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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잘했어요, 연우.”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고 만 내게 스튜어드가 격려의 말을 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현기증을 가라앉히느라 말을 하지 못했다.
남자의 페로몬을 전신에 뒤집어쓴 채 5분이 넘게 버텼다. 스튜어드가 준 약을 먹고 시작한 덕분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해냈다. 나는 기절하지도 발작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정신이 멍해진 것은 오직 내가 오메가이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히트사이클이 가까워진.
스튜어드는 나를 의자에 앉히고 물을 먹였다.
“물을 많이 마셔요. 페로몬을 빼내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스튜어드는 한 잔을 더 먹인 후 내 상태를 확인했다. 눈에 빛을 비추기도 하고 맥을 짚어 보기도 하더니 이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안심해도 되겠군요. 조금씩 노출 시간을 늘려서 도전해 보죠. 일단 히트사이클이 가까워졌다니까 그 기간이 지나고 나면 해 봅시다. 돌아가서 할 일은 기억하고 있죠?”
나는 고작 고개만 끄덕였다. 갑자기 피곤이 밀려와 입을 여는 것조차 버거웠다. 아까부터 계속 열이 올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당장 히트사이클이 올 것 같은 위기감마저 들었다. 아니, 조만간 그렇게 될 것이다. 지금 내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스튜어드는 대기하고 있던 휘태커에게 나 대신 전화를 해 곧 나갈 테니 준비해 달라고 전했다. 뒤이어 그가 전화한 곳은 관리실이었다.
“302호 기계가 모두 다운됐어요. 네? 아, 별거 아닙니다. 그냥 페로몬 실험을 했을 뿐이에요.”
스튜어드는 의미심장하게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뭐 30분가량의 기록은 사라졌을 테지만 어쩔 수 없죠. 대단한 것도 아니니까 괜찮습니다. 네, 그럼 확인 좀 부탁합니다.”
전화를 끊고 그는 씨익 웃었다.
“완전 범죄죠?”
나는 그저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스튜어드는 내가 진정될 동안 기다리려는 것처럼 의자를 끌어와 옆에 앉았다.
“고생 많이 했어요, 이제 곧 상담도 끝나겠네요.”
가볍게 어깨를 토닥인 그가 말을 이었다.
“극알파들한테 시달려서 이런 식으로 상담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종종 있어요. 연우만 이런 게 아닙니다. 그 망할 페로몬은 여러모로 민폐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스튜어드는 애초에 답을 듣고자 말을 한 것 같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사람이라면 이성이 있어야 하는데, 페로몬에 휩쓸려 그게 날아가다니 짐승 같지 않습니까? 거기다 극알파들은 자신의 페로몬과 다른 극알파의 페로몬을 구분한다고 하더군요. 개가 가로수에 오줌을 싸서 마킹을 하는 것도 아니고 대체 뭔지.”
거기까지 말한 스튜어드가 히죽 웃었다. 문득 언젠가 휘태커가 했던 말과 그의 말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그가 덧붙였다. 여전히 혼잣말을 하듯이.
“극알파들 따위 전부 다 없어지면 좋겠는데.”
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하아아.
깊은 심호흡에 휘태커가 흘긋 뒤를 돌아보았다.
“연우, 괜찮습니까?”
나는 흐릿한 의식을 다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조금…… 피곤해서.”
그는 걱정스러워하는 기색으로 말했다.
“곧 도착할 겁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조금 전보다 빠르게 시야를 스쳐 갔다. 나는 차창에 이마를 기댄 채 또다시 심호흡을 했다. 이제 곧 저택에 닿을 것이다. 우선 씻고, 씻고, 씻고…….
아.
흐리멍덩한 머릿속으로 어렵게 다른 생각이 끼어들었다.
키이스에게 연락을 안 했구나.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머릿속은 또다시 열에 들떠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현기증과 함께 더운 숨결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지그시 아랫도리를 눌렀다. 다행히 아직 발기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곳을 꺼내 훑고 싶은 욕망만은 강렬했다. 나는 떨리는 손을 그곳에 머물게 한 채 이를 악물었다.
*
*
“연우, 괜찮습니까?”
차에서 내리는 나를 보자마자 찰스는 물었다. 이렇게 당황해하는 그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나는 휘청거리며 간신히 그와 마주 섰다.
“네, 조금…… 피곤해서.”
찰스가 킁킁, 하고 소리 내어 냄새를 맡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페로몬 냄새가 심한데…… 피트먼 씨의 페로몬은 아닐 테고, 어떻게 된 건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는 내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닌지 걱정하는 것 같았다. 너무나 피곤했지만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저, 스튜어드 씨가 새로운 치료법을 제안했을 뿐입니다……. 그만 올라가도, 되겠습니까? 제가…… 너무, 힘들어서.”
곧이어 나도 모르게 유혹하듯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찰스가 멈칫했다.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분명히 애타게 그를 보고 있을 것이다. 이미 얼굴은 화끈거리며 달아올라 있었다.
아까부터 피어오르는 열을 빨리 잠재우지 않으면 울면서 매달리게 될지도 모른다. 이성을 잃게 되기 전에 어서 혼자가 되고 싶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안다는 듯 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올라가 쉬십시오. 피트먼 씨에게는 제가 보고를 하겠습니다.”
“고맙, 습니다.”
간신히 인사를 마무리한 후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스튜어드가 경고를 하지 않았으면 당장 가방을 뒤져 약을 입에 털어 넣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마지막 인내심을 발휘해 그것만은 참아 냈다. 이제 거의 다 끝났다는 생각과 함께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이 많은 사람들 중 누군가가 도와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스튜어드에게 대신 연락이라도 해 주겠지.
하아, 하아.
계단을 오르는 것도 너무나 힘겨워 나는 몇 번이나 걸음을 멈춰야 했다.
엘리베이터를 탈걸.
뒤늦게 후회가 들었지만 되돌아가기엔 늦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계속해 걸음을 옮겼다. 숨을 쉴 때마다 내 주변에 머물러 있는 페로몬이 몸속으로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어서 이걸 씻어 내야 해…….
거의 다 올라온 것 같았다. 얼마나 남았지,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을 때 계단 위에 서 있는 키이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만 멈춰 서 버렸다.