의 의미를 눈치챈 나는 곧 말을 이었다.
“지시하신 대로 사무실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식사도 주신 걸로 끝냈고요……. 방문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키이스는 항상 그렇듯이 별다른 말이 없었으나 표정은 어딘지 부드러워졌다. 나는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약속은 어떻게…… 잘 마무리되셨습니까?”
“뭐, 대충은.”
키이스는 언제나처럼 무심히 말하며 몸을 움직였다. 문득 그의 향기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러트가 다가오고 있다고 했었지.
찰스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나는 그의 페로몬 향이 평소보다 유난히 부드럽고 달콤하게 느껴지는 이유를 납득했다.
빨리 상대가 필요하겠구나.
가슴이 욱신거리는 것을 참고 나는 고개를 숙였다. 러트를 혼자 보내는 알파는 세상에 없을 것이다. 거기다 페로몬이 쌓이는 것은 곧 자해 행위나 마찬가지라는 소리까지 나오는 극알파니 더더욱 그렇겠지.
씁쓸하게 생각을 되새기는데, 문득 위화감이 느껴졌다. 무심코 고개를 든 나는 키이스와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어……?
그대로 사무실로 들어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그는 책상을 사이에 두고 내 건너편에 서 있었다. 나는 눈을 깜박이다 입을 열었다. 뭔가 지시할 것이 있는지 물으려는데, 불쑥 키이스가 손을 내밀었다.
……?
갑자기 그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치 어린애를 칭찬하듯이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손길에 나는 당황했다. 이윽고 키이스의 손이 떠나가고, 나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의아해하며 바라보는 내 시야에 부드럽게 풀어진 그의 얼굴이 보였다.
대체 왜 내 머리를 쓰다듬은 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어린애가 아니었고, 칭찬받을 일을 한 게 없었다. 그저 점심시간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게 전부인데 어째선지 키이스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미팅이 잘돼서 그런가?
지레짐작하며 바라보는 사이, 키이스가 몸을 돌렸다. 사무실로 들어가려는 그의 모습을 보고 나는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저, 죄송합니다만 오늘 상담이 있어서…… 퇴근 후 스튜어드 씨의 진료실로 가려고 하는데요…….”
말끝이 흐려진 이유는 키이스의 다음 상대를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직 나오미에게 관계를 정리하겠다는 말을 하지 못했으니 그동안은 그녀를 만나도 되지 않을까, 하고 나는 안일한 생각을 했다. 키이스가 한번 내뱉은 말을 되돌리는 일은 결코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내심 씁쓸해하는데, 키이스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졌다.
“진료실로 가다니? 저택으로 오는 게 아닌가?”
아, 하고 나는 설명을 덧붙였다.
“다른 치료법을 써 보겠다고, 진료실로 오라고 했습니다.”
키이스는 미간을 찌푸린 채 나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있었던 부드러운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어지고 다시 서늘한 침묵이 흘렀다. 내심 당혹해하는 내게 키이스가 물었다. 탐색하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괜찮겠어?”
짧은 한 마디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네.”
간신히 대답하자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거짓말하지 마, 하고 말하듯이. 문득 키이스가 짧게 웃은 것 같았다. 너무나 짧은 순간이라 내가 본 것이 사실인지 믿을 수 없을 정도였지만. 물론 웃었다고 해도 내가 그 의미를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좋을 대로.”
그걸로 끝이었다. 조심스럽게 눈치를 봤지만 나오미와 약속을 잡으라든가 다음 상대를 어서 찾으라든가 하는 요구는 하지 않았다. 곧바로 문을 열고 사무실로 들어가 버리는 키이스의 모습에 나는 안심이 되기도 하고 나 자신이 한심해지기도 해서 더는 말을 하지 못했다.
* * *
퇴근을 할 때까지도 키이스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 보였다. 내일 할 일을 정리해 마무리를 하는 도중에 불쑥 사무실의 문을 열고 나온 그는 아직 일이 남은 나를 흘긋 보더니 놀랍게도 책상에 엉덩이를 걸친 채 반쯤 앉았다. 순간 나는 심장이 멎을 뻔했다.
전에는 시간이 되면 휭 하니 사무실을 나가 버리기 일쑤였던 키이스였지만 내게 문제가 생긴 후부터는 항상 준비가 끝나면 내가 사무실의 문을 두드려 보고를 하곤 했다. 그러면 그때서야 사무실을 나와 퇴근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되기 전에 먼저 나온 것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내 책상에 앉다니. 이 남자가 갑자기 왜 이러지?
“아직 멀었어?”
키이스는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은 얼굴로 무심하게 물었다. 크게 뜬 눈을 깜박였던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거, 거의 다 했습니다. 5분, 아니, 10분만…….”
키이스는 흠, 하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시선이 줄곧 내게 고정되어 있는 것을. 나는 마음이 급해져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다.
“아!”
순간 종이에 손가락을 베여 버렸다.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주먹을 쥐고 말았다. 찌릿거리는 아픔이 금세 퍼져 나갔다.
“뭐 하는 거야?”
키이스가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당황해 괜찮다고 말하려는데, 갑자기 그가 손을 쑥 내밀었다.
“……?”
나는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믿을 수 없게도 키이스가 내 손을 덥석 붙잡은 것이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곧바로 자신에게로 손을 가져간 그는 가는 눈으로 상처를 들여다봤다. 빨갛게 맺힌 피가 둥글게 솟아오르는 것을 키이스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는 뭔가를 고민하는 듯 그저 보고만 있었다. 선홍빛 핏방울이 이내 둥글게 흘러내렸다. 그것은 곧이어 키이스의 손을 타고 내려갔다.
“죄, 죄송…….”
급하게 사과를 하며 벌떡 일어나는데, 키이스가 슈트의 재킷에 꽂힌 손수건을 꺼냈다. 그가 아무 말 없이 내 손가락을 묶어 주는 것을 나는 멀거니 바라보았다.
키이스의 손에 내 피가 길게 선을 그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그 뒤였다. 하지만 미처 뭔가를 말하기 전에 그는 몸을 일으키더니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 버렸다. 아마 연결된 화장실에서 손을 씻으려 하는 것이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급하게 남은 일을 마무리했다. 키이스가 돌아올 때까지 일을 전부 끝내야 한다. 더 이상 그가 기다리지 않도록.
5분도 걸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키이스는 10분이 다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미친 듯이 정리를 끝내고 난 후 한 차례 더 점검을 했지만 역시나 문은 굳게 닫힌 채였다.
내심 불안해하며 기웃거렸을 때. 갑자기 사무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동시에 달큼한 향내가 확 밀려왔다.
나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나자 곧이어 키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희미하게 눈가가 붉어져 있는 것이 이상했다.
아!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혹시 내 향기 때문인가? 키이스가 내 향기를 비난했던 것이 떠올랐다. 상처가 나서 페로몬 향기가 강해졌을까? 나는 또다시 그가 나를 힐난할 거라고 예상하며 각오를 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키이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불안해하는 나를 흘긋 내려다본 것이 전부였다. 나는 바짝 긴장해서 키이스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던 그가 말을 꺼냈다.
“……스튜어드의 병원에 간다고 했지?”
“아, 네.”
즉시 대답하자 키이스는 또다시 침묵했다. 그의 시선이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는 눈길에 나 또한 잠자코 기다리는데, 키이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취소할 수는 없는 건가?”
생각지 못한 질문이라 즉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나는 수많은 생각을 떠올렸다. 키이스가 어떤 말을 하든 그것을 거절한다는 것엔 어마어마한 용기가 필요했다. 당장 ‘네, 취소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스튜어드가 준비를 하고 기다릴 것이다. 미뤄 봤자 쓸모없는 날이 며칠 더 연장될 뿐이다. 유혹은 너무나 거대했으나 초인적인 힘으로 그것을 거부했다. 차마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나는 고개를 숙이고 웅얼거렸다.
“네……. 예약을 취소하는 것은, 좀.”
감히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될까? 키이스 나이트 피트먼에게 내가 거절의 말을 한 게 맞나? 지금이라도 당장 그렇게 하겠다고 말할까?
키이스는 아무 말이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역시나 그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빈정거리는 말을 하지도 무시하고 나가 버리지도 않았다. 그저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
나는 유혹처럼 번져 오는 페로몬 향기를 느끼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마 그 향기에 취한 모양이었다. 키이스가 내게 키스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다니, 미친 게 분명했다.
어째서 그런 착각을 했는지 몰라도 키이스는 한동안 그렇게 나를 내려다보았다. 부드러운 페로몬 향기를 은근하게 흘려보내면서.
키이스가 고개를 돌렸을 때 나는 갑자기 정신이 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는 그대로 걸음을 옮겨 문으로 향했다. 서둘러 브리프 케이스를 들고 뒤를 따랐지만 이후 키이스는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단둘이 차 안에 탄 뒤에도 대화는 없었다. 키이스의 긴 손가락이 천천히 건반을 두드리듯 톡, 톡하고 팔걸이를 때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시기가 다 됐는지도 몰라.
키이스의 페로몬 향이 아침보다 훨씬 강해졌다. 나 역시 이런 식으로 영향을 받으면 조만간 사이클이 와 버릴 것이다. 지금도 이렇게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나에 대한 대책도 필요하고 키이스의 상대도 찾아야 했다. 나는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저, 혹시 바로 상대를 구하지 못하면 이번 러트까지는 파커 씨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키이스가 시선만을 움직여 나를 바라봤다. 나는 어렵게 말을 이었다.
“곧 시기가 온다고 찰스가 얘기를 해서…… 상대를 구하는 건 제 일이니까요.”
나를 믿어 줬으면, 하고 마지막으로 기대를 걸었다. 애타게 바라보는 시선에 키이스는 그러나 심드렁하게 말했다.
“됐어, 이번 러트는.”
“…….”
키이스가 다시 정면을 응시하고, 나는 더 이상 할 말을 잃어버렸다. 서서히 자동차가 속도를 늦추고 있었다. 스튜어드의 병원에 도착한 것이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렵게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리려는데, 불쑥 키이스가 입을 열었다.
“끝나면 불러. 혼자 나오지 말고.”
뜻밖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키이스는 나를 바라보며 평소처럼 무심하게 말했다.
“오다가 또 무슨 일이 생기면 곤란하니까.”
“……네.”
그의 제안은 너무나 친절했지만 그래서 나는 더 괴로워졌다.
“감사합니다.”
어렵게 미소를 지어 보인 뒤 차에서 내리는 내게 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억지로 그를 외면한 채 서둘러 문을 닫아 버렸다. 그리고 키이스는 저택으로 돌아갔다. 휘태커를 비롯한 몇 명의 경호원을 대신 남겨 둔 채.
*
*
“어서 와요, 연우.”
스튜어드는 반갑게 나를 맞이했다. 처음 보는 그의 진료실에 나는 생소하면서도 신기해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서재처럼 책이 가득히 꽂혀 있는 진료실을 상상했으나 뜻밖에도 여긴 책상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작지 않은 실내에 휑하니 책상과 의자뿐이라니. 비록 그 책상이 제법 크다고는 해도 공간을 채우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나는 새삼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그래요?”
스튜어드가 웃으며 물었다. 나는 무안해져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라서요. 음, 책이라든가 뭐가 많을 줄 알았는데.”
내 말에 스튜어드는 미소를 지었다.
“여긴 임시로 쓰는 곳이라 그래요. 진짜 사무실은 따로 있어서.”
“아, 네……. 여기선 상담을 안 하시나 보죠?”
상담실을 여러 개 운영하는 모양이었다. 내심 납득하며 묻자 그는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용도에 따라 다르다고 해 두죠. 아무튼 그 얘긴 됐고, 마음의 준비는 했어요?”
곧바로 그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나는 순간 긴장해 표정이 굳어졌다.
“네.”
목소리가 성대에 걸렸다 튀어나온 것처럼 갈라졌다. 스튜어드는 내 두려움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쓴웃음을 지었다.
“너무 무리하지는 말아요.”
그는 내 어깨를 두어 번 토닥이더니 잠시 물끄러미 쳐다봤다. 지금 못 하겠다고 하면 그는 선뜻 그럼 다음 기회에, 하고 말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럴 때면 항상 그렇듯이 나는 키이스를 떠올렸다. 그러자 모래처럼 흩어졌던 용기가 어렵게 고개를 들었다. 나는 떨리는 손을 꽉 움켜쥐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스튜어드는 물끄러미 내 얼굴을 응시했다. 정말 이대로 진행해도 괜찮을지 걱정스러운 것처럼.
“좋아요. 대신 하다가 중간에 힘들 것 같으면 바로 얘기해요. 다음에 또 기회는 있는 거니까.”
그는 진지한 얼굴로 경고를 덧붙였다.
“괜히 무리했다가 오히려 더 큰 트라우마를 얻게 되는 수도 있어요. 그렇게 되면 정말 치료가 어려워져요. 오늘은 그냥 시험만 해 보는 겁니다, 알겠죠?”
나는 마른침을 삼킨 후 대답했다.
“네.”
* * *
시작하기 전 스튜어드는 내게 먼저 약을 먹였다. 이번에는 플라세보가 아니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의외로 대답은 간단했다.
“처음부터 너무 자극이 센 것도 안 좋아요. 조금씩 익숙해지는 걸로 하죠.”
스튜어드가 주의에 주의를 거듭하는 것이 나에게도 전해져 더욱 긴장이 됐다. 약을 먹은 뒤 몇 차례 심호흡을 시킨 후 스튜어드는 나를 데리고 진료실을 나와 옆 건물로 향했다. 기다리고 있던 휘태커에게는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을 하겠다고도 전했다.
병원의 부지는 상당히 넓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도 꽤 거리가 있어서, 비록 옆 건물이라고는 해도 적지 않은 시간 동안 걸어야 했다.
“평소에 운동이 부족할 때 도움이 되죠.”
스튜어드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나 역시 마주 웃었지만 사실은 그저 형식적인 미소에 불과했다. 스튜어드를 따라 잘 다듬어진 정원을 걷는 동안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또 실패하면 어쩌지?
예고도 없이 마주친 그레이슨 때문에 또 발작을 일으켰던 걸 떠올리자 자신감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자꾸만 떨리는 손을 꽉 쥐는데, 스튜어드가 말을 꺼냈다.
“그 뒤에 별일은 없었습니까?”
“아…….”
망설이는 나를 그는 참을성 있게 기다려 주었다. 말을 하기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나는 심호흡을 한 후 어렵게 지난번 발작에 대해 털어놓았다. 잠자코 듣던 스튜어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오늘 할 훈련을 미리 한 셈이나 마찬가지군요. 준비를 전혀 안 했기 때문에 당황했을 겁니다. 오늘은 내가 옆에 있을 테고 미리 대비를 해 놓았으니까요……. 억제제는 먹고 있죠? 매일.”
“네.”
나는 기회를 틈타 물었다.
“곧 히트사이클이 올 것 같은데 약을 더 먹는 건 안 되겠죠……?”
“물론이죠. 지금도 너무 많이 먹어요.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스튜어드는 즉시 정색을 했다. 향이 많아져서, 라고는 말도 꺼낼 수 없는 분위기였다. 잠자코 입을 다물어 버린 내게 스튜어드가 조금 누그러진 말투로 덧붙였다.
“곧 나아질 테니까 그때는 그쪽 약을 조절해 보죠. 이번 사이클은 최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가능하면 휴가를 받아요.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내게 연락을 해 주고. 사이클 동안 혼자 머물 수 있게 병실을 하나 비워 주죠. 수면제를 처방해 줄 테니까 먹고 하루 정도 지나면 다 끝나 있을 겁니다. 며칠 정도 갑니까? 사이클은.”
“이틀에서 사흘 정도요.”
솔직하게 대답하자 그는 난감해하는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긴 편이군요. 대부분은 하루면 끝나는데.”
별일도 아닌데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것을 본 스튜어드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건 따로 대책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어떤 실험을 할지는 전에 충분히 설명했죠?”
“네.”
마른침을 삼킨 후 대답하자 스튜어드는 아이디카드를 통과시키며 물었다.
“아침에도 약을 정량보다 많이 먹었습니까?”
자동문이 희미한 소리를 내며 옆으로 물러났다. 나는 이번에도 네, 하고 대답했다. 스튜어드는 먼저 건물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이 이상 약을 먹는 건 위험하니까 오늘은 이제 먹지 말아요. 대신 집에 돌아가면 곧바로 샤워를 하고 자야 됩니다. 입욕은 페로몬을 오히려 흡수시키니까 안 되고 꼭 샤워만 하되 오래 씻을수록 좋습니다. 오늘 입었던 옷도 전부 세탁하고. 버리면 더 좋겠지만…….”
스튜어드는 뒤따라가는 내게 경고했다.
“페로몬이 넘치면 사이클 주기가 당겨질 수도 있으니까 꼭 잊지 말고 그렇게 해야 합니다. 자칫하다간 오늘 밤에 갑자기 올 수도 있어요. 아무 때나 괜찮으니까 만약에 그럴 경우엔 바로 연락해요.”
나는 어느 때보다 긴장해 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건물 안은 무서울 정도로 고요했다.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른 스튜어드가 말했다.
“지금쯤은 모두 퇴근하고 당직만 남아 있을 겁니다. 이 실험에 대해서는 비밀이니까 마침 잘됐죠.”
함께 엘리베이터를 탄 나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저, 외부인이 오면 기록에 남지 않습니까? CCTV라든가…….”
“그런 건 적당히 둘러대면 되고.”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피식 웃었다.
“어차피 실험실의 카메라는 작동하지 않을 겁니다.”
때마침 문이 열리고 지하의 긴 복도가 눈앞에 펼쳐졌다. 먼저 내린 스튜어드를 따라 나 역시 걸음을 옮겼다. 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넓은 간격으로 띄엄띄엄 하나씩 있는 문에는 오직 숫자만이 담백하게 적혀 있을 뿐이었다. 숨 막히는 적막감 속에 차갑게 울려 퍼지는 발소리가 마음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마침내 어느 문 앞에 선 스튜어드가 다시 아이디카드를 통과시켰다. 뒤이어 지문까지 찍은 다음에야 비로소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이제 정말로 물러날 길은 없는 것 같았다. 잔뜩 긴장한 나를 지나쳐 스튜어드가 한쪽 벽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갑자기 캄캄하던 벽이 환하게 밝아지더니 또 다른 실내가 드러났다.
“괜찮아요, 저쪽에선 이쪽을 볼 수가 없으니까.”
스튜어드는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대로 굳어져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자, 심호흡해요. 천천히……. 약을 먹었으니까 괜찮아요. 발작은 오지 않을 겁니다.”
단호한 말에 어느 정도 의지가 됐다. 조금씩 숨을 가라앉히고 나자 건너편의 정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가만히 시선을 멈춘 내게 스튜어드가 말했다.
“저쪽이 내가 말한 실험체입니다. 우리 병원에서 연구 중인.”
딱딱한 1인용 침대 위에 걸터앉아 있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흐리멍덩한 시선이 나를 향했다. 순간 나는 긴장했다.
“태어날 때부터 극알파였다고 하던데, 그래서인지 페로몬이 특별히 강합니다. 극알파의 특징이 잘 드러나서 연구에 도움이 많이 돼요.”
어둡게 빛나는 보라색 눈을 바라보며 스튜어드가 말했다.
“들어 봤을 겁니다. 저 남자가 100명을 넘게 죽였다는 연쇄 살인마죠.”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스튜어드는 격려하듯 내 어깨를 힘주어 잡더니 곧 놓아 버렸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더 이상 마음의 준비를 할 여유도 없이 그는 연결된 문을 열었다. 나는 스튜어드가 남자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유리 너머로 지켜보았다. 무슨 말을 한 건지, 아니면 행동을 한 건지 알 수가 없었지만 남자의 변화는 확실했다. 흐릿했던 시선이 뚜렷해졌지만 이내 그는 완전히 넋이 나가 버렸다. 사방에서 기계음이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가 싶더니 이내 고요해졌다. 그리고 달큼한 향이 벽의 틈새로 흘러나와 이내 실내를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